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우 이야기 38> 모든 동화는 해피엔딩이다
1
그의 입술은.......따뜻했다.
그러나 가슴이 아프다.
혀끝에 짠 맛이 난다고 느끼는 순간, 그는 천천히 얼굴을 들어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의 눈도 슬퍼 보였다.
내 눈도......이 사람처럼 슬퍼 보일까?
“왜..........”
“네?”
그가 묻는 “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난 바로 잡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의 손이 다가와서는 내 볼을 쓰다듬는다.
그의 손에 물기가 맺혀 있다.
내......눈물이었던 건가.
“내가........널........힘든 게 한 거야?”
그의 목소리는 성대를 긁어서 겨우 내놓는 듯이 갈라져서 나온다.
난 가만히 그의 눈을 바라본다.
이 사람의 눈도, 그 속에 보이는 내 모습도.......왜 이리 슬플까.
난.......고개를 흔들었다.
“내가........무리한 부탁한 거 알아.
널......욕심내겠다는 거.....아니야.
그냥........같이 있고 싶어서.......
곧 돌아가야 하니까.......
이렇게 헤어지는 게.......정말 싫어서.......
그래서 그랬어.
널......힘들게 하려던 건......정말 아니야.”
“저도...........알아요.”
“있는 동안 같이.......지내는 건......안 되는 거니?”
난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내 눈 속에서 답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는 한숨을 지으며, 나를 그의 품속으로 끌어안았다.
“정말..........돌아버리겠네.”
“황...태경씨........”
“고미녀! 나 어떡하냐?
어떻게......한 사람을......이렇게 좋아할 수가 있지?
이렇게 미칠 것 같은 마음이 들 수가 있을까?
고미녀 너 때문에 이러다........곧 정신병이라도 걸리겠다.”
그의 말이 자꾸만 내 심장을 찔러댄다.
바늘로 찔러대는 듯이 자꾸만 생채기를 낸다.
“고미녀! 너! 나 모르게 약 탔지?
알고 보면, 너 수녀가 아니라 마녀지망생이었던 거 아니야?
매일매일 내가 정신 못 차리도록 주문 걸고 있는 거지?
이상한 인형으로 내 심장 막 찌르고?”
그는 장난치듯이 내 얼굴을 보며 웃고 있지만, 난 도저히 그를 향해 웃을 수가 없다.
입꼬리를 올리려고 해도, 바들바들 떨릴 뿐, 웃음이라는 걸 지어줄 수가 없다.
마냥 장난치듯이 나를 바라보던 그의 얼굴도, 서서히 굳어간다.
“알았어. 보내줄게. 대신 내일 아침부터 와서 쫓아다닐 테니...각오하고 있어.”
그의 얼굴이 다시 내 얼굴로 다가온다.
내 입술 위로 그의 입술이 가볍게 놓였다 떨어진다.
“그래.....고미녀는 여기 있는 게 낫긴 낫겠다.
둘만 있으면, 내가 어떻게 될지....나도 날.....장담할 수가 없어.
잘 자.......
그리고.......”
그의 손가락이 내 왼쪽 가슴을 가리킨다.
“잘 지켜.”
“예?”
“다른 놈 못 들어오게 고미녀 심장 잘 지키라구!!
갈게........
니 뒷모습은 못 보겠다. 자꾸....잡고 싶어질 거 같아.”
그가 한 걸음 한 걸음씩 내게서 멀어진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내게 손을 흔들며 그는 자신의 차로 걸어간다.
인간은.......
이타적이어야 할까........
아니면,
이기적이어도 되는 걸까.......
내가 배운 가르침과, 그 가르침대로 살아간다는 건,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예전.......고등학교 시절 배웠던 것처럼.....
인간은......정말 악하다.
정말로......악한.....존재다.
2
돌아선 그곳에 그가 있었다.
내 눈과 마주치자 내 눈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신우 형! 잠깐만요.
나랑 얘기 좀 해요.”
“.....................”
