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은시경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12
* 배경음악을 틀어놓고 읽어주세요.
1. 김광석 - 그날들
2. 김동률 - Replay
3. 김광석 -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1
알고 있었다.
그녀가 내게 화낼 거라는 걸,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듣는 건, 그저 머릿속에서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녀의 슬픔은, 그녀의 고통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너무나 깊고 잔인했다.
죄송하다는 말로는 다 해결될 수 없는, 그녀의 처절했던 과거였다.
기억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그녀의 무의식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고통은 그녀의 저 깊은 곳에서부터 드러나고 있었다.
감히....내가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
내가 그녀의 마음 한 자락을 얻으려고 했다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인지, 깨닫고야 말았다.
달게 받을 수 있다, 그리 말씀드렸었다.
그러나 그건 내 지독한 착각이었다.
“나 위하는 척 하지 마!!!
그래, 기억이 지워진 건, 정말 하늘이 도우신 거야.
그러니까, 당신도 지워. 나도 지웠으니까. 당신도 지우라고.
당신은 오로지 내게 근위대장일 뿐이야.
예전에 어쨌든, 그건 과거일 뿐이야.
당신 기억 속에 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몰라.
그러나 그 이재신은 진짜 이재신이 아니야.
가장 어둡고 암울했던 이재신이야.
아니, 이재신이라는 자아를 잃었던 그저 그런 여자였어.
지금은 아니야. 절대,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갈 일, 없어.
그러니까 당신도 지워. 난 죽어도 내 기억 찾지 않을 거야.”
그러나 여기까지라는 그녀의 말은, 내게도 기억을 지우라는 말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말씀을 하셨다.
그때도 무서웠다. 가장 힘들 때, 가장 나약할 때, 오로지 의지할 곳이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를 좋아하신다고 착각하신 게 아닐까 하는, 그 생각.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말씀을 공주님의 입으로 하신다.
가장 어둡고 암울했던 공주님이었다고, 진짜 공주님 모습이 아니라고 하신다.
그러니, 그런 자신을 잊으라 하신다.
어떻게.......어떻게........당신을 잊는단 말인가.
내가 어떻게.........
아무리 내가 잊어야 한다고 해도, 나는..........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랬다면, 이미 2년 전 그녀를 마지막으로 봤던 그 날, 그리했어야 했다.
그녀를 따로 만나지도 말아야 했고, 그녀의 손을 잡아서도 안 되었다.
그 날 그녀의 다리가 되고, 그녀를 내 여자로 대하며, 당부를 전해서도 안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가져서도 안 되었다.
사랑한다는 말도, 남겨서는 안 되었다.
수천수만 번도 더 생각했다.
그녀를 잊을 수만 있다면, 그녀를 내 마음에서 지울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정말로 내게 이런 사랑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녀를 잊어야만 한다면, 정말로 잊혀지면 좋겠다고,
그렇게 숱한 밤을 새웠었다.
그런데 내게 당신과의 추억을, 나의 기억을 지우라고 하신다.
그걸.....내가.....어떻게......할 수 있단 말인가.
죽음의 문턱 앞에서 오직 그녀 하나만을 잡고 돌아왔다.
그런데 내게 그녀를, 나의 공주님을 지우라 하신다.
그녀는, 그것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모르신다.
당신을 지우는 것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그녀는 전혀 모르신다.
“은.시.경. 근위대장님.
오늘 일, 내게는 없었던 일입니다.
예전의 당신이 어땠는지, 난 모르고, 관심도 없습니다.
결코 기억을 찾는 일 따위는 없을 겁니다.
다시는, 과거에 대한 얘기는 입에 담지 않을 겁니다.
은시경 씨와 나, 근위대장과 공주일 뿐입니다.
그러니, 근위대장님도 그렇게 해 주세요.
이만, 비켜주세요.”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비켜달라는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나는 감히 그녀를 비켜서지 못했다.
그럴 수가 없었다.
이렇게 비켜드리면, 정말로 끝일 것 같아서, 나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근위대장과 공주님.
알고 있다.
넘을 수 없는 그 벽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감히 비켜드릴 수가 없다.
2년 전이라면 비켰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내 가슴을 찢더라도, 내 심장이 터져버리더라도, 나는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도, 허락되지도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지난 2년간 뼈저리게 느껴버렸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것이 얼마나 나약한 것인지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중'이라는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허락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러했다.
내겐 그 기회가 없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누군가가 잃은 그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하늘은 내게 그 기회를 주셨다.
내 몸에는 세 사람의 인생이 담겨 있다.
그들이 가지고 싶었던, 빛나는 인생의 '나중'이라는 시간을, 나는 그 사람들의 몸을 빌려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내 심장은 세 개다. 내 인생은 세 사람의 심장에 빚진 것이다.
그래서 함부로 내 삶을 포기할 수가 없다.
늘 '지금'이라는 빛나는 순간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지난 2년 간 너무나 뼈저리게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좋다.
그래도 나는...........그녀를......놓을 수가 없다.
“은시경 씨!!! 내 말 안 들려요? 비켜달........”
“싫습니다!!!”
그녀는 놀란 듯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슬프다.
아니 그녀의 눈은 아팠다.
“지금, 뭐라고 했죠?”
“싫습니다. 공주님!!!!”
“은.시.경.씨! 지금! 뭐하자는......”
나의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2년 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었을 일을, 나는 지금 세 사람의 심장을 빌어 용기를 내고 있다.
“공주님, 전.....못 지웁니다.
공주님께 기억 찾으시라고 강요하는 거, 아닙니다.
얼마나 힘드셨을 지 압니다. 충분히...압니다.
그런데, 전, 전, 안 됩니다.”
이제 진실을 토해내어야 할 때다.
내 마음을 진실로 드러내어야 할 때.
“공주님, 저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공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척하며,
그저 근위대장으로만 공주님을 대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저는요. 공주님........이제 그게 안 됩니다.”
이것이 나의 진심이었다.
늘 도망갔었다. 공주님과 일개 근위중대장일 뿐이라고 애써 그녀를 밀어냈었다.
그러나 진실은, 내 마음의 진실은 이것이었다.
나는 이제 근위대장으로만 그녀를 대할 수가 없다.
“이것 봐요!!! 은시경 씨 내 말이 말 같지 않아요?
내가 예전에 마음 줬다고, 그렇게 내가 만만하고 우스워?”
“사랑합니다!”
"은시경 씨!!"
“사랑합니다. 공주님.
화내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전, 이제 어쩔 수가 없습니다. 공주님”
그런 내 태도에 그녀가 화를 내더라도, 나는 이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미 그녀 앞에서 고백한 말이지만, 이제 그녀는 내 고백이 누구를 향하는지 알고 계신다.
지금 내 고백이 그녀에게 향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나의 고백은 진실로 그녀에게 닿았다.
나의 "사랑한다"는 고백은 2년의 방황 끝에 약속대로 지켜지게 되었다.
속에서부터 울컥하고 올라왔다.
눈물이 났다.
아, 정말로 내가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구나.
2년 만에 내 고백을 그녀에게 할 수 있게 되었구나.
그 마음이 벅차올랐다. 동시에 가슴이 먹먹했다.
이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녀의 상처 앞에서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자신의 상처가 커서, 그녀는 내 고백이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얘기하고 싶었다.
내 마음을, 이제 어쩌지 못하는 내 사랑을, 이제는 드러내고 싶었다.
