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7
*배경음악을 꼭 틀어주세요.
1) 스윗 소로우 - 그대에게 하는 말
2) Lovely Yours - 더킹 ost
1
차는 한 대.
기다리고 있던 근위대원은 두 명.
결국 그는 내 옆 자리에 앉았다.
나도, 그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궁으로 돌아가고 있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 일도 없어야 한다.
살짝 옆에 앉은 그를 훔쳐본다.
그는 앞만 주시한 채, 흔들림 없는 자세로 앉아 있다.
<뷰갤에서 줏어온 짤....쏴리쏴리>
역시 아무 일도 없었던 거다.
아무리 그가 나를 꽉 껴안았다고 해도,
내 허리를 휘감은 손 때문에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해도,
그의 손이 내 맨살 위에 뜨겁게 놓여 있었다고 해도,
내 귀에 그의 한숨소리가 깊게 들어왔다고 해도,
그리고 그의 입술이 내 어깨 위를 스쳤다고 해도,
아무 일도 없었던 거다.
재신은 갑자기 핏 하고 웃음이 나온다.
나, 남자가........그리웠나?
내 웃음소리에 그가 돌아본다.
재신은 그의 눈빛에서 걱정 반, 두려움 반을 읽어낸다.
멀쩡해 보이지만, 사실 이 사람도 떨렸던 건가?
그저 그랬으면 좋겠다는 내 바람인가?
재신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던 시경의 눈빛이 흔들린다.
자꾸만 깊어지던 그의 눈이, 먼저 재신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서서히 그의 귀가, 그의 볼이, 그의 목이 붉어지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재신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번진다.
아!
자신의 어깨에 그녀가 기대왔다.
순간 시경의 가슴이 쿵........하고 떨어진다.
"공...주..님......"
"피곤해서요. 머리 가눌 힘도 없어. 좀 기댈게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시경의 어깨에 기대왔다.
시경은 얼어붙은 듯이 주먹에 힘을 주며 앉아있을 뿐이었다.
각진 시경의 어깨에 기댄 재신의 머리는 자꾸 미끄러질 것 같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재신도 흔들린다.
정지선에 조금은 급하게 서는 바람에 재신의 몸이 앞으로 쏠리는 순간, 시경의 팔이 재신의 어깨를 감쌌다.
그래도, 매너는 있네.
아니지. 충성심인가?
재신은 자신의 어깨를 붙잡는 단단한 손길을 느끼며, 이 목석같은 남자가 웬일인가 싶다.
사실 놀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자신이 한 말은 솔직한 심정이기도 했다.
목을 가눌 힘이 없을 정도로 피곤했다.
오래 서 있고, 그 난리를 쳤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뭔가 자신의 기운이 다 빠져버린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마치 무슨 일이 있었던 것처럼 기진맥진했다.
그래서 그의 어깨에 기댔지만, 마치 얼음처럼 굳어져서는 기대도 기댄 것 같지 않았다.
정말 이러다 미끄러지는 거 아냐?
속으로 혼자 궁시렁대던 재신은 그래도 기대고 있는 편이 나아서 계속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가 결국엔 자신이 넘어지려 하자 잡아준 것이다.
물론 그의 엄청난 충성심 때문에 말이다.
곧 다시 정자세로 돌아가겠거니 했는데, 재신의 팔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는 재신의 어깨를 더 단단히 잡고 안듯이 자신의 품으로 가까이 당겼다.
재신은 그저 그가 하는 대로 더 깊이 그에게 기댄다.
마치 연인인 것처럼, 애인의 어깨에 기댄 것처럼,
공주님과 근위대장은 그렇게 앉아 있다.
2
시경은 그녀를 휠체어에 태워 그녀의 방으로 직접 데려다 준다.
재신도 보통은 됐다고, 궁인들에게 시키면 된다고 했을 텐데, 별 말 없이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둔다.
지친 건지, 익숙해진 건지, 아님 또 다른 이유에선지, 재신은 그가 자신을 데려다 주는 걸 당연하게 느끼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 남자가 어디까지 하는지 지켜보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침대로....옮겨드릴까요?"
재신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저, 공주님!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시경이 재신을 안으려고 다가가는 찰나, 궁중실장이 급히 들어오며 재하가 찾는다고 알린다.
재신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시경이 먼저 대답을 한다.
"지금, 공주님께서 많이 피곤하십니다. 제가 직접 전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쉬세요. 공주님."
"아니에요. 오빠, 저 상태로 계속 나 괴롭힐 거예요.
아예 빨리 가서 얘기하고 쉬는 게 나아요.
내가 오빠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에휴....."
"그럼....제가...."
"아니에요. 오늘 근위대장님도 수고하셨어요. 가서 쉬세요."
재신은 시경을 보내려고 한다.
"아닙니다. 저도 전하를 뵈어야 합니다.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어! 같이 왔네? 안 그래도 은시경도 부르려고 했는데."
"왜? 뭐가 궁금한데?"
재신은 재하가 뭔가를 의도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저 과장된 목소리, 제스츄어, 뭔가가 있다.
"어땠어?"
"뭐가?"
"상우!"
"오빤 다 알고 있었으면서, 어떻게 귓띰도 안 해 주냐?"