멈춰선 그의 모습........
그의 등이 낯설다.
“혹시.....보셨어요?”
눈에 띄게 움찔대는 그의 등......
그러나 그는 나를 향해 돌아서진 않는다.
“하아.........”
그의 한숨이 차가운 공기 사이로 김을 뿜어낸다.
“................미녀야, 난..........지금.........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잠깐만요! 신우 형!! 제 얘기.....”
“아니! 고미녀! 아무 얘기도 하지 말자.
지금은 그게 더 좋을 것 같다.”
“그래도....그래도......
뭔가...뭔가가 서운하다.
지금 신우 형은 저렇게 돌아서서는 안 된다.
적어도.......나에게 이러면 안 되는 거다.
“난.....널 잡아줄 생각이 없어.”
한참 만에 그의 입으로 뱉어진 말을 난...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라구요?”
“널.....잡아줄 생각이 없다고.....”
“왜!! 왜! 안 되는데요?
왜....잡아주면.....안 되는데요?”
“너를 위해서도,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그건........아니다.”
“그런 법이......어디 있어요.
이건......이건........억울해요.”
“억울해? 정말.....그럴까?
똑같은 상황에서........시작과 끝을 봐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야........후회가 없어.
난....페어플레이 하지 못했어.
너도 마찬가지야. 그러니........”
도저히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다.
사랑하는 여자를 어떻게 잡아줄 수 없다는 거지?
그게 왜 공정하지 않다는 거지?
어떻게 날 이렇게 내버려 둘 수 있다는 거지?
난....자꾸만 속에서 울컥하고 뭔가가 올라오는 것 같다.
내가 아는 신우 형이 아닌 거 같다.
“내가 널...왜 잡아줘야 하지?”
“신우 형!!”
“다시 말해볼까?
더 적나라하게 말해 줘?
니 말 속에 이미.......니 마음이 들어 있어.
모르겠니?
니 마음이....확실했다면, 굳이 잡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어.
그런데 누군가 잡아줘야 한다면, 그건 이미 확신이 없는 거야.
확신이 없는데.......그게....사랑일까?
고미녀! 냉정하게 생각해!
넌..........이미.........흔들리고 있어..........”
“그건.....그건.......”
“니 인생에 대한 결정을.....왜 남이 하도록 하는 거야?
언제까지....니 인생을 남에게 맡길 거야?
어차피 인간은 이기적이야.
그러니까.....고미녀 넌 가장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면 되는 거야.”
“신우 형!”
그는 내가 불러도 그냥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버린다.
그는 마치 내 마음 속을 환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이 말한다.
잡아달라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할 지 가르쳐 달라고....아우성대는 내 목소리를 그는 이미 듣고 있었던 걸까.
그러나 그는.........단호히 그런 나를 끊어낸다.
그 모습이 내겐...너무나 서운하다.
내 마음을 다시 시리게 한다.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거라 믿었던.....감각.......
또 다시 발이 시리다.
3
아이 옆에는 마치 그림자처럼 황태경이 붙어 있다.
아니, 그림자는 절대로 아니다.
그림자가 저런 빛을 낼 수는 없다.
그저 음악만이 흘러나오는, 그저 연습하고 부대끼며 익숙했었던 연습실이 황태경 하나 때문에 완전히 다른 공간이 돼 버렸다.
황태경의 카리스마는 공간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분위기도, 사람도, 그리고.........사람의 마음도.....그렇게 장악해 나가고 있었다.
난....애써 황태경과 아이의 모습을 안 보려 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자석처럼 내 눈이 그쪽을 향해도 내 머리는 어떻게든 죽을 각오로 오선지로 가져오려 미친 듯이 싸우고 있다.
“야~~ 고미녀!! 너......이런 곡도 썼어?
이거 굉장히 좋은데?”
황태경은 미녀의 곡을 허밍으로 불러보고 있었다.
