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남이시네요/(미남) 신우 이야기

신우 이야기 46 - 모든 삶은 겪어내야 할 이유가 반드시 있다

그랑블루08 2010. 12. 23. 16:19

<신우 이야기> 46. 모든 삶은 겪어내야 할 이유가 반드시 있다


 

 

 

 

 

 



1. 




“그 어떤 말로도” 활동이 접혀질 때쯤 다음 곡 활동까지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예전 같으면 쉬어서 좋았겠지만, 지금은 정신없이 바쁘고만 싶다.

바쁘다는 것이, 할 일이 많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요즘 톡톡히 느끼고 있는 중이다.

다들 황금 같은 며칠간의 공백을 어떻게 보내는지 말들이 많다.

제르미는 자꾸 같이 MT라도 가자며 졸라대고 있고,

황태경 씨는 그 말에 심드렁한 표정이고,

미남 오빠는 데이트해야 된다며 단호하게 거절한다.


“고미녀! 그럼 너랑 나랑 둘이 가자!! 응? 응?”


제르미가 그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황태경 씨가 버럭한다.


“뭔 소리야? 고미녀가 왜 너랑 같이 가?

 얘는 일 있어서 안 돼!!”


나도 모르는 무슨 일?

의아한 표정으로 황태경 씨를 보지만, 황태경 씨는 내게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젓는다.

아마 안 된다는 뜻이겠지.

난 차라리 MT라도 가고 싶은 심정인데,

이렇게 아무 일도 없이 그렇게 집에 혼자 있고 싶지 않은데,

그 순간 전화가 왔다.

지역번호 051.

부산이다!


분명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절대로 상상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그런 이성적 판단과는 상관없이 내 심장은 터질듯이 뛰어댄다.


“나....전화가 와서.....”


휴대폰을 들고 연습실 밖으로 나왔다.

몇 번이고 숨을 고르고 나서야 겨우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여보....세요.”


내 목소리는 이미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여보세요? 미녀 씨 휴대폰 아닌가요?”


중년 여자분 목소리였다.

아.........이 분은.........


“혹시 신우 오빠....어...머니...세요?”


“아, 미녀 씨 맞구나.

 맞아요. 신우 엄마예요.

 너무 오랜만이라 전화번호가 바뀌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맞아서 다행이네.”


신우 엄마.

다른 사람 입에서 정말 오랜만에 그 사람의 이름을 듣는다.

그 사람의 이름만 들어도 내 심장은 이미 저 아래로 쿵 하고 내려앉아 버린다.


“건강은 괜찮으세요?”


“난...늘 그래요. 늘 같아요.

 그러니까 괜찮은 거겠죠?”


“네.....저...근데 무슨 일이신지.....”


“갑자기 전화해서 놀랐죠?

 며칠 전에 잠이 안 와서 밤 늦게 티비를 켰는데 미녀 씨가 나와서......

 그걸 보고 있으니 미녀 씨가 보고 싶더라구.

 주책이죠?”


며칠 전?

저번에 녹화했던 초콜릿이 며칠 전에 방영됐는데 그걸 보신 듯했다.

그런데...초콜릿을 보셨다니 약간 마음이 들킨 듯 불안해진다.


“초콜릿.....보셨어요?”


“아, 맞아요. 그 프로. 김정은 씨 나오는......”


“예.”


“미녀씨!!”


“네?”


“혹시 기차여행 하고 싶지 않아요?”


“예?”


“그냥 멀리 떠나고 싶지 않아요?

 혼자서 겨울 들녘도 보고, 사람 사는 풍경도 보고,

 그렇게 덜컹거리는 기차 타고 생각에 잠겨도 보고.....

 그렇게 종착역에 도착해서 노을 지는 바다.......보고 싶지 않아요?”


“보고.......싶어요.”


“그럼, 와요. 바쁘지 않으면........

 노을 지는 바다.........나랑 같이 봐요.”



모르겠다.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니 기차를 타지 않으면, 그 노을 지는 바다를 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같이 보자는 그 말씀을 듣고 나니, 왜 내가 여행을 떠나지 못했는지 알 것도 같다.

종착역에 도착한다 해도 아무도 만날 사람이 없어서, 외로움만 더 짙어질 것 같아서,

그래서 더 못 견딜까봐 난 떠나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2.




그분 말씀처럼 KTX 기차를 타고 부산을 내려갔다.

새벽 기차는 마치 빛 속을 향해 달리는 것 같았다.

기차가 지나가는 곳곳마다 아침 햇살이 비취는 것 같았다.

아주 멀리까지 그림자를 길게 빼면서 낮게 낮게 빛을 비추고 있었다.

그래 늘 이렇게 오늘의 태양은 뜨는 법인데,

왜 이렇게 나는 이다지도 그늘 속에 잠겨 있어야 하는 건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지,

점점 속상해지기 시작한다.

도대체 무엇부터 잘못된 것인지.......

기억은 기억의 꼬리를 물고, 다시금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어머니는 병원에 계신다고 하셨다.

늘 겨울이면 병원 신세를 질 수밖에 없다고 하시며 대수롭지 않다고 하시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계속 안 좋아지시는 것 같다.


부산역 앞에 꽃 가게가 있었다.

병원 문병을 가는 거라고 했더니 이것저것 권해주신다.

