[선택/상플] 94년 어느 날, 어쩌면 번외편
그 어느 처음의 기억 下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52575522 음악링크
들국화 – 오후만 있던 일요일 (들국화 1집, 85.9)
오후만 있던 일요일 눈을 뜨고 하늘을 보니
짙은 회색 구름이 나를 부르고 있네
생각 없이 걷던 길옆에 아이들이 놀고 있었고
나를 바라보던 하얀 강아지 이유 없이 달아났네
나는 노란 풍선처럼 달아나고 싶었고
나는 작은 새처럼 날아가고 싶었네
작은 빗방울들이 아이들의 흥을 깨고
모이 쪼던 비둘기들 날아가 버렸네
달아났던 강아지 끙끙대며 집을 찾고
스며들던 어둠이 내 앞에 다가왔네
나는 어둠속으로 들어가 한없이 걸었고
나는 빗속으로 들어가 마냥 걷고 있었네
오후만 있던 일요일 포근한 밤이 왔네
오후만 있던 일요일 예쁜 비가 왔네
1
토요일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과 함께 하교하는 길이었다. 늘 운동장에 모여서 함께 집에 오고는 하는데 그날따라 덕선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제일 먼저 덕선을 언급한 사람은 역시나 택이었다.
"덕선이는?"
"덕선이? 아까 누구 만난다고 우리 먼저 가라던데?"
선우의 말에 택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누구?"
"그야 모르지. 자기반 친구랑 떡볶이라도 먹으러 가겠지, 뭐.
우리끼리 가자."
선우와 아이들이 재촉해댔지만, 택의 발걸음은 이상하게 잘 떨어지지 않았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정문으로 나가는 동안, 택은 자꾸 주변을 둘러보았다. 왜 그런지 자신도 알 수 없었으나, 뭔가 불안한 마음에 그냥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무슨 촉에서였는지 운동장 오른쪽에 있는 수돗가를 바라보던 순간, 택은 그 자리에서 멈춰 서고 말았다. 그곳에는 덕선이와 한 남자애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야?"
덕선이 묻자, 정재훈은 뭔가 주저주저하는 듯했다.
"나한테 할 말 있어서 보자고 한 거 아니야?"
"어. 그렇긴 한데....."
"그럼, 말해."
덕선의 거리낌 없는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정재훈은 덕선의 눈도 쳐다보지 못하고, 애꿎은 바닥만 발끝으로 쳐댄다.
"저기...."
덕선이 답답해서 속이 터지려던 찰나, 드디어 정재훈의 입이 열렸다.
"너, 혹시, 최택이랑 사겨?"
이게 뭔 소린지. 덕선은 정말이지 이 소리도 이젠 지겹다 싶었다.
"아니, 안 사귀는데? 우리 그냥 불알...아니 소꿉친구야.
이젠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지겹다, 진짜...."
덕선이 한숨을 쉬며 대답을 하자, 아까까지 망설이던 정재훈이 뭔가 안심이라도 되는 듯 고개를 들었다. 낯빛이 밝아진 건, 덕선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정재훈은 아까와는 달리 덕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럼, 너 남친 있어?"
"엥? 뭔 남친? 그냥 친구야 많지."
"그 얘기가 아니라, 사귀는 남자 있냐고."
"없어. 그런 거."
사귀는 남자가 있냐니. 덕선에게는 뭔가 낯간지러운 소리였다. 그러나 그 다음 나온 1반 반장의 말에 덕선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해.”
수줍어하는 듯 정재훈의 목소리는 작았다. 그래서 덕선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뭐? 뭐라고? 못 들었어.”
“나, 너 좋아한다고!!!”
문제는 그 말을 덕선만 들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택이를 따라 덩달아 운동장에 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4인방 모두 그 말을 듣고 말았다. 게다가 못 들었다는 말에 정재훈이 힘껏 소리를 치는 바람에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야, 야, 봤지? 내 말 맞지?
야 써누, 정팔이, 당장 돈부터 내놓으시지.”
