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11
<배경음악을 들으시면서 읽어주세염>
1. 조정석 - <내 사랑 수정>
2. 에피톤 프로젝트 -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3. 김범수 - <끝사랑>
1.
전화가 울렸다.
염동하였다.
“왜? 전하께서 부르시는 거야?”
“근위대장님!!!!!! 큰일 났습니다!!!!”
“뭐야? 무슨 소리야?”
"공주님께서 영상실에...계십니다."
"뭐?"
영상실이라는 말에 이미 시경은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설마...설마......
"비디오를........."
시경은 더 듣지도 않고 무작정 뛰어갔다.
심장이 터지도록 뛰어 갔다.
그렇게 문을 벌컥 열었을 때,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 앞에 자신이 있었다.
화면 속에 웃고 있는, 설레 하는.........은시경 자신이 있었다.
공주님처럼 멋지고 당당해져서 다시 돌아올게요.
그리고 꼭 와서 직접 말씀드릴게요. 사랑한다고.
충성!
그녀의 눈이, 문에 서 있는, 어찌할 바 몰라 얼어붙은 듯이 서 있는 살아있는 은시경을 향해 꽂혔다.
문을 잡고 있는 시경의 손이 떨린다.
“이..거.....이거.......뭐예요?
이거............뭐야?”
재신의 눈이 마치 헛것을 본 듯, 흔들리고 있었다.
충격. 그녀의 온 몸이 말하고 있었다.
“공...공..주..님.........”
화면 속에서 은시경이 웃고 있었다.
팔을 올려 거수경례를 하면서 너무나 행복한 표정으로, 너무나 설렌 표정으로,
온 몸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담아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의 은시경은 그렇게 웃을 수 없었다.
공주님께서 아셨다.
기억이 돌아오신 게 아니라, 오로지 강요된 기억에 의해서 알게 되셨다.
숨이 턱 막힌다.
2
그랬다.
재신은 그에게서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화가 난 것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그에게서 어떤 말도 듣지 말고, 스스로 상황을 살펴보고 싶었다.
그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처음엔 그에게서 받는 사과가 싫어서일까 싶었다.
그래도 공준데 이 나라 공주가 다른 여자 대타가 되는 게 자존심 상하기 때문인가 싶기도 했다.
물론 그런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은 그렇게 단순하게 치부하기에는 뭔가 달랐다.
도대체 이 마음이 뭘까.
그의 사과든, 변명이든 듣지 말고, 상황을 제대로 바라보고 싶었다.
그러다 그의 말 한 마디가 재신의 마음 전체를 흔들어버렸다.
"그 옷.....
분명 이미 세탁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가지고 계신 겁니까?"
재신이 스스로도 가장 의아스러웠던 것을 그가 묻고 있었다.
"세탁실에서 바로 보내셔도 됐을 텐데, 왜...가지고 계셨습니까?"
그가 내게 대답을 요구했다.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거죠?"
내가 겨우 꺼내 든 대답은 이거였다.
나 자신도 모르니까, 나 자신도 혼란스러우니까.
그러나 나의 대답은 정확하게 그에게 가서 꽂혔다.
그 말을 하고 나서야, 나 자신도 궁금해졌다.
이 사람이 지금 내게 이걸 묻고 있는 이유가 뭔가.
그것이 왜 궁금한가.
내가 그렇게 한 것이 그에게는 중요한가.
함부로 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지금, 내가 이렇게 화내고 있는 상황에서,
사과도 없이, 어떤 변명도 없이,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인 양, 물어보는 질문이 이거였다.
그건, 그에게는 이 질문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거였다.
돌아서는 나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내 생각을 지지해주고 있었다.
재신은 무슨 정신으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이제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피하지 말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그 생각만 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상했다.
그의 고백이 이상했다.
분명 그는 자신의 그 사람만 보겠다고 했다.
언제가 되든지 기다리겠다고, 그렇게 그곳에 있겠다고, 그렇게 진실되게 고백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다른 여자를 자신의 그 사람으로 착각할 수가 있을까.
이 경우,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자신의 옛사랑을 팔아서 지금 앞에 있는 여자를 꼬시려는 것.
그러나 아무리 내가 은시경 씨를 오래 보지 못했다고 해도,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단 한 마디만 해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뼛속부터 군인이며, 충신이었고, 답답하리만큼 진실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다.
고백의 대상이 바로 지금 앞에 있는 여자라는 것.
뭐??
나?
끊임없이 피해왔던 문제였다.
상우 오빠가 말할 때도, 아니라고 그렇게 도리질 했던 거였다.
그가 내 손을 잡고 놓지 않았을 때도,
내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내 볼을 만졌을 때도,
내 상처에 입맞추며 눈물을 흘렸을 때도,
벽장에서 나를 안고 있으면서 그 깊디깊은 한숨소리도,
허리를 감싸 안던 강한 힘도,
내 얼굴을 만지던 그의 손길도,
그리고 내 입술 가까이 느껴졌던 그의 입김도,
나를 볼 때면, 늘 흔들리던 눈빛도,
늘 먼저 얼굴을 돌리면서도, 돌아보면, 다시 나를 오롯이 보던 그 눈빛도,
아니라고, 내가 아니라고, 그렇게 열심히 외쳐댔었다.
그저 그의 충성심일 뿐이라고 그럴 뿐이라고, 착각하지 말라고,
이재신 이러면 안 된다고, 그렇게 외쳤었다.
그러나 지금 재신은 자신이 다다른 결론에 황망해진다.
착각이라고 했을 때, 그의 태도가 떠오른다.
분명 착각이었다면, 그는 거기에서 멈췄어야 옳았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마치 화가 난 듯, 상처받은 것처럼, 내 입술을 다시 빼앗았다.
그건 마치 착각이 아니라고 내게 온몸으로 항의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것 때문이었다.
내가 이후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은.
그 상황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아서......였다.
그 앞의 상황은 충분히 그의 실수라고, 그의 착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상황은 확연히 달랐다.
그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동욱 씨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도, 그는 나를 놓지 못했다.
자신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듯이, 나를 깊게 껴안았다.
자신이 진정하기 위해서 나를 이용했다고 하기에는, 그의 한숨소리가 너무 깊었다.
보체 접촉 조항을 근위대장인 그 사람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 모든 걸 어기고, 그는 내게 키스하고 나를 안았다.
그 모든 일이, 그에게는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는, 내게 사과하지 않았다.
죄송하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더 입을 맞출 수 없는 상황에, 더 안고 있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한 남자만 있을 뿐이었다.
그는, 분명 나를 여자로 보고 있었다. 분명 그 눈은 자신의 여자를 바라보는 눈이었다.
그 때는 안 보이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니 뚜렷해진다.
아!
재신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떠올랐다.