정박으로 불러보던 황태경은 갑자기 키보드에 앉더니, 안단테에서 포르테까지 갖가지 방식으로 변주를 한다.
그걸 지켜보던, 우리 팀도, 일본 팀도 모두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방금 봤을 뿐인데, 황태경은 즉흥으로 5~6개의 편곡을 만들어내었다.
심지어 한 곡 안에 그 모든 분위기의 변화를 다 담아내기도 했다.
역시 황태경이었다.
빛나는 존재, 황태경......
종현이와 내가 몇 시간에 걸쳐 겨우 이 곡을 편곡했었는데, 황태경은 그저 자신의 마음의 필을 따라 몇 곡이나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난....미녀의 볼이 발그레해지는 것을, 그리고 미녀의 눈빛이 빛나고 있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미녀와 황태경의 키스를 봤던 날, 황태경은 내게 전화했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도대체 뭐 때문인지.....궁금했을 거다.
그러나 황태경은 그저......놀랐다는 말....외에는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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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에게...혹시 무슨 일 있는 거냐....>
“왜?”
<아니, 미녀가......힘들어 하는 거 같아서.......
강신우 니가........나에게 뭔가 얘기해 줄 수 있는 게 없는가 해서.......>
“.....................”
<강신우?>
“내가 대답해 줄 수 있는 건 없어.
미녀 스스로 뭔가...결정을 내리는 중일지도 몰라.
미녀 스스로 말할 때까지....기다려.
사랑한다면.....그 정도는 기다려줄 수 있잖아.”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군.
근데.......강신우! 니가 정용화라니.......>
“왜?”
<아니........니가 쓴 곡, 계속 듣고 있었거든.
굉장히 느낌이 좋더라구.
뭐, 물론 몇몇 곡은 좀 투박하달까 거친 느낌이 든달까....
그렇긴 했지만, 몇 곡은 아주 멋졌어.>
“...고맙다.....근데 너한테 칭찬 받을 줄은......몰랐다.”
<풋~ 내가 좀 칭찬엔 약하지.
근데.....>
“뭐?”
<곡들이...비슷한 느낌도 들어. 미니 앨범이라 해도 그 앨범마다의 색깔이 있을 텐데......
앨범 2개 다 색깔이 비슷한 거 같아.
니 감정을 솔직하게 그려내는 것도 좋은데, 니 느낌을 좀 더 드라마틱하게 살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어차피 음악도 하나의 완결된 무대를 지향하는 거니, 거기에는 극적 요소가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잖아.
뭐, 어차피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니까...... 듣든 말든 니 자유야.>
“!!!!!!!!!!!!!!!!!”
<강신우? 기분 상한 거냐?>
“아니.....아니야......고맙다.”
<뭐, 고마울 거까지야.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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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경은......내 문제점을 정확하게 짚어내었다.
내 무의식은 이미 알고 있었겠지만, 애써 밀어놓고 있던 문제를 황태경은 정확하게 짚어 내었다.
그걸 듣고서야, 내가 무얼 회피하고 있었는지.......알게 되었다.
음악도 일종의 연극이라는 걸, 난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거 같다.
음악적으로 황태경은........여전히 나보다 훨씬 위에 있는 존재다.
그래서 황태경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내게는 굉장히 중요하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다는 거, 특히 자신이 경쟁자로 생각하는, 나보다 앞선 사람에게서 받는 칭찬과 조언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내게 황태경이 그러한 존재이듯이, 미녀에게도 황태경은 똑같은 존재다.
미녀도, 누구보다도 황태경에게 인정받고 싶을 것이다.
미녀에게 황태경은 그러한 존재다.
고통.........
고통 그 자체.......
사실 나도.....잡고 싶었다.
아이가 잡아달라고 할 때, 미친 듯이 잡고 싶었다.
나도 안다.
아이가 내게 길들여져 있다는 걸....
나도 알고 있다.
아이를 진한 입맞춤으로.......그렇게 깊게 안아 버릴 수도 있다.