아니, 내가 말한 것이 아니었다.
내 사랑이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었다.
감추어질 수 없는 마음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서른이 넘어서야 알게 된다.
그녀가 내게 착각일 뿐이라고 해도, 단순히 화학반응일 뿐이라고 해도,
내게 그녀는 운명이었다.
그녀는 내게 마지막까지 달려가야 할 나의 길이었다.
바라기는 그 길 끝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기를,
내 길이 그녀에게 상처가 되지 않기를......
2
전하는 한 마디도 묻지 않으셨다.
어제 근위대원들에게서 공주님이 전하께 다녀가셨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전하는 어떤 내색도 하지 않으신다.
시경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일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어제도, 오늘도, 그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은시경!! 야!! 은시경!!!!!!"
"예, 예? 전하."
놀라서 바라본 전하는 무슨 말씀을 꺼내시려다가 다시 입을 다무신다.
"이거, 정리해서 다시 가져와."
그러시더니 시경 앞에 서류 뭉치를 툭 던지신다.
시경은 서류를 정리해서 받아들고는 잠시 서 있었다.
"뭐 하고 있어. 나가서 니.방.에.서. 정리하라니까?"
"예? 예. 알겠습니다. 전하."
시경은 서류 뭉치를 들고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서류를 보고 있지만, 자신이 뭘 하는지, 뭘 해야 하는지 도통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다.
머리가 계속 지끈거렸다.
결국 며칠 동안 잠을 통 못 잔 것이 화근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시경은 재신이 걱정되었다.
잠은.....제대로 주무신 건지......
혹시.....무서운 생각을 하신 건....아니신지......
시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공주님이 다시 그러실 리는 없었다.
기억을 잃으시고 나서 훨씬 강해지셨다.
훨씬 더 단단해지셨다.
그러니 기억도 나지 않는 자신 때문에 그런 일을 하실 리가 없다.
한번 흐트러지기 시작한 생각은 끝도 없이, 또다시 그녀에게로 달려가 버린다.
보고 싶다.
너무 보고 싶다.
고작 하루밖에 안 되었는데, 보고 싶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시경은 어느 새 공주 궁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야 만다.
미친 놈.
보고 싶다는 마음과, 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으실 거라는 마음이, 시경의 심장에 자꾸만 생채기를 낸다.
그렇게 발걸음을 돌려도, 또다시 머물고 있는 곳은, 처음으로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던 그곳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그 날의 기억이 속삭였다.
“노래도 다시 시작하시구요.”
그 말 앞에서 그녀의 입술을 느꼈었다.
내 이성의 모든 것이 끊어져나가는 경험.
부드러운 그녀의 입술을 내 볼에 느꼈던 순간, 그 부드러움이 내 감각을 타고 심장을 타고 전달되던 그 순간,
오로지 한 가지만 떠올랐었다.
저 부드러움을 느껴보고 싶다는, 너무나 강렬했던 본능의 욕구.
그렇게 그녀의 입술을 훔쳤던 기억들.
이곳에 그 하나하나의 추억들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다리가 되어주며, 마치 내가 그녀의 특별한 누군가가 된 듯이, 그녀에게 숙제를 내던 내 모습도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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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 저, 당분간 휴가 가요.”
“왜요?”
“내가 숙제 내 줄게요.
그거 다 하시면, 저 아마 올 거예요.”
“치잇...또 교과서질.”
“내 탓이 아니다, 하루에 백번씩 하기”
“그건, 은시경 씨도 백번.”
“네.”
“그리고 하루에 세 번 씩 웃기, 억지로라도.”
“응......”
“심리치료 열심히 받으시고, 재활치료 빼먹으시면 안 돼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도 연습 많이 하시고.”
“어, 그럴게요.”
“노래도 다시 시작하시구요.”
“또, 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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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내가 뭐라고, 나는 그녀에게 마치 그녀의 연인인 양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그녀는 니가 뭔데 감히 내게 그러느냐고 말씀하실 만했는데도, 그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셨다.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연인을 대하듯이, 그렇게 내 가슴에 바람이 일게 하셨다.
그녀에게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된 마냥, 너무나 설레었던 그 순간이 떠올라 또다시 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렇게 멈춘 그 자리에 그녀의 벤치가 놓여 있다.
그녀의 벤치 앞에서 시간은 순식간에 2년 전 그 날로 돌아가 버린다.
그곳에 그녀가 앉아 나를 외면하고 있었다.
“괴물 같죠? 정나미가 뚝 떨어지죠? 나.”
날 향해서 그토록 불안해하며 시선을 돌리던 그녀가 아팠다.
나 같은 게 뭐라고, 그녀가 이렇게 불안해하시나 싶지만, 또 그만큼 가슴이 뛰기도 했었다.
그녀에게 나는 이런 존재라고, 적어도 그녀의 마음은 내게 이토록 가까이 와 있다고, 그래서 아프면서도 설렜던 순간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씻을 수 없는 죄 앞에서도 나는 감히 그녀 앞에 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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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 내 탓이다 하지 않으려구요.
아버진 아버지고 전 저니까.
공주님도 마찬가지예요.
그 놈들 때문이지 공주님 탓, 아닙니다.
기억을 꺼내신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 공주님은, 멋지십니다.
공주님 탓, 아니에요 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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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를 위로했었다.
공주님 탓 아니라고, 우리 공주님은 너무 멋지시다고, 내 마음의 고백을 곁들여 말씀드렸었다.
그랬다.
그녀는 내게, 오직 내게만 의지하셨다.
그것이 그 무엇보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어디를 가시건, 어느 곳에 계시건, 그녀는 ‘은시경’을 먼저 부르셨다.
그녀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던 그 순간들.
언제나 그녀가 찾으시는 존재가 된다는 것.
내가 그녀에게 위로를 전해줄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었는지를, 지금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만약, 내가 그 때, 알았더라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그녀의 마음을 밀어내지 말고, 그녀의 마음을 의심하지 말고,
온전히 사랑을 믿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지금 덜 아팠을까.
“근위대장님”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본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김동욱과 같이 이곳을 거닐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다 그녀는 내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이 방금 전까지 나를 설레게 했던 그녀의 모습과 너무나 달라서, 또다시 내 가슴을 저릿하게 한다.
“나오셨습니까?”
“네. 돌아가던 참이에요. 가요, 동욱 씨.”
“예? 공주님, 잠시 여기 앉으셔야죠? 여기 쉬셨다가 다시 가셔야.....”
“아니요. 오늘은 그냥 바로 들어갈래요.”
그녀는 나 때문에 돌아가려고 한다.
나를 피하고 싶어 한다.
어쩌면 나는 지금 벌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게 온 복을 믿지 못해서, 두려워서 어쩌지 못하고 피하고 있었던 내 어리석은 행동들에 대한 죗값을 치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늘 다가오던 그녀와, 늘 뒷걸음치던 내 모습이 오버랩 된다.
난 그 때 뭐가 그리도 두려웠던 걸까. 무엇이 그리도 무서웠을까.
그녀를 잃는 거, 그녀의 관심을 못 받는 거, 그녀에게 버려지는 거.
지금처럼........
바보 같이, 어차피 그렇게 되는 게 운명이라면, 그 순간이라도 추억으로 남길 수 있도록, 그녀와의 시간을 가졌어야 했던 게 아닐까.
더 많이 보여주고, 더 많이 표현하고, 그녀의 마음을 감사히 받았더라면, 적어도, 후회는 남지 않았을 텐데.......
