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과 삶/시와 풍경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그랑블루08 2009. 12. 17. 00:19

 

<이..사진 퍼온 건데....출처를 잃어버렸네요. 죄송합니다.(__)> 

 

 

 

 

           절정(絶頂)

                                    이육사

 

매운 계절(季節)의 채쭉에 갈겨       
마츰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리빨 칼날진 그 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겨울이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이육사의 절정.

시적 언어로도, 영적 감수성으로도, 그리고 현실을 직시하는 시인의 날카로운 눈으로도,

이 시는 내게 최고의 시다.

 

시를 구호로도 사용하고 있지 않고,

시를 행동을 위한 도구로도 사용하지 않고,

시를 시답게 사용한 가장 시다운 시....

 

비유와 상징과 패러독스와 그 모든 것을 떠나서....

끝까지 내몰려진 시인이 선택한 것이 바로 전환이다.

나를 다스리는 힘.

말이 어떠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극한의 상황에 처한 한 시인이 그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시가 시답게 사용될 때, 어떠한 힘을 일으키는지.....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영혼을 가진 시인이

세상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가진 그 시인이

언어라는 인간의 유일한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난....이 시를 통해서 배움을 얻곤 한다.

 

말의 힘이,

언어의 힘이,

시의 힘이,

누구부터 변화시키는지를....이 시는 말해준다.

 

시인은 말하고 있다.

실망하고 좌절하고

그리하여 더 힘들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칼날 위에 서서

시인은 눈을 감는다.

 

그리고 꿈을 꾼다.

세상을 꿰뚫어보는 날카로운 눈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꿈을.....

눈을 감고

상상해 본다.

 

그리하여 북방에서, 서리빨 같은 매운 계절 속에서, 그리고 칼날 위에서

무지개를 본다.

 

그 시인의 꿈은,

그렇게 옆으로 옆으로 옮겨 다니고, 입으로 입으로 전해지고,

어느 순간 그 무지개는, 꿈이 되고, 그 꿈은 현실의 길로 들어선다.

 

한 사람의 꿈이 현실로 이어지는.....그것이야말로......시의 정신이 아닐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시인은 담담하다.

자신의 상황을, 자신의 세계를 철철 넘치는 감정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감정의 과잉 대신에 단지 담담하게 지켜본다.

자신이 처한 현실인데도, 관조가 가능하다.

내 감정에 빠져들지 않고,

나 자신이 힘들다고 말하지 않고,

오로지 담담하게 바라보다 눈을 감는다.

그리하여 시인이 꾸는 꿈이.......도리어 현실감을 갖는다.

 

 

글쓰는 이들은.....모두 시의 정신을 지녀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니......나라는 이 잡초 같은 인간은....아직 한참 한참 모자란 인간이 아닌가.

감히....글쓰는 사람이라고, 글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도 부끄러운 것이 아닌가.

 

북방에서, 얼음 같은 칼날 위에, 매운 계절 위에

서 있는 것은.....동일하나,

아직.......눈을 감지 못하고 있다.

아직.......눈을 감고 무지개를 꿈꾸지 못하고 있다.

 

아주 작은 일에 슬퍼하고, 속상하고, 억울하고, 혼자 피해를 입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주....상처 잘 받는.......

참으로 여린 족속.......

 

이렇게 칼날 위에 서서 한발 뒤로 재껴 디딜 틈조차 없다고....

숨이 막힌다고 느껴질 때......

이 시를 떠올린다.

나도 언젠가....이렇게 눈 감을 수 있지 않을까.

나도 언젠가....이렇게 꿈을 꿀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오늘은......조금 이 북방에, 이 칼날 위에....잠시만 더 서 있자.

조금 있으면 눈을 감고 꿈을 꿀 수 있을 테니.....

오늘은.....잠시.....이러고 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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