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상플) 94년 어느 날, 어쩌면 – 번외]
그대 내게 다시 돌아오는 길 下
그대 내게 다시 돌아오려 하나요
내가 그댈 사랑하는지 알 수 없어 헤매이나요
맨 처음 그 때와 같을 순 없겠지만
겨울이 녹아 봄이 되듯이 내게 그냥 오면 돼요
헤어졌던 순간은 긴 밤이라 생각해
그대 향한 내 마음 이렇게도 서성이는데
왜 망설이고 있나요 뒤돌아보지 말아요
우리 헤어졌던 날보다 만날 날이 더욱 서로 많은데
변진섭의 그대 내게 다시 中에서 -
1
덕선이가 떠난 지 한 달이 되던 날, 이제 돌아왔어야 하는 그 날, 별 일 없냐는 물음만 던지고 전화를 끊고 난 후, 택은 고민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의 삶의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올곧게 바둑을 두었고, 기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유 과장이 보기에 택은 이상했다. 너무 고요하고 너무 조용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어쩌면 덕선이 그를 떠날지도 모르는, 아니 이미 떠난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의 행동은 변화가 없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조금 더 미간이 좁혀져 있는 정도랄까. 한동안 사라졌던 두통이 다시 도진 정도랄까. 가끔 편두통이 오는 듯, 오른쪽 이마를 짚는 행동 외에 새롭거나 달라진 점은 없었다. 사실 그런 행동은 덕선과 사귀기 전엔 늘 있던 행동이었으므로, 덕선이 오래 떠나 있으면서 다시 편두통이 생긴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그런 미묘한 변화가 있다고 하더라도, 택은 어떤 다른 행동도 없이 그저 가만히 있기만 했다. 적어도 유 과장이 보기에는 그랬다. 마치 잔잔한 수면처럼, 어떤 움직임에도 고요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듣고서도 저렇게 평상시와 같을 수 있는지, 정말 사람이 맞나 싶어, 유 과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쩌면 자신과 같은 범인(凡人)이 이해하기에 최택은 차원이 다른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고요하던 택이, 그 말을 들은 지 일주일이 지나서 유 과장을 다시 찾아왔다.
“유 과장님, 저 비행기 티켓 좀 끊어주시겠어요?”
“예? 어디 말씀이세요? 설마.....뉴욕?”
“예. 이번 주말하고 다음 주 수요일까지 대국 치르고 나면, 목요일부터 나흘 정도는 시간이 날 것 같아요.“
“다음 주면.... 어! 그 다음 주 월요일에 대국이 있는데요?”
“일요일 밤이나 월요일 새벽에 도착할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유 과장에게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는 택의 걸음걸이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저 유 과장은 택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쩌면 어느 정도 스케줄을 정리할 수 있을 때까지 그는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그 가운데 이틀에 한 번 꼴로 대국을 쳐내는 그 집중도와 계획성에 그저 놀랄 뿐이었다. 유 과장은 은서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바로 다음 날 저녁, 유 과장은 택의 앞에 티켓을 내밀었다.
“벌써 준비하셨어요?”
“아시다시피....”
어깨를 으쓱하는 유 과장을 보니, 아마 탑 언니에게 부탁한 듯 싶었다. 그런데 받아든 티켓은 4장이었다. 왕복이면 두 장이어야 하는데, 왜 4장이지 싶다가 이름을 보니 YU RAM이라 적혀 있었다.
“유 과장님.....혹시......”
“에휴... 사범님 혼자 못 가세요. 찾으시기도 어렵고.
그리고 저도 사범님 덕분에 여자친구랑 바람이라도 쇨려고요.
그러니 전 업무차 가는 겁니다.
아, 뉴욕 한인 친선 바둑 강습회 정도로 해두었습니다.”
“근데...여자친구분 스케줄은 맞으세요?”
“그게...흐흐 좀 바꿨습니다.
여차저차해서 결국 같이 갈 수 있는 걸로.....“
“아...저 때문에.....죄송합니다.”
“에유....죄송하다뇨? 전, 업무차로 가는 겁니다.
저 확실하게 출장비 받는 거니까, 염려 마세요.
최 사범님과 동행하는 거니까 확실히 업무 맞고, 저도 애인이랑 놀고,
딱 좋죠, 뭐.“
유 과장이 저렇게 말은 하고 있어도, 이건 분명히 택 자신 때문에 따라가는 거였다. 탑 언니 스케줄까지 조정해서 맞추어준 듯했다. 그저 고맙고 미안했다. 사실 혼자서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조금 걱정을 했던 것도 사실인데, 이렇게 유 과장이 함께 가 준다니 시름이 놓였다.
