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우 이야기> 33. 꿈꾸는 고래
1.
“잘~한다!! 둘이 아예 이불이라도 깔지 그래?”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떠보니 정신이가 얼굴을 온만상 구긴 채 나를 노려보고 있다.
“형! 진짜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민혁이가 정신이에게 헤드락을 걸어서는 앞좌석으로 돌려 앉힌다.
“얌마! 낄 데 좀 껴라. 니가 여기 낄 데냐?”
“이거 놔봐!! 형!!! 우리 공중도덕 좀 지킵시다!!!”
계속 투덜대는 정신이에게 난 조용하라고 입에 손을 갖다 댔다.
전혀 요동 없는 내 태도에 정신이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내 어깨에 놓인 무게가 내 마음을 자꾸 요동치게 한다.
아이는 내 왼 팔을 꼭 붙들고 내 어깨에 기댄 채 잠이 들어 있다.
아이의 무게가 느껴지는 만큼, 난 이상한 평온함을 느끼게 된다.
마치 모든 세상이 원래의 자리에 돌아온 것 같은 그런 느낌.
처음부터 이 아이와 내가 하나였던 것 같은 그런 느낌.
그랬다.
살면서 이런 느낌이 들 수 있다는 거.......
단순한 설렘과는 다른 이런 기분 좋은 평온함을 느낄 수 있다는 거.......
어쩌면 처음인 것 같다.
짧지만, 그 짧은 세월을 살아오면서도, 어린 시절에도 느끼지 못했던 이런 평온함은 내게 내민 신의 손길처럼 느껴진다.
내 어깨 위에 고이 놓여 있는 아이의 머리 위에 살짝 기대 본다.
이 무게를 평생 내 어깨에 담고 살 수 있었으면.......그랬으면 좋겠다.
욕심 같은 바람.......
“으음.......”
아이가 뒤척인다.
나 때문에....깬 건가?
“어.....신우 형?”
아이가 내 쪽을 흘낏 보는 것 같더니 눈을 비빈다.
“어...엇!!! 아.......신우 형!! 죄송합니다. 제가...잠이 들어서......”
아이는 그제야 내 어깨에 기대고 있다는 걸 알아 챈 듯 갑자기 바로 앉아서는 얼굴이 붉어진다.
아이의 붉어진 얼굴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어어~~~!! 시...신우 형!!! 잠시만요!! 어어!!! 신우 형!!!”
나는 아이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도록 아이를 내쪽으로 당겼다.
아이는 그런 내 행동에 당황한 듯 소리를 지른다.
“너.....계속 소리 지르면, 아직 자는 사람들 다 깬다?”
“아.....예.......”
아이는 이내 조용해진다.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아이의 평상시 생각이 아이를 조용하게 만드는 거겠지.
내 어깨에 놓인 아이의 무게가 다시금 느껴진다.
“미녀야......”
“예?”
“행복하다........”
아이가 살짝 움찔하는 것 같더니 이내 가만히 있다.
행복........
그래......행복하다.
내 어깨에서 느껴지는 이 무게가 마치 내 행복의 무게인 것 같다.
그렇구나........
설레는 것과 또 달랐던 그 평온했던 그 마음이.....바로.....행복이었구나.
그렇게 내 어깨에서 시작된 이 느낌은 내 심장 곳곳으로 퍼져나가 온 몸을 따뜻하게 만든다.
스물두 해를 살아오면서.......어쩌면.....처음 느끼는 행복인 것 같다.
2
모두들 짐도 단촐하고 배낭에 기타를 맨 게 전부라서 리허설 현장으로 바로 가기로 했다.
아침을 먹고 공연장인 오사카 조 홀에 도착하니 10시가 좀 못 되었다.
오사카 성에 온 적은 있지만, 이 오사카 조 홀에서 공연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A.N.Jell에 있었으면, 올해에는 이곳에서 콘서트를 열었을지도 모르겠다.
“기분이 어때?”
밖에서 청색돔을 바라보는 내게 종현이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묻는다.
“뭐가, 어때?”
“A.N.Jell 생각 안 나?
형.....계속 A.N.Jell 있었으면, 지금쯤 태경이 형이랑 같이 여기서 단독 콘서트 했을 텐데.....후회 안 돼?”
