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과 트라이앵글/강철과 triangle

강철이 트라이앵글(Triangle)을 꿈꾸다 5

그랑블루08 2009. 5. 11. 03:01

 

5. 준

 - 담배꽁초와 불량배


  

 

 

                         잠시 후면

          

                                          - 베로니카 A. 쇼프스톨 -

 

 

잠시 후면 너는

손을 잡는 것과 영혼을 묶는 것의 차이를 배울 것이다.


사랑이 기대는 것이 아니고

함께 있는 것이 안전을 보장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걸

너는 배울 것이다.


잠시 후면 너는

입맞춤이 계약이 아니고, 선물이 약속이 아님을

배우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면 너는 어린아이의 슬픔이 아니라

어른의 기품을 갖고서

얼굴을 똑바로 들고

눈을 크게 뜬 채로

인생의 실패를 받아들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내일의 토대 위에 집을 짓기엔

너무도 불확실하기 때문에

오늘 이 순간 속에 너의 길을 닦아 나갈 것이다.


잠시후면 너는 햇빛조차도 너무 많이 쪼이면

화상을 입는다는 사실을 배울 것이다.


따라서 너는 이제 자신의 정원을 심고

자신의 영혼을 가꾸리라.


누군가 너에게 꽃을 가져다주기를 기다리기 전에.

그러면 너는 정말로 인내할 수 있을 것이고

진정으로 강해질 것이고

진정한 가치를 네 안에 지니게 되리라.


인생의 실수와 더불어

너는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되리라.


 

<출처 http://cafe.daum.net/dydans0405/1i6A/292?ocid=19lyj|1i6A|292|20080424004350&q=Jesse+Cook+virtue&srchid=CCB19lyj|1i6A|292|20080424004350

: 강을 건너가는 꽃잎처럼, 디바리아님 시, 음악(Jesse Cook의 "Virtue") 펌.>





머리가 아프다.

아침을 한두 번 안 먹은 것도 아니고, 오늘따라 유독 아침을 먹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아버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뭐라고 소리를 지르든 말든 책가방만 들고 집을 뛰쳐나왔다.

오늘도 제일 일찍 학교에 도착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가방만 던져두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 학교는 건물이 희한하다. 세 건물이 ㄷ자로 되어 있었다.

오른쪽 긴 건물은 중학교였고, 중간 건물은 고등학교 1,2학년들, 그리고 왼쪽의 하얀 건물은 고3들 건물이었다.

고등학교 건물은 서로 이어져 있었는데, 서로 층수가 맞지 않아서 뭔가 들쑥날쑥하니 이상했다.

고3들이 쓰는 건물은 정신병동이라 불렀다.

오래된 건물이라 그때 그때 증축하다보니 이쪽 저쪽으로 교실이 덕지덕지 붙고, 계단도 여기 저기 붙어서 통일감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중간 건물과 정신병동 사이에는 뭔가 균형이 맞지 않게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붙어 있었다.

중간 건물에서 정신병동으로 넘어가려면 한 층의 반 정도 되는 계단을 올라가서 돌아 넘어가야 했다.

그러다 보니 그 계단의 옆면은 사각지대였다.

계단 옆면에 있으면 중간 건물에서도 정신병동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 옆은 창고처럼 부서진 책상이나 의자가 쌓여 있어서 얼핏 보면 공간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부서진 의자를 치우러 왔다가 우연히 발견한 장소였다.

그래서 1학년 때부터 내 자리로 삼았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 이 자리에서 시간을 보낸다.


CDP를 귀에 꽂고 언제나처럼 Jesse Cook의 기타 연주를 듣는다.

그 중에서도 난 유독 "Virtue"가 좋다.

무언가 우수를 느끼게 하는 가느다란 기타 소리...

물론 그것도 좋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아련한 슬픔에 빠져들만 하면 머리를 울려대는 냉철한 소리 때문이다.

감상에 젖고 싶다가도 그 소리는 자꾸 정신 차리라는 것 같았다.


뉴에이지 음악이네 뭐네 그런 건 난 잘 모른다.

그냥 필이 오면 좋다.

그렇다고 뉴에이지가 좋은 건 아니다.

그냥 이 곡이 좋다.

얼마 살아온 건 아니지만, 삶이 참 쉬운 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드는데, 이 음악은 꼭 인생이 그렇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애늙은이가 되어 가는지도 모르겠지만, 이 기타연주는 삶이란 다 그런 거라고 체념하는 듯하다.

아니다. 

삶이란 뭔가 조금 서글픈 듯도 하고, 여리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뭔가라고 보여주는 것도 같다.

그래서 자꾸 감상에 빠지게 되고, 연민에 빠지고 싶어진다.

그런데 이 냉철한 소리는 연민에 빠지려는 날 자꾸만 깨우는 것 같다.

너무 소리가 맑아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그래서 자꾸 정신차리고 싶어서 습관처럼 듣게 된다.


오늘도 이 곡을 들으며 내 자리로 간다.

계단 옆면에 등을 대고 앉으면 고즈넉하고 아담한 내 공간이 된다.