모든 게 무너지고 나서야, 그 순간을 잊지 못해서, 그 어리석은 인간을 탓하고만 있을 뿐이다.
“제가......들어가겠습니다. 여기에서, 쉬십시오.”
그렇게 돌아서면서도 나는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어리석고, 또 어리석게도, 그녀의 벤치를 그녀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설렜을지도 모른다.
기억도 못하실 텐데, 그래도 그녀의 무의식이 그 자리를 그녀의 쉼터로 여기는 것 같아서, 그것만으로도 이렇게 벅찬 마음이 된다.
그러나 나는 정말 어리석었다.
그곳을 떠났어야 했다.
미련을 두지 말고 돌아서야 했다.
그랬다면, 적어도 그랬다면, 이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됐을 텐데.......
아.........그녀가........그녀의 첫사랑에 안겨서 울고 있다.
그녀가 왜 우는지 알지 못하면서, 오롯이 가슴이 무너지는 건, 그녀를 달래고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것, 이제 내가 그녀를 위로해 줄 수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내게 위로받았던, 그곳에서, 그녀는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서 위로받고 있었다.
그 사실이 나를 미치게 한다.
나만을 필요로 하셨는데, 나만 보셨는데, 늘 나만 찾으셨는데, 이제 그녀에겐 내가 필요 없다.
이제 그녀에겐 내가 필요 없다.
나를 찾을 이유가 없다.
그것이 나를 죽고 싶게 만든다.
그러다가 그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던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직도 여기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부끄러움보다도, 내 아픔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두 주먹을 꽉 쥔 채로 그녀를 고통스럽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 가슴의 고통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공주님, 제가, 안 보이십니까........
전 이제, 필요 없으십니까........
내 속에서 고통이 올라온다.
그것은 내 울대를 타들어가게 만든다.
나를 보던 그녀의 눈이 젖어가는 것 같다.
그녀의 눈이 슬프다.
모두들 새로운 시간을 향해서 달려가는데, 나만, 나 혼자만, 2년 전 그 시간에 놓여 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나를 자신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어리석었다 한탄하게 하면서도, 너무나 아름다웠던 순간에, 그 기억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3
다음 날, 시경은 집무실 밖을 아예 나가질 않았다.
잠깐 재하가 불렀을 때 외에는 점심도 거른 채, 계속 집무실 안에만 있었다.
동하가 재하의 부름으로 시경을 찾아왔을 때도, 시경은 서류 정리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동하는 그런 시경을 보면서 왠지 모를 죄책감에 휩싸여 있었다.
어떤 마음인지 알 것도 같은데, 그런 내색도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흠흠.....근위대장님.”
“어? 염동하 대위, 언제 들어 왔어?”
“금방 왔습니다. 바쁘십니까?”
“아니, 그냥 정리 좀 하느라....”
동하가 보기엔 굳이 지금 정리하지 않아도 되는 서류들이었다.
일을 만들어서 하고 계시는 거였다.
동하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뭐야, 뭔 일 있는 거야?”
“전하께서 저녁 만찬에 근위대장님 나오시라고 전달하라고 하셔서......”
동하는 뒷말을 흐렸다.
시경의 얼굴이 금방 굳어진다.
저녁 만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가 있는지, 시경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근위대장님, 몸 안 좋으시다고..........말씀드릴까요?”
동하의 말에 시경이 동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오죽하면 동하가 저런 말을 할까 싶기도 하다.
근위대장이, 공사도 구분 못하고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있으니.......
“아니야. 바로 갈 거다. 알았어. 나가 봐.”
동하는 시경이 가겠다는 말에 더 놀란다.
솔직히 동하 스스로가 말리고 싶었다. 그 자리에 가서 또 무슨 꼴을 봐야 할 지......
정말.....이 모든 게 너무 잔인하게 느껴진다.
저녁 만찬이 열린다는 왕실 만찬회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던 시경은,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며, 아까 동하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이곳은 자신이 올 곳이 못 되었다.
긴 6인용 테이블엔 이미 다들 자리를 잡고 계셨다.
대비마마의 왼쪽에는 전하 내외분이 앉아 계셨다. 그리고 오른 편에는 공주님과, 공주님의 첫사랑이 앉아서 나를 보고 있었다.
지금 이곳은 내가 끼일 곳이 아니었다.
왜, 나를 부르신 거지?
보고 내 주제를 알라는 건가.......
시경은 감정의 울렁임을 겨우 잠재우며, 고개를 숙였다.
“늦었습니다.”
“늦긴, 방금 얘기했을 건데.
이리 와서 앉아.”
재하가 대비마마의 맞은 편 자리를 권한다.
“제가.....끼일 자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전.....그냥.......나가....”
“아니에요. 은시경 씨, 내가 같이 식사하고 싶다고 했어요.
늘 고생하는데 같이 식사라도 한 번 하고 싶어서.......
이리 와서 앉아요. ”
“은시경 동지, 오마니 말씀대로 어서 앉으시라요.”
대비마마와 왕비마마께서 따뜻하게 나를 바라봐주신다.
그래서 더 거절하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래, 안 그래도, 상우 이 놈도 너 보고 싶다 그래서, 부른 것도 있어.
서로 봤잖아. 저번에 재신이 선볼 때. 인사 했지? 서로?”
재하는 짓궂게도 시경 앞에서 선이라는 얘기를 굳이 언급한다.
“당연하지. 내가 은시경 씨라는 말에, 완전 감동받았잖아.
다시 봐서 좋네요. 은시경 씨.”
“예.”
시경은 반갑다는 상우의 말에 그저 짧게 대답하고 말았다.
다들 자신을 향해서 한 마디씩 곁들어 주지만, 오직 한 사람만은 자신을 외면하고 있었다.
이 자리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자리라는 걸 알면서도, 또 이곳에 오면 자신이 상처받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올 수밖에 없었던
단 하나의 이유가 자신을 외면한다.
“엄마, 상우가 은시경 미국에 있을 때, 이것저것 많이 도와줬었어.
병원도 그렇고, 그쪽 외교관련 일도 그렇고.”
“그랬구나. 상우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네.
참, 근데 은시경 씨는 요즘 몸은 괜찮아요?”
영선은 마치 어머니처럼 은시경을 자애롭게 바라봤다.
“예.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선은 예의바르고 반듯한 은시경의 모습에 자꾸 눈이 갔다.
은실장님 일만 아니었으면, 정말 욕심나는 사람이다 싶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이 사람은 재하를 지키려고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사람이다.
영선도 어머니였다.
자신의 아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이 사람도 자신의 아들처럼 마음을 짠하게 한다.
그래서 자꾸 은시경 앞으로 더 반찬을 갖다 놓으라며 조용히 지시한다.
“상우가 와서 참 좋긴 하다. 바로 미국으로 가는 거니?
볼 일은 다 본 거고?”
영선의 질문에 대답하려고 상우가 입을 떼기도 전에 재하가 나서서 치고 나갔다.
“볼 일은 당연~히 다 보셨지. 볼 일이랄 것도 있나.
오로지 누구 얼굴 보러 온 건데?”
“얘? 넌 참. 상우도 바쁜 사람이야. 말을 해도....참.....”
“아닙니다, 대비마마. 재하 아니 전하 말씀이 맞습니다.
공주님 얼굴 보고 싶어서 온 거죠.