"미안 미안. 그 자식이 절대로 너한테 얘기하지 말라고 들들 볶아대는데 어떡하냐?
오랜만에 니 첫사랑 보니까......좋지?"
"오빠!!!!! 근위대장님도 계신데........"
재신이 시경을 흘낏 쳐다본다.
그리고는 재하에게 눈짓을 보낸다.
다른 사람 있을 때, 사적인 얘기는 피하는 게 예읜데 하여튼 예의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다.
재하는 그런 재신의 눈짓을 모른 척하며 계속 밀어붙였다.
"너 그 때 난리도 아니었잖아.
시집가겠다고. 상우한테......."
"좀!!!"
재신은 당황스럽다.
재하가 왜 저러는지. 지금 다른 사람도 있는데, 왜 저렇게 사적인 얘기를 계속 해 대는지. 분명 눈치까지 줬는데, 분명히 알아먹어 놓고서는 모르는 척을 하고 있다.
도대체 왜 저래?
재신이 시경을 흘낏 보니, 시경은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다.
시경이 눈을 내리깐 채, 어금니를 꽉 깨무는 것도, 그런 시경을 곁눈질로 보고 있는 재신이도, 재하는 놓치지 않고 보고 있다. 재하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번진다.
좀 더 강도 있게 밀어붙여 볼까?
"내가 알기로, 학도 1000마리 접었을 걸.
게다가 딱 한 개는 금종이로 접어서, 그 안에 깨알같이 썼잖아.
오빠....나랑 꼭 결혼해!! 약속!!!"
"야!! 이재하!!! 너!! 너!!!!"
"참, 근데 그거 아냐?
내가 미국에 그 놈 집에 갔다가 놀랐잖아.
그 놈 그거 아직도 가지고 있다?
더 놀라운 건, 그 놈...스토컨 줄 알았어.
너 기사까지 스크랩해서...아, 그래 대형 사진도 있었어."
"그만해. 좀. 사적인 얘기를....진짜!!!!"
"어때? 군인 아닌 사람 보니까.......좋아?"
재신은 순간 입술을 깨물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싶지만, 저 사람 앞이니........이상한 소리 하지 말자 싶었다.
"당연히 좋지."
"뭐야? 이재신 너, 군인 싫었던 거야?"
“아니...그게 아니라....."
"야......이거 내 옆에 있는 군인, 되게 상처받겠는데."
"오빠 좀!!!!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
은시경 씨가 왜 상처받아!!!"
재하는 어깨를 으쓱하며 시경을 흘낏 본다.
은시경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턱을 꽉 깨물고 있는 듯, 뭔가 화가 난 듯해 보였다.
재하의 시선을 따라 재신도 시경을 본다.
화가...정말...난 건가?
"가서 쉬어."
"뭐야? 이것 때문에 부른 거야? 오늘 피곤해 죽겠는데?"
결국 재신이 폭발한다.
재하는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얄밉게 덧붙였다.
"그래서 몇 마디 안 물었잖아. 가서 쉬라고."
"아....진짜!!! 우리 오빠지만...정말.....하아....."
재신은 기가 찬다.
정말 그렇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이재하. 정말 이재하다!!
돌아서는데, 재하가 한 마디를 더 던졌다.
"근데 말야. 이상해."
고개를 돌려보는 재신에게 재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던졌다.
"너희, 어디 있었던 거냐?"
"예? 예?"
그때까지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하던 시경이 놀란 듯 떨리는 목소리를 낸다.
재신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생각해보니, 이상해서 말이야.
내가 보고 받기로는, 모든 문에 기자는 있었어.
그런데 두. 사.람.이 사라진 거지.
공주와 근위대장이.
그렇다고 객실로 간 것도 아니야.
어디에도 없었지.
그리곤 한참 후에 갑자기 나타난 거야.
둘 다 엄청나게 지친 상태로.
이상하단 말이지."
"무슨 소리야? 그냥...그냥 피해있었지!!! 아, 진짜!!
계속 이상한 소리야. 나. 간다."
"이상하네....도대체 어디 있었던 거지?
아........그게 있었네. 벽장?"
시경도, 재신도 그대로 얼어붙었다.
얼어붙은 듯한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던 재하는 능글거리며 몇 마디 덧붙인다.
"근데, 희한하네.
되게 좁을 텐데.
둘이.....어떻게 들어갔지?"
"아..아니....이상한 소리 좀 그만하라고!! 갈 거야 진짜!!!"
"은시경!! 너 심장은 괜찮냐?"
"예?"
심장이라는 말에 재신도 시경을 본다.
아, 저 사람, 죽다 살아온 사람이었지. 심장 이식 수술을 받았다는 얘기도 궁인들에게 얼핏 들은 것도 같다.
아직도 많이 아픈가?
"심장 괜찮냐고."
"예. 괜찮습니다."
"오늘, 어택 온 거 아니야?"
"예?"
"너무 뛰면, 안 좋을 텐데.......
오늘, 심장에 너무 무리 온 거 아니야?"
"아..아..아닙니다....전.전혀 무리 없습니다."
시경이 긴장해서 덜덜 떨면서 말을 하자, 재하는 결국엔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고야 만다.
"큭큭큭큭.......아...미치겠다.
야, 둘 다 빨리 나가. 은시경 넌, 오늘 끝까지 재신이 책임져라.