왠지 그런 색깔 있는 꽃보다는 한뭉치 배경처럼 담겨 있는 하얀색 작은 꽃에 시선이 간다.

내가 좋아하는 꽃. 그 하얀 안개꽃을 바라보며 나는 한 없이 그 기억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에게서 그 꽃을 받았던 날은....어쩌면 그 전까지는 내 생애 가장 힘들었던 날이기도 했다.

그를 만나기로 했던 날.

그날은 내게 최고로 행복하기도 했었고, 완전히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기도 했던 날이었다.

내가.......사랑한다고 믿었던 황태경 씨가 내게 입을 맞췄던 날이기도 했고,

그의 입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을 들었던 날이기도 했다.


고미남은 남자니까 여자라고 헷갈리지 말라는 유헤이의 말에 황태경 씨는 아주 건조하게 대답했었다.


“고미남은 여자 아니야....고미남한테 해준 건 아무 의미 없어.”


아직도 그 말이 생각난다.

그를 만나기로 했던 약속도 잊고 연습실에 박혀서 엄청 울었던 기억.

그러나 참 상황은 웃긴다.

이제 그 기억들은 떠올리며 웃을 수 있는데, 도리어 그 당시의 다른 기억들이 내 심장을 찔러댄다.

그 힘듦을 잊게 해줬던 그와의 시간들이 도리어 지금은 내게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이 되고야 말았다.

나와의 약속을 위해 그가 무엇을 준비했을지.......

조금은 알 것도 같은데......

내 기억 속에 남은 건, 그와 내가 함께 했던 상상놀이.



--------------------------------------------------------------------------------------




한강에서 오뎅을 먹고, 그 오뎅집 아줌마가 애인이라고 놀려서 굉장히 쑥스러웠던 순간.

그는 내 어깨를 안고 차까지 걸어가고 있었다.

그것이 너무나 어색했었다.


“혀...형......신우 형.....”


“나.....신우 형 아닌데?”


“아.....신우.......오.빠....”


“왜?”


“이제....어깨 좀.....”


“아가씨......

 내 차까지만 이렇게 가자.”


“예?”


“우리....오늘....둘 다 많이 힘들었으니까......

 지금은......그냥....상상해보자. 그....사람과......같이 있다고.........

 많이 아팠으니까........

 그 정도는.......괜찮지 않을까......

 지금은.......이렇게......그 사람 옆에 서 있다고.....상상하면서 위로받아도.....괜찮지 않을까.....”


그리고........그 사람과 난.....아주 천천히 걸었다.

그렇게 내 상처받았던 마음은 위로받고 있었다.




-----------------------------------------------------------------------------------





“맞아요. 사귀긴 하는데, 이 아가씨가 워낙 마음을 안 열어서.....

 저 혼자 짝사랑하는 기분이라니까요.

 저 혼자만 무지 사랑하고, 저 혼자만 속 끓이고.......”


오뎅을 팔던 아주머니에게 했던 농담 같았던 그의 말은.......농담 같은 진실이었다.

농담일 거라 생각해서 부담이 되지 않았던 그 말이, 지금은 상처가 된다.

그랬다.

그는.....그 날......상처받았던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사람도 나 때문에 상처받았을 텐데.......그는 나를 위로해주고 있었다.

그와 함께 걸었던 그 시간들은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내게는 따뜻한 위로였을 그 시간들이 그에게는 고통이었을까.

그래서...지금 내가....그 벌을 받고 있는 걸까.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과 같이 있다는 상상.

그걸 하자고 했었다.

그 사람이 생각한 사람이 나였다면, 그는 상상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그는.......내게 상상해 보라고 했지만, 나 역시 상상하지는 않았었다.

그가 주는 오빠 같은 느낌이 좋았으니까........

그 사람이 황태경 씨가 될 수는 없는 거니까..........


왜 그 때는 몰랐을까.

왜 그 때는 내 마음이 이렇게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흐를 거라는 걸 왜 몰랐을까.

그 사람을.......이렇게 품게 될 줄 왜 몰랐을까.

아무 것도 몰랐던 그 시절의 내가........너무나 한심스럽다.

아팠을 그의 말들이, 그의 마음들이 다시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그래서.....벌 받고 있는 거겠지.





--------------------------------------------------------------------------------




“자......고미녀 양을 위해 준비한 거랍니다.”


“신우 형!!!”


“어....고미남 군한테 주는 거 아닌데?”


“아....죄송합니다. 신우 오빠.....정말 저한테 주시는 겁니까?”


내 기억 속 그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정말........

 저.......안개꽃.....정말 좋아합니다.”


“아까는 장미 사라고 했었잖아.”


“그건.....보통 여자분들이 좋아하실 것 같아서.......그랬습니다.

 그럼.....장미는 안 사신 겁니까?”


“아니....샀어....그건 아마 레스토랑에 있을 거야.”


“아....죄송합니다.”


“어이~~ 고미녀 양. 아직은 고미남 군이 되면 안 돼.

 어쨌든......이 baby's breath는 고미녀 양을 위한 꽃이야.”


“baby's breath요?”


“안개꽃의 영어 이름이야. 아이의 숨결........”


“아.....정말 어울리네요. 전.....이 자그마한 꽃들이 참 좋습니다.”


“장미가 없어도....괜찮아?”