동룡이 신이 나서 낄낄 대며 돈을 내놓으라고 난리인데, 선우와 정환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여전히 덕선과 정재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난리가 난 틈 사이로 택은 어느 순간 그들 곁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어느 새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정문을 통과해서 학교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저 자식, 언제 나간 거야.
택아!! 같이 가자. 야!! 최택!!“
선우는 마치 동룡의 말은 안 들린다는 듯이, 택을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환도 눈치를 보여 선우를 따랐다. 애가 탄 동룡은 돈 내놓으라고, 이 도둑놈들아, 라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그 뒤를 쫓아갔다. 토요일의 오후의 풍경은 이토록 뭔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언제나와 같은 깨복쟁이들의 놀이 같았지만, 단 한 사람만은 달랐다. 그저 웃기고 재미있고 뭉쳐 다니는 그들만의 세계가 어느 새 산산이 무너지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어, 택아, 너 어디 가?”
택이 서 있는 곳은 집으로 가는 정류장이 아니었다.
“기원.”
“야, 밥도 안 먹고 기원으로 바로 가냐?”
“생각이 없어.”
“택아, 너 계속 소화 안 되는 거냐? 어제부터 계속 그러네.”
선우가 그런 택이 걱정되어 무어라 자꾸 말을 걸어보지만, 택은 그저 괜찮다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조차 억지로 지어진 듯, 택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 보였다.
기원에 가서도, 택의 컨디션은 영 좋지 않았다. 이 부장님은 몸이 안 좋은 거냐며 연신 집으로 가라는 성황에 결국 택은 집으로 향하고 말았다. 앉아 있다고 해서 바둑판이 눈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택이가 바둑을 시작한 이래, 이런 날은 처음이었던 것도 같다.
택의 얼굴이 그렇게 안 좋았던 건지 이 부장님은 택이를 바래다주며, 내일까지 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발걸음은 무거워도 마음은 가벼웠던 시간들이었는데, 발걸음보다 마음이 더 무거웠다.
결국 택의 발은 파란 대문 앞에 멈춰 섰다. 대문 고리를 잡고 들어갈까 말까를 수십 번도 더 고민을 하며 망설였지만, 끝내 파란 대문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지는 못했다.
뭐라고 말할 건데.....
도대체 뭘 물어볼 건데.....
왜 궁금한 건데....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택이 스스로도 내놓을 수가 없어서, 파란 대문을 넘어설 수가 없었다. 만약 덕선이 묻는다면, 자신은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이 복잡한 마음을, 자신도 알 수 없는 이 무거운 심장의 무게를 십오 년의 삶으로는 설명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택은 그렇게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2
일요일.
택은 마치 기절한 듯이 오후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무성은 걱정이 되어 연신 택의 방문을 조심조심 열어보지만, 택은 눈을 감은 채 잠에 빠져 있었다. 점심을 차려놓고도 무성은 아들을 깨울 수가 없었다. 열다섯 살짜리가 지고 가기에는 짐이 너무나 무거운 까닭이었다.
오후가 한참 지나서야 택은 눈을 떴다. 밖은 온통 먹구름이 끼어 어둑했다. 오후라고는 하지만, 어두워서 저녁이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더 택이 일어나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말하지 않아도 온 몸으로 걱정하고 있는 아버지 때문에 택은 모래알 같은 밥을 억지로 씹어 삼켰다. 그러나 그마저도 몇 술 뜨지 못한 채, 수저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왜, 더 안 먹고?”
“속이...좀 안 좋아서요.”
“....소화제, 줄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를 닮아 말이 없는 아들은 오늘따라 더욱 말이 짧았다. 어쩌면 그의 아들은 이제 사춘기가 온 것인지도 몰랐다. 또래 남자 아이들보다 택은 훨씬 더 일찍 어른의 세계라는 것을 접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것이 아이를 자꾸만 어른스럽게 만들고 있는 듯해서 무성은 마음이 아플 뿐이었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죄인 것만 같아서, 미안하고 또 미안할 뿐이었다.