호위 마무리하라고."
"예."
밖으로 나온 두 사람 사이엔 정적만이 흘렀다.
이걸 그저 정적이라고 해야 할 지, 엄청난 긴장감이라 해야 할 지, 그 누구도 말 걸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재하는 대단했다.
그야말로 아이큐 187의 위엄이었다.
단 몇 마디로, 완전히 상황을 뒤집어버렸다.
재신도, 시경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서로를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3
재신의 전화가 울린다.
예전에 영국에서 같이 유학하던 친구였다.
반가운 마음에 재신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는 더 올라간다.
"어? 박혜원? 뭐야? 너 왜 이렇게 오랜만이야!!!"
<공주니~~임!!!!>
"공주님은 무슨? 공부는? 이제 끝났어? 학위는 받았어?"
<네네....저 끝났답니다.>
"와와~~!!! 축하해!!!! 진짜 진짜 고생했어!!!!!"
<고마워!! 근데, 진짜 너 없어서 넘 섭섭했어>
"미안. 알잖아. 내가 좀~~ 바쁘잖니?"
<네네...우리 공주님이신데 모를 리가요?>
"그럼, 들어오는 거야?"
<응. 담달엔 들어가려고. 졸업식 끝내고 여기 집도 처분하고>
"아휴! 진짜 고생했다."
<큭큭...근데 공주님, 약속 기억하지?>
"응? 무슨 약속?"
<어쭈~~ 공주님! 이러기야? 너 나한테 뭐라 그랬어?
나, 그만 두고 한국 가겠다고 그랬을 때,
니가 그랬잖아!!!! 학위 따오면, 멋진 남자 소개시켜준다며?
궁에 멋진 근위대원 많다고, 아무나 고르라며!!!!!
이럴래? 이재신!!!!>
"아아......네네....기억해 기억해.
해줄게. 소개팅. 걱정마.
진짜 여기 멋진 남자 많아. 궁에 널리고 널린 게 멋진 군인이다, 너?"
재신이의 통화 내용을 듣던 시경이 놀란 듯 재신을 쳐다본다.
그러다 재신과 눈이 마주쳤다.
재신이의 눈이 약간 반짝이는 것도 같다.
저, 눈빛.......뭔가 장난치고 싶으실 때 저런 눈빛이 되시는데.......
혜원이가 곧 들어온다고 한다.
진짜 약속지켜야 하는데......
재신이 더 이상 공부를 이어가지 못하게 되면서, 혜원이도 정말 힘들어 했었다.
둘이서 그 어려운 유학생활을 같이 견뎌온 거였는데, 재신이 가버리자, 또 재신에게 그런 큰일들이 생기자 혜원도 뭔가 의욕을 찾기가 어려웠다.
재신의 다리도 서서히 괜찮아지면서 혜원도 조금은 기운을 차렸지만, 유학을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다.
그래서 재신에게 진지하게 상담을 하곤 했다.
그 때 재신이 혜원을 닦달하면서 학위만 따오면, 매일 멋진 남자들과 소개팅을 시켜준다며, 궁에 근위대원들 다 멋있다고, 학위 해오는 날 번호표 돌린다는 말까지 하면서 혜원을 말렸다.
그랬던 혜원이 결국 학위를 따고 이제 들어오겠단다.
이제 약속을 지켜야 할 때가 됐는데, 누구를 소개시켜주지 하며 곰곰이 생각에 빠진다.
그 사이 어느새 재신의 방에 도착했다.
"공주님? 공주님?"
시경이 자신을 불러도 재신은 알아채지 못하다가 한참을 부르고 나서야 깨닫는다.
"아, 미안해요. 내가 생각할 게 있어서."
"침대로......"
"아, 네. 그렇게 해주세요."
사실 예전처럼 못 걷는 것도 아니고, 충분히 혼자서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재신은 손도 까딱하고 싶지가 않았다.
예전처럼, 자신을 옮겨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시경의 품에 안겨서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시경이 자신을 침대에 눕힐 때까지 빤히 쳐다보던 재신은 드디어 결심을 하고 입을 열었다.
“은시경 씨.”
“예?”
재신을 침대에 눕히고 고개를 숙인 후 나가려던 시경은 재신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그녀를 쳐다본다.
“혹시........지금 사귀는 사람 있어요?”
“예...예? 지금...뭐라고....?”
“사귀는 사람, 애인 있냐구요.”
시경은 도대체 왜 이런 질문을 하시는 건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공주님께서 뭔가 자신을 또 놀리시려는 건가 싶기도 하다.
“없습니다.”
시경은 최대한 감정을 없애고 대답을 한다.
그러나 시경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지금 자신의 심장이 다시 세차게 뛰기 시작하는지, 자신이 왜 긴장되기 시작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저.....그럼........”
“예?”
“혹시 소개팅 하실래요?”
“!!!!!!!!!!!!”
서서히 시경은 감이 온다.
정말 자신은 늦다. 아까 분명 공주님은 친구분과 소개팅 얘기를 하셨다. 궁에 괜찮은 군인 많다고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공주님의 친구와 자신을 소개팅을 시켜줄 생각이셨던 거다.
그런데...나는....이 바보 같은 나는.........
뭘, 기대한 거야? 바보 같은 놈.
