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우 이야기 35> 신은 적어도 하나는 남겨 주신다.
1.
“신우 형! 전화 온 거 같은데?”
“그래?”
종현이가 테이블 위에 올려둔 내 전화를 전해 준다.
그런데 모르는 번호다.
한국 연결 번호인 듯한데, 마실장님 번호도 아닌 알 수 없는 번호가 뜬다.
“여보세요.”
“아버지다.”
굵은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심장이 꽉 하고 막혀온다.
아버지.......
“듣고 있는 거냐?”
“예. 듣고 있습니다. 아.버.지.”
잊고 있었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즐거워서 그만 잊고 말았다.
내 어깨를 짓누르는 짐이 무엇이었는지 까맣게 잊고 말았다.
“일본 생활은 마음에 들었나 보지?”
“.........지금 멤버들과 같이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식당에서 빠져나와 복도로 나갔다.
창문으로 오사카의 시내가 시원하게 내다보였다.
“예, 말씀하세요.”
“너!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거냐?”
“...................”
“설마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래, 아버지는 모르는 것이 없으신 분이다.
어떤 식으로든 아실 거라고 생각했었다.
미국에 가는 척해 봐도, 그렇게 한국에 알리지 않아도,
어머니에게 연락처를 남기지 않아도,
아버지는 다 아실 분이었다.
그래도 조금 시간은 벌고 싶었다.
어쩌면 의외로 시간을 벌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보다 늦으셨네요.”
“그래. 조금 기다렸다. 니가 정신차리고 돌아오지 않을까 싶어서.......
근데, 전혀 소식이 없더군.”
“...................”
“이제 그만큼 했으면 됐다. 그만 들어와!!”
벽과 마주한 느낌이다.
마치 스쿼시를 하는 것처럼 공을 아무리 쳐대도 그 공은 내게 돌아왔다.
내가 세게 치면 칠수록 공은 내 힘보다 더 세게 돌아왔다.
“.......싫....습니다........”
쥐어짜는 듯이 나온 목소리........
듣기 싫은 내 목소리........
언제쯤....난 언제쯤........이 사람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을까.
미칠듯한 굴레. 그 굴레가 또다시 내 숨을 막히게 한다.
“강신우!!!!!”
“.................”
아버지는 한동안 아무 말씀이 없다.
“너! 그 여자애 때문이냐?”
“예?”
여자애? 미녀?
미녀에 대해서도 아시는 건가?
아.......아버지라면 당연히 아실 것이다.
날 찾아낸 분이시니, 내 주변에 누가 있는지 당연히 아실 분이다.
“고미남인가......그 쌍둥이 여자애.......
그 애 때문이냐고!!!!!”
“그 애.....때문만은......아닙니다. 전...제..음악..”
“뭐야!! 결국 그 여자애 때문이라는 거군.”
“아니, 그게 아니라.....”
“일단 한국에 들어와!!”
“아버지!!!!”
내 말은 전혀 듣지 않는 벽.
아버지는 모든 것을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고 계신다.
나는 언제쯤...내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들어와라! 니가 있을 곳이 아니야!”
“제 얘기도 좀 들어주세요!! 제발요!!!”
“니 어머니.....많이 아프다.
그러니 어서 들어와!!”
이젠 어머니 얘기까지 하신다.
내가 어머니에게 약한 걸 아는 아버지니 어떤 식으로든 필요한 대로 어머니 카드를 쓰시는 것이다.
또 그렇게 날 묶어 두려는 것이다.
“또...또...어머니 얘긴가요?
어제도 어머니와 통화했었어요.”
“니 어미는 니가 걱정할까봐 아무 말도 못한 거야.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는 놈이 어미가 아프다는데 들어오지도 않겠다는 거냐!!”
“그렇게 걱정되시면 아버지가 잘 하시지 그러셨어요?”
“뭐야!! 이놈이!!!!
잔말 말고 어서 들어와!”
“싫습니다. 전 여기서 하고 싶은 공부...할 겁니다!!”
“흥? 딴따라 짓 말이냐?
니가 언제부터 그 딴따라를 잘했다고 그러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기집애 하나 때문에 겉멋이라도 든 거냐?
배가 골아보지 않아 무서운 게 없어?