그렇게 택은 꽉꽉 들어차 있는 대국을 하나하나 쳐내며, 결국 목요일 새벽 비행기로 뉴욕으로 떠났다. 14시간만에 J.F.케네디 공항에 도착한 택은 은서를 기다리는 유 과장을 뒤로 한 채, 공항 안 어딘가로 향했다.
그곳은 덕선이 일하는 곳이었다. 오전에는 어학 교육을 받고, 오후에는 공항 근무를 선다고 했었다. 오후 5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아니나 다를까 덕선은 공항 항공사에서 발권 업무를 하고 있었다. 그런 덕선을 택은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 그녀에게 자신이 왔다는 걸 알리지 않았다.
그 사이 덕선에게 남자 승무원 한 사람이 다가갔다. 그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며 웃는 덕선을 바라보는 택의 마음이 뭔가 스산해졌다. 그리고 택은 그 말을 듣고야 말았다.
“아무...사이 아니에요.”
최택과 무슨 사이냐고 묻는 남자 승무원에게 덕선은 택이가 서 있는 자리에서도 뚜렷이 들릴 만큼 선명하게 대답했다. 아무 사이 아니라고..... 그 말에 당황한 건 도리어 유 과장이었다. 그저 지켜만 보고 있는 택을 따라 그 곁에 서 있었지만, 그 대답을 직접 듣고 있는 택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은서가 나와서 덕선과 회포를 푸는 동안, 택은 몸을 돌렸다.
“안 가보실 겁니까?”
유 과장의 물음에도 택은 옅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도리어 슬퍼보였다.
“이렇게 얼굴만 보고 가실 거예요?”
유 과장이 거듭 물어보아도 여전히 그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두 분 오랜만에 데이트 하세요.”
“최 사범님은, 어떻게 하시게요?”
“그냥...좀....있으려고요.”
그 말에 한숨을 쉬던 유 과장은 택에게 주소가 적힌 쪽지를 내밀었다.
“공항 호텔로 잡아놔서 찾기는 쉬우실 겁니다.
메리어트 호텔이고요. 공항 셔틀이 그까지 바로 간답니다. 아니면 택시를 타셔도 5분이면 간다고 하네요.“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최 사범님.”
머뭇대던 유 과장이 다시 택을 불렀다.
“예?”
“뒷면에 덕선 양 주소가 있습니다.
공항 근처 아파트에 연수생들이 기숙사로 쓴다고 하네요.
인우드 스트리트 근처라서 메리어트에서 가깝습니다. 덕선 양 방은 2층입니다.
거기 뒷면에 주소 적어뒀습니다.“
쪽지 뒷면에 135th Ave 라고 아파트 주소와 약도까지 자세히 적혀 있었다.
“아, 그리고 덕선 양은 근무가 6시 이후에 끝나서
지금부터 1시간은 더 일해야 한답니다.
저도 메리어트에 있으니까 나중에 제가 호텔방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전....“
“저 때문에..... 여러모로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유 과장님.”
“어휴.... 그러니까 어서 좀 잘 풀어보세요. 두 분....
그리고 제가 혹시나 해서 선물도 흠흠....가방에 넣어뒀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꼭 사용하셨으면......좋겠습니다. 그럼, 전 진짜 가보겠습니다.“
택은 쪽지를 들고 한참을 서 있다가 공항 앞에서 택시를 탔다. 그가 내린 곳은 인우드 스트리트 근처 135th Ave 3층짜리 아파트였다. 아파트 발코니에는 간간히 불이 켜진 곳도 있었지만, 대체로 불이 꺼져 있었다. 택의 눈이 불이 꺼진 2층에 머물렀다.
내가.....널....놓을 수 있을까.....
뭔가 속에서 울컥하며 올라온다. 택은 아파트 옆에 놓인 벤치에 앉았다. 겨울, 뉴욕의 겨울은 가슴까지 사무치도록 춥고 어두웠다.
2
“택.....아.......”
덕선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자신의 눈 앞에 정말 택이가 서 있는 것이 맞는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멍청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도대체 몇 시간을 밖에서 헤맨 건지 빨갛게 얼어버린 택의 얼굴을 보며, 정신을 차렸다.
“들어와. 추워.”
