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하진
- 죽거나 까무러치거나
“병원 갔다 왔다며?”
“......................”
“어이~~~!! 하진!! 이제 사람 말 생까는 거야?”
굉굉거리는 소음에 돌아보니 그 녀석이다.
하진은 본 체 만 체 하며 그 녀석을 무시해 버린다.
“뭐야? 아직 삐진 거야? 아니, 고파있는 후배 좀 적선해 줬다고 생각하면 되지. 그걸 그렇게 고깝게 생각하냐? 너무 하네 진짜!!”
그 녀석이 뭐라고 떠들든지 말든지 하진은 학교 안으로 급하게 걸어 들어간다.
“하진!!! 어이 진!!!”
앞서 걸어가던 하진이 갑자기 선다.
“다시 말해봐!!”
“어? 뭘?”
“뭐? 하진?”
“아....아니 누나!! 그게 누나가 내 말을 안 듣길래, 그래서 누나 대답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야. 에이...왜 그래, 우리 사이에...”
“우리? 우리 좋아하고 있네. 야! 이 자식아!! 너 한번만 더 기어오르면, 죽는 수가 있다!! 알았냐?”
“아..알았어. 누나. 에이...화 내지마. 누나 화내면 대따 무섭단 말이야. 화내지 마라...어?”
징그러운 나이에 애교라니...넉살 하나는 좋은 녀석이다. 아마 이 넉살이 없었다면, 이 녀석이랑 이렇게 오랫동안 볼 수도 없었겠지만...
“출판사 들어가는 거야?”
“응.”
“같이 저녁 먹을까? 내가 오늘 맛난 거 해 줄게.”
“됐네. 나 오늘 야근이다!!”
“하여간...그 따위 일은 왜 해 가지고....아..아니야. 누나...그러니까 누나가 넘 고생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저녁 때 내가 갈게. 알았지? 난 랩 들어간다!!”
녀석은 내가 별 말 하지 않아도 혼자서 알아서 떠들고는 가버린다. 저 녀석의 넉살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저 넉살에 귀찮다가도 안쓰러워지려고 한다.
소현이 기집애 때문에 오전을 그대로 날렸다. 늦그막히 들어간 사무실은 약간 살벌한 기운이 돈다.
아무래도 편집부장이 또 한바탕한 모양이다.
“다녀왔습니다.”
모기 소리만큼 작은 목소리로 나의 귀환은 알렸으나 편집부장은 혼자서 씩씩대며 책상을 쳐대고 있고, 웹디자인 담당 김실장 언니만 조용히 하라고 검지를 입술에 붙인다. 결국 편집부장은 혼자 씩씩 대다 담배라도 피우려는지 밖으로 나갔다.
에휴....
“언니, 또 왜 저래?”
하진은 그제서야 이실장에게 말을 붙여본다.
“뭐, 딴 게 있겠냐? 지 마음대로 안 되니까 저 난리지. 하여간 저 인간 성질 저거 안 죽이면 생고생할 거다, 아마.”
“어디 쪽이 삑사리 낸 거야?”
“뭐긴 뭐겠냐? 교양학부 교재 때문이지. 대충 가자고 하는데, 저쪽에서는 제대로 해 내라 그러지. 그쪽 책임 교수님은 보통 성깔이 아니지. 편집부장은 지 맘대로 안 되니 거의 지랄을 하지. 정말 우리만 죽어나가는 거 아니냐?”
“나 없다고 뭐라 그랬어?”
“너까지 불똥튀기에는 저쪽이랑 너무 세게 부딪쳤어. 조만간 아마 3차대전 일어날 거다. 아마.”
“에휴....괜히 우리만 죽겠구만.”
대학 출판부라는 곳은 말만 대학이지 정말로 영세 그 자체다. 출판부장은 일종의 보직이라 교수님들 중에서 돌아가면서 하게 된다. 내가 듣기로는 보직 중에서도 다들 다 하기 싫어하는 거라는데, 그나마 미대 교수님이 해 주셔서 디자인 하나는 예전보다 나아진 듯하다.
편집부장이라고 해 봤자, 조교 티오에서 빼온 거라 역시 승진이라고는 없는 아주 애매한 자리이고, 웹디자이너인 김실장 언니나 교정 담당인 나나 그야말로 비정규직이니 파리 목숨처럼 간당간당한 자리다. 대학 안에 있어서 함부로 막 잘리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처지가 나아지는 것도 없다.