“풋....전....장미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안개꽃이나 국화를 좋아한답니다.

 풀 냄새를 풍기는.....꽃들이 참 좋습니다.

 안개꽃은.......늘.......멋진 꽃들 뒤에 있지만, 저는.....이런 안개꽃이 정말 좋습니다.

 안개꽃만으로도......충분히.....아름답습니다.”


내 말을 듣고도 그 사람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너랑 나.....정말.....바보 같이....닮았다.”




-------------------------------------------------------------------------------------




그렇게 그에게서 그 꽃을 받았다.

안개꽃을 그가 사올 줄은 정말 몰랐다.

그가 꽃을 선물할 지도 몰랐지만, 무엇보다 안개꽃을 사줄 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떻게 내가 좋아하는 꽃을 알았을까.

그게 정말 신기했었다.

이 사람.......나랑 참 비슷하구나.......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마치...오빠처럼 내 마음을 다 알아봐주고, 내 마음을 읽어주고, 내 마음을 위로해주는 사람이구나....싶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것이 그렇게 고마웠다.

미남 오빠가 곁에 없으니, 이렇게 이 사람을 보내서 나를 위로해 주시는구나.......그런 생각을 했었다.


꽃 하나에 또 울컥하며, 어쩔 수 없는 기억을 떠올려대는 나를 보며,

어쩌면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 아닌가....겁이 나기도 한다.

그렇게 난 하얀 안개꽃 한 다발을 품에 안고 택시를 탔다.




그러나 병원에 도착해서도 한참을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언젠가.......기억 속 어딘가에 깊이 묻어 두었던, 그 장면이 바로 떠올라버려서 자꾸만 코끝이 시큰해진다.


이곳이었는데.....

그가 날 바라봤던 곳이 이곳이었는데........

그가.......내게.......자신의 마음을 보여줬던 곳도 이곳이었는데.......

그의 마음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그 최초의 장소로......오고야 말았다.

아주 오랫동안 생각하지 않으려 애써 묻어두었던 기억이 미친 듯이 떠올라서 숨을 쉴 수가 없다.

그렇게 나는 한참을 서서 내 기억과 싸우고 있었다.


언제쯤........안개꽃을 보더라도, 또 어떤 장소를 가더라도,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3





심호흡을 크게 하고 병실문을 두드렸다.


“네.”


밝은 목소리가 들린다.

목소리만으로도 사람을 기분 좋게 해 주시는 분이다.



“저....왔어요.”


“어? 미녀 씨! 온다고 힘들었죠?”


“아니에요. 이거.......오다가.....이뻐서 샀어요.”


한참을 망설이며 샀던 그 안개꽃 한 다발을 어머니께 내밀었다.


“세상에!!! 미녀 씨!!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안개꽃 제일 좋아하는 거??”


“예? 안개꽃 좋아하세요?”


“응. 정말 좋아해요. 사실....이건......신우가 자주 사줬었는데......

 이 녀석이 군에 있으니.........계속 못 받고 있었네.

 정말 고마워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보니, 뭔가.........가슴이 휑한 느낌이 든다.

그 사람은.........왜.....그 날 내게 안개꽃을 줬을까?

난........그저 그 사람이 내 마음을 헤아렸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지금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나니 굉장히 혼란스럽다.

그는......단지.....어머니를 생각하며 안개꽃을 샀던 게 아닐까?

그가 내게 사줬던 구두도.....어머니를 생각하며 샀던 거였다.

난.....뭔가.......아주 심하게......착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에게 나라는 존재는.........뭐였을까........



“미녀 씨? 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아요.”


“네? 네. 괜찮아요. 추운 데 있다가 들어와서 그런가 봐요.”


“점심은 먹었어요?”


“네. 기차역에서 대충 식사하고 왔어요.”


“그랬구나. 내가 이러고 있으니 멀리서 온 손님에게 맛있는 밥도 못 해주고 미안해요.”


“아니에요.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여행 오는 기분이었어요.”


“미녀 씨.”


“네?”


“내가.....갑자기 전화해서 이상했죠?”


“네?........저.......”


“괜찮아요. 이상했을 거예요.

 내가 연락하는 것만으로도 미녀 씨에게는 아플 수도 있을 텐데.....

 그래도 연락하고 싶었어요.”


어머니는 따뜻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다 알고 계시겠지.

어쩌면 어머니와 나는 아주 불편한 사이일 수밖에 없다.

아들의 전 여자친구.......

아니 여자친구라고 불릴 수나 있는 사이일까 의심스러운......그런.....여자.

그런 내게 연락하고 보자고 하신 건 보통의 어머니라면 참 어려운 일이다.


“초콜릿이라는 프로에서 미녀 씨의 독백을 들었어요.”


“아...그건...제작진에서 그냥 노래에 대한 해설 같은 건 해보라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한 거예요.

 뭐, 그렇게 의미를 두시지 않으셔도 돼요.”


황급히 아무 것도 아니라며 손을 내젓는 나와는 반대로, 어머니는 고요했다.

부산스러운 내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어머니는 고요히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


“난........미녀 씨의 어떤 말이.....참.....마음에 와 닿았어요.

 <굿윌헌팅> 영화 좋죠?”


아...그거였구나.

혼자 집에 있어야 하는 날들에 견딜 수가 없어서 동이 터올 때까지 나는 영화를 보곤 했었다.

