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우 이야기 18 - 내가 불입니다
1
“그 아이는 간 거니?”
“네.....”
“신우야, 너.......괜찮니?”
괜찮지 않아요. 어머니.......
“신우야?”
“제가........큰 실수를.....했어요.
어떡하죠? 어머니.........”
어머니는 마치 다 아신다는 듯이 내 손을 잡아주신다.
그 손이 따뜻한 만큼 내 마음은 더 시리다.
어찌하면 좋을까요? 어머니........
이제....아이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요?
2
이건 기쁨과는 다른 감정이야.
아니, 이건 기쁨이 아니라 도리어 속상함이겠지.
왜 왔냐고 아이를 잡고 다그치고 싶은 나를 몇 번이나 주저앉힌다.
어머니가 보고 계신다고.......
지금 내가 이러면 안 된다고........
아까 입구에서 어머니를 안고 있던 아이,
지금 어머니의 병실에서 가만히 서 있는 아이,
그러면서 내 눈치를 보고 있는 아이......
한결 차분한 듯한 아이에게서 난 보고 싶지 않은, 아니 봐서는 안 될 무언가를 보고야 말았다.
무슨....일이 있었던 거다.
황태경과......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 생각이 떠오르니 속에서 불같은 것이 일어나는 것 같다.
왜.....온 거야?
이런 식으로....와서는 안 되는 거잖아.
이렇게 잔인하게 사람 마음을 짓밟아서는 안 되는 거잖아.
아이는...알까?
자신의 그 착한 마음이 누군가를 잔인하게 찢어대고 있다는 걸......
“참....신우야, 물 좀 떠올래? 차라도 한잔 끓여서 대접해야지.”
어머니가 얼어붙은 듯 서 있는 나를 재촉하신다.
아이는 괜찮다고 하지만, 난 내 자신을 위해서 그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물을 떠서 병실 문을 열려는데 어머니의 말소리가 들린다.
“미녀 양은 왜 수녀가 되고 싶었지?
다른 사람들 말고, 하나님도 말고......
미녀 양 자신은 말이야. 왜 수녀가 되려고 했어?”
수녀?
고미녀가 수녀가 되려했다는 말인가?
그랬었나?
수녀라구?
수녀라는 말에 내 심장이 꽉 조여온다.
그래서......그런 분위기였었나?
그래서 그렇게 천상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나?
그래서 내가 그렇게 다가가기가 미안했었던 건가?
어머니는 미녀를 향해 또 축복의 말씀을 하신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고.....
“미녀 양........
내 존재가 다른 이를 돕고, 희생하고, 그래야지만 의미가 있어지는 건 아니야.
사람은 얼마든지 즐겁고 행복하고 이기적이어도 돼.
그게 사람이야.”
어머니의 말씀이 또 다시 내 가슴을 무너뜨린다.
어머니, 당신이야말로 그리 사셨어야지요.
즐겁고, 행복하고 이기적으로 사셨어야지요.
“내 생각에...신은.....인간에게 소망이라는 걸 주셨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거...그게 신이 우리를 만든 이유야.
미녀 양은 미녀 양의 그 신이 자신을 희생하라고 했을 것 같아?”
소망.
내가 하고 싶은 일.......
어머니 당신께서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그런 소망을 갖지 못하셨으면서
왜 우리에게는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
어머니.....
당신 앞에 서 있는 이 아이는.......당신과 닮았습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희생하는.....
그런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이 아이두요.
“미안해. 만나자마자 이런 질문을 해서....
괜히 미녀 양을 힘들게 만들었네.
내 노파심 때문이야. 내 자신 때문에 꼭 이 말을 해 주고 싶었어.”
어머니께서 아이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건지.....
어머니 자신 때문이라면, 후회....하신다는 건가?
“난.......사랑은 희생인 줄 알았어.
그래서......내 모든 걸....다 버리고, 그 사람만 바라보고, 그 사람을 위해서만 산다고 생각했어.
그랬는데, 어느 순간 내 희생이 그 사람의 숨통을 막히게 하고 있더라구.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그 사람의 목을 조이고 있는 거야.
그 사람만 바라보고, 그 사람을 위해서 모든 걸 준비하고 그렇게 나를 없애면서 난 내 모든 무게를 그 사람 어깨에 걸어버렸던 거지.”
아.......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다.
어머니의 말씀을 더 이상 듣고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다.
어머니는....단 한번도 저런 말씀을 내게 하신 적이 없다.
자신은 그리도 희생하시면서, 다른 이에게는 그러지 말라고 하시니....