성적으로 순진한 아이를.......그렇게 유린해 버릴 수도 있다.
그쪽으로 무지한 상태인 아이는.......자신도 모르게 내 유혹에 넘어가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아이를 뺏기지 않을 수 있는지 아는데,
아이를 데리고 가서 내 여자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는데,
그렇게 뜨거운 밤을 보내버리면 된다는 걸 아는데,
내 욕심대로, 내 이기심대로,
아이가 떠나지 못하도록 잡을 수도 있는데......
난.....그렇게 할 수가 없다.
마치 무거운 돌을 매단 것 같이...먹먹한 내 심장이.......
내 이성도, 내 욕심도, 내 욕망도.......내 육체도.........
다 막아 버린다.
그건 아니라고.....내 사랑은.....그런 것이 아니라고......
자꾸만 내 욕심을 꺾게 한다.
그래서.....내가 행복할까....
나중에.....아이가....행복할까.......
아이의 눈빛을 알고 있는데,
아이가 태경이를 바라볼 때, 어떠한 눈빛인지, 어떻게 흔들리는지, 어떻게 반짝이는지.....
다 알면서.........
내가......행복할까.....
행복하지 않은.....후회와 괴로움만 가득차 있을.....아이의 나머지 생을.......
내가......지켜볼 수 있을까.......
아니......그럴 수 없다.
난......이미......내 평생을 두고.....봐 오지 않았던가.........
그러한 삶은.........그 누구도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걸.....
난....내 평생을 두고 알고 있다.
4
“형, 오늘 새 곡 올릴 거야?”
“응.”
“와우!! 기대되는데?
頑張れ!!(힘내!)”
종현이 녀석과 며칠 동안 새 곡을 다듬었다.
종현이도 이번 곡은 많이 낯설어 했다.
이때까지 내 노래와 많이 다르다고, 그래서 약간은 주저하기도 했다.
그러나........난.....올려보고 싶었다.
아직은 덜 다듬어졌지만, 왠지.....황태경 앞에서......보여주고 싶었다.
TATOO
작사 정용화 작곡 정용화
내 안을 파고드는 넌 마치 Like Tatoo
내 반을 다 가져간 넌 마치 Like Tatoo
스쳐간 향기 속에도 내 말투 속에도
내 뼛속 깊이 박혀있는 Tatoo
Rap)
네가 남기고 간 따뜻한 네 온기가 내 심장을 파고들어 와
그 어느 때보다 까만 밤 그런 까만 밤보다 속타는 내 맘
미칠 것 같은 너의 그 Motion
스칠 듯 말 듯 한 너의 Motion
지우려 애써도 몸부림쳐 봐도
문신처럼 박힌 너의 Motion
Keep on (I wanna keep on)
Keep on (on and on and on)
Keep on (uh uh I have no way uh)
Keep on (I wanna keep on)
Keep on (on and on and on)
Keep on your back on
(떠나주겠니 못 잊을 것 같아 이젠 사라져 내 속에서)
심장 속에 가득 새긴 넌 마치 Like Tatoo
머릿속 가득 고인 넌 마치 Like Tatoo
두 눈을 감아 보아도 소리를 질러도
더 커져만 가는 너라는 Tatoo
Rap)
네가 남기고 간 따뜻한 네 미소가
내 머리에 스며들어 와
내 목을 타고 오르는 말을 삼켜버리면
내 심장엔 큰 문신이 선명히 생기겠지만
닿을 것 같은 너의 그 Motion
보일 듯 말 듯 한 너의 Motion
잊으려 애써도 몸부림쳐 봐도
심장 속에 감긴 너의 Motion
Keep on (I wanna keep on)
Keep on (on and on and on)
Keep on (uh uh I have no way uh)
Keep on (I wanna keep on)
Keep on (on and on and on)
Keep on your back on
미칠 것 같은 너의 그 Motion
스칠 듯 말 듯 한 너의 Motion
지우려 애써도 몸부림쳐 봐도
문신처럼 박힌 너의 Motion
Keep on (I wanna keep on)
Keep on (on and on and on)
Keep on (uh uh I have no way uh)
Keep on (I wanna keep on)
Keep on (on and on and on)
Keep on your back on
새 곡에 사람들은 모두 의아한 눈빛이었다.