자신이 "성곽"에 간다고 얘기한 적은 없었다는 것을.
분명 재하 오빠 앞에서 별똥별을 보러가겠다고 했지, 성곽에 간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결국 이 모든 상황들이 모여서 단 한 가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변명을 찾아보려 해도, 이제 더 이상 그 진실을 가릴 수는 없었다.
재신은 고개를 흔들었다.
확실하지는 않아.
나 혼자 오버 하는 걸 수도 있어.
그러나 이미 자신의 머리로, 가슴으로, 맞다고, 자꾸만 외쳐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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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염동하 대위 말로는 근위대장님께서 살아 돌아오신 게,
첫사랑한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래.
나 그 얘기 듣고 며칠 잠도 못 잤어.”
“글쎄. 그 때 클럽 M이랑 맞서러 가기 전에,
그 첫사랑 여자한테 돌아와서 사랑 고백한다고 했대.
그걸 영상 편지로 남기셨대!”
“근데 2년 동안 식물인간처럼 있었잖아.
정말 병원에서도 다 포기했대.
근데 그 여자한테 고백하겠다는 약속지키려고 살아돌아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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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신의 머리 속에서는 예전에 들었던 궁인들이 말이 떠다녔다.
염동하 대위, 영상 편지, 고백.
단어들이 떠다닌다.
어쩌면 염동하 대위는 뭔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재신은 좀 더 확신이 필요했다.
진실을 알아야 했다.
"염동하 대위, 지금 어디있어요?"
"아, 공주님. 전 지금 전하께서 시키셔서 문서실에 와 있습니다만, 무슨 일이신지."
"거기 있어요. 곧 갈테니까."
"예? 예? 공주님!"
재신은 자신이 지금 잘하고 있는지, 뭘 하려는 건지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알아야 했다.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뭔가가, 도대체 무엇인지.
이 남자가 지금 내게 어떤 마음인지.
단순히 자신의 착각인지, 아니면...진짜........하아.....
일단 염동하 대위를 만나자.
3
동하는 공주님 앞에서 벌서듯이 서 있었다.
재신의 얼굴이 너무나 단호해서 절로 긴장이 되었다.
“염동하 씨.”
“예...공주님.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예전에 은시경 씨랑, 그러니까 근위대장님과 같이 일했다고 했죠?”
“예? 예. 갑자기....근위대장님은 왜.......”
동하는 재신의 입에서 은시경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입술 바짝바짝 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하께 매뉴얼이라도 받아놓았어야 했다.
“근위대장님과.......”
재신은 말을 하다가 입술을 깨문다. 그러나 다시 결심이 선 듯 입을 열었다.
“후우...그러니까 근위대장님과, 저, 무슨 사이였어요?”
“예?예? 아..아니......그..그게..무슨........”
눈에 띄게 동하가 당황한다.
설마 설마 하던 재신은 점점 자신이 생각하던 게 맞는 건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은 모른다.
확실할 때까지 굳이 판단하려 하지 말자.
“좋아요. 어차피, 그랬든 아니든, 확인하면 나올 테니까......”
“저...그게...공..공주님....이게..저......”
“영상 편지.”
“예!!!옛!!!!”
“근위대장님이 영상 편지라는 걸 남겼다면서요.
그거, 나 볼 수 있어요?”
“그..그런 거....전..모릅니다. 그러니까....”
“이것 봐요! 염동하 대위. 당신 입에서 나왔다는 거, 궁인들이 전부 다 알아요.
대질 심문이라도 시킬까요?”
“저...그..그게......”
“분명 당신이 측근이었으니, 당신에게 뭔가 남겼죠? 그죠??
그러니까, 분명 그거 당신이 가지고 있을 거예요.
아니면, 어디 문서실이나 비밀 서고실에 숨겨져 있거나.........”
동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마른 침만 삼켰다.
“희한한 일이죠? 난 그 동안, 한 번도 ‘은시경’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근데 이상한 건, 내 주변에 있던 궁인들이나 근위대원들은 그 사람 사고난 이후 모두 싹 바뀌었다는 거죠.
궁중실장님과 몇 분만 제외하구요. 그것도 엄청나게 입 무거우신 분들만.
근데 또 웃기는 게, 은시경이라는 사람을 지우고 살다가, 은시경 씨 돌아오자마자, 모두들 갑자기 다 아는 척을 하더군요.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예..예?”
“이상하잖아. 마치 다들 짜고 은시경 얘기는 하지 말자 한 것처럼.
그에 대한 기록도, 이야기도 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요.
오빠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는 그 사람에 대해서, 난 그 존재 자체도 몰랐다는 거예요.
그리고 유독 나는 그 사람만 기억을 못해.
충분히 이상하죠. 이 상황은.
마치 누군가 일부러 은시경 씨 관련 기록은 모두 지워버린 것처럼......아닌가?”
공주님은 이미 뭔가를 눈치 채시고 계셨다.
기억이 돌아오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분명 뭔가가 있으셨던 것 같다.
동하는 고민이 된다. 자신이 지금 어떻게 처신을 하는 게 좋을지,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그리고 왜 하필 자신인지 고민이 된다.
모른다고, 근위대장님께 가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면 이 진실은 다시 묻힐 것이다.
근위대장님은 자신의 소신을 절대로 굽히지 않을 분이셨다.
자기 스스로 절대로 입 밖에 내실 분이 아니다.
그것이 안타까웠다.
미친 척하고, 모르는 척하고, 그냥 드려버릴까 싶기도 하다.
공주님께서 받으실 쇼크도 크시겠지만, 솔직히 동하는 시경이 우선이었다.
자신이 가장 힘들어하면서도, 가장 존경하는 상관이었다.
시경이 아픈 게, 정말 싫었다.
“갈등하고 있군요.”
“예~에?”
마치 독심술을 하는 듯이 공주님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 보여요. 지금.
없으면 바로 얘기했겠죠. 없다고.
그런데 이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게 다 보이니, 분명 있다는 얘기고,
갈등할 정도라면, 어디에 있는지도 안다는 거네.
그러니까 이제 어디 있는지, 나한테 보여주죠?”
“후우..............저, 죽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한테요? 나보다 높아요?”
“한 분은.....아, 아닙니다.”
“염동하 씨, 지금 굉장히 좋은 정보 날린 거 알아요?”
“예?”
“적어도 두 명 이상이라는 것과, 오빠가 관련되어 있다는 거, 맞죠?”
동하는 다시 침을 꿀꺽 삼켰다. 남매는 정말 같은 핏줄이 흐르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옭아매는 것도, 사람의 마음을 날카롭게 들여다보는 것도,
유도심문하는 것도, 모두 똑같았다.
그렇게 동하는 재신에게 비디오를 넘기고 말았다.
아니 동하 스스로 넘기고 싶었다.
