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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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적 - 다행이다
2) 더킹ost - Lovely yours
1.
“참, 은시경! 너 어젠 재신이 방에 들어갔다며?”
“예? 예.”
“궁엔 비밀이란 없어.”
“알고 있습니다.”
“뭐, 어쨌든 이건 궁중실장이 직접 나한테 보고한 거니까,
다른 궁인들이 아는 건 아닌 것 같고.
어쨌든 조심해.
재신이 대한민국 유일한 공주다.”
“그렇게 강조하지 않으셔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은시경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분명 내 말에 욱했겠지.
“그거 아냐? 젤 억울한 건, 소문은 소문대로 났는데, 실속은 없는 거야.”
“예?”
“실속 없이, 아무 것도 한 것도 없는데, 소문만 나는 거.
그게 제일 억울한 거라고.”
“무...무슨....말씀이신지?”
“아니, 은시경 니가 그랬다는 게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렇다고.”
여전히 은시경은 전하의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다.
재하도 그런 은시경을 파악해서인지 “내가 저 답답이를 데리고 뭔 얘기를 하겠냐”며 한숨을 내쉰다.
“아, 근데 동욱이 녀석, 출장 보내놨더니, 괜히 귀찮아졌어.”
“예?”
“나흘 뒤에 있는 제주 평화 포럼, 재신이가 가기로 했는데, 이 자식 이거 너무 열심이야.
재신이 이 놈, 연설문 나한테 검토해 달라고 보내기까지 한다.
이놈이 나를 일시키네. 참 내.
봐주긴 봐줬는데, 재신이한테 직접 와서 가져가라고 하기도 그렇고.
다른 근위대원 시키기도 그렇고.”
“제가 갖다드리겠습니다.”
“근위대장인데, 내가 너무 아무 일이나 막 시키는 것 같잖아.”
“아닙니다. 전하 보필하는 게 제 일인데요.”
“흐음.........그래? 그렇단 말이지?”
“예?”
재하는 그저 운만 띄워본 거였다. 궁에 널린 게 근위대원이요, 궁인이다.
누군들 시켜서 안 될 사람이야 있을 수가 없다.
재하는 시경을 지금 꼭 재신이에게 보내야만 이유가 있었다.
이 녀석의 반응을 보고 싶다는, 그런........이유.
“진짜, 그 이유야?”
“무슨 말씀이신지?”
“너! 내가 고맙지?”
“예?”
“내가 재신이 공식적으로 만날 수 있게 해 주는 거잖아. 아니야?”
“그..그게...아니라......물론 뵈면 좋긴 하지만...그렇다고 꼭 그 때문은 아니고......”
그의 충신은 또다시 재하가 아무렇게나 던진 미끼를 덥석 물어준다.
그러면서 그렇게 긴장하면서 또 할 말은 다 한다.
보면 좋다니.....어떻게 저렇게 자신의 감정도 직구로 던져버리는지.
2
똑똑......
시경은 재신의 방을 두드렸다.
“네.”
조금은 들뜬 듯한 공주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열다가 시경은 순간 멈칫 했다.
공주님의 방 전체가 붉게 빛나고 있었다.
온 방 가득 붉은 장미로 가득 차 있었다.
“어? 은시경 씨, 아니 근위대장님이네요. 여긴 웬일이에요?”
“전하께서 전해주라고 하신 게 있어서 왔습니다.”
“아, 그래요? 어! 잠깐만요. 전화가 와서. 여보세요?”
<공주님!>
“어, 뭐야? 상우 오빠? 이게 다 뭐야 진짜.......
나 깜짝 놀랐잖아. 웬 꽃을 이렇게 많이 보내?”
상우라는 말에 시경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엄청난 꽃들도 그 사람이 보낸 듯했다.
<이제 괜찮은 거야? 이제 안 아파?>
“응. 응. 하나도 안 아파. 사실 어제부터 다 나았는데, 기운 없어서 누워 있었어.
오늘은 완전히 괜찮아졌는데? 근데 어떻게 알았어? 나 아픈 거?”
<후유~~ 다행이다. 어떻게 알긴? 공주님께 아무리 연락을 해도 돼야 말이지.
나, 차인 줄 알았다.>
“무슨 소리야? 차이다니?
미안해 오빠. 몸살 때문에 전화기도 꺼놓고, 계속 잠만 잤어.
오빠 계속 전화했었구나.”
<괜찮아. 결국 너랑 전화 안 돼서, 재하한테 전화했지.
우리 공주님이 날 피하는 거 같다고, 나 싫어하는 거냐고 전화했더니,
재하가, 너 아프다고 그러더라.>
“미안......근데 나 이제 괜찮아. 걱정 안 해도 돼.”
<나, 너 보러 가면 안 되지?>
“뭐? 보러? 안 돼, 안 돼! 기자들 난리날 거야.”
<하아...알아. 그냥 그렇다고. 너 아프다 그러니까.......>
밝게 말하던 상우가 한숨을 쉬었다.
그런 상우의 마음이 전화기를 타고 들어와 재신의 마음을 미안하게 만든다.
그리고 고맙기도 하다.
정말로 자신을 생각해 주고 있구나 싶어서 힘이 나기도 한다.
“아, 어쨌든 꽃 진짜 고마워. 내 방이 정원이 됐어. 빨간 정원. 큭큭”
<너 예전에 빨간 장미가 정열적이라 좋다 그랬잖아. 그래서 스페인도 좋다고.
아직도 그래?>
“흐응...내가 그랬구나....풋, 오빠 대단하다. 그런 것도 다 기억해?”
<당연하지. 누가 한 말인데. 공주님이 얘기한 건, 다 기억하고 있어.>
“와~ 감동적이다. 오빠.”
<재신아........>
“응?”
<보고 싶다.>
“...................”