이제는....당신의 사랑법마저 잘못되었다고 하시는 겁니까?
당신 때문에 그 사람이 더 힘들었을 거라고....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더 사랑하는 게.......죄입니까?
그 사람을 가슴에 품은 게 죄입니까?
정말......미칠 것만 같다.
정신없이 밖으로 뛰어나왔다.
온 세상이 꿈꿀 수도 없는 심연의 바다색으로 뒤덮여 있다.
그 속은 아무도 알 수 없을 만큼 짙다.
3
자박 자박........
아이의 발소리가 들린다.
발소리조차 내게 가까이 오는 걸 주저하는 것 같다.
소리에서 그 사람의 마음을 읽게 되다니.....
정말....사랑이라는 놈은.......무서운 놈이다.
“와줘서 고마워. 더 늦기 전에 가.
난 하루 더 있다가 갈 게.”
어서 아이를 보내야 한다.
아이를 보는 것이 너무나 힘이 든다.
“신우 형....저도 같이......있겠습니다.”
뭐? 같이?
내 속에서 뭔가가 터져나온다.
도대체 고미녀! 너 이런 식으로 사람을 숨 막히게 해야겠니?
너 아니잖아. 아니면서....이렇게 행동하는 게 상대에게는 어떤 상처를 주는지 알기나 아니?
내 눈빛을 마주 보던 아이의 눈빛이 흔들린다.
왜.....이런 내가 두려워?
“너 뭐야!!!
너 사람 놀리는 거야!!!!!!!”
내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냥.....미친 듯이 속이 상했다.
나 몰라라 하고 있는 이 아이가, 그러면서 따뜻한 손길을 내밀며 내게 생채기를 내는 이 아이가.....밉다.
“아악!!”
아이가 비명을 지른다.
난 이미 아이의 어깨를 잡고 벽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신....신우 형....왜.....이러세요......”
아이의 목소리가 떨려오는 것 같다.
그러나 내 속에서 뭔가가 자꾸만 터져나온다.
“몰라서 물어?
정말 모르는 거야? 모른 척 하는 거야?"
“무슨.......”
아이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걸까.
이렇게 바로 앞에 서서 다 보여주고 있는데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걸까.
너에게 나라는 존재는 없는 거니?
안 보이니?
“시...신우...형......”
“하아......고미녀!!
너....여기 왜 온 거야?
너....여기 오는 의미 몰라? 너도 시작이야? 그래?”
“아...아니....신우 형....그게 아니라.....신우 형께 죄송해서.......어머니께서 편찮으신 것도...죄송.,.ㅎ..”
“그래서!!! 그래서 왔다구? 죄.송.해.서?”
죄송하다!!!
그 말 한 마디가 심장의 피를 거꾸로 솟게 한다.
바보 같이 한 사람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의 마음도 화가 나고,
그런 아이를 그저 지켜봐야 하는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난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작은 행동들로 자꾸 감정을 일어나게 하는 아이의 태도 때문에 미치도록 화가 난다.
“그래...그렇게 죄송하다는데....그래서 뭘 해 줄 건데?”
“그...그래서....같이.....”
“하하하하하........”
텅 빈 웃음이 터져 나온다.
아이는 모른다.
아무 것도 모른다.
내가 누구 때문에 가슴 아팠는지, 왜 이렇게 심장이 터질 것 같은지.....
아무리 보여줘도 모른다.
그 모르는 마음 때문에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데,
그것도 전혀 알지 못한다.
그저 말간 눈으로 이렇게 죄송하다는 말만 해댄다.
“고미녀! 잘 들어.
내가 널 언제부터 좋아했을까?“
“예? 좋아하다뇨? 저번에 시작하신다고.......”
“그래. 그 시작. 언제부터였을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아니 참아지지가 않아서 내 마음들이 터져나온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게 언제지?”
“예?”
“강신우와 고미녀의 어설픈 연애 스토리...생각해 봐.”
“예? 제가 A.N,Jell 새로운 멤버로 처음 소개된 날....아닌가요?”
“그래. 맞아. 그때가 나도 시작이야.”
“예...그게 무슨.....아!!!!!!!”
아이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린다.
이제....
겨우 이제야 안 거야?
구두를 신고 온 것도, 그냥이었니?
구두로 사람 마음을 이렇게 흔들어놓고서도 몰랐다는 거니?
“그래. 난 니가 여자라는 걸....그날 알았어.”
“헉!!!!!!!!!”
“놀랐니? 니가 연습실에서 울었던 그날.....
