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킹투하츠와 은신상플/(은신)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은신상플)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14 - 존재가 존재에게 주는 위로

그랑블루08 2012. 7. 26. 03:06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14

 

 

 

 

 

 

 

 

 

*배경음악을 틀고 봐주세요.

1. 정엽 - 한 발짝도 난

2. 현성 - 오직 너만을

3. 알리 - 별 짓 다해봤는데

 

 

 

 

1.

 

 

 

 

후원.

뭔가에 이끌린 듯, 점심을 먹은 후 습관처럼 가 본 그 곳에 그녀의 친구가 앉아 있었다.

뭔가 낯 뜨겁기도 하고, 잘못하면 공주님께서 오해하실 것 같아서, 고개만 잠깐 숙이고 바로 돌아섰다.

 

“은시경 씨”

 

그런데 그녀의 친구는 나를 붙잡았다.

 

“어제, 놀랐죠?”

 

“예?”

 

“첨 본 여자가 와서 갑자기 안지를 않나, 좋아 한다 그러질 않나........큭큭.....

내가 생각해도, 진짜 이상한 여자 같았을 거야. 큭큭.”

 

박혜원이라는 이 사람은 뭐가 웃긴지 계속 혼자 키득거리고 있다.

시경은 그런 그녀가 몹시 못마땅했다.

공주님께서 오해하시는 것도 싫고, 뭔가 자신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는 기분이랄까.

 

“죄송하지만, 전 공주님 친구분......처음 뵈었습니다.

또 그렇게 나오시면, 제가 곤란해.......”

 

“알아요. 곤란했던 거. 근데 어쩔 수 없었어요.”

 

“예?”

 

“은시경 씨에 대해 말하지 않기로 한 게, 약속이었으니까요.

대한민국 국왕전하와 한 약속.”

 

전하와?

그렇다면, 이 사람도 나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은시경 씨, 나, 예절 이런 거 굉장히 따지는 사람이에요.

적어도, 형부될 사람, 아니지 제부가 되나? 여튼 그런 사람에게 혹할 만큼, 경우 없는 여자 아니에요.

그러니까 안심해요.”

 

“형부.....라니....무슨 말씀이신지......”

 

“큭큭.......그래도 은시경 씨가 살아 있으니 이렇게 웃을 수도 있네요.

처음에 은시경 씨를 보면, 정말 때려주려고 했는데, 그게 참 안 되더라구요.

살아 있는 은시경 씨 보니까.......진짜 울컥했어요.”

 

“저........”

 

“제가 어떻게 은시경 씨를 아는지 궁금하죠?

공주님이........늘 은시경 씨 얘기한 거 알아요?”

 

“.............제 얘기를......하셨습니까? 공주님께서........”

 

“네. 아주 답답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자꾸 자기를 피한다구요.

분명 좋아하는 거 같은데, 자꾸 아니라고 한다구요.”

 

시경은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시경을 혜원은 살짝 흘겨보더니 이내 입가에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근데........이해해요.

나도 그럴 거 같아요.

만약에 말이에요.

내가 엄청나게 좋아했던 배우가 나 좋아한다 그러면, 너 지금 나 놀리냐고 그럴 거 같아요.

죽어도 못 믿겠죠.

그는 스타니까......절대로 일반인인 나를 좋아할 리가 없을 테니까.......

나는 당신을 좋아할 수 있어도, 스타인 당신은 나 같은 일반인을 좋아할 리 없다.

뭐 그런 심정 아닐까 해요.”

 

연예인을 좋아해 본 적은 없다.

그래서 그게 어떤 감정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사람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것 같다.

혜원은 시경 자신이 느꼈던 그 감정을 그대로 얘기해주고 있었다.

내가 공주님을 좋아할 수 있어도, 공주님께서 나를 좋아할 리는 없을 거라는 것.

 

“근데 그거 아세요. 그때 공주님은 진심이었다는 거.

