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과 삶/책과 길

<뜬구름>과 <이불>

그랑블루08 2012. 6. 6. 18:02

 

 

 

 

 

 

 

1887년에 나온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뜬구름>

일본 최초의 언문일치 소설인데, 120년도 더 된 이 소설이 나를 참 놀랍게 한다.

 

개인적으로 일본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100년도 더 된 메이지 시대 소설들은 읽으면서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어떻게 이 시절에 이런 감성으로 글을 쓸 수 있는지...놀라울 따름이다.

 

노보루와 가깝게 지내면서부터 오세이는 본래의 자기를 잃었다.

하지만 그것을 본인은 모른다.

오세이는 노보루를 사랑하는 것 같지만 실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딱이 노보루라서가 아니라 모든 남자를, 특히 젊고 잘 생긴 남자를 연모하는 것이 왠지 좋아 사랑이라고 느끼는 것이거늘

그런 사실조차도 자신은 모르고 있다.

요컨대 오세이의 병은 외부에서 온 것 말고도 안에서도 있던 그녀의 혈기 때문.

분조에게 감염되어 잠시 숨죽이고 있던 혈기가 지금 외부의 자극을 받아 한꺼번에 꿈틀거리더니

이성의 입을 다물게 하고 인식의 눈을 흐려놓을 정도의 엄청난 힘으로 갖은 추태를 부리며 날뛰는 것 같다.

                                                       - 후타바테이 시메이, <뜬구름>, 1887 -

 

 

사무라이의 아들로 정도만 걷는 남자 분조.

그리고 숙부의 딸인 오세이.

분조와 오세이는 집안에서 결혼하는 분위기지만,

혼다 노보루가 나타나 오세이를 흔들어놓으면서 분조의 괴로움은 시작되는 이야기.

 

물론 메이지 시대의 근대와 전근대의 혼란을 보여주고 있다고는 하지만,

내 눈에 꽂히는 것은 이런 묘사다.

젊고 잘 생긴 남자를 연모하는 것. 외부의 자극에 꿈틀되는 욕망과 혈기.

참 자세하게도 그려놓고 있다.

인간의 욕망 중 가장 바닥에 깔려 있는 욕망.

 

120년도 전에 이미 후타바테이 시메이는 인간의 감정 저 밑바닥을 후벼파며 묘사하고 있다.

동시대 조선의 상황을 본다면, 비교도 안 되는 감각이다.

또 어떻게 보면, 조선은 가장 단숨에 소설의 영역의 발전을 꾀하기도 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어쨌든 100년 전 메이지 중,말기 시대의 소설들이 훨씬 더 좋다.

그 감정의 밑바닥을 긁어대는 묘사들이 좋다.

분조가 괴로워하는 면들도 좋은 듯하다.

사랑하지만, 지켜봐야 하는 분조의 괴로움이 그대로 느껴진다.

자유분방한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놀아나는 것도 봐야 하고, 또 버림받는 것도 봐야 하고,

자신의 처지는 점점 초라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긍지와 기준을 잡고 살고 싶은 지조 있는 남자 분조에게 감정이입이 된다.

 

 

1907년에 나온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 역시 놀라울 뿐이다.

마치 지금 <은교>를 보는 느낌이랄까.

젊음에 대한 애착과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어쩔 수 없는 부분인 듯하다.

어린 여제자를 사랑하는 늙은 선생.

그리고 그 여제자가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자 폭풍 질투를 하는 모습.

그리고 그 여제자를 떠나보내며 느끼는 늙은 선생의 마음은, 노인이 아니라 한 남자다.

 

 

도키오는 깊은 눈이 쌓인 시오리 산길과 눈에 묻힌 산 속의 시골 마을을 떠올렸다.

헤어진 뒤 그대로 놓아두었던 이층으로 올라갔다.

너무나도 그립고 그리워서 희미하게 남아 있는 그 사람의 흔적을 쓰다듬으려 했던 것이었다.

무사시노의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로 뒤뜰의 고목에서는 바닷물이 빠지는 듯한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헤어졌던 날처럼 동족 창의 덧문을 하나 열자 햇빛이 흐르듯 쏟아져들었다..

책상, 책장, 병, 베니자라, 여전히 원래대로 놓여 있어 그리운 사람은 평소와 다름 없이 학교에 간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도키오는 책상 서랍을 열어 보았다.

기름에 전  낡은 리본이 그 속에 버려져 있었다.

도키오는 그것을 집어 냄새를 맡았다.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나 벽장을 열어보았다..

커다란 야나기고리가 세 개, 당장 보내질 것처럼 가는 새끼줄로 묶여 있었고

그 맞은 편에 요시코가 늘 사용하던  이불-녹황색 당초무늬가 들어간 요와, 두툼하게 솜을 넣은 같은 무늬의 요기가 포개져 있었다.

도키오는 그것을 끄집어냈다.

여자의 그리운 기름 냄새와 땀 냄새가 말할 수 없이 도키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요기의 벨벳을 댄 깃, 눈에 띄게 더러워진 곳에 얼굴을 묻고 그리운 여자의 냄새를 마음껏 맡았다.

 

성욕과 비애와 절망이 단번에 도키오의 가슴을 덮쳤다. 

도키오는 그 이불을 깔고 요기를 덮고 차고 더러운 벨벳 깃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어둑어둑한 방, 문 밖에서는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 1907 -

 

 

<은교>를 보고 온 친한 언니는 많이 슬프다고 했다.

몸은 늙었지만, 마음은 늙지 않았다고.......

그래서 마음아프다고......

자신도 늙어가고 있는 것 같다고....

그런데 여전히 마음은 어린 것 같다고........

 

물리적인 시간과, 낡아가는 육체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마음은 늙지 않는다.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도 그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늙은 선생 도키오가 어린 여학생 요시코에게 품는 뭔가 더러운 욕정이 아니라,

몸은 늙어가지만, 그와는 반대로 여전히 젊은 자신의 마음 때문에

그래서 괴로워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도키오는 그저 요시코를 지켜볼 뿐이다. 혼자 질투하고, 혼자 아파하며,

그래서 요시코와 그 남자 친구의 사이를 훼방 놓으며,

그러면서 떠나는 요시코 때문에 이불에 코를 박고 울음을 터뜨리는,

여전히 마음만은 청년인, 한 남자의 욕망을 보여준다.

 

 

 

늙음.

늙어간다는 것.

그것이 서글픈 것은, 마음은 늙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젊음을 꿈꾸고, 욕망하고, 그래서 아픈 것.

그것이 인간이 늙어가는 것인가 보다.

 

 

100년도 더 된 이야기가 사람의 마음을 저 아래에서부터 긁어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