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남이시네요/(미남) 신우 이야기

신우 이야기 37 - 집착과 사랑의 경계에 서서

그랑블루08 2010. 8. 2. 21:56

<신우 이야기 37>. 집착과 사랑의 경계에 서서


 




1. 





초침은 일정한 간격으로 움직인다.

그러니 그것이 느리게 움직인다거나, 갑자기 빨리 움직인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상의 이야기일 뿐, 시간은 갑자기 느리게 흐르고 있다.

그 사람이 없는 며칠 간.......

겨우 손에 꼽을 수 있는 날짜 동안, 시간은 마치 약이라도 먹은 듯이 느려지고 있다.

언제쯤.......볼 수 있을까......

마치......그가 떠나버리고 나서 그 때의 느낌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고 있다.

마치.....처음 수녀원에 들어갔을 때의 그 느낌처럼......

세상이 두렵고 불안하다.

연습실에서 다들 열심히 악기를 두드려대고 있지만, 나만 혼자 남겨져 있는 듯이 느껴진다.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주저하면서 전화를 받으니 마실장님이셨다.


“오랜만이에요. 마실장님.”


<오우~! 고미녀양!! 잘 지내고 있지?>


“네.”


<좋은 소식 전해줄 겸, 전화했어.>


“예? 좋은 소식이라뇨?”


<오후에 별일 있어?>


“오전에는 연습실에 계속 있다가, 3시쯤에는 숙소로 돌아갈 거예요.

 근데 왜 그러세요?”


<그래? 잘 됐네. 그럼 오후에는 계속 집에 있을 거지?>


“네.”


<집에 가 보면, 누군가가 와 있을 거야.>


“누구요?”


<고미녀가 가장 기다린 사람...일 걸?>


내가 가장 기다린 사람?

그때부터 심장이 두근두근거리며 뛰기 시작한다.

오늘따라 연습이 느리게 느껴지고, 오늘따라 지하철이 늦는 것 같고,

오늘따라 내 걸음이 너무나 느린 것 같다.


“누나! 아까부터 왜 그래?”


“어?”


정신이가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아...아무 것도 아니야.”


“거참....이상하네. 아무 것도 아니긴 뭐가 아니야.

 갑자기 사람이 안절부절 못하지, 얼굴은 빨갛게 열이 오른 것 같지.....

 뭔 일 있어?”


“아니, 아니야.”


그러나 내 눈은 이미 숙소로 향하고 있다.

조금만 더 가면 도착이다.


두근거리며 뛰어간 그 곳에......그가 서 있었다.

그리고 내 심장은 쿵....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만다.





2. 





그곳에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그 사람이 서 있었다.


“태경....형님?”


나를 보자마자 구겨져 있던 그의 얼굴이 해맑게 펴진다.


“고미녀.......이제서야 보네.”


약간은 차가운 듯한 그의 목소리.

그러나 난 그의 목소리 사이에서 반가움을 읽어낼 수 있었다.

반가움도 잠시, 내 등 뒤를 살피던 그의 눈이 다시 찌푸려진다.


“뭐야? 다 남자야?”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인사도 하지 않고 얼굴만 찡그리고 있는 이 사람을 건방지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난 그가 낯설어 하고, 어색해 하고 있다는 게 너무나 잘 보인다.

그는 익숙지 않은.....사람일 뿐.


“태경이 형. 저 아시겠어요? 저 가끔 연습실에 들렸던 이종현입니다.

 블루밴드 리더구요.”


그 상황에서도 종현씨는 리더답게 먼저 인사를 했다.


“C.N.Blue...... 촌스러워.

 C.N.은 왜 달았냐? 니 취향이야? 아님 안사장 취향이야?”


태경이 형님은 특유한 씨니컬한 말투로 종현씨에게 아는 척을 했다.

그 말에 정신이도 민혁이도 뻥한 표정이다.

나나, 종현씨는 태경이 형님 성격을 알지만, 정신이나 민혁이는 형님을 실제로는 처음 보는 거니, 아무래도 충격이 클 듯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신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시잖아요. 안사장님이....뭔가 그럴 듯하게 하고 싶어하시는 거......”


종현씨의 말에 형님은 콧방귀를 끼시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렇지. 안사장이 촌스럽긴 해. 블루는 니가 단 거냐?”


“그렇죠 뭐.”


“나 참. 블루밴드나, C.N.Blue나....그게 그거다.