니가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도, 니 애비가 피땀 흘려 번 돈이 있어서 그랬던 거야.
그만큼 봐줬으면 됐다.
잔말 말고 들어와!!
빨리 들어오는 게 좋을 거다!!!”
달칵.......
뭔가가 지나간 거 같은데......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건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알 수가 없다.
내 오른손 안에 든 휴대폰만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다.
“한번만....한번만이라도.......
제 얘기 좀......들어주시면......안 됩니까?
아...버...지.......하아........”
자꾸만 저 깊은 곳에서 한숨이 나온다.
창밖으로 하늘이 바다와 맞닿아 있다.
하늘과 바다가 구분되지 않는, 그 푸르름 속에서 난 주먹만 쥐고 있을 뿐이다.
2
“신..우 형.......”
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괜찮아요?”
“응..........”
난 괜찮다는 듯, 웃어보인다.
그런데 미녀의 표정이 너무나 안 좋다.
“왜...그래?”
“신우 형........제발요. 제발......그렇게 웃지 말아요.”
“응?”
“제발........그렇게........웃는 척 하지 말아요.”
“웃는.......척?”
“웃고 싶지 않으면 웃지 마세요. 화가 나면 화를 내요.
억지로 괜찮다고....그런 말도 하지 말구요.
그냥........편하게........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요.”
아이의 눈이 맑다.
맑은 눈망울 안에 내가 오롯이 보인다.
아이는 늘....내 눈과 마주한다.
그 거리낌 없는 태도에, 그 맑은 눈에........
똑바로 바라봐 주는 그 눈 때문에.......
이 아이에게 그토록 빠졌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미녀야, 니 눈에 내가 보여.”
“예?”
“니 눈 속에........내가 보인다구.”
“음.......저도 보입니다.”
“어?”
“신우 형 눈에도....저만 있거든요.”
“늘.....그랬어.”
그래 늘 그랬다.
내 눈에 다른 걸, 다른 사람을......담아 본 적이....없는 것 같다.
미녀를 만나기 전에는 그 어떤 것도 담고 싶지 않았었고,
미녀를 만난 이후에는 미녀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담을 수가 없었다.
“저도.....알아요.”
미녀가 갑자기 내 품 안으로 깊이 들어왔다.
얼떨떨하게 서 있으니 미녀가 내 등 뒤로 손을 감싸고 꽉 껴안았다.
“미..녀야!”
내 품 속 가득 미녀의 감촉으로 가득 찬다.
내 등에 닿은 미녀의 손이 따뜻하다.
참으로 다행히도.....
너무나 다행히도......
신은 내게.......따뜻한 사람 하나는......남겨 주셨다.
정말로.....다행히도........
내가 숨 쉴 수 있게 해주셨다.
3
식당 안으로 들어가니 멤버들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
“왜들 그래?”
내가 무심한 듯 말을 던져보지만, 종현이도 민혁이도 정신이도 뭔가 무거워보인다.
“형! 괜찮아?”
“뭐가?”
종현이 녀석....뭘 걱정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다.
“걱정 마. 별 일 아니야.”
“뭐가 별 일이 아니야? 형.....A.N.Jell 아버지 때문에 나온 거라며?”
“네?”
종현이의 말에 미녀가 깜짝 놀란 듯 숟가락을 놓는다.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마실장님께 대충 들었어.
형...아버님이 회사든, A.N.Jell이든 건드리실 수도 있다고.....”
“풋~~ 아니야. 그 얘긴 내가 안 사장님께 뻥친 거야.”
“뭐?”
“우리 아버지.......지독한 장사치야.
주판 두드려 보고 돈 된다 싶으면, 절대로 감정적으로 행동하실 분이 아니지.
지금 A.N.Jell이 우리 회사를 먹여 살리는 거나 마찬가진데.....
아버지가 그걸 건드린다구?
절대 그런 일은 없어.”
“그럼....형은......왜 그런 소리까지 하며 A.N.Jell을 나온 거야?”
“그래야......내가 뭘 원하는지 알 수 있으니까.......
그리고......내가 진짜 잘 하는 게 뭔지....알고 싶었거든......”
모두들 무슨 소린가 싶은 표정이지만, 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독한.....삶의 굴레를 이 아이들에게 다........드러낼 수는 없었다.