동네에 있는 DVD 대여점에 가서 아무 생각 없이 몇 개 씩 쓸어오곤 했었다.

“본다”라는 말보다는 “틀어두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저 틀어두었다.

의미 없는 시선으로, 눈만 화면을 향한 채, 어서 해가 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몇 개월을 보내고, 1년이 지나갔다.

그에게 찾아갔다가 엄청나게 앓고 난 후, 병원에서 퇴원해서 돌아와 보니,

언제나처럼 여러 개 가져온 DVD 타이틀 중에 <굿윌헌팅>이 끼여 있었다.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틀어두었다.

역시나 건조하게 바라보다가, 그만 어떤 한 부분에서 나는 내 속에 모든 것들이 솟아오르고 말았다.


“내 잘못이 아니다. 내 잘못이 아니다.”


그 말 한 마디가........그토록 서럽고도 위로가 될 줄 몰랐다.

그 말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통곡을 해대며 나는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내 스스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다 내 잘못 때문일 거라는 자학.

그것이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울었다.

그 영화의 주인공과 같이 내 잘못이 아니라고 외치며 울었었다.

그리고는 황태경 씨를 찾아갔다.

곡작업을 하겠다고, 나도 끼워달라고, 그렇게 내 삶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 출발점이 이 영화였다.

내게는 전환점 같은 영화...였다.


“난........미녀 씨가 얘기한 ‘내 잘못이 아니다’라는 부분이 많이 걸렸어요.”


“예?”


“미녀 씨가 왠지.......모든 잘못을 자신에게 돌리고 있었구나 싶어서........”


아......이분은.......모르는 게 없으셨다.

내가 가지는 감정, 내가 느끼는 죄책감, 내 스스로를 비하하는 마음까지 모두 알고 계신지도 모른다.


“지금은.........해결된 건가요? 미녀 씨가 느끼는 죄책감?”


“조금은.......그랬던 거 같아요.”


“그럼, 아직.......인가요?”


“그 영화 때문에 활동을 시작할 수 있게 됐어요.

 힘도 많이 얻었구요. 좀 정정당당하게 맞서려고 했던 거 같아요.”


“그러나.........아직.......조금은 그런 죄책감이 여전히 남아 있는 건가요?”


죄책감.

어머니의 말씀은 자꾸만 숨겨두고 묻어두고 끄집어내려 하지 않았던 저 아래의 무언가를 건드린다.

건드려서는 안 될 것 같은데,

이게 터져 나오면 안 되는데,

나 자신도 감당하지 못할 텐데,

어머니는 내게 불편한 진실을 끄집어내라고 하신다.


“전...전........”


말을 뱉기도 전에 목이 멘다.


“수녀원으로.........가고 싶어요.”


“미녀 씨!!!!”


“벌....받는 거 같아요.”


“그게 무슨.....”


“제가 서원을 지키지 않아서, 신께 맹세했던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호되게 벌 받는 거 같아요.”


그랬다.

난....단 한 번도 속으로도, 밖으로도 해 보지 않았던 말을 해버렸다.

애써 외면했던 그 말을,

내 마음 속 아주 깊숙이 숨겨 두었던 그 죄책감을

그 자학의 가장 핵심을 건드리고 말았다.

내가 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그러니 벌을 받아도 싸다고,

그러니 그 사람이 내게 질려서 떠나더라도 당연한 거라고.......

그러니까 내가 원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면 이 모든 괴로움들은 떠나지 않을까.....


“미녀 씨, 신이 그렇게 매몰차고 이기적일까?”


“예?”


“그렇게 인간을 괴롭히고 벌주는 게 취미인 신이라면,

 그런 신이라면 믿지 말아야지. 그건 신도 아니지. 아닌가?”


“어...머니.......”


“미녀 씨, 아직도 수녀님이 되고 싶어요?

 아니면, 수녀님이 안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전......전.......이곳이 제가 있을 곳이 아닌 거 같아요.”


“그게 아니야. 내가 묻고 싶은 건, 미녀 씨가 정말로 수녀님이 되고 싶은가 하는가예요.

 정말로 수녀님이 되고 싶어요?

 되어야 하는 것과 되고 싶은 건 완전히 다른 거예요.

 되고 싶은 건, 그게 안 되면 죽고 싶은 거예요.

 너무너무 하고 싶어서 그렇게 되고 싶어서, 내 모든 것을 팔아서라고 내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하고 싶은 거예요.

 그 어떤 것도 이보다 더 클 수는 없는 거, 그 어떤 걸로도 바꿀 수 없는 거,

 이것보다 더 중요한 건 내겐 없는 거,

 그게 바로 정말 되고 싶고 하고 싶은 일이에요.

 지금 미녀 씨, 그래요? 그런 마음이에요?

 그 어떤 것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좋아죽을 만큼, 하고 싶어요?”


“어머니.........”


어머니는 지금 내게 정말로 수녀가 되고 싶으냐고 묻고 계신다.

예전 그 물음처럼.....

정말로 너무너무 하고 싶은 일이냐고 물으신다.

해야만 하는 “당위”가 아니라 너무너무 하고 싶어서 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의 “꿈”이냐고 물으신다.


“더....독하게 물을까요?

 미녀 씨가 상처받아도, 다시는 내 얼굴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해도,

 난,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어요.