이제 근위대장님이 그만 아팠으면 좋겠다는 사심에서 못 이기는 척 주고 말았다.
재신은 영상실에 앉아서 동하가 비디오를 틀어주는 대로 지켜보고 있었다.
동하가 건네주는 리모컨을 받아들고, 심호흡을 했다.
“그럼, 전 나가 있겠습니다.”
“주변에 다 물려줘요. 방해받지 않게.”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뭐 하나만 물어볼게요.”
“예. 말씀하세요.”
“그 때, 은시경 씨, 작전 수행하다 죽은 줄 알았을 때, 그거, 은시경 씨 스스로 간 거예요?
아니면, 오빠가 보낸 거예요?”
“제가 알기로는, 전하께서는 말리셨습니다.”
“그럼, 스스로 자원했다는 거네요?”
“예. 그것 때문에 전하께서 처음에는 근위대장님 감금까지 시키셨습니다.
혼자 못 나가시게.”
“그런데도, 나간 거네요. 자기 스스로.”
“예.”
“오빠가 말렸다면, 그만큼 위험했다는 거네요.
죽을 수도 있다는 거, 알고....있었던 거죠. 은시경 씨도.”
동하는 그때가 생각나는 듯,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그의 눈은 젖어 갔다.
“대단한 충신이네요. 은시경 씨는.”
“예. 그 누구보다도 그러십니다.”
“알겠어요. 아, 하나만 더.”
“예. 말씀하십시오.”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재신이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은시경 씨한테는 아무 얘기도 하지 말아요.”
“예. 알겠습니다.”
시경이 안다고 하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기도 했다.
보지 말라고 할 건지, 아니면 보기를 바랄 건지.
사실 지금 이 상황이 웃기기도 하다.
만약 내가 아니라면, 얼마나 웃기겠는가.
염동하 대위에게 자신과 시경이 무슨 사이였냐고 묻지를 않나, 게다가 남에게 보낸 영상을 훔쳐보지를 않나,
그야말로 기가 막히는 일이다.
공주가 드디어 미쳤다는 말을 듣겠다 싶었다.
재신은 섣불리 플레이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겠다.
왜 이렇게 리모컨을 든 손이 떨리는지, 뭐가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풋....
갑자기 웃음이 나온다.
이거 진짜.....다른 여자한테 보내는 건데, 이재신 혼자 오버하고 난리난 거 아냐?
다른 여자 대타 뛰어서 존심 상해서.........
뭐, 그렇더라도 확인하자.
확인하고 사과하지 뭐.
솔직히 은시경 씨가 나한테 잘못한 건 사실이잖아.
그러니까 난 충분히 이럴 수 있다고......
점점 재신은 자신이 오해하고, 착각하고 있다는 쪽으로 무게가 갔다.
오버야, 오버.
병이다. 이재신...진짜 이건 공주병, 진짜 심각한 공주병이야.
아니지, 도끼병이랬나?
전부 자기만 찍는 줄 안다는.....
에효, 뭐 어쩌겠어. 그냥 앞부분만 보지 뭐.
앞만 보면, 확실히 이름이라도 나올 테니.....,그리고 사과하지 뭐.
나중에 동하한테 입막음으로 뇌물이라도 바쳐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아까까지 뭘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했나 싶기도 하다.
혼자 오버해서는....
편지 보는 건 범죄지만, 난 앞부분만 확인할 거니까 괜찮아. 괜찮아.
그렇게 재신은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그러나 조금은 또 떨리는 마음으로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지금 되고 있는 건가.”
조금은 어려보이는 듯한 은시경이 화면에 나왔다.
화면에서도 어버버거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뭐야, 왜 저렇게 허당이야.......
“아까 그....키스.....죄송했습니다.”
은시경이 수줍은 듯 키스를 말하고 있었다.
순간 재신은 놀랐다. 중국에 가기 직전에 키스했나 보네 싶었다.
키스하고 죄송?
첫키스였나?
그래도 좀 너무했다 싶기도 했다.
물론 지금이야 살아왔지만, 어쨌든 한참동안 죽은 사람이었을 텐데, 당사자가 봤으면, 참 죽을 맛이었겠다 싶었다.
살아있는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게, 첫키스를 한 거라니, 그리고 죽어버렸다니.......
사랑하는 사람의 고백을 이런 영상으로 봐야 했다면, 정말 살고 싶지 않았겠다 싶었다.
그러다 문득 재신은 그 짧은 순간 생각했다.
근데 보통은 먼저 누구야~이름부터 불러야 되는 것 아닌가?
“제가 겁쟁이였어요..........”
자신이 겁쟁이라고 말하는 은시경의 얘기에 재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신은 좀 그랬을 것 같아.
그러나 그 다음 순간 재신은 머리끝까지 곤두서는 것 같았다.
비디오에서, 그 은시경이 뱉은 말은 다름이 아니라, ‘공주님’이었다.
“제가 겁쟁이였어요..........공주님.
제가 답답하고 재미가 없어서 틈을 보이면 바로 싫증내실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일부러 바라만 보자 했는데, 후우...안 되더라구요.”
공주님?
나?
정말 나였어?
진짜.......그 사람이 나였어?
“처음 뵈었을 때부터 좋아했습니다.
너무 자유롭고 당당하셔서
하아....저한테 없는 거라.....
수천, 수만 번도 더 생각했어요.
제가 공주님이 좋아할 만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아....지금 이게 무슨 소리지.......
나를.....좋아했다고?
“저 공주님한테 별로 안 어울렸죠?”
이건 또 뭐야? 안 어울렸죠?
왜.....과거형이야?
둘이 사겼던 거야?
아니지...분명 바라보자 그랬다는 건데.........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분명 싫증낸다고 했잖아. 내가 싫증낼 거라고....
그래서 겁쟁이처럼 바라만 보자고 했다고?
키스를 했는데, 저 남자가 이제야 고백을 한다고?
고백도 안 한 상황에서, 내가 자신을 싫어하는 상황이라면 키스를 했을 리가 없는 사람이잖아.
그저 지켜보려고만 했다고?
틈을 보이면 싫증낸다?
내가.........저 남자를.....좋아했던 건가.
그래서 이 남자는 싫증낼 거라며, 나를 밀어냈던 건가?
영상이 진행되는 동안 재신의 머리는 온통 뒤죽박죽되고 있었다.
장면 장면마다 자꾸만 다시 재생되고, 새롭게 들어오는 내용과 들었던 내용들이 조합되면서, 재신의 머릿속에서는 점점 뭔가가 잡혀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일, 용기 냈어요.
공주님한테 어울리는 사람 되고 싶어서.
만약에 이걸 보시게 되면,
아니, 아닙니다. 보실 일 없을 겁니다.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요 뭐.
멋진 사람 돼서 돌아오겠습니다.