그 말에 택도 쭈뼛거리며 문 안으로 들어왔다. 방은 단순했다. 기숙사처럼 사용하다보니, 원룸이 다였다. 오래된 아파트인지 걸을 때마다 목조 건물에서 삐꺽거리며 소리가 나서 걷기도 조심스러웠다.
“도대체 얼마나 밖에 있었던 거야? 이불이라도 덮어야겠다, 너.”
뭐가 속상한지 미간을 찌푸리며 이불을 꺼내오겠다는 덕선을 택이 잡았다. 잡은 손이 소스라칠 정도로 차가웠다.
“괜찮아, 덕선아. 그냥 있어.”
“택아, 너 이러다 진짜 감기 걸려.
넌, 너 하나만 생각하면 안 된다, 그랬지?
넌....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너 지금 꽁꽁 얼었어.
이불 따위로는 안 되겠다. 잠깐 있어 봐.“
택이가 말릴 새도 없이 덕선은 욕실로 들어가는 욕조의 물을 받았다. 혼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덕선이 여전히 멀뚱하게 앉아 있는 택의 손을 잡고는 욕실로 이끌었다. 욕탕 안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들어가서 몸부터 녹여.”
“아니...난......”
“시끄러. 최택! 너 아프면 내가 가만 안 둔다!!”
어느 틈에 택은 덕선이 코트를 벗기는 대로 욕실 안에 들어와 있었고, 덕선은 택이 어영부영 하는 사이 언제 가방까지 열고 속옷이며 갈아입을 옷까지 택의 품에 안겼다. 택이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따뜻한 욕탕 안에서 몸을 녹이고 있었다.
지금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걸까.
몸은 나른해지는데, 몸이 풀려 가면 갈수록 지금 자신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분명 아까까지 찬 겨울 바람 속에서 고민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그야말로 희극적이었다. 이제 나가면 무어라 말해야 할지, 이 웃기는 상황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덕선도 택과 같은 마음이었다. 도대체 택이는 왜 온 걸까. 밖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걸까. 그리고 자신은 뭐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그렇게 30분은 흐른 것 같았다. 시간을 보던 덕선이 욕실의 문을 두드렸다.
“택아, 자?”
“아니....”
그러나 대답하는 택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너무 오래 있으면 더 안 좋아. 이젠 나와.”
“어.”
샤워 소리 이후, 택이 머리가 젖은 채로 욕실 밖으로 나왔다. 덕선은 수건으로 택의 머리를 닦아 주었다.
“내가, 할게.”
“어? 어.”
택이 머리를 말리는 동안, 덕선은 소파에 앉아 눈만 굴리고 있었다. 뭔가 어색한 분위기 때문에 말을 건네기도 어려웠다. 택도 머리를 다 말린 후, 쭈뼛대며 덕선이 앉아 있는 소파에 와서 앉았다. 나란히 앉아 있었지만, 그렇다고 서로 붙어 있는 것도 아닌 어느 정도의 틈이 있는 거리. 가까운 듯했지만, 틈이 존재하는 딱 그 거리만큼 두 사람의 마음도 그런 듯했다.
하아......
택이 한숨을 쉬었다. 덕선은 그런 택을 몰래 흘낏 쳐다보다 택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하자 황급히 눈을 돌렸다. 자꾸만 심장이 뛰었다. 설렘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긴장 때문인지 덕선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생각해 봤어.”
“어? 뭘?”
덕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덕선이 너랑...내가....”
“.............”
“예전처럼 지낼 수 없다면.......”
올 것이 와버린지도 몰랐다. 그 말에, 예전처럼 지낼 수 없다는 그 말에 덕선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벌써 덕선의 눈 안으로 물기가 차올라 왔다. 그 말만으로, 그 말만 들어도 힘이 들었다. 덕선은 그랬다.
“난....어떻게 해야 할까.”
“...............”
“덕선아, 난.....널 붙잡으러.. 온 건 아니야.”
“...............”
“니가 헤어지고 싶다면.....정말 그렇다면......”
“................”
아무 말도,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는 덕선의 눈에서는 어느 새 눈물이 송글거리며 올라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왠지 택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래서 덕선은 더 서글펐다. 붙잡지 않겠다는 그 말이 서러웠다. 어쩌면 덕선은 그가 잡아주길, 이렇게 와서 왜 이러는 거냐고, 절대로 널 놓아주지 않겠다고, 그 말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덕선은 지금에서야, 아니 지금 이 담담한 듯한 그의 말을 듣고서야, 잡지 않겠다는 그 말을 듣고서야, 자신의 속내를 진심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늦어버렸다.