이쪽은 폐품들 때문인지 난간이 좀 부서져서 앉은 자리에서도 하늘이 정면에 보인다.

그것도 마음에 든다.

서 있지 않아도 조금만 얼굴을 들면 보이는 하늘.

난간 벽 군데군데 구멍이 나고 금이 가서 그 사이로 하늘이 비집고 들어오는 것도 좋다.

또 다시 벚꽃이 날리는 계절...

이곳에서 두 번째 봄을 보내고 있다.


부서진 난간 앞에 시멘트 부스러기인지 꽃잎인지 알 수 없는 허연 무언가가 보인다.

가져와 보니 담배꽁초다.

갑자기 머리가 확 서는 것 같다.


누가...또 온 건가...


이상하게 겨울 보충 수업 때부터인가 담배꽁초가 한번씩 보였다.

기분이 자꾸 상하려 한다.

어차피 내 돈 주고 산 내 땅도 아니니 어쩌겠는가 싶기도 하다.

그저 시간대가 다르기만 빌어야지.

그래도 다행인 건, 정말 시간대가 다른 것 같다.

이제 벚꽃은 다 지고 곧 초여름이 올 판인데 겨울부터 보였던 담배꽁초는 꽁초만 보일 뿐, 주인은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 꽁초는 생각보다 길었다. 덜 피우고 간 건지...

뭔 생각이 든 건지 나도 모르겠다.

내 자리에서 나와서 정신병동 옥상으로 올라갔다.

갈라진 벽 틈이나 부스러기가 흩어져 있는 바닥을 샅샅이 뒤졌다.


찾았다!!


오래된 듯한 라이터 하나가 버려져 있었다.

역시 정신병동은 고3들 건물이라 이런 것들이 산재해 있었다.

은근과 끈기로 수십 번을 켜보니 불이 올라왔다.

의기양양하게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꽁초에 불을 붙였다.

의외로 쉽지가 않았다.

라이터의 불도 잘 켜지지 않았고, 많이 남았다고는 해도 짧은 꽁초에 불을 붙인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결국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불을 붙였다.

치이익 하고 담배가 타들어갔다.

꼭 성냥팔이 소녀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소원이라도 빌어야 하나...

픽 웃다가 갑자기 이 꽁초를 입에 대 보고 싶었다.

삐뚤어진 놈이 된 듯해서 기분이 좋기도 했다.

천천히 입으로 가지고 갔다.


“뭐야? 정말 꽁초라도 피우겠다는 거야?”


입에 댈까 말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 낮은 음성이 옆에서 울렸다.

순간 나는 걸렸구나 싶어 꽁초를 버리고 바로 일어났다.

계단 벽과 폐품실 공간 사이에 실루엣만 보이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키가 무척 컸다.

우리 학교에 이렇게 키 큰 선생이 누구였더라 하며 쫄고 있는데 남자가 내가 있는 쪽으로 몇 걸음 다가왔다.

빛으로 나오자 그제서야 그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내 예상과는 달리 학생이었다.

넥타이도 없고 셔츠의 단추는 여러 개 풀어재껴 단정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 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인 건 틀림없었다.

배지도 하지 않고 있어서 몇 학년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내가 놀라는 걸 보더니 피식 웃었다.


“꽁초는 이렇게 제대로 밟아줘야지.”


그는 내가 떨어뜨린 꽁초를 발로 짓뭉개며 여전히 타들어가고 있던 불을 껐다.

그리고는 자기 담배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여차하면 도망가려던 나는 이거 뭔 상황인가 싶어 그를 잠시 봤다.

입술에 약간 조소 어린 미소가 보였다.


“피고 싶었던 거 아니야?

 새 거 주겠다구.”


나는 왠지 그 얄미운 미소를 보이는 이 남자가 짜증이 났다.

생각해 보니 자기나 나나 똑같은 상황이었다.

어차피 담배 피려 했던 거나, 담배를 가지고 다니는 거나 피우는건 똑같은 상황이니 내 쪽에서 쫄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공간을, 나만의 공간을 들켜버렸다는 것과, 저 불량한 놈과 이곳에 함께 있다는 자체가 짜증이 났다.

난 내게 담배를 내밀고 있는 그 남자의 손을 확 쳐버리고는 그곳을 뛰쳐나와 버렸다.

뒤로 약간의 웃음 소리 비슷한 것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아...정말 재수가 없다.

이제 그곳에 못 가는 건가...

이젠 어디서 시간을 보내지...


아!! 내 CDP!!

아까 라이터 찾으러 다닌다고 빼놓고서는 그냥 내버려두고 온 듯했다.

1교시 수업 마치자마자 바로 가봤지만, 역시나 없었다.


미치겠네.

CDP도 비싼 거지만, 무엇보다도 Jesse Cook의 기타 연주는 정말 구하기 힘든 건데...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사실 이 CD는 캐나다에 출장 다녀온 이모가 사 주신 거였다.

그게 너무 아까웠다.

누군지도 모르는 문제아 같은 녀석에게 그걸 고스란히 상납한 꼴이니...이건 열을 안 받을래야 안 받을 수가 없었다.