“아니.”
“역시!!. 우리의 신우 형이다.”
“무슨 소리야?”
“그냥......이런 형이 멋있다고.....”
종현이는 내게 말을 툭 던지더니 모두에게 리허설 현장으로 들어가자고 재촉했다.
안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16,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니 어마어마한 장소인 건 틀림없었다.
돔 안에는 가운데는 경기장이고 객석은 원을 그리며 앉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인디 밴드 공연인 만큼 가운데 경기장에도 의자로 채워 넣고, 공연장을 그 경기장 중앙에 설치한 듯했다.
일반 콘서트 현장과는 달리 관객과 굉장히 가깝게 공연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렇게......넓어요?”
미녀는 놀랐는지 겁을 먹은 것 같았다.
“겁나?”
“예. 신우 형.....이렇게 넓을 줄 몰랐어요.
여기.....설마 다 차는 건가요?”
“당연하지. 이번 행사가 인디 밴드 행사 중 꽤 큰 거야.
사실.......우리도 못 올 뻔 했는데, 한 팀이 펑크가 나는 바람에 우리가 들어올 수 있었던 거야.
인디 밴드로서는 여기 참가하는 건 영광이지.”
종현이가 열심히 미녀에게 설명해 주고 있지만, 미녀의 얼굴은 과히 좋아 보이지 않았다.
주눅이 든 것 같아서......신경이 쓰인다.
“우리, 순서는 어떻게 되냐? 내일인 건 확실하지?”
“응. 그래도 리허설은 오늘 가볍게라도 해 보는 게 나을 거야.
오사카 한국인 밴드에 아는 애가 있는데, 웬만하면 오늘 내일 리허설 다 해보라고 그러더라구.
그 녀석이 다행히 이번 행사 주최 측 쪽에서 일하는 바람에 우리는 좀 편하게 됐어.”
이럴 때 보면 종현이는 영락없이 리더다.
“그럼, 지금 당장 해 보는 거야?”
“아마도........녀석에게 전화 한 번 해 보고.......”
종현이는 전화를 하더니 어떤 사람과 함께 온다.
“다들 인사해. 여긴 이번 행사에서 리허설 담당인 내 친구 성욱이야.
오사카 인디 밴드에서는 나름 인지도도 있어.”
서글서글한 인상이 좋은 친구였다.
“안녕하세요? 김성욱입니다.
아.....근데 이 분이 새 멤버이신 미녀양?”
“예? 예. 처음 뵙겠습니다. 고미녀라고 합니다.”
“와!! 우리 동갑이죠? 종현이가 나이가 같다고 했는데.....”
“아....예.”
미녀가 당황한 듯 대답하자 종현이 친구라는 녀석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다.
“그렇게 당황하실 필요 없어요.
제가 팬이라서 그래요.
이번에 새로 낸 곡, 미녀씨 곡이라면서요?
곡이 너무 좋아서 종현이한테 물어봤더니 미녀씨 곡이라고 해서.....
아....근데....정말 귀여운 분이네요.”
귀.여.워?
그 녀석의 말에 미녀가 부끄러운 듯 웃고 있다.
“어이!! 너 말 조심해. 지금....누구는 심기 불편하실 걸?”
종현이의 말에 녀석은 무슨 소리냐며 묻는다.
“시끄럽고, 우리 체크인도 못하고 왔으니까, 바로 리허설 해 볼 수 있게 해 줘.
오늘 공연 4시부터라며?
오늘 공연 팀들 하기 전에 우리 후딱하게 해 주라.”
“오케이~~! 일단 말해 뒀으니까 음향 시설 갖춰지는 대로 바로 올라오면 될 거야.”
녀석은 무대로 가다가 다시 돌아보면서 미녀를 향해 한 마디 더 날렸다.
“고미녀씨! 기대하고 있을게요!”
“예?”
저 녀석......뭔가.....찝찝하다.
3
무대에 서 보니 공간이 워낙 크다는 게 중압감으로 다가왔다.
음향시설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마이크도 많이 울리고, 오랜만에 인이어까지 귀에 꽂고 하려니 영 어색했다.
