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의 왕녀> 2회 희(喜), 세상을 베어내다
2. 희, 세상을 베어내다.
10년 후...
좌지왕 10년, 417년...
난세...
“게 누구냐”
달빛에 날선 검 하나가 번쩍인다.
마봉산 근처 삿갓을 쓴 남자와 그를 따르는 듯한 무사가 그 소리에 멈춰섰다.
뒤에 서 있던 검은 띠의 무사가 칼에 손을 대자, 삿갓을 쓴 남자가 저지했다.
“그냥 지나가는 길이다.”
삿갓 사이로 예리한 눈빛이 번뜩이는 남자는 순식간에 주변 상황을 인지한다.
대여섯 명의 무뢰배들에게 한 여인네와 그 어린 자식들이 끌려가고 있었다.
“그냥 지나가는 길이라니 계속 그냥 지나가라.
경 치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가던 길 가는 게 신상에 좋을 거다.”
그들을 막던 한 무뢰배가 길을 터 준다.
“어떻게 할까요?”
낮게 속삭이는 검은 띠의 사내에게 삿갓을 쓴 남자는 냉정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가자.”
그 순간 또 다시 날아든 검 하나...
“나 참...보다 보다 이런 무뢰배보다 못한 놈들은 첨 보네. 불쌍한 애들 끌고 가는 이 자식들보다 그냥 지나가는 니네가 더 웃기는 놈이다. 니들이 그러고도 사내냐~~”
숨쉴 틈도 주지 않고 바로 삿갓 쓴 사내의 목으로 칼을 들이대는 묘령의 인물과,
“챙”
그 앞을 신기에 가까운 속도로 막아내는 검은 띠의 무사...
그 순간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 그만해. 일단 저놈들부터 처리하자.”
언니라고 부르던 그 여자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두건을 벗고, 목검을 들어 무뢰배를 겨냥한다.
“이것들이 쌍으로 미쳤나...그려...기집아들 오늘 경 한번 시게(세게) 치겠구마니라.”
한 판의 굿판이라도 벌어진 듯 화려한 몸놀림을 보여주는 두 여인네...
달빛에 한 판 춤을 추는 것 같다.
“내 참 쪽 팔려서 살겄냐? 쌔(혀) 확 깨물어 번지고 죽어삘란다...썩을 놈의 세상...기집아들한테 당허고 내가 내 명대로 살겄냐...”
터질 대로 터진 입으로 열 받아 죽을 듯한 절규를 뿜어내는 무뢰배들에게 한 방 쥐어 먹이는 “언니”라는 여자...
“입 닥쳐라. 으이그, 이것들을 그냥...
한번만 더 “기집아” 소리 해 봐.
니들도 기집아로 만들어 줄 테니...”
“실이 언니, 일단 풍인 영감 나오시라고 해. 쌀 몇 포대 빌려주고 사람 파는 짐승들 잡았다고...”
목검의 여자는 돌아서 뛰어가는 “언니”를 뒤로 하고 앞에 서 있는 두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삿갓을 쓴 남자...
두 여자를 마치 무희의 춤을 구경하는 듯이 쭉 그 자리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손을 대면 베일 듯한 시린 얼굴을 하고 입꼬리를 살짝 올려 비웃는 듯한 인상을 보여주며 그렇게 그 여자를 보고 있다.
“하~~, 이제야 누군지 알겠습니다. 희 공자...오랜만이군요.”
“여전하시군. 진 공주...임금님도 알고 계시오? 그대가 이렇게 야밤에 칼춤을 추는 것을...”
소리내지 않고 씨익 웃는 차가운 미소에 진의 마음이 얼어붙는다.
저치가 이 가락국의 대각간의 아들이란 말이냐?
최고의 용맹스러운 가라가야의 아들...장수란 말이냐?
불붙는 마음을 누그러뜨리려 눈을 감은 진이 다시 눈을 떴다.
“그래...공의 귀거래사...가...겨우 이거랬드랬소...오류 선생이 울고 가리다...”
여전히 차가운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희는 진을 스쳐 지나간다.
*
*
*
*
그래...그는 희라 하였다...
내 어린 시절 귀가 닳도록 들었던 그 이름 희...
이름을 부르면 휘파람 소리가 날 것만 같던 그 이름 희...
가라가야의 대장부...가라가야 최고의 아들...최고의 장수...
그렇게 들어왔다.
그가 돌아오는 날...가락국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리라....
그렇게 수 언니는 늘 노래하듯 말하곤 했지.
그런 그를 처음 본 건...
가락국이 아닌
고구려 국내성...
4년 전 거련을 만나러 간 길이었다.
여러 차례 밟아본 태왕의 땅...
그를 아끼면서도...그를 존경하면서도...
올 때마다 이리 가슴이 저린 태왕의 땅...
