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우 이야기 12-사랑도 살아가는 일이다
1
내 품 속에 있는 아이의 몸이 떨고 있다.
어서 여기에서 나가야 한다. 아이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그리고 저기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황태경을 위해서도...
“저는 제 여자친구를 공개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갈 수 있게 비켜 주십시오.”
그런데 내 앞 바로 앞까지 온 황태경이 내게 자신의 자켓을 건넨다.
황태경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다.
저 녀석도 나와 같은 마음일 테니.....
난 황태경의 옷으로 아이의 머리를 덮고는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안전요원들의 도움으로 별 무리 없이 분장실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분장실로 들어와 문을 잠근 순간부터 더한 긴장감이 몰려온다.
이곳에는 나와 아이, 둘뿐이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생각이 새하얗게 변해 버린 듯하다.
“ 죄송합니다...저는 사실 남자가 아닙니다...”
내가 당황하고 있는 동안 아이가 먼저 말을 걸어온다.
여전히 태경이의 옷을 덮어 쓴 채로 목소리만 내고 있다.
“지금... 저를 보시면... 많이 화나실 겁니다. 용서 해 달라는 말씀도 못 드리겠습....어!!”
난 아이의 머리 위에 씌어 있는 옷을 벗겨버렸다.
죄지은 듯이 잘못하다가 들킨 어린아이처럼 아이는 주눅이 들어 있다.
내 눈과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숙여버리는 아이는.......아이가 아니라, 여자였다.
강신우와 고미남양의 첫 만남인 건가.
적어도 고미남양에게는.....
“너무 갑작스럽게 닥친 일이라, 너한테 무슨 말을 먼저 해야 될지 모르겠다.
이런 상황은 대비를 못 했거든.”
자꾸 당황하게 되는 마음을 숨기려 약간 장난스럽게 말을 건네 보지만, 아이는 여전히 고개만 푹 숙이고 있다.
“먼저 화를 내는 게 맞나?
바로 괜찮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겠지?”
혼잣말인 것처럼 아이를 떠보니, 아이는 이제 대역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이의 옆모습을 찬찬히 살펴본다.
옅은 화장이 더욱 아이를 여성스럽게 보이게 한다.
“음..... 너, 여자였어? 정말 어이가 없어서!!”
아이를 위해, 당황한 나 자신을 위해 화난 척 해 본다.
스스로 정말 잘못했을 때는 야단맞지 않으면 더 불안한 법이다.
그런 아이의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
그렇다면 약간의 화로 아이의 마음에 평안을 주어야겠지.
“어이가 없으실 겁니다.”
“확실하게 다시 보자. 고개 좀 들어 봐!”
아이는 주저주저하며 얼굴을 들어 나를 본다.
아이의 맑은 눈을 보는 순간, 내 가슴이 떨려온다.
난 처음으로 여자인 고미남과 마주 선 거다.
그렇게 마주 하고 싶었던 고미남 양.
그러나 이렇게 이러한 자리에서 마주하게 될 줄을 정말 몰랐다.
“정말 여자네! 참~ 예쁘네! 어떻게 그동안 내가 몰랐지? 미남이 너 어설픈 줄 알았는데 대단하다.”
“아무 것도 모르고 저한테 잘해주셨는데, 감쪽같이 속여서 죄송합니다.”
감쪽 같이라는 말에 터질 뻔했다. 하마터면 들킬 뻔 했다. 아이는 정말로 자신이 감쪽같이 속였다고 생각할 텐데...... 그 마음을 저버릴 수도 없고, 어떻게든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헛기침으로 간신히 막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나중에 천천히 듣기로 하고, 어쨌든 고미남!”
너한테 좋은 형 노릇은 이제 끝났어.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나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강신우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고.미.남.양!!”
“예?”
“잘 부탁한다구요. 아.가.씨!”
“시..신우 형!!!”
“이제 형 아니지. 난 이제 좋은 형!! 안 한다니까?
그리고 언제까지 내 손을 허공에 띄어둘 건데?”
“어어...죄송합니다. 시..신..우...형...아니.....아....뭐라 그러지....”
아이는 어설프게 나와 악수를 하면서도, 혼자 고민하며 눈을 굴리고 있다.
“풋! 미남양. 할 수 없네. 당분간은 신우 형이라고 불러도 돼.