 그렇군. A.N.Jell도 그 나물에 그 밥이니....

 여튼....작명 센스하고는......”


그 말에 동조한다는 듯 종현씨가 어깨를 잠깐 으쓱한다.


“근데....C.H.O.R.D.의 코드야? 아님 C.O.D.E.의 코드야?”


태경 형님의 말에 종현씨의 움찔하는 것 같다.


“역시~~~! 형 대단하신데요?

 아무도 그렇게 물어본 사람은 없었는데.....

 사실 화음 기호 C.H.O.R.D.를 달려고 했었는데, 사장님이 C.O.D.E.로 바꾸셨어요.”


“흥~! 안사장! 무식하긴.....

 아마.....뭔가 앞에는 달아야겠고, 니가 코드 네임 어쩌고 하니까......

 당연히 code name인 줄 알았겠지.

 여튼...안사장! 무식하게 용감하긴...쯧!”


나도 처음 안 사실이었다.

코드가 화음 코드를 나타내는 코드인 줄은 이제야 알게 됐다.

왠지.......

그런 면에서 태경 형님은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진 듯하다.

오로지 음악이라는 곳쪽으로만 모든 감각이 이어져 있는 듯하다.


갑자기 형님은 내 옆에 서 있는 정신이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영 눈빛이 좋지 않았다.


“고미녀! 너......남자들이......너무 많다?”


“예?”


내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듣자, 형님은 정신이를 턱으로 가리켰다.

내 옆에 정신이가 바짝 붙어 있는 게 마음에 안 드셨나 보다.


“아.....이 친구는 이정신이에요. 베이스 기타 맡고 있구요.

 이 옆은 강민혁이고, 드럼 맡고 있어요.

 둘다 귀.여.운. 동생들이에요.”


난 ‘귀여운’에 힘을 줘서 발음하며 형님의 눈치를 살폈다.

동생들이란 말에 형님의 눈이 조금은 풀린 것 같았다.


“멤버는 이게 다야?”


순간 멤버들은 다 나를 보고 있었다.

종현씨와 눈이 마주치자 종현씨가 갑자기 고개를 옆으로 흔든다.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빤히 쳐다보자, 종현씨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이,

두 번째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고 조용히 “쉬~”라고 제스츄어를 해 보인다.

신우 형 얘기를 하지 말라는 것 같았다.


형님은 연습실을 이리저리 둘러보시며 얼굴을 찌푸리셨다.

아마.....너무나 열악하다고 생각하시는 듯 했다.

그는 조용하고 우아하게 연습실을 둘러보았다.

기타를 볼 때, 악기를 살필 때 그의 눈은 훨씬 빛나보였고, 훨씬 더 집중하고 있었다.

어두웠던 연습실에 빛 하나가 들어와 전체를 밝히고 있는.....그런 느낌이 들었다.


“흠흠.....”


형님이 갑자기 마른 기침 소리를 낸다.

그 소리를 듣던 종현씨는 뭔가 알아 챈 듯, 멤버들에게 눈짓을 했다.


“형, 그럼 둘러보세요. 저흰 윗층에 올라가 있을 게요.”


“윗층?”


“아.....여기는 연습실 겸 미녀 쉬는 곳이고, 윗층에 저희가 쓰는 방이 있거든요.”


“그래?”


뭔가.....형님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엿보인다.

그렇게 멤버들은 윗층으로 올라가고 나와 형님만 이 공간에 오롯이 남게 되었다.

어색해서인지......긴장해서인지.......

심장이 자꾸만 뛰어댄다.

겁이 나는 건가....반가운 건가......

아니면 이 사람의 존재자체가.....날 긴장시키는 건가........

늘 그랬듯이.......


멤버들이 올라가고 나서도, 형님은 조용히 악기들을 살폈다.

그러다 갑자기 내 방문을 발견하고는 문을 열어보신다.

아니나 다를까 얼굴이 심하게 찌푸려진다.


“여기...야?”


“예?”


“고미녀...방....”


“예.”


형님은 뭐라고 말씀하고 싶으신 듯 입술을 움직이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난 여전히 긴장한 채로 그렇게 형님을 바라보며 서 있다.

그는......

처음......그를 본 날처럼.....

여전히 아름다웠다.

신경질적인 그의 얼굴의 옆선도, 찌푸려진 듯한 그의 눈매도,

그 속에서 심하게 빛나고 있는 그의 눈빛도,

우아한 그의 자태도.........