나도 내가 이 자리에 있을 거라고는 대학에 입학할 때만 해도 몰랐다. 그 때는 국문학도로서의 꿈도 있었던 듯하다. 소설을 쓰고 싶다는 어쭙잖은 생각으로 국문과를 와서 대학원까지 갔지만, 어럽쇼. 이건 정말로 잘못된 선택이었다. 주구장창 프로젝트만 하다가 얼떨결에 박사 과정까지 근근이 밟아왔다. 그러나 박사과정을 마치니 박사 논문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박사 수료를 한다고 해도 강의도 없었고, 겨우 모교에서 강의 하나 할동말동이었다. 그 때 대학 출판부에 공채포스터가 붙었다. 돈 벌어야겠다는 일념으로 무작정 시험을 쳤다. 용케 붙어 버렸다. 결국 나는 대학원에서 지도교수님과 선배들에게 온갖 욕을 얻어먹으며 이곳으로 적을 옮겼다. 그리고 난 죽지 못해 살고 있다.
오늘도 정말 말도 안 되는 원고를 붙들고 맞춤법 교정하랴, 문장 고치랴 머리를 쥐어 뜯고 있는데, 공대 교수님께 전화가 왔다.
“나 공대 **과 ***교순데, 내 원고 교정 본 게 자넨가?”
“아...예 안녕하세요? 예, 접니다만, 무슨 일이신지?”
“자네. 무슨 생각으로 마음대로 고치는 건가? 자네가 책임질 수 있나?”
“예? 아...뭐가 잘못된 건지요? 교수님.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제가 고치...”
“아니!! 고치고 말고가 아니라 원래대로 해 놓게. 누가 교정을 보라고 했나? 대충 편집이나 하면 되지, 뭘 마음대로 고치긴 고쳐? 원래대로 해 놓게!!!”
뚜뚜뚜뚜....
상대가 일방적으로 끊었다는 효과음이 밖으로 새어 나왔는지 옆에 있던 김실장 언니가 기가 막혀한다.
“뭐야? 어느 인간이야? 몰상식하게. 소리소리 지르던데, 뭣 때문에 그러는데?”
“공대 교수님인데, 내가 잘못 고쳤대나봐.”
“나참!! 교정 봐주면 고마워해야지. 어디서 난리야. 정말. 자기들이 제대로 썼어 봐라. 우리가 새로 고치나. 한국어 문장도 제대로 못 쓰면서 꼭 티를 낸다니까.”
“아...진짜 짜증난다. 에휴...”
“너무 열받지 마라. 이게 한 두 번 있는 일이냐? 그냥 그러려니 해. 그리고 너무 많이 고쳐주지 마라. 넌 밤새워 실컷 고생하고, 먹는 건 욕뿐이니. 아예 해 주질 말라니까.”
“그래도...언니. 나 너무 열받아. 이게 말이 돼? ‘실행되어진다.’ 참.. 이건 그래도 나은 거네. 실행을 한글로라도 써서. ‘비쥬얼화해서 쇼로 보여지면, 리플레이가 썩세스한 것이다’란다. 이게 문장이야? ‘시각화해서 보여주면 제대로 재생된 거다.’가 훨씬 더 잘 알아먹겠다. 아예 영어로 쓰던가. 영어 독음을 한글로 옮기면 뭐하냐고? 정말 열받아 미치겠네. 하여간 유학파들 때문에 우리나라가 망한다에 올인이다. 정말!!!”
“그래. 나도 동감이다. 그리고 난 일단 인쇄소 쪽으로 가서 표지 디자인 확인하러 갔다가 퇴근 바로 할 테니까, 넌 좀 대충하고 집에 가서 쉬어라. 오늘 병원도 갔다온 애가.”
“아..병원,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니 걱정 마쇼. 근데 편집부장도 같이 가냐?”
“그래...죽고 싶다. 하여튼, 낼 보자.”
“응. 언니, 낼 살아서 보자.”
오후 여섯시. 편집부장과 김실장 언니가 인쇄소로 가고, 아르바이트생도 퇴근해서 이제야 사무실 안이 조용해진다.
하진은 이렇게 혼자 사무실에 있는 게 좋다. 출판사라고는 해도 대학 내 다른 건물들과 함께 있어서 학교 건물이나 다름이 없었다. 게다가 바로 앞 동은 컴퓨터공학과 건물이라 늘 밤새 환해서 무섭지도 않았다.
“똑똑”
그 녀석이다.
“넌 입으로 노크하냐? 그리고 들어와서 노크하는 애가 어딨냐?”
“거..되게 입 험하네. 맛있는 도시락까지 싸왔구만.”