미녀는 리허설인데도 얼어붙은 모습이다.
기타줄을 맞추는 척하면서 미녀 곁에 갔다.
“미녀야, 괜찮아?”
“신우 형.........여기......너무 크고, 너무 무서워요.
이렇게 큰 줄 몰랐어요.”
“어차피 오늘은 연습이야. 겁내지 말고, 연습실에서 하는 것처럼 하면 돼.”
“예........”
대답은 하고 있지만, 미녀의 목소리는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
“종현아, 우리 곡 순서 조절하자.”
“어?”
“Wanna be like you를 맨 뒤로 빼고, 미녀 솔로 말고 클럽에서 부를 때처럼 나랑 너랑 같이 들어가자.”
“미녀.......좀 부담스럽겠지? 알았어.”
종현이도 미녀 쪽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이번에 새로 발표한 2곡을 먼저 연습하는데, 미녀 파트가 많이 불안했다.
목소리도 불안하게 나오고, 그러다 보니 키보드도 삑사리를 내고 있다.
Wanna be like you를 앞두고 미녀를 걱정스레 바라보는데 갑자기 무대 아래에서 누가 소리를 지른다.
“우유 빛깔 고미녀!!!”
성욱인가 뭔가 하는 녀석이 뭐라고 소리 지른다.
다들 의아해서 보고 있으려니 녀석이 미녀를 향해서 하트를 그려댄다.
“미녀씨!! 여기 팬 있어요!!1
한국에서 팬들이 이런다면서요!!
우.유.빛.깔. 고.미.녀!!!”
뭐 저런 맛간 녀석이 다 있나 싶어서 한 소리 하려는데, 미녀가 웃음을 터뜨린다.
“뭐야? 누나는 왜 웃어?”
정신이가 짜증난다는 듯이 한소리 해대자, 미녀가 황급히 사과를 한다.
“아....미안........”
“자자.....다들...마지막곡 들어가자.”
Wanna be like you를 부르는 동안, 종현이 친구라는 맛간 녀석은 계속해서 하트를 날리며 “우.유.빛.깔”을 외치고 있었다.
리허설을 마치고 악기를 정리하는데, 그 녀석은 또 미녀 곁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
이젠 말까지 슬며시 놓는 것 같다.
미녀는 뭐가 또 웃기는지 계속 웃고 있다.
“어어~~!! 형!!! 이거 우리 거 아니야. 너무 쾅쾅 옮기면 안 돼!!!”
종현이가 갑자기 내 팔을 잡는다.
“뭐?”
“아니, 형이 지금 앰프 부술 뻔했다구!!”
“무슨 소리야?”
“하아.....됐다. 아무 것도 아니다. 그냥 형은 먼저 내려가.
뒷마무리 내가 할 테니......”
내가 뭘 어쨌다고 종현이 녀석이 저러는 건지......
무대 아래로 내려가려는데, 종현이가 다시 한 마디 한다.
“형! 그냥 팬이야. 팬!! 팬 뭔지 알지?”
“무슨 소리야?”
“아...아니다. 나도 모르겠다. 나는 빠질래.”
종현이가 알 수 없는 소리를 해댄다.
미녀 옆에는 여전히 저 이상한 놈이 붙어 있다.
변태같은 녀석이 이제는 미녀의 키보드를 드는 척 하면서 미녀의 손까지 잡고 있다.
그대로 그 놈의 손을 확 털어냈다.
“뭐야?”
“예...예? 아....미녀씨가 키보드를 혼자 들려고 하길래, 제가 도와주려고.......”
“그래? 야! 이종현!”
“왜?”
“니가 뒷 정리 한댔지? 니 친구랑 같이 이거 정리해라.
난 간다.”
“어? 형? 어디 간다는 거야?”
난 그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변태 녀석을 노려보며 한 마디 날렸다.
“내.여.자.야!!!”
“예?”
“내 여자! 함부로 건드리지 마!”
녀석의 뻥진 모습에 썩소를 날려주고는 미녀의 손을 잡고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어어~~ 신우 형?! 아직 저 뒷정리를 덜했는데......”
“종현이 녀석이 하기로 했어.”