상우가 갑작스럽게 던진 보고 싶다는 말이 재신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뭐라고 대답할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기도 하고, 조금은 떨리기도 하고, 예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도 든다.
예전에......여고시절........그렇게 듣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장난스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던 오빠였는데, 방금 상우 오빠의 말은, 귀여운 여동생에게가 아니라, 정말 자기 여자에게 하는 말인 것 같다.
<왜 아무 말이 없어?>
“응? 아......응.......”
<넌, 안 보고 싶구나.>
“어? 아니야, 아니야. 나도 보고 싶지.”
<진짜지?>
“그럼. 진짜야.”
재신은 상우의 말에 미안해서 얼른 보고 싶다고 말하지만, 이내 얼굴이 뜨거워진다.
세상에...보고 싶다니.....
옆을 흘낏 보니, 꽃을 정리하던 궁인들이 놀란 듯 자신을 쳐다보다가, 서로 눈짓을 하며 밖으로 나간다.
아!!!
그리고 하필이면 그 사람을 봐버렸다.
아, 바보 같이. 이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 내 전화 통화 다 들었을 텐데......
이재신!! 진짜!!!
갑자기 재신의 마음이 긴장되기 시작한다.
"아...오빠, 고마워. 덕분에 진짜 기분 좋아졌어.
다음에 만날 때, 내가 꼭 맛난 거 살게."
<어~ 이재신 뭔가 마무리하는 기분인데?>
"어? 어.......주변에 사람들도 있고......"
<아, 알았어. 곤란하구나. 공주님 주변에 늘 궁인들이 있는 건 당연한 건데.....
알겠어. 오늘은 여기까지.>
"응. 고마워."
<그런데, 그래서 밥은 언제 살 건데?>
"어..어?? 아....그게..."
<이번 주엔 되는 거야?>
"어? 아, 안 돼. 이번 주는 스케줄이 빡빡해서, 게다가 좀 이따 평화 포럼에도 오빠 대신 내가 가야 해서, 일이 좀 많아."
<뭐? 평화 포럼? 혹시 제주도에서 열리는 거?>
"응. 오빠도 알아?"
<I got it! 됐다! 알겠어. 푹 쉬어. 우리 공주님!!!!>
"어? 오빠? 그럼 약속은?"
<난 이미 잡았는데?>
"어?"
<저번에도 말했듯이 다른 남자들한테 눈길 주지 말고, 어서어서 나아. 우리 공주님.
나중에 얼굴 보고 얘기하자.>
"응. 그럴게."
갑작스럽게 밝아진 상우가 의외로 빨리 전화를 끊었다.
뭐지? 제주도에 오겠다는 건가? 미국 있는 사람이?
혼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시경과 눈이 마주쳤다.
아, 맞다. 이 사람 있었는데.......
시경을 인식하자, 재신은 다시 긴장이 된다.
아무래도 어젯밤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 있는 듯했다.
“은시경 씨, 무슨 일로?
아, 맞다. 오빠가 뭐 갖다 주라고 했다 그랬죠?”
“예. 여기”
재신에게 파일을 넘긴다.
재신은 몇 장 넘겨보더니, 한숨을 쉰다.
“뭐야? 새로 다시 하라는 거네. 에휴.....”
슬쩍 본 파일은 온통 붉은색이었다.
“근데, 은시경 씨! 왜 이런 걸 은시경 씨가 가지고 와요?”
“예?”
뭔가 불만인 듯한 재신의 목소리에 시경은 의아해진다.
뭔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건가?
“아니, 이거 진짜 너무 하잖아요. 왜 이런 일을 은시경 씨에게, 아니 근위대장님께 시켜요.
오빠 진짜 웃기네. 은시경 씨 이런 거나 할 위치가 아닌데........”
시경은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할 지, 아니면 민망하다고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재신의 입장에서는 시경에게 미안했다.
예전에 자신의 호위를 했다고는 해도, 지금은 엄연한 근위대장이다.
그런데 왠지 재하가 그런 시경에게 함부로 하는 것 같아서 자신이 화가 난다.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인지도 알지 못한 채, 오빠가 그저 너무해서 그런 거라고 재신은 자기 자신을 설득하고 있다.
“이런 거....아닙니다.”
“네?”
“제가 원해서 왔습니다. 전하께서 시키신 게 아니라.”
“그래도.......”
“제가, 제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공주님......괜찮으신지........직접 뵙고 싶어서........”
재신은 이 사람의 직구 같은 말에 쿵....하고 심장이 떨어진다.
재신은 생각한다.
이 사람은 정말 엄청난 선수거나, 아니면 진짜 충신일 거라고.
아마 후자겠지만, 이 때문에 오해도 많이 받을 것 같다.
“몸은......괜찮으십니까?”
“네? 아, 네. 괜찮아요. 이제 다 나았어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재신은 예쁘게 웃어준다. 그런 그녀를 시경은 멍하니 바라본다.
“근데요. 은시경 씨.”
“예...예?”
“은시경 씨야 빈 말을 할 리는 없겠지만,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여자들 오해해요.
아까 그 말.......선수들이 하는 말인 거 알아요?
여자들한테 작업하는 멘트? 그런 거 같다구요. 큭큭.
나야 은시경 씨가 워낙 충신이라는 걸 아니까......괜찮지만요.”
“공주님.......”
또 낮게 깔리는 저 목소리.
“저, 아무에게나 그런 말 하는 사람, 아닙니다.”
“네?”
“괜찮아지셨다니 다행입니다.
뵙고 나니 안심이 됩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혼자서 할 말만 다 하고 나가버리는 시경을 재신은 멍하니 바라본다.
저 남자, 지금 그것도 작업 멘트인 거.....알까?
알고 보면, 저 남자, 진짜 선수인 거 아닐까......
3
다음 날 오후에 재신은 일정표 정리한 거와 새로 쓴 연설문을 가지고 재하의 집무실을 찾았다.