무대 앞 쪽에 있던 황태경은 뭔가 신기하다는 듯 한 쪽 눈을 찡긋거리며 올렸다.
뭔가 특이하다고 싶을 때 어김없이 나오는 반응이라는 걸, 난 알고 있다.
저번부터 뭔가 맴돌던 멜로디가 있었다.
다른 곡들처럼 약간 부드럽게 진행하려 했는데 황태경의 말을 듣고 나서는 뭔가 좀 더 강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좀더 자극적이고, 좀더 강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난 마치 검사받는 아이처럼 긴장한 채 무대를 내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황태경은 한쪽 입꼬리만 올린 채 약간 건방져 보이는 표정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확실히.....달라졌는데?”
“칭찬이냐?”
황태경은 날 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녀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 더 할 말이 남은 것 같았다.
“너.........아직......인 거냐?”
녀석이 뭘 묻고 있는지......알고 있다.
내가 대답하지 않아도, 녀석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뭐, 대답을 바라고 말한 건 아니야.”
돌아서는 녀석의 등에 대고 나는 겨우 한 마디 뱉어낸다.
“아직은 아무 말도 해 줄 수가 없다.”
녀석이 내 말에 멈춰 선다.
“......어쩌면....내가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은 걸지도.......”
그래, 녀석은......아무 말도....듣고 싶지 않을 것이다.
문신을 부르고 내려올 때, 미녀의 눈빛이 떠오른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시선 앞에서 난.......순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마치 낯선 사람을 보듯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모르겠다.
나도 아무 것도 모르겠다.
아이의 눈빛은 다시 내 심장에 문신처럼 그저 새겨질 뿐이다.
5
다음 날도 우리는 연습실에서 하루 종일 악기를 두드려대고 있었다.
아니, 그랬었다.
미녀와 황태경이 어느 순간 사라진 것 외에는, 모두들 열심이었다.
종현이도, 정신이도, 민혁이도 모두 아무 말 없이 내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애써 아무 말도 못하고 있지만, 지금 이 상황을 그들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더 난감할 것이다.
“형, 괜찮아?”
미녀와 황태경이 나가고 나서 도저히 못참겠는지 종현이가 와서 내 어깨를 툭 친다.
“뭐가?”
난...종현이가 말을 걸어와도 여전히 기타 코드를 잡아보며 줄을 튕겨본다.
“형! 지금 이러는 거, 정말 비정상 같아.
왜 이러는 거야?”
비정상......그래 나도 안다.
다른 남자라면 자신의 여자를 이렇게 보내지 않을 거라는 걸, 나도 알고 있다.
챙~~~~
갑자기 E선이 끊어졌다.
“어!! 형!! 괜찮아?
형!! 볼에 피나! 지금!!!”
종현이는 놀라서 휴지를 뜯어와 내 볼을 눌렀다.
볼에 싸한 느낌이 지나간다.
약한 피냄새도 나는 것 같다.
“오늘은.....이만 가봐야겠다.
아무래도 날이...아닌가 보다.”
주섬주섬 짐을 챙기며 나오는데,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다들.....말하지 않아도 어떨지......알고 있다.
연습실을 나와 코너를 도니까 남녀의 소리가 들린다.
미녀와 황태경이 다른 곳으로 간 줄 알았는데, 근처에 있었다.
뭔가 심각해 보인다.
피해야 하는 건지,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등을 돌리는데 황태경의 목소리가 나를 잡는다.
“나랑 같이 가자구!!!”
“황태경씨!!! 제발.....이러지 마세요.”
“내일이면!! 한국으로 가야 한다구!!
또.....너랑 이렇게 헤어져야 하는 거야?