아니 그걸 이야기함으로써 내 자신이 내 굴레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4
“형! 나랑 얘기 좀 하자.”
다들 짐을 싸고 있는데, 종현이가 갑자기 나를 불러낸다.
“왜?”
“하나만 물어 보자.”
“그래.”
“왜........우리한테 온 거야?”
올 것이 온 것 같다.
내가....이 팀에 온 이유.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하기에는
굳이 이 팀일 이유는 없었을 것 같다.
----------------------------------------------------------------------------
“우와!!! A.N.Jell을 직접 보다니...정말 영광입니다.”
곱슬인 건지 파마를 한 건지 꼬불꼬불한 머리에 4차원 같은 녀석 하나가 사장님과 함께 우리 연습실로 들어왔다.
태경이는 벌써 짜증난다는 표정이었다.
나 역시 매 한 가지였지만, 애써 접대용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다들 인사해. 내가 일본 가서 건져온 Blue ocean이다!!
여기는 이종현군. 그리고 종현이 넌 우리 A.N.Jell 멤버 다 알지?”
“그럼요. 안녕하세요? 전 이종현입니다. 반갑습니다.”
넉살 좋은 웃음을 짓던 약간은 촌스러웠던 녀석이었다.
“앞으로 종종 보게 될 거야.
내가....몇 번이고 가서 설득해 온 녀석이야.
인디밴드로 시작한 실력 있는 녀석이고, 이번에 새로 몇 명 더 넣어서 밴드를 만들 거야.
아직 데뷔는 안 하겠지만, 종현이가 하던 대로 일본에서 인디 밴드로 자리 잡아 보려구.”
“형! 왜...안 하던 짓해?”
태경이는 겨우 한 마디를 내던졌다.
“무슨 소리야!! My dream이 밴드였어!!
그것도 Japan 신주쿠에서 기타 하나 매고 멋지게 노래 부르는 거였다구!
뭐! 종현이가 그렇게 gorgeous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 녀석 실력이 끝내주니까......”
사장님의 말에도 그닥 믿음이 가지는 않았다.
집시 스타일의 촌스러운 이 녀석이 그렇게 대단한 실력을 갖춘 건지......
녀석은 갑자기 내 기타를 보더니 감탄을 하기 시작했다.
“와우!! 이거 정말 좋은데요?
한번 만져 봐도 돼요?”
나는 그러라고 기타를 풀어서 넘겨줬다.
그러자 녀석은 한 번에 줄을 튕기더니 바로 일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Plastic tree - alone again, wonderful world>
“もう、会えないんだな。嘘みたいだな。(이젠, 만날 수 없는 거겠지. 거짓말 같아.)
眠り方も忘れたみたし。(잠드는 방법도 잊어버릴 것 같아.)”
현란한 기타 연주도, 대단한 실력을 보여준 것도 아니었다.
녀석은 그저 한 번씩 줄을 내려 쳤을 뿐이었다.
목소리가 매끄럽다거나 한국의 아이돌 분위기가 아니었다.
거칠었다.
허스키한 소리에 끊어지는 노래.......
연주도, 노래도 거칠었다.
그런데........그 연주가........이 녀석을 달리 보게 만들었다.
태경이의 매끄러움과는 다른 거친 듯한, 길들여지지 않은 듯한
기교와는 상관없는 듯한 그 연주가........내 마음을 움직였다.
녀석은 정말........자유로워 보였다.
“이거....무슨 노래야? 니가 직접 만든 거야?”
내 물음에 녀석은 피식 웃는다.
“그럴 리가요? 이거 모르세요?
Plastic tree의 ‘alone again, wonderful world’라는 곡인데.......”
녀석의 입에서 처음 들었다.
Plastic tree라는 밴드가 있다는 것도, 이런 곡이 있다는 것도........
인디 밴드........
내게 인디 밴드는..........종현이.......그 자체였다.
(Plastic tree의 ‘alone again, wonderful world' 노래와 가사를 보시려면, 아래의 블로그에 들어가 보세요.)
http://blog.naver.com/xerocy/70077867979
------------------------------------------------------------------------
내 눈 앞에 종현이가 어서 대답을 내놓으라는 듯이 서 있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너를 선택한 이유.........
