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13
*배경음악을 틀고 읽어주세요.
1. 김광석 - 사랑이라는 이유로
2. 조정석 - 나의 사랑 수정
3. 조권 - Just a kiss
옛날 옛날 한 성에 예쁜 공주님이 살았어요.
그 공주님은 자신을 지켜주던 기사를 사랑했답니다.
그 기사는 공주님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해도, 믿지 못했어요.
기사도 공주님을 너무 사랑하지만, 공주님은 자신에게 금방 싫증내실까봐 겁이 났어요.
그래서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그 나라에 큰 용이 쳐들어왔어요.
기사는 공주님을 위해 그 용과 싸우러 나가게 되었어요.
그리고 기사는 공주님에게 돌아오면 사랑한다고 고백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떠나지요.
기사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공주님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게 되지요.
공주님은 기사를 따라 죽으려고 했는데, 그만 기억만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공주님은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무의식으로는 알고 있었어요.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게 겁이 났어요.
자신의 사랑이 죽었다는 것을, 그래서 새로운 사랑도 다시 하기 두렵다는 것을.
그런데 어느 날 한 남자가 나타났어요.
공주님은 그 남자가 무서웠어요. 피하고 싶었어요.
그 남자가 공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공주님은 무서웠어요.
다시 사랑하게 되는 것도 무섭고,
그 남자도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길로 떠날 수도 있으니까
새롭게 다시 사랑한다는 것이 두려웠어요.
공주님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해요.
그러나 공주님의 본능이 사랑을 하지 말라고,
함부로 마음을 주지 말라고, 그러면 다칠 거라고, 자꾸만 속삭였어요.
공주님은 그 남자가 무서워요.
첫 번째 사랑을 잃어버린 공주님이 두 번째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 동화 <공주님과 기사> 中에서 -
1.
기대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하시는데,
시경은 자꾸만 기대가 된다.
오늘처럼, 그렇게 조금은 자신의 마음을 조금씩 보여주실 것 같아서,
그래서 또 다시 자신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키실 것 같아서,
자라나는 기대를 접을 수가 없다.
내가 궁을 떠나지 못하게 하셨다.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좋다.
적어도, 정리라는 걸 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녀 스스로 인정한 것이니까.
내 감정에 대해서 그대로 가져도 좋다고, 정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녀가 인정해 주었다.
“왜.........여기에 나오시는 겁니까?
왜.......자꾸........여기에 계시는 겁니까?
이곳이.......어떤 장소인지, 알고.......계십니까?
왜......이렇게 저를........기대하게 하시는 겁니까? 공주님.......”
나도 무슨 용기로 그 말을 밖으로 뱉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일말의 기대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녀가 대답해 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그녀는 기억하고 있다고,
공주님 탓 아니라고 말하던 내 목소리를 기억한다고 하셨다.
그 말 때문에 2년을 견뎌내셨다고, 힘드실 때마다 그래서 이곳에 나오신다고 하셨다.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녀가 내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 힘든 2년 동안 내 목소리에, 내 얘기에 힘을 얻었다는 말씀이 좋았다.
적어도, 그 목소리를 기억하는 동안은, 그녀는 나와 함께 있었던 거니까.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지 못했다고 해도, 그녀는 나라는 존재를 느끼고 있었을 테니까.
그걸로 좋았다.
아니,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녀를 안지 않고서는 버텨낼 수가 없었다.
목발을 짚고 있는 그녀를 뒤에서 안아버렸다.
바르르 떨리는 그 어깨를, 그러나 거부하지 않던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나는 기억한다.
내 품 속에서 느껴지던 그녀의 한숨도, 그녀의 살내음도, 그녀의 떨림도 모두 내 심장을 떨리게 했다.
난.....이 사람을 놓고 살지 못하겠지.
절대로 이 사람을 놓지 못하겠지.
이 사람 없이는, 살 수가 없겠지.
그것을 불변의 명제처럼 내 심장 안에 새겨 넣고 있었다.
천천히 목발을 짚고 걷고 있는 그녀의 뒤를 조용히 따르며, 그녀의 뒷모습을 가슴 가득 품을 뿐이었다.
하아........
다리가 떨리는 것 같다.
그렇게 무리한 건 아니었는데, 후원을 돌아들어가는 길이 이토록이나 길었던가 싶기도 하다.
자꾸만 다리의 힘이 풀렸다.
혼자 힘으로 걸어가야 하는데, 갈수록 힘겨워진다.
이렇지 않았는데, 이렇게 약하지 않았는데, 무엇 때문인지 자꾸 목발을 잡은 손이 미끄러지는 것 같다.
똑바로 걸어야 하는데, 약한 모습 보이면 안 되는데........
앗!
그러다 오른쪽을 지탱하던 목발이 미끄러진다.
미끄러지려는 순간, 그의 손이 내 허리를 안았다.
"공주님!!"
"미끄러졌어요. 목발만 주워주면......."
"안 되겠습니다."
"네?"
뭐가 안 된다는 건가 싶어 그를 보려는데, 갑자기 내 몸이 공중으로 붕 뜬다.
"은시경 씨!!!"
그는 순식간에 나를 자신의 품에 안아 올렸다.
"나, 걸어갈 수 있어요. 내려줘요."
"오늘은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걸어갈 수 있다구요."
그는 내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안은 채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목발을 짚고 갈 때는 언제 도착하겠나 싶게 무척이나 길어보이던 길이 그의 품에 안겨가니 금방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도리어 너무 짧은 듯도 하다.
"예전에도, 이렇게 나 안아서 데려다 줬어요?"
"예?"
"예전에요. 2년 전에 그랬냐구요."
"아......필요하실 때........"
"그래서 이렇게 익숙하게 안는 거구나."
그는 아무 말 없이 앞만 보며 걷고 있다.
재신은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그의 가슴에 자신의 머리를 기댔다.
그가 긴장하는 게 느껴진다.
그가 긴장하는 것이 이상하게 좋다.
방에 들어와서는 바로 내려줘도 될 텐데, 그는 굳이 재신을 침대에 눕혔다.
다리를 움직일 수 있는데, 짧게는 몇 발자국 걷기도 하는데,
그는 마치 재신이 전혀 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그녀를 안고 바로 침대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이불까지 덮어준다.