“어? 공주님께서 직접 발걸음을 하셨네?”
“그래. 아예 직접 전하께 사사 받으려고 내 발로 왔지.”
“근데 뭐가 이리 당당해? 가르침을 얻겠다는 자세가 아닌데?”
“시끄럽고 이거나 봐줘.”
재하는 재신이 내민 파일들을 꼼꼼하게 살핀다.
비서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재하는 의외로 굉장히 꼼꼼했다. 늘 자신이 직접 확인하고는 했다.
재신은 이럴 때의 재하가 낯설다. 허허실실거리는 오빠가 이때만큼은 뭔가 대한민국 국왕처럼 보인다.
늘 자신을 감추고 사는 사람이다. 대한민국 국왕인 자신의 오빠는.
“괜찮네. 이대로 하면 되겠다. 고생했어.
중간 중간마다 중국, 일본 쪽 대표들 신경 좀 쓰고. 알지?
너, 잘하는 거 있잖아. 이재신 공주표 미소 뽝~ 띄어 주는 거. 알지?”
“걱정 마. 장사 하루 이틀 해?”
“그렇기는 하다. 이 장사 좀 쉬고 싶다. 진짜.....”
“근데, 오빠 은시경 씨한테 왜 그래?”
재신의 입에서 은시경 얘기가 나오자 재하는 뒤로 재꼈던 몸을 바로 세운다.
눈에는 이미 흥미로움으로 반짝반짝 빛난다.
오호....드디어 재신이가 은시경을 입에 담았다?
“왜 그렇게 막 대해?”
“무슨 소리야? 내가 은시경을 막 대하다니?”
“솔직히 그렇잖아. 다른 사람들 있는 데서도, 근위대장님께 ‘은시경’ ‘은시경’ 거리고,
그런 파일 심부름이나 시키고, 나 호위나 막 시키고.
진짜 너무 하잖아. 예전에 계셨던 근위대장님 생각해 봐.
오빠 태도가 너무 차이 나잖아.”
“예전에 계셨던 분이야, 나보다도 연배가 높으셨고,
또 은시경은 사실 너무 일찍 근위대장 된 거지.
근위대장이 공석이라 그런 것도 있고. 상황이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것도 있고.
근위대 전체를 총괄해야 할 사람은 필요하고, 사람은 없고.
어쨌든 임시직처럼 있는 거니까, 예전 근위대장님과는 경우가 달라.
야, 근데 너 이상하다.”
“어? 어? 뭐가 이상해?”
“왜 그렇게 은시경 신경 쓰는 거야?”
“어어? 아니, 신경이 아니라, 내가 미안해서 그러지.”
재신은 재하의 집요한 시선을 피한다.
호오......그러셔?
재하는 슬슬 흥미로워지기 시작한다.
“은시경 어때?”
“응? 뭐가?”
“그냥 어떠냐고?”
“어떻긴 뭐가 어때? 오빠의 충성스러운 근위대장이지. 목숨까지 바쳤다며?”
“그거 밖에 없어?”
“무슨 소리야?”
재신은 자꾸 캐묻는 재하가 이상하면서도 불편했다.
“은시경...얘기 들은 적 있지?”
“궁인들이 떠드는 건 들은 적 있어. 왜?”
“그 자식, 왜 돌아왔는지도 들었냐?”
“그......첫사랑 때문에 왔다는 얘기?
고백...인가 뭔가 하겠다고?
궁인들이 떠드는 거 듣긴 했는데, 그거, 사실이야?”
“진짜야.”
“의외로 로맨티스트네.”
“그 놈다운 거지. 그 놈이 달리 답답이겠냐?
한 길밖에 못 보니까, 답답이지.”
“어? 오빠도 그 사람, 답답이라 불러?”
“이재신, 너도 그 놈 답답이라고 불렀다. 내가 알기론.”
진짠가 보다.
내가 그 사람한테 답답이라고 불렀다는 게, 진짠가 봐.
내가......큰오빠한테처럼 그랬나 보다.
요즘 상황을 보면, 그 사람한테 그랬을 것 같기도 하다.
묘하게 닮았다.
강직한 듯하면서도 따뜻하고, 변하지 않는 소나무처럼 늘 같은 자리에 서 있을 것 같고,
한번 마음을 박으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 같고..........
정말, 큰오빠........닮았구나. 이 사람.......
묘하게 가슴이 저릿해 온다.
큰오빠......보고 싶다.
“근데, 근위대장님, 심장이, 많이 안 좋아?”
“심장?”
“저번에 오빠가 그랬잖아. 심장에 무리 오면 안 된다며?”
심장에 무리? 아아...그거?
재하는 또다시 이 상황이 재미있어진다.
“아, 그랬지. 은시경 심장 안 좋아.
심장 이식만 3번이나 했어.”
“그러면, 무리 오면 안 되는 거야?
지금도 많이 안 좋아?”
재신은 걱정스럽다.
뭔가 무리하고 있는 듯해서, 그 사람이 신경 쓰인다.
재하는 그런 재신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다.
“그 자식이 좀 무식한 구석이 있지.
자꾸 스트레스 받고 심장에 무리 오면 안 되는데,
이 놈 인생 자체가 무리니까.......
지가 좋아하는 여자한테 고백하겠다고 겨우 살아 돌아와서는,
그 말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고만 있으니, 심장이 무리하지 않고 배기겠냐?”
“고백하면 되잖아. 왜 안 해?”
재하는 잠시 재신을 쳐다본다.
고백하면, 어떻게 될까......잠시 생각해 본다.
저 녀석.....괜찮을까......
“뭔가...사정이 있겠지.
어쨌든 너도 은시경한테 잘해줘라.
그 자식........많이 아프다.”
“그렇게..... 많이 아파?”