 아니!!! 이렇게 물어야 해요!!!

 지금 미녀 씨의 마음에, 솔직하게 물어봐요!

 수녀가 되고 싶다는 마음과, 신우에 대한 마음.......

 어떤 마음이 더 커요?”


그랬다.

어쩌면 그 날 이후로 아무도 내게 묻지 못했던 말을,

나조차 나 자신에게 묻지 못했던 말을,

그 진실 앞에 나는 마주하고야 말았다.


어느 것이 더 크냐고 물으신다.

그건........‘신우’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철렁 내려앉는 가슴에서,

고통스럽게 쓰린 내 심장의 요동 속에서

이미.....답은 내려져 있다.


“미녀 씨,

 어쩌면 미녀 씨는 지금 이 상황을 정직하게 견뎌내야 할 거예요.

 지금은 고통스럽겠지만, 미녀 씨가 반드시 겪어내야 하기 때문에 주어진 거예요.

 신이 주는 시련은 인간을 괴롭히기 위해 주시는 게 아니에요.

 그건......성장을 위한 거예요.

 당신의 고통 앞에, 당신의 신도.......고통스러울 거예요.

 자식을 키우는 부모는, 자식을 괴롭히기 위해 키우는 게 아니에요.

 자식 골탕 먹이려고 혼자 서게 하는 게 아니에요.

 자신의 아이가 스스로 설 수 있게,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게

 그래서 성장할 수 있게 그렇게 함께 그 고통을 견뎌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미녀 씨, 이제 피하지 말아요. 도망가지 말아요.”


말을 하고 싶은데 그 어떤 말도 뱉을 수가 없다.

신음 같은 울음소리만 자꾸 새어나온다.

아무리 입술을 깨물어보아도 소용이 없다.

이미 맞닥뜨린 내 바닥의 진실은 고통 속으로 자꾸만 밀어 넣는다.


“버림.........받았다고..........생각했....어.....요......”


그 신음들 사이로 억지로 말을 뱉어내보니 난 이제 아이처럼 꺽꺽 대며 울고 있다.

그런 아이 같은 나를 어머니께서는 진짜 우리 엄마처럼 안아주신다.

그 품이 너무 따뜻하고, 너무 고마워서 자꾸만 더 서러워진다.

기대 울 수 있는 품이 나를 점점 더 서러워지게 한다.


“전......전.......처음부터 버림받았다고...흑....그렇다고...생각.....했어요.

 태어나면서부터.......아버지께도 버림받고,

 어머니도.......일찍 돌아가시고,

 늘........운도 없이.......세상에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그래서.......나 같은 거........아무도....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주님조차도, 원장수녀님조차도, 나 같은 거..........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까.....내가 잘 해야 한다고........생각했어요.

 언제든지 돌아서실 테니.....언제든지 저를 버리실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버림받지 않으려면.........제가........잘 해야 한다고.......

 그런데.....그런데..........

 신우 오빠에게도.........결국........버림받았어요.

 나 같은 건..........처음부터..........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였는데,

 그런 가치도 없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더 벌 받기 전에.......수녀원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더 불행해지지 않게 돌아가야 한다고....엉..엉..........”


터져버린다.

내 속에서 그토록 쌓여 있던 그 마음의 병들이 곪아질 대로 곪아진 채로 다 터져버렸다.

아무에게도 말해보지 못한......나만의 상처들이 다.....터져버렸다.


어머니는 내 속이 다 터지도록 내 등을 어루만지셨다.

내 등을 토닥이고, 내 속의 것들을 다 토해내도록

그리고 그 고통들을 견뎌내도록 당신의 품에 나를 감싸셨다.

그래서.....터뜨릴 수 있었다.

그 품이 있어서, 아주 잠깐이지만, 세상에 나를 위한 품도 있다는 걸,

그래서 마음 놓고 터트릴 수 있었다.


“이렇게 어린 아가씨가,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웬 상처가 이렇게 많았을까.

 다 터뜨려요. 이렇게 나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걱정 말고, 부끄러워 말고 다 터뜨려요.”


내게.......버림받는 건 일상생활 같은 거였나 보다.

그래서 그 어떤 기대도 않고 살고 있었나 보다.

그러니 어서 주님께 버림받지 않도록

수녀가 되어 ‘행복’이라는 걸 욕심내지 않고 조심하며 살아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나 보다.

아니면, 받아줄 곳이 없으니, 그렇게라도 갈 곳이 있다고 안위하고 살았나 보다.

그러다.........나도 모르게 신우 오빠라면....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나 보다.

어쩌면 진짜 내 사람을, 내가 기댈 언덕을 만난 게 아닌가 하고 너무 많이 기대했나 보다.

이 사람만은 주님이 주신 선물이 아닐까,

내 고단했던 삶에 이 큰 선물을 주시려고, 그토록 힘들게 하셨나 보다고,

그러니 이 귀한 선물이 더 귀하고 감사하다고 그렇게 기대고 있었나 보다.

내게 신우 오빠는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나를 세상으로 이끌어준, 내게 세상이라는 선물을 준

내 인생의 마지막 보루였나 보다.

그러니, 그런 그에게 버림받는다는 건, 이제......내겐....내 인생엔

그 어떤 빛도, 그 어떤 소망도 없는 거였다.