"고마워요."
그런 그에게 그녀가 한 마디 건넨다.
고개만 숙이고 나갈 줄 알았던 그가 물끄러미 재신을 바라보았다.
"왜, 왜요?"
그가 자신을 바라보자, 재신은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침대에 앉아 있는 자신도, 자신을 위에서 물끄러미 보는 그도,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공주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한참을 바라보기만 하던 그가 겨우 입을 뗐다.
"네? 무슨 부탁요?"
재신이 의아한 듯 묻자, 그는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결심한 듯 다시 재신을 바라본다.
"제게......선보라는 말씀은......하지 말아주세요."
재신은 그 말에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분명 자신이 잘못한 일이었다.
그에게 상처가 되는 말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자신에게 말할 줄은 몰랐다.
"공주님 입으로......그 말씀만은........
제 마음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데, 분명 말해야 하는데,
그의 눈을 보고나서는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저 안에서부터 올라오지만, 억지로 꾹꾹 누르고 있는 그의 모습이, 재신을 아프게 했다.
그 모습이 어떤 말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성곽에서......고백, 제 진심입니다."
재신은 그 말에 이불을 꼭 쥐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자신의 눈을 피하는 재신을 잠시 보더니,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재신은 그의 뒷모습조차 보지 못한다.
재신은 자신의 왼쪽 가슴을 손으로 꾹 눌렀다.
아무리 눌러도 미친듯이 뛰고 있는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다.
계속 쿵쿵 소리를 내고 있을 뿐이다.
“전........전.........길은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한 번 정해진 길은..........목숨처럼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 길만 보고, 그 길만 생각하고, 그래서 그 길로만 갑니다.
제 길은.......제 길은.........당신입니다.
그래서 다른 길을 찾을 수도, 다른 길로 갈 수도 없습니다.
운명처럼 당신이 왔으니, 운명처럼 저는 당신을 향한 길로만 갈 겁니다.
비록 당신이 다른 사람을 만나 다른 길로 간다 할지라도,
저의 길은.......오로지 당신입니다."
성곽에서 내게 하는 줄도 몰랐던 그의 고백이 떠오른다.
너무나 생생하게 그의 목소리로 들린다.
내게 하는 얘기인 줄도 모르면서 울컥거렸던 그 말이 다시금 내게 돌아와 가슴에 울림을 던진다.
다음 사랑이란 없다던 그 사람의 얘기가, 자꾸만 심장을 뛰게 한다.
"당신은 제게....첫사랑이 아닙니다.
첫사랑은.......다음 사랑이 있어야 하는 거니까, 제겐......그런 건 없습니다.
처음도 당신이어야 하고, 다음도 당신이어야 합니다.
한 번 정해진 길은.....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제 평생..........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평생 당신만 보며, 당신만 생각하며, 당신을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그는 다음 사랑이란 없다고 했다.
처음도 나였고, 다음도 나여야 한다고, 그래서 평생 나만 보겠다던 그의 고백이 자꾸 울컥하게 한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그에게 당장 가서 얘기하라고 했었다.
나인 줄도 모르고, 내게 하는 고백인 줄도 모르고.
왜 그렇게 아픈 사랑을 하냐며, 그러지 말라고, 자신을 생각하라고, 그런 바보 같은 말들을 했었다.
그런데 그 바보 같은 여자가 바로 나였다.
그가 말하던 그 당신은 바로 나였다.
평생 기다리겠다고 말하던 대상이 바로 나였다.
다른 상대는 없다고, 자신은 한 사람만 보고, 한 길로만 가겠다고,
그 길의 끝이 나라고........
그의 아팠던 고백이 나를 향하고 있었는데,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많이 아팠었겠지? 그 날......
나 때문에 더 아팠었겠지.
숨이, 턱하니 막히는 것 같다.
왜 이러니, 이재신..........
정말 왜 이래..............
그러다 문밖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알게 된다.
한참이 지나서야 복도에서 나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방에서 멀어지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심장이 왜 그렇게 오랫동안 그토록 뛰어댔는지 알게 된다.
2
시경은 재신의 방을 나와서 벽에 기대어 섰다.
한 발짝도 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왜 이토록 떨릴까. 왜 이토록 심장이 뛰어대는 걸까.
기대를 하면 안 되는데, 그녀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자꾸만 설레는 걸까.
사랑한다....사랑한다....사랑한다.......
이 말만이 자꾸만 내 온 몸을 휘감아 돈다.
이 말이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그녀가 흔들릴 때, 감사했다.
그녀는 내게 안기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혼자 걷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안고 싶었다.
내 가슴 안에 그녀를 품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가 목발을 놓치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안았다.
마치 내 여자를 침실로 데려가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 길이 끝나지 않기를, 계속 이어지기를, 바랐던 내 마음을 그녀는 모를 것이다.
스스로 걷고 계시는 날들이 길어질수록 내 마음이 아파온다는 것을 그녀는 모를 것이다.
내 손에서 떠나는 듯해서, 내 자리가 없어지는 듯해서, 그녀에게 다가갈 여지가 사라지는 듯해서,
늘 가슴 졸이고 있는 나를 그녀는 모를 것이다.
어쩌면 조급해진 건지도 모른다.
분명 지켜보겠다고, 기다리겠다고 해놓고서는, 나는 지금 그녀를 빼앗길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오늘 아침 나를 찾아왔던 그 남자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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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그 남자였다.
시경은 순간, 그가 따로 얘기하자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십니까?"
"가기 전에 은시경 씨와 나, 할 얘기가 있을 것 같아서요."
"앉으시죠."
시경은 상우를 소파에 앉으라고 한 뒤, 전화를 들었다.
"혹시, 차 내오실 거라면, 됐습니다."
시경은 상우 앞에 앉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어느 정도 예상은 되었다.
이미 서로가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다.
이제 남은 건, 누가 더 큰 패를 가지고 있나, 그것일까.
그녀에게 누가 어울리나....그런 것일까.
내게는 어떤 패도 없는데........
시경은 자꾸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은시경 씨. 재신이...에 대한 마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아니, 아예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재신이, 사랑하시죠?"
"............예."
상우의 말에 시경은 벌써 가슴이 저린다.