제주평화포럼 일정 맞춰서 나온 거라서 내일은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빨리? 난 2~3일은 더 있다 갈 줄 알았는데?”
“대비마마께서 붙잡아 주시면, 얼마든지 더 있을 수도 있습니다.”
“풋~그럴 수야 있나. 바쁜 사람을........”
영선은 상우가 참 고마웠다.
아무리 수술에 성공했다고 해도 아직은 다리가 불편한 딸이었다.
여러 가지 아픔도 많은 아인데, 이렇게 옆에서 좋아해 주는 모습에 눈물이 날 만큼 고마웠다.
그런 이야기 속에서도 재신은 그저 밥만 묵묵히 먹고 있었다.
사실 밥을 먹고 있다기보다, 밥알을 세고 있다고 하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모래알을 씹는 것 같았다.
“왜? 입맛이 없어?”
상우가 곁에서 지켜보다가 밥이 거의 줄어들지 않고 있자 작게 재신에게 소곤거린다.
“아니.....원래 많이 못 먹어. 신경 쓰지 마. 그래도 혼자서 잘 먹으니까.”
재신의 말에도 상우는 재신에게 먼 듯한 반찬을 집어서 그녀의 숟가락 위에 올려준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맞은편에서 재하와 항아가 지켜보다 입을 떡하니 벌렸다.
뭔가 알콩달콩한 연인들이나 하는 듯한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둘이 하는 걸 보고 있으려니 불편하기도 했다.
재하도, 항아도, 영선의 맞은편에서 묵묵히 밥을 먹고 있는 한 사람이 너무나 신경이 쓰였다.
재신은 고맙다며 상우를 바라보며 웃어주다가 그 시선 넘어 자신을 보고 있는 시경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재신은 뭔가를 잘못하고 들킨 것처럼 놀라서 바로 다시 얼굴을 돌렸다.
그런 그들을 복잡한 표정으로 재하가 보고 있었다.
흥미롭다고 느끼면서도 한 편으로는 머리를 찌끈거리게도 한다.
“참, 그러고 보니, 은시경 씨 아직 결혼 안 했죠?”
“예? 예.”
갑작스럽게 영선이 결혼 얘기를 꺼냈다.
저번부터 얘기하고 싶었기도 했다.
보면 볼수록 이 청년이 너무 괜찮다 싶어서 괜찮은 규수와 맺어주고 싶다는 어쩔 수 없는 오지랖이었다.
“내가 지켜보니, 은시경 씨 참 괜찮은 사람인데, 정말 괜찮은 사람 소개시켜주고 싶어서요.
재하 밑에서 너무 일만 하는 것 같고, 또 결혼이란 게 때가 있는데, 그것 놓칠까봐 안타깝기도 해요.
재신아?”
갑자기 자신을 부르자 재신은 쥐고 있던 젓가락을 떨어뜨린다.
“어? 어?”
“얘는, 칠칠치 못하게.........혹시 너 친구 중에 은시경 씨 소개해 줄 사람, 누구 없니?”
“어? 아........”
재신은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시선 때문에 왼쪽 뺨이 뚫리는 것 같다.
“아, 참! 너 혜원이 온다 그랬지? 맞네. 너 저번에 그랬잖아. 혜원이 곧 한국에 나온다고.
맞지?”
“어? 어.......”
재신은 할 수 없이 어정쩡하게 대답한다.
“잘 됐네. 은시경 씨, 재신이 친구 중에 혜원이라고 정말 참한 아가씨 있어요.
재신이 영국 유학할 때 같이 유학한 친군데, 내가 봐도 참 괜찮은 아가씨에요.
한 번 만나 보지 않겠어요?
얘, 재신아, 니가 소개해 주면 되겠다.”
“아, 저 엄마, 그게........”
“죄송합니다. 대비마마”
재신이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그때까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있던 시경의 강직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정말 죄송합니다. 대비마마.
이미 공주님께서 말씀하신 적, 있으십니다.”
“어, 그랬구나. 재신이도 엄마 마음이랑 같았나 보네.
난 은시경 씨 보면, 넘 안타깝고 그래요.
이렇게 괜찮은데, 계속 혼자 있고. 내 아들 같고 그래서.....”
“죄송하지만, 제가....거절했습니다. 대비마마.”
“왜요? 혜원이 정말 괜찮은 애야. 너무너무 괜찮은 앤데...
아까워라. 이유가 뭐예요? 선이 싫은 거예요?
그게 아니면......?”
머뭇머뭇 거리던 시경이 뭔가 결심한 듯, 영선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죄송합니다. 대비마마....제가......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설마설마했지만, 그가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재신의 얼굴에 열이 확 느껴졌다.
재신은 얼굴도 들지 못하고 긴장한 채 앉아있었다.
그 말에 재하는 재미있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휘유~하며 휘파람을 불었고, 항아는 안타까운 눈으로 시경과 재신을 봤으며, 상우는 둘을 살피다가 점점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세상에, 사귀는 사람이 있었어요? 몰랐네. 언제 사귄 거야.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잖아요. 그 전부터?”
“그게....저혼자.....”
아까까지 패기에 넘치던 은시경의 모습은 또다시 사라지고, 다시 절절매고 있다.
“세상에, 짝사랑? 이렇게 괜찮은 남자가, 짝사랑이라니....말이 돼요?
아니, 그 아가씨는....이렇게 괜찮은 남자를 두고,
아유~ 아까워라. 진짜......
혜원이도 참 괜찮은데, 그래도 은시경 씨 마음이 그러면........”
“어차피 혼자 좋아하는 거면, 다른 사람 만나보는 것도 좋지 않아요?”
영선이 아쉬워도 이 선은 안 되겠다 싶어서 접으려는 찰나, 일은 다른 곳에서 터졌다.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앉아 있던 재신이 그에게 폭탄 같은 말을 던졌다.
시경은 자신이 지금 들은 말이 정말 재신이 한 말인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솔직히 혜원이만한 여자 눈 닦고 찾아봐도 없거든요.
이런 말하면 좀 그렇지만, 우리 엄마 말고 내가 세상에서 인정하는 여자가 딱 2명 있거든요.
한 명이, 우리 새 언니, 그리고 다른 한 명이 혜원이에요.
은시경 씨, 오래 보진 못했지만, 괜찮은 사람이란 거, 알아요.
그래도, 난 솔직히, 혜원이도 아깝거든.
만나보면, 내가 그 때 왜 거절했었나....할 거예요.”
재신은 말은 당당히 하는 듯이 얘기했지만, 사실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을 마주 본 순간, 그녀의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바로 후회했다.
그의 눈을 바라보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를 아프게 하려던 건 아니었다.
기억도 못하는 나를 마음에 품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나보다 건강하고, 나보다 괜찮은 여자 만나면, 이 사람도 덜 상처받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재신은 자신의 지금 이 마음이 도대체 어떤 마음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시경은 놀란 듯, 아픈 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 알고 있지 않느냐는 표정..........
다 알면서 어떻게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는 그의 표정.
내 마음을 알지 않느냐고....너무 잔인하지 않느냐고......
그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그 표정 앞에서 재신은 또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얘, 재신아, 너 사람 마음 가지고 그러는 거 아니야.
아무리 짝사랑이라도, 그렇게 사람 마음....쉽게 생각하면 안 되는 거야.
미안해요. 은시경 씨, 얘가 아직 철딱서니가 없어.
너무 오냐오냐해서 그래요. 공주라고.........