“하아.........”
대답 대신 시경의 입에서는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 한숨소리를 듣자 재신은 자신이 왠지 잘못한 듯한 생각이 든다.
뭔가 저 사람에게 잘못하는 듯한 느낌. 왜 이러지?
“좋아하는 사람.......있습니다. 저.”
그의 대답은 짧았다.
그러나 그의 진심이 다 들어 있었다.
낮게 깔리는 음성으로 또박또박 그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화가, 난 것 같았다.
“그 사람이..........첫사랑이에요?”
“예?”
“아...미안해요. 궁인들끼리 하는 얘기를 지나가다가 들었어요.
은시경 씨 로맨티스트라고......”
“....................”
그는 맞다고도 아니라고도 그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물끄러미 재신을 바라볼 뿐이다.
그의 눈을 마주 보던 재신은 자신도 모르게 먼저 그의 시선을 피했다.
궁인들의 말이.....결국 맞았네......
뭘, 새삼 놀라? 알고 있었잖아. 이재신.
저 사람, 좋아하는 사람 있다는 거.
그래, 저렇게 감정이 없는 듯한 사람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니까, 신기해서, 그래, 많이 신기해서 그런 거야.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은 거니까.......
“첫사랑이니까...당연히 못 잊겠죠?
첫사랑이잖아.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는 거잖아요.
다 사라진 감정인 것 같아도, 그 사람 앞에만 서면,
툭하고 나와버리잖아요.”
시경은 그녀의 말이 아프다.
첫사랑.
그녀에게 첫사랑이란 어떤 존재인지 너무나 아프게 가르쳐주고 계신다.
공주님께 첫사랑이란, 그런 거라고, 잊을 수 없는 거라고, 다 사라진 것 같아도 그 사람 앞에만 서면 다시 휘몰아치며 나오는 감정이라고, 당신의 감정을 말씀하고 계시는 거다.
공주님은 날 기억하지 못하신다.
만나도 되살릴 감정 따윈 없으셨던 거다.
그런데 첫사랑은 달랐다.
아주 오래 보지 못했어도, 아주 오래되었어도,
다시 그 감정은 살아나서 공주님을 흔들어놓고 계신 거다.
공주님의 마음엔 내가 한 발 들어설 공간 따위는 없다.
“공주님.........”
그가 낮게 재신을 부른다.
그가 부르는 ‘공주님’이라는 호칭에는 늘 이상한 느낌이 든다.
낮고, 낮고, 낮아서, 더 깊고 깊고 깊게 느껴지는 이상한 느낌.
재신이 그를 바라보지만, 도리어 시경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재신을 보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입을 뗀다.
“..........그래서 아까 그 사람이........좋으셨습니까?”
“.....네?”
“첫사랑이니까........공주님의 첫사랑이니까.........”
시경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재신을 쳐다본다.
의아해 하고 있는, 지금 자신이 들은 말이 진짜 시경이 한 말인지 의심하고 있는 재신과 눈이 마주쳤다.
서로가 다른 대답을 하고 있었다.
서로가 다른 포인트에서 뭔가를 느끼고 있었다.
이거, 뭐지?
감정 상태는 둘 다 똑같았다.
그런데 이야기의 포인트가 달랐다.
재신은 ‘시경’의 첫사랑을 언급하고 있었고, 시경은 재신의 ‘첫사랑’을 언급하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있었다.
분명 둘은 같은 상황이었다.
뭔가 ‘실망’이라는 같은 감정 상태에 놓여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재신은 시경의 감정 상태를 느끼고 있었지만, 시경은 재신의 감정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
그러나 재신도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재신은 알지도 못한 채, 그 질문이 자꾸 가슴에 남는다.
그리고 자꾸 그 질문이 자신의 심장을 콕콕 쑤셔대는 것 같다.
4
돌아서며 시경은 생각했다.
자신은 군인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목숨을 바쳐 지키는 일뿐이다.
내 여자라고 감히...불러선 안 되는 게 아닐까.
아니, 언감생심. 그럴 수 있을 거라고, 그런 꿈이라도 꿔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이것이 오늘 그 장소에서 느낀 시경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군인이 싫으셨던 거였다. 공주님은.
군인이 아닌, 진짜 재미없는 군인이 아닌, 위트와 유머가 넘치는 그런 일반 남자가 좋으실 것이다.
이제 공주님은 이전으로 돌아가고 계시니까,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벗어나고 계시니까,
회복된 마음으로 보면, 나 같은 건, 나 같은 건.........눈에 들어오시지 않으실 거다.
심장이 아프다.
몇 걸음 걷던 시경이 자신의 심장을 손으로 꾹 누른다.
마음이, 육체에 고통을 가할 수 있다는 걸, 요즘 느끼고 있다.
그 날 이후 재신은 계속 아팠다.
몸살 기운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재신이 아프다는 말에, 시경은 무작정 재신의 방으로 달려왔다.
궁인들이 부산하게 왔다갔다 거리고 있었고, 주치의도 다녀갔다고 했다.
시경은 차마 방문을 두드릴 엄두는 나지 않았다.
마치 자기 때문인 것 같았다.
벽장에서, 자신이 욕망을 드러냈기 때문에, 공주님이 아프신 것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그 때 객실로 올라갔어야 했나.