“사 왔냐? 싸 왔냐?”
“싸 왔소!! 됐소?”
“원룸에 다시 갔다 온 거냐?”
“그래. 나 먹으려고 해 논 거 도시락 싸 왔다. 감동 좀 받냐?”
“너...말이 막 나간다?”
“그냥, 오늘은 좀 먹자!! 내 말버릇 한 두 해 이런가? 그냥 그러려니 좀 하지?”
“먹어보고 맛있으면 봐준다.”
락앤락에 담아 놓은 된장찌개를 먼저 한 입 떠 넣었다. 역시나 이 녀석표다. 다시 데웠는지 뚝배기 맛이 난다. 그냥 냄비에 끓인 건 이런 맛이 나지 않는다. 반드시 뚝배기에 끓여야 제 맛이 난다. 이 녀석은 그걸 아는 녀석이다.
“오늘 진찰 어땠어?”
녀석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 있다.
먹다 말고 녀석을 쳐다보았다. 녀석 답지 않게 눈에도 걱정이 담겨 있다.
“뭐가 걱정인데?”
“죽을 병인가 해서...”
“죽을 병이면 어쩔건데?”
“그럼, 누나 지금 사무실 모니터랑 노트북 나한테 적선하고 가라.”
“뭐얏!! 지금 이 누님이 죽을 병일지도 모르는데, 의리 없는 네 녀석은 한 몫 건지시겠다?”
“뭐! 발끈하는 걸 보니, 죽을 병은 아닌 거 같고...뭔데? 어디가 아픈 건데? 누나는 정신 외에는 다 멀쩡하잖아.”
역시 무서운 녀석이다. 바로 정곡을 찌르고 만다.
“그래, 그 안 멀쩡한 부분 때문에 갔다. 됐냐?”
“어? 뭐야!! 그럼 정말 정신과에 갔단 말이야? 진짜야? 누나가 정신과에 갔다고?”
“야~~ 아예 온 동네 광고를 해라. 그게 자랑이냐? 온데방데 다 떠들게!!!”
“그래도 너무 놀랍잖아. 누나가 정신과에 가다니? 병명이 뭔데? 뭐 때매 간건데?”
“뭣 때문에 갔겠냐? 연애하고 싶어서 갔다, 됐냐?”
“연애라니 뭔 소리야? 누난 연애하는 거 싫어하잖아.”
“그~~건!! 니 생각이고!!”
“아, 진짜!! 나 심각하거든!!!”
“내가 연애를 하겠다는데, 니가 심각한 건 뭐냐? 어쨌든 이 누님도 달라지겠다는 거지. 반드시!!!! 고쳐보고 말리라!!!”
“뭘 고쳐? 설마.... 불감증?”
하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석윤은 점점 불안해진다.
“뭐....이 의사가...부부 클리닉 이 쪽으로 정통을 했단다. 그래서 함 고쳐 볼라고. 그래서 세기를 주름잡는 카사노바가 될까 생각중이야.”
“뭐야? 누나 이미 카사노바거든? 수십 명의 남자 속을 시꺼멓게 만들어 놨으면 됐지, 뭘 또 어째?”
“어쨌든 난 생각을 굳혔어. 이 의사를 믿고 가기로 했거든. 어차피 내가 손해볼 것도 없고.”
“뭐야? 누나!! 여기 이상한 데 아니야? 요즘 이상한 의사들 많다는데, 환자들 상대로 성폭행도 하고....”
“아예 저주를 퍼부어라!! 그리고 너 말 참 잘했다. 어차피 느끼지도 못할 거. 느끼게 해 주겠다는 데, 한번 가보는 거지 뭐. 그리고 그 의사놈 돈도 많아 보이던데, 그 앞날 창창한 놈이 뭐가 아쉬워서 노처녀를 건드리겠냐? 어린 것들도 많을 텐데.”
“누나!! 진짜 왜 이래? 나 도는 거 보고 싶어?”
“쯧쯧...넌 그 오지랖...좀 줄이는 게 어떠냐? 하기야, 네 녀석이 이 오지랖이 없었다면, 내가 널 곁에 뒀겠냐. 의리 빼면 시체라고 말해주마.!!”
“나 참, 의리 빼도 많거든. 잘 생겼지, 키 크지, 똑똑하지, 집안 좋지...”
“고까이 해라. 확 엎고 싶으니까...”
하진은 터프하게 밥만 푹푹 떠먹고 있다.
정말...고쳐질 순 있는 걸까...
아니, 정말 고쳐야만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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