“여러모로 말이야. 몸도 그렇지만, 문제는 마음이.....더 아픈 놈이야.”
재하의 목소리에서 걱정이 묻어나온다.
재신은 느끼고 있었다.
정말로 오빠가 은시경을 아끼고 있다는 것을.
정말 많이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오빠가 이렇게 마음을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 대상이 은시경이라는 사람이라서 다행이라고.
그리고 그 사람이 살아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라고.
4
“전하, 은시경입니다.”
“어. 들어와.”
은시경이라는 말에 재신은 순간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은시경 얘기를 한 것도 민망하다.
“공주님도 계셨네요.”
“네.”
재신은 당황하는 모습이 들킬까봐 최대한 짧게, 공식적으로 대답한다.
재하는 그런 재신이 흥미롭다.
호오....아까까지는 그렇게 걱정하더니......
유리 멘탈인 자신의 충신은 또 저 모습에 상처받겠고......
재하의 눈에는 보였다.
재신을 발견하고서 순간 설레던 눈빛을, 그리고 딱딱한 재신의 대답에 급속도로 실망하던 눈빛을......
아, 내가 진짜, 이것들을 나노로 분석해야 되는 거냐고!
“말씀중이시면, 나갔다가 다시 오겠습니다.”
“아니야. 별 얘기 없었어. 무슨 일이야?”
“지시하셨던 대로 조정한 근위대 배치표입니다.”
“그래, 이대로 하면 되겠네.
재신이 넌, 다른 얘기 없지?
제주 포럼은 아까 그대로 하면 되겠더라.
니가 알아서 더 잘하겠지.
오천만의 ‘우리 공주님’이니까.”
“근데........”
재신이 할 말이 더 있는 듯 머뭇거린다.
“왜? 할 말 있어?”
“나, 오빠한테 부탁할 거 있는데.......”
절대 그런 녀석이 아닌데, 또 저렇게 내가 가장 약해지는 표정을 짓는다.
여튼 재신이 이 놈은 선수다. 선수.
지가 원하는 거 또 얻어내려는 술수.
“에휴.....뭐야, 말해 봐.”
“있지. 오늘 별똥별이 엄청 떨어진다네.”
“그.래.서?”
“가고 싶어서........”
“또, 거길 가겠다고?
너, 한동안 안 그러더니, 또 시작이야?”
“동욱 씨는 언제 와?”
“내일은 돼야 오지. 내일부터 궁으로 출근이야.”
“그럼, 염동하 씨는? 염동하 씨도 바빠?”
“동하, 그 자식도, 요즘 나랑 일한다고 정신없다.”
“그래? 그럼.....안 되겠네.”
재신은 한숨을 쉰다.
가고 싶은데......
재하는 쟤가 또 왜 저러나 싶다.
괜찮다가, 한 번씩 저럴 때가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답답한 건지, 뭔가 풀리지 않는 일이 있을 때면,
그곳에 가겠다고 했다.
요즘, 고민되는, 답답한 뭔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괜찮으시면.........”
조용히 듣고만 있던 시경이 입을 뗐다.
“제가, 모셔도 되겠습니까?”
“네? 은시경 씨가요?”
“성곽........말씀하시는 거라면,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저, 아니에요. 은시경 씨는 근위대장님인데, 일도 너무 많으시구요.
이런 일까지 부탁 못해요.
오빠 일만도 바쁘신 분인데, 제가 자꾸 귀찮게 해드리는 것 같아서, 죄송해서 안 돼요.”
“제가, 싫으십니까?”
뭐야, 이 남자.
싫다니......
재신은 당황해서 재하를 흘낏 본다.
재하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입에는 이것 봐라 싶은 웃음이 배여 있다.
“그게 아니시라면, 제가 공주님......모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 남자는 진지했다.
이 상황에 재하가 없다면, 이건 뭔가 애매한 분위기였다.
내가 부탁하는 상황인데, 그가 부탁하고 있었다.
마치, 나와 같이 가고 싶다고, 데이트 신청이라도 하는 것처럼, 애매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거절할 수도 없었다.
거절하면, 정말 이상해지는 상황이었다.
아까까지 분명 누구라도 필요하다고 그래놓고서는, 은시경 씨는 싫다고 하면, 이건 진짜 데이트 신청에 대한 거절이 되고야 말았다.
“고마워요. 그럼, 부탁할게요.”
머리가 뒤숭숭해서 별이나 보러 가려는 건데, 이건 되려 더 복잡해질 것 같다.
재신이 나오는데, 뒤에서 재하가 한 마디 던진다.
“둘이, 데이트 잘 해라.”
“오빠!!!!!!”
뒤로 돌아보며 재하를 노려보다 얼핏 스친 시경의 얼굴은 이미 귀까지 붉어져 있었다.
재신은 얼른 고개를 돌리며 생각했다.
잘못 본 거라고.......창밖에 노을이 져서 그런 거라고 애써 마음을 다독였다.
정말......그곳에......뭔가가 있는 걸까.
재하는 성곽에서 분명 뭔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5
바람이 분다.
6월이라 낮은 덥지만, 밤은 더운 가슴을 식혀주고 있었다.
근위대원들은 성곽 아래 쉬라고 하고서는 재신과 시경만 성곽 위로 올라갔다.
재신이 목발을 짚고 가겠다고 했지만, 시경은 말렸다.
아무리 길이 잘 되어 있다고 해도, 거의 산을 타듯이 올라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재신에게는 무리였다.
결국 옥신각신하다 재신이 지고 말았다.
재신의 휠체어를 시경이 밀어주며, 성곽 위까지 올라갔다.
시경은 그 날 이후 처음이었다.
마치 그 날로 돌아온 것처럼, 아련해진다.
“나, 저기 올라가고 싶어요.”
시경은 묵묵히 재신이 성곽 위에 앉을 수 있도록 안아서 올려준다.