아, 유머집도 가져가요.
더 이상. 답답이는 없습니다.
센스, 센스 충만”
뭐? 이 남자 뭐야!!!
죽으러 가는 거, 알고 있었잖아.
분명 알고 있었어. 그런데....그런데...이런 걸 남겼다는 거야?
이런 걸........
하아........그걸.......내가........본 거야?
그가 죽고 나서, 혼자.........남겨진 채로, 이걸 봤다고? 이걸?
“풋....
공주님처럼 멋지고 당당해져서 다시 돌아올게요.
그리고 꼭 와서 직접 말씀드릴게요. 사랑한다고.
충성!”
돌아와서 사랑한다고 말하겠다며, 웃고 있다.
이 남자가.....하아........
어떻게......어떻게.........
눈을 들어본 그곳에 살아있는 은시경이 서 있었다.
화면 속에서 환하게 웃던 남자와는 달리, 놀라고 두려운 표정으로 그가 서 있었다.
4
“이..거.....이거.......뭐예요?
이거............뭐야?”
재신은 자신의 목소리가 자기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패닉......그 자체였다.
머릿속으로 엄청난 정보들이 떠다녔다.
분석적이고 이성적인 부분들은 서서히 제거되고, 뭔가 풀 수 없는 감정만이 남는 것 같았다.
“공...공..주..님.........”
곧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그 남자가 나를 부른다.
그리고 그런 남자를 보는 내 눈에는 이미 눈물이 흘렀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알 수 있었다.
이 동영상이 궁에 있었다는 것부터, 이상한 것이었다.
다른 여자에게 한 고백이라면, 그 여자에게 있었겠지, 궁에 있었을 리 만무했다.
하아하아..........
재신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시경은 그런 재신을 바라보기만 한 채,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놀라던, 그 경악에 가까웠던 표정을 보고나서 그 어떤 말도 건넬 수가 없었다.
재신은 겨우 감정을 추스르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며 굳은 듯이 서 있는 그 남자에게 물었다.
“이 사람........은시경 씨......맞아요?”
“.......예.”
“그럼, 그 날.......성곽에서........그 고백.........내게 한 거 맞아요?”
“..........죄송합니다. 공주님. 제가.....”
“나냐고!! 묻잖아요!!!”
“예.”
하아........
바보 같이.........정말 바보 같이..........
난.......난.......진짜 뭐 때문에...........
“하나만 더 묻죠. 내가.......은시경 씨를......좋아했어요?”
“....................”
“얘기하라구요. 뭘 더 숨겨요? 얘기해보라구요.”
“저를............좋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좋아한다는 그 말 앞에서 시경의 목소리가 떨리지만, 재신은 이미 자기 감정에 취해서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랬군요. 그랬어. 그래서요? 당신은요?
아니야, 아니야. 지금........저거 찍은 거 보면, 당신 감정 내게 직접 말한 적 없죠?”
“예..........”
시경은 대답을 하면서 가슴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말이 아팠다. 그 때의 자신의 모습이 보여서, 그녀가 자신에게 보여준 마음 앞에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옹졸했던 자신이 보여서, 가슴이 아팠다.
마치 지금 그녀는 그걸 책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알겠네. 이제 이해가 돼요.
내가 분명히 당신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당신은 싫증낼 거라며, 나를 밀어냈던 거......맞죠?
그래서 자신을 겁쟁이라고 한 거고.........
그런데 그러다가 덜컥 내게 키스를 한 거고.........
감정 표현 하나도 없다가, 도리어 밀어내다가 갑자기 키스해 놓고서는,
그게 미안해서 이거 찍고 날아간 거구나.”
“공...주...님..........”
“맞냐구요? 내 얘기가.”
“예.....맞습니다.”
재신이 감정이 복받치는 듯 눈을 감는다.
“하아......죽으러 가는 거면서.....이런 걸........남겼어?”
“죽으러 갔던 거 아닙니다.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려고 했습니다. 정말...저....”
시경은 아프다. 그녀의 말이 너무나 아프다.
살고 싶었다. 살려고 간 거였다.
그녀 옆에서 당당하게 있고 싶어서, 그녀를, 이 나라를, 이 왕실을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간 거였다.
누가 죽고 싶겠는가.
누가 자신의 목숨이 아깝지 않겠는가.
나도 살고 싶었다. 너무나 살고 싶었다.
그녀 곁에서, 그녀를 사랑하며 살고 싶었다.
어떤 미친 놈이, 사랑하는 여자를 놔두고 일부러 죽으러 가겠는가.
나는 정말 살아오고 싶었다.
죽는다는 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 곁에 돌아오겠다고, 반드시 영웅이 되어서, 아니, 김봉구를 잡고, 그 공으로 당신을 갖고 싶다고,
그렇게 욕심내고 싶었다.
적어도 그러면, 아버지의 죄도, 조금은 용서될 거라고,
그래서 당신을, 이렇게 아름다운 나의 공주님을 욕심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공주님!
정말...........살아 돌아오려 했습니다. 그리고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살아왔다고?
난.....당신 장례식 치르고, 이거 보고...그 난리 쳤을 텐데.....
이 딴 거 남기지 말았어야지. 그냥 갔어야지.
키스? 돌아오지 못하는 거 알았으면서, 키스?
고백은 무슨 고백이야?
그래서, 남아 있는 나, 죽이려고 작정했어?”
그러나 재신의 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보면서 느꼈던, 자신이 아니라 다른 여자를 향해서 느꼈던 그 동정심이 결국 자신에게 돌아와야 할 것이었다는 것이 자신을 못 견디게 했다.
그저 보기만 해도, 다른 사람의 일이라고만 해도, 가슴이 턱턱 막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겪어냈다는 거다.
내가........
좋아한다고 말해도, 아니라고, 싫증낼 거라고 밀어대던 그 사람을 향해서 가슴앓이했을 자신이,
그리고 죽으러 가는 지도 모르고, 그저 키스에 기뻐했을 그 바보 같은 여자가,
그러다 남자는 죽고 혼자 남겨져서 이 따위 고백을 봐야 하는 처절한 여자가,
기가 막혔다.
아니, 숨이 막혔다.
그랬구나.....정말 그랬구나.
내 안에 어둠은....이것이었구나.
모르는 사람이 겪는 일이라도 가슴이 아픈 일인데, 내가 이걸 견뎌냈다고? 이걸.......
재신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 울음을 멈출 수가 없다.
또한 자신의 분노를 멈출 수가 없다.
“하.....진짜.......
그래, 참....끝내주는 인생이었겠네.
오빠는 내 손으로......이 손으로 죽여.
거기다,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다 살아나서 하반신 마비야.
게다가 좋아......했다는 남자는........나를 밀어내다가 결국은 죽으러 가기 직전에 키스하고는 죽어버려.