못 들은 걸로 해요. 은시경 씨”
시경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꾸벅 숙였다.
그러나 시경은 그 이후로 밥을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다.
어서 자신을 잊으라는 그녀의 마음인 것 같아서, 이제 자신을 사랑하지 말라고, 그 마음이 부담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자꾸만 울컥하고 올라오는 것 같다.
4
저녁을 먹은 후, 재신과 상우는 후원을 거닐다가 후원 벤치에 앉았다.
“너, 근데 이 벤치 되게 좋아하는 것 같다?”
“아? 응....그냥 늘 여기 앉아.”
“그런 것 같다. 일종의 산책 코스 중 쉬어가는 곳인가?”
“그런가?”
그러고 나서 또 재신은 아무 말이 없다.
아까부터 상우는 재신이 신경 쓰였다.
늘 밝게 조잘조잘거리며 떠들던 재신이었다.
예전에 한국에서 보았을 때도, 영국 유학 중에 봤을 때도, 재신은 늘 빛이 났다.
재신의 온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재신은 우울해보였다.
무엇이 그렇게 이 사람을 아프게 하는 걸까.
상우의 마음 한 구석이 자꾸 저릿해진다.
“왜 그래? 뭔 일 있어?”
“어..어?”
“내 얘기 듣고 있는 거니?”
“아, 미안........내가 자꾸 멍하게 있네.”
“무슨 일....있는 거지?”
상우가 재신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처음 재신을 이곳에서 만났을 때도 그랬다.
그를 보기 전부터 재신의 표정이 좋지 않았었다.
뭔가 속상해 하는 표정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아니라고 얘기하고 있다.
“너, 지금 울고 싶지?”
“뭐? 아니야. 울기는 내가 왜?”
“그럼, 나보자마자 왜 울었어?
속상한 일 있었던 거 아니야?”
상우가 계속 자신에게 묻는다. 무슨 일 있느냐고......
그러나 재신 자신도 모르겠다.
분명 무슨 일이 있다.
여전히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들을 외압에 의해서 강제로 알게 되었다는 것.
나는 참 비운의 여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
그런데, 그것만은 또 아닌 것 같다.
내 마음을 나도 알 수가 없다.
자꾸 가슴이 아프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는데, 자꾸 가슴이 아파 죽을 것 같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았는지, 상우가 재신을 자신의 품에 꽉 껴안는다.
“오빠.......”
“그냥 이렇게 있자.
너 지금 무지 아픈 표정인데, 내가 어떻게 위로해야 될지 몰라서, 화가 나.
내가 아파서, 널 좀 안아야겠어.”
상우의 품이 따뜻했다.
그런데 따뜻한 만큼, 또 아프다.
재신은 자신이 왜 이러는지, 정말 알 수가 없다.
한참을 그렇게 안고 있던 상우가 한숨을 쉬며, 그녀를 품에서 놓았다.
그러나 두 손은 여전히 재신의 두 팔을 잡고 있었다.
“오빠? 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상우의 눈빛이 조금은 깊어지는 것 같다.
아, 이런 눈빛을 안다.
이런 눈빛을 했던, 아니 이 눈빛보다도 더 깊고, 아팠던 누군가의 눈이 떠오르자, 재신은 알 수 없는 고통에 휩싸였다.
상우의 오른손이 천천히 재신의 얼굴을 감싸며, 볼을 천천히 쓸어내렷다.
재신은 알고 있었다.
상우가 지금 뭘 원하는 것인지, 본능으로 알고 있었다.
키스.........
그러나 키스라는 말을 떠올리는 순간, 재신은 성곽에서 그 사람의 입술이 떠올랐다.
너무나 자극적이었던, 온 몸을 곤두서게 만들었던, 머리에서 발끝까지 저릿하게 만들었던,
그와의 키스........
왜 하필.........
도대체 왜 이러니...이재신!
그와의 키스를 떠올리는 자신이 짜증이 났다.
상우의 입술이 점점 자신에게 다가오자, 차라리 잘 되었다 싶기도 했다.
너무 키스를 안 해 봐서 그 사람이 떠오르는 거라고, 다른 사람과 키스해 보면, 또 괜찮아질 거라고,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상우의 입술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재신은 침을 삼켰다.
그러나 상우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닿기 직전,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것은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녀의 본능이 그녀의 얼굴을 돌리게 만들었다.
하아........
“오빠...미안해. 나....아직.......”
한숨을 내쉬며 재신이 말하자, 상우의 손이 갑자기 그녀의 얼굴을 강하게 잡아서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
“오빠, 이러지 마!”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재신의 얼굴을 잡고 있던 상우의 팔이 뒤로 확 꺾였다.
재신의 바로 앞에 약간은 상기된 듯한, 화가 난 듯한 시경이 서 있었다.
재신의 심장이 또다시 쿵 하고 내려앉는다.
“은.시.경.씨. 지금....뭐하는 겁니까?”
“궁입니다.”
“지금, 남의 연애사까지 끼어드는 겁니까?”
“공주님께서......싫어하셨습니다.”
“흠....그래서 날 완전히 치한 취급을 한 거네.
날 진짜 나쁜 놈으로 봤네. 허..참........”
기가 찬다는 듯이 상우는 시경이 잡고 있는 자신의 팔을 빼낸다.
“봤지? 이재신. 은시경 근위대장님. 너한테 꽂혀 있다니까.”
상우는 시경을 정색하며 쳐다본다.
“지금, 은시경 씨, 근위대장으로 여기 있는 거 맞습니까?
내가 보기엔 질투에 눈먼 남자로밖에 안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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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재신이 피하자, 상우는 순간 멈칫하더니, 핏 웃었다.
그러면서도 얼굴은 그대로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는 작게 속삭였다.
“걱정 마. 니가 싫으면 안 해.”
“오빠.......”
“근데 지금은.......뭘 좀 알아보고 싶어서, 잠시만 이렇게 있자.”
“응?”
다시 상우의 손이 재신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끌어 당겼다.
그러나 더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고 정지해 있었다.
“내 팔 밀어봐.”
“뭐라는 거야?”
사실 어차피 재신은 상우를 밀고 있었다.
근데 상우가 도리어 재신에게 더 밀어보라고 한다.
재신은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겠고, 어서 여기서 놓여나자 싶어서 얼굴을 돌렸다.
그때 다시 상우가 재신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확 돌렸다.
그러던 상우가 한 쪽 눈을 찡긋한다.
“분명, 내 말이 맞다니까.....”
“오빠, 이러지 마!”
그 순간 상우의 팔이 뒤로 확 꺾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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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우는 당당했다.
어쩌면, 그의 낚시에 내가 걸려든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참을 수 없었다.
그녀를 품에 안고 있는 것도,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는 것도 그 어떤 것도 참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는 내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불안함이 들켜버렸는지도 모른다.
그의 편안한 웃음에, 그의 당당함에, 공주님이 반하실까봐, 좋아하실까봐, 불안하고 두려웠다.
속상했다.
자신에게는 잊으라 하고, 그녀는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서는 것을, 보고 있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그가 그녀에게 키스하려고 했다.
그 순간 시경은 자신의 머리가 돌아버리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그의 얼굴을 치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가 그의 키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피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기억하지 못하니까, 당연한 건데, 그러나 그런 그녀의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 숨을 막히게 했다.
제발..........
그런데 그녀가 그를 피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 남자를 거부했다.
그 순간 나는 이미 그를 향하고 있었다.