그러나 계속은 안 돼!
어쨌든 난 내 마음 속에서 너의 형이 되는 걸 버렸으니까....”
“신우 형......”
아이의 눈이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애처롭다.
아직도 이 아이는 내 말 뜻을 알지 못하는 듯하다.
“잊었니? 너! 내 여자잖아. 이제 전국에 알려질 텐데?
그러니 내 여자의 ‘좋은 형’은 될 수 없잖아. 안 그래?
‘좋은 남자’라면 모를까......”
“예예? 시..신우...형!!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갑자기 밖이 시끌벅적하다.
문소리가 나면서 제르미가 문 열라는 소리가 들린다.
“강신우와 ‘내 여자’와의 대화는 여기까지네.”
멍하니 날 보는 미남이를 내버려두고는 문을 열었다.
태경이와 제르미가 굳어진 표정으로 들어온다.
미남이를 아래 위로 훑어 보는 제르미를 보니 확실히 충격을 받은 듯하다.
“보다시피 고미남은 여자야. 나는 미리 알고 있었어, 다들 속인 거 미안해.
이 상황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으면 지금 말해. 너희들 끌어들이지 않고 고미남은 내가 책임질게.”
“난, 이미 뛰어 들었어.”
“신우는 됐고. 제르미 넌?”
태경이의 물음에도 제르미는 쳐다도 보지 않고 고미남에게 다가간다.
“고미남, 니가 여자라구. 여자였어!”
“미안해요 제르미...”
또 나왔다. 석고대죄 상태의 고미남.
제르미의 얼굴이 너무 심각해서 나까지 긴장된다.
“고미남 너... 나는 그것도 모르고...”
고미남 바로 앞까지 간 제르미는 갑자기 미남이의 어깨를 잡고 이마에 뽀뽀를 해 버린다.
헉!
“고미남! 여자였구나!! 나는 정말 좋아!!!”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제르미를 보니, 괜히 내가 미안해진다.
녀석........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다.
미남이가 남잔 줄 알고, 꽤 속을 끓인 눈치다.
내가 마실장님과 왕코디 누나를 불러와서 결국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을 냉철하게 정리하는 건 역시 황태경이었다.
“고미남. 이제 우린 다 한편이야. 니가 오늘 여기까지 온거 아무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고 했지.”
태경이의 말에 미남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길 바라면 남자인 고미남으로 끝까지 가. 이젠 니가 그만 두고 싶다고 해도 우리가 그렇게 둘 수 없어.
우리도 너에 대한 책임을 질테니, 너도 우리에 대한 책임을 져.”
“형님...”
“앞으로 잘 부탁한다 미남아.”
“신우형”
“나 책임져야 돼 고미남.”
“제르미...다들 너무 고맙고 죄송합니다.
끝까지 들키지 않게 책임지겠습니다.”
미남이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녀석도 마음 고생이 심했겠지.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고는 안사장님이 들어오셨다.
“강신우!!”
안사장님이 화가 난 듯하다.
“죄송합니다.”
미안한 듯 미남이가 나를 바라본다.
난 입 모양으로 괜찮다고 만들어 보인다.
그래도 아이의 눈이 날 향하고 있으니......참.....좋다.
안사장님이 미남이를 데리고 나가고 상황은 정말 일단락이 되었다.
문을 나가려다가 태경이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태경이의 눈이 수많은 의문을 품고 있다.
그러나 늘 그랬던 것처럼 모르는 척 하기로 한다.
“잘 넘어가서 다행이다.”
나는 평상시의 강신우로 돌아와 황태경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 덕분에 잘 넘어갔어.”
역시 황태경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제자리....
이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을지 모른다.
나도, 아이도, 그리고 황태경도.......
그냥 아무 일이 발생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할 뿐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황태경도 안다.
뭔가가 변했다는 걸......
그것이 언제, 어떻게, 어떤 식으로 드러날지 그건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변했다는 것 자체만은 우리 모두에게 뚜렷하게 각인되고 있었다.
2
내 손에, 내 가슴에 아직도 아이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다.
뭔가 심각해 보이던 풍경.
마트에서 미남이가 넘어질까봐 잡아주다가 거의 안아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 때의 황태경의 표정은 질투하는 남자의 바로 그것이었다.
내 품에 안긴 아이는 황태경과 나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아이가 황태경에게 뭔가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인지......