걱정되는 마음에 공주님 방문 앞에서 서성대다가 차마 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돌아서고는 했다.
그런데 벌써 사흘 째 누워계셨다.
오늘은 좀 괜찮아지셨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기력은 없으신 듯했다.
저녁 업무가 마치자마자 결국 또 오고 말았다.
나와서 산책이라도 하시는 모습이라도 보면, 마음이 괜찮을 텐데, 계속 누워만 계시는 듯하니, 괜히 큰 병이 아닌가 싶어서 마음이 자꾸만 불안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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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야!! 은시경!! 내 말 듣고 있어?”
“............................”
“야!! 은.시.경!!!!!!”
“아....예. 전하, 부르셨습니까?”
“내 얘기 또 못 들었냐?”
“예? 뭐라고....하셨는지...?”
“은시경! 너 도대체 왜 그래?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려?”
“죄송합니다.”
“뭐가 문젠데? 재신이?”
“예?예? 아.......공주님께서 계속 아프시니까......”
“근데?”
“예?”
“재신이가 아픈데, 그래서?”
자꾸 꼬치꼬치 캐묻는 재하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공주님이 걱정도 안 되시는지, 약간은 서운하기도 한 시경이다.
자기가 뭐라고 서운할까마는, 그래도 이상하게 섭섭해지려고 한다.
“전하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아프신데, 걱정, 안 되십니까?”
“그래. 당연히 걱정되지. 근데 니가 왜?”
“예?”
“넌, 포커페이스라는 게 없어. 아예 없어. 그게 뭔지도 모르지?
그렇게 재신이라면, 좋아 죽겠냐?”
“사람이 아픈데, 걱정되는 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시경이 도리어 세게 나오자 재하는 더 얼척이 없다.
“그래? 그 놈의 걱정 더 하다가는 나랏일이 안 되겠다.
야! 너 3일 째 정신 못 차리는 거 알아 몰라?
너 틈날 때마다 재신이 방 앞에 가서 서성댄다며?
궁에 다 소문낼 거야?
더 웃긴 건 뭔 줄 알아? 기껏 가서는 들어가지도 못해.
그게 더 웃겨. 알아?
사내새끼면, 뭐, 무라도 잘라야 될 거 아니냐구.
걱정되면, 많이 아프냐고 들어가서 물어보던가.
니가 뭐, 강아지냐? 밖에서 낑낑대고 있으면 다야?”
“전하!!!!”
“야, 그리고 솔직히 너! 그 날 무슨 일 있었어?”
“예..예? 일..일이라뇨? 그..그런 거 어..없습니다.”
“이봐 이봐! 넌 포커페이스 없다 그랬지?
지금 다 나오잖아. 일 있었다고. 벌벌 떨고 있네.
그러니까, 너 지금 이렇게 걱정하는 거, 니가 그 날 저.지.른. 일 때문일까 봐 그러는 거 아니야?”
“예? 예? 아..저...그게......”
재하는 한숨이 나온다. 그냥 대충 던져도 덥석 덥석 물어대는 그의 충신 때문에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모르겠다.
지 놈이 저질러 봤자 뭘 저질렀겠냐?
그래봤자. 넌 은.시.경. 이지. 이재하가 아니라고.
잠깐. 아니지. 진짜 이 놈 뭔 짓 한 거 아냐?
이 놈도 사내새낀데.
“야야!! 너 좀 이상하다!!! 너 솔직히 말해 봐. 너! 거기서 뭔 일 있었어? 진짜야?
너! 무슨 짓 한 거 아니야? 어? 분명 좁고, 엄청 밀폐된 공간이지?
그런 벽장 같은데서, 재신이랑 뭔 짓 했어? 어? 솔직히 말해!!!”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순식간에 은시경은 은시경으로 돌아왔다.
“전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불순한 일은 절.대. 없었습니다.”
“하아.......뭐?”
재하는 기가 막혔다.
이놈이 지금 날 한방 먹인 거다. 전하 넌 원래 그렇게 불순하지 않냐고.
그러니 우리를 그렇게 불순한 너랑 비슷한 부류로 보지 마라...뭐 그런 일종의 경고과 비난?
이 자식이!!
뭔가 더 열을 내려던 재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 녀석 얼굴을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시경의 얼굴이 정직하게 말하고 있었다.
공주님이 너무 걱정이 돼서 아무 일도 손에 안 잡히고, 아무 일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내 앞에 국왕이 있다고 해도, 자신에게는 지금 공주님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고.......
재하의 마음이 미묘해진다.
“너, 오늘 퇴근해라.”
“예? 아직 퇴근 시간은 남았는데.......”
“제대로 일할 수 있을 때, 더 일해. 오늘은 가! 그냥 가!
너 보기 싫어! 그러니까 어서어서 나가!!”
“전하........”
“두 번 말 안 한다.
아님 야근할래?”
“아, 아닙니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시경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휑하니 나가버린다.
재하는 기가 찬다.
그러다 다시 표정이 어두워진다.
모르겠다.
머리가 아프다.
사람의 연이라는 건, 인간이 함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인간이 어떻게 해 보려는 것 자체가 월권이 아닐까.......
재하의 마음이 착잡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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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은 그렇게 일이 끝나자마자 달려와서 공주님 방 앞에 섰다.