“그치만........신우 형........”
미녀는 계속 뭔가 불안해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듯했다.
자꾸 빠져나가려는 미녀의 손을 꽉 잡고는 바로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신우 형! 어디 가시는 거예요?
멤버들과 같이 가야죠?”
“.......................”
“신우 형!!!!”
난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미녀를 데리고 지하철을 탔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미녀는 계속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토요일이라 지하철 안은 정말 복잡했다.
일본은 정말이지 한국과 너무나 흡사했다.
지하철은 점점 사람으로 미어터지기 시작했다.
미녀를 문 쪽으로 세우고, 난 한 손을 문에 짚은 채 버티고 서 있었다.
한쪽 손은 여전히 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마치......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처럼 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손을 빼내려 하던 미녀도 내가 꽉 잡고 놓아주지 않자, 포기한 눈치였다.
“저.....신우 형.......”
미녀가 주저주저 하며 내게 말을 건넨다.
“화.......나셨어요?”
이 아이가 화가 났냐고 묻는다.
화났냐고?
“응. 화났어!”
“왜......?”
“왜 화났냐구?
내가 왜 화가 났는지 모르니까.......그러니까 화가 나지.”
“예?”
고개를 숙여서 미녀의 귀에 속삭였다.
“웃지 마!”
“예에?”
“웃지 말라구. 다른 남자들 앞에서......웃지 마!
그렇게 행복하다는 듯이......웃지 마!!!”
아이가 놀란 듯 눈이 동그래진다.
그리곤 이내 얼굴이 빨개진다.
정말이지.....미녀가 이럴 땐 속수무책이 된다.
“키스......하고 싶다.”
아이의 귀에 다시금 속삭인다.
아이는 내 눈을 피하며 귀까지 빨개진다.
그런......아이의 모습이.......너무나 마음에 든다.
정말......내 여자인 것 같은........그런 착각이 든다.
4
“신우 형? 여긴 어디예요?”
“카이유칸!”
“네?”
“우리 둘이만.......데이트 하는 거야.”
“데이트요?”
“응. 오사카 카이유칸 유명해. 일종의 큰 수족관이야.”
“와~~ 그럼 고래도 볼 수 있어요?”
“고래가...보고 싶어?”
“네. 실제로 본 적이 없어요.
어릴 땐, 그런 수족관이나 동물원 같은 데.....정말 가고 싶었어요.”
어릴 때......
미녀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던 걸까.
수녀원에서 자랐을 아이의 과거가.......또 나를 가슴 아프게 한다.
“와~~~ 여기 정말 신기해요.
정말 정말 커요!!”
지하로 몇 층이나 이어져 있는 거대한 수족관 앞에서 미녀는 놀란 듯 서 있다.
저 위로 가오리가 마치 큰 새처럼 떠다닌다.
“어어~~!!! 저게 고래죠? 맞죠?”
미녀가 가리킨 곳에 커다란 점박이 고래 상어가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었다.
“와~~!! 정말 귀엽다!!”
미녀는 마치 아이라도 된 양, 수족관 유리에 붙어서 정신이 없었다.
어린 시절을 선물 받지 못한 스물한 살짜리 아이가.....가슴을 자꾸만 저리게 한다.
“근데요. 신우 형!”
“응?”
“참......인간은 이기적이에요.”
“뭐가?”
“저....고래......슬퍼 보여요.”
“뭐?”
“많이 슬퍼 보여요. 거대한 척하고 있지만, 이 수족관 어차피 바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데.......
저 고래는 날 때부터 여기가 전부인 줄 알고 살고 있겠죠?
원래 이렇게 좁은가 보다 하고......
자신은 원래 이런 운명인가 보다 하고......
그렇게 갇힌 채 아무 불평도 못하고 포기하고 살고 있겠죠?
저 고래를 진짜 바다에 데려다 놔도......
그 넓은 곳이 자기 세상인 줄도 모르고, 도리어 무서워하면서 겁만 먹겠죠?"
“미녀야........”
“갇혀 있는 거에 너무 익숙해져서........
바다를 두려워하게 된 고래 이야기.......
슬퍼요.”
