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팔 선택 상플/(선택) 번외-돌아오는 길

[선택/상플] 번외-그대에게 다시 돌아오는 길 中

그랑블루08 2016. 7. 21. 18:02

[(선택상플) 94년 어느 날, 어쩌면 번외]

 

 

 

그대 내게 다시 돌아오는 길

 

 

 

 

그대 내게 다시 돌아오려 하나요

내가 그댈 사랑하는지 알 수 없어 헤매이나요

 

맨 처음 그 때와 같을 순 없겠지만

겨울이 녹아 봄이 되듯이 내게 그냥 오면 돼요

 

헤어졌던 순간은 긴 밤이라 생각해

그대 향한 내 마음 이렇게도 서성이는데

 

왜 망설이고 있나요 뒤돌아보지 말아요

우리 헤어졌던 날보다 만날 날이 더욱 서로 많은데

 

변진섭의 그대 내게 다시 에서 -

 

 

 

1

 

 

다음 날 덕선이 출근한 본사에서는 다들 뭔가 웅성대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서류를 들고 가는 탑 언니를 붙들어 물어보았다.

 

뭔 일이에요, 언니?”

 

? 그게 저번 달에 마감됐던 미주 파견 근무 있잖아.”

 

그거 이미 마감됐잖아요.”

 

그러니까. 근데 한 명이 취소했댄다.”

 

? 왜요? 그거 경쟁률 장난 아니었잖아요.”

 

그 말에 탑 언니는 목소리를 낮추어 덕선의 귀에 속삭였다.

 

너만 알고 있어.

그게 25기 윤희 알지? 걔가 애인 때문에 못 가겠다 그랬대.”

 

? 남친요? 헤어진 거 아니었어요?”

 

그러게 말이다. 헤어져서 자기는 거기 가서 죽도록 일만 하겠다더만. 기가 막히지.

남친이랑 화해했다네. 그래서 못 가겠대. 기가 막힌다, 기가 막혀.”

 

덕선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자, 탑 언니의 눈이 갑자기 반짝였다.

 

, 덕선아, 너 가볼래?

너 경력도 되고, 스마일 상 받은 것도 있고. 지원해 보면 될지도 몰라?”

 

제가요?”

 

...근데 안 되려나. 안 되겠다. .”

 

갑자기 탑 언니의 태도가 뭔가 돌변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요?”

 

넌 안 되지. 국가적인 엄청난 손실이 올 수도 있어.

, 안 돼. 넌 일단 안 되는 걸로....”

 

아니요. , 지원할게요.”

 

? 니가? ! 너 지금 그러면 안 되잖아! 왜 그래 갑자기?”

 

지원서 언제까지 내야 해요?”

 

? 그거...이제 보름 후에 가야 하니까, 오늘 내일 받아서 꽤 급하게 진행될 걸?

근데, 너 진짜 괜찮겠어?”

 

. , 지원서 한 장 주세요.”

 

뭔가 단호한 표정으로 지원서를 받아가는 덕선을 은서는 그저 황당하다는 듯 바라볼 뿐이었다.

 

2

 

 

그 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보름 후 바로 출발해야 하니, 급하게 추진해서 그런지 지원자도 많이 없었고 덕선은 다행히 합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 이것도 부분 합격이었다. 한 달 동안의 근무 상황을 보고 계속 근무해도 좋을지 어떨지는 현지에 상주하는 상급자가 판단해서 결정한다고 했다. 언어나 근무 태도 등 근무 평점이 높으면 3개월씩 연장이 가능하다고 했다.

 

덕선은 합격 통지서를 받아들고 골목을 터덜터덜 걸어 들어오며 생각했다. 택이에겐 뭐라고 말하지? 엄마, 아빠에게는 또 뭐라고 말해야 하지? 생각하면 할수록 심장을 무언가가 짓누르는 듯이 답답해졌다.

 

그렇게 느릿느릿 주저하며 걸어 들어온 그 골목에 택이가 있었다. 평상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택은 덕선을 보고 환하게 미소를 건네 온다.

 

느리게, 아니 어쩌면 그런 택을 보고 멈추어 서 있는 덕선을 더 기다릴 수가 없었던지, 택은 어느 새 덕선의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와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을 맞잡아 왔다.

 

걷자.”

 

그의 손에 이끌린 채로 덕선은 언제나처럼 동네를 걸었다. 설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여전히 겨울의 바람은 살을 에는 듯 온 몸을 휘감았지만, 맞잡고 있는 택의 손만은 따뜻했다. 어쩌면 겨울이 차가워서 그의 손이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신기해.”

 

? 뭐가?”

 

한참 말없이 걷기만 하던 택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덕선은 이해하지 못했다. 걷는 동안 신기한 일을 본 건 없는데 말이다.

 

그냥....손 잡고 덕선이 너랑 이렇게 걷는 게 신기해서.....”

 

무슨 소리야? 우리 사귄 지가 벌써 1년하고도 몇 달이나 지났는데.....”

 

그 말에 택이도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벌써 그렇게 됐네.