저 남자와 나의 차이는 벌써 드러나고 있었다.
저 남자는 공주님을 재신이라고 부른다.
혼자 있을 때조차 재신이라는 이름으로 그녀를 떠올려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내게 늘 고귀한 공주님이었다.
그녀의 이름을 감히 떠올려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런데 그는 그녀를 재신이라 부른다.
그것은 엄청난 차이였다.
"사실 방금 재하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그래서 모두 들었습니다."
"................"
"어쩌면, 내가 당신을 가장 잘 이해할 만한 사람이 아닌가 합니다."
"예?"
"그냥...그런 거 같아서요.
솔직히, 재신이 영국에서 많이 만났습니다.
그 때도 마음만 먹는다면 기회는 많았죠.
그러나 내 스스로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재신이에게 어울리는, 진짜 부마의 자격을 갖추고 싶었습니다."
부마........
부마의 자격........
시경의 주먹에 힘줄이 돋아난다.
자신은 입 밖으로 감히 낼 수도 없는 말이다.
아무리 바라고 또 바란다고 해도, 언감생심, 입으로도, 가슴으로도 품어서는 안 될 말이다.
그런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말을 입에 올린다.
이것 또한 저 남자와 나의 차이인가.
"부마의 자격.......그게 뭐라고......하아......
은시경 씨는 이해할 겁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런데 지금은 바보 같았다는 생각만 듭니다. 아시죠?
자격을 갖춘 후 사랑을 하는 건, 결국 사랑을 놓치는 것과 같더군요.
사랑도 때가 있는데, 그걸 그때는 몰랐습니다.
기회가 늘 주어지는 건 아니더군요.
적어도 그때 잡았다면 재신이가 그렇게 아프진 않아도 되었을 겁니다.
그게 가장 후회됩니다."
그때 그가 기회를 잡았다면, 내겐 그 어떤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그녀가 아프지 않았을까.
적어도 그녀가 나 때문에 아플 일은 없었겠지.
그러면,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일도 없었을까.
시경은 눈을 감았다.
그럴 수는 없다는 걸.........시경은 알고 있다.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을,
자신의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난 솔직히 은시경 씨가 재신이를 사랑한다면 이길 수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예?"
"당신은 죽음을 이기고 온 사람이죠.
당신이 끝까지 생을 놓지 않게 했던 사람이 재신이 아닌가요?
그래서 둘이 서로 사랑한다면 깨끗이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재신이가 당신을 만나서 너무 아팠다면, 또 아플 거라면 난 포기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때도 재신이를 힘들게 했을 겁니다. 아닙니까?
계속 자격 없다며 도망간 거 아닙니까?
그런 당신이 재신이를 다시 만난다면 또 그런 일이 안 생길 거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죠?"
시경은 저 속에서부터 열이 솟구쳐 올라왔다.
이마에 힘줄이 튀어나오고, 목까지 벌겋게 열이 올라와도, 시경은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은 너무나 열 받지만, 그래도 옳았다.
그래서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상황은 은시경 씨의 일방적인 마음으로 보입니다. 아닌가요?
재신이가 은시경 씨를 사랑했다면, 당신이 돌아오기 전에 그렇게 평온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재신이는 현재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거죠."
그의 말이 너무나 아프게 박혔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그토록 아플 줄 몰랐다.
"재신이 주변에 늘 남자들이 들끓었습니다.
그래서 늘 저는 재신이 주변을 맴돌면서 남자들을 쳐냈습니다.
영국에서도 그랬습니다.
마찬가집니다. 나는 그렇게 할 겁니다.
그러나 은시경 씨라면, 나 역시 긴장됩니다."
"............................."
"난 정정당당하게 당신과 붙을 겁니다.
은시경 씨도 각오가 되었다면 그렇게 하세요.
만약 아직까지도 스스로에 대해서 자신이 없다면 그만 두시죠.
혹시 기억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다면, 그건 페어플레이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적어도 기억이 없는 편이 공주님께 더 낫지 않을까요?"
그의 말은 모두 옳았다.
하나하나 반박할 수 없을 만큼 다 옳았다.
기억에 대해서도 그랬다.
그녀에게는 기억이 없는 편이 더 나았다.
단지, 기억이 필요한 건, 오로지 나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일 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각오가 되었다면 붙어봅시다.
누가 재신이의 마음을 얻는지,
만약 당신이 얻는다면 난 깔끔하게 물러날 겁니다.
그리고 지켜볼 겁니다.
당신이 재신이를 행복하게 해주는지, 그러지 못하는지.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나는 바로 다시 올 겁니다.
당신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제대로 재신이를 아껴주는 지 지켜봐 주시죠.
난, 정정당당하게 재신이를 내 여자로 만들 겁니다."
상우의 눈은 진지했다.
놀리는 것도, 업신여기는 것도 아니었다.
남자 대 남자로, 당당하게 시경을 보고 있었다.
"난, 단 한번도, 감히.......부마 자리를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시경은 이 남자가 진심으로 자신을 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 역시 진심으로 그를 대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 누구에게도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속내를 끄집어 보였다.
"아시다시피 난, 가진 재산도, 그렇다고 배경이 될 만한 집안도, 또 대단한 지식도, 지위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당신의 적수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은시경 씨는, 내가 만난 최고의 적수죠.
내겐 가장 겁나는........남자죠. 당신이.
우린 어차피 같은 운명입니다.
같은 여자를 사랑하고, 그 여자 때문에 스스로의 가치를 높여보려다, 그 여자를 잃은........
그런데 또 이렇게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이게 운명입니다.
은시경 씨와 나의 운명."
운명........
그도, 나도, 똑같은 실수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마음을 가졌었지만, 아직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물러났던 어리석었던 인물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이 떠난 후에야, 미친 듯이 괴로워하는 인물들.
떠나기 전, 그는 내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었다.
“은시경 씨, 난 진심입니다.
은시경 씨도 그럴 거라고 봅니다.”
그 남자 때문에 불안하지만, 또한 그 남자 때문에 용기를 얻은 것도 있다.
그 남자는 나를 자신과 맞설 상대로 인정해 주었다.
그는, 그녀가 사랑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가 멋진 만큼, 그가 당당한 만큼, 두려워진다.