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좁은 곳에서 갇혀 지내야만 했던 어린 아이였던 미녀가 떠올라 가슴을 자꾸만 아프게 한다.
“배고파요. 신우 형! 맛있는 거 먹어요!”
이내 미녀는 밝은 웃음을 짓는다.
그러나 난 이제 안다.
저 웃음이 진짜 웃음이 아니라는 걸.......나는 이미 알고 있다.
카이유칸 바로 옆 건물에 카페테리아가 있었다.
값이 싼 대신 사람들이 많이 북적였다.
겨우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싼 가격에 여러 가지 음식을 시켰다.
맛은 의외로 굉장히 좋았다.
역시 오사카는 음식의 도시였다.
거의 다 먹었을 때쯤, 한국인 관광객으로 보이는 여자들 몇 명이 우리 옆 테이블에 앉더니 우리 쪽을 흘낏흘낏 쳐다본다.
“야...야....옆에 봐봐!”
“왜?”
“누구...닮지 않았어?”
“응?”
“A.N.Jell 강신우!! 아니야?
진짜 많이 닮은 거 같은데.......”
“와와!!! 정말!!! 물어 볼까?
근데 옆에 여자는 누구야?”
“글쎄....나 강신우 진짜 좋아했는데.....
갑자기 미국으로 유학간다 그래서 울었잖아.
근데.....여기 있는 거야?”
여자들의 얘기에 나와 미녀는 난감해지기 시작했다.
미녀에게 눈을 찡긋하고는 일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옆 테이블의 여자들은 갸우뚱거리더니 그래도 계속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 같았다.
안 되겠다 싶어서 미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와~~!! 따라올까봐 걱정했는데 안 따라오네요.”
“알 수 없지. 저러다 다시 따라나올지도.....어디 숨을까?”
“어디요?”
“저기!”
“예?”
난 손가락으로 대관람차를 가리켰다.
“우와!!! 진짜 커요!!”
“오사카 대관람차 진짜 유명해. 아마 세계에서 제일 클 걸?
저거 타자. 저 여자들 다시 나와서 우리 뒤 밟으면 골치 아프니까......”
“아? 예.”
바로 티켓을 끊고 올라탔다.
“와~~!! 이거 진짜 큰데요.
밖이 한 눈에 다 보여요!!! 진짜 신기해!!!”
미녀는 정말 어린 아이라도 된 양, 서서히 움직이며 올라가는 관람차 유리에 붙어서 연신 신기하다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이거......한 바퀴 도는데 얼마나 걸려요?”
“15분.”
“15분이나요? 진짜 크구나.”
“15분이나라니? 15분밖에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15분씩이나 있는 게 아니라, 15분밖에 없다구.”
“예?”
“아....이러고 있는 동안 피 같은 시간이 또 흐르고 있어.”
“신우 형?”
난 미녀 쪽으로 가서 앉았다.
“어어~!!! 신우 형 이 쪽으로 기울어요. 어서 저쪽으로 가세요!!”
“싫어!!”
“신우 형!!!”
“이제 13분 남았다.”
“신우.........!!!!”
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아이의 입술을 빼앗았다.
아이는 갑작스런 내 행동에 바둥바둥 거린다.
“가만히 있어. 안 그럼, 우리 칸만 떨어질지도 몰라.”
“그치만........지금 한쪽으로 기울어진 것 같아요.”
“그러니까.......가만히 있으라고.....”
“신우 형!!!!”
“나......더 이상 못 참아. 이건 다 미녀 니 책임이야.
자꾸.....다른 남자한테 웃어주고.......그랬으니까.......벌이라고 생각해!”
아이의 입술은........달콤하다.
맛보고 또 맛봐도 내 가슴을 다 채우지 못할 목마름을 주는 아이의 입술.
너무 달콤해서 자꾸만 깊게 깊게 들어간다.
그렇게 덴포잔 대관람차는 세상을 돌고, 우리는 그 안에서 서로를 향해 돈다.
신은 이렇게 미치도록 달콤한 선물을 주셔서 괴로운 인생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 같다.
5
오사카 베이 타워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겨울 해라 빨리 져서 그런지 어둑해지려 하고 있었다.
“잘~~한다!! 이때까지 둘이 논 거야?”