음악을 하고 싶었는데....왜....이곳을 선택했을까.
“형.......난....형을 믿어.”
“신파...찍냐?”
“형!!! 나....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야.”
“알아.”
녀석의 눈이 많이 진지하다.
안다. 이 녀석이 무엇 때문에 이러는 건지........
블루밴드를 이용하고 있냐고 묻고 있는 거다.
A.N.Jell이 다칠까봐 피하고서는 블루밴드에 와서 이용한 거냐고........
“내가......널.....이용한 거 같니?”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그렇대?
형이 왜 우리를 선택했는지 알고 싶을 뿐이야.”
“난....처음에.......널 선택했어.”
“뭐?”
“널 선택했다고. 블루밴드는 몰랐어. 누가 있는지도....
이름만 대충 들었어.
난......그냥........널 선택했어.”
“왜?”
“A.N.Jell은 떠나야 했고, 사장님은 그래도 계속 자신의 그늘 아래 있길 바랬고,
그 와중에 난.......내 음악을 찾고 싶었고..........
그리고..........”
그래......그랬다.
잊을 수가 없었다.
기교도 없고, 꾸미지 않은 듯한, 날것의 음악을.........
녀석이 보여줬었다.
그 날것을 찾아가고 싶었다.
그 날것을 나도 만들어 보고 싶었다.
나도.......멋지게 보이는 연주 말고, 팬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써 멋있는 척하는 그런 음악 말고.......
겉멋 없는 그런.....날것을 연주하고 싶었다.
“니가 연주했던 ‘alone again, wonderful world’.....
그 곡을 연주해 보고 싶었어.”
“............”
“더......필요해?”
“아니........됐어. 무슨 말인지...알겠어.
형....그 때 내게 물었었지. 이거 무슨 곡이냐구.......
그 전까지....형, 사람 눈 아니었던 거 같아.
뭔가......얼음 같은......그런 눈이었는데..........
나한테 무슨 곡이냐고 물을 땐, 사람 같았어.”
“사..람...?”
“사실은......조금 느꼈었어.
이 형....뭔가 굉장히 갑갑하구나........
이젠 됐어!!!”
“종현아! 우리 밴드에겐 피해 안 가도록 할게.
혹시...아버지가.......”
“아니!!!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내가 궁금했던 건, 형이 혹시 우리 밴드가....도피처였던 건 아닌가........였어.
아버지를 벗어나기 위해 도망쳐 온 도피처........
분명......아닐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형의 입으로 듣고 싶었어.
짐 싸자.”
녀석이 방으로 걸어가더니 갑자기 우뚝 선다.
“형! 나 사실........형이 여기 오기 전까지...... 여기서 형이 노래하기 전까진
형이....A.N.Jell의 얼굴 마담인 줄 알았어.”
“풋~~!! 고맙다.”
“별 말씀을.....
아, 그리고......”
“뭐?”
“한 가지 더 있잖아. 형이 여기 온 이유.
하기야 꼭 여기 올 이유는 아닐 수도 있겠다.
그저 떠나고 싶은 이유였나?”
“무슨 소리야?”
“형도...참...신기한 인생이다.
놓으려고 떠나왔는데, 떠나와서 얻다니.........
완전히.......놓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걸까........”
완전히 놓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다........
녀석의 말이.....아주 오랫동안 내 마음을 떠다닌다.
5
도쿄에 돌아와서는 쉴 틈도 없이 아오이에게 다녀왔다.
녹음을 새로 해야 한다는 얘기에 나와 종현이는 일단 녹음실로 향하고 나머지 멤버들은 집에서 쉬기로 했다.
오후 늦게 돌아오니 미녀가 없다.
“미녀...어디 갔어?”
“뭐야? 오자 마자 애인부터 찾냐?”
종현이가 옆에서 빈정거리자, 정신이가 버럭 댄다.
“누가 애인이야? 미녀 누나 애인은 나라구!!!”
“곱게 미쳐라! 좀!!”
민혁이는 정신이의 목에 또 헤드락을 해댄다.
“장난치지 말구! 미녀 어디 나갔어?”
“아....아까 전화 받구 나가던데?”
“누구?”
“나도 모르지. 누나가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하는 말밖에 안 했어.”