층계처럼 되어 있는 성곽이라, 옆에 난간에 기댈 수 있도록 재신을 앉혔다.
그리고는 자신의 자켓을 벗어서 재신의 어깨에 걸쳐주며, 시경도 재신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 나, 안 추워요.”
“며칠 전까지 몸살이셨잖아요. 밤기운은 여전히 차갑습니다.”
기분 탓일까. 재신의 귀에 시경의 목소리가 조금은 풀어진 듯이 들린다.
늘 딱딱하던 그의 목소리가 조금은 부드러워진 듯도 하다.
“자주, 오셨습니까?”
“네? 네. 가끔씩 왔어요.”
“별똥별 보면서, 소원도 비셨습니까?”
이상하다. 그가 의외로 먼저 얘기를 건다.
그러고 보니 신기하다.
이 사람과 안 맞는 이야기인 듯하다.
“어? 은시경 씨는 왠지 미신이라고 그런 거 안 믿을 거 같은데,
은시경 씨도 별똥별 보면서 소원, 빌었어요?”
“미신이라서 안 믿습니다.”
“그런데요? 왜?”
“아.........누가 제게 그래야 한다고 얘기했었거든요.”
“......혹시.....예전에 좋아한다는 그 사람?”
시경이 약간 놀라는 눈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혹시 은시경 씨도 여기에서.......?”
“예.”
아 그랬구나. 어쩌면 그래서 오고 싶었구나. 이 사람.
괜히 마음이 짠해진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이상하게 오해만 한 것 같다.
이재신 요즘.....정말 문제가 많다.
그는 앉아 있으면서도 군인이다.
군인답게 각잡은 채로, 주먹까지 쥐고 앉아 있다.
이 사람은 뼛속까지 군인인 것 같다.
흐트러짐 없이 내 곁에서 굳은 듯이 앉아 있다.
이상하게 그 자세가, 안정감을 준다.
흔들릴 것 같지 않아서, 늘 그곳에 있을 것 같아서, 늘 변함없을 것 같아서,
이 사람은 내게 그렇게 믿음을 줬었나 보다.
“은시경”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그렇게 나를 두렵지 않게 만들어줬었나 보다.
“별.....안 보십니까?”
“네? 네. 볼 거예요. 흠흠......”
너무 빤히 쳐다봤는지, 그가 눈치 채고는 한 마디 한다.
겸연쩍은 듯 괜히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재신은 고개를 돌려 하늘을 쳐다본다.
그러나 재신은 본 듯도 하다. 그가 아주 약하게 미소 짓던 것을.
“어어어어....와!!! 별똥별!!! 별똥별!! 빨리 빨리 소원! 소원 빌어요!!!”
호들갑을 떨며 은시경의 팔을 툭 치는데, 이미 은시경이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있다.
어, 이 사람 보게. 아까는 미신이라더니.......
재신도 황급히 눈을 감았다.
복잡했던 마음을 풀어내듯이 재신은 소원을 빈다.
그리곤 눈을 뜨곤 시경을 쳐다보는데, 시경은 이미 재신을 바라보고 있다.
찰나였지만, 그의 눈이 애잔하다.
“어? 벌써 다 빌었어요?”
“예..예.”
“뭐 빌었어요? 왠지 은시경 씨는 뼛속까지 군인이라, 군인스러운 소원 빌었을 것 같아요.”
“이번에는, 아닙니다.”
“네? 이번에는?”
“아, 아닙니다.”
“어쨌든 그런 거 아니라구요? 그럼 뭐예요? 얘기해 주면 안 돼요?”
“약속........지키게 해 달라고.......빌었습니다.”
“혹시.......좋아한다는 그 여자분.....한테 한 약속?
고백....하겠다는 거, 맞죠?”
“어떻게.....아십니까?”
“그러게요. 제가 어떻게 알까요?
아마 궁에 있는 사람들 다~ 알 걸요?”
“예?”
시경이 당황한 듯 침을 꿀꺽 삼킨다.
“풋~~! 은시경 씨가 인기가 많아서 그래요.
궁인들이 요즘 은시경 씨를 이리 저리 핥고 다녀서....
아, 이 말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열심히 뒷조사하고 다닌다구요.”
“....................”
“돌아와서, 그 여자분한테 고백.....했어요?”
시경은 고통스러운 듯 고개를 흔든다.
“그 사람에게 고백할 수가 없습니다.”
“왜요?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겼대요?”
“.............예.”
그의 대답이 고통스럽다.
재신의 마음도 덩달아 아파온다.
“그렇다고 어떻게 얘기를 안 해?
은시경 씨 살아 돌아온 건, 그쪽이 알아요?”
시경이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다른 반응도 없어요?”
“예. 그 사람에게도 사정이 있어서........”
사정이라.....
이 사람은 상대방 사정만 봐주다가, 자신은 속이 다 타들어갈 텐데.
그러다 보면, 자신만 죽도록 아파질 텐데.
“사실 내가 오랫동안 상담 받고 있거든요.
근데 상담에서 가장 중요한 게 드러내는 거래요.
계속 속에 담아두고 있으면, 치유될 기회조차 없대요.
밖으로 드러내는 그 순간 치유될 수 있다고 선생님께서 그러셨어요.
은시경 씨.....지금...속은 다 타들어간 거, 아니에요?”
“........................”
“깨어나서.....얼마나 재활한 거예요?
그 사람한테 살아있다고 보여주기 전까지...얼마나 버틴 거예요?”
“일 년 반...정도 됩니다.”
“그럼, 그 일 년 반 동안, 그 사람한테 고백할 생각으로 그렇게 버틴 거잖아.
그런데 그 사람한테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고......접겠다구요?”
“......................”
아무 말이 없다. 이 바보 같은 사람은 이 모든 고통을 자기 혼자 지고 갈 생각인 듯했다.