내게 기회라는 것이 존재할까.
그녀가 내게서 멀리 날아가 버릴까봐 너무나 두렵다.
3
동욱은 인천공항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공주님께서 주셨던 사진을 보며, 친구라는 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묘했다.
스타일도, 인상도 모두 다른데, 묘하게 공주님과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친구라서 그런가.
유유상종이라지만, 공주님과 닮았다고 해서 공주님이 될 수는 없다고 동욱은 혼자서 생각하고 있었다.
짧은 커트 머리에 몸에 완전히 피트된 바지를 입은 뭔가 당차보이는 여자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분명 사진 속의 여자였다.
그런데 움직이는 그 여자는 굉장히 달랐다.
강하면서도, 당당하면서도, 공주님께만 풍기는 카리스마까지 느껴졌다.
이 여자, 뭐지?
그 여자는 동욱에게 다가오더니 옆에 서 있는 근위대원들까지 쑥 훑었다.
"음....이쪽이 김동욱 대위시군요. 공주님 전담이신....맞죠?"
"아, 예."
"해외에서 유학하셨다는?"
"예?"
"내가 좀 알아요. 에효....우리 공주님, 갑자기 막 안 됐네.
늘 이러셨을 거 아니에요.
이렇게 검은 양복 입은 사람들한테 쭉 둘러서 다니셔야 했으니,
그렇게 한국 들어가기 싫다고 하셨겠지."
동욱은 이상했다.
분명 왕족도 아닌데도, 공주님께 보이던 권위가 느껴졌다.
닮아서 그런 건가.
"공주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어서 가시죠."
동욱과 근위대원들이 고개를 숙이자, 혜원이 픽 웃더니 같이 고개를 숙인다.
그래도 공주님 친구분인데, 근위대원들은 약간 놀라는 듯하다.
"안녕하세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박혜원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그들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런 모습이 낯설어서 근위대원들은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전 왕족도 뭣도 아니에요. 여러분과 같은 그저 대한민국 국민일 뿐이에요.
그러니 그렇게 깍듯하게 하시지 마세요.
부담스러워요."
"가방은 제게 주시죠."
동욱이 혜원의 가방을 받으려 하자, 혜원이 웃으며 말렸다.
"자기 스스로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가방이 아니라면, 들고 다니면 안 되죠.
제가 손발이 불편한 것도 아니구요. 멀쩡하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차만 좀 얻어 탈게요."
혜원은 어깨에 맨 가방도, 핸드캐리어도 모두 스스로 끌고 갔다.
그런 혜원을 동욱은 신기한 듯 쳐다봤다.
뭔가.......다른 듯, 또 비슷했다.
"혜원아!!!!!!"
재신은 공주궁 앞에까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만인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와!!! 공주님이닷!!!!"
혜원은 끌고 오던 가방은 팽개쳐두고는 달려가서 휠체어에 앉아있는 재신을 안았다.
"뭐야? 왜 휠체어야?
걷는 거 보여준다며?"
혜원은 재신이 휠체어에 앉아 있자, 바로 타박이다.
"미안, 미안....내가 오래 서 있을 수가 없잖아.
그리고 너 기다린다고, 조바심이 나서 나와 있느라 그랬어.
여튼......시어머니다, 시어머니! 뭘 그렇게 오자마자 타박이야?"
"아니야, 아니야.....공주님, 너무 약해지셨어.
이러지 않았잖아. 좀 더 강해지셔야지.
이재신 공주님! 저한텐 어린양 통하지 않아요. 절대!!"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동욱이 재신에게 다가왔다.
"공주님, 볕이 너무 따가운데, 들어가셔서 얘기하세요."
"응. 그럴까?"
"저, 그리고......."
동욱이 갑자기 혜원이 쪽으로 돌아섰다.
혜원은 이 남자가 왜 이러냐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우리 공주님, 늘 연습하셨습니다.
힘드시다고 연습 빼먹으신 적도 없으시구요.
늘 목발 짚고 연습하셔서, 제가 늘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요?"
"예?"
혜원은 강했다.
니가 뭔데 여기 끼어드냐는 뉘앙스가 팍 풍겼다.
"이것 보세요. 김동욱 씨.
지금, 웃기는 거 알아요?"
"혜원아......."
혜원이의 성격을 아는 재신은 일단 말리려고 한다.
"놔봐. 나 예전부터 말하고 싶었어."
"뭘?"
"공주님은 잠깐만 있어봐.
이것 봐요. 나 가끔 김동욱 씨 얘기들은 적 있거든요?"
"혜원아!!"
"물론 공주님이 당신 얘기를 막한 건 아니지만, 듣다 보면 이상하더라구요.
당신 태도 말이에요."
"예?"
동욱은 재신이 자기 얘기를 했다는 게 놀라웠다.
"공주님 얘기 속에 김동욱 씨 얘기가 가끔 나오는데 말이죠.
내가 종합해보니, 당신은 피터팬 증후군 같더군요."
"예에?"
"공주님은 당신이 가둬두고 현실로 못 가게 할 웬디가 아니에요.
정신 차리세요.
공주님 곁에서 그렇게 징징대지 말고, 현실을 좀 직시하시죠."
동욱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지금 이 여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욱 하는 심정으로 뭐라고 말하려는데, 그 여자가 갑자기 자신의 뒤를 보더니, 헉! 하며 놀라고 있었다.
"설마........."
그 여자는 갑자기 누군가에게 다가갔다.
"혜원아......."
공주님이 부르시는데도 그 여자는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세상에.......세상에.........."
그 여자 앞에는 근위대장님이 서 계셨다.
그 여자가 자신 앞에 오자 시경도 놀란 것 같았다.
시경은 지금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군지, 지금 무슨 상황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하께서 공주님께 일정을 전달하라고 해서 그것 때문에 왔을 뿐이었다.
일주일 후에 제주 포럼을 다시 개최할 거라는 말씀을 드리러 왔을 뿐이었는데,
한 여자가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누구신지........."
"진짜, 살아있네."
여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뭐지, 지금?
시경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알지 못하는 여자가 자신에게 아는 체를 하고 있었지만,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저 이 상황을 그녀가 이상하게 받아들일까봐 그것만 걱정될 뿐이었다.