모두....여전히 아름다웠다.

이 사람 하나로 그저 아무렇지도 않았던 일상이...빛을 잃어버렸다.

평범했던 연습실도 이 사람 하나 때문에 빛을 잃어버렸다.

그는.....그런 사람이다.

그의 내면에서 발산되는 카리스마로 모두를 숨죽이게 하는 남자.......

보고 있으면 숨 쉴 수 없을 만큼......강렬한.....남자........

그래서, 

그는 여전히.....아름다웠다.


“그렇게.....하고 싶었어?”


알 수 없는 말......

그가 묻는 말이 뭔지.....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뻥한 표정으로 있어선지.......그는 한 마디 더 붙였다.


“너의 노래........고미녀의 노래.......”


그리고 그의 얼굴에 평온한 미소가 번진다.

그 미소 앞에서 난....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난...그가 화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곳에 있으려고 왔냐고....

이게 뭐냐고.....

이런 후진 곳에서 음악이 그렇게 잘 되더냐고....

그런 말을 들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예상을 뒤엎고.....저런 미소를 보여주고 있다.

저렇게 평온하고, 저렇게 아름다운.......

내 심장을 울렁거리게 하는 그런 미소를 지을 줄은 몰랐다.


“형.....님.....”


그때였다.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그렇게 절대로 오지 않길 바라던 시간은 돌아오고야 말았다.

두 시간은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아니, 내가 그렇게 믿고 있었다.

이 두 시간들은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하지도 못했다.

난 어쩌면 두 시간은 다르게 흐르고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한국에서의 시간과, 이곳 일본에서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는 거라고......

두 시간이 겹쳐질 일은 없을 거라고...

나도 모르게 암시를 걸고 있었나 보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 잔혹하게도

그 두 시간을 교차시켜놓고, 날 향해 비웃고 있는 것 같다.


내 눈은 태경 형님을 향해 있었다.

갑작스런 문소리에 약간 짜증나는 눈빛으로 문쪽을 살피던 형님의 눈이 서서히 커져갔다.

그 눈을 보면서.......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온...것일까.......


그랬다. 정말.......그가 서 있었다.

헐떡거리는 숨을 고르며, 문을 잡고 서 있는

그러면서 얼굴 가득 반가운 미소를 머금은.......

나의.....

나만의....

신우 형이 서 있었다.


“강.....신우?”


그 소리와 함께.......

평행으로 달리던 두 시간은 조우했다.

그렇게......두 시간의 경계는 깨져버렸다.





3. 





태경이 형님이 신우 형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신우 형의 얼굴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태경이 형님도, 신우 형도, 서로를 이곳에서 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테니....

너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신우 형의 얼굴이 날 향하고 있는 걸 알면서도, 난....도저히 신우 형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강신우! 니가 왜 여기 있어? 미국 간 거 아니었어?”


“아니........”


“뭐야? 너도........그럼, 씨엔블루.......멤버라는 거야?”


“응.”


“잠깐.....잠깐......너 혹시.......정.용.화....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거냐?”


신우 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태경 형님은 전체 상황의 밑그림을 이미 그려내고 있었다.


“그랬군.......그랬었군........

 그런데.......말하지....않았던 거군.......”


뭔가 알겠다는 듯, 같은 말을 되뇌던 태경 형님이 갑자기 내 눈을 뚫어질 듯 쳐다본다.

그 눈빛이 불안해 보인다.

아니, 불안한 건 나일지도 모른다.


“내가......내가 미녀에게 말하지 말라고 부탁했어.

 우리 아버지 어차피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아셨지만,

 그래도 시간을 벌고 싶었어.”


“그럼, 지금은 아신다는 거야?”


“응. 얼마 전에......다녀가셨어.”


두 사람 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신우, 하나만 물어보자.”


“말해.”


“너...정말......일본에 온 이유.... 떠나기 전 내게 말했던 이유와 같은 거냐?”


“뭐?”


“다른.......이유가...........있는 거 아니냐구?”


“어떤......다른 이유?”


“하아..........”


두 사람은 끝없이 질문만 하고 있었다.

떠나기 전....형님과 신우 형이 만났었다는......그 사실 외에 내가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침묵.....

끝없이 이어질 듯한 침묵을 깨고, 형님이 나를 돌아보며 말을 건넸다.


“고미녀, 나가자.”


“예?”


형님은 앞서서 연습실 밖으로 나갔다.