이러지 말라는 그녀의 말에 나는 이미 손이 먼저 나가고 있었다.
황망히 서 있는 나를 두고, 그 남자는 그녀를 휠체어에 태워 그녀의 방으로 데려다 준다.
난,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걸까.
가던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은시경 씨, 우리.....따로 얘기 한 번 하죠.”
“오빠.....무슨 소리야?”
공주님은 그를 보더니 다시 나를 쳐다보신다.
그녀의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 같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제 점점 미쳐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아..........
시경의 한숨소리가 공기 중으로 퍼져나간다.
5
“어, 아침부터 웬일이야? 짐은 다 쌌어?”
아침부터 상우가 재하를 찾아왔다.
“나, 가기 전에 너한테 물어볼 거 있다.”
“뭔데? 재신이 문제야?”
“은시경 씨....”
재하는 은시경이라는 말에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렇듯이 문제는 한꺼번에 터진다.
늘 재신이에 대한 촉은 밝았던 녀석이다.
분명 눈치채고도 남았겠지.
“얘기해.”
“은시경 근위대장.
재신이 좋아하지?”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다음으로 넘어가라는 듯 상우를 본다.
“공주님 마음은 ?
공주님도 은시경 씨 좋아하는 건가?”
후우~
재하가 숨을 깊이 내쉰다.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재하 자신도 모른다.
“질문이 잘못 됐다.
언제인지를 물어야지.
지금, 아니면 예전?”
“그 말은 예전과 지금 공주님 마음이 바뀌었다는 거야?”
재하는 고민하다가 좀 더 분명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답하기 전에 나도 물어볼 거 있어.
이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뭐야?
만약에 yes라면 넌 어쩔 건데?”
“yes라면, 물러나야지.”
“진심이야?”
“당연.
물론 상대가 공주님 정말 많이 아껴주고 잘해준다면, 그래야지.
하지만 조금이라도 공주님 아프게 하면 바로 컴백이야.”
이 녀석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이 놈은 분명 그렇게 할 놈이다.
“예전에 재신이가 은시경, 많이 좋아했어.”
상우의 입에서 약한 신음소리가 나온다.
예상하고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확실히 충격적이었다.
“지금은?”
상우는 이 대답을 기다리는데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땀이 난다.
“지금은, 하아...... 나도 모르겠다.”
“공주님 마음이 바뀐 거야?”
“바뀌었다기보다는....
좋아. 솔직하게 얘기할게.
재신이가 은시경에 대해서 기억을 못 해.”
“뭐? 기억상실이라는 거야.? 뭣 때문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아. 그러다 상우도 뭔가가 떠오른다.
“혹시 은시경씨 식물인간 상태였을 때, 충격 받은 거야?
죽은 줄 알고?”
재하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걸 지켜보던 상우의 가슴이 쿵 하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
“그렇게 많이 좋아했던 거야?
하기야 그냥 알던 사람이 죽었다고 해도 충격일 텐데
좋아했으면......”
“그 정도 수준이 아니야.”
“어?”
“재신이, 하아..... 지 손목.....그었다....은시경 때문에......”
“뭐!!!!!!!!!!”
“그냥 충동적인 게 아니라 정말 오랫동안 계획해서 그었어.
그 전에도 자살시도 2번이나 했었고.
그랬다, 그 자식이.”
상우는 아무 말도 못한 채 신음소리만 낼 뿐이었다.
그러다 한참 만에 상우가 물었다.
“근데 왜 기억을 못 하는 거야?”
“손목 긋고 나서 겨우 살아나서는 기억을 못하더라.
지도 살려고 그랬던 거겠지. 지도 살아야 하니까..
그리고 형이. 형이......우리 재신이 위해서......그랬을 거야..
기억이 너무 잔인한 기억만 있는 애니까 .
우리 재신이 좀 살라고......
아니다...사실은 엄마랑 나랑 살라고 그래 준 걸 거야.
먼저 간 게 미안해서 우리 재신이까지 데리고 가면 우리한테 너무 잔인하니까.”
재하는 또다시 울컥한다.
상우는 그런 재하가 안타깝다.
어디에도 말 못했을 우리의 국왕이, 내 친구가 가슴 아프다.
“나한테라도 얘기하지 그랬어?”
재하가 상우를 본다.
상우의 눈에서 친구를 본다.
“됐다. 임마! 너도 국왕 돼봐라. 그럴 수 있나.”
“섭섭하다. 이재하!
나 그래도 너 불알친구다.
적어도 입 무겁게 있을 줄 안다고.”
“알아.
그래서. 고맙다.”
“어쨌든 은시경 씨와 재신이 상황이 아주 애매하네.
그럼 재신이는 지금도 기억 못 하는 거야?”
“응. 못해. 근데......”
“..........”
“은시경이 자기 좋아한 건 아는 상황이야.”
“뭐?”
“기억은 못 찾았는데. 은시경 그놈이 중국에 가기 전에 재신이한테 동영상 찍어서 남긴 모양이야.
재신이는 우연히 그걸 얼마 전에 본 거고.”
“그럼 재신이도 다시 은시경 씨를.......”
“아니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
어제 저녁만찬 때 봤잖아. 재신이 까칠했던 거.
녀석 지금 화가 나서 나도 은시경도 안 보겠다고 난리였어.”
“은시경 씨는 왜?”
“그냥 그 상황이 열받겠지.
지한테는 사랑하네 어쩌고 해놓고서는 결과적으로는 죽으러 간 거니까.
죽고 나서 그런 영상 봤으니. 결국 지가 견디지 못하고 자살기도까지 한 거니까”
그 얘기를 듣던 상우는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결국 그 침묵을 재하가 깨고 만다.
“넌 그래서 결론이 뭐야?”
“어렵네.”
“그래.....어렵지......”
“그런데, 물러나진 않을 거야.”
“뭐?”
“아직 재신이 마음도 모르지만, 무엇보다 은시경 씨에 대한 확신이 없어.
재신이가 그렇게 힘들었다면, 그 남자랑 밀어 주고 싶지 않다.”
후우.......
어쩌면 방금 상우의 말은 재하의 마음과도 같았다.
“넌, 재신이 오빠로서 넌 어떤데?
어떻게 되길 바라는데?”
“나?
솔직하게 말하면,
은시경은 정말 내 친구로, 내 충신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재신이도, 은시경도 각자 좋은 사람 만나고,
아프지 않게 사랑하고, 그랬으면 좋겠어.
김광석이 그랬잖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며......
둘 다 상처가 너무 커.
물고 물린 게 너무 많아서......그런 아픈 사랑은 안 했으면 좋겠다.
재신이가 또 아플까봐 겁나고,
은시경 또 잃을까봐. 하아.......무섭다, 나는.”
상우는 재하의 어깨 위에 잠시 손을 얹었다.
동생을 바라보는 마음과 충신을 잃고 싶지 않은 국왕의 마음이 느껴졌다.
약한 나라의 국왕의 아픔도 느껴졌다.
“나도 넣어줘.
이재하의 충신. 나도 있다.”
대한민국의 국왕은 자신의 친구를 향해서 그저 고개만 끄덕인다.
그러나 그의 눈가는 젖어가고 있었다.
6
재신은 목발을 벤치에 걸쳐놓고, 자신도 그곳에 앉았다.
이곳에만 오면 이 복잡한 마음이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나와 보았다.
궁중실장님께는 잠시 걷는 연습을 하고 오겠다고 겨우겨우 설득해서 나왔다.