은시경이라는 남자에 대해서.......”

 

그 말에 시경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진다.

 

“알고.....있습니다.”

 

가슴이 또 한 번 저릿해진다.

 

“그러니까 내가 절대로 당신을 넘볼 리는 없다는 거예요.”

 

“예?”

 

“은시경 씨는, 내게 형부가 될 사람이니까.

뭐, 공주님 생일이 저보다 빠르니까, 형부라고 하죠.

어쨌든 내가 처음으로 인정한 공주님의 남자예요. 은시경 씨는.”

 

혜원이 시경을 향해서 따뜻하게 웃어준다.

 

“그러니까, 저는 당신을 지지한다구요.

물론, 중간에 당신 때문에 속앓이한 거 생각하면, 진짜 한 대 때려주고 싶지만,

그래도 살아 돌아왔으니, 그걸로 됐어요.

어쨌든 은시경 씨의 사랑, 은시경 씨가 공주님의 남편이 되는 거, 내가 엄청나게 지지하고 있다구요.”

 

“처음....입니다. 제 마음 지지해주신 분........”

 

시경은 목이 메었다.

처음으로 들어보는 말이었다.

그래서 고마웠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어쩌면 나 혼자만 던져진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누군가 나를 밀어주는 사람 있을지도 모른다고 안심이 되기도 한다.

 

“어! 은시경 씨 웃기도 하네요. 와~~! 이래서 공주님이 반했구나.”

 

“예? 아....저........”

 

“둘이.......똑같은 거 알아요?

은시경 씨가 공주님 생각하는 얼굴이나, 공주님이 은시경 씨 생각하는 얼굴이나,

둘이 똑같은 표정을 짓는 거 알고 있어요?”

 

“공주님께서......제 얘기........많이 하셨습니까?”

 

“그렇게 설레요?”

 

“예? 예...그게.......”

 

혜원은 이 과묵하고 무뚝뚝한 남자가 이렇게 변하는 게 참 신기하고도 웃겼다.

공주님이라고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가슴 설레하는 남자가,

사랑에 빠진 남자는 이렇게 변할 수도 있구나 싶어서,

되게 딱딱해보이던 군인도 이렇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수도 있구나 싶어서,

혜원은 또다시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시경의 심장은 계속해서 쿵쿵 뛰고만 있었다.

공주님께서 자신의 얘기를 했다는 것이, 그렇게 설렐 수가 없었다.

가슴이 자꾸만 간지러웠다.

그런 자신이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던 순간, 그곳에 그녀가 서 있었다.

고개를 돌리며 뒤돌아서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공주님!!!”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불렀다.

보고 싶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하다가 더 미치도록 그녀가 생각나서, 그녀가 보고 싶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곁에 전하가 계셨다는 건, 전하께서 난 안 보이냐고 타박하시고 나서야 알았다.

내 눈엔 온 세상이 모두 그녀 하나만을 향하고 있었다.

나의 공주님. 나의 세상.

 

그러나 곧 시경의 세상은 무너지고 말았다.

 

“두 사람 잘 어울려.”

 

들떠 있던 시경의 마음은 그 말 한 마디로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설레던 마음은 바로 처절하게 응징당하고 말았다.

착각하지 말라고.

너는 아직도 2년 전 그 시절 속에 있느냐고.

웃기지 말라고.

 

"전,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녀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당신은 지금 내 마음을 보고 있느냐고.

지금 내가 어떤 심정인지 아느냐고.

그녀를 향해서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나라는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기억해야 할 어떤 의미도 없는, 근위대원에 불과했다.

 

"죄송하지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더 견딜 수가 없어서, 돌아서고 말았다.

나의 세계는, 이렇게 또 무너지고 만다.

늘 그녀를 향해서 달려가는데, 나의 세계는 오로지 그녀 한 사람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녀의 세계 속에는 내가 없다.

나라는 존재는 없다.

그것이 내 심장 저 밑바닥까지 서늘하게 한다.