"은시경 씨 맞죠?"
"예? 예. 맞습니다만........"
혜원은 그대로 시경에게 돌진해서 그를 안아버렸다.
졸지에 안겨버린 시경도, 방금 전까지 혜원에게 비난 받던 동욱도, 둘이 서로 아는 사이였던가 싶어서 놀라는 재신도, 모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궁인들도, 근위대원들도, 이 상황은 오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혜원이가......은시경 씨를 알고 있었나? 그랬나?
시경을 안고 엉엉 울고 있는 혜원이 낯설어서, 자신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난감해서, 재신은 두 사람을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시경은 울고 있는 혜원을 떼 내지도 못하고, 굳은 채로 서 있을 뿐이었다.
4
"흠흠........."
시경이 어색해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재신의 방에 모두들 들어와 있기는 했지만, 공기는 어색함과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재신은 휠체어를 돌려 창 쪽을 향해 있었고, 혜원은 시경과 재신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치를 보고 있었으며, 동욱은 도대체 저 여자는 뭔가 싶어서 혜원을 향해서 인상을 쓰고 있었다.
"혜원아, 너 나한테 해명은 좀 해줘야겠다.
방금, 이 상황이 뭔지......."
"아.....그게........"
혜원은 난감한 듯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너, 감정적인 애 아니잖아. 니가 그랬을 때는 뭔가가 있는 거지.
얘기해 봐. 뭐야?
너, 은시경 씨, 알고 있었던 거야?"
"어? 어? 아.....알고 있었다기보다는, 그래. 참.....살아 돌아오셨더라고.
뉴스. 뉴스에서 봤어. 그래서, 아, 이 분이 참 고생하시고 살아 돌아오셨....."
"박.혜.원!!!!"
재신이 단호하게 혜원의 이름을 불렀다.
그 단호한 목소리에는 나는 이 나라 공주라는 권위가 들어 있었다.
그러니 나를 속이려 하지 말라는 그런 무언의 압력이 있었다.
"내가 널 모르니?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 뉴스에서 본 사람이 살아왔다고, 그 사람을 안고 그 난리를 친다고?
박혜원! 넌 날 못 속여!
말해, 무슨 일인지."
"재신아......난......."
"뭔가 있는 거지.......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 때, 뭔가가 있었던 거지?"
재신은 궁금했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그 순간에,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자신이 놓치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래야, 적어도 실수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혜원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재신이 팔목을 그었을 때, 영국에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들어왔었다.
재하가 전화한 순간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니가 필요하다고, 재신이 팔목을 그었다고........
벌떡벌떡 뛰는 심장을 붙잡고, 살아있는 재신을 보며, 그저 감사하다고, 살아있어서 감사하다고, 재신을 붙잡고 울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재하가 혜원에게 부탁했다.
은시경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재신이 그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잃었다고.
혜원은 아직 그녀에게서 어떤 얘기도 듣지 못했다.
은시경이 돌아온 건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기억이 돌아온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묻고 있는 걸 보면, 재신의 기억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재하를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좋아했었어."
혜원은 눈을 감았다.
그 다음 상황은 나도 모르겠다 싶었다.
전하, 이건 다 전하 책임입니다!!!
"지금....무슨 소리야? 누가 누굴 좋아해?"
재신은 자신이 듣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내가, 이 박혜원이, 저기 죽었다가 살아오신 은시경 씨를, 좋아했다고.
됐니?"
시경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정확하게 인지가 되지 않았다.
분명 모르는 사람이다.
재신에게서 이름으로만 듣던 사람이다.
예전에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영국에 친한 친구 분이 있다 정도밖에 아는 게 없었다.
이름을 들은 것도 최근이었다.
뭔가 억울했다.
공주님께서 오해하실까봐, 그게 가장 걱정되었다.
"공주님, 전......처음 뵙는 분입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전........"
"아, 맞아. 은시경 씨는 날 전~~혀 몰라.
나 혼자. 오로지 나 혼자 좋아한 거야."
재신은 한쪽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양쪽 관자놀이를 누군가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쑤셨다.
"은시경 씨, 동욱 씨, 자리 좀 비켜줘요.
혜원이랑 둘만 있고 싶어요."
"예."
둘이 나가려는데, 재신이 다시 시경을 불렀다.
"아, 근데, 은시경 씨는 왜 온 거죠?
오빠가 뭐라고 그래요?"
"아, 그게. 제주 평화 포럼이 일주일 후로 정해졌다고, 공주님께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오빠가 결국 해냈나 보네. 알겠어요. 나가봐요."
5
궁은 조용한 듯하면서도, 소문은 엄청나게 빨리 퍼져나가는 곳이었다.
이미 혜원과 시경에 대한 소문은 일파만파 퍼져나가고 있었다.
다음 날 재신은 혜원과 같이 점심식사를 한 후, 후원으로 산책을 나가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재신에게 갑자기 처리할 일이 생겨버렸다.
어쩔 수 없이 혜원이를 먼저 보내고, 재신은 일처리를 한 후, 뒤에 나가게 되었다.
목발을 짚고 천천히 걸어가는데, 궁인들 몇이 얘기하는 게 들렸다.
"얘, 들었어? 그 왜, 공주님 친구 분 있잖아. 그 분, 근위대장님 첫사랑이래?"
"그래? 그럼, 그 로맨틱한 고백의 주인공?"
"그렇다나봐. 봤지? 난리도 아니었잖아.
그 분 궁에 오시자마자, 근위대장님 껴안고 울었잖아."
"그러게 말야. 게다가 근위대장님도 같이 안고 울었다며?"
"에휴. 연인의 상봉이었다지.
앞에 공주님도 계셨는데, 다 같이 우셨대."
"그러니까, 근위대장님 다치시기 전에, 공주님께서 두 분 다리 놔주신 거네?"
"그렇네. 어휴~~ 그 사이에 근위대장님 돌아가신 줄 알고, 정말 그랬겠다."
"지금, 남 걱정 할 때냐?
우리 걱정해야지. 어떡하냐. 우리......
근위대장님께서 이렇게 빨리 애인이 생기실 줄은 몰랐다.
아....미치겠다. 정말."