“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봤어.”
“.................”
“덕선아....난....니가 원하는 대로 해줄 거야.”
덕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무너졌다. 마음 저 안으로부터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택은 지금 자신을 놓으려 한다. 분명 자신이 저지른 짓이다. 그러나 그 이별이, 너무나 아프다. 아직 자신은 어떤 준비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난.....”
“................”
“난 같아.”
그러나 그 다음 나온 말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뭐?”
“덕선아, 난, 같다고.”
“뭐...뭐가....?”
“난 너에게 내 곁에 있으라고 말 못해. 그렇다고 널 붙잡고 가두어둘 수도 없어.
난.....그냥.....이곳에 있을 거야.“
“무슨 소리야? 그게?”
“난.....변하지 않아.”
“어...?”
“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도 없어.
그러니까, 난....나는....
덕선이 니가 다른 사람을.........좋...아하게 되었다고 해도,
나한테....싫증이 나서.....떠난다고 해도....
나는....성덕선 니 거니까, 난 성덕선의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그냥....이렇게 있을 거야.“
한참 침묵이 흘렀다. 이제 택이 긴장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택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녀에게 해야 할 말과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 사이로 택은 결정해야 했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는 침묵했다. 그래서 택의 가슴은 뉴욕의 겨울 거리보다도 더 추웠고 스산했고 서글펐다.
이윽고 나온 그녀의 말은 이것이었다.
“나 놓고 싶어?”
“아니.”
그의 대답은 빨랐다. 아니 절박했다.
“잡고 싶어.
내 모든 걸 놓고서라도 널 잡고 싶어.“
어쩌면 오늘 택이가 온 이유는 이 말을 하고 싶어서였다. 해야 할 말과 하고 싶은 말 사이에서, 택은 해야 할 말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진정 이것이었다. 그녀를 잡고 싶다고, 그녀를 지키고 싶다고, 떠나지 말아 달라고....
“니가 바둑 안에 있었으면 좋겠어.
그럼 난 절대로 널 잃지 않을 텐데
목숨 걸고 널 지킬 텐데....“
“택아....”
“붙잡고 싶어.
근데 그럴 수가 없어.
내가 살자고 널 숨 막히게 하면 안 되니까.“
그때였다. 덕선의 손이 곁에 앉아 있는 택의 손을 잡았다. 그제야 택의 눈이 덕선의 눈을 향했다.
“택아, 내가 널.....놓을 거라고 생각했어?”
택의 눈이 흔들렸다. 그의 고개가 아주 천천히 끄덕여졌다.
“바보야! 내가 어떻게 널 놔? 내가 너 없이 어떻게 사냐?
너, 아직도 그렇게 날 몰라?“
“그...그게. 니가 나랑 헤어지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누가! 누가 그래? 누가?”
“.....그냥 얘기하는 걸 들었어. 유 과장님이랑 탑 언니가........”
“아니야. 그런 거. 두 분이 잘못 아신 거야.
난 그냥...... 우리 사이 자꾸 알려지면 너한테 안 좋을 거 같아서....
스캔들 나고 이러면 안 좋다고, 김 기자님도 그러시고.....
그냥 좀 떨어져 있으면 조용해질 거라고 그래서....
그래서 이렇게 와 있었던 거야.“
“그럼, 정말 나랑 헤어지려는 거, 아니었어?”
“아니라고. 이 바보야! 내가 미쳤냐?
내가 너 없이 어떻게 살아?
근데 넌 바보 같이, 뭐? 붙잡으러 온 게 아니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줘?
너, 그 따위로 말......!!!!!“
덕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택의 입술이 밀려왔다. 무언가가 터져버린 듯, 울컥하던 심정 그대로 택은 거세게 밀어왔다.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해서 덕선의 몸은 어느 새 소파 위로 눕혀졌고, 택은 속이 타들어가는 듯이 그녀의 입술을 가졌다.
“태...택아...잠시만...하아하아......”
숨이 가쁘도록 거칠게 다가오는 택의 가슴을 밀어내며, 덕선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 때문에 잠시 밀려난 택의 입술에서는 번뇌와 같은 고백이 이어졌다.
“덕선아.....나......죽는 줄 알았어.....”
“택아......”