기다리다가 그 남자 죽었다는 사실 알고, 참....가관이었겠네?
어? 참......군인은 죽으면 군번줄 남긴다며?
그거, 설마 나한테 준 거 아니겠지?
아주.......비운의 여주인공 나셨겠네.
그거 안고 울면서 쓰러졌겠지.
장례식 때.......아예 죽지 않았을까?
정말 멋진 인생이었네.
근데....그게.....내 인생이었다고?
그게......잃어버린 내 시간이었다고?
하아.....이거였어. 이거.........”
재신은 자신의 손목에 있던 팔찌를 벗어던졌다.
“이거 봐. 그래서 좋아? 결국 이거였어. 이거.
당신 때문이었어. 내가....내가......나를 죽이려고 했던 게....당신 때문이었어.
내가 죽으려던 게, 당신 때문이었다고.
당신은, 살아돌아오면 다겠지?
그래서 돌아와서 약속지키네 어쩌네 하면서 사랑한다 고백하면 다겠지?”
재신은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들어보인다.
붉은 줄이 얼기설기 남은 그녀의 흉터가 시경을 또다시 고통스럽게 한다.
“이거 성공했으면, 어떻게 됐을 거 같아?
그랬으면, 당신도 나를, 조금은 이해하겠지?”
“공주......님!!!!!”
시경의 입에서 비명 같은 소리가 나온다.
알고 있었다.
그 모든 건 다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입으로 듣는 이야기는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녀는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무의식이 그 엄청난 고통을 드러내고 있었다.
“죽어도...죽어도 기억 따윈 찾지 않을 거야.
당신이란 사람 완전히 잊을 거야.
만약 예전에....내가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당신을 좋아했다면, 죽어도 그 기억 안 찾을 거야.
난....당신이란 사람, 용서 못 해. 죽어도 용서 못 해.”
“용서....안 하셔도 됩니다.
기억 안 찾으셔도 됩니다.
너무, 아파하시지만 마세요. 공주님.”
시경의 목소리가 아프다.
“나 위하는 척 하지 마!!!
그래, 기억이 지워진 건, 정말 하늘이 도우신 거야.
그러니까, 당신도 지워. 나도 지웠으니까. 당신도 지우라고.
당신은 오로지 내게 근위대장일 뿐이야.
예전에 어쨌든, 그건 과거일 뿐이야.
당신 기억 속에 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몰라.
그러나 그 이재신은 진짜 이재신이 아니야.
가장 어둡고 암울했던 이재신이야.
아니, 이재신이라는 자아를 잃었던 그저 그런 여자였어.
지금은 아니야. 절대,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갈 일, 없어.
그러니까 당신도 지워. 난 죽어도 내 기억 찾지 않을 거야.”
재신은 갑자기 휠체어를 움직였다.
그리고는 문 앞에 서 있는 은시경 바로 앞까지 갔다.
“은.시.경. 근위대장님.
오늘 일, 내게는 없었던 일입니다.
예전의 당신이 어땠는지, 난 모르고, 관심도 없습니다.
결코 기억을 찾는 일 따위는 없을 겁니다.
다시는, 과거에 대한 얘기는 입에 담지 않을 겁니다.
은시경 씨와 나, 근위대장과 공주일 뿐입니다.
그러니, 근위대장님도 그렇게 해 주세요.
이만, 비켜주세요.”
재신이 비켜달라고 했지만, 그는 그녀를 아프게 쳐다볼 뿐,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은시경 씨!!! 내 말 안 들려요? 비켜달........”
“싫습니다!!!”
단호한 그의 음성에 재신이 그제서야 그를 제대로 쳐다본다.
“지금, 뭐라고 했죠?”
“싫습니다. 공주님!!!!”
“은.시.경.씨! 지금! 뭐하자는......”
순간 그가 재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공주님, 전.....못 지웁니다.
공주님께 기억 찾으시라고 강요하는 거, 아닙니다.
얼마나 힘드셨을 지 압니다. 충분히...압니다.
그런데, 전, 전, 안 됩니다.”
“지금 무슨.......”
“공주님, 저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공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척하며,
그저 근위대장으로만 공주님을 대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저는요. 공주님........이제 그게 안 됩니다.”
“이것 봐요!!! 은시경 씨 내 말이 말 같지 않아요?
내가 예전에 마음 줬다고, 그렇게 내가 만만하고 우스워?”
재신은 화가 났다. 자기 마음대로 떠나버렸던 남자가, 그렇게 죽어버렸던 남자가,
저렇게 본인이 더 상처받았다는 듯이 말하고 있는 그가, 재신을 화나게 했다.
“사랑합니다!”
“은시경 씨!!”
“사랑합니다. 공주님.
화내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전, 이제 어쩔 수가 없습니다. 공주님”
시경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재신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이미 재신은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가슴으로 통곡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고통까지 느낄 여력이 없었다.
기억하지도 못하는 그 상황들이, 물밀듯이 다가와, 재신의 무의식을 헤집어 놓아버렸다.
감정의 파고가 그녀를 덮쳐버렸다.
“하, 사랑? 뭐? 웃기지 마.
Major Histocompatibility Complex, 주조직 적합성 복합체라고 들어봤어?
사랑이라는 게 존재할 거 같애?
당신이 말하던 그 절절한 마음 같은 거, 웃기지 말라고 그래.
사랑은 무슨.....그건 그냥 자기와 다른 면역 성분을 찾는, 그저 화학 반응일 뿐이야.
자기와는 다른 면역 성분을 찾는다고!
단 1초만에. 이게 짐승이랑 뭐가 달라.
거룩한 척, 대단한 사랑한다는 척 하지 마!!
냄새로 짝짓기 상대 찾는 거랑 뭐가 달라? 인간도 똑같아!!!
당신이 뭐, 그렇게 대단한 사랑, 하는 줄 알아?”
“공주님!!! 전!! 정말 공주님........”
“은시경 씨! 정신차려요.
당신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거, 없어.
그냥 자기랑 다른 면역 성분 찾아서 화학적으로 반응하는 거뿐이라고.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거뿐이야.
그래, 그랬겠지. 나도. 당신과 나, 화학적으로 맞았겠지.
그러나 그게 다야.
그러니까 당신도 정신차려!!!
웃기지도 않는 감상에 빠지지 말라고!!!”
재신은 통곡했다.
가슴으로 통곡했다.
밖으로 소리나지 않아도, 시경에게 들렸다.
그녀의 통곡 소리가.......
그걸 오롯이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재신의 휠체어가 시경의 옆을 지나쳐 밖으로 나간다.
나가면서 마지막으로 들려온 재신의 말은 시경의 마음을 찢어놓고야 말았다.
“이재신 최악이었네. 정말.
기억하지 않을 만 했네.