그러면 근위대원이라도 같이 가야 한다는 걸, 한사코 말렸다.
그들도 사람 아니냐고. 좀 쉬어야 되지 않겠냐고.
어차피 궁에 곳곳에 보초들이 있으니 괜찮다고 열심히 설득해서, 결국 CCTV 있는 곳으로만 다니겠다고 해서 겨우 나올 수 있었다.
바람이 시원했다.
낮은 그리도 덥더니, 밤은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자신의 답답한 마음에도 바람이 불어와 식혀주는 듯해서 조금은 나아지는 듯했다.
상우 오빠가 미국으로 떠났다.
조만간 다시 보자며, 가만히 나를 안아주었다.
상우 오빠를 마주 안아주다가 또다시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모두들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유독 그만 나를 오롯이 보고 있었다.
왕실 측근의 스킨십을 보는 것도 불경죄였다.
그는 마치 그 모든 조항들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상우 오빠를 안고 있으면서, 나는 마치 그와 안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눈빛 때문에, 그의 눈빛이 너무나 강렬하고 깊어서, 그의 눈빛에서 도망갈 수가 없었다.
또 다시 가슴이 답답해 온다.
바스락........
갑자기 들리는 발소리에 고개를 들어본 그곳에, 그 사람이 있었다.
아..........
그도 나도 아무 말도 못한 채, 그저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시경은 운동으로 밤을 샐 것처럼, 후원을 뛰고 있었다.
몸을 혹사시키고 있지만, 그의 머리에는 온통 복잡할 뿐이었다.
이상우가 오늘 미국으로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그와 악수를 하며, 했던 말이 자꾸만 남는다.
“은시경 씨, 난 진심입니다.
은시경 씨도 그럴 거라고 봅니다.”
안다. 그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거.
그래서 불안하다.
그녀를 마음에 품으면서부터 두려웠던 건 이런 것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맞지 않다.
감히 그녀를 마음에 품어서는 안 되었다.
그녀의 곁에 설 수 있는 사람은 그 남자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는....나는..........
아무리 아무리 뛰어도 자신의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몇 바퀴를 돌아도, 이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김유신의 말처럼 또다시 그곳으로 향하고 만다.
그리고 그곳에 앉아 있는, 하얀 달빛을 받아 마치 빛이 나는 듯한 그녀를..........만나고 나서야, 내가 사실은 이것을 기대했음을 알게 된다.
사실은 공주님이, 나의 공주님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는 것을........
시경도, 재신도, 그저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역시나 은시경이었다.
자신의 신분에 대한 자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공주님 앞으로 다가가서 고개를 숙였다.
“왜, 나와 계셨습니까?”
“아......걷는 연습 좀 하려구요.”
“근위대원은 왜....”
“아, 내가 번거로워서요. 어차피 금방 들어갈 거였어요.”
“그래도, 공주님. 아무리 궁이라도 밤은 위험합니다.”
“안 그래도 들어가려고 했었어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 저...........”
재신이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말을 얼버무렸다.
시경은 왠지 불안해진다.
왠지 저 말을 들어서는 안 될 거 같은, 그래서 피하고 싶은........그런 불안한 느낌.
그러나 피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대한민국 왕실의 고귀한 공주였고, 자신은 그저 그녀를 호위하는 근위대의 일원일 뿐이었다.
“은시경 씨, 나 안 그래도 은시경 씨에게 하고 싶은 말, 있었어요.”
“예. 말씀하세요.”
시경은 그녀의 눈도 바라보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다.
마치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안다는 듯이, 그는 두 주먹을 꽉 쥐고 서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재신의 눈에도 보였다.
그가 얼마나 긴장하는지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이 이상하게 재신의 마음을 저릿하게 한다.
그러나 재신은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다.
이런 미적지근한 태도가 더 나쁜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기억하지 못할 때.....내가 당신을..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알고....있습니다.”
“나......은시경 씨에 대해...사실 아무 감정 없어요.
그러니까..........저번 같은.......”
“혹시........성곽일이라면, 성곽에선....죄송.....했습니다.
이제 절대로 그런 일 없을 겁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재신은 가장 하기 어려웠던 말은 전한다.
“나에 대한...감정도...혹시 아직도 있다면,
정리해줬으면 좋겠어요.
은시경 씨 보기가....좀...불편하네요.”
그 말을 듣던 시경이가 한동안 아무 말이 없다.
그저 그의 목울대가 몇 번이나 울렁이는 것을 본 것도 같고,
그의 이마 위의 힘줄이 돋아나는 것도 본 것 같다.
그래, 그에겐 정말 잔인한 말이겠지.
“........많이 불편하시면, 제가....궁을....떠나겠습니다.”
뭐? 떠나?
“은시경씨!! 지금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누가 떠나래요?”
재신은 기가 찼다. 궁을 떠나겠다니, 겨우 나 때문에 궁을 떠나겠다니.
오빠가 가장 믿는 사람이 오빠를 떠나겠다니.......
“이..이봐요. 은시경 씨!
지금 오빠를, 당신이 목숨 걸고 지켜낸 우리 오빠를 떠나겠다는 거예요?”
“제가...계속 있으면, 많이...불편하실 겁니다.”
“은시경 씨!!!”
“전.......정리라는 것이........뭔지 모르겠습니다.
공주님에 대한 감정........그걸...제 마음대로....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정리라는 걸.......할 수가 없습니다.”
천천히 그가 고개를 들고 재신을 바라보았다.
재신은 한 남자의 진심을 보았다.
저 안에서 올라오는 엄청난 감정의 깊이를 보았다.
그 울렁이는 감정의 깊이를, 그 남자가 감내하고 있는 고통의 깊이를,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한 남자의 진실하고도 충직한 마음을 보았다.
그래서 재신은 그 어떤 말도 더 할 수 없었다.
어떤 말을 그에게 더 한다는 것이, 한 남자의 깊이를 무시하는 행동인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이상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재신은 한 가지만 생각했다.
이 혼란스러움을, 이 상황을 벗어나자고.
자신에게는 그 어떤 해답도 없었다.
자신의 마음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도망가고 싶었다.
그로부터, 그의 마음으로부터, 또 자신의 저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다.
재신은 목발을 잡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그를 외면한 채 돌아섰다.
“혼자.......들어갈게요. 은시경 씨는 가서 쉬세요.”
그런 그녀를 시경은 아프게 바라봤다.
가슴 저 안에서부터 자꾸만 감정이란 것들이 끓어오르는 것 같다.
자신을 외면하는 저 모습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자신의 가슴을 뛰게 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가슴이 시렸다.
설렌 만큼, 심장의 고통은 커져만 갔다.
“왜.........여기에 나오시는 겁니까?”
천천히 한 걸음 씩 옮기던 그녀의 발걸음이 멈춰선다.
“왜.......자꾸........여기에 계시는 겁니까?
이곳이.......어떤 장소인지, 알고.......계십니까?
왜......이렇게 저를........기대하게 하시는 겁니까? 공주님.......”
시경의 목소리가 떨렸다.
울음이 섞인 듯, 저 깊은 감정의 바다 속에서 울렁이는 듯, 떨려왔다.
그런 그를 뒤로 하고, 재신은 목발을 짚고 걸어간다.
그러다가 다시 선다.
“여기에 오면, 누군가 내게 말해줘요.
내 잘못이 아니라고, 괜찮다고..그렇게 누가 말해줘요.