오늘은 들어가 봐야겠다고, 진짜 오늘은 얼굴이라도 뵈어야겠다 싶어서 방문을 잡으려는데, 방에서 나오는 궁중실장님과 마주쳤다.
“아, 근위대장님.”
“저, 공주님은....어떠십니까? 괜찮으십니까?”
궁중실장은 오래 전 이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때도 그랬다.
그 때도 이렇게 초조해 하시면서, 공주님에 대해 물으셨다.
“약 드시고 방금 잠 드셨어요.”
“좀 괜찮으십니까?”
“많이 좋아지시긴 했는데, 기력이 많이 쇠해지셨어요.”
은시경이 입술을 깨문다.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하지만, 은시경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러면서 방문만 쳐다보는 시경에게 궁중실장이 한 마디 더 건넸다.
“들어가 보세요.”
“아, 예.”
은시경이 방 안에 들어가자 궁인들 두 명이 공주님 옆에서 간호하고 있었다.
시경이 들어온 걸 본 궁인들이 놀라자, 뒤따라 들어오신 궁중실장님이 두 사람을 손짓해서 방 밖으로 불러낸다.
“오늘 근위대장님이 공주님 방에 들어오신 건, 기밀사항이다.
절대로 밖으로 나가면 안 돼.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지면, 여기 있는 너희 둘에게 무조건 책임을 묻겠다.”
“예. 알겠습니다. 궁중실장님. 걱정 마세요.”
둘은 재빨리 공주님 방에서 벗어났다.
궁중실장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물렸다.
그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5
시경의 눈에 들어온 공주님의 얼굴은 희다 못해 투명해지시는 것 같았다.
그 사이 살도 더 빠지신 것 같아서 시경의 마음이 아려온다.
혹시 그 날 자신 때문에 아프게 되신 건 아닌가, 자꾸만 마음이 쓰려온다.
“공주님.........”
시경은 낮게 불러본다.
약을 드시고 주무신다고 하셨으니, 듣지는 못하실 테지만, 그저 불러보고 싶었다.
자신의 마음을 담아서, 공주님을 입밖에 내어 부르고 싶었다.
“으응...으.......헉헉.........”
약간씩 인상을 쓰시던 공주님이 급기야 신음소리를 뱉기 시작했다.
“공주님!! 공주님!!”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시경이 재신을 부르지만, 재신은 계속해서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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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퀴레의 기행>이 흐르고 있었다.
그 음악만으로도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몇 장면이 함께 겹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창문 너머로 초콜렛을 먹으며 비웃는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
그 여자는 분명 내 머리를 잡고 내 손으로 목탄가루를 넣게 했던 바로 그 여자였다.
아!! 싫어!!!! 싫어!!!!!!!!
줄기 차게 소리를 질렀다.
싫다고 싫다고!!!!!!!!!!
그리고 죽이고 싶도록 무시무시한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치 애들은 이 노래 가스실에 틀어놨어. 유태인들 죽이면서.”
소름끼치도록 잔인한 목소리가 들린다.
재신은 죽고 싶다.
영원히 벗어날 수가 없는 지옥이었다.
지옥이다. 지옥!!! 나는 벗어날 수 없다!!
이 지옥에서!!!!!!!
“정신 차리고 절 보세요!!!! 제가 누굽니까?”
익숙한 음성이 들린다.
누구지? 누구야?
“제가 누굽니까?”
그 목소리만으로도 이상하게 마음을 안정시키는 누군가가 있었다.
누구야? 당신 누구야?
나 좀, 꺼내줘. 나 좀........
일어나고 싶어!! 나 좀 꺼내 줘.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나 좀 꺼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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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
은시경입니다!!!!!!!!!!
공주님!!!!!!!!!!
은시경이에요. 일어나세요!!!!!!!!
확연히 구분되는 목소리.
저 지옥에서 나는 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목소리가 재신을 서서히 깨운다.
눈을 떴지만, 그녀는 여전히 초점이 없다.
시경은 재신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앉혔다.
그리고는 그녀가 자신의 눈을 보도록 초점을 맞췄다.
“공주님!!! 저예요. 은시경입니다.
누군지 알아보시겠어요?”
“....아...아..............”
재신의 입에서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신음소리만 흘러나온다.
“공주님!!!!!! 절 보세요. 꿈이에요!!!!!
꿈은 절대로 공주님을 헤치지 못해요.
공주님!!! 저를 보세요. 은시경입니다!!!!
제가!! 이 은시경이!! 공주님 지킵니다!!!!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공주님!!”
그의 목소리에, 은시경이라는 이름에, 재신은 서서히 정신이 돌아온다.
“하아.....은.시..경....씨?”
시경은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순간, 그때처럼 그녀를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재신도 마치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그에게 안겼다.
자신도 왜 이런지 모른다.
악몽을 꾸다 일어났는데, 그것이 현실인지 과거의 기억인지 꿈인지도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그의 품이 따뜻하다고, 그래서 두렵지가 않다고.......
자신을 지켜준다는 은시경이라는 사람의 말이 너무나 안심이 된다고......
그래서 재신도 그의 등을 안았다.
그의 품에 안겨 재신은 눈을 감았다.
꿈인지, 기억인지 모를 한 장면이 떠오른다.