민혁이는 정신이의 목을 조르며 내게 대답해 준다.
“이상하네. 미녀가 전화 받을 사람이 없을 텐데........”
“형! 너무 과잉 보호하는 거 아니야?
미녀도 사생활이 있다구.
자꾸 그렇게 감시하면 여친이 숨막혀 해.
좀 적당히 느긋하게 좀 있어라.”
종현이까지 내가 너무 난리라고 하지만, 뭔가 자꾸만 이상하게 느껴진다.
겨울해라 벌써 뉘엿뉘엿 지는 것 같은데 미녀는 들어올 생각이 없다.
전화를 몇 번이고 걸어 봐도 받질 않았다.
자꾸만...불안해진다.
“이상해.......”
미녀의 방에 들어가 보니 작은 상 위에 휴대폰이 놓여 있다.
놔두고 간 모양이다.
이러니 연락이 안 되지........
그냥 나가려다 혹시나 싶어서 전화기를 열어봤다.
발신자 번호를 검색하는데 뭔가 이상했다.
분명..........그 번혼데.............
황급히 내 휴대폰을 열어 발신자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
“제길..............”
난 미친 듯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형!! 형 어디가!!!! 저녁 안 먹어!!!”
녀석들이 잡는 소리가 들렸지만, 난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뛰어 나갔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면서.....무작정 지하철 역으로 뛰었다.
지하철 역으로 들어가려다 혹시나 싶어서 입구 왼쪽 벤치 쪽을 보니.....미녀가 앉아 있었다.
“고미녀!!!!”
“아........신우 형!”
“너!! 너!!!”
미녀의 눈이 빨갛다.
“왜!!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신우 형.........”
6
신우 형과 종현씨는 도쿄에 도착해서 쉬지도 못하고 바로 녹음실로 향했다.
우리만 집에서 쉬려니 많이 미안했다.
오면 맛있는 거라도 해 드리려고 이것 저것 요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태경이 형님 전화는 이 번호가 아닌데........
한국 쪽에서 온 전화 같았다.
마실장님이....전화를 바꾸셨나?
“여보세요.”
“고미녀씨?”
“예. 전데요.”
“나........강신우 아버지는 되는 사람이요.”
“!!!!!!!!!!”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참 정신없이 앉아 있었다.
심장이 계속 떨리는 것 같았다.
긴자(キンザ)로 나오라고 하셨다.
기다리고 있겠다고........
지하철 역에서도, 지하철을 내려 말씀하신 cafe를 찾아 걸어가면서도,
내 심장은 멈추지 않고 뛰어대고 있었다.
태경이 형님 어머니를 만날 때도, 이런 마음은 아니었는데........
그때는 많이 속상하고 분한 마음뿐이었는데......
지금은.....뭔가 모르게....자꾸만 내가 작아지는 기분이다.
“고미남 군과 많이 닮았군.”
“안녕..하세요?”
그분의 첫마디는 오빠 얘기였다.
어쩌면 저분이 보신 그 오빠의 모습은 내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뭐...마실 텐가?”
“전.......물이면 됩니다.”
아무 표정 없이 날 보시더니 쥬스를 두 개 시키신다.
옆 테이블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두 남자가 앉아 있다.
계속 우리 쪽을 보는 걸 보니, 아마......이 분의 보디가드...분들이신 듯했다.
“고미녀 양,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왜 우리 신우를 따라 일본에 온 건가?”
“예?”
신우 형을 따라 일본에 왔다구?
이 분의 대화법....너무나 이상했다.
무조건...자신이 생각한 대로 상황을 만들어 가시는 듯했다.
뭔가......답답하다.
“전....신우 형을 따라 일본에 온 게 아닙니다.”
“그럼....왜 온 거지?”
“그건....제 개인적인 이유라서 말씀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 왜.......황태경군과 연관이 있어서?”
“!!!!!!!!!!”
태경이 형님에 대해 이야기 하신다.
뭔가 굉장히 억울한 듯도 하지만, 태경이 형님의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죄스럽다.
“아무 말 없는 거 보니 맞는 거 같군.
꼭 그렇게 신우와 황태경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쳐야겠나?
내가 보기엔 황태경과 사이가 안 좋으니 신우를 이용하는 거 같은데?”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그런 거.......아닙니다.”
