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과 삶/책과 길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영혼, 빛, 사랑

그랑블루08 2013. 1. 8. 22:40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Las Meninas)>

 

 

17세기 최고의 화가라 말할 수 있는 스페인의 궁정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

그가 남긴 최고의 역작이 바로 <시녀들(Las Meninas)>이었다.

이 작품 하나만 가지고서도 숱한 이야기거리를 내놓을 수 있을 만큼 문제작이다.

도대체 이 그림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라는 것만 가지고도 말이 많은 작품이다.

나는 이 그림을 "시점"을 배우기 위한 도구로 접했었다.

시점이란 것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과 허구성에 대해서,

시점이란 것이, 시선이라는 것이 사실은 근대의 작위적인 산물임을, 이 작품을 통해서 배웠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놀랍다.

도대체 주인공은 누구인가? 누구를 보고 있는가, 누가 보고 있는가, 정말 다양한 이야기거리를 양산해내는 대단한 작품이다 싶다.

 

작품에 등장하고 있는 모든 인물들이 한 쪽을 보고 있다.

이 작품을 보는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친다. 그러나 사실 그것 역시 허구다.

그들이 시선이 향한 그곳에는 저 벽에 걸려 있는 거울에 비치듯이, 왕과 왕비가 서 있다.

그리고 그 왕과 왕비를 모델로 벨라스케스가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의 중심에는 그의 딸 마르가리타가 서 있다.

참 재미있는 그림이다.

<시녀들>이라는 그림의 주인공은, 왕녀 마르가리타인 듯하면서 또 빗겨서 있는 화가 벨라스케스 자신이기도 하다.

그러나 또 한 편, 마르가리타 옆에 서 있는 시녀들이 주인공인 것처럼 보인다.

<시녀들> 속, 그림 속 상황을 보면, 왕과 왕비가 그림의 대상이다.

그들의 모든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그러나 이 또한 fake일 수 있다. 독자들을 향한 시선. 작품과 독자를 사로잡고 소통하게 만드는 시선들.

 

그뿐만 아니라 이 가운데 어마어마하도록 정교한 원근법.

가까이서 보는 것보다 떨어져서 봤을 때 더 입체적인 그림.

벨라스케스는 클림트가, 또한 피카소가 인정한 최고의 화가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매력은 누가 바라보는지, 누구를 바라보는지 자꾸만 헷갈리게 한다는 점이다.

누가 주인공인가. 그것을 알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애매함인지도 모른다.

주인공인 듯 보이는 그 인물이 어느 순간 엑스트라로 변질되어 있고, 늘 엑스트라처럼 곁에 서 있던 인물이 주인공처럼 떡하니 정가운데 있기도 한다.

 

그것을 작가 박민규는 아주 절묘하게 잡아내고 있다.

박민규.

먹물을 먹은 이들에게도, 그저 즐기고 싶은 대중들에게도, 그 모두에게 인정받는 유일한 작가가 아닌가 한다.

보통 먹물들이 좋아하는 작가들은, 사실 그들만의 리그다.

대중들에게 인기도 없으면서, 그저 자신들만의 어려운 말들로 자신들의 리그를 펼쳐간달까.

그러나 또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는 소설들은, 먹물들이 싫어한다.

그런 식으로 문학계가 흘러서는 안 된다고, 아주 고압적으로 단정적으로 비판을 해댄다.

어쩔 수 없는 평행선인 듯 보이나, 그것이 묘하게 겹쳐진 곳에 박민규가 서 있다.

그래서 이 작가를 좋아한다.

재미를, 가벼움을 잃지 않는 그 비꼼이 좋다.

겉면을 읽더라도 재미있고, 또 다시 한꺼풀 벗겨 보면, 더한 반전이 나오고, 또 벗기고 또 벗기고, 그렇게 자신의 속살이 어마어마하게 등장하는

소설.

그의 소설은 내게 양파 같은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그가 처음으로 인터넷에 연재한 소설이다.

책이 나오자마자 사두었지만, 실제 읽은 것은 어제였다.

그리고 한참....가슴이 먹먹해서, 아직도 울컥하는 마음이 남아있다.

 

 

 

1. 영혼을 기다리다.

 

 

이 책에서 나를 감동시켰던 것은 처음 펴자마자 나왔던 인디언의 구절이었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

이따금 말에서 내려 자신이 달려온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한다.

말을 쉬게 하려는 것도, 자신이 쉬려는 것도 아니었다.

행여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봐

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려주는 배려였다.

그리고 영혼이 곁에 왔다 싶으면

그제서야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39쪽 중에서 -

 

 

늘 달리기만 할 뿐, 이렇게 인디언들처럼 자신의 영혼을 기다리지는 않는다.

사실 이 책 전체를 읽고 가장 깊게 남은 문구는 이것이었다.

정신없이 달리다가도, 가끔은 이렇게 내려서,

걸음이 느린 내 영혼을 기다려주어야 한다는....그런 깨달음.