나를 위해 준비된 선물 따윈 없다는 걸.......

나 같은 사람은 그 어떤 선물도 기대해선 안 된다는 걸........

그와의 이별은 말해주는 것이었다.


“혼자...버림받은 거 같았죠?

 신은 나만 괴롭히는 거 같았죠?

 행복하면 벌 받을 거 같죠?

 아니에요.

 미녀 씨의 상처는 당신을 벌하려고, 당신을 괴롭히려고 주어지는 게 아니에요.

 미녀 씨가 상처가 많은 건, 미녀 씨가 아픔이 많은 건,

 그만큼 큰일을 하기 위해서예요.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될, 그 상처를 겪어내고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이유가 있어서예요.”

 

내가 꼭 겪어내야 할 이유.......

그런 걸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저 나 같은 존재는 민폐일 뿐이라는 생각뿐, 다른 이유를 생각해본 적은 없다.


“상처받은 치유자.

 미녀 씨에게 상처가 많은 만큼, 또 그 상처를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일어서고 나면, 미녀 씨는 상처 입은 누군가에게 큰 위로를 줄 수 있을 거예요.

 미녀 씨가 당당하게 겪어내고 일어선 만큼, 당신을 보며 누군가는 살아가는 희망을 얻을 거예요.”


“저....같은.....사람 때문에요?”


“'저같은 사람'이 아니라, 아픔을 견뎌낸 미녀 씨 때문에요.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건, 그 사람이 대단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성공을 했기 때문이 아니에요.

 실패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그 모습 자체가 감동인 거예요.

 그 사람이 대단한 무언가를 해내고 성공을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과는 별개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건 그 사람이 대단한 거니 나와는 상관없다고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그러나 비록 상처가 많고 아픔이 많지만,

 그렇게 대단한 성공을 이룬 건 아니지만,

 쉬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열정을 다해서 아파하고, 그 안에서 일어서고, 또 나아가려는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 감동을 주지요.

 살아갈 희망은........그런 사람에게서 얻게 돼요.

 괴테가 그랬죠. 좋은 글과 좋은 음악.....그것이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미녀 씨는 이미 그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나라는 존재가 살아가야 할 의미를, 그 존재의 의미를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러기에는 내 삶은 너무나 구질구질했다.

나라는 존재의 가치 따위를 생각할 겨를도, 염치도 없었다.

그와의 이별조차도 당연하게 느껴졌다.

나 같은 게 언감생심.....행복을 꿈꿔서는 안 되는 거였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정말 어머니의 말씀대로, 모든 존재는 살아가야 할, 그런 존재의 가치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존재의 이유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여전히 고통스럽지만, 버림받은 현실은 그 어떤 것 하나 변한 것은 없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의 말씀을 의지하고 싶다.

나 역시.....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지금의 이 아픔은.....이 상처는......나를 성장시키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다.


그러는 사이....조금씩......내 마음은......다시.....평온해지기 시작했다.

울음도 멎고, 정신도 차려지고....그러다 보니 쑥스러워진다.

어머니 품에서 벗어나니 도리어 더 눈 둘 곳을 모르겠다.

이렇게 염치가 없어도 되나 싶기도 하다.


“저......정말 바보같죠?

 이미....끝났는데, 끝난.....사랑 때문에......이러고 있으니......

 죄송해요.”


“뭐가요?”


“예? 아.....저 때문에 괜히 힘드신 듯해서.......”


“아니야. 내 말은.......뭐가 끝난 사랑이냐구?”


“이미........그 사람은.......떠났으니까.........”


“미녀 씨, 내 생각엔 미녀 씨의 사랑은 아직 끝난 게 아닌 거 같은데?”


“예?”


“나도....내 아들의 마음은 몰라요.

 짐작하는 것도 있지만, 그래도 내 마음대로 얘기할 수는 없어요.

 그 사람의 마음은, 그 사람의 상황은 그 사람 입으로 정확하게 들어야 해요.

 그러나.......사랑이라는 거....그거 물론 같이 하는 거예요. 맞아요.

 그런데.....사랑이 끝났다는 거.........그건.....상대방이 끝났으니까....그렇게 도둑처럼 갑작스럽게 닥치는 게 아니에요.

 그런 선고를 받더라도.......상대방의 마음은 떠났다는 그런 선고를 받더라도,

 결국엔.....나한테 달린 거예요.

 내가 해결되어야 끝나는 거예요.

 상대방 마음이 변했으니까 끝났다라는 거......그것도....나 자신에 대한 폭력이에요.


 억지로 잊으려고 하지 말아요.

 억지로 뭔가를 해보려고 하지 말아요.

 힘들면 울고, 그리우면 많이 그리워하고 그렇게 혼자서 사랑을 끝내야 해요.

 그래야 끝나요.

 그 사람이 끝났더라도, 나는 안 끝났을 수도 있어요.

 미녀 씨는......아직....사랑이 끝나지 않았어요.”


그 사람은 끝났어도 내 사랑은 끝나지 않았을 수 있다.

그것을.....인정하라는......말씀이셨다.

어렵다. 무진장 어렵다.

사랑이라는 거, 시작하는 것도, 끝내는 것도 너무나 어렵다.


“어려워요. 너무.”


“맞아요. 어려워요. 그래서.....사랑을 하는 것도, 사랑을 끝내는 것도, 사람을 성장하게 하지요.