그래도 난....신기해.”

 

덕선의 손을 잡고 있는 택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앞을 보며 걷고 있었지만, 택의 눈가가 웃고 있었다. 덕선은 그의 눈가에 맺힌 웃음을 바라보다, 저 안에서 올라오는 울컥대는 감정을 외면하려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은 어느 새 동룡의 가게가 있는 언덕 쪽으로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아니 사실 덕선은 택의 손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이니, 그쪽으로 방향을 잡은 건 택이었다.

 

사실 그 날.....”

 

?”

 

이렇게 걷고 싶었어. .....잡고 싶었어. 그 날....”

 

언제?”

 

, 가슴 아파 죽을 뻔한 날.....”

 

기억한다. 덕선의 어깨로, 덕선의 손으로 자꾸만 부딪쳐 오던 택의 감촉을, 덕선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날 택은 덕선과 우진을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터질 뻔했고, 그 남자 우진도 덕선의 마음을 눈치 채며 가슴이 찢어졌을 것이고. 결국 알고 보면 두 남자 모두 가슴이 찢어진 날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당사자인 덕선도.....

 

니가 그 날 그런 말을 했어. 그 사람이 결혼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고백하라고...”

 

미안.......”

 

그랬었다. 덕선은 그 날 그 고백이 자신에게 하는 것이라 생각지 못했다. 그저 기원에 있는 그 여자일 거라 생각하며 고백하라고 그토록 택이에게 강요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기가 막힌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생각해봤어. 덕선이 니 말대로 정말 그렇게 되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각자 결혼해서 만났을까?”

 

아니.....”

 

?”

 

.....기다렸을 거야.”

 

?”

 

그냥.....”

 

택은 말끝을 흐린다. 그 말끝에서 덕선은 택의 대답을 알 것만 같다.

 

혼자 살았을 거라고?”

 

.”

 

그래도 설마 설마하고 물어본 말에 대한 대답은 덕선의 예상과 같았다.

 

말이 돼? 니 주변에 여자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지금도 장난 아닌데?”

 

나한테 여자는 너 하나니까.....”

 

택아.....”

 

그냥 덕선이 니가 그 남자와 잘 살길 바라면서.....그렇게 살았겠지.”

 

택의 말을 들으며 덕선은 자꾸만 무언가가 저 안에서 울컥하며 올라오는 것만 같다. 코끝이 시려왔다.

 

그리고....기다렸겠지.”

 

?”

 

혹시 니가 힘들거나, 혹시 혼자가 된다면, 내게 오길.....”

 

아까부터 시려오던 그 느낌은 기어코 눈물을 흘리게 하고야 만다.

 

그러니까, ...버리지 마. 덕선아.”

 

택은 어느 새 덕선의 볼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다가왔다. 그녀의 입술에 닿을 듯이 다가온 택의 입술이 스친다.

 

사실은 그날 이러고 싶었어.”

 

택의 따뜻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감싸며 깊게 들어왔다. 그 사이로 또다시 덕선의 볼에서는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따뜻하다. 그래서 가슴이 저려왔다.

 

 

3

 

 

기원에서 유 과장님께 이야기를 들은 후, 택은 그저 고요했다. 어쩌면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도 몰랐다.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정리할 시간, 그리고 덕선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짚어볼 시간. 이제 그녀가 떠난 지, 아니 이제 돌아올 때가 된 한 달이 된 시점이지만, 그녀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택은 새벽이 돋아오도록 전화기를 잡은 채, 세상이 멈춘 듯이 앉아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번호를 눌렀다.

 

“Hello?”

 

나야, 택이.”

 

. 택아.”

 

퇴근...했어?”

 

. 근데 너, 지금 새벽 아니야?

일찍 일어난 거야, 아니 안 잔 거야?”

 

일찍....일어났어.”

 

그래?”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택이 한숨을 쉬었다.

 

덕선아.....”

 

?”

 

별 일, 없지?”

 

.”

 

택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4

 

 

덕선 스스로 택에게 전화하는 걸 피하고 있기도 했지만, 택에게서도 연락이 없었다. 이제 한 달인데..... 택의 입장에서는 이제 덕선이 곧 돌아올 거라고 생각할 텐데. 그러나 택은 덕선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사실 덕선의 업무는 석 달까지 연장되었다. 예정대로 한 달 동안의 평가를 통해서 석 달까지 연장되고, 또 이 세 달 과정이 통과되면 1년 정도 더 연수 과정을 이어갈 수가 있었다. 어쨌든 2달이 더 연장된 상황에서 택이에게 전해야 하지만, 덕선은 도저히 입이 떼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꾸 차일피일 미루게 되고, 택과의 연락도 점점 뜸해졌다.

 

물론 덕선 자신이 피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택에게서까지 연락이 오지 않는 게 이상하기도 했다. 아니 솔직히 서글펐다. 어쩌면 택은 덕선이 없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그의 견고한 바둑의 세계 속에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을지도 몰랐다. 솔직히 자신이 잘 하는 짓인지도 알 수 없었다.