허하고 답답한 마음에 택은 집 밖으로 나왔다. 아버지에게는 소화라도 시킬 겸, 걷고 오겠다고 했지만, 집 대문을 열고 나와도 막상 갈 곳이 없었다. 일요일도 대국이 있을 때는 기원에 가고는 했었다. 어쩌면 택의 일상은 대국을 준비하거나, 대국을 치르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역시 기원에 가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 택은 갈 곳이 없었다. 이 부장님이 기원에 오지 말고 집에서 쉬라며 단단히 다짐시킨 덕분에 택은 진짜로 갈 곳을 잃어버렸다.
흐린 하늘....곧 비가 오려는 듯 하늘이 낮게 가라앉았다. 그 무게만큼 택의 마음도 가라앉고만 있었다.
걷는다고는 했지만 걸을 곳도, 관심이 가는 곳도 없었다. 동네를 느릿느릿 거닐다가 결국 택이 자리를 잡은 곳은 봉황당 골목 끝 계단이었다. 그의 세계는 그토록 좁았다. 바둑판 속에서 세계를 꿈꾸고 있었지만, 그의 물리적 세계는 이토록 좁고, 작았다.
무거운 하늘은 결국 비를 내렸다. 툭툭 떨어지는 빗속에서도 택은 일어날 줄 몰랐다. 지척에 집이 있어도 집에 들어가지도, 아니 집에서 우산을 들고 오지도 않았다. 그저 그곳에 앉아 비가 내리는 일요일 오후를 그렇게 무료하게 보냈다. 조금씩 세차지는 빗방울 소리에 그나마 골목에서 놀던 아이들도 모두 집으로 뛰어 들어가 버리고, 짖어대던 강아지 소리도 어느 새 잠잠해졌다.
세상이 어둠 속에 물들어가듯이 무거운 빗속으로 잠겨들었다.
“어, 택아!”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 어둠을 깨고 스며들었다.
“뭐야, 너 왜 비 맞고 있어?”
언제 왔는지 덕선이 노란 우산을 쓰고 택의 바로 앞에서 우산을 받쳐 주며 이상하다는 듯 그를 내려다본다.
촉촉이 젖은 택의 눈썹 끝, 빗방울이 맺혀 있다. 오늘따라 조금은 다른 듯 보이는 택에게 뭐라고 지청구를 더 하려다 덕선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에휴 하며 택의 곁에 나란히 앉았다.
“덕선아, 너, 옷 버려.”
“됐네요. 이미 다 맞았어.
그리고 너도 다 젖었네, 뭐.”
우산을 씌워주며 같이 앉는 덕선을 말리지도 못하고, 택은 그저 덕선의 손에서 우산을 받아들었다. 그러자 덕선은 주머니에서 작은 카세트 하나를 꺼내서는 이리저리 다이얼을 돌리며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기 시작했다.
“샀어?"
“내가 돈이 어딨냐? 친구 거, 빌렸지.
내 친구 김지 알지? 걔 건데 내가 오늘만 좀 쓰기로 했어.“
“어? 누구?”
“나랑 매일 붙어 다니는 내 친구, 김지영....몰라?
너 오며 가며 자주 봤어.“
“아....”
뭔가 알 것 같다는 듯 택이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지만, 딱 봐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렇지, 택이 니가 그럼 그렇지. 눈을 뜨고 있어도 볼 수가 없지. 쯧쯧.
덕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어느 새 주파수를 맞추었는지 이어폰 한 쪽을 빼서 택에게 내밀었다.
“어?”
잠시 망설이는 택을 대신해서 덕선은 택의 왼쪽 귀에 이어폰을 끼워주었다. 택은 모르는 곡이 흘러나왔다. 사실 택이 아는 노래도 없었다.
노란 우산 위로 빗방울 소리가 투두둑 떨어지고, 귓가로 음악이 흘러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어폰을 끼고 있으니까, 덕선은 듣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자신도 모르게 용기가 났는지도 모르겠다.
“덕...선...아......”