 미녀 씨, 조금 더 살아 본 내가 해 주고 싶은 말은 이거예요.

 억지로 기억을 지우려고 하지 말아요.

 당신을 떠난 사람과, 기억 속의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에요.”


“예?”


“지금 떠난, 지금 마음이 변한 현재의 그 사람과, 과거 기억 속에 존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에요.

 기억 속에 그 사람은 진실했어요. 그걸 의심하지는 말아요.

 그리고 그 때를 부정하지 말아요.

 나 자신이 어리석었다고 생각하지도 말아요.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 사람과 사랑했던 추억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거예요.

 사랑이 끝났다고, 그 추억 자체도 더럽혀지고, 거짓인 건 아니에요.

 사랑이 끝나고 고통스러운 건, 처음엔 떠나버린 그 사람 때문이지만,

 사실 더 고통스러운 건, 그 아름다운 기억들이 거짓이라고 믿어서, 그래서 그 추억을 잊어야 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추억은 추억으로 기억 속에 담아둬요.

 언젠가는 고통스럽지 않게, 아니, 그 고통까지 아름답게 느껴질 때가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억지로 잊으려고 하지 말아요.

 ‘사랑’을 시작하는 것도, 끝내는 것도, 상대에게 끌려다니지 말고, 스스로 해요.

 미녀 씨가 시작하면, 시작하는 거고, 미녀 씨가 끝내야 끝나는 거예요.”


그랬나?

나도 그랬을까.

지금은........추억 때문에 더 힘든 것 같기도 하다.

아름다운 추억이 거짓되다고 느껴서..........

잊어야 하니까, 그 모든 기억을 잊어야만 하니까, 그래서 더 아팠던 것 같다.

그 기억을 지우고 나면, 그 추억을 지우고 나면,

나의 스무 살이, 스물한 살이, 스물두 살이, 그리고 지워나가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지금 곧 올 스물세 살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나 자신이 지워져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아팠나 보다.

기억을 기억 그대로 두는 것, 추억을 추억 그래도 두는 것,

난........그것을 연습해야 정말 ‘끝’이라는 걸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뭐 하나......여쭤봐도 되나요?”


“얘기해요.”


“어쩌면, 가슴 아픈 질문일 수도 있는데......”


“괜찮아요. 얘기해요.”


“만약에요. 예전으로......그러니까......다리 다치셨을 때, 그때 즈음으로 돌아가신다면,

 같은 답을 내셨을까요?”


“미녀 씨는 다르게 묻네.”


“예?”


“보통 사람들은 왜 헤어지지 않았냐고, 뭐하려고 봐줬냐고 그 이유를 묻는데,

 미녀 양은 내 결정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느냐고 묻는 거네.”


“아......그런가요? 그냥.........궁금했어요.

 죄송해요. 제가 너무 실례되는 질문을 드렸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난...모르겠어요. 그때로 돌아가면 똑같은 결정을 내렸을까.

 지금 이런 모습을 다 알고, 이렇게 지낼 걸 다 알고 과거로 돌아간다면 내 결정이 달라졌을까.

 그건 모르겠어요.

 그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느끼느냐에 달려 있어요.

 똑같은 결론을 내릴 수도 있고, 어쩌면 다른 결론을 내릴 수도 있겠죠.”


“네.”


“근데 한 가지는 확실해요.”


“예?”


“만약에 미녀 씨에게 이런 일이 닥친다면,

 그러니까 내가 겪었던 이런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난 아마 목숨을 걸고 강경하게 그 사람과 헤어지라고 할 거예요.

 절대로 안 된다고 그렇게 말릴 거예요.”


“예?!!!!”


“풋~ 미녀 씨, 굉장히 헷갈려 하네요.

 미녀 씨........근데.......이게 사람이에요.

 지금은 무슨 의미인지 헷갈리겠지만, 나 역시 왜 이런 마음인지 헷갈리지만,

 그래요. 이렇게 흔들리고 헷갈리는 게, 그게.....사람이에요.”


어려웠다.

역시........세상을 조금 살아본 내게는 많이 어렵다.

그러나....아주 조금.......뭔지....알 것 같기도 하다.

다른 이의 삶과 내 삶은 다른 것이니.......

이성적 판단과는 다른...그 무언가가......심장을 움직이고, 마음을 움직이는 그 무언가대로

우리는...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사는 게 아닐까.


겨울 해는 짧았다.

5층 창으로 저 멀리 바다 한 쪽이 붉게 물들어온다.

정말 어머니 말씀처럼 같이 노을을, 바다를 물들이는 노을을 보게 된 듯하다.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은지도 모른다.

사실은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적어도 한 가지는 알게 되었다.

내가..........성장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결국 이렇게 삶을 배우고 있다는 것.






4





그렇게 노을을 함께 본 후에야 나는 병실을 나왔다.

병원의 현관도, 그 앞 풍경도 조금은 덜 아프게 느껴지는 듯도 했다.

병원이 높아서 저 아래 마을과 저 멀리 바닷가의 풍경이 서서히 깔리는 어둠 사이로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저 앞에 택시 하나가 선다.

뛰어가서 잡지 않으면 금방 언덕 아래로 내려가 버릴 것 같았다.

타러 뛰어갈까 싶다가 어둠이 깔리는 풍경 사이로 걷고 싶기도 했다.