재신은 자기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지 모르겠다.
그 시간을 혼자 견뎌내었을 텐데.......
그 죽을 것 같은 재활을 견뎌내 놓고, 그 사람한테 말도 못하다니........
재활의 고통은 해 본 사람만이 안다.
재신은 자신의 가슴이 도리어 타들어가는 것 같다.
자신도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지 모르겠다.
마치 내 일처럼 마음이 아프다.
“안 돼요. 은시경 씨. 그러지 마요.
너무 그 사람만 생각하지 마요.
자기 자신도 생각을 좀 해요.”
재신은 이 사람이 안타깝다.
뭐가 이리도 생각이 많을까.
죽다 살았으면서, 그래서 그 사람 생각에 죽을 것 같은 재활 받았을 거면서......
근데, 그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고.....고백도 못한다고?
“은시경 씨, 그래도 고백해요.
그래야 은시경 씨, 가슴에 맺힌 거라도......조금은 풀릴 거잖아요.”
“그 사람이......부담스러울 겁니다. 제 마음.
이미....오래 전 일이니까.........기억도.......안 날 테니까.......”
“그런 게 어딨어요? 여자는...아니에요. 절대로...그럴 수가 없어요.”
“공주님.......”
“나 솔직히 그 여자분도 이해가 돼요. 그 여자분도 은시경 씨 죽은 줄 알았을 거잖아요.
그러니까...죽도록 괴로워하다가 다른 사람 만난 거겠죠.
그래도, 은시경 씨 그 사람한테 고백해야 돼요.
은시경 씨 자신을 위해서도, 그 여자분을 위해서도 반드시요.
은시경 씨........이렇게 내놓지 못하면, 평생 상처가 될 거예요.
아물 기회조차 없이, 상처만 더 깊어질 거예요.”
이 남자는 재신의 말에는 아무 대꾸 없이 앞만 본다.
입술을 꽉 다문 채, 얼굴은 고통스럽다.
재신은 마음이 아프다.
겨우 살아 돌아왔을 텐데......좋아하는 사람 만난다는 마음으로 억지로 그 지옥 같은 재활을 견뎌내었을 텐데....
이 사람에게도 기회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재신은 해서는 안 될, 오지랖을 펴고 말았다.
“은시경 씨, 그럼, 나한테 고백해 봐요.”
“예..예?”
재신의 갑작스러운 말에 시경은 놀라서 재신을 바라본다.
“아무리 마음에 병이 생겨도 은시경 씨가 병원에 갈 거 같지도 않고,
나한테 연습 삼아 해보라구요.
상담하는 것처럼, 그 사람한테 얘기하는 것처럼,
마음을 꺼내 봐요.”
“공..공주님...그게.......”
“알아요. 은시경 씨. 그런 말하는 것도, 다른 사람한테 얘기하는 것도 싫어하는 거.
그치만, 이러다 속에 있는 말, 단 한 번도 못하고 이렇게 고통만, 상처만 쌓이면 어떡해요?
나한테라도 연습 삼아 얘기해 봐요.
말에는 힘이 있대요. 입 밖으로 내놓은 말 때문에 은시경 씨가 용기를 내서 그 여자분께 가서 고백을 할지도 모르잖아요.
자신의 마음을 시험해 봐요.
어느 정도인지....그 여자분에게 가서 그래도 고백하고 싶은지.......
아니면, 나한테 연습해본 걸로 접을 건지........”
그의 얼굴이 굳는다.
목의 울대가 몇 번이고 움직이고 있었다.
이마에 핏대가 서고, 주먹을 쥔 손에도 파랗게 핏줄이 선다.
그는 지금.........괴로운 걸까.........
내 어이없는 제안에 더 힘든 걸까.........
이재신 너무 오지랖이었던 거야.
그래도.......마음이 아픈 걸.
한번이라도 밖으로 뱉으면, 그래도 치유가 될 수도 있으니까.
더 용기를 가질 수 있으니까.....
얘기해보라고 했던 거지만, 그에겐 부담일 수도 있다.
“얘기하기 힘들면, 못 들은 걸로.......”
“정말.........”
“네?”
“정말, 고백해도......되겠습니까?”
재신은 그 말에 이상하게 심장이 떨린다.
이 사람, 참 사람을 떨리게 하는 재주가 있다.
“그럼요. 은시경 씨 뻘줌할 테니까, 내가 눈감고 있을게요.
그 사람이다 생각하고 얘기해 보세요.”
그렇게 재신은 눈을 감았다.
마치 자신이 고백을 받는 사람처럼 설레기도 한다.
자신이 눈을 감고 나서도, 한참동안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그의 한숨소리가 들린다.
".........처음부터.........좋아했습니다.
그때, 저를 좋아한다고 얘기해주셨을 때, 제가.....거짓말을 했습니다.
호기심일 거라고, 놀리지 말라고 얘기했던 거.........사실 다 거짓말이었습니다.
싫증나실까봐, 제 마음을 들켜버리면, 내게서 마음이 돌아서실까봐,
아닌 척했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속상해서라도, 절.......바라봐주실 거 같아서,
조금은....더......신기해하실 것 같아서,
그러면 당신의 시선을 더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거짓말 했습니다.
제 마음을 당신께 들키면, 당신은 정말로 돌아서버릴 것만 같아서, 무서웠습니다.
그 시간을 잡고 싶었습니다.
당신의 시선을, 당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오래 잡고 싶었습니다.
제가 죽은 줄 알았을 시간동안
당신이.......얼마나 힘들었을지.....압니다.
그러니 이 이후의 시간들은 저 역시 달게 받겠습니다.”
그의 얘기를 듣는 동안 재신은 자꾸만 울컥한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는 듯, 진지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전........전.........길은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한 번 정해진 길은..........목숨처럼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 길만 보고, 그 길만 생각하고, 그래서 그 길로만 갑니다.