황태경의 아까 모습은 날 늘 의심하게 만든 그 표정이었다.
내가 아는 황태경은 적어도 두 여자를 품지 않는다.
적어도 그 녀석은 깔끔하다.
감정을 그리 너저분하게 흘리지 않는다.
유헤이와 사귄다는 그 녀석이 미남이를 바라볼 때마다 늘 그 표정이 마음에 걸렸었다.
정말 이상했었다.
유헤이의 태도도 정말 이상했다.
분명 사랑하는 이를 가졌는데도 불안해 보이던 유헤이가 이제야 이해가 된다.
미남이를 감싸주기 위해 공갈로 사귀는 척했다...라.....
황태경이. 저 자기중심적인 인물이 미남이를 위해 그런 귀찮은 일을 했다?
점점 불안하다.
그러나 인간은 참으로 이기적이다.
그 와중에도, 난 내 품에 안겼던 아이 때문에 아직도 두근대고 있다.
전화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발신자를 보고는 정신이 번쩍 든다.
아버지다.
벌써 이렇게 빨리 아신 건가.......
“예, 아버지.”
“너, 지금 뭐하는 거냐?”
“....................”
“정리하라고 했더니, 더 일을 치고 있어?
어떻게 된 거야?”
“죄송.......합니다.”
“내가 지금 그 말을 듣자고 전화한 줄 알아?
무슨 상황인지 나를 납득시켜 봐! 지금 당장!!”
“조만간.....내려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몇 몇 신문사에는 손을 썼지만, 워낙 공개적으로 터트려서 수습도 안 돼!
좋다.
이걸 어떻게 수습할 건지, 또 신우 니 계획은 뭔지 내려와서 듣기로 하겠다.”
달칵.
전화가 끊겼다.
끊어진 전화를 들고 한참을 그냥 서 있었다.
아버지는 내게 묻지 않은 것이 있다.
그리고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걸 묻지 않으실 거라는 걸......
그런 것들은 관심 밖이시라는 걸........
다시 전화가 울린다.
“어...머니......죄송해요.”
“신우야, 괜찮니?”
어머니가 괜찮냐고 물으신다.
어머니, 당신께서 물어주시니 그제서야 내가 안 괜찮다는 생각이 듭니다.
“......네....”
그러나 난 반대로 대답해 드린다.
“아버지.....전화 하셨지?”
“네.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아버지 뵈러 내려 올 거니?”
“예.”
“그래, 그렇겠지. 아버지 이해해 드려라.
늘 앞만 보며 사시는 분이니까 마음 상했더라도 풀고....응? 신우야?”
“저.....어린애 아니에요. 걱정 마세요.
근데......어머니, 다리는 괜찮으세요?
날이 추워져서......”
“괜찮아. 신우야.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그리고 그 아가씨...말이다.”
“.........!........”
어머니의 그 아가씨라는 말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같이........와 줄 수 있겠니?
한번........보고 싶구나.”
“어...어머니........”
“신우야. 이 엄마는 말이다.
솔직히.......많이 기쁘다.”
“.................”
“우리 신우. 이제 정말로......남자가 되었구나 싶어서 말이야.
그리고.......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밝힐 수 있는 니 마음이 정말 장해.”
“어머니........”
어머니의 말에 내 속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무언가가 울컥 하고 올라온다.
“알지? 신우야. 엄마는 우리 신우가.......아버지처럼 살까봐.....아니다. 아니야. 미안하다.
그냥 너무 다행이야. 엄마는 정말 기뻐.”
어머니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안다.
내가 아버지처럼 살까봐 걱정하셨다는 거.....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내가 얼음처럼, 마치 심장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어머니에게는 그렇게 가슴 아프셨던 거다.
어머니와의 전화를 끊고 나서야 아버지가 나에게 무엇을 묻지 않으셨는지 분명히 알게 된다.
아버지는 내가 미남이와 정말로 사귀는 건지, 내가 정말로 미남이를 좋아하고 있는 건지 전혀 묻지 않으셨다.
그건 내 마음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는 아버지만의 생각이신 거다.
어머니 역시 묻지 않으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냥 믿으셨다.
그냥.......나를.......내 말을.......믿으셨다.
추호도 의심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바로 어머니께서 세상을 사는 방법이다.