느릿하게 그러나 깊게 불러오는 자신의 이름에, 덕선이 대답을 건네 왔다.
“어.”
“너........”
“응.”
택이 말을 잇지 못하고 뜸을 들인다. 그러나 덕선은 보채지 않고, 조용히 기다린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택은 겨우 입을 열었다.
“너....정재훈...이랑 사겨?”
“....................”
이번엔 덕선이가 대답이 없었다. 음악 때문에, 빗소리 때문에 제대로 못 들은 건가 싶어 재차 물어보려던 순간, 덕선이 한 박자 늦게 대답을 건넸다.
“아니.”
“진짜? 안 사겨?”
택은 그 대답에 놀란 듯 곁에 앉은 덕선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덕선은 여전히 앞을 보고 있었다.
“당연하지. 정재훈, 걔 내 타입 아니야.”
그 말에 택의 가슴을 짓누르던 무언가의 무게가 어느 새 내려놓아지는 듯했다.
“왜? 설마 어제 봤냐?”
택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칫, 그럼 다 봤겠네, 너네들...하며 덕선은 혀를 찼다. 그러다 마치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넌, 걔가 별로야? 안 좋아해?”
“아, 진짜. 최택! 오글거려. 뭘 좋아해? 니들 그걸로 나 놀리면, 다 죽여 버린다.
아니지, 도롱뇽이랑 정팔이만 잡으면 되지. 됐다. 내가 너한테 뭔 말을 하겠냐.“
덕선은 애들이 놀리는 것만 걱정되는 듯, 정말 별 생각이 없어보였다. 분명 방금 전까지 어둡던 하늘이었는데, 이토록 무겁게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택에게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스산하던 빗물이 따뜻하게 느껴졌고, 먹구름 낀 어두운 날씨가 포근한 것만 같았다.
<다음 곡은 얼마 전 1집을 발표한 밴드의 곡입니다. 들국화의 “오후만 있던 일요일”이라는 곡을 들려드리겠습니다. 비오는 날, 아주 딱 맞는 곡입니다.>
라디오 디제이의 소개와 함께 무언가 몽롱하면서도 나직한 노래 하나가 흘러나왔다.
“와, 나 이 노래 저번에도 라디오에서 들었는데.
택아, 이 노래 완전 좋아.
뭔가 낭창~하고 느릿한데, 은근 땡긴다? 너도 들어봐. 너도 좋아할 거야.“
들국화 – 오후만 있던 일요일 (들국화 1집, 85.9)
오후만 있던 일요일 눈을 뜨고 하늘을 보니
짙은 회색 구름이 나를 부르고 있네
생각 없이 걷던 길옆에 아이들이 놀고 있었고
나를 바라보던 하얀 강아지 이유 없이 달아났네
나는 노란 풍선처럼 달아나고 싶었고
나는 작은 새처럼 날아가고 싶었네
작은 빗방울들이 아이들의 흥을 깨고
모이 쪼던 비둘기들 날아가 버렸네
달아났던 강아지 끙끙대며 집을 찾고
스며들던 어둠이 내 앞에 다가왔네
나는 어둠속으로 들어가 한없이 걸었고
나는 빗속으로 들어가 마냥 걷고 있었네
오후만 있던 일요일 포근한 밤이 왔네
오후만 있던 일요일 예쁜 비가 왔네
같이 음악을 들었다. 나른하고 고요한 노래 사이로 덕선의 머리가 택의 어깨로 툭 기대어 왔다. 덕선은 어느 새 나른한 노래를 들으며 새근새근 잠들어버렸다.
일요일, 포근한 밤, 예쁜 비가 왔다. 택의 어깨에 잠든 소녀와 함께 노란 우산 속에서 아주 오래된 사랑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그의 심장을 두드려대며, 가슴 저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와서는 아주 오랜 그 자리를 차지하고는 들어앉아 버렸다.