듣던 음악이 없으니 하루종일 멍만 때리고 있었다.


다음날 해가 뜨자마자 학교에 나와서는 옥상 내 자리에 죽치고 앉아 있었다.

그 놈의 양심을 믿어볼 요량이었지만, 자꾸 자신이 없어졌다.

나라도 CDP들고 가서 다시 안 오겠다.

 이름을 알아 학년을 알아...생긴 것도 영 기생 오래비에 가벼워보이는 것이...문제아에 불량배가 틀림없었다.


“불량배 같은 놈!!”


“뭐야...날 지금 그렇게 부르는 거야?”


“엇!!!”


불량배가 내 눈 앞에서 비죽비죽 웃고 있었다.

이놈의 상판때기, 특히 저 비웃는 듯한 미소가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른 줘요!!”


“뭘?”


“몰라서 물어요? 빨리 내놔요. 내 CDP!!!!”


“아....이거! 안 그래도 줄...”


난 불량배 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른손에 들려 있던 내 CDP를 확 뺐아 왔다.


“거...참...성질 참 급하네. 줄려고 왔다 잖아. 그걸 그렇게 확 빼 가냐?”


“받았으니 됐어요. 그럼...”


난 이 불량배 놈과 같이 있는 게 영 불편해서 바로 내려가려 했다.

그런데 통로로 나가려는 내 앞을 이 불량배 놈이 바로 막아섰다.

그냥 잘못해서 서로 막아섰다 싶어 오른쪽으로 가니 다시 내 오른쪽 앞을 가로막아 섰다.


이거 뭐야! 싶어 이 놈의 상판때기를 쳐다보니 역시나 그 재수 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다.


“지금 뭐하자는 거예요?”


“아니, 놓고 간 건 꽁초 니 책임이고. 근데 내가 가져다 줬으면 고맙다고 해야 할 거 아니야?”


“꽁초라뇨? 지금 날 꽁초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리고 아까부터 기분 나빴는데 왜 자꾸 말을 놔요?”


“이름을 모르니,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을 상기해서 너를 부르는 거고, 말 놓는 건 선배니까 당연한 거고.

뭐 불만 있어? 그렇게 고까우면 이름을 가르쳐 주든가.

그럼 이름 부르도록 노력해볼게.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됐거든요. 댁한테 그다지 가르쳐주고 싶지 않네요.

그리고 다시 만날 일도 없거든요.

어차피 선.배.님.이니까 정신병동에서 계속 생활하시든가요.”


난 명찰을 잘 달지 않는다.

지금도 교복 위 호주머니에 넣어두고 달지 않았다.

그냥 모르는 사람들이 내 이름을 알게 되는 게 싫었다. 오늘처럼 말이다.


“나 참. 선배님이라는 말을 그렇게 재수없고 싸가지없게 말하기도 참 어려울 거다.

그래서 이름을 네까짓놈에게는 알려주기 싫다. 이 말이군.

그러든가. 난 별로 아쉬울 건 없으니까.

앞으로 만나더라도 난 계속 꽁초라고 부르지 뭐.”


얼굴로 열이 확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어차피 저 불량배 놈과 다시 안 만나면 그만이다 싶어 더 이상 말대꾸도 하지 않고 그 놈을 밀쳐 냈다.

그러나 이 불량배 놈은 또 꿈적도 하지 않았다.


“비켜주시죠?”


“때가 되면 비켜주지.

 넌 꽁초로 불려도 상관없는지 모르겠지만, 난 아니거든?

 널 보니 댁 아니면, 불량배 놈으로 부를 것 같은데, 뭐 그리 달갑진 않고...

 그렇다고 너 같은 성질머리에 오빠라느니, 선배라느니 그렇게 부를 것 같지도 않고...

 차라리 내 이름 가르쳐 줄 테니 이름으로 불러라.”


“싫거든요? 어차피 만날 일도 더 없겠지만, 알고 싶지도 않구요.

 저 원래 이름 잘 기억 못해요.

 그러니 알려줘 봤자 저 몰라요.

 그럼, 빚은 청산하고 가죠.

 CDP 돌려줘서 고마워요. 됐죠?”


난 턱을 들어올리고 눈에 힘을 주며 그 놈을 노려봤다.

이번에도 안 비켜주면 저 턱을 한 대 패든가, 명치를 발로 까든가 해야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

근데 의외로 불량배 놈은 피식 웃더니 통로에서 옆으로 비켜섰다.

난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바로 통로 쪽으로 돌아 들어가려는데 그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꽁초! 난, 한준이다.

 다음에 만나면, 댁이나 불량배는 사절이다.

 준이라고 불러라!

 준! 이름 한 자 정도는 기억하겠지?”


난 지가 뭐라고 말하든말든 바로 내려와 버렸다.

내 자리에 다시 못 가는 건 안타깝지만, 그래도 다시 볼 일은 없을 테니 CDP나 찾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교실에 돌아와 이어폰을 귀에 꽂고 CD를 재생했는데 영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고장 났는가 싶어 CD 플레이어를 열어보았다.


“뭐야!! 이 불량배 놈!!!!”


안이 텅 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