정신이가 곱지 않은 시선으로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잘 놀다 왔어?”
종현이는 나와 미녀를 흘낏 보더니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당연하지.”
“질투도 좀.....작작해라!!! 형!!! 공연은 해야할 거 아냐?”
“누가 뭐래?”
내 대답에 종현이는 혀를 끌끌 차더니, 타겟을 미녀에게로 맞췄다.
“하여튼.......근데 뭐했어? 미녀야?”
“아.....수족관에도 가고....아...그리고 뭐지 동그랗고 큰 건데... 빙글빙글 돌아가는 거.
이름이 기억이 안 나네. 놀이공원에 있는 건데.....”
“덴포잔 대관람차 탔어?”
“응. 그거야.”
“호오!! 그렇단 말이지.....
미녀야 그럼, 그거 꼭대기 올라가면 정경 끝내주는데, 사진 찍었어?
사진 찍으라고 꼭대기에서는 꽤 오래 서 있잖아.”
“어? 어? 아...아니......”
“뭐야? 사진도 안 찍은 거야?
그럼 뭐 했어? 그까지 올라가서?”
종현이가 짓궂게 미녀를 바라보자 미녀는 이내 얼굴이 빨개진다.
“이거 봐. 이거....뭔가 있어.
둘이서만 손 붙잡고 나갈 때부터 알아 봤어.”
“시끄럽고....피곤하니까....
미녀 방이나 가르쳐 줘.”
“미녀 방? 3702호. 자, 키!”
“뭐야? 남자 방이랑 왜 이렇게 떨어져 있어?
거의 복도 끝이네.”
“나참....3702호는 그래도 바깥 정경이 끝내주거든.
내가 일부러 좋은 방 잡아 줬더니 괜히 옆에서 난리네.”
“알았다. 그럼, 내 가방이랑 기타 좀 방에다 넣어줘.
난 미녀 방에 짐 좀 넣어주고 올 테니까......”
“뭔 소리래 형? 형 방은 여기 아니야.”
“뭐?”
“난 눈꼴 시려워서 형 못 보겠어.
그러니.....죽고 못사는 둘이 같이 한 방 쓰시던가.”
“야!! 이종현! 지금 장난하냐? 무슨 소리야?”
“난 할 말 다했다. 키는 줬고. 그럼.....내일 봅시다.”
종현이는 손 쓸 틈도 없이 호텔방문을 닫아 버린다.
처음에는 장난하는 거다 싶어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아무리 두드려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안에서는 절대로 문을 안 열어 줄 테니 알아서들 하라며 버팅기고만 있었다.
설마 설마 싶어 30분 정도를 문을 두드리고 있는데도 녀석들은 들어가서는 소식이 없었다.
“형! 그냥 미녀 방으로 가라.
여기 싱글 침대 3개밖에 없어.
좁아 죽겠는데, 미녀 방에서 자라구!!!
아무리 그래 봐라 문 열어 주나!!”
미녀를 보니 어색한 듯 입술을 깨물고 있다.
이거 참....난감하게 됐다.
너무 오래 문을 두드렸는지 다른 방문들이 열리며 우리를 자꾸 본다.
미녀도 피곤한데 너무 오래 세워두는 듯해서 일단 미녀를 데리고 그 방으로 가기로 했다.
“이 자식들이!!!!”
그런데 문을 열어 보니, 더블 침대 하나가 다였다.
아무래도 종현이가 처음부터 계획했던 일인 듯했다.
“신우 형!! 어떡해요?”
미녀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다.
“왜? 걱정 돼?”
“예?”
“내가.......너 어떻게 할까봐 걱정 되는 거야?”
“아...아니에요. 그런 거......진짜 아니에요!!!”
아이는 열심히 아니라고 말하지만 얼굴은 이미 발갛게 물들어 버렸다.
“걱정 마. 녀석들 방문을 부수든, 할 테니.......
아니면, 바닥에서 자지 뭐.”
“신우 형........”
“와!! 저기 봐라. 멋진데?
야경 정말 좋네. 여기 51층짜리 호텔이라더니 야경 하나는 끝내 주는데?”
“우와!! 진짜네요. 정말 멋져요.