“나, 정말......다시는 이렇게 너, 못 만질까봐, 다시는 니 입술에 입맞추지 못할까봐.....하아.......”
그의 말은 끊어졌다. 그저 미치도록 덕선의 입술을 탐했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것처럼, 그의 입술은 밀려 들어오고 또 밀려왔다. 덕선이 그의 혀를 그의 입술을 다 쫓아갈 수 없을 만큼, 그는 덕선을 욕심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택이 그녀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그 사이 겨우 숨을 내쉬며 가쁜 호흡을 내뱉는 덕선에게 이윽고 택이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사랑해도 돼?”
“....어?”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라 덕선은 한참 택의 눈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 속에서 남자를 읽고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그녀를 여자로 갖고 싶다고, 완전한 남자의 눈을 하고, 택은 덕선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그토록 깊고 검은 눈을 하고, 온전히 그녀를 바라고 있었다.
“널....사랑하고 싶어.”
“택...아....”
아직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했는데, 또 어떠한 대답도 듣지 못했는데 택은 덕선을 안아 침대에 눕혔다. 당황한 덕선이 택의 품을 벗어나려 해보지만, 택의 손에 두 손목을 잡힌 채 올려지고, 그녀의 입술은 또다시 택의 입술에 막혀 버렸다.
그만 하자고, 이러면 안 된다고, 거절해야 한다고, 머리로는 아무리 외쳐대지만, 정작 덕선의 몸은 전혀 다르게 반응했다. 그의 입술이 달콤했고, 얽혀드는 그의 혀가 저릿했다. 덕선의 팔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니 사실은 택도 덕선도 알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대답하고 있다는 것을, 서로가 서로를 선택했다는 것을, 그리고 오늘 밤 서로가 서로의 남자와 여자가 되기로 서약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 선택의 순간에 택이 또다시 물었다.
“내가....널...사랑해도...돼?”
덕선은 신음처럼 대답했다.
“응.......”
덕선의 팔이 또다시 그의 목을 안으며 끌어당겼다. 그렇게 택은 남자가 되었고, 덕선은 여자가 되었다. 그리고 태초의 밤은 서로의 사랑을 담은 채 그렇게 흘러갔다.
덕선은 2달의 연수 기간을 마저 채우고 늦봄이 다 되어서야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해 6월 15일, 두 사람의 결혼 발표가 있었다.
물론, 택이는 메리어트 호텔에는 발도 디디지 않았고, 나흘 동안 덕선의 아파트 방을 벗어난 적도 없었다. 넉넉하게 챙겨 준 유 과장의 선물은 그 선견지명대로 아주 유용하게 잘 활용되었다. 덕선은 택이가 아파트에 찾아온 바로 다음 날은 아예 병가를 신청해야 했다. 그리고 셋째 날은 오전 교육은 빠지고 오후 근무만 겨우 설 수 있었다. 그 다음 날인 일요일 새벽에 택이가 비행기를 타고 돌아갈 때까지 두 사람은 아파트 안에서 나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 택은 월요일 오전 한국에 도착해서 그날 대국을 바로 치러야 했고, 당연히 질 수밖에 없었으나, 택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 있어 관계자들 모두가 놀랐다고도 한다.
택이가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한 달 동안 나온 국제전화비의 천문학적인 숫자에 그 선비 같은 봉황당을 소스라치게 놀라게 했고, 더 이상 견디지 못한 택이 한 달 후 또다시 비행기를 탔을 때, 봉황당은 이미 이 모든 상황을 눈치 채고 말았다. 그리고 덕선의 마지막 세 달째도 택이는 무리를 해서라도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겨우 대국을 비워 맞춰 둔 날짜에 하필이면 덕선이 미주 대표로 자회사 광고를 찍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못 가게 되면서 한동안 택이의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에도 광고로 얼굴이 알려진 덕선이 때문에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듯, 택이의 마음은 그토록 불안했다고 한다. 어쩌면 그 때문에 택이는 덕선과의 결혼 발표를 그토록 서둘렀는지도 모른다. 덕선이 돌아온 후, 보름이 겨우 지났을 때, 그렇게 빨리 기자회견을 한 걸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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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에 올렸던 선택상플 옮겨놓음.
7월말까지 갤에 <9.어.면과 번외편 pdf 파일> 올려뒀어요. 혹시 원하시는 분은 갤에서 다운받으심 됩니다.(but 비밀번호가 있으니, 갤의 내용을 잘 읽어주시길...)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reply1988&no=10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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