난 주저주저 하면서 문을 향해 다가갔다.

문 옆으로 비켜선 신우 형의 얼굴은 애써 피해본다.


아!!!!!


나가려던 순간 신우 형이 내 팔목을 잡았다.


“신우...형?”


잠깐이었을까? 아니면 한참이었을까......

이 사람과 있을 때의 시간은 평소의 시간과는 다르다.

이 사람과 있을 때는 일상적인 시간은 멈춰 버린다.

난 그저 이 사람의 눈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깊고 푸른.......그 눈 속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하아.......미녀야.......”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한참 뜸을 들인다.


“너.......아무 말도 하지마.”


“예?”


“태경이에게.......아무 말도 하지 마......

 니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면 돼.”


“신우 형!! 그게 무슨?”


“고미녀! 내 말 들어!!

 이제........12시 종은 울린 거야.

 현실로.......돌아와야지.”


현실로?

그럼........우리의 시간은.......현실이 아니었다는 얘기인가?


“고미녀!”


저 앞에 선 태경이 형님이 날 재촉한다.

신우 형도 나도 날 부르는 형님의 목소리에 정신이 드는 것 같다.


형님을 따라나가면서 신우 형에게 잡혔던 내 팔목을 만져본다.

약간 붉어진 팔목......

서서히.......붉은 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4. 





“형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형님은 마치 화난 사람처럼 아무 말씀이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차속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은색 차가 보였다.


“타!”


“예?”


“타라구!”


머뭇거리고 있으니, 형님은 왼쪽 앞좌석 문을 열어준다.


“나......이렇게 매너 있는 사람 아니거든?

 그러니까......어서 타.”


“아....예!”


내가 앉으니까 형님은 문까지 닫아준다.

어느 틈에 형님은 운전석에 앉으셨다.


“제가....타면 되는데........”


“알아.”


“그런데.......”


“왜 안 하는 짓 하냐구?

 적어도 한 사람한테는 나도.......안 하던 짓 해 보고 싶어서.....”


일본에 있으면서 이렇게 자가용을 타 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다들....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열심히 걷고 그렇게 살았는데......

이렇게 형님과 함께 차 안에 있으니, 마치 서울에 있는 것 같았다.

운전석 위치만 바뀌지 않았다면, 서울에 있다고 해도 그대로 믿었을 것 같다.


운전하는 내내 태경이 형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

운전하고 있는 형님의 옆얼굴은 차가운 얼음처럼 요동이 없었다.

형님은 지금........뭔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이 상황에 대한 정리....그런 것일까?


“그렇게....잘 생겼어? 넋을 잃을 만큼?”


“예?”


“너....계속 내 얼굴만 보고 있잖아. 그렇게 좋아?”


“아....그게.....”


당황하는 내 얼굴을 흘깃 보시더니 풋 하고 웃음 짓는다.

이 웃음은......아마....이 세상에서 나 혼자만 본 것이라는 걸......나도 알고 있다.

웃지 않는 사람이, 절대 웃을 줄 모르는 것 같은 사람이,

그렇게 차가운 사람이,

마치 소년처럼 해맑게 웃는 걸 보고......

내 심장은 뛰고 말았었다.

그래서 그 웃음에 눈을 뗄 수가 없었었다.

지금도.....이 사람도 내게만, 세상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웃음을 웃고 있다.

그는 이렇게 해맑게 웃고 있는데,

여전히 이렇게 맑은 웃음을 날 향해 웃어주는데,

난.......지금.....뭘 하고 있는 걸까........


그저 멍한 채로, 그와 함께 스파게티 전문점에 가고,

마치 어제 만난 사람처럼 일상을 이야기하고,

그의 콘서트 이야기를 듣고.........

서울에서의 일상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이른 저녁을 먹어서인지, 아직 해가 떠 있었다.

아니......이제 해가 지려하고 있었다.


“미녀야, 노을 보러 갈까?”


그는 웃으며 어디론가로 또 향한다.

지하에 주차를 해 놓고 올라가보니 엘리베이터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뭐야.....웬 사람이 이렇게 많아?”


짜증스럽다는 듯이 태경이 형님은 다시 썬글라스를 낀다.

한국만큼은 아니더라도 일본에서도 A.N.Jell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있었다.

그러니 형님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모자와 썬글라스를 챙기신 것 같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참을 올라갔다.

뭘 이렇게 높이 올라가나 싶었더니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온 사방이 유리로 된 전망대가 나왔다.