내가 결코 따라가지 못할, 때로는 그것 때문에 열 받고, 때로는 그것 때문에 가슴 아프고, 그리고 때로는 그것 때문에 죄송한......
어머니의 사랑법이다.
3
“신우 형! 여기 계셨네요.”
미남이가 나를 보자 뛰어온다.
내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더니 미남이의 얼굴이 굳어진다.
“신우 형!!!! 지금........”
“어? 미남아.....”
아이가 내 눈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서 있다.
“왜 그래, 미남아......”
아이가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자 이상하게 긴장이 된다.
도대체 뭔 일인 건지......
그래서 어설프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웃지 마십시오!!”
단호한 아이의 말이 날 얼어붙게 만든다.
“미...남..아......”
“그렇게 웃지 말란 말입니다.
즐겁지도 않으면서, 왜 웃고 계시는 겁니까?
왜 눈물 흘리면서 억지로 웃으십니까?”
눈물? 내가?
아이는 입술을 깨물더니 내 턱으로 손을 가져다 댄다.
아이의 부드러운 느낌에 나는 또 짠해지고 만다.
아이의 손가락에는 투명한 물방울이 맺혀 있다.
내가.....울고 있었나?
“다......저 때문입니다.”
아이의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황망해진다.
“무슨 소리야? 이건.....이건.............나도 모르게......
어쨌든 너랑....... 아무 상관없는 일이야.
내 개인적인 일이야.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마.”
“신우 형. 정말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오해까지 받고, 괜히 신우 형이 사람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하게 해서.....정말 죄송합니다.”
“미남아.....”
아이의 표정이 정말 심각하다.
생각이 복잡하게 엉킨다.
아버지의 말씀도, 어머니의 말씀도.......
지금 아이의 말도,
모든 것이 내 머리 속을 둥둥 떠다닌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밝힐 수 있는 니 마음이 정말 장해.....
어머니의 말씀이 자꾸 내 가슴을 찌른다.
적어도 어머니께만큼은 정직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사실 이 못난 아들은, 사람들 앞에서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도
마음을 당당하게 밝히지 못했습니다.
이 아들, 아직 남자가 아닙니다.
적어도 어머니께만은 정직해야겠지요?
적어도 어머니를 뵈었을 때, 다른 이를 보는 사람 앞에서 당당하게 내 마음을 밝혔노라고 그래도 괜찮노라고 말씀드려야겠지요?
그리하여 난 다시 연기를 시작한다.
“그러게 다들 그 여자가 누구냐고 날 너무 괴롭히네.”
갑작스런 내 말에 아이가 당황하며 미안해 한다.
아까까지 웃지 말라며 당당하게 외치던 아이는 어느 새 사라지고 없다.
“괴로우실 겁니다.”
“뭣보다... 내가 좋아하는 애가 괴로워하네.”
“그 분한테도 너무 죄송합니다.”
아이는 다시 석고대죄 상태로 돌아가고 있다.
“신우 형은 좋아하는 여자분도 계신데 저 때문에... 죄송합니다.”
“이제라도 그 여자한테 모든 걸 얘기하고 오해를 풀어줘야겠지?”
“그렇게 하십시오.”
“미남아, 필요하다면 그 여자한테 가서 해명 해줄 거야?”
“그래야죠, 저 때문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백 번이라도 해명 해야죠.”
“진지하게 해명의 자리를 마련해야겠네. 너 꼭 같이 가줘야 된다.”
“네. 그러겠습니다.”
그래, 적어도 강신우.
어머니께는 당당하게 말씀드려야지.
혼자 끙끙대다 끝낸 건 아니라고, 적어도 말씀은 드려야지.
4
오랜만에 운동하러 나오니 참 좋은 듯하다.
복잡하던 머리도 조금은 맑아진 느낌이다.
“편은, 내가 미남이랑 한편 하면 되겠다. 괜찮지 미남아?”
“저는 잘 못 치는데 괜찮겠습니까?”
“난 괜찮아.”
“그럼 저도 괜찮습니다.”
아이가 해맑게 웃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까지 해맑아지는 느낌이다.
“고미남 저리가. 신우, 내 편.”
갑자기 황태경이 끼어들더니 초등학생처럼 심술을 부린다.
“그렇게 되면 팀 차이가 많이 나는데.”