제 길은.......제 길은.........당신입니다.
그래서 다른 길을 찾을 수도, 다른 길로 갈 수도 없습니다.
운명처럼 당신이 왔으니, 운명처럼 저는 당신을 향한 길로만 갈 겁니다.
비록 당신이 다른 사람을 만나 다른 길로 간다 할지라도,
저의 길은.......오로지 당신입니다.
당신은 제게....첫사랑이 아닙니다.
첫사랑은.......다음 사랑이 있어야 하는 거니까, 제겐......그런 건 없습니다.
처음도 당신이어야 하고, 다음도 당신이어야 합니다.
한 번 정해진 길은.....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제 평생..........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평생 당신만 보며, 당신만 생각하며, 당신을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행여, 당신이 힘드실 때, 당신이 외로워지실 때,
행여, 돌아보신다면, 늘 그곳에 제가 있을 겁니다.
당신이 돌아볼 수 있는 그곳에 늘........서 있겠습니다.”
재신은 그 순간 눈을 떴다.
뒤에 서 있겠다는 이 사람의 고백 때문에, 자기 자신의 마음 따위는 상관없다고 말하는 이 사람 때문에,
오로지 지켜보겠다는 이 사람 때문에 재신은 가슴이 아파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눈을 뜨는 그 순간, 재신의 눈 앞에 그의 검은 눈동자가 마주쳤다.
이 남자는......오롯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 사람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사랑합니다.
나의 과거이자, 나의 현재이자, 나의 미래인......나의 아름다운.......당신을.......
별보다 더 아름답게 빛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별처럼 빛나실 수 있게 제가 당신의 어둠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어두움은 제가 다 가져가겠습니다.
그러니 마음껏 빛나세요.
당신이 빛나시는 그곳에, 그 뒤에 제가 늘........있겠습니다.
제가 있다는 거, 모르셔도 됩니다.
어둠 같은 거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아름답게 빛나기만 해 주세요.
빛나는 당신을 보면서, 제 평생.....그렇게 만족하며 살겠습니다.
짧은 순간이나마, 당신의 마음을 받은 적이 있었노라고,
당신의.....입술을........가진 적이 있었노라고,
그래서 사랑한다고 감히 말해 본 적이 있었노라고.......
그렇게......아름다운 당신을 보며 살겠습니다.”
뭐야......이 남자.........뭐야 도대체.......
재신의 눈에 눈물이 흐른다.
뭐가 이렇게 아파.........
"은....시......경 씨........"
"...........사랑합니다.......사랑합니다.........하아...........사랑합니다......."
시경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른다.
"하아........뭐가.....이렇게 아파요?
뭐가....이렇게........하아........."
재신은 자신이 왜 우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이 사람이 너무 아프다.
뭐가 이리도 아픈 건지......뭐가 이렇게 아픈 사랑이 다 있는지.......
"은시경씨......너무 가슴 아프잖아요.
뭐가, 어둠이 돼? 뭐가? 뭘 뒤에서만 봐요?
뒤에서만 지켜보겠다는 게, 뭐가 괜찮다는 거예요?"
"공..주님........"
시경의 입에서 신음소리처럼 새어나온다.
"은시경씨! 정말 답답이에요. 진짜!!
뭘 지켜만 봐요? 그 여자분...도 당신이 죽은 줄 알았을 거잖아요.
혼자서 엄청 아파했을 거잖아요.
가서 얘기해요. 사랑한다고....지금처럼......꼭...가서 얘기해요."
"...................."
시경은 아무 말도 못한 채 재신을 보기만 한다.
재신은 그의 눈빛이 너무 슬퍼서, 너무 아파서 가슴이 쓰라리다.
"나라면 말이에요. 나라면, 내가 그 사람이라면,
나 한번쯤은 다시 돌아볼 거예요.
당신이 죽은 줄 알고, 다른 사람 만난 거잖아.
그러니까.....당신이 살아 돌아와서,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걸 알면,
반드시 돌아볼 거예요.
나라면, 당신을 돌아볼 거라구요."
".......진짜......그러실 겁니까?"
"네?"
"만약에...정말 만약에 공주님이시라면,
한번쯤은 절.....다시......다시 생각해 주실 겁니까?"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간절하다.
그의 간절함이 가슴 아프게 한다.
그 눈빛 때문에, 그 떨리는 그 목소리 때문에 재신은 또다시 눈물이 난다.
이 사람....정말 간절하구나.....
이 사람....정말 아팠구나......
너무 많이 아팠을 이 사람이, 지금도 아플 이 사람이 재신은 또 아팠다.
그래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이 재신의 볼을 훔친다.
"어!"
하고 놀라는 사이, 그의 손이 재신의 눈물을 닦아낸다.
"..........용서......하세요......."
"네? 무슨.........!!!!!!!!!!!!!"
재신은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도 설마, 설마 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닐 거야.
그러나 찰나의 순간이었다.
피할 시간조차 없이, 단숨에, 그의 입술이 재신의 입술을 덮쳤다.
부드러우면서도 뜨거운 그의 입술이 재신의 아랫입술을 빨아당겼다.
재신은 순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뒤로 물러서려는 재신의 목 뒤를 시경의 손이 감싸 쥔다.
그의 강한 힘에 재신은 시경에게로 더 가까이 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입술을 미친 듯이 빨아대는 이 남자 때문에 재신은 숨이 막힐 것만 같다.
시경의 혀가 재신의 입술을 핥으며 안으로 들어오려 한다.
재신은 고개를 흔들며, 그를 억지로 떼어놓으려 했다.
그의 입술에서 겨우 놓여나면서 재신은 그를 불렀다.
아니, 그를 부르려 했다.
“은시.....흡!!!!!!!!!!!”