“여기가.....어디예요?”


“너도 참......연습실에 처박혀서 연습만 한 거야?

 너 도쿄 시내도 제대로 구경한 적 없지?”


“혹시 여기가 도쿄 타워예요?”


이만큼 높은 걸 보니 도쿄 타워가 아닐까 싶었다.

도쿄 타워라는 책도 있는 걸 보면, 높이 올라가는 것도 그렇고, 제일 신빙성 있어 보였다.

그러나 내 대답에 형님의 얼굴은 더욱 찌푸려졌을 뿐이었다.


“말을 말자....이리 와봐.”


형님은 내 손을 잡고 선물 가게를 지나 구석 쪽으로 데려 갔다.

모퉁이진 곳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적었다.

벌써 하늘은 아름답게 물들고 있었다.

갑자기 저 앞 시내 건물들 중 탑 모양을 한 건물 하나가 밝게 불이 켜졌다.


“도쿄 타워는 저거야.”


“그럼, 여기는 어디예요?”


“도쿄 시청. 니가 좋아하는 45층짜리 공짜 전망대다. 됐냐?”


서서히 해가 지고, 어둠에 잠겼던 도시가 점점 살아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불빛으로 수놓아진 도시......

이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난......이방인마냥.......작아지고 있다.


“미국에서.......엄마와........이야기를 했어.”


눈은 불빛 가득한 도쿄 시내를 향한 채였다.

마치....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이, 그는 그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엄마.......

그는 엄마라고 부르는 걸 정말 싫어했다.

그 여자......라고 혐오스러워 하며 부르고는 했었는데,

그의 입으로 편안하게 엄마라는 말을 하는 걸 듣고 보니 많이 낯설었다.


“이제......괜찮아진 거예요?”


“음.....괜찮아졌을까? 모르겠어.

 내가 인정하든, 안 하든, 내 엄마인 건 맞으니까.......

 어쨌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거든.

 나도, 너도, 그리고 엄마도......

 뭔가 대화가 필요했달까?

 그래서 미국에 간 김에 대화를 시도했지.”


마치 다른 나라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처럼, 내게는 멀게만 느껴지는 이야기 같았다.

서울에 있을 때는 내 인생을 뒤흔들 절대적인 이야기였는데,

지금은 모든 게 덤덤하게 느껴진다.


“엄마의 사랑에 대해서.......

 사랑......지독한 집착에 대해서........

 뭔가......내게도 엄마에게도 결론이 필요했어.

 그 오래된 집착이 지금 내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걸....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어.”


“그래서.......그 분과는....잘 해결했어요?”


형님은 별말 없이 어깨를 으쓱한다.


“글쎄.....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일방적으로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했는지도 몰라.

 결론 없는.........”


그의 손이 내 손을 찾는다.

내 손가락에 깍지를 끼는 그의 단호한 힘이 느껴진다.


“근데.....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게 됐어.”


그의 목소리에 미소가 묻어난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날 보며 웃고 있었다.


“사랑하면 떠나보내지 말아야 돼.

 그러니 난 더 늦기 전에 널 잡을 거야.

 과거의 흔적이 널 놓치도록 만들지는 않을 거야.”


더...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라는 그의 말이......슬프다.

난.....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걸까.


“난.......니가 없으면 안 돼. 고미녀......

 너 없으면.....니가 안 된다고 하면, 나라는 인간 싫다고 하면,

 난 또 무엇을 잡고.....어떻게 살아야 할지....알 수가 없어.”


고백....

세상이 우스워 보였을 대단한 남자 황태경.

그 남자의 고백........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나는 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말하고 있는지도 안다.

그래서 자꾸만 가슴이 먹먹해진다.


“난..있지.....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굳이 음악을 할 이유가 있을까...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어.

 음악은 내게 살아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아니 그나마 살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것.

 그런 거였어.

 그러니까.....내게 음악은 즐거워서 하는 게 아니라, 살고 싶어서 하는 처절한 돌파구였어.”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그만큼 내 마음은 더욱 무거워진다.


“그런데 널 만나고 나서 음악이 즐거워졌어.

 행복했어.

 그런데.....니가 음악을 하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은 못했어.

 이제...이해해.....

 미녀 니가 내 옆에서 무엇이 힘들었을지.....

 미안해....

 내게 음악을 못하게 한다면, 난 숨 막혀 죽어버렸겠지.