그래서 레스토랑에 못 왔던 그날....
난 너에게 고백하려고 했어.
내가 좋아한 사람은.....다른 사람이 아닌 너라구.....
고미녀!! 바로 너!!!”
목이 메인다.
이런 식으로 고백하는 건가.
이런 식으로 화내면서.....
“시...신...신우 형!!!”
아이의 목소리가 떨려나온다.
나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왜....당황스러워? 피하고 싶어?
너....정말 모르는 거야? 모른 척 하는 거야?”
“신우 형...전.....”
“자신의 마음을 강요하는 것두 이기적이지만,
사람 마음.....모른 척 하는 거.......
그것두 정말 이기적이야. 알아?”
내 속에서 모든 것들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어머니도, 어머니의 사랑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아버지도, 그리고 이 아이의 마음도,
모두 모두 소용돌이치면서 이성을 갉아먹고 있다.
적어도 말이다. 미남아.
니가 조금이라도 내 마음을 알았다면, 이렇게 오는 건 아니야.
적어도 내 마음이 너에게 있다는 걸 알았다면, 와서는 안 되는 거야.
죄송하다는 마음으로 내게 오는 건 도리어 내 심장에 칼을 들이대는 거야.
아니? 너 알아?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그렇게 순수한 눈으로 기대하게 해서도, 기대한 만큼 실망시켜서도 안 되는 거야.
“죄송하다구? 그래서 왔다구?
그래? 그럼 이건 어때?”
모르겠다. 나도 무슨 행동을 하는 건지.
그냥......심하게 화가 났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적어도 내 마음이 어떤지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를 받아줄 마음 없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오는 행위만큼은 막고 싶었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내 심장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알려주고 싶었다.
아이의 입술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아이의 입술이 내 입술 바로 앞에 있었다.
아이의 몸이 심하게 흔들린다.
그래, 미남아.
이제 날 때리고 저리 가라고 말하고 떠나버려.
이렇게 미안하네, 죄송하네 하지 말고, 그냥 가버려.
그게 내게는 더 속 시원해.
어서 때려버려.
아이는 그냥.....몸을 심하게 떨면서도 꼼짝도 하지 않는다.
“너 뭐야....왜 가만히 있어.
이럴 땐 뺨이라도 때려야지.
그냥...그러고 있을 거야?”
때리지도 못하고 그냥 부들부들 떨고만 있는 아이의 모습에 더 속이 상한다.
아이의 입술에서 한숨이 새어나온다.
그 따뜻한 온기가 내 입술로 넘어온다.
정말.......
미.치.겠.다.......
겁만 주려고 했는데, 나 이렇게 위험한 놈이니까 곁에 오지 말라고,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내 곁에 오지 말라고,
그런 모습이 내겐 더 힘들다고,
내 속을 보여주려던 거였는데,
미치도록, 정말 미치도록 아이의 입술이 갖고 싶었다.
내 속에서 감정과 이성이 미친 듯이 싸우고 있다.
강신우....미친 짓 하지마.
안 돼!!!
정신 차려!!!!
나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되뇌었다.
그러나 아이의 입술은 여전히 내 입술 바로 앞에, 곧 닿을 것처럼 바로 앞에 유혹하듯이 놓여 있다.
갑자기 아이가 뭔가 결심한 듯 내 가슴을 밀어낸다.
순간 완전히 이성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오로지 한 가지만 느꼈다.
아이를 놓치고 싶지 않다!
내 품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지 않다!
난 이미 내 품에 아이를 안고 입술을 맛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아이의 입술에 닿는 순간, 심장으로 저릿함이 퍼져 내려간다.
단 한 번 품어 봤던 그 느낌이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나서 내 몸의 모든 감각을 깨우며 휘몰아쳤다.
입술이 너무나 부드러워서 눈물이 날 것만 같다.
내 입술로 아이의 아랫입술을 가만히 빨아본다.
입술 사이로 아이의 숨결이 느껴진다.
내가 살아 숨쉬는 것 같다.
가져도 가져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
몸부림 치는 아이를 더 깊이 껴안았다.
아이가 순간 소리를 치는 듯했지만 이내 그 소리는 내가 먹어버렸다.
아이의 열린 입술 사이로 내 마음을 조금씩 넣어본다.
놀란 듯 아이는 도망을 친다.
내 혀는 그런 아이의 혀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너무나 부드럽고, 너무나 촉촉해서 저 아래에서부터 저릿함이 올라온다.
얽혀들고, 쓰다듬으며 아이의 입술과 혀에 취해 들어간다.