“그래? 희한하군.
황태경 군이 미국에 가기 전에 만났었는데, 고미녀 양이 자기 여자라도 되는 듯이 이야기하던데....
황태경 군과는 이야기가 아직 안 끝났나 보지?”
화가 나는데, 정말 화가 나는데,
그 말들이...다 맞는 거 같다.
난....결국 아무 것도 끝낸 게 없는 거다.
아무 것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질질 끌고 있는 거다.
단지 속상한 건, 그 모든 과정을 다 생략하고 결과로만 말하고 있는 거......
그것이 속상하다.
다 똑같아 보이는 결과라 하더라도,
그 속에는 수많은 과정들이 있는 건데,
이 분은 오로지 결과만을 보고 이야기하신다.
“이제......그만 하지?”
“예?”
“그만, 신우 놔 주라구.
신우....할 일이 많은 녀석이야.
내 사업도 이어가야 하고.....
이놈이 아마 지금은 여자에 정신 팔려 있지만, 곧 냉정해질 거야.
어차피 내 피를 받은 놈이야.
그렇게.....오래 가지 못해.
고미녀 양이 신우를 놔 주고 지금 계속 음악을 하고 싶다면, 내가 밀어 줄 수도 있어.”
정말 웃긴다.
드라마인가?
대단한 집안의 남자를 만난 것 때문에 온갖 수모를 겪는 그런 여자........
내 얘기가 돼 버린 건가.......
“고미녀 양?”
“싫.......습니다.”
“뭐?”
“도움...안 주셔도 됩니다.
그리고.......신우 형을 놔주고 안 놔주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건......신우 형과 저.......두 사람의 문제입니다.
아무리.....신우 형의 아버님이시라도 간섭하실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신우 형의 아버님이 픽~ 웃음을 터뜨리신다.
억지로 말씀 드린 건데, 아버님은 가소롭다는 표정이시다.
“신우가 언제까지 널 볼 거라 생각하는 거냐?
게다가 넌 황태경과도 만나고 있으면서 양쪽 다 잡고 있겠다?”
“!!!!!!!!!!”
“좋다. 니가 지금 이러는 걸.....어려서 그렇다고 생각해 주지.
근데 언제까지 신우가 널 좋아하겠어?
게다가 넌....이제 겨우 스물을 넘겼을 뿐이야.
이러다 말 뿐이야. 굳이 이렇게 신우 발목을 잡아야겠느냐?
지금 만나봤자.....길어야 2-3년이면 끝나.
누가 이런 감정 장난이 끝까지 간다고 하더냐?
그래서 그깟 장난 때문에 지애미가 아픈데도 한국에 못 보내주겠다? 그거냐?”
“.....신우 형 어머님께서 편찮으신가요?”
“그건.....니가 알 바가 아니야.
적어도 넌 지금 모자 사이도 막고 있고, 부자 사이에도 금을 내고 있어.
그게 바람직한 관계라고 생각하는 거냐?
곧 없어질 감정........그것 때문에 가족의 가슴에 비수를 꽂아야 되겠냐고!”
“말씀하신 것처럼.....신우 형의 마음이, 제 마음이.....정말 어떤 마음인지......
얼마나 오래 갈 진실한 마음인지......그건 저도 잘 모르지만,
모두가 금방 없어진다고 저희도 그럴 거라는 단언은 하지 말아 주세요.
적어도.....그냥 가슴만 뛰는 관계는 아니니까요.
세상의 사랑이란 것이 말씀하신 대로 2-3년밖에 안 간다면 부부들은 어떻게 사는 건가요?”
“뭐야? 허~~ 맹랑한 아가씨네.”
“적어도.....사랑이라는 게..........2-3년 후에는 다른 형태도 있는 거 아닌가요?
처음...가슴 뛰던 그런 마음은 달라졌다 하더라도,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고 해서,
사랑이 없어진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그 때 가서.......사랑이 아니었다면, 그 때 다시 생각하면 되는 것이지
미리부터 지레 겁먹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죄송합니다. 전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난 인사를 꾸벅한 채 바로 몸을 돌렸다.
“어이!! 겁 없는 아가씨!!
난.......오늘....충분히 말했어. 그러니....후회는 하지 말게.”