나.......이제 정말....이렇게는 못 살겠어!!
미녀야!! 너야말로 이러지 마!!”
“죄송해요. 정말...죄송해요.
그렇지만, 전...여기에서 계속 음악 하고 싶어요.”
“한국에서도.....할 수 있잖아.
여기에서 며칠 동안 같이 곡 작업하고....좋았잖아.
아니야? 나만......그렇게 착각한 거야? 그런 거야?”
“...아니에요. 저도.....좋았어요.”
그 순간 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알고 있었지만, 미녀의 입으로 나온 말을 듣고 있으려니....
자꾸만 심장이 불안하게 쿵쿵 소리를 내며 뛰어댄다.
겁이 난다.
너무 겁이 난다.
머리로는 어서 이 자리를 뜨라고 하지만, 내 발은 꼼짝을 못하고 있다.
마치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다.
멀리서 괴물이 쫓아오고 있는데, 아무리 머리로는 도망가야 한다고 수백 번도 더 생각하고 외치지만,
이상하게 몸은 천근만근 무거워져 꼼짝도 못하게 되는....
바로 그 상황인 것 같다.
“고미녀!! 난....난......너 없이는 도저히 못 살겠어.
이렇게 고미녀 니 목소리 듣고, 널 만지고, 널 안고, 키스하고....
그렇게 살고 싶어.
더 이상은....이렇게 떨어져서 살 수가 없어!!”
“황태경씨!!”
“넌.......나랑.....다른 마음인 거니?”
내 심장이 갑자기 미친 듯이 뛰어댄다.
올 것이....온 것 같다.
미녀에게도, 나에게도, 그리고 황태경에게도.........
그렇게 바로 그 순간이 오고야 만 것 같다.
이제........정말로......미녀의 선택만이 남은 것이다.
“황태경씨.......
당신을 보면.......여전히.......두근두근거려요.
그래요. 여전히....제게 당신은 빛나는 존재라서 가슴이........뛰어요.......”
툭...툭.......
무조건 반사처럼 뭔가가 흘러내린다.
누군가에게 들킬까봐 난 앞으로 걸어간다.
어디라도 상관이 없다.
그저....이곳만 벗어나면 된다는....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 하며 난...어서 내 발이 이곳에서 날 멀리 데리고 나가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황혼.....
도시에 황혼이 내린다.
그래, 난.....저 황혼이...너무나 아름다워서.......그래서......이렇게 눈물이 나는거야.
그뿐이야.
황혼은....서럽도록 붉다.
가슴이 시릴 만큼......붉게 붉게 하늘이 타들어간다.
그렇게 서서히 도시에 어둠이 내린다.
6
어디 갈 곳도 없었는지, 내 다리는 마치 김유신의 말처럼 나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제대로 헤맬 줄도 모르는....무식한 내 다리는......다시 연습실 모퉁이로 나를 밀어 넣었다.
기타를 잡고 오선지를 앞에 두고서도, 난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기타를 잡은 손이....부들부들 떨린다.
떨리고 있는 내 손이 마치 내 손이 아닌 것 같다.
그저 낯설다.
이 모든 상황이.......낯설다.
기타를 잡고도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머리 속에는...그 어떤 음악도 울리지 않는다.
소용돌이치던 수많은 음들은 사라지고, 어둠만이 짙게 깔려 있다.
벌컥!!!
갑자기 문이 열렸다.
누가 들어오는 건지 확인도 못했는데, 어느 틈에 누군가 내 멱살을 잡고 있었다.
“강신우!! 너야? 니가...어떻게 니가........널 믿었는데...어떻게......”
황태경이었다.
이제.....모든 것은....끝났다.
“미녀가........드디어........이야기했나 보군.”
“뭐야? 이 자식이!!!!”
내 왼쪽 뺨으로 주먹이 날아왔다.
녀석의 주먹은 매웠다.
“일어나!! 이 자식아!!!”
황태경은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다시 주먹을 날렸다.