내 영혼이 나를 쫓아오고 있지 못하는 건 아닌지,

영혼이 없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심 없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영혼을 돌아볼, 그러한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닌지.....

 

사실 어제 다 읽을 생각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구절 때문에 끝까지 읽었던 것 같다.

내게 영혼이 따라올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어서,

걸음이 느린 내 영혼을 기다려주고 싶어서,

밤을 새워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2. 시녀, 그리고 엑스트라.

 

아주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꽤 잘생긴 남자.

아주 진부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읽는 내내, 이 이야기는 전혀 진부하지 않았다.

도리어 너무나 생소한지도 몰랐다.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민주주의니 다수결이니 하면서도 왜 99%의 인간들이 1%의 인간들에게 꼼짝 못하고 살아가는지.

왜 다수가 소수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말이야. 그건 끝없이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기 때문이야.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174쪽 중에서 -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그래서 99%가 1%에 복종하고 살아가야 하는 현실.

 

 

결국 열등감이란

 

가지지 못했거나

 

존재감이 없는 인간들의 몫이야. 알아?

추녀를 부끄러워하고 공격하는 건 대부분 추남들이야. 실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인 거지.

안 그래도 다들 시시하게 보는데 자신이 더욱 시시해진다 생각을 하는 거라구.

실은 그 누구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데 말이야.

보잘것없는 여자일수록 가난한 남자를 무시하는 것도 같은 이유아.

안 그래도 불안해 죽겠는데 더더욱 불안해 견딜 수 없기 때문이지.

보잘것없는 인간들의 세계는 그런 거야.

보이기 위해, 보여지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봐줄 수 없는 거라구.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220쪽 중에서 -

 

 

결국 그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그 부러움을 견디지 못해서,

열등감이라는 것이 폭발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시시한 인간일수록, 시시한 인간을 경멸한다는,

가난할수록 가난한 인간을 무시하고,

못생길수록 못생긴 사람을 공격한다는.....진실.

 

그것을 열등감이라 부르고, 또 부끄러워하거나, 부러워하는, 모든 행위로 부른다.

 

내가 만약 누군가를 비난하고 있다면,

내가 만약 가난한 누군가를 업신여기고 있다면,

내가 만약 못생긴 누군가를 마음도 몸도 못생겼다 말하고 있다면,

나는, 열등감에 사로잡힌, 못생기고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이다.

그것이 내 가슴을 쾅 하고 때려버린다.

 

그러한 마음이, 나를 나 자신을 시녀로, 엑스트라로 만들고 있다고 말이다.

내 마음이 이미 못생겨져 있어서, 이렇게 주인공의 들러리를 서고 있다고 말이다.

모든 행운과 모든 기회들은, 저 누군가에게 자꾸만 빼앗기고 있다고 못난 소리나 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나와 같은 누군가는 무시하며, 1%를 향해서 부러워하고 있다고 말이다.

결국 그 마음이 나 자신을 더더 엑스트라로 만들어가고 있다고 말이다.

 

아주 못생긴 여자의 사랑이야기.

시녀의 사랑이야기.

엑스트라가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

그것을 박민규는 아주 드라마틱하게 비꼬아서 보여주고 있다.

너무나 뻔한 이야기인데, 뻔하지 않게, 너무나 생소하게, 비틀어서 보여준다.

아주 못생긴 여자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도리어 판타지가 되어버린 소설.

그러나 그 판타지가 다큐멘터리보다도 더 진실성을 가지고 가슴을 후벼파고 있다는 것.

그것이 이 소설의 묘미가 아닐까 한다.

 

 

 

3. 진부하지만, 진부하지 않은, "사랑" 그 거룩한 이름.

 

 

여전히, 사랑은 내게 진부하다.

그러나 또한 여전히, 사랑은 내게 진부하지 않다.

먹물들로부터 늘상 어마어마한 욕을 먹어오면서도, 이 '사랑'이라는 키워드는 단 한 번도 대중들의 손을 떠난 적이 없다.

아니, 여성들의 손을 떠난 적이 없다.

진부하다, 그러나 재미있다.

그 역사는 어마어마하다.

그 장구한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버려진 적이 없는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 "사랑"

 

많은 이들은 이 소설의 묘미를 비꼼으로 해석한다.

뒤집기, 낯설게 하기, 포스트모던적인 해체, 등등.......

주객의 전도, 시선의 교차....등등.......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이토록 울컥하게 하는 단어는 "사랑"이었다.

가슴 아픈 사랑.......

아직도 울컥하게 가슴을 쥐어흔드는, 고통스럽게 만드는 그것은 "사랑" 때문이었다.

 

이 소설은 분명 못생긴 여자와 잘생긴 남자의 사랑 이야기다.

그러나 웃기게도, 어느 순간, '못생겼다'는 그 부분은 자꾸만 잊혀진다.

그저 한 사람과 한 사람의 사랑이 보이기만 한다.

한 사람의 지고지순한 사랑.......

멜로드라마의 전형적인 키워드.

그래도 이것이 나를 울컥거리게 한다.