너무나 원했던 아이의 입술,
한번 맛보고 난 후, 그토록 잠 못 들게 했던 아이의 입술......
이 입술을 맛보고 있으면서도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듯해서.....슬프다.
그래서 자꾸만 더 아이의 입술을, 아이의 혀를 탐하게 된다.
절대 잊지 않도록, 지금의 감정과, 지금의 감각을 내 입술, 내 혀에, 내 심장에 새기도록 아이의 입술 안으로 더 깊이 더 깊이 들어간다.
아이가 놀라고 있는 걸 알면서도,
아이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을 걸 알면서도,
도저히 놓아 줄 수가 없다.
너무나 짜릿해서, 너무나 달콤해서, 너무나 부드러워서
도저히 놓아 줄 수가 없다.
아이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는지 몸부림을 친다.
겨우 겨우 이성을 찾아 아이의 입술에서 떨어졌지만, 그 감각은 여전히 남아 내 심장을 뛰게 한다.
아이의 눈이 놀람과 두려움으로 파르르 떨린다.
아이의 입술은 조금은 붉게 부풀어 있다.
다시금 가지고 싶은 욕구가 솟아 오른다.
“왜.......안 때려?”
내 목소리가 쉰 듯이 갈라져서 나온다.
“.....................”
아이는 빤히 나를 바라볼 뿐 아무 말이 없다.
그러더니 갑자기 나를 밀치고 가려 한다.
내 품에서, 내 손에서 벗어나려는 아이를.....도저히 보낼 수가 없다.
아직은.......떠나보낼 준비가 안 돼 있다.
돌아서는 아이의 팔을 잡고 다시 내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시...신우 형!!!!”
“잠시만......아주 잠시만.......이렇게........있어 줘.”
아이를 내 품 안에 가득 안고 있어도, 내 마음은 여전히 고프다.
가득 채워지지가 않는다.
내 마음대로 내 욕심대로 할 수 없는 것인데도,
자꾸만 아이의 마음까지 욕심낸다.
정말 바보 같이........
따뜻한 아이의 품을 느끼면서, 아이의 숨결을 느끼면서....
슬픔이 점점 차올라 온다.
아이의 마음은....나의 것이 아니니까....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니까......
정말....화가 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어머니의 사랑법을.....
나도....이미 시작하고야 만 것이다.
“이젠.....보내주세요. 신우 형.......”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에 내 손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더 이상 붙들 명목도 힘도 내겐 없다.
“고미녀!”
내게 등진 채 걸어가던 아이가 우뚝 멈춰 선다.
“너에게.......미안하지는 않아.
미안하다는 말은.......하지 않을 거야.”
“..........왜....안 때리느냐고 물으셨죠?
전.......사람을 때려본 적이 없습니다.”
아이는 내 눈 앞에서 서서히 멀어진다.
4
“신우야?”
“어머니........”
“너.....정말 괜찮은 거니?”
“어머니.....사실은........
미녀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그랬구나......”
“아셨어요?”
“음....조금......그런 거 같았어.
신우 니가 미녀 양을 보는 눈과, 미녀 양이 널 보는 눈이 많이 달랐어.
신우 니 눈은 깊었지만, 미녀 양은 그저 말갛게 순수하기만 했거든.”
그랬군요. 아셨군요. 어머니는 벌써 알고 계셨군요.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니?”
“..........제가.....미녀에게 실수를 했어요.
제 마음만 강요했어요.
이제..........미녀의 얼굴을 볼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바보 같이 제 마음을 제 스스로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신우야,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하는 것과, 그 마음을 모른 체하고 싶어하는 것....
이 둘 중에 누가 더 이기적인 걸까?”
“예?”
“사랑이라는 감정은.....어쩔 수 없는 거잖아.
그러니 그 마음을 고백하고 싶은 것도 인간이 어쩌지 못하는 거지.
그 마음을 고백하는 건 이기적인 게 아니야.”
“그렇지만......상대가 싫어할 수도,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잖아요.”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런데 상대가 부담스러워서 듣고 싶어하지 않는 거....그것도....이기적이야.”
“예?”
어머니의 말씀이 너무 어렵다.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는 건데......부담스러워서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이 더 이기적이라니.....
“상대방은 왜 듣기 싫어할까?
날 좋아하지 마라, 친구로 지내자....
그 말이야말로 이기적인 거야.
지금의 관계가 좋으니까, 그 관계를 깨기 싫은 거지.
