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소설은 그랑블루님을 위해 써내려간 것입니다.
유난히 청명한 하늘이 끊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지는 곳, 서(瑞)국.
평평하게 펼쳐진 정갈한 땅이 바다에 닿아있는 곳.
그래서 대륙의 국가들은 이 곳을 미지(美地)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이 아름다운 땅을 몹시도 탑내었다.
그 이유에 대해 후세의 사가(史家)들은 대륙에서 바다건너 땅으로 진출하려는
야욕때문이라고 설명하였고,
미학(美學)에 심취한 이들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무엇때문이든 대륙의 강국들은 이 작은 나라를 끊임없이 침범하였고,
노략질하였으며, 그곳의 삶을 짓밟았다.
몇백년간 꿋꿋히 버텨온 서국의 명운도 이제는 다한 듯,
깜빡깜빡 꺼져가려 하고 있었다.
서국의 황제 조운은 노쇠하여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 하였고,
그에게는 자식이라고는 젊은 황녀 하나 뿐이었다.
서국의 마지막 황녀, 이녹.
그녀는 대륙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절세가인이었다.
대륙의 경훈(景薰)국이 서국을 정벌하려는 이유 중 하나가 이녹때문이기도 했다.
경훈국의 황제는 황녀를 자신의 여인으로 취하기를 몹시도 원하고 있었다.
서국의 북쪽지역에 위치한 황궁.
온통 금칠한 경훈국의 황궁에 비하면 초라해 보일 수도 있지만,
단청과 붉은 색으로 칠해진 벽들이 어쩐지 범접하기 힘든
위엄을 내뿜고 있었다.
오늘도 황궁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북쪽 국경을 경훈국의 도적패들이 침범하여
인근 마을을 약탈하고 있다는 소식이 황궁으로 날아들었다.
늙은 황제 조운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황실 수호대의 대장인 창휘는 그런 황제를 잠시 바라보다 물러나왔다.
아무래도 자신도 그곳으로 출병해야 할 듯 하다.
계속되는 침범으로 국경 수비부대 군졸의 수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앞장 서 국경을 향해 말을 달리던 창휘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뒤따르던 병사들도 영문도 모른 채 같이 멈춰섰다.
국경 마을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 창휘의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이미 한발 늦은 모양이다.
허탈해진 창휘와 수호병사들은 말에서 내려 멍하니 온 마을을 태우기라도
한 듯 계속 올라오는 연기를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마을을 뒤로 한 채 말 한 필이 이리로 달려오고 있었다.
말에는 너울을 늘인 원립을 쓰고 있는 사람이 타고 있었다.
이 곳은 궁으로 가는 길목이다. 어떤 자도 보내 줄 수 없었다.
병사들은 말 앞을 막아섰고 낯선 자는 그 자리에 멈추었다.
너울로 인해 낯선 자의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병사들은 원을 이루며 그 자 주위를 삥 둘러쌌다.
빠져나갈 길이 없어지자 낯선 자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병사들과 낯선 자는 서로를 경계하며, 한걸음 씩 움직였다.
휙. 낯선 자가 먼저 등 뒤에 맨 검을 빼내 가장 가까이 있는 병사를 노렸다.
기습을 당한 병사는 일단 뒤로 물러났다.
챙. 낯선 자의 정면에 있던 병사가 검을 휘둘렀으나 그 자의 검에 막혀버렸다.
뒤에 물러서 있던 창휘가 눈짓을 하자 병사들이 일제히 낯선 자를 공격했고,
그 자는 공중으로 뛰어오르며 검을 둥글게 휘둘렀다.
병사들은 공격을 피해 다시 뒤로 물러났고, 일제 공격을 당한 그 자는
지면에 착지하였다.
그리고 낯선 자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너울이 떨어져 내렸다.
낯선 자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주위를 둘러싼 병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황녀마마”
원립마저 벗어던지자 칠흙같이 검은 머릿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황녀 이녹이었다.
이녹이 얼굴을 들자 창휘도 서서히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검에는 온통 검붉은 피가 뭍어있었다.
검을 보는 순간 창휘는 이녹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오는지를 알았다.
이녹은 창휘와 시선이 마주치자 깊은 눈으로 그를 잠시 응시하였다.
“모두들 일어나라. 궁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녹의 말에 병사들은 자리에서 일어서 황녀의 뒤로 정렬하였다.
“다시는 이런 위험한 일은 하시면 안되십니다, 황녀마마”
이녹이 탄 말 옆으로 자신을 말을 몰며 창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백성입니다. 장군. 저는 그들을 지킬 의무가 있어요”
이녹은 앞쪽만 응시한 채 단호하게 말했다.
“황녀마마께서 백성을 지키는 방법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떤 방법을 써야 한 단 말입니까? 그 탐욕스러운 늙은이와 혼인이라도
하라는 그 얘기를 하고 계신 겁니까?”
이녹은 창휘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황녀마마! 그런 얘기가 아니오라...”