 너에게도 똑같다는 걸...너무 늦게 깨달았어....

 미녀야, 정말.......미안해.”


미안해.....미안해.....미안해.....

그의 말이 내 마음에서 메아리를 쳐댄다.

그가.....내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정말.....가슴 아픈 눈을 하고, 내게 미안하다고.......

그렇게 내 손을 꼭 쥐며 그런 말을 한다.


“황...태...경....씨? 맞아요?”


그는 그렇게 묻는 날 보며 웃는다.

왜 내가 그런 말을 하는지 너무나 잘 안다는 듯이.....

그렇게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이 사람......변해가고 있는 걸까.........

변해 가는 이 사람 때문에 가슴이 아프다.


왜.....이제서야 그 말을....하는 건가.

왜.....이제서야.........내 마음을 이해하게 된 걸까.

조그만 더....일찍 날 이해해줬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5





숙소 앞, 난 고집스럽게 차문을 열고 내렸다.

그러자 그는 나를 따라 와서 내 팔을 잡는다.


“꼭....여기 들어가야겠어?”


“네.”


“하아.......”


이미 어두워진 하늘 아래 그의 한숨 소리가 깊다.


“나랑.....같이.........호텔로 가자.”


“형님!!”


형님이라는 말에 그는 내 어깨를 잡고 담벽으로 밀어붙였다.


“나......형님이란 소리는 싫다고 말했었잖아.

 난.....고미녀의 형님이 아니라, 너의 애인이야.

 그러니까......오빠라고 하든지, 아니면 이름을 불러!”


“아....네....”


“뭐라고 부를 거야?”


“그럼......이름.....부를게요.”


“뭐? 그래! 좋아. 일단은 이름으로 시작하고 나중에 호칭은 바꾸지 뭐.

 자 됐으니까......그럼, 호텔로 가자.”


“형님!...”


“뭐?”


“아..아니....황....태경씨.....”


“왜.....안 된다는 거야......?”


그의 손이 내 볼에 붙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준다.

그의 눈이 너무 깊어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다.


“미녀야.....아까.....다 못한 얘기가 있어.

 사실은 그 사람과....처음으로 진지하게 얘기해봤어.

 그 사람의.....사랑에 대해서도....진지하게 얘기해봤어.

 한번도......이해하지 못했는데,

 나를 버리면서까지 그렇게 사랑이란 걸 하고 싶었나....생각했었는데....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하더라.


<너! 고미녀 없이 살 수 있니?

 고미녀가 니가 싫어져서, 다른 남자가 생겨서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돼서 떠나고 싶다고 한다면,

 너....놓아 줄 수 있어?>


 그 순간.....정말로.....미칠 것 같았어.

 내 인생에서......니가 사라진다면,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그 처절했던 순간으로 돌아간다는 건....

 상상도 할 수가 없었어.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혀와.”


“형...님......”


“어머니를 이해하겠더라.

 어머니가 왜 그렇게 니 아버지에게 집착했는지...

 근데 말이야. 내가 사랑을 해 보니까......그게 집착이 아니라, 사랑인 걸 알겠더라.

 어머닌 진심으로 니 아버지를 사랑했어.”


“그렇지만, 방법은...옳지 않았어요.”


“그래, 맞아. 나도 인정해.

 그래도...그 마음만은 진심이야.

 받기만 하는 사랑에 익숙해져서, 자신의 사랑을 어떻게 줘야 하는 건지 몰랐던 거야.

 주는 사랑을.....배운 적이 없었어.”


날 바라보는 그의 눈은 마치.......나도 그래....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지금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 자신의 사랑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처음 사랑했던 상황.....그 때 어머닌 사랑을 우습게 봤어.

 그 사랑이 자신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는 걸,

 삶을 송두리째 가져가 버릴 수 있다는 걸 모르셨대.

 그래서...너무나 당연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대.

 그리곤...어머니는 우리 아버지를 만났지.

 그러나...사랑은.......찾아오지 않았어.

 자신의 사랑은 다른 이를 향해 떠나버렸어.


 모든 건, 자신의 사랑을 지켜내지 못한 어머니의 잘못이야.

 그러나.......어떤 면에서 어머니가 가여워.

 자신의 사랑을 너무 늦게 알아버려서.....이미.....떠나버린 사랑을.....

 지금까지 놓지 못하고 있는.....어머니가.....가여워.


 그리고...그런 어머니를 보면, 무서워.

 내가....어머니의 모습을 할까봐......