"야, 솔직히 공주님 친구 분이지만, 그 분도 우리랑 다를 바 없잖아.
평민인데 뭐.
근데 도대체 전생에 뭔 일을 했길래, 근위대장님 애인이래?
완전 부럽다. 진짜......."
"나라를 구했겠지. 알고 보면, 행주산성에서 행주로 돌 날랐을 거야. 어휴......"
"그냥, 지금 나라를 구해라.
그게 더 빠르다. 알게 뭐야. 다음 생이란 게 있으면, 우리 근위대장님 같은 분을 만날 수 있을지....."
"야, 니가 나라를 열 번 구해도,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야! 죽을래? 악담을 해라. 악담을!!!"
"근데, 그래도, 그 친구 분, 공주님하고 진짜 닮지 않았어?"
"그래, 나도 그런 생각했는데, 두 분 은근히 많이 닮았어.
눈 큰 것도 그렇고, 말씀하실 때, 스타일도 그렇고.
친구라서 그런가?"
"근위대원들 난리라던데?
공주님은 너무 높이 계시지만, 닮은 분이 계시니 친구 분한테 은근 꽂혔다더라."
"꽂히면 뭐해. 근위대장님 계신데."
"야, 말을 말자. 말을 하면 할수록 염장 터진다. 에휴."
궁인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재신은 소문이란 싶었다.
언제나 와전되고는 만다.
두 연인의 만남에 나까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라?
천천히 목발을 짚고 가는데, 저 앞에 혜원이가 보였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내가 늘 앉아 있는 그 장소에, 그 벤치에, 혜원이와 그 사람이 있었다.
이 자리가 어떤 곳인지 아느냐고, 그 사람이 외쳤던 그 곳에 그와 혜원이가 있었다.
혜원이는 벤치에 앉아 있고, 그는 혜원이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지는 것도 같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의 미소를 잘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웃는 모습.......그가 웃는 모습을, 그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던가.
그가 다른 사람을 향해서 미소 짓는 걸 보는 게 참 묘했다.
혜원이에게는 빛이 있었다.
늘 밝았다.
내게 있는 그런 무거움이 없었다.
그래서 혜원이가 좋았고, 또 그래서 부러웠다.
누구나 혜원이에게는 쉽게 다가갔다. 씩씩하고 당찬 혜원이의 매력이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열게 했다.
나도 이 왕족이라는 무게를 벗으면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혜원이와 내가 그렇게 닮았나?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던 것도 같다.
둘이 많이 닮았다고.
그런데 궁인들 말대로, 두 사람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그는 늘 무거워보였는데, 혜원이랑 있으니, 훨씬 가벼워보였다.
밝고 건강한 혜원이가 그에게 더 잘 어울려보였다.
"왜, 여기 서 있어?"
언제 왔는지 재하가 옆에 와서 선다.
"왜 안 가고 여기 있는 거야?"
재하는 동생의 시선 끝에 있는 혜원이와 시경을 보자,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두 사람, 방해할까봐 안 가는 거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둘이 잘 어울리는데?"
오빠의 눈에도 그렇게 보이나 보다.
내 눈에도 그런데.....
"응. 잘 어울려."
재신의 목소리가 의외로 담백해서 재하가 도리어 의아했다.
"안 이상해?"
"뭐가 이상한데?"
"그냥....뭐, 널 좋아한다는 어떤 군인이랑, 너랑 제일 친하다는 친구랑 저러고 있는데,
이상하지 않나?"
"혜원이.......참 건강하다. 그치?"
재하의 말에 재신은 전혀 딴소리를 한다.
"갑자기 뭔 소리야?"
"그냥......반짝 반짝 빛난다. 내 친구.
씩씩하고, 건강해서 보기 좋아."
"이재신. 너."
재하는 금방 눈치 채고 만다.
자신의 동생이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어떤 마음인지.
내 동생은 분명 잘 이겨내고 있었다.
기억을 잃고 나서는 훨씬 더 잘 해내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찾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바쳐야 할 곳에 어김없이 가서 일하곤 했다.
내 동생이었다.
대한민국 유일한 공주였다.
당차게, 장애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당당하게 일어선 우리의 공주였다.
그런데 내 동생이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은,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픔이었다.
절대로 극복될 수 없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아픔.
"그거 알아?
건강해서 좋다고, 반짝반짝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 굉장히 건강한 거야. 오빠."
"재신아!"
"정말 너무너무 부러우면, 그런 말도 못해.
나 자신을 비관하면, 좋다는 말도 못해. 부럽다는 말은 죽어도 못해.
그러니까 괜찮은 거야. 나.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재신은 안다. 지금 재하의 마음이 어떤지. 지금 얼마나 가슴 아파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재신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일들은 있다.
내가 갖지 못하는 것들, 혹은 내게서 가져가시는 일들이 있다.
그러나 그 또한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다른 이가 가진 것이 아름답다고, 반짝반짝 빛나서 부럽다고
그런 말을 하지 못하란 법은 없다.
재신이 몸을 돌렸다.
"뭐야, 너. 안 가?"
"응. 그냥....저 두 사람, 있게 놔두자."
"왜?"
"왜라니.....그냥."
"두 사람, 같이 있어도, 너 괜찮은 거야?"
재신은 재하의 물음이 낯설다.
"그럼, 괜찮지 않아야 하는 거야?"
"아니....그렇다기보다......."
"혜원이를 위해서.......좀 피해주고 싶어."
"혜원이? 혜원이가 왜? 어? 그거?
혜원이가 은시경 혼자 짝사랑한다는 그거?"
"오빠도 알아?"
재신이 말갛게 자신을 바라보자 재하는 난감해진다.
이 녀석 진짜 그 말을 믿은 거네.
이것 참.
안 그래도 김동욱에게서 그 얘기를 들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김동욱이란 놈이 뭔가 불만이라는 듯이 그 얘기를 했다.
저건 또 왜 저래? 싶었지만,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다른 데 신경 쓸 수가 없었다.
혜원이의 임기응변이었겠지.
그런데 아무래도 재신이 녀석,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재신이 놈은 아마 혜원이 일이라면, 무조건 밀어주려 할 텐데......
이거 도리어 더 난감해진 거 같기도 하다.
"공주님!!!"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들켜버렸다.