그 최악에, 당신이라는 사람이 정말 큰 정점을 찍어줬네요.”
시경은 당장 가서 그녀를 안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들먹이는 게 보이지만, 그래도 안아줄 수가 없다.
시경은 자신의 죄를 안다.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한 죄.
너무 아름다운 빛을 사모한 죄.
너무나 멀리 있는 별을 딸 수 있다고, 말도 안 되는 꿈을 꾼 죄.
그러나 또한 시경은 알고 있다.
죽음을 넘어서 온 진실을 알고 있다.
자신은 이제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을,
이젠 도망갈 곳도 없다는 것을,
그에겐 오로지 그녀라는 정점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시경은 그녀가 아프다.
그래서 자신의 사랑이 아프다.
5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왜 나한테 얘기 안 했어?
나한테는 얘기했어야지.
그래, 그 때는 그랬다 쳐! 그럼, 돌아와서는 얘기해 줬어야지.
나만 바보 만들고.”
재신의 눈이 벌겋다. 이미 퉁퉁 부어 있었다.
한 바탕 하고 왔구나.
그 자식도 저러고 있겠구나.
재하의 마음도 무겁게 가라앉는다.
내 죄다.......하아........
재하도 동하의 전화를 받았다.
다급했던 동하의 목소리와는 달리 재하는 침착했다.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생각보다 그게 빨리 왔을 뿐이었다.
그저 아주 조금만 그 시간을 늦추고 싶었는데, 그것이 조금 아쉬울 뿐이다.
“그래서? 얘기했으면 어쩔 건데?
너, 어차피 기억도 못 하잖아.”
“뭐야? 어떻게 나한테!!!!”
“아니야? 너 솔직히 기억 못하잖아.
너 지금 이 상황,
드라마나 영화에서 배우들이 나와서 하는 거 보는 거랑 뭐가 달라.
너, 니 얘기 아니잖아. 아니야?”
“하, 자기 얘기 아니라고, 어떻게 그렇게 함부로 얘기해.”
“알았으면 어쨌을 것 같은데?
어떻게 했을 건데!!!!!!
왜, 또....또......그럴 거....였니? 그럴 거였냐고!!!!!!”
재하도 울컥하고 말았다.
그 순간은 아무리 해도 상처다.
재신도 재하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안다.
자신은 기억도 못하는 그 순간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오빠의 절규였다.
“너!! 너 말야, 니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니가 더 잘 알잖아.
형 가고 나서, 우리 어땠는지,
넌 근데, 나랑.....엄마....놔두고...가려고 했잖아.
너 하나 편하자고. 그랬던 거잖아.
남겨진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 니가 더 잘 알면서, 어떻게 니가.....우리에게........크흑.....”
결국 재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강해야만 하는 국왕이지만, 한 나라를 책임져야 하는 국왕이지만, 지금 이곳에는 그 모든 짐을 지고 가야 하면서도, 아픈 가족사를 가진 한 가엾은 남자일 뿐이었다.
형을 잃어야 하고, 자신의 충신을 잃어야 했으며,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내를 납치 당해야 했고, 하나 남은 동생을 잃을 뻔 한,
가슴 아픈 한 남자일 뿐이었다.
“오빠..나.....”
그런 오빠 앞에서, 재신도 복받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너, 진짜 너무 하는 거, 아니야?
형, 그렇게 가고, 우리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니가, 니가 더 잘 알잖아.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지, 어떤 죄책감으로 살아야 하는지,
순간 순간마다, 얼마나 떠오르는지,
그리고, 얼마나 보고 싶은지,
그래서, 얼마나 미안한지,
그럴 줄 알았으면, 그게 마지막일 줄 알았으면, 사랑한다고 말 좀 하며 살 걸,
얼마나 후회되는지,
이재신! 니가 더 잘 알잖아. 니가.....그런데....니가 어떻게 이래?”
“오빠....미안해........미안해.........난....난......”
“그래, 너 기억 안 나는 거 알아.
근데 임마! 난....아직도 속에서 열천불이 올라와!!! 알아?
기억도 안 나는 너 붙들고 열낼 수도 없고,
근데 너 같으면 말할 수 있겠냐?
평생을 함께 한 가족들 놔두고, 그 가족들 가슴에 떨쳐낼 수 없는 상처 주고,
넌, 잠깐 만난 남자 하나 때문에 니 목숨을........세 번이나, 그래 세 번이나 버렸어.
그런데, 내가........내가 얘기할 수 있겠냐고!!!!”
재신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그 상처가 어떤 건지,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안다.
지금도, 큰 오빠가 보고 싶어서 미친 듯이 사무칠 때가 있다.
내가 그런 상처를, 그런 어마어마한 상처의 무게를 엄마와 오빠에게 또 지게 만든 것이다.
“그래도, 이재신.
이게 내 죄라는 거 안다.
약한 나라에서, 힘 없는 왕이라서, 그런 거라는 거, 알아.
그래도, 난 이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은, 더 이상 보지 않을 거다.
적어도 형 죽음 하나로 끝나야 해.
그래, 넌 열받겠지. 아무 것도 몰랐으니까, 바보 취급 당한 거 같겠지.
그래도 난 감사한다. 니가 기억을 잃어서, 그렇게 넌 살 수 있었어.
그래서 난, 너도 지키고, 은시경도, 저 답답한 놈도 지킬 수 있었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런데, 나도 모르겠어. 너무 화가 나.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모르겠어.
너무 잔인하잖아.
내가, 그래 내가 잘못한 일이야.
큰 오빠도, 나 때문에..........아무리 그랬다고 해도, 나 때문이야.”
“이재신!!!!! 너 지금!!!”
“아니야. 맞아.
근데 말이야. 너무 가혹해.
내게만, 너무 내게만 최악의 것들이 몰려오잖아.
내 죄가 큰 거 아는데, 너무 잔인하잖아.
내 손으로 큰 오빠...흑....죽게 하고,
절벽에서 떨어져서 죽을 뻔하고,
아니, 그 때 죽었으면 더 좋았겠지.
근데 살아버렸어. 하반신 마비가 돼서 살아버렸다고........
그런 구질구질한 삶 속에서 또, 한 남자를 사랑했네?
근데 그 남자도, 또 죽어버려.
그리고는 사랑했다고, 영상 하나 남기지.
그래, 나 아까 은시경 씨 만나서 화냈어.
내가 그 사람 좋아했는지 어떤지 난 몰라. 전혀 기억 안나.
근데 그 얘기만 들어도 너무 화가 났어.
그 사람 잘못 아닌 거 아는데, 정말 너무 화가 나.
난 뭐야? 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야?
왜 이렇게 잔인해?
그래, 나 아무 것도 기억 안나.
근데, 이렇게 듣기만 해도, 가슴이 무너져.