어느 틈엔가 짭짤한 맛이 느껴졌다.
약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녀석의 주먹은 의외로 셌다.
아마....분노가.....더.....세게 만들고 있겠지만.......
태어나서.....이렇게 맞아본 적도 처음인 것 같다.
단 한 번도......무작정 맞아본 적은 없었다.
속에 독기가 있는 녀석들은.....절대로 맞고만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맞는다는 것이 뭔지 전혀 모르고 살았었다.
그러나 지금......이렇게 무작정 맞아보니, 이것도......꽤 괜찮은 것 같다.
육체의 고통이, 가슴의 통증을 조금은 완화시키는 것 같은 착각도 든다.
“헉헉...... 잘 들어! 강신우!!」
미녀는...... 외로워서 잠시 흔들렸던 거뿐이야. 알겠어?
니가 좋아서 그랬던 게 아니라구!!!!!”
난 겨우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앉았다.
“강신우!!! 뭐라고 말해 봐!!!!”
“.........나도......알아......”
“뭐?”
“나도 알고 있다구.......미녀가.......외로워서.......너무 외로워서 내게 기댔다는 거.......
알고 있어.......”
“너!! 너!!!!”
내 말에 도리어 황태경이 뭐라고 말을 못한다.
기가 막힐 것이다.
자기 여자를 꼬드겨낸 놈이 이렇게 당당하게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나라도 기가 찰 것이다.
황태경도, 나도.....한참을 침묵하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황태경은 입을 뗐다.
녀석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가라앉아 있었다.
“난......미녀를 데리고 갈 거야.
더 이상 미녀를 이곳에 둘 수 없어. 절대로!!!”
“........미녀도 동의한 거야?”
“어떻게든 설득할 거야. 니 곁에는...절대로 미녀 더 이상 둘 수 없어.”
“미녀.......여기서 많이 행복했어.”
그 말에 태경이 녀석의 오른손에 힘이 들어간다.
녀석의 기분이 어떨지...나도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래.....내가 나쁜 놈인 건 알아.
하지만......미녀 여기에서 음악을 배우면서 정말 즐기게 됐어.
아직은 아니야. 조금만 더 시간을 줘.”
“니가.....뭔데..그런 말을 하는 거야? 니가 고미녀의 뭔데?”
“.......................”
그래, 난....고미녀의 도대체 뭘까......
나도 궁금하다.
나라는 존재는....도대체 뭘까......
“그 잘난 입으로 말 좀 해보라구!!”
“아무 것도......아니야. 나도 알아..........
그래도......이곳에서의 생활이 미녀에게 도움이 되길 바랐어.
녀석.....한번도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제대로 선택해서 해 본 적이 없었어.
처음으로 선택한 거야.
그걸.....한번만 봐줘.
나 때문에 그런 거라면........내가 떠날게......”
“뭐?”
“어차피...이제 아버지도 알게 됐으니, 슬슬 움직이실 테지....
그 전에...내가 알아서 떠날게. 그러니까...미녀의 길을 꺾지 마.”
그래, 어쩌면 아버지가 오신 순간부터 난....이 시간을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떠나야 할 시간........
참......아름다웠던.......신데렐라의 시간이었다.
다시는 깨고 싶지 않은 꿈처럼, 그렇게 계속 꾸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12시의 종은 쳐버렸다.
이제 멋진 마차는 호박으로 돌아가고, 아름다운 드레스는 누더기가 될 뿐이다.
구두는....아름다운 유리 구두만........그 시간이 있었다는 걸 증명하고 있겠지만,
내 손 안에는 그 어떤 구두도 없다.
모든 동화는 해피 엔딩이다.
신데렐라도 해피 엔딩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동화가 아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행복한 사람들만 계속 행복해지는.....불공평한 세상.......
잠시...그 행복이라는 걸.....가질 수 있는 줄 알았다.
내게도......이런.....행복이라는 선물이 주어진 줄 알았다.