황태경은 이미 내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뭐가 배알이 꼬였는지 강스매싱으로 미남이만 집중 공격하고 있다.
배드민턴 공은 거의 화살처럼 미남이에게 내리 꽂히고 있다.
난 보다 못해 공을 뺏아서는 미남이에게 넘겼다.
“미남아 받아 봐.”
미남이는 의외로 내 공을 받아내고 있다.
처음 치고는 잘 치는 듯하다.
“봐, 살살하니까 고미남두 잘 하잖아.”
제르미도 좀 열받았는 듯, 태경이에게 한 소리 해댄다.
미남이와 공을 치고 있는데, 갑자기 태경이가 끼어들더니 미남이의 공을 땅으로 확 내리 꽂아 버린다.
“너, 내가 준 공 한 번도 못 받아 넘겼지. 그것도 못 하냐. 넌 어떻게 잘하는 게 하나도 없냐. 끝났으니까 가자.”
“다른 걸로 하면 저도 잘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잘 하는 게 있습니다!”
황태경, 완전히 초딩이다.
좋아하는 여자 아이 괴롭히는 초딩.
오기가 발동한 아이는 철봉에 매달린 채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지간히 자존심이 상했나보다.
태경이와 미남이를 보니 참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제가 다른 건 잘 못해도 매달리기 버티기 이런 건 잘 합니다. 제가 자란 곳에서 남자애들도 다 제치고 제가 일등이었습니다.”
“대단한 거 알겠으니까 그만하고 내려와 힘들겠다.”
걱정이 되어 말해 보지만, 미남이는 어림도 없다는 표정이다.
“저 더 버틸 수 있습니다.”
“저런 거로라도 잘 보이고 싶나...눈물겹다 돼지토끼.
야, 잘 한다 됐지? 그만 내려와.”
“제가 더 참겠다는데 형님이 왜 끼어드십니까.
전 끝까지 참을 수 있다는 거 보여드리겠습니다.”
미남이는 정말 단단히 골이 난 듯하다.
저런 모습도 처음 보는데....
어지간히 약이 오른 듯하다.
제르미가 그 앞에서 갖은 아양과 애교를 다 떨어도 꿈쩍하지 않는다.
태경이와 미남이의 상황 그대로 지켜보기도 힘들다.
아직까지도 어린애처럼 구는 태경이를 위해서도, 또 어머니를 위해서도 이제 뭔가를 보여드려야 할 것 같다.
“태경이 말도 안 먹히고, 제르미가 웃겨도 안 되고. 그럼 내가 한 번 해볼까?”
“신우 형이 뭘 하셔도 저는.......”
난 아이의 이마 위에 그대로 내 입술을 갖다 대었다.
내 입술에 아이의 향내가 그대로 배는 것 같다.
입술을 떼고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눈으로 말한다.
어머니에게 부끄럽지 않게, 지금.....천천히 고백한다.
‘사.랑.해..........’
내 눈에 내 심장의 이야기를 담아서 아이에게 보내었다.
내 눈이 조금은 떨리는 것 같다.
내 입술도 약간은 떨리는 것 같다.
그러나 정직하게 내 눈에 내 마음을 담는다.
한참을 내 눈을 바라보던 아이의 눈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아이가 툭....하고 땅으로 떨어진다.
“형! 그건 반칙이잖아!”
또 이 어색한 상황의 구원자는 제르미다.
“그런 규칙 없었잖아.
미남이 너, 나한테 진 거다.”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아이의 얼굴이 많이 굳어 있다.
내 손도 잡지 않은 채 혼자 일어난다.
“신우형! 많이 놀랬습니다. 이런 장난은 하지 마십시오.”
“장난 아닌데......내기였잖아. 내가 승부욕이 강하거든.”
“형! 고미남 놀래게 하지마! 고미남 니가 졸리 잡구 가!”
아이는 졸리 목줄을 잡고 가면서 어색하게 내 얼굴을 한번 쳐다본다.
난 최대한 담담하게 아이를 보고 웃어준다.
그런데도 아이의 얼굴은 영 굳어 있다.
“갑자기 너무 놀래켰나... 앞으로 더 놀라게 할 건데...”
아이의 놀란 얼굴이 자꾸만 마음에 걸리지만, 후회는 하지 않기로 한다.
어쩌면 내게 그리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어머니께, 어머니의 믿음 앞에서 정직하고 싶다.