그것도 자기 욕심이야. 상대방은 사랑을 원하는데, 자신은 우정만을 원한다고 상대방의 마음을 얘기하지 말라고 하는 건, 결국 자기 욕심만 챙기는 거지.”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그것도 사실은 또 다른 관계를 원하고 있기 때문인가.....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도, 이 사람과 더 이상 관계가 유지되지 못할까봐 겁나서 고백을 못하게 되지.
그러나 고백하게 되면, 결국 이 사람과의 다른 관계는 깨질 수 있어.
물론, 받아들여야 해. 고백 자체는 나쁜 게 아니야.
그 다음 상황을 받아들이는 거.......그걸 못 받아들이게 되면 문제가 되지.”
“아...........”
“그러니 사랑을 고백하고 싶다면, 끝까지 가보고 또 접어야 한다면 접어야 해.
또, 누군가 나에게 사랑을 고백한다면, 친구로서의 관계를 강요해서도 안 돼.
깔끔하게 끊어내야지. 친구로서의 관계 때문에 그 사람에게 죄를 지어서는 안 돼.”
“그럼....전....어떻게 해야 되죠?”
“신우야, 끝까지 가봐. 끝까지 니 마음을 고백하고, 미녀 양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넌 접어야 돼.
또.....니가 고백한 것 때문에 미녀 양에게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
미녀 양이 싫어하는 행동을 했다면, 그건 미안해 해야 되겠지.
그러나 더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미녀 양에게 부담이 될까봐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
미녀 양 역시 너와의 관계, 친구로서의 관계에 대해서는 욕심내서는 안 돼.”
어머니.....어쩌면, 제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화를 내고 있었나 봐요.
그러면서 내 욕심대로 행동했었나 봐요.
어쩌면, 아이의 대답을 일부러 듣지 않으려고 했었나 봐요.
돌아봐 주길 바라면서도, 전 어쩌면 제대로 말한 적은 없었나 봐요.
그러면서 아이의 마음만 탓하고 있었나 봐요.
정직하게 고백하고, 정직하게 대답을 들어야겠지요.
그걸 알면서도........겁이 나요, 어머니.
왜 몰라주냐고 다그치면서도, 정작.....저는.....아이의 대답을 들을까봐 무서웠나 봐요.
이렇게라도 옆에 있고 싶었나 봐요.
아이가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면서 그렇게라도 제 자리를 찾고 싶었나 봐요.
“신우야........어쩌면 니가 미녀 양을 놓아주는 것만큼이나, 미녀 양도 널 놓아주는 게 많이 아플 거다.
그래서 미녀 양도 무의식적으로 니 마음을 모른 척 했을지도 몰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니?”
“그냥.....살다보니.....사람의 관계가 참 다양하더구나.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참으로 희한해서 정의내릴 수 없는 무언가가 있어.
미녀 양이 좋아한다는 그 사람과 상관없이, 너와 미녀 양 사이에도 그런.....관계가 있어.
그러니......니가 미녀양을 놓아야 하듯이, 미녀양도 널 놓아야 할 거야.”
“어머니......”
어머니는 조용히 눈을 감으신다.
내가 미남이를 놓아야 하듯이, 미남이도...날 놓아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놓아야 하는 관계........
그런데, 어머니.....
이렇게 타오르는,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감정이라는 놈을
끌 수 있다고, 누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해도 꺼지지 않는 불도 있다는 걸......
이렇게 나 자신을 잃게 만드는 불이라는 것이 있다는 걸.......
그래서 내가 다 타서 재가 될지언정 불을 끌 수는 없다는 걸.......
알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내가 불입니다 - 김용택
언젠가부터
당신을 향해 타오르는 사랑의 불을
나는 물로 끌 수 있을지 알았습니다
불길이 목울대를 넘나들 땐
한방울의 물을 찾아
천지를 헤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불길은 갈증을 넘어서 버렸습니다
어느덧
물로 끌 수 없는
큰 불길에 싸여 있는 내 가여운 영혼
한방울의 물을 찾아
천지를 헤매고도 남을 이 영혼을 당신은 아시기나 한지요
아
그냥 두지요
재가 되도록 타게 그냥 두지요
불은 타올라야 합니다
타오르는 불에
몇 방울의 물은 물이 아닙니다
그도 따라 뜨거운 불입니다
아
당신을 향해 타오르는
이 불길로 내가 다 타겠습니다
내가 불이 되겠습니다
-------------------------------------------------------------------------
새해부터는 열심히 올리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이렇게 또 늦어져 버렸네요.
죄송합니다.
사흘간 내리 앓다보니, 죽다가 살았네요.
모두들 건강하시길.....(_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