그러나.....그건.....잠시 왔던,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다.
신은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분노하는 한 녀석에게 잠시 선물을 베푸신 걸까...아니면 벌을 내리신 걸까.......
세상을 다 가진.....저 녀석이....미치도록 부럽다.
부러워서, 너무나 부러워서.......눈물이 날 것 같다.
7
황태경 덕분에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것이......쉬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빠른 시간 내에 옮길 수 있었다.
녀석도...오늘 밤 비행기로 한국으로 떠난다고 했다.
체크인을 하고 방 안으로 들어오니 이미 저녁 무렵이 되어 있었다.
모두가 인디 밴드 연습실로 가 있는 동안 혼자 짐을 챙겨 나왔다.
며칠 내로......이곳을 떠야 한다.
도착하자마자 종현이 녀석에게만 전화로 알렸다.
녀석은 무슨 짓이냐며 미친 거냐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미녀가 황태경을 선택했다는....그 말에.....종현이는 입을 다물었다.
“형!! 어디로 갈 거야?”
“몰라.”
“한국으로 돌아갈 거야?”
“그것도 모르겠어. 그래도...당분간은...한국에는....못 갈 거 같아.”
“에이씨!!!!”
전화기 너머로 쾅하는 소리가 들린다.
열 받은 녀석이 벽이라도 친 모양이다.
“함부로 열내지마. 너.....뮤지션은 목도 중요하지만, 손도 중요해.”
“형!! 한 가지만 알아둬!!
씨엔블루는....4명이야! 알겠어?
우리 세 명은.....나머지 한 명이 돌아올 때까지 계속 기다릴 거야.
알겠지? 그러니까...그러니까.........”
녀석의 목이 멘다.
뭔가 뭉클한 것이 속에서 올라와서 내 목까지 막아 버린다.
“고맙다........
그리고 종현아.....”
“어?”
“미녀에게는........절대로.......말하지 마라. 부탁이다!!”
“............알았어......”
다......끝났다.
이제.........
이렇게 끝내면 돼.
멍하니....멍하니 그렇게 앉아 있었다.
서럽도록 붉은 황혼만, 뜨거웠던 낮이 끝났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전화가 울렸다.
황태경이었다.
“황태경!”
“너.....지금 어디야? 정말.....떠난거야.?”
“아직은......도쿄야. 곧.....떠날 거야. 걱정 마.”
“지금 어디냐구!!!”
“.......우에노 근처......○○ 호텔.....”
“몇 호야?”
“512호...........”
“갈 테니까 기다려!!!”
뚜뚜뚜뚜
전화가 끊겼다.
나 더 이상...이 녀석에게 할 말이 없는데....
어쩌면 내가 약속을 지키는지 확인하러 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녀석에게 비행기표라도 내밀어야 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초인종이 울렸다.
황태경! 정말 미친 듯이 달려온 모양이다.
문 여는 시간도 길다는 듯이 초인종을 울려대고 있었다.
띵동띵동.......
“황태경! 나 이제 더 이상 할 말 없..........!!!!!!!!!!!!!!!!!”
“강신우!!!!!”
내 심장이 그 자리에서 멎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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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화요일 밤이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하루 일찍 올리게 돼서 다행입니다.
39회는 아마...한참 걸릴 듯합니다.
사실 16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본에 출장을 다녀와야 해서....
그 사이에 업무 처리해 놓고, 가서 일할 거 챙기고 하려면 시간이 없을 듯합니다.
참...이상하게도 뭔가 자꾸 쓰고 싶을 때, 일이 몰아치더라구요.
여유가 있을 때는 도리어 글이 안 써지구요.
이 알 수 없는 아이러니를...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신우 이야기 알림판>에 있는 <꼭 읽어주세요!!!>를 아직 안 보신 분들은 꼭 봐 주시길.....
(http://blog.daum.net/grandblue08/8746307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이제...정말 얼마 안 남았으니.....꼭 부탁드려요.
늘....평안하시길.......(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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