공주님 탓, 아닙니다.......
그래서 살아남은 사람의 죄책감을...누군가가 자꾸 괜찮다고 말해줘요.
그 목소리가 말해요. 내 탓이 아니다, 내 탓이 아니다, 그렇게 자꾸만 말하라구요.
그렇게 힘들 때마다 주문처럼 외웠어요.
그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내 탓이 아니다, 내 탓이 아니다.......
그래서 여기 와 있었어요.
힘들 때마다, 죄책감이 느껴질 때마다, 여기에 나와요.
그러면 어김없이 그 목소리가 들려요.
공주님, 탓....아닙니다....... ”
“공...주...님.........”
“그 목소리가........낯익다고 생각했어요.
기억은 나지 않아도, 뭐가 낯익다구요.
그러다가......당신이 살아서 돌아왔죠.
늘 낮게, 공주님이라고 부르는 그 목소리가, 왜 낯설지 않았는지,
이제야 알겠네요.”
재신은 시경이 자신에게 묻는 그 물음을 듣고서야 알았다.
그 물음을 들으면서, 이 사람이었구나, 그 목소리는 이 사람 것이었구나 하고 알게 되었다.
저 사람이 나를 위해서 그렇게 말해주었겠지.
내 손을 잡고 그렇게 해 주었겠지.
내 탓 아니라고, 공주님 탓 아니라고, 그렇게 내게 힘이 되어주었겠지.
자꾸 눈물이 날 것 같다.
아.........
재신이 걸음을 떼려는 그 순간, 자신의 어깨를 감싸는 손길이 느껴졌다.
은시경이 뒤에서 재신을 안고 있었다.
그의 단단한 두 팔이 재신의 어깨를 강하게 안고 있었다.
은시경의 숨소리가 귓가에서 들렸다.
그의 한숨소리가 목덜미에 느껴졌다.
재신은.......움직이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거부해야 하는데, 거부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그 순간을, 이 남자는 오롯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 시절, 나는, 아마 이 남자를 온 마음으로 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남자도 내 사랑을 오롯이 받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너무나 고통이겠지.
이 남자의 아픔이 느껴진다.
그래서 움직일 수가 없다.
나는 공주라고, 어디 감히 공주의 몸에 손대냐고, 말해야 한다는 그런 생각조차도 들지 않았다.
그의 고통을 함께 느낄 뿐이었다.
많이 아팠겠구나.....이 남자.
서로 사랑했던 기억을 모조리 잊어버린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때문에, 자신을 거부하는 이 여자 때문에
이 남자, 속이 다 타들어가겠구나.
그래도 재신은 정신을 차리려고 한다.
감상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자신을 다독인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나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것도 운명일지 모른다.
하아........조금은 차가워진 공기 사이로 재신의 한숨이 퍼졌다.
"은시경 씨, 나 정말 이기적이에요.
내가 원하는 거, 내게 필요한 것만 기억해요.
무슨 뜻인지 알죠?
나한테 필요하니까, 기억할 뿐이에요.
위로받은 것만, 내게 좋은 것만, 그런 것만 기억해요.
그러니까....기대...하지 말아요........."
이 말이 그에게 얼마나 아픈 말일지 알지만, 재신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게 희망고문을 할 수는 없으니까.....
적어도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리는 것이 그에게도 좋을 것 같아서.....
그러나 돌아온 답은 다시금 재신의 가슴을 쿵~하고 떨어뜨렸다.
"......괜찮습니다. 공주님.
정말, 다행입니다.
제가 곁에서 지켜드리지 못한 그 2년 동안, 그래도 제 말이.......공주님께 위로가 되셨다면, 저는 그걸로 충분합니다."
정말...이 남자.........
재신은 이 남자의 말 때문에 또 속상해진다.
"은시경 씨, 여기 궁이에요. 이제...나, 놔줘요. "
어렵게 재신은 입을 뗐다.
시경은 아무 말 없이 재신을 품에서 놓아준다.
그의 손길이 떠나간 자리마다 서늘해진다.
그의 온기가 사라진 자리가 재신을 외롭게 하는 듯하다.
자신을 지탱해주던 단단한 그의 가슴이 사라지자, 힘이 빠지는 듯도 하다.
그러나 재신은 마음을 다잡으며 걸어갔다.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는데, 그가 뒤에서 조용히 따른다.
굳이 옆으로 오지도 않고, 그렇다고 멀리 떨어지지 않으면서, 그는 내 뒤를 지키며 따라온다.
뭐하려고 그러느냐고 말도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 이상하지만, 재신은 애써 생각해본다.
누군가 내 뒤를 지켜주는 게 좋아서라고,
그래서 외롭지 않아서라고,
그의 단단한 등이 나를 지켜줄 거라고.
그렇게 공주는 앞을 보며 걸어가고, 그녀의 기사는 공주의 뒤를 조용히 지키며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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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을 아직도 봐주시고, 댓글을 남겨주시는 님들, 정말 감사드려요.
많이 아프시죠?
제 글은 알콩달콩이나 달달한 글과는 거리가 멉니다.
제가 그런 글을 못 씁니다.
달달한 글을 쓰시는 분들은 진정 금손이신 거죠.
저는 제 능력이 비루하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쓸 수 있는 건, 두 사람이 서로를 느끼면서, 서로에게 끌려 하면서, 지켜보면서 마음 아파하는,
이런 것밖에 못 씁니다.
그걸 좋아해서이기도 하구요.
혹시 제 글에서 알콩달콩이나 달달을 원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제 글은 아마 달콤쌉싸름한 얘기가 아닐까 합니다.
늘 진한 초콜릿 같은 그런 사랑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달기만 한 게 아니라, 그 쌉싸름한 이야기를 쓰게 됩니다.
쌉싸름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뭔가 슬픈 듯도 하지만, 그 안에 달콤함이 스며들어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제가 참 비루합니다.
오늘은 은시경의 49재이지만, 제 글에서는 살아있습니다.
고통받고, 가슴 아프고, 혼자 절절해 하고, 또 질투하고, 그러고 있지만,
이 남자, 사랑을 드러낼 수밖에 없어서, 또 그렇게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고 있어서,
제게는 가슴 두근거리게 합니다.
제 필력이 부족해서, 글로는 잘 표현되지 못했지만,
제 상상 속에서 움직이는 은시경은 분명 그렇습니다.
어쨌든 49재 맞추어서 선물처럼 12회를 쓰고 싶었습니다.
다소 무리한 감도 있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제가 쓰면서 그래도 멘붕은 되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마지막 씬에서 은시경 백허그는 제 로망입니다.
백허그는 진정 저의 로망이라......
저는 백허그하는 은시경 앓이를.....좀 하게 될 듯합니다.ㅠㅠ
+1) 이 글을 쓰면서 계속 김광석 다시 부르기 노래를 들었습니다.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두 곡을 배경음악에 넣어보았습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은 아시님께서 떠올려 주셔서 다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해요.^^)
김동률의 곡도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곡인데, 제 글과 너무나 잘 맞아서 넣었습니다.
사실 들으면서 썼기 때문에 곡을 들으시면서 보시는 게 더 잘 이해되시지 않으실까 합니다.
+2) 49재에 맞추어 49장을 쓰려고 했으나, 42장 조금 넘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분량이 많았습니다. 은시경 49재 특별편으로 생각해 주시길....
+3) 10회까지 주신 댓글에 답글 달았어요. 감사해요.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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