내가.....그 때 살 수 있었을까?
내 죄가, 너무 큰 걸까?
용서받을 수 없을 만큼........그런 거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죽어버려.
왜 이렇게 세상의 모든 불행이.....내게만 있는 거지? 응? 오빠?”
“재신아!!! 아우씨~~~아 진짜......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왜 니가 용서를 못 받아?
니가, 뭘 잘못했는데?
야 임마, 내가 너 어떻게 살렸는 줄 알아?
그날 밤에, 형이 찾아왔어.
내 꿈에서....형이.......너무 많이 울었어. 임마!!!
형이 널 탓할 거 같냐?
너 같으면 그러겠냐? 어?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스러우면 좋겠냐고?
그러고 나서 너, 기억 잃었어.
난 임마, 형이 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고통 받지 말고 살라고........
힘겨우니까, 그렇게 힘들지 말라고,
웃고 살라고, 다 괜찮다고 말이다! 임마!
살아남은 자들의 죄책감 따위 벗어버리라고 말이다!!!”
그래, 살아남았기 때문에 죄인이었다.
그 고통을 오롯이 지니고 살아야 하니까, 그러니 죄인이다.
살아남아서 죄인이니, 그 고통 느끼지 말라고,
재신이의 기억을 가지고 가신 거다.
적어도 하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신다.
“한 가지 더 얘기해 줄게.
그 밤, 형이 널 살렸고, 니가 은시경을 살렸다.”
“뭐?”
“은시경, 병원에서 뇌사라고 얘기했었다.
그 자식 수술을 아무리 해도, 깨어나질 못해서, 의료진들이 그러더라.
지금 잡고 있는 건, 전하의 이기심이라고.
어서 장기이식으로 다른 사람들 살려야 한다고........
그랬던 놈이, 그렇게 6개월을 거의 죽어가던 놈이,
니 얘기에 일어났다. 그 놈이 그런 놈이야.”
“무슨 소리야?”
“그 날도 가망 없다는 얘기를 듣고, 그 놈한테 갔었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미국으로 날아갔었어.
그리곤 울었다. 그 놈 앞에서.........
너, 하아......손목 그었다고, 일어나라고, 너 때문에 재신이 죽겠다고..........
근데, 그놈이 깨더라. 울더라. 그 놈이.
겨우 손가락 하나 움직였는데, 그 놈이 그렇게 펑펑 울더라.
처음 총맞았을 때도 그랬어. 멈춰 있던 심장이 니 이름 듣고 뛰었어.
난, 정말 모르겠다. 니들.
솔직히 말리고 싶은 것도 있어.
겁나서. 뭐가 그렇게 무서운 사랑도 다 있는지.
근데, 너들 둘, 나도 모르겠다.”
“오빠...난....난.....정말.........”
“재신아, 그냥 편하게 생각해.
서로를 살려주는 거까지가 너희 인연일 수 있어.
그러니까 힘들면, 놔도 돼.
기억 안 해도 돼.
그냥 거기까진 거야. 그러니까 힘들어 하지 마.
너, 마음 가는 대로 해. 그러면 돼.”
재하가 무릎을 꿇고는, 오열하는 재신을 안아 준다.
재하에게도, 재신에게도, 그리고 시경에게도, 너무나 고통스러운, 그러나 또한 묵은 고통을 꺼내어 드러내야 했던, 그래야만 했던 날이었다.
6
제주 평화 포럼 당일.
그러나 결국 제주 포럼은 취소되고 말았다.
어쩌면 다행일 수도 있었다.
재신이의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재활훈련도 가지 않고, 하루종일 방에만 쳐박혀서는 나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궁중실장님은 그런 재신이 너무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억지로 재신을 독려해서 잠시라도 산책을 하도록 떠밀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노을이 아름다워서 나가고 싶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 나가면, 그나마 사람들을 덜 마주칠 것 같기도 했다.
동욱이 빈 휠체어를 밀고, 재신은 스스로 목발을 짚으며 후원을 돌았다.
후원은 조용했다.
천천히 걷는 그 길이, 늘 재신에게 위로를 주었다.
늘 이 길 위에서 위로를 받았다.
후원을 거닐면,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누군가가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괜찮다고.........
나의 죄책감을,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을,
누군가가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공주님, 무슨.....일 있으세요?”
“무슨 일?”
“아무 말 없이 하루종일 방에 계시다가, 바로 이쪽으로 오시면, 분명 무슨 일 있으신 거잖아요.”
동욱은 아는 체를 한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과도 1년이다. 그러니 당연히 나를 알 수밖에 없다.
“내가, 그랬나?”
“그럼요. 늘 그러셨어요.
답답하실 때, 속상하실 때, 재활이 잘 안 되실 때, 늘 그러셨어요.”
“여기.......이상해요. 여기에서 늘 위로를 받아요.”
“다행입니다.”
“응? 뭐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 보니, 좀 괜찮아지신 거 같아서요.
솔직히 어제는 말씀도 못 붙이겠더라구요.”
“에이...동욱씨가 그럴 리가 없지. 풋.
잘만 떠들더만........”
“와~ 공주님, 이제 중상모략까지! 이러시면 안 되죠.
제가 아무리 공주님이 좋아도, 확실히 할 건 해야 되는 거죠.”
“아, 진짜......이 사람!! 진짜 왜 이래요?”
“어!!!”
어느 덧 투닥대며 늘 앉던 벤치까지 왔다.
그런데 갑자기 동욱이 놀란 듯한 소리를 낸다.
동욱을 바라보느라 앞을 보지 못했던 재신이 돌아본 그곳에 그가 서 있었다.
그가 벤치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근위대장님!”
동욱이 부르자, 그도 이쪽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도 나를 보고 놀란 듯하다.
나는 바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
“나오셨습니까?”
“네. 돌아가던 참이에요. 가요, 동욱 씨.”
“예? 공주님, 잠시 여기 앉으셔야죠? 여기 쉬셨다가 다시 가셔야.....”
“아니요. 오늘은 그냥 바로 들어갈래요.”
동욱은 늘 하던 대로 하지 않는 내가 이상한지 자꾸만 쭈뼛거린다.
목발을 짚고 다시 몸을 돌리려는데, 그의 낮은, 그러나 조금은 한숨이 섞인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들어가겠습니다. 여기에서, 쉬십시오.”
그가 내게 목례를 하고는 돌아선다.
나는 또다시 그를 외면했다.
그의 떨리던 목소리도, 그의 낮은 한숨도, 모두 외면했다.
그러면서 무겁게 떨어지는 마음을 추스렸다.
뭔지 모르겠지만, 뭔가가 자꾸 목 아래에서 올라오는 것 같다.
울컥하는 느낌이, 자꾸 올라온다.