그러나 그의 이름을 채 부르기도 전에, 그는 다시 재신의 입술을 가졌다.
그나마 그에게서 떨어졌다고 생각했던 것은 오산이었다.
잠시 입술이 떨어졌을 뿐, 시경은 더 강하게 재신을 잡아당겼다.
재신에게 다가온 것은 그의 입술만이 아니었다.
놀라서 은시경을 부르던 재신의 입술 안으로 그의 혀가 들어왔다.
그의 혀가 자신의 혀에 닿자, 재신은 놀라서 뒤로 도망가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도망갈 곳도 없었다.
등은 이미 난간 벽에 닿아 있었고, 시경의 팔은 재신의 허리를 단단히 감고 그녀를 자신 쪽으로 더 강하게 안았다.
재신은 오롯이 시경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놀라서 도망가려 해도, 그는 집요하게 재신을 쫓아왔다.
그녀의 혀를 휘감고, 그녀를 헐떡이게 만들었다.
그를 밀어대던 팔에 힘이 빠졌다.
재신은 더 이상 반항하지 않고, 그가 하는 대로 자신을 맡겼다.
그러자 거칠게 덤벼들던 그도 부드럽게 재신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을 가지며 깊게 들어온다.
그의 혀는 도망가던 그녀의 혀를 잡고 섬세하게 얽혀들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부드러운 혀가, 재신을 당황하게 한다.
알 수 없는 느낌이, 자신의 등 뒤로 자르르 흘러가는 것 같다.
처음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처럼, 처음 감각이 돌아왔을 때처럼,
발끝까지 저릿한 무언가가 흘러내려갔다.
세상의 모든 중심이 입술로만 모이는 것 같다.
모든 감각이 입술의 감각에, 혀의 감각에 모여들며, 집중되고 있었다.
그는......한번 맛본 그녀의 입술을 놓을 줄 몰랐다.
더 미치도록 더 깊이 빨아당기고, 또 빨아당겼다.
깊이 맛보면 맛볼수록 허기가 져서, 미치도록 더 맛보고 싶어서,
그는 그녀를 놓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경은 재신의 입술을 놓지 못하고, 더 깊이 깊이 맛보고 있었다.
별이 지는 밤, 성곽 위에는 두 사람의 헐떡이는 숨소리만, 가득히 퍼져나간다.
<윤찡갤 시경재신 횽아 짤....감솨감솨...(__) 이 짤 정말 쓰고 싶었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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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30장입니다.
8회는 분량 때문이 아니라, 은시경 때문에 쓰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살아돌아온 은시경이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게 바로 공주님께 고백하는 것이었겠죠.
그러나 은시경은 고백을 하지 못하지요.
눈 앞에 공주님을 보고도, 예전처럼 쳐다봐서도 안 되고, 손을 잡아서도 안 되고, 사랑한다고 말도 해서는 안 됩니다.
공주님께서 기억을 잃으셨다는 건, 1년 반의 재활을 참고 견뎌온 은시경을 거의 죽음으로 내모는 것과 같았을 겁니다.
은시경은 아마 자신의 가슴에 그 고백을 묻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더 아팠을 듯합니다.
그래서 저는 은시경이 고백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었답니다.
다름 아닌 성곽에서, 그 곳에서 고백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었다지요.
아직 공주님의 기억은 찾지 못했지만, 한번이라도 자신의 마음을 뱉어낼 수 있도록 그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쓰다보니, 은시경이 너무 아픈 겁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공주님 앞에서, 공주님은 자신에게 고백하는 줄도 모르는데, 고백을 해야 하는 은시경이.....
은시경의 고백이 너무 가슴 아프더라구요.
그래서 몇 번이나 쓰다가 포기했습니다.
보통은 감정이입이 되면 글이 더 잘 써지는데, 이번은 너무 아파서 도리어 글이 안 써지더라구요.
이 글을 쓰면서 몇 번이나 울게 되네요. 이 글이 뭐라고....저도 참......싶습니다.
정말....좀...거리를 두고 써야 할 듯합니다.
몇 번이나 울컥해서 글을 쓸 수 없는 지경이니........
이 고비가 넘어갔으니, 다음엔 좀 낫지 않을까 합니다.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를 처음 구상하면서 생각했던, 혹은 가장 쓰고 싶었던 회 중에 하나가 바로 8회입니다.
시경의 고백. 그러나 그 고백이 자신에게 하는 것인지 모르는 공주님, 그러나 가슴 아파하는 공주님 때문에 감정이 터져버리는 시경.
살아돌아온 시경과 재신의 첫키스 씬을.....참 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 위의 짤은.......윤찡갤 시경재신 횽이 만드신 짤입니다.
종방연 때 이윤지 씨와 조정석 씨께 윤찡갤 갤신갤 시절 때 드렸던 상장에 들어간 성곽씬 짤이지요.
이 짤 때문에 더 이 씬을 쓰고 싶었다지요.
혹시 제 글을 보고 있다면, 시경재신 횽....늘 감사하다능......(__)
오래 기다려주신 님들 감사합니다.
아이 공부시키고, 목욕시키고 재우고 나서 마무리 하며 올리느라, 결국 수요일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혼자 끙끙대고 있지만, 이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도, 들어오셔서 작은 말씀 나눠주시는 데 큰 힘을 얻고 있습니다.
혼자 써나가는 게 아니다 싶어서요.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은데, 제가 많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많이 격려해주셔서, 감사해요.
오늘 밤도 평안하세요.
전...오늘 밤......은시경 때문에...좀 앓아야 할 듯합니다. (__)
+) 7회까지 주신 댓글에 답글 달았습니다.
엄청난 칭찬과 격려, 위로 너무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
하나하나 답글 달면서 저도 많이 회복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__)
'더킹투하츠와 은신상플 > (은신)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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