이 또한 판타지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판타지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또다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상상속에 빠져들지 모른다.

 

박민규는 말한다.

사랑은 오해라고.

마음이 변하지 않을 거라는 오해, 저 사람만은 특별하다는 오해,

저 사람은 아름답다는 오해, 저 사람은 모든 걸 이해할 거라는 오해.....

그 수많은 오해들이 사랑이라고....그렇게 멋도 모르고 믿는 거라고...한다.

 

 

인간은 참 우매해. 그 빛이 실은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걸 모르니까.

하나의 전구를 터질 듯 밝히면 세상이 밝아진다고 생각하지.

실은 골고루 무수한 전구를 밝혀야만 세상이 밝아진다는 걸 몰라.

자신의 에너지를 몽땅 던져주고 자신은 줄곧 어둠 속에 묻혀 있지.

어둠 속에서 그들을 부러워하고...또 자신의 주변은 어두우니까...그들에게 몰표를 던져.

가난한 이들이 도리어 독재 정권에게 표를 주는 것도,

아니다 싶은 인간들이 스크린 속의 인간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헌납하는 것도 모두가 그 때문이야.

자신의 빛을...그리고 서로의 빛을

 

믿지 않기 때문이지, 기대하지 않고...서로를 발견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야.

서로의 어둠은 결국 그런 서로서로의 어둠에서 시작돼.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186쪽 중에서-

 

그러나 실상 사랑하는 이들이 아름답게 빛나는 것은, 그 오해와 같은 사랑 때문이라고 한다.

누군가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그러면서 내가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고 믿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빛나게 만드는 거라 한다.

1%가 빛나는 것은, 나머지 99%의 빛을 받아서인데,

사람들은, 자신에게 빛이 나는 것을 모른다고...그 때문에 이토록 인간은 우매하고도 못나게 1%를 부러워하며, 어둠 속에 잠겨들어간다고 한다.

 

사실은 내게 어마어마한 빛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내가 가진 빛이 주변을 밝힐 수 있으리라는 것을 믿지 못하고,

내 곁에 있는 보잘것없는 사람일지라도, 그 속에 빛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렇게 아무 것도 믿지 못한 채로, 어둠속으로 침잠해 버린다.

 

나를 사랑해주는 그 사람 때문에 빛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 때문에 빛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은, 그 사랑은, 내가 빛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해 준 계기일 뿐인데,

그 존재가 없다고, 그 사랑이 없다고, 내가 빛나지 못할 거라고 믿어버리고 만다.

 

 

여름이었을 것이다. 샤워를 하다 문득, 이별이 인간을 힘들게 하는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사라졌다는 고통보다도, 잠시나마 느껴본 삶의 느낌...생활이 아닌 그 느낌....

비로소 살아 있다는 그 느낌과 헤어진 사실이 실은 괴로운게 아닐까...

생각이 든 것이었다.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300쪽 중에서 -

 

 

이별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 아닐까 한다.

그 사람이 사라진 것에 대한 고통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그 느낌과 헤어진 것.

그것이 고통이 된다는 것.

생활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을, 그 순간, 내가 빛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니......

그 순간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

그래서 여전히 그 그리움을 안고 있는 것이 아닐까.

 

빛은 내 속에 있는 것이다.

나는 늘 빛나는 존재였다.

세상은 이렇게 작고 볼품 없고 가난하고 지치고 못생긴 사람들의 빛으로 만들어가는 것인데,

그것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 시녀로, 엑스트라로, 어둠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이 책은 내게,

 

내 안에 빛나는 영혼을 믿어보라고 한다.

 

나 자신을 믿으라고, 내가 스스로 빛나는 존재임을 믿으라고, 그 빛을 믿으라고 가르쳐준다.

 

그리고 지치도록 달려가는 이 발걸음을 멈추고, 걸음이 느린 나의 빛나는 영혼을 기다려주라고 한다.

 

그리하여 내 빛을 믿고, 내 곁에 선 평범하고 가난한 지쳐 있는 사람들의 빛을 믿으라고,

그 빛들이 세상을 밝혀주는 빛이라고 가르쳐준다.

 

또한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 사랑, 그 애절함에 대해, 내게 깊은 그리움을 안겨준다.

 

모든, 평범하고 가난하고 못생긴, 시녀들을 위한 이야기.......

 

 

 

 

 

더보기

쓰다보니 굉장히 장황하게 길어져버렸다.

내 영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정리해본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 때문에 이젠 정리해두지 않으면, 기억하지 못한다.

정말 이러다, 내 자신이,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가 될 것 같아서, 두려워지는 요즘이다.

 

 

그리고 이 책, 여운이 너무나 길다.

두 사람의 사랑이....너무너무 깊게 남아, 자꾸만 그리움을 부른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중에서, 액자 속 이야기만, 가슴에 담고 싶다.

어쩌면,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것은, 액자 밖의 이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한번 날려 먹고 다시 쓰니, 더 힘들다.

역시 늘, 처음 쓴 것이 제일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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