이녹은 창휘의 얘기를 더이상 듣지 않겠다는 듯 세차게 자신의 말을 걷어차더니
그를 남겨둔 채 저만치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황녀마마...”
창휘는 안타깝게 홀로 그녀를 나직히 불러볼 뿐이었다.
“다시는 그러지 마십시오”
황궁 내 이녹이 전용으로 사용하는 검술 연습터에 허락없이 드나둘 수 있는 자는
그녀의 검술스승인 창휘뿐이었다.
창휘를 돌아본 이녹은 그의 안타깝게 흔들리는 눈을 보자 더이상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대련하시겠습니까?”
창휘는 자신의 검을 빼어들었다.
“좋습니다”
이녹이 두 손으로 자신의 검을 단단히 잡고는 공격자세를 취했다.
“많이 느셨습니다. 이젠 더이상 제가 가르쳐드릴 것이 없는 듯 하옵니다”
대련이 끝나고 창휘가 자신의 검을 내려놓았다.
“아직 장군만큼 실력을 갖추려면 멀었습니다”
이녹의 시선은 창휘에게 머물러 있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이녹의 눈을 보는 순간 창휘의 본능은 그녀의 질문을 피하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창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변방 마을을 침입한 훈국의 패들과 대적하여 내 백성을 구한 것을
그렇게 걱정하는 것이 황궁의 수호대장으로써 황녀의 안위를 걱정해서입니까
아니면...”
이녹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잠시 머뭇거렸다.
“사내로써 나 이녹이라는 여인을 염려한 건가요, 휘?”
그녀의 입에서 휘라는 자신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창휘는 두눈을 감아버렸다.
자신이 듣지 말아야 하는 질문을 들었음을 알았다.
“그 둘이 어찌 다르다 생각하십니까?”
창휘는 최대한 즉답을 피하고자 했다.
“여러 해 전 제게 휘가 처음으로 검술을 가르쳐 주었을 때가 생각나요.
그때가 참 좋았는데...그때는 우리 서국도 이렇게 위태롭지는 않았는데...”
이녹이 창휘를 돌아보았다.
“저는 추호도 경훈국의 황제의 여섯번째 부인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제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알고 싶은 것이 그대 휘의 마음입니다”
이녹이 창휘에게 눈을 맞추었다.
“제 낭군이 되어주시겠습니까?”
이녹의 눈이 간절히 창휘의 대답을 원하고 있었다.
창휘는 자신의 심장이 요동치고 있는 걸 느꼈다.
“마마....”
창휘의 목소리가 바람에 흩어졌다.
“소장은...영원히 황녀마마의 수호무사일 것입니다..마마 저는 그저 유능한 무사일
뿐입니다. 이 나라 서국을 다스릴만한 자가 못 됩니다. 제가 황녀마마와 혼인을
한다한 들 제위를 이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휘...”
이녹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황녀마마께서는 이 나라의 다음 제위를 결정하실 유일한 분이시지 않습니까?”
창휘는 이미 충분히 국운을 책임지고 힘들어하고 있는 이녹에게 자신마저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무슨 변명을 한다한 들
그녀는 서국의 하나뿐인 황녀인 것을.
이녹은 소리없이 눈물을 흘려보내더니 이내 자신의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버렸다.
“저는 아바마마를 이어 다음 황제가 될 것입니다. 장군께서 도와주시겠습니까?
서국을 저 대륙의 마수로부터 지켜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여황제가 되는 것. 그것이 이녹의 결정이었다.
그것은 또한 여인으로서의 삶은 버리겠다는 것이기도 하였다.
“소장은 황녀...아니 황제폐하를 기꺼이 받들 것입니다”
그래. 이것으로 이녹과 자신의 아슬아슬한 관계는 끝이리라.
“나는 이 나라를 강한 나라로 만들고 싶습니다, 장군.
먼 옛날 우리 서국이 호령했다던 대륙의 땅도 되찾고 싶습니다.
가능하겠지요?”
그게 가능한 일이겠는가. 하지만 창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꿈꾸는 것조차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바마마”
이녹은 황제가 있는 대전으로 들어갔다.
“오, 이녹이구나. 어서 오너라”
노쇠한 황제는 늙은 몸을 일으켜 이녹을 맞았다.
“아바마마...”
이녹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결정하였구나. 잘 하였다, 잘 하였어”
그러나 부모란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 하여도 자식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다.
“아바마마, 소녀는 두렵습니다”
이녹의 목소리가 떨렸다.
황제는 이녹의 앞으로 걸어오더니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울지 말거라. 강해져야 한다. 앞으로 더 무서운 일들이 많이 일어날 것인데,
벌써부터 이리 울면 어찌하느냐?”
이녹은 쉽게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노쇠해져버린 황제의 모습이 꼭 서국의 모습 같이 느껴졌다.
“미안하구나, 이 아비가 미안해. 너한테 이런 짐을 지워서 정말 미안하구나..”
황제는 이녹을 품에 안아주었다.
이제 이녹은 서국의 황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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