“정신 차리고 절 보세요!! 제가 누굽니까?”
“알아보시겠어요? 제가 누굽니까?”
자신을 향해 묻던 한 사람의 목소리.
검은 눈동자 가득 걱정과 안타까움과 슬픔을 품고 자신을 부르던 한 남자가 있었다.
곧 눈물을 흘릴 것 같던 한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며, 대답하는 한 여자가 있었다.
“........으......은........시...........경.........”
자신을 향해 눈물을 흘릴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숨이 막힐 정도로 자신을 끌어안던 한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남자의 품에 안겨서 그 남자의 이름만 불러대던 한 여자가 있었다.
은시경이라고, 몇 번이나 그 이름을 부르며 안심하던 그 여자는........나였다.
재신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기억의 한 자락 끝에 그가 있었다.
이 남자가 누구인지 여전히 알지 못하지만, 그 기억의 편린만으로도 이 남자가 어떤 존재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은시경이었다.
은.시.경이라고 이름만 불러도 안심이 되는, 그런 존재였다.
재신은 소리 내어 그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은...시...경......”
“네. 공주님.”
“은.....시경!”
“네. 공주님.”
“은시경!!”
“네. 공주님.”
몇 번을 불러도 그는 변함없이 대답했다.
재신은 그가, 자신의 앞에서 대답해 주는 그가, 고마웠다.
왜 고마운지 자신도 모른다.
부르면 대답해 주는 그가 있어서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재신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시경은 그런 재신을 가슴에 품고 또 품었다.
6
자신을 안고 있던 그녀의 팔이 밑으로 툭...하고 떨어진다.
그녀는 다시 잠에 빠졌다.
기운이 없으시니 바로 다시 쓰러지시듯이 잠에 빠져드신 듯하다.
시경은 그녀를 조심조심 베개에 다시 눕힌다.
그녀의 한쪽 손이 시경의 소맷자락을 쥐고 있다.
자면서도 놓지 못한다.
그녀가 여전히 자신을 의지하는 듯해서 시경의 마음 한켠이 뭉클해 온다.
시경은 그녀의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잡았다.
“제가........기억나세요?
제 이름은.........기억나세요?
공주님..........”
공주님은 그날을 기억하셨다.
분명, 그날..........그날의 한 장면을 떠올리셨다.
그날처럼 내 이름을 부르셨다.
오로지 내 이름만 부르셨다.
그날처럼 오늘도 내 이름을 부르셨다.
오롯이 내 이름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나는 안다.
그녀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존재.
그것이 “은시경”이다.
시경은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춘다.
여전히 붉은 흉터가 남아 있는 그녀의 손목에도 입을 맞춘다.
그녀의 흉터는 시경을 다시 울컥하게 한다.
그리고 또 그녀의 흉터는 시경을 포기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이 그녀에게 있어서 나라는 존재의 의미였다고.
은시경이라는 존재는, 바로 이 손목의 상처라고.
그러니 자신은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자꾸 다짐하게 한다.
자신 없고, 약해지는 마음을 자꾸 다잡는다.
약해지지 말자.
어리석은 생각하지 말자.
움츠려들지 말자.
비교하지 말자.
은시경은 은시경이니까........
은시경은 은시경답게........
그렇게 다짐해 보는 시경이었다.
재신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다.
시경은 머뭇거리다가 그녀의 눈물을 자신의 손으로 닦아준다.
부드러운 그녀의 살결이 느껴진다.
그 느낌이 다시 심장에 전해지자 온 몸으로 저릿함이 퍼져갔다.
그녀의 이마를, 그녀의 눈썹을, 그녀의 볼을 자신의 손으로 느껴본다.
머뭇거리던 그의 엄지손가락은 그녀의 입술을 천천히 만져본다.
부드럽고 촉촉한 그녀의 입술의 감촉이 온몸을 떨리게 한다.
예전 맛보았던 그녀의 입술이 새삼 떠올라 시경을 미치도록 만든다.
시경은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서서히 자신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안 된다고. 이건 범죄라고........
속에서 누군가 외치고 있지만,
시경은 멈출 수가 없다.
그녀의 입술을 맛보고 싶다는 너무나 원초적인 본능이, 욕망이, 시경을 움직이게 했다.
그녀의 입술이 바로 앞에 있었다.
그녀의 향이 코 안 가득 향긋하게 들어온다.
미칠 것 같은 상황에서 시경은 이성의 끈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다.
이를 꽉 깨물었다.
절로 고통스러운 숨소리가 내뱉어진다.
은시경!!! 정신 차려!!!!!!
이건 범죄다!!!!!
공주님이시다!!!!!!
니가 목숨 걸고 지키겠다는 공주님이시다!!!!!
시경은 초인적인 힘으로 자신의 욕망을 깨고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하아...하아.......
시경은 주먹을 꽉 쥐고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을 진정시켰다.
자신의 욕망은 너무나 강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이제 겁이 난다.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다음에는.......못 참을지도 모른다.
이대로는 안 되는데.....정말 안 되는데.......
한참을 숨을 고르며 서 있던 시경은 재신의 손에 입을 맞추고는 방을 나갔다.
문소리가 달칵 하고 나자, 재신은 눈을 떴다.
재신의 눈은 방금 나간 문을 향했다.