 겁이 나.

 난......어머니처럼.....그런 실수는 하지 않을 테니까....

 다른 사람 욕심 부릴 일은 없을 테니까.....

 어머니처럼.....그렇게 고통스러운 일은 없겠지? 그렇겠지? 미녀야?”


그의 애잔한 표정....

가슴 아프다.

세상을 다 가진...사람....

그 사람이 너무나 두려워 하며떨고 있다.

신경질적일 만큼 예민한 두뇌와 여리여리한 소년의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이 사람........

난....그에게....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을까.......


음악적으로 뛰어난 이 사람에게.......인정받고도 싶었고,

때로는 아이같이 상처받은 모습에 모든 걸 품어주고 싶기도 했다.


지금도...그 마음은 같은 것 같다.

소년의 눈.......

여전히......상처받은 소년의 눈을 가진....이 사람.....

사랑해 달라고, 안아 달라고, 무작정 떼를 쓰고 있는 이 사람.......


이 사람 앞에서는 모든 이들이 빛을 잃는다.

반짝거렸던 모든 인물들이....다...빛을 잃고 만다.


너무나, 너무나 빛나는 존재.........

그리하여, 나 자신까지도......빛을 잃는다.


이 사람 앞에서는 나 자신을 잃어버린다.


“미녀......”


그런데 이 빛나는 존재가........내 앞에서 고통스러워 한다.

그래서......나 역시 고통스럽다.

그가....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보는 것은...정말 힘든 일이다.


그의 얼굴이 점점 내 얼굴로 다가온다.

내겐.....거부할 힘도, 여력도, 없다.

그저 그 빛에 정신을 빼앗긴 채로, 그에게 끌려가고야 만다.


그의 눈이 불타오른다.


“황...태....겨!!!!!!”


내 입술 위로 그의 입술이 강하게 느껴진다.


난.....세상에서....가장 나쁜....여자다.

어쩌면.......신이 버리신......건지도....모르겠다.





6





해가 지고, 밤이 오고.....

그렇게 시간은 지나가지만, 아이는 오지 않는다.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알면서도,

그 사실을 내 머리는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도

내 심장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 같다.


어느 틈에 난 문을 열고 골목 앞을 서성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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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아무 말도 하지마.”


“예?”


“태경이에게.......아무 말도 하지 마......

 니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면 돼.”


“신우 형!! 그게 무슨?”


“고미녀! 내 말 들어!!

 이제........12시 종은 울린 거야.

 현실로.......돌아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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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로 돌아와야지.

미친 놈.

정말 미친 놈이다. 난........

미친 듯이 펄떡대는 심장 소리를 애써 외면한다고 해도,

고통까지, 저 아래에서부터 찢겨나가는 듯한 이 고통까지

외면할 수는 없다.


강신우!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한 건 너였다, 강신우!!

이렇게.......헤매지 말라고!!

원래부터.......그녀는.......황태경의 여자였잖아.

그러니까......이제 제발 현실로 돌아오라고!!!


차가 서는 소리,

문이 닫히는 소리........

그리고 골목 끝 벽에 두 사람이 서 있다.

확인해 보지 않아도.......누구인지......이미 내 심장은 알고 있다.

미친 듯이 불안하게 뛰는 내 심장은.....

그곳에 아이가 있다고, 경고를 해댄다.

그냥 집으로 들어가라고, 보지 말라고.....

숱한 소리들이 머리를 울려댄다.

그러나........난......그쪽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희미한 가로등 빛에 여자의 실루엣이 보인다.

그리고.....그 실루엣 위로 남자가 겹쳐진다.


헉!!!!!!!!!!!


심장을 옥죄어 오는 아픔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상처 입은 영혼이 내 육체까지 침범하고 있다.

숨을.....쉴 수가.....없다.




12시........

거울이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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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회.....

어떤 말도 필요 없을 듯합니다.

안 써지는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신우 이야기> 통 복습을 3번 했다는 것.....

그것만 알아주시길......ㅠㅠ

에효......

그저...제가....나쁜 X입니다. ㅠㅠㅠㅠ


+) <꼭 읽어주세요!!!>에 참여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계속 대문에 걸어둘게요. 계속 참여해 주시길......

   (37회를 이따위로 적어놓고...저도 참 뻔뻔합니다. ㅠㅠ)

   http://blog.daum.net/grandblue08/8746307  : 이 글에 댓글로 참여해주시길.....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