“진아”
사절단과 떨어져 국내성 안을 천천히 걷고 있던 진을 부르는 목소리...
“거련 오라버니!”
“오랜만이구나...”
진을 바라보는 거련의 눈길이 촉촉했다.
왜 저 눈빛이 아플까...
“이리 시정을 다니셔도 되는 겝니까?”
“뭐가 어떠냐? 진이 니가 이곳에 있는 것을...”
“대모님이 아시면 노발대발 하실 텐데요...”
“하하하...내가 아직도 어린 소년으로 보이는게냐...대모님은 걱정할 필요 없다.
우장군께 잘 부탁해 놓았으니...”
“여전하신가요? 두 분은?”
“그래...우장군의 몸에 아마 못해도 사리가 한 사발은 나올 것이다...하하하”
“나 참...그게 웃을 일입니까??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진이 니가 도와 줄 사람은 우장군이 아니라 나다...”
진은 짐짓 심각하게 자신을 보는 거련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내 사리는 아마 두 사발은 나올 것이야...”
“그만 하시지요...곧 즉위식입니다. 왕좌에 오르실 분이 이리 허투루 말씀하셔서야 되겠습니까?”
“네겐 허투루일진 모르나...나는 아니다...”
거련은 농담처럼 말을 던지고 저 앞으로 걸어 나간다.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당신의 인연이 될 수 없다는 걸...
태왕의 나라와 가락국이 이미 갈라서 있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제가 가락국을 버리지 않을 거라는 것도...
그것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 심각한 표정 지을 것 없다. 그냥 넌 진인 게야.
가락국의 공주도 무엇도 아닌, 그저 오류 선생의 집에서 하숙이나 하던 그 진인 게야.
그러니 마음 쓸 것 없다.”
따뜻한 미소와 가슴 아픈 말이 함께 어우러져 햇살에 부서져 내린다.
진의 마음도 그 사이로 부서져 내린다.
이미 둘은 즉위식을 앞둔 궁 앞에 서 있었다.
“너에게 소개시켜줄 사람이 있다.”
거련이 들어오자 궁 앞에 내관들이 줄을 지어 양옆으로 비켜서서 머리를 조아렸다.
그 사이로 두 남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한 사람은 신라의 눌지 왕자로 왜에 갔을 때 잠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그녀가 알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보라색 띠로 머리를 묶고 앞머리를 길게 내려 날카롭지만 깊은 눈매를 감추고 있는 신비로운 인물...
“아는 사이였더냐?”
눌지 왕자에게 예를 갖추는 진을 보며 거련은 잠깐 놀란다.
“왜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평안하셨는지요? 눌지 왕자님...”
“이곳에서 그대를 보리라 기대하고 있었소...”
야망을 담은 두 눈에 그윽한 미소를 띠우는 눌지 왕자의 시선을 놓치지 않는 거련...
“그 옆에 계신 분은 사실 알지 못합니다.”
진의 말에 눌지 왕자의 곁에서 묵묵히 앞을 보고 있던 귀공자가 갑자기 진을 향해 고개를 든다.
사람의 심장에 닿는 시선...
“아니, 같은 나라 사람인데도 모른다 말이오?
이 분이 바로 가락국 대각간의 아들, 수로 왕의 핏줄 희 공이 아니오?”
눌지 왕자의 말에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그렇구나...이 사람이 희 공이구나...그랬구나...
“아마 진 공주님은 아시지 못할 겁니다.
제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왜로, 동진으로, 고구려로 문물을 배워오던 터라...
가락국에는 거의 있지 못했습니다.”
정적을 깨고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들린다.
“자...곧 즉위식이 있을 겁니다. 모두들 식을 즐겨주시오.
진이 네 자리는 내가 따로 준비하였다. 조금 있다 내관을 따라 오너라.”
“네. 오라버니!!”
진은 힘내라는 듯, 거련을 향해 주먹을 꼭 쥐고 흔들어보였다.
그런 진을 귀여운 듯이 보며 웃다가 거련은 눌지 왕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눌지 왕자님은 저와 같이 가시지요. 신라 왕족의 대표로 즉위식에 참예하셔야 합니다.
내관들이 식의 절차를 안내해 줄 겁니다.”
진은 눌지와 함께 궁안으로 들어가는 거련을 향해 환하게 웃음 짓고 돌아섰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진은 멈칫 하고 말았다.
자신의 바로 눈 앞에, 희가 서 있었다.
“그대...그저 사랑놀음이나 하러 이곳에 왔는가...”
가라가야 최고의 장수 희의 살을 에는 듯한 말 한 마디가 가락국 공주 진의 심장을 도려냈다.
<동시 연재중>
* 네이버 웹소설 : http://novel.naver.com/challenge/detail.nhn?novelId=237996&volumeNo=2
* 북팔 웹소설 : http://novel.bookpal.co.kr/viewer?uid=61983&bid=5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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