갑자기 심장이 덜커덕 내려앉는다.
걸어 나오는 데도 자꾸만 다리가 후들거린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오늘.....이 분을 만나고 나서야, 왜....신우 형의 모습이 그랬는지 알 것 같다.
왜 그렇게 얼어붙어 있었는지.......
왜 그렇게 모든 것에 재미가 없어 보였는지........
왜 그렇게 억지 웃음을 짓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웃음이 얼마나 가슴을 에이게 했는지.....
이제...조금은 알 것 같다.
자신의 세계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아버지와
온갖 상처를 다 끌어안고 사시는 어머니......
그 사이에 어린 신우 형이......자랐던 거다.
예전에 난 왜...부모님이 계시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나만큼 불행한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저....무서웠다.
언제든지.....쫓겨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
“고미녀!! 너 자꾸 울면 안 돼!!!”
“응? 왜?”
넘어져서 울고 있는 내게 오빠는 굉장히 무섭게 말했었다.
“너 자꾸 울면 우리 쫓겨나!!”
“왜 쫓겨나?”
“왜냐하면...우린 이제 엄마도, 아빠도 없으니까.........
아무도 우리를 안아주지 않아.
우리 둘이 손 붙잡고 살아가야 해.”
“그래도 여기 계신 선생님들 잘 해 주셔!”
“그렇게 보일 뿐이야. 우리가 잘못하면 내보내 버릴 거야.”
난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머리에 회색 긴 천을 두른 분들이 늘 웃고 계셨는데, 왜...이렇게 웃고 계신 분들이 우릴 내보낸다는 걸까?
“정신 차려! 고미녀! 너 무조건 웃어야 돼.
많이 웃고, 착해야 우리가 계속 여기 있을 수 있는 거야!
알겠어?”
생각해 보니 오빠가 많이 변했다.
예전...아빠가 계실 땐, 저런 모습이 아니었다.
기억 속에 오빠는 뭔가...화가 나 있었다.
아빠를 찾아오시는 아줌마에게 화를 내고, 투덜거리고...
그래서 나까지 무서웠었다.
근데 이곳에 온 이후 오빠는 인사를 잘 하는 착한 어린이였다.
오빠의 모습에 처음에는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오빠도 우릴 내보낼까봐 무서워서 그랬나 보다.
굉장히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던 이곳이...점점 무서워진다.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곳에서......
하루하루가 무서웠다.
그래서...난 변했다.
넘어져도 절대로 울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제일 열심히 인사하고, 넘어져도 웃는 아이가 되었다.
그렇게 기를 쓰고 착한 애가 되려고 했다.
--------------------------------------------------------------------------
그래, 그래서 미사에도 제일 열심이었고, 기도에도 제일 열심이었다.
원장 수녀님이 수녀가 되어 보겠느냐고 하셨을 때도,
무조건 좋다고 했었다.
왜냐하면, 그래야 수녀님들이 좋아하실 것 같아서였다.
계속 여러 번 생각해 보라고 하셨지만, 생각하고 말고가 없었다.
그저 난.......쫓겨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이곳에 맞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수녀님이 되면, 쫓겨나지 않겠구나.........
오로지 그 생각만 들었다.
나를......“나”라는 존재를......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내 감정을 드러내는 건.........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늘 감추고, 늘 숨기고, 늘 아닌 척 하고 살았을 뿐이다.
그냥........사는 게......무서웠다.
너무나 무서웠다.
그래서........모두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려 했다.
그것만이.....내가 쫓겨나지 않는 유일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고,
또......내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이유가 될 것 같았다.
지하철 속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 중인 듯하다.
마치 옆 사람이 투명인간이라도 되는 듯이 행동한다.
어쩌다 부딪치기라도 하면, 굉장히 예의바른 미소로 미안하다고 말할 뿐........
생각해보면, 이 사람들도 모두........뭔가.......두려워서.......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다.
쫓겨나지 않으려고, 내쳐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이곳에서 아둥바둥 비슷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건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나를 내놓으면, 쫓겨날까 싶어서.......
모두들 겁이 나서.........저렇게 가면을 쓰고, 가면의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연기를 해 가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신우 형이 아버님을 만나고 나서야, 신우 형도, 나 자신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내 속에....어떤 응어리가 있었는지도 알 것 같다.