어...저기 초록색 동그란 거.....혹시 아까 탄...그 뭐더라...관람차 그거 아니에요?”
“맞는 거 같다.”
“와......신기하다. 오사카가 한 눈에 다 보이네요.”
“이젠....좀 괜찮아?”
“네? 뭐가요?”
“리허설할 때.......많이 긴장했잖아.”
“아.........”
아이의 얼굴에 다시 긴장하는 기색이 떠오른다.
“많이.....걱정 돼?”
“네. 꼭.......수족관에 갇혀만 살아서 넓은 바다에 내놔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두려워만 하고 있는 거 같아요.
그런 제 자신이 한심해요.
공연이 두려우면 안 되는 건데......”
“왜....두려운 건데?”
“실수하고.....잘 못할까 봐......걱정 돼요.
우리 밴드에 폐 끼칠 것 같고.......”
“미녀야, 아까 대관람차 탈 때 무서웠어?”
“예? 아...아니요.”
“왜...안 무서웠어?”
“생각보다 천천히 올라갔고....또....어차피 박스 같은 데 들어가 있고, 신우 형이 같이 있어 주니까......”
“그래.....그거면 돼. 넌.....수족관에 길러지다가 갑자기 바다에 던져진 고래가 아니야.”
“예?”
“삶이라는 것도.....대관람차처럼....그렇게 아주 천천히 올라가고 아주 천천히 내려와.
또 천천히 내려온 만큼, 다시 천천히 올라가고.....
그렇게 돌고 도는 거겠지.
그래도......박스 안에 있어서 무섭지 않았잖아.
울타리처럼.......내가 니 옆에 같이 있을 거니까........ 혼자가 아니니까......
갑자기 바다에 던져졌다 해도, 미녀는 나와 함께, 나라는 울타리 안에 같이 있는 거야.
함께.......바다에 적응해 가는 거야.”
“신우 형......”
“어차피......관람차를 탄 건 우리야. 밖에서 우리를 볼 수도 없고, 우리 대신 탈 수도 없어.
그렇게 올라가면 올라가나 보다 할 거고, 내려가면 내려가나 보다 할 거야.
중요한 건........그 안에 탄 우리야.
우리가 즐거워야, 세상이 즐겁지. 우린....그냥....세상이라는 관람차를 타고 바다에 나와 있을 뿐이야.”
“........................”
“잊지 않았지?
한 명의 청중을 위해 노래 하라!!!
그 한 명의 청중인 고미녀 너 자신!!
너 자신을 위해서 노래 해. 그거면 돼.
잘하고 못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야.
어차피 천천히 올라가고, 또 천천히 내려올 거야.
늘......인생의 관람차는 돌고 있을 뿐이야.”
“한 명의 청중.........”
“그래......너 자신!
고래가 바다를 꿈꿔서, 바다에 나갔다 해도 슬플 거라고 했지.
정말 그럴까?
적어도 내 세계가 수족관이라는 걸 안 이상, 자신이 좁은 세계에 있었다는 걸 안 이상,
바다로 나가려고 노력한 이상, 그 고래는 다른 수족관의 고래와는 달라.
그 넓은 바다를 다 품을 수는 없겠지.
그러나 적어도....자신이 사는 동안, 천천히 그 바다를 여행하겠지.
비록 천천히 헤엄친다고 해도, 그 고래는 바다에서 헤엄치는 거야.
수족관에서는 만족하지 못하는, 꿈을 꾸는 고래라구.”
미녀가 내 눈을 빤히 바라본다.
그런 아이를 향해 웃어준다.
“그럼....저도.....꿈꾸는 고래...인 건가요?”
“당연하지. 나도....마찬가지야.
바다가 너무 넓어서 겁은 나지만, 그래도 수족관이라는 내 세계를 깼으니까......
바다를 만날 수 있는 걸 거야.”
꿈꾸는 고래........
어쩌면, 이 꿈꾸는 고래 이야기는.......나 자신을 위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나에게 해 줘야 할 이야기를, 아이에게 해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인생이 저 대관람차처럼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열심히 오르고 내려오고 다시 오르고 있다는 것이.....
힘이 된다.