 

덕선 씨, 오늘 서울팀들 온다는 거 들었어요?”

 

같이 지상 근무하는 승무원 남자가 덕선에게 물어왔다.

 

. 은서 언니가 연락했었어요.”

 

, 그렇죠. 두 분 친하시죠.”

 

요즘 자신에게 친절한 남자였다. 자신보다 3개월 일찍 들어온 준성은 업무나 연수에 낯설어하는 덕선에게 이것저것 알려주며 살갑게 대했다. 처음엔 왜 저러나 싶었지만, 워낙 싹싹한 성격이라 그런가 보다 싶었다.

 

, 아까 슬쩍 들었는데, 우리 비행기에 최택 9단이 탔다던데요?”

 

네에? 최택 9단이요?”

 

닮았다고 하던데. 나도 정확하게는 못 들었어요.”

 

이상하다. 택이가 탈 리가 없는데. 미주 쪽으로 올 리가 없는데..... 그러나 자꾸 심장은 뛰어댔다. 혹시 온 걸까. 니가....?

 

근데....덕선씨....”

 

?”

 

최택 9단이랑 무슨 사인지 물어봐도 돼요?”

 

갑작스런 준성의 물음에 덕선의 눈은 파르르 떨리기만 했다.

 

, 갑자기 미안해요. 근데 저번에 신문에 난 기사, 본 적도 있고 해서.

그 때 왜, 스캔들...비슷하게......”

 

이 남자는 왜 이런 걸 물어보는 걸까. 정말 김 기자님 말씀대로 소문이 날 만큼 나버린 건가 싶었다. 덕선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사이 아니에요.”

 

그 말을 뱉는데 입 안이 까칠해지도록 메말라왔다.

 

아무 사이 아니야.....

 

그렇죠? 두 사람 오래된 동네 친구라고 들었는데....맞아요?”

 

? ........”

 

그 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뭐가 그렇게 궁금해? 준성 씨는?”

 

언니!!!”

 

어유, 덕선아, 너 왜 이렇게 말랐어? 외지 나와서 굶고 다니니? 어어...!!”

 

덕선은 은서의 품으로 들어가 안기고 말았다. 그런 덕선을 은서는 어깨를 토닥이며 안아주었다. 은서의 품에서 덕선은 자꾸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서 눈을 몇 번이고 깜빡이고만 있었다.

 

~! 겨우 한 달만에 이러면 어떡해?

3달까지 체류 허락받았다며?”

 

겨우 은서의 품에서 벗어나 덕선은 고개만 끄덕였다.

 

, 은서 선배. 최택 9단 진짜 우리 비행기 탄 거 맞아요? 같이 타고 오셨어요?”

 

준성은 이때다 싶었는지 은서를 향해 또다시 택이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은서는 고개를 흔들었다.

 

타긴 뭘 타? 최택 9단이 미국까지 올 일이 뭐가 있냐?

우리 유람 씨가 타는 바람에 이상하게 소문이 나서 그래.

유람 씨, 볼일 있어서 나랑 같이 뉴욕 왔어.”

 

그래요? 잘 됐네요. 오랜만에 여행도 하시고, 데이트도 하시고....”

 

.... 그렇긴 한데. 알잖아. 며칠 못 있어.”

 

별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하던 은서가 덕선에게 가까이 와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래도 같이 오니까 완전 좋은 거 있지?

역시 애인이랑 같이 다녀야 돼.”

 

은서는 누구 배라도 아프라는 건지, 덕선에게 은근히 자랑질을 했다. 그런 은서를 향해 덕선은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뭔가 스스로도 어색했다.

 

은서는 유람 씨가 기다린다며 먼저 가고, 덕선은 6시까지 근무를 마친 후에야 겨우 기숙사로 사용하고 있는 아파트로 털레털레 돌아왔다. 준성이 회식 있는 데 같이 가자는 것도 거절한 채 공항 셔틀 버스에 올랐다.

 

방에 들어와 한참 전화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나 벨은 울릴 생각이 없었다. 샤워를 하는 내내 이상하게 서러웠다. 분명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덕선 자신이었지만, 왜 이렇게 버림받은 느낌이 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서러워서 울었다. 그렇게 펑펑 울고만 있었다. 웃기게도, 택이가 탄 줄 알았다는 말에, 유 과장님이 오셨다는 말에, 더 그가 그리운지도 몰랐다. 그 말을 안 들었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나랑 헤어지고 싶은 거야?

진짜 나랑 헤어질 거야?

 

그 물음이 도리어 더 서럽게 했다. 마치 그 물음이 진짜인 것만 같아서, 어쩌면 택이는 자신을 놓고 있는지도 몰라서, 시작은 자신이었으면서 그렇게 서럽도록 울었다.

 

수건을 머리에 감고 나오는데, 벨 소리가 울렸다.

 

누구세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 시간에 누굴까 하다가 혹시 탑 언닌가 싶기도 했다.

 

누구? 혹시 은서 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