어쩌면, 신우 형을........조금......이해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이 사람도........
다 괜찮다고 말하는 이 사람도.......
아주 많은 짐을.....어깨에 지고 가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늘......어머니를 가슴아파했던.......이 사람의 마음도.......
그 가슴 아픈 마음마저........이 사람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내가 틀렸던 거다.
내 짐이.....내 인생의 짐이 가장 무겁다고 생각했던......
내 삶이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내가.......틀렸던 거다.
인생의 짐은........비교대상이 없는 거다.
다른 사람의 짐을 들어볼 수는 없는 것이니......
각자 자신의 짐을.......힘에 부대끼며 어떻게든 지고 가는 것일 뿐........
인생의 무게는...... 내 어깨의 짐은......
상대적인 게 아니라, 늘.......절대적인....무게였다.
“하아..............”
벤치에 앉았다.
아직은.........들어갈 수가 없다.
노을이 진다.
하늘은.....각자 자신의 색깔을 열심히 낸다.
섞일 수 없는 색들이 섞여서.......저리도 아름다운데,
사람은.....그럴 수 없는 걸까........
노을이 너무나 아름다워서..........눈물이 난다.
7
“고미녀!!!!”
“아........신우 형!”
신우 형이다.
어떻게 알고...나오신 거지?
“너!! 너!!!”
신우 형의 표정이 울 것만 같다.
“왜!!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신우 형.........”
“왜.......너 혼자 만난 거야!!!!
나한테 말했어야지!!!!!!”
“전....괜찮아요.....아.......”
신우 형은 그대로 품에 날 안아 버린다.
노을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났던 것처럼,
이 사람의 가슴이 너무 따뜻해서 눈물이 날 것 같다.
“미녀야...미안해...
한 번도....이런 식으로 널 잃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나 때문에 널 잃을 수도 있다는 걸....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오늘은....
너무....
두려웠어....
정말.......미안해..........”
그의 목소리가......젖어 있다.
난....늘....이 사람의 목소리를 젖게 만든다.
정말 이기적이게도, 내가.....이 사람의 목소리를 젖게 만들 수 있다는 게.........
정말......행복하다.
“행복이란........이런....거군요.”
“뭐?”
“행복은......이런 거라구요........
겨울이.....한 사람의 가슴이 얼마나 따뜻한지......가르쳐주는 거.....
늘......따뜻하면, 사람의 체온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를 테니까.......
그래서 주님께서.......겨울을 주시나 봐요.
지금.......당신 앞에 있는 이 사람이........축복이라고.........
그 말씀을 해 주시나 봐요.”
“미녀야..........”
이 사람이 날 바라본다.
걱정스럽지만, 따스한 눈길.........
그래서......신께 감사드린다.
“미녀야, 난........니가........상처 받았을까봐...........”
“신우 형...바보군요.
전...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어머니 뵙고 오세요.
어머니...정말 편찮으신 것 같아요.”
“미녀야!!!!”
“잘......다녀...와! 요! 알겠죠?”
신우 형을......내가 안아 준다.
그의 등을 토닥여 준다.
그는 아이처럼 내게 안겨 있다.
신은......모든 것을 가져가실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바닥까지........가져가시지는 않는다.
---------------------------------------------------------------------------
또 많이 늦었습니다.
이야기가 또 길어졌습니다.
이제....<신우 이야기>도 클라이막스로 향해 가고 있네요.
갈등이 있어야 이야기의 해결도 있는 법........
치열하게 갈등을 써야, 좋은 결말도 있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늘...읽어주시고, 부족한 글에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말....잘 보내시길......(__)
'미남이시네요 > (미남) 신우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우 이야기 37 - 집착과 사랑의 경계에 서서 (0) | 2010.08.02 |
---|---|
신우 이야기 36 - 최고의 하나 (0) | 2010.07.20 |
신우 이야기 34 - 두려워지는 순간, 사랑은 이미 시작되었다 (0) | 2010.06.20 |
신우 이야기 33 - 꿈꾸는 고래 (0) | 2010.06.13 |
신우 이야기 32 - '좋은 형'과 '좋은 남자' (0) | 2010.05.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