6
아무래도 미녀와 단 둘이 한 방에 있기가 뭐해서 호텔 방이 빈 게 있는지 알아본다며 혼자 내려왔다.
그런데, 역시 빈 방은 없었다.
주말이기도 했고, 인디밴드 축제 때문에 아무래도 다 찬 듯했다.
“어쩌지......”
정말 난감한 상황이다.
일단 바람이나 쇄며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싶어서 밖으로 나왔다.
오사카의 겨울도 밤은 차가웠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니, 어머니가 떠오른다.
말씀 드려야 할 것 같다. 이젠.......
“여보세요.”
“어머니.......”
“신우야!! 잘 지내니? 아픈 덴 없고?”
“네. 아픈 데 없어요.”
“그래....그럼 다행이다.
근데....혹시 아버지 연락 왔었니?”
“네? 아니 안 왔었어요.”
“그래? 그렇구나.”
“왜 그러세요?”
“아니야. 혹시나 싶어서........
근데.......밖이니?”
“네. 오사카 공연이 있어서 오사카에 왔어요.”
“아.....그랬니? 오사카.....오래됐구나.”
“네....”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오사카에 왔었다.
그때도 카이유칸에 들르고, 대관람차를 탔었다.
“어머니.....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래.”
“저.......미녀랑 사귀게 됐어요.”
“뭐? 어떻게? 같이.....있는 거니?”
“네.”
“그랬구나.”
“근데 해결된 건 없어요.
아직.....태경이에겐 얘기하지 않았어요.”
“미녀 양 마음은 어떤 거니?”
“모르겠어요.”
“그랬구나........”
“어머니, 근데, 왜.....부산에 갔을 때, 미녀도 절 잊는 게 힘들 거라고 하셨어요?
그때 미녀는 이미 태경이를 만나고 있을 땐데......왜 그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글세......그때 그래 보여서.......
미녀 양이 널 많이 의지하는 거 같아서......
그 마음이 남자를 향한 것이든, 아니면 사람을 향한 것이든.......
접어야 한다면 힘들 테니까......”
“제가......제 고백이.....미녀를 힘들게 하는 걸까요?”
“후회하니?”
“아니요. 지금이 너무 행복해서........겁이 나요.
내 마음을 그냥 고백하는 거뿐이라고......
미녀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태경이에게 다시 보내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미녀를 더 힘들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래.....신우 니 고백이 미녀 양을 더 혼란스럽게 하고 있겠지.
그래도,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하고 후회하는 게 훨씬 나아.
어쩌면 미녀 양을 위해서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었을지도 몰라.”
“그런데 두려워요.”
“뭐가?”
“제가......이 아이에게 집착할까봐........
아이를 숨 막히게 할까봐........
내 마음이 미녀에게 구속이 될까봐........
그게 두려워요.
그래서.......
자꾸만 욕심 내는 제 마음에 돌을 매달아요.
너무 많이 사랑하면 안 된다고....
더 사랑하면 안 된다고.......”
“우리 신우가......진짜.....사랑을 하는구나.
신우야, 그래도 이 시간들도 다 지나갈 거야.
그리고 지나가고 나면, 이 시간들이 정말 아름답게 니 가슴 속에 자리 잡게 될 거야.
그러니 그렇게 시간이 흐르도록 내버려 둬.”
시간이 흐르도록........그렇게 내 마음을 그냥 내버려두면........
나중에 떠나보내야 할 땐.....어떡하죠?
제가.....보낼 수 있어야 할 텐데......그럴 수 있을까요?
이렇게 마음은 깊어만 가는데......
달콤함을 알아버렸는데......
제가.....이 아이 없이.......살 수 있을까요?
“하아..........”
한숨을 쉬며 돌아서는데 바로 앞에 아이가 서 있다.
“미..녀야!!”
“신우 형!!! 도대체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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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많이 늦었습니다.
오랜 만에 썼더니...더 마음에 안 드네요.
그래도 너무 기다리시는 듯해서.....급히 올려둡니다.
교정도 봐야하는데, 너무 졸려서 좀 자고 봐야겠어요.
오타가 있더라도 너그러이 봐주시길....
주말 잘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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