왜 이렇게 뭔가가 서러운지, 뭐가 이리도 억울한지, 나도 모르게 자꾸만 울컥해 온다.
“이재신!!!!!”
그 순간 나를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어? 상우 오빠? 뭐야? 어떻게 온 거야?”
“제주 포럼 취소돼서 바로 서울로 왔다.
재하도...아니지 국왕전하도 뵙고, 우리 공주님도 보고.”
“응..응......”
“왜 그래? 재신아? 너 아프다더니, 얼굴이 왜 이래?”
그 말이 신호가 돼 버렸다.
그가 다정하게 내 팔을 잡아주는 손에 그대로 무너져서 그의 품에 안겼다.
그의 품 안에 안겨서 나도 모르게 울었다.
“무슨 일이야? 재신아.........정말 재하 말대로 많이 아팠나 보네.”
오랜 사람을 보는 게 좋았나 보다.
마음껏 어리광을 부려도 되는 사람, 내 어린 시절까지 다 아는 사람을 보고 나니, 자꾸 마음이 의지가 되었나 보다.
그래서 그만 그의 품에 안겨 울어버렸다.
뭐가 그렇게 서럽다고, 뭘 그렇게 잘 했다고, 이렇게 헤프게 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궁인들이 볼 수도 있다 싶으니, 갑자기 정신이 들기도 한다.
“왜 그래? 걱정 되게......”
상우의 걱정스런 눈빛을 받으며, 그렇게 눈물 사이로 헤~웃어보였다.
어린 소녀로 돌아간 듯이 나는 오빠에게 의지하고 싶었나 보다.
“미안! 아무 일도 아니야. 그냥 마음이 약해져서, 그랬나 봐.”
“들어가자. 너 몸이 싸늘해.
아팠다며, 아픈 애가 이렇게 돌아다녀도 돼?
휠체어 타자. 내가 밀어줄게.
그래도 되죠?”
상우가 동욱을 향해서 양해를 구한다.
동욱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동욱 씨, 나 오빠한테 밀어달라고 할게요.
이제 퇴근해요.”
동욱은 입술을 깨물더니 고개를 숙이고는 저 앞으로 걸어갔다.
상우는 자신의 자켓을 벗어서 재신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재신의 눈에 남아 있는 물기를 손으로 닦아준다.
“우리 꼬맹이 공주님, 울지 마. 응?”
나는 그 손길이 좋아서, 10여년 전, 한없이 어리광을 부리던 소녀로 돌아간 거 같아서 고개만 끄덕댄다.
그가 내 뒤로 가서 휠체어를 밀어준다.
그에게 고맙다며 고개를 돌리다가, 노을 비치는 숲 쪽에서 그 사람을 보고야 말았다.
내 쪽을 아프게 바라보는, 나만을 오롯이 바라보는 그 남자를 보고야 말았다.
두 주먹을 꽉 쥐고, 너무나 고통스럽게 바라보는 그 남자를, 나는, 보고야 말았다.
그리고는 나는 내 울음의 정체를 알고야 만다.
운명의 굴레라면, 끊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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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또 한참 새벽에 올리게 되네요.
오늘은 34장입니다. 정말 계속 기록 경신이네요.
더 웃긴 건, 제가 오늘은 여기에 16장을 더 썼다는 거지요.
뒷부분을 역시 먼저 써놨는데, 그 부분은 결국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제가 사실 쓰면서, 공주님 때문에, 재하 때문에 좀 많이 울었습니다.
쓰다가 울다가 계속 그러네요.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11회, 힘드시다고 욕하시면, 욕 달게 받겠습니다.
마음껏 욕하셔도 됩니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ㅠㅠㅠㅠ
공주님 얘기 꼭 털어내고 싶었습니다.
보면서 너무나 속상했던 거라서, 그걸 공주님의 목소리로 얘기하고 나니,
저도 펑펑 울게 되네요.
사실 제가 19회 20회를 안 봤기 때문에 그나마 견디는 거지만,
그걸 다 봤다면, 영상편지가 너무 잔인할 것 같았습니다.
공주님은 온 세상의 아픔을 다 안고 가시는 것 같아서요.
공주님의 마음에 닥빙되고 나니, 정말 속상하다 못해 원통하더라구요.
그래서 11회에서는 그런 공주님의 마음을,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재하와 재신의 대화에서도 진짜 펑펑 울게 되더라구요.
재신에게 해주는 재하의 이야기는 살아남은 자가 견뎌내야 하는 슬픔이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누구나 그 힘든 무게는 견뎌내고 있으니,
꼭 살아야 한다고, 그 말을 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을 생각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꼭 살아야 한다고,
꼭 견뎌내야 한다고,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이렇게 자신의 삶을 견뎌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얘기 같았습니다.
살아야 한다구요. 반드시 살아야 한다구요.
서로를 위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새벽에, 펑펑 울고 났더니, 저도 참 굉장히 센치해졌나 봅니다.
11회 욕하시면 달게 받겠습니다.
그래도 오늘 하루, 열심히 살아냅시다.
삶은 권리이기도 하지만, 의무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서로를 위로하며, 서로를 격려하며, 또 서로를 위해서,
그렇게 살아주세요.
저도, 그렇게 열심히 살겠습니다.
+1) 오늘 배경음악은 <나의 사랑 수정>은 yeon님께서, <끝사랑>은 동현홀릭님께서 추천해주셨어요.
내용과 맞는 듯해서 올려보았습니다.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__)
+2) 참 재신이 얘기하는 MHC 면역반응에 대한 얘기는 Daum EBS 지식채널 <남과 여-끌림> 편에 나온 내용입니다. 재미있더라구요.
+3) 혹시 댓글 다시면, 지우시지 마시길......댓글 있다가 지워지면, 상처받는 족속입니다. ㅠㅠㅠㅠ
+4) 제 글이 곧 끝나지 않을까 걱정하시는 님들이 많으신데요. 이 글 꽤 오래 연재될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예전 제 글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꽤 오래 진행됩니다. 이 글도 그럴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아직 멀고도 멀었다는 말씀...드립니다.
+5) 냐미님....생일 축하드려요. 7월 5일에 꼭 보고 싶다는 말씀도 달리는 데 큰 의무감이 됐다능....ㅠㅠㅠㅠ
+6) 오늘 찡갤 조공갑니다. ㅋㅋㅋㅋㅋㅋ 조공 횽아들 홧팅~~
7월 6일은 뷰갤 감성 조공!!! 역쉬 조공 횽아들 홧팅~~
+7) 참, 갤에서 온 횽아들!!! 갤처럼 해죠라.....갑자기 존대하면, 나님 손발이 오글오글...ㅋㅋㅋㅋㅋ 개럴들은 개럴답게...ㅋㅋㅋㅋㅋ
그저 편하게 해 주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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