걸어볼까........

조금은 걸어도 좋을 것 같다.


그렇게 몇 걸음을 앞으로 내딛다가 내 심장은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아니 얼어 붙어버렸다.

택시에서 내리는 누군가.

아니 택시에서 내리는 군인 한 사람을 보는 순간.

그랬다.

군복을 입고 있어도, 주위에 어둠이 깔려도 난 알 수 있었다.


그다.

그 사람이다.

정문 앞에 ‘그’가 서 있다.


택시에서 내려 앞을 바라보던 그 사람 역시 그대로 멈춰 선다.

어떤 감정도 담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마치 왜 자신을 보고 있느냐는 것처럼,

당신은 누군데 자신을 보고 있느냐는 것처럼,

그의 표정은 낯설었다.

그저 빤히 나를 낯설게 보고만 있었다.

내 표정도 저럴까?

저렇게 모르는 타인을 보듯 하고 있을까.

감정이 담기지 않는 시선이 어떻게 사람을 상처 줄 수 있는지 학습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가 그 동상 같은 그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아니 내 쪽으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1년 10개월 만에 그를 만났다.


헤어진 그 사람을 만났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내게 질려서 떠났다는 사람을,

내가 싫어졌다는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걸까.


한 걸음, 두 걸음.......서서히 그와 나의 사이는 좁혀지고 있다.

좁혀지는 만큼, 내 심장은 터질 듯이 뛰고 있다.

고통스러울 만큼 뛰어대는 심장을 손으로 누르고 싶지만,

마치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깨어날 꿈인 것처럼

그 어떤 행동도 할 수가 없다.


이제........스무 걸음 정도면 내 앞에 올 것 같다.

심호흡을 한다.

이제.......열다섯 걸음.......

손에 주먹을 꼭 쥔다.

이제......열 걸음.......

주먹 사이로 땀이 배어나온다.

아홉 걸음.....

말을 건네야 할까?

뭐라고 말해야 할까?

여덟 걸음.....

웃어야 할까?

일곱 걸음.....

그의 모습이 점점 자세히 보인다.

여섯 걸음.....

군복을 입은 모습이....저랬구나.

하마터면 저 모습을 못 볼 뻔했구나.

다섯 걸음.....

다가올수록 모든 생각들이 사라진다.

네 걸음......

그 사람이다.......

세 걸음......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이다.......

오로지.....한 가지 생각만 든다.

보.고.싶.었.다.

내가 얼마나 이 사람을 보고 싶어했는지, 그것만이 느껴질 뿐......

그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얼마나 큰 감동인지......

그 뿐.......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딛던 그가 순간 멈칫 선다.

그것과 동시에 내 뒤에서 목소리 하나가 들린다.


“말년 휴가냐?”


그의 시선은 벌써 내 너머에 가 있다.

그의 아버지였다.


“네.”


“제대는, 복귀해야 끝나는 거지?”


“...............”


그의 아버지가 물어도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한참을 가만히 있다.

그의 얼굴은 얼음처럼 굳어갈 뿐이었다.


“................네.”


그 대답과 함께 그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내 곁을 스쳐 지나간다.


뭘......생각한 거야......고미녀......

그 사람이 아니야.

그 사람이 아니야.


비교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이다.

내 기억 속에 있는 사람과, 현재의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이다.

착각해서는 안 된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내 머리가 받아들인 이 사실을 내 심장도 받아들일 수 있을 거다.

그래 그럴 수 있을 거다.


그러나.......지금은.......이곳을 벗어나야겠다.

최대한 빨리.....그래야겠다.

빈 택시 하나가 보인다.

종종 걸음으로 택시를 향해 뛰다시피하며 걸어가는데, 뒤에서 갑자기 조금 빠르게 걷는 소리가 들린다.



“잠깐.........나랑.......얘기 좀 하지.”







------------------------------------------------------------------------------------



<신우 이야기>는 아마.....당연히 해를 넘기겠죠?

올해 안에 끝내야겠다는 욕심은 버려야겠지요. ㅠㅠ

연말 전에 한 편을 더 가져올 수 있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이 있습니다만,

장담을 할 수 없어서 정확하게 말씀을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열심히 살고 계시죠?

저도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이때까지 산 것보다 내년 2월까지 조금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

불평하지 않고 조금 더 열심히 살아볼까 합니다.

마감을 앞두고 쓰는 외도 같은 글은.......그 내용의 질과는 상관없이 쓰면서도 더 맛깔나는 듯합니다.

그래서 이 맛깔나는 짓(?) 때문에 조금 더 열심히 연말까지 또 살아갈까 합니다.

틈틈이 즐기는 성탄절과 틈틈이 즐기는 연말에도 분명 행복은 있을 것 같습니다.

가득차게 주어진 편안한 연휴도 물론 좋지만,

일하는 간간이 틈을 낸 쉼도 좋지 않을까, 더 소중하고 귀하지 않을까,

그래서 더 그 짧은 몇 시간의 쉼이 행복하지 않을까,

열심히 세뇌하고 있습니다.

성탄절과 연말 연초 연휴에 직장에서 일해야 하지만, 틈틈이 가족과 함께 할까 합니다.

가족과 함께 따뜻하고 행복한 성탄절과 연말되시길.......


평안하소서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