그가 나를 보고 말았다.
오빠만 아니었어도 피할 수 있었는데.......
두 사람이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재하는 두 사람을 향해서 미소를 짓는 재신을 보다가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래, 니가 그렇단 말이지.
“야, 은시경! 넌 난 안 보이고, 재신이만 보이냐?”
재하가 또다시 심술을 부린다.
시경은 늘 그런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만 숙였다.
"이야~~ 근데 둘이 그림 되는데?"
그러나 이어진 재하의 말에 시경은 바로 얼굴이 굳어졌다.
시경의 눈은 바로 재신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재신은 시경을 보고 있지 않았다.
시경의 얼굴에 안타까워하는 표정이 지나가는 것을 재하는 놓치지 않았다.
"전하, 그런 말씀 좀 하지 마세요.
또 놀리시는 거예요?"
혜원이 밉지 않게 흘기며, 재하를 타박했다.
"왜 이래? 내가 한 소리 아니야."
"네? 그럼 누가 한 소린데요.
여기 계신 은시경 씨도, 저도 다 들었거든요?"
"둘이 그림 된다고, 방금 공주님께서 그러셨거든.
맞지, 이재신? 둘이 잘 어울린다고, 니가 그랬잖아."
"어? 어......."
"봤지? 봤지? 그리고 재신이가 피해주자고 그랬다니까.
둘이 시간 가지게 해 주자고, 재신이가 자리 피하자고 그랬다고!!
이재신 니가 말해 봐. 맞지?"
혜원이는 황당한 눈으로, 시경은 상처받은 눈으로 재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응. 그랬어.
두 사람 잘 어울려."
재신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것처럼, 아니 도리어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는 것도 같았다.
재신은 진심이었다.
두 사람이 잘 되면 괜찮겠다고.
두 사람 다에게 좋은 일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 남자도 혜원이가 훨씬 나을 거라고, 곧 혜원이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
재신은 생각하고 있었다.
혜원이가 이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다.
혜원이는 남자를 함부로 좋아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오픈되어 있는 것 같았지만, 사랑을 구속이라 여겼다.
자신의 일이 우선이었고, 자신의 꿈이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그래서 남자 때문에 자신의 일이, 꿈이 막히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랬던 혜원이가 좋아한다는 남자였다.
진심으로 두 사람이 잘 되길 바랐다.
은시경 씨에게 적어도 이렇게 불편한 자신보다는 혜원이가 훨씬 잘 맞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전,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 순간 시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화가 난 듯, 그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시경은 고개를 숙이고는 바로 뒤돌아서 걸어가 버렸다.
재신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6
혜원은 가끔씩 궁에 들리기로 하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잠시라도 같이 있고 싶었지만, 혜원은 자신의 부모님께서 슬퍼하신다며, 결국은 돌아갔다.
재신은 동욱에게 부탁해서 근위대 배치표를 확인했다.
그리고 시경과 마주치지 않도록 자신의 스케줄을 완전히 조정했다.
성당을 갈 때도, 장애우 사업을 위한 세미나에 참여할 때도, 동욱에게 근접 경호를 시켰다.
오빠 심부름으로 그가 오더라도, 직접 전달을 받지 않고, 궁중실장님이나 동욱이 대신 전달받도록 했다.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아니, 최대한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를 위해서도, 또 헤원이를 위해서도, 나 자신을 위해서도 최선이라 여겼다.
며칠 후면, 제주 포럼에 갈 테니, 한참 동안 그를 보지 않아도 될 거다 싶었다.
동욱 씨도 내가 그를 피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 친구를 배려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산책하시고 싶으시면, 오늘은 괜찮을 거라는 얘기를 은근히 흘렸다.
"왜요?"
"아....그게.....오늘 근위대장님, 사가에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집안 일 때문에........"
"아, 그래요? 근데......"
"예?"
"동욱 씨, 왜 안 물어요? 내가 근위대장님 피하는 거......"
"왠지......친구 분 때문인 거 같아서......."
"응. 아는구나. 근데 그래서 이상해요?"
"예? 이상하다기보다는........
공주님께서 친구 분을 굉장히 아끼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맞아요. 동욱씨.
나, 혜원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해줄 수 있어요."
내 말에 동욱 씨는 놀란 눈치였다.
"왜요? 남자들만 의리 있는 줄 알았어요?"
"아, 아닙니다. 두 분......굉장히 특별하신 것 같아서......."
"응. 맞아요. 특별해요. 혜원이는 정말 내게 너무나 특별해요.
혜원이도 그럴 거예요."
동욱은 그런 재신을 한참 바라본다.
어쩌면 혜원이라는 사람도 꽤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주님께서 저토록 아끼신다면,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싶었다.
재신은 동욱이 완전히 돌아가고 나서야, 겨우 목발을 짚고 나왔다.
궁중실장님께만 살짝 얘기해 놓고, 근위대원도 없이 밖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후원을 걷고 있으니,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것도 같았다.
아까까지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지더니, 소나기가 지나간 듯, 온 세상이 말갛게 변했다.
군데군데 물 웅덩이가 있었지만, 그래도 걸을 만 했다.
비 냄새가 정신을 맑게 했다.
흙의 기운이 밤공기를 덮고 있었다.
비가 올 때 나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서, 다음엔 꼭 비옷을 챙겨 입고 나와 봐야겠다 싶었다.
그래도 우산을 받치고 걷는 그 기분을 느낄 수는 없겠지.
다리를 다치고 나서, 그게 가장 아쉽다.
아니다. 이만큼 걷게 된 게 어디야.
더 열심히 연습하면, 한 쪽 손으로 우산 받치고, 목발 짚으면서 다닐 수도 있을 거야.
재신은 애써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시 공주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1층 현관부터 불이 깜빡이더니 그만 나가고 말았다.
뭐야? 불 나간 거야?
아까 번개가 심하게 치더니, 두꺼비집이 나갔나 싶기도 했다.
복도가 어두웠다.
잘못 디디다가는 더 큰일 나겠다 싶었다.
1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으니, 자신을 찾으러 내려오겠거니 싶었다.
재신은 복도 벽에 몸을 기댔다.
눈도 점점 적응해서 어느 정도 앞이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서 있을 수 있는 것도 참 감사한 일이다 싶다.