그저 바라보는 것이 좋았고, 보이지 않으면 보고 싶었고, 소녀의 곁에 있고 싶고 곁에 있으면 행복하다는, 간질거리기도 하고 자꾸만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던 그 감정이,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소녀의 곁에 있는 것이 마치 체한 것처럼 심장을 짓눌러 오며 답답하게 만들던 그 감정이, 아주 오래된 감정이라는 것을, 그것이 아주 오랜 사랑이었음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러나 오랜 사랑이, 사랑임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랑은 슬프고, 애틋하며, 가슴 저리지만, 그러나 찬란했다. 그렇게 사랑을 알아버린 노을빛의 소년에게, 아직은 사랑을 알지 못하는 아침 햇살 같은 소녀가 문을 두드렸다.
그의 열다섯의 날들은 그렇게 완벽해 보였던 세계를 깨뜨리며 시작되었다. 그렇게 지독한 열병과도 같은 사랑이 질풍노도와 같이 몰아쳐왔다.
3
월요일, 학교에서 언제나처럼 도시락을 까먹으며 선우가 물었다.
“택아, 너 이번 생일 선물 뭐 받고 싶어?”
보통은 됐다고 말하는 택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번에......”
“어?”
“덕선이랑 같이 라디오에서 들었던 곡인데, 무슨 꽃 이름 밴드였는데....
얼마 전에 1집 나왔다고....“
“꽃 이름? 야, 혹시 들국화냐?”
“아, 맞아. 들국화.”
“들국화 1집 사줘?”
“응.”
그렇게 택이의 15살 생일의 선물은 들국화 1집이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모두가 생각했다. 택이는 들국화를 좋아한다고. 심지어 10년이 지난 후, 94년의 그 가을날, 기원의 유 과장도 이승환 콘서트를 권유하는 은서에게 말했었다. 최 사범님은 들국화를 좋아한다고. 여전히 그의 취향은 들국화라고.
4
결혼하고 첫 인터뷰였다. 결혼과 대승 그것도 세계적인 대국마다 승승장구하는 기록에 기자는 입이 마르도록 칭찬에 칭찬을 끊이지 않았다. 택에게는 익숙해 보였지만, 그 곁에 같이 앉아 있는 덕선은 그저 낯간지럽기도 하고, 뻘줌하기도 했다. 몇 번 매스컴을 타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집중적으로 앉아서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이런 일들을 15년 가까이 해오고 있는 택이가 새삼 대단하다 싶기도 했다.
“최택 9단님께 드리는 마지막 질문입니다. 아, 사모님께 먼저 여쭈어 봐야겠네요.”
“네? 네."
갑작스럽게 덕선에게 화살이 돌아오자 덕선은 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그러나 질문은 평범한 것이었다.
“두 분 음악 취향은 비슷하신가요? 사모님은 어떤 음악, 어떤 가수를 좋아하세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아, 저요? 전....이승환 씨 좋아해요.”
“아, 그렇죠. 최고 아니십니까. 요즘.”
“네. 이오공감으로 나오셨을 때도 굉장히 좋아했어요.”
“아, 그럼 혹시 두 분 같이 콘서트도 가시고 하신 겁니까?”
그 말에 덕선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그 모습에 이미 기자는 눈치 채고 있었다.
“이승환 콘서트, 두 분 그 때 가신 것 맞으시죠?”
“네...네?”
담담한 택이와는 달리 덕선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기자가 지금 무엇을 묻고 있는지 아는 까닭이었다.
“최택 9단께서 딱 한 번 기권패를 하셨죠.
아마 이런 일이 바둑계에서 전무후무한 일이라 말이 많았었는데.....
그 때 혹시.......?“
덕선이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당황하고 있는 사이, 택의 입술이 고요히 열렸다.
“말씀하신 것처럼, 전무후무한 일일 겁니다.
바둑계뿐만 아니라, 앞으로 제게도 말입니다.”
“예? 그럼 인정하시는.......?”
“같은 상황이 또 생긴다고 해도, 전 또다시 그렇게 할 겁니다.”
단호한 대답에 기자의 입에서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와~!! 최택 9단님, 진~짜 로맨티스트시네요.”