쿵쿵쿵쿵.........
재신의 심장이 미친듯이 뛰고 있었다.
재신은 자신의 왼쪽 가슴을 손으로 꾹 눌렀다.
뭐지.......방금.......뭐지.......?
그의 목소리, 그의 손길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그의 손가락이 자신의 입술을 훑어내던 순간이 느껴지자 재신의 심장이 더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가 들릴 때는 꿈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의 손길이 자신의 얼굴을 만질 때부터 뭔가 현실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자신의 입술 위에 놓였을 때는 완전히 잠이 달아나고 말았다.
하아...........
자신의 코에 그의 스킨 향이 느껴졌다.
벽장 안에서 느꼈던 그의 스킨 향, 그의 숨결이 자신의 입술 바로 앞에서 느껴졌다.
그의 거친 숨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렸다.
설마........키스하려던......거야?
아.....아닐 거다. 아니야.........
재신은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일은 절대로 아니라고, 아니라고 재신은 자꾸만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내가 아니야.
그냥......내가......안 됐으니까......위로하고 간 거야.
내가........착각한 거야. 착각이야.
절대 아니야. 아니야.
그러나 자신의 손에 남은 그의 입술의 흔적은 재신의 심장을 자꾸만 뛰게 만들었다.
재신도, 시경도, 그날 밤은 잠들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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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무너무 늦었습니다. 제가 능력이 안 돼서, 쓰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네요.
제가 제 무덤을 팠습니다. 깜냥도 안 되면서 이렇게 일만 벌여놓고, 끙끙대고 있네요.
제 스스로 맘에 안 들어서, 너무 비루해서, 자꾸만 고치고 또 고치고 하다보니 시간이 넘 많이 걸리고 있습니다.
시놉 짜 놓은 것도 맘에 안 들어서 그거 고치다가 시간이 더 걸리네요.
다 짜놓은 상태가 아니면, 글을 한자도 못 쓰는 저의 비루한 성질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긴 글이라 오래 걸리는데, 더더 오래 걸리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ㅠㅠㅠㅠ
그저 능력이 부족한 제 탓이니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길......
그래도 오늘은 30장이나 되니, 분량으로 조금은 용서해 주소서.
2) 오늘 회는 좀 많이 걸렸지만, 특히 제 멘탈 힐링을 위해 넣은 부분은 재신이가 시경이의 이름을 부르는 부분입니다.
“은시경”이라고 부르면, “네. 공주님”이라고 꼬박꼬박 대답해 주는 시경이를 공주님이 굉장히 고마워하잖아요.
사실은 제가 그렇습니다. 제가 쓰면서 제가 힐링이 되었습니다.
제 마음이네요. 대답해 주는 시경이가 너무 고마워요.
쓰는 제가 비루해서, 전.....이런 부분이 참 좋더라구요.
실제 엄청난 스킨십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저 마음을 다독이며,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그 사람은 또 그렇게 대답해 주고.......
그게 왜 그렇게 뭉클한지 모르겠습니다.
믿음 같은 것이 보여서 그런 듯합니다.
존재의 가치란, 그 사람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뭉클하고 가슴 벅찬 것이 아닌가 싶어서요.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은 믿을 수 있다 라는 것이 제겐 더 큰가 봅니다.
이 사람은 내가 부르면, 늘 이렇게 옆에서 대답해 줄 거라는 그 믿음이 절 더 뭉클하게 만듭니다.
오늘...제가 굉장히 센치한 듯합니다.
그저 이 두 사람이 서로의 존재의 의미를 알아가는 것이 좋아서, 혼자 뭉클해서 이러고 있습니다.
3) 두 번 째 힐링 포인트는 Lovely Yours를 따뜻하게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노래만 들으면, 마음이 너무 아파서, 이 노래 자체를 못 듣고 있었는데,
이번 회에 넣으면서 이 노래를 좀 덜 아파하면서 들을 수 있게 된 것 정도인 것 같습니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부분에 자꾸 이 배경음악을 넣을까 합니다.
힐링 안 되는데, 여전히 슬픈데? 이러시면 그저 죄송합니다.
그래도 앞의 회보다는 조금은 진도가 나간 거라 저는 믿고 있어서리......
물론 은시경은 오늘 찬물로 목욕했을 거라능......밤은 추운데....몹시 추웠을 거라는........
4) 그리고 공주님의 친구는 <민들레 가족>에 나온 박혜원입니다.
박혜원은 바로 이윤지 양이 연기했던 캐릭터지요. 박혜원양의 캐릭터 그대로 등장합니다. ㅎㅎㅎㅎ
오로지 제 사심입니다. <민가>를 풀어주신 우리 찡개럴들께 감솨감솨 (__)
김동욱 씨도 <민가> 버전으로 등장시키고 싶었으나,
넘 놀랍게도 캐릭 이름이 "이재하"라서 본명 그대로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는 안타까운 현실.....ㅎㅎ
5) 댓글 달아주셔서 넘넘 감사합니다.
비루한 글 읽어주시고 찾아주시고 기다려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잠도 못 자고 달리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작은 말씀이라도 나눠 주시면 힘이 납니다.
고맙습니다.
주말도 평안하세요.^^
+) 6회까지 주신 댓글에 답글 달았습니다. 댓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큰힘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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