창을 열고는 창틀에 걸터앉았다.
바람 사이로 나뭇잎에 맺혀 있던 빗방울이 날려 들어왔다.
그때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현관 쪽에서 재신이 있는 쪽으로 누군가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근위대원이겠거니 싶어서 재신은 기다리고 있었다.
부축해달라고 해야겠다 싶어 그쪽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그 사람이 멈칫 선다.
"누구.....세요?"
내 목소리에 그가 앞으로 더 성큼성큼 걸어왔다.
내 바로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인 사람은, 그 사람이었다.
내가 피하고 피했던, 그 사람이었다.
"또, 혼자 나오셨습니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곧 데리러 올 거예요."
"어두워서 못 올라가신 건 아니구요?"
그의 눈이 여전히 화가 난 것 같다.
생각해 보니, 그 때 화내면서 돌아서 간 이후 처음으로 그와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
"오늘 사가로 간다고 들었는데, 다시 들어온 거예요?"
내 말에 그가 흠칫한다.
말해 놓고, 난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마치 정말 당신을 피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 사람이 없는 시간에 일부러 나왔다고......
당신 스케줄을 알고 내가 피하고 있다고.......
"그래서......나오셨습니까?"
한참 만에 그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러나 난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게서 고개를 비낀 채,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공주님!!"
"은시경 씨. 돌아가서 쉬세요.
궁인들이 곧 올 테니까, 난 여기서 좀 이따가 갈 거예요."
나는 여전히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의 눈을 볼 수도, 볼 용기도 없었다.
그저 피하고 싶다.
"제 질문엔 대답, 안 해주십니까?"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억지로 화를 참는 것처럼, 그는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 이러고 있을 수도 없었다.
목발을 잡고 일어서서 한 발짝 채 딛기도 전에, 그의 팔이 내 팔을 잡았다.
그러고는 내 두 팔을 잡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 순간 복도에는 목발이 떨어지는 소리만 울려대고 있었다.
"은시경 씨!!! 지금!!! 뭐하는 거죠?"
화가 나서 올려다 본 그의 눈은 엄청난 감정의 깊이로 울렁대고 있었다.
"왜 자꾸 피하시는 겁니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지금, 피하시고 계시잖아요.
도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은시경 씨!!!"
"지금도, 제가 없으니까 나오신 거잖아요.
절 보는 게 그렇게 싫으세요?"
몇 번을 찾아가도, 볼 수 없었다.
먼발치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미칠 것 같았다.
마치 작정한 듯, 그녀는 자신을 꼭꼭 숨겼다.
오늘도 그랬다.
사가에 머물러도 됐었다.
그래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를 볼 수 없다고 해도, 그녀의 곁에 있고 싶었다.
몇 번이나 그녀의 방 앞에 머물다가 가곤 했다.
그래도 이곳에 계시니까, 저 벽 너머 그녀가 쉬고 계시겠지 싶어서,
그렇게라도 그녀 근처에 있고 싶었다.
그녀는 모른다.
지금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지금 자신이 얼마나 죽을 것 같은지.
달빛 사이로 그녀의 얼굴이 말갛게 보인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그녀를 보고 있으니 살 것 같다.
그가 자신을 뚫어질 듯 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지금 미칠 것 같다고, 힘들어서 죽을 것 같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그 감정의 깊이를 감당할 수가 없다.
그래서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두.....사람........잘 어울려요.
잘.....됐으면, 좋겠어요. 혜원이 정말 좋은.......아!"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내 어깨를 강하게 잡고 벽에 더 세게 밀쳤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은...시경 씨......"
"전,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누구를 품고 있는지, 전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래도, 모르시겠습니까?"
그의 눈 속에 불꽃이 이는 듯도 했다.
"더 정확하게 알려드려요?"
그의 입술이 내 입술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순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그의 입술에 닿을 것 같았다.
그가 내 입술 바로 앞에서 속삭였다.
"제가 뭘 하고 싶은지,
공주님만 보면, 뭘 하고 싶은지,
이제 아시겠어요?
제겐 다른 여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그의 입김이 내 입술 바로 앞에서 느껴졌다.
그가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내 입술에 닿을 것만 같았다.
그것이 그의 입술인지, 그의 숨결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내 입술 위를 간질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내 입술 바로 앞에서 여전히 움직이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다른 건 참을 수 있습니다.
공주님께서, 다른 사람을 좋아하실 수도 있고,
또, 절 좋아하시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적어도, 제 마음 가지고 마음대로 판단하시지는 마세요.
적어도 제 마음은 제 거니까, 그걸 가지고, 장난치진....마세요."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부들부들 떨며 서있을 뿐이었다.
그 때 내 어깨를 잡고 있던 그의 오른손이 내 얼굴로 올라왔다.
놀라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그의 눈은 내 입술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내 입술을 훑었다.
묘한 느낌에 온 몸이 떨려왔다.
그의 눈이 심연의 바다처럼 가라앉고 있었다.
내 입술 위에 그의 손가락이 올려진 채로,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마치 그의 입술에 직접 닿은 것처럼 가슴이 떨려왔다.
아니 입술이 닿은 것보다도 더 떨렸다.
그의 입술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내게 다가왔다.
닿인 듯, 닿이지 않은 듯, 그의 입술은 내게 다가왔다 떨어졌다.
그의 숨결도, 그의 한숨도 모두 느껴졌다.
그의 입술은 떨어졌지만, 그의 손가락은 여전히 내 입술 위에 놓여 있었다.
그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러니까 저 자극하지 마세요. 공주님."
그의 낮은 목소리가 조금은 갈라진 듯, 조금은 거칠게 들린다.
멀리서 여러 명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내 입술을 한 번 더 쓰다듬더니, 이내 현관 밖으로 나가버린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궁인들과 근위대원들이 내게 와서 괜찮으시냐고 부산스럽게 말할 때까지 나는 그저 그가 떠난 자리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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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좀 줄여 써야지 하면서도, 오늘도 또 36장입니다.
이 지루한 글, 여전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__)
+) 12회까지 주신 댓글에 답글 달았어요. 늘 이렇게 댓글로 격려해 주시고 힘주셔서 넘넘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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