“전,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
도리어 당황하고 있는 것은 기자였다. 방금 전까지 분명 긍정의 대답을 들은 것 같은데, 정작 택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아니 도리어 지금 무슨 소리냐며, 어떤 긍정의 대답도 한 적이 없노라 말간 표정으로 기자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자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러니 어떤 식으로도 이 부분을 기사화하지 않으실 거라고 믿습니다.
대답을 들으신 것이 전.혀. 없으시니까요.“
기자는 멍하니 택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택은 변함이 없었다. 그 청명하고 고요한 눈으로 기자를 가만히 마주볼 뿐이었다. 뭐라고 딱히 말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 자신이 뭔가 좋은 기삿거리 하나를 놓친 기분이었다.
“어...저...그러면 최택 9단님도 좋아하시는 가수가 이승환이신 거죠?”
다시 대답을 이끌어내겠다는 굳은 의지인지 기자는 이제 대놓고 택에게 답을 요구하는 중이었다.
“물론 좋아하긴 합니다만, 가장 좋아하는 건 들국화입니다.”
그 말에 덕선이 택을 놀란 듯 돌아보았다. 너무나 당연히 택은 이승환을 좋아할 거라 생각했다. 두 사람의 어쩌면 첫 출발일지도 모르는데, 택은 예전처럼 아주 한결같이 들국화가 좋다고 말하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소중한 순간이 택에게는 아닌 건가 싶어 이상하게 서운한 감정이 들고 말았다.
“참, 한결 같으시네요. 예전 인터뷰에서도 본 것 같은데....
혹시 좋아하시게 된 계기라도 있으십니까?“
기자는 이제 포기한 듯, 대충 마무리하려는 분위기였다. 그 말에 사실 덕선도 궁금해졌다. 택이는 왜 그렇게 한결 같이 들국화를 좋아하는 걸까. 그 이유를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제가 사랑하고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순간 들었던 음악입니다.”
“예?”
“아주 오랫동안 한 소녀를 사랑해오고 있었다는 걸.....알게 되었던 순간이 있었어요.
그 오랜 감정이, 사랑이었다는 걸 알게 된 그 날을 잊을 수가 없어서요.
들국화는 그래서 제겐 언제나 그 소녀입니다.
제가, 열다섯 살, 아름다운 소녀를 사랑해오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 제 처음의 순간이었습니다.“
“지금, 사모님을 두고, 첫사랑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 말에 택은 덕선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고, 덕선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10년도 더 된 아주 오래 전, 한 장면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비가 내리던 그 날, 노란 우산 아래에서 들었던 그 곡이 들국화였다.
어쩌면 택의 사랑은 아주 오랜 것인지도 모른다. 덕선은 그래도 여전히 모를 것이다. 그들의 결혼 생활이 10년이 되고, 20년이 되어도 모를 것이다. 택의 손이 덕선의 손을 맞잡아왔다. 그 모습을 기자가 사진을 찍어댔지만, 택의 눈은 여전히 덕선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낮게 속삭였다.
감사해.
어?
지금 이 순간, 니가 내 곁에 있어서 감사하다고.
덕선은 눈물이 맺힌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나도 그래. 택아.....
들국화 – 오후만 있던 일요일 (들국화 1집, 85.9)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52575522 음악링크
오후만 있던 일요일 눈을 뜨고 하늘을 보니
짙은 회색 구름이 나를 부르고 있네
생각 없이 걷던 길옆에 아이들이 놀고 있었고
나를 바라보던 하얀 강아지 이유 없이 달아났네
나는 노란 풍선처럼 달아나고 싶었고
나는 작은 새처럼 날아가고 싶었네
작은 빗방울들이 아이들의 흥을 깨고
모이 쪼던 비둘기들 날아가 버렸네
달아났던 강아지 끙끙대며 집을 찾고
스며들던 어둠이 내 앞에 다가왔네
나는 어둠속으로 들어가 한없이 걸었고
나는 빗속으로 들어가 마냥 걷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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