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과 삶/책과 길

단 한 번의 연애 - 고래의 꿈

그랑블루08 2013. 5. 20. 19:00

 

<출처 :  [위키피디아] Michaël CATANZARITI

 

 

 

 

 

 

언덕 위 보리밭에서 바다를 굽어보고 있을 때

대여섯 마리의 고래가 한꺼번에 항행하다가 펄쩍 뛰어오를 때의 그 어마어마한 느낌.

고래 중 작은 혹등고래만 해도 사람 체중의 수백 배가 넘는데,

최대 길이 이십 미터에 무게 팔십 톤에 이르는 참고래가

왜 그 엄청난 에너지를 들여서 수면 위 허공으로 뛰어오르는지 알 수 없다.

경제성으로 계산이 안 되고 두뇌로는 예측할 수 없다.

그건 내 머리통을 후려갈기는 깨달음의 몽둥이질 같았다.

인생에 특별히 깨달을 건 없다는 깨달음.

중요한 건 살아가는 것이라는.

중요한 건 존재하며 느끼는 것이라는.

 

 

고래가 뛰어올랐다.

하늘 가득 무지개를 흩뿌리며.

고래가 수면으로 떨어졌다.

바다를 쳐서 엄청난 바닷물을 배에 뒤집어씌우며.

그건 존재 증명이었다. 자신이 거기 있고 우리를 알고 있다는.

 

 

생각해 보니, 내게 행복은 기억이 아니라 경험이었다.

 

 

-성석제, <단 한 번의 연애> 중에서-

 

 

 

 

 

성석제의 소설 <단 한 번의 연애>

성석제 특유의 해학 같은 풍자 같은 요소들이 여전히 개입되고 있지만,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처럼 판소리체 문체나, 강한 풍자나 해학 같은 요소는 없었다.

그러나 연애로 풀어내는 일종의 근현대사의 느낌이랄까.

 

민현을 사랑하는,

너무나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민현을 평생 동안 사랑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

고래잡이의 딸인 민현은......정말 치명적인 여자였다.

민현을 본 모든 남자들이 사랑에 빠졌고, 민현은 완벽하게 그것을 이용할 줄 아는 여자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꿈을 성취해 가는 강단과 추진력이 있었고,

지적인 욕구 역시 대단했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방식 역시 강했다.

 

그런 그녀를 사랑하는 나는......평생 한 여자만 품고 산다.

그녀는 여전히 다른 남자들을 만나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고, 여전히 시대와 거대 자본과 사회와 싸워나가지만,

이세길, 나는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가 된다.

 

사랑은.......시대를 말하기 위한 수단처럼 보이기도 한다.

조금은 작위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또 남성 작가들의 여자에 대한 로망이 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그래도 이 이야기는 고래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삶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

 

기억과 경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삶이라는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

지금이라서 가능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거대담론이 깨어지고, 미시적인 서사가 피어오르는 이 시대에,

큰 이야기들 속에서, 나라는 작은 사람의 이야기가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위안과 안도를 느끼게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작지만 꿈을 꾸는 이야기.....

삶이라는 것에 대한 경외를 보내는 이야기가 아닐까......

 

거창한 것을 꿈꾸고 있지만, 사실......내가 사는 삶은.....아주 보잘 것 없고, 작은 먼지 같은 뿐이다.

그래도......꿈꾸고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도 같다.

 

 

웃기게도, 이세길이라는 이 남자 주인공의 사랑이.......

이 변함없이 한 사람만을 지켜보는 그 사랑이......

애잔하게 마음에 들었다.

이 바보 같은 사랑법이, 이 흔들리지 않는 이 사랑법이,

좋았다.

 

 

 

그리고 고래에 대한 끊임없는 동경.

무게 팔십 톤의 고래가 그 엄청난 에너지를 들여서 수면 위 허공으로 뛰어오르는 이유......

이유 따위는 생각하지 말라고.....

중요한 건 살아가는 것 그 자체라고....

중요한 건 존재하며 느끼는 것이라고....

그리 말한다.

 

고래를 꿈꾸며 살아가는 듯하다.

모두가 자신의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도 같다.

누군가는 잃어버리고, 잊어먹고,

삶에 치여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도 같다.

이 소설은...그런 일상을 토닥여주는 것 같다.

 

당신은 고래처럼, 살아가고 있다고....

비록 미약하고, 약할지라도, 당신은 저렇게 수면 위로 뛰어올라 허공을 날아오르고 있다고......

삶 자체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살면서 느끼는 것 자체가....

그리고 살아가는 그 행위 자체가.....

이미 고래의 비상이라고....

그리 말해주는 것도 같다.

 

어쩌면 민현은...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주인공이 꿈꾸는 꿈...고래일지 모른다.

꼭 가지고 싶은,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일지도 모른다.

또는 만들고 싶은 세계 그자체일지도 모른다.

혹은 희화화된 세계 속에서도 싸워나가야 하는 절대적인 가치일지 모른다.

 

그래도, 열심히 살고 있으니 되었다...라고 말해주는 것도 같다.

누구나 그 고래를 가슴에 품고 산다고.....

 

누군가는 물을지도 모른다.

왜 굳이 날아오르려 하느냐,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할 수도 있지만,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고래의 비상을 가슴에 품고 산다고,

그것이 내 생의 의미라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의미를, 가치를 굳이 갖다 붙이지 않아도,

내 삶 자체가, 살아가는 행위 자체가 의미가 있는 일이지 않을까....싶다.

 

 

마지막.......남자 주인공의 말....

 

"생각해보니, 내게 행복은 기억이 아니라 경험이었다."

 

이 말의 의미를...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과거를 붙잡지 말고, 현재로 나아가라는 말로 들린다.

 

움직이는 나 자신......비록 삶은 비루하지만, 거대한 꿈을 꾸는 나 자신....

살아가는 행위를 열심히 이행하는 나 자신......

그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런지....

 

그래서 이 이야기는.....한편으로...나를 위로한다.

 

서평에 나온 김연수의 글이.......어쩌면 이 책을 읽고 난 나의 감상이 아닐까 싶다.

 

"제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거대한 이야기를 품고 산다.

마치 고래 한 마리를 보고 태평양을 상상할 수 있듯이"

 

 

 

 

 

+) 이 이야기는 연애 이야기로도, 근현대사를 읽는 이야기로도, 또 내가 추구해온 꿈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엄청난 내러티브가 있는 것도, 어마어마한 헤게모니적인 상상이 있는 것도, 엄청난 해학이나 풍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아주 뛰어난 글이라, 하기도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참 많은 것을 비유한 글인 것 같다.

열심히 살아온, 맞서온, 항거해 온 세대들에게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하고,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너의 꿈을 향해 걸어가라는.......

과거를 과거인 채로 놓아두고, 앞으로의 현재와 미래는 삶이라는 작은 영역 속에서 말해도 된다는.....

지나간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에게 보내는 위로가 아닐까......싶다.

 

지금, 당신,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고......

그것이 바로, 저 거대하고 푸르른 바다 위에서 비상을 꿈꾸는 고래의 날개와 같다고.....

그렇게 위로하는 글인 것도 같다.

내게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