어머니의 말씀처럼.......저 당당하게 표현했다고, 세상에도, 내 여자에게도, 당당했다고......
그렇게 정직하게 말씀드리고 싶다.
미안하다. 미남아.
그러나 후회는 하지 않아.
인간은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가 있다지.
물러나야 한다면, 물러날 때가 된다면, 그렇게 할게.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내 심장이 나아갈 때라고 말하고 있어.
그러니.........용서해.........
널........내 심장에 담아 버려서.........
미안해...........
사랑도 살아가는 일이니까.......
사랑도 골짜기 물 흐르듯이 그렇게 작은 물소리로 쉬지 않고 흐르며 사는 일이니까........
그러니까.......날.......용서해.
널 사랑하는 날........용서해.
사랑도 살아가는 일인데
도종환
꽃들은 향기 하나로 먼 곳까지 사랑을 전하고
새들은 아름다운 소리 지어 하늘 건너 사랑을 알리는데
제 사랑은 줄이 끊긴 악기처럼 소리가 없습니다.
나무는 근처의 새들을 제 몸 속에 살게 하고
숲은 그 그늘에 어둠이 무서운 짐승들을 살게 하는데
제 마음은 폐가처럼 아무도 와서 살지 않았습니다.
사랑도 살아가는 일인데
하늘 한복판으로 달아오르며 가는 태양처럼
한번 사랑하고 난 뒤
서쪽 산으로 조용히 걸어가는 노을처럼
사랑할 줄을 몰랐습니다.
얼음장 밑으로 흐르면서 얼지 않아
골짝의 언 것들을 녹이며 가는 물살처럼
사랑도 그렇게 작은 물소리로 쉬지 않고 흐르며 사는 일인데
제 사랑은 오랜 날 녹지 않은 채 어둔 숲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마음이 닮아 얼굴이 닮아 오래 묵은 벗처럼
그렇게 살며 늙어가는 일인데
사랑도 살아가는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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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오늘도 많이 길어졌습니다. 새로운 내용들이 점점 늘어나게 될 것 같습니다.
늘 읽어주시고 격려해주시는 님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님들의 댓글만 받고 감사하다는 말씀 못 전해드려서 마음이 좀 그랬답니다.
제 글에 제가 댓글을 막 달기도 뻘줌하고 해서 <신우 이야기 11>에 답글을 달아두었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새로운 일주일도 힘차게 시작하시길......
<미남텔존 소설게시판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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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칼 | 사랑도....살아가는일이다.... | [2009-11-29] | |||
ru | 이렇게 아픈 사랑이 언제 올지 알 수만 있다면, 전 아마도 피했 겁니다... 하지만, 알 수 없 었기에, 신우도 아픈 것이고... 저 자신도 아픈 것이겠죠... 이별이 예정된 사랑을 한다는 것 은.. 심장에 칼을 하나 더 꽂는 것..이겠죠 | [2009-11-29] | |||
ru | 이 칼을 뽑으면, 피 흘리다 죽을 것이고... 오직 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사랑없는 이 세상 을 살기 위해 그 칼을 뽑지않는다면, 그 고통을 참아내야 하는 것이겠죠... 이 심장이 더이 상 통증을 느끼지 못하도록 무디어지는 그날까지...ㅠㅠ | [2009-11-29] | |||
Ryeong | 여,역시 제 소설에 대해서 엄청난 내공..ㅇ<-<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군여..ㅠㅠ 잘봤습니다 ㅠㅠㅠ | [2009-11-29] | |||
하얀나라 | 엉엉ㅜㅜ 많이 기달렸습니다~제가 가장 아끼는 11회를 오래오래품고 볼수있게 써주셔서 무한 감사드려요~~블루님 추운날 건강조심하셔요 | [2009-11-29] | |||
하얀나라 | 참, 어느분이 댓글에 '가락국의 이녹'을 달아놓으셨길래 찾아봤더랬죠^^ 제가 쾌홍도 참잼있 게 봤었는데 그땐 텔존이 있는지몰랐거든요 글고보니..저 블루님 스토커같네요ㅎㅎㅎ | [2009-11-29] | |||
free1017 | 본방은 편집된 내용이 많은거 같더라구여~ 그래서 아쉬웠는데...블루님의 글을 보며 미남에 대한 신우의 마음이 어떨지 알게 되어 기뻐요~ 글쓰시느라 힘드시겠지만 힘내시라는 말밖에 해드릴수 없네요ㅠㅠ | [2009-11-29] | |||
웃음향기 | 그랑블루님! 최고예요 | [2009-11-29] | |||
carpediem | 전 그냥 묵묵히 기다릴뿐...신우이야기 완결될때까지 열심히 기다리겠습니다. 감정의 소소함 이 담겨있어 내가 마치 신우가 된냥 가슴이 아리네요. 지독한 짝사랑... | [2009-11-29] | |||
eann | 외출했다 들어왔는데 그랑블루님 글이 있어 어김없이 답글을...이번 편도 즐겁게 봤습니다. 미남에 끌려 소설북도 샀는데 처음엔 그냥 지밌기만 했는데 자꾸 진지해진다고 둘러대며 말 하는 부분에서 미남이에 대한 신우의 감정 표현이 그랑블루님 소설을 떠올리더라구요.^^ 앞으 로도 쭉 즐겁게 보겠습니다. | [2009-11-30] | |||
하늘사랑 | 잘 봤습니다. 신우의 가슴앓이가 드라마에서는 잘 표현이 안돼 있던데 님께서 드라마에서 표 현하지 못한 부분 많이 써 주시기를~~ | [2009-11-30] | |||
신혼새색시 | 신우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잘 보고 갑니다..^^ | [2009-11-30] | |||
가을나무 | 일상의 기다림이 참 오랫만입니다 .......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2009-11-30] | |||
someday | 그라블루님... ㅠㅠ 우리 신우의 마음이 가슴에 파바박 와닿네요... 아프지만... 항상 기다리 고있답니다. ^^ 우리 신우의 마음을 전해주시는 그랑블루님 감사해요. | [2009-11-30] | |||
뜨는돌 | 그랑블루님 감사합니다..... 전 신미라인 포기 못하겠어요 | [2009-11-30] | |||
몽이삐삐 | 저 역시 완전 감사드려요 그랑블루님.. 늘 님의 글 기다리고 있습니다.. 완전 재창조된 여느 소설들과는 달리, 드라마 속에서 꽁꽁 숨겨져 있던 신우의 맘을 훔쳐보는 기분에.. 너무 행복 합니다.. 비록 읽는 내내 아프지만.. 그래도.. 훌쩍.. ㅠ.ㅠ.. 마지막 시는.. 그동안 한참을 잊고 살던 감정들을 마구 떠오르게 하네여 | [2009-11-30] | |||
몽이삐삐 | 울 신우.. 앞으로 계속 아프겠죠?.. 그래도.. 순간순간 행복하길 기도합니다.. 엉엉엉.. ㅠ. ㅠ.. | [2009-11-30] | |||
나였으면 | 자기전에 잠간 들렀는데, 선물받은 느낌이네요. 완전 신우가 되신듯한 느낌... 저도 신우 중 심으로 미남을 다시 봐보고 싶은 느낌이 듭니다. 잘 읽고 갑니다. 멋지십니다~ ^^b | [2009-12-01] | |||
이정일 | 충분히 사랑하고 사랑받고 ... 그런관계면 더이상 바랄게 없겠지만 주기만 하는 사랑, 심장 에 상대를 담기만 하는 아픈 사랑을 하는 신우가 용서를 비는게 오히려 더 아파요.. 왜 더 많 이 사랑하는 사람이 항상 약자가 되어야 할까요? 참 이상한일이에요.. 그쵸? ^^~ | [2009-12-02] | |||
*라니* |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린이 되기 직전.... 인제 신우 아픈일만 남아서 속상하네 요... | [2009-12-02] | |||
달래 | 드라마내용대로 가면... 역시나 신우는 속앓이하다가 끊나겠지요.... 아우.. 가슴이시려요;; | [2009-12-02] | |||
요술공주 순이 | 이거 계속 보고싶은데 그랑블루님 이제 안 올리시나요... | [2009-12-03] | |||
하얀눈송이 | 안돼요~ 님 소설에서는 신미여야 해요.... 걍 우리 미나미 신우 따라서 부산으로 쑝~!!!!! 가 게 해 주세요.... 플리즈..... ㅠㅠ 신우가 넘 불쌍하잖아요..... ㅠㅠ | [2009-1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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