 

 

 

 

2

 

 

 

아버지의 호출이었다.

혼자 살고 있는 시경의 오피스텔에 아버지가 올라오셨다고 연락을 하셨다.

요즘 계속 예민해지고 있는 시경으로서는 아버지의 연락이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다.

자신이 왜 이렇게 예민한 건지.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한지.

그건 오로지 한 가지 이유다.

 

당신이라는 사람.........

너무나 아름다워서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

나의 아름다운 공주님.........

 

그녀를 볼 수 없는 날들이 쌓여갈수록 시경은 점점 예민하고 날카로워져 가고 있었다.

하필 이럴 때, 아버지를 만나야만 하다니.......

 

 

 

 

 

 

 

 

 

 

오피스텔 앞 식당에서 같이 식사를 하며, 시경도, 규태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규태는 아들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살아 돌아와 준 것이 너무나 고마우면서도, 이젠 자식놈이 겁이 났다.

내 등을 보며 걸어오라고 이젠 말할 수 없어서, 그래서 이 자식놈이 자신을 아비로 인정해줄 것 같지 않아서,

이 놈을 보는 것이 두려워진다.

 

그러나 오늘 규태는 작정하고 올라왔다.

아들 놈의 얼굴을 보니, 잘 올라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아직이냐?”

 

“예? 무슨 말씀이세요?”

 

“니 마음, 아직 정리 덜 됐느냐고 묻는 거다.”

 

시경은 놀라서 규태를 바라봤다.

규태는 그저 무심한 듯 밥을 먹고 있다.

 

“정리........라니요?”

 

“아비가 모를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아버지도 알고 계셨던 걸까.

 

“알고.....계셨던 겁니까? 언제부터.........”

 

“니가 제주포럼에 정신없이 뛰어갈 때부터다.

난, 니 아비다. 모를 수가 없지.

한 번도 이성을 놓은 적이 없는 놈이, 그렇게 감정적으로 날뛰는데 모를래야 모를 수가 있나.”

 

시경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되셨다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자신도 자신의 마음을 감출 수가 없는데, 이 마음이 이토록 정신없이 튀어나오는데,

이젠 스스로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정리해라.”

 

“..............”

 

“시경아....”

 

“.......왜........그래야 합니까?”

 

그러나 이 말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모두 자신에게 정리하라고만 하신다.

왜, 그래야 하나. 왜.

 

규태는 감정으로 일렁이는 자신의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도 그랬다.

날라리 같던 왕제를 한없이 믿던 놈이었다.

자신의 왕은 약하지 않다고, 위기에 강하시다고, 강변하던 놈이었다.

니가 믿고 싶으니 그리 믿는 게 아니냐며,

너라는 놈은 원래 한번 믿으면 끝까지 가는 놈이지 않느냐고 그때도 시경에게 호통을 쳤었다.

 

이렇게 이 놈은 한 길밖에 모르는 놈인데.

한 번 믿으면 끝까지 가는 놈인데.

그래서 전하를 선택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았던 놈인데.

그런 놈이 공주님을 마음에 품었다.

저 깊은 곳에서 한숨이 새어나온다.

 

“내 잘못이다.”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시경아, 내 잘못이 아니더라도, 넌 안 된다.”

 

“무슨, 말씀이세요? 왜, 전 안 되는데요?”

 

“대한민국 왕실이다. 넌.......안 돼.

아무리 공주님이 다리를 다치셨더라도, 이 나라의 공주님이다.

그리고 이젠 공주님의 다리도 거의 나아가고 계시지.

예전으로 돌아가시는 건, 이젠 시간문제다.

왕실은 국익과 비즈니스와 정치가 얽혀 있는 곳이다.

전하도, 공주님도 모두 그걸 너무나 잘 아시지.

어려서부터 그렇게 교육받고 자라신 분들이다.

그리고 국익을 위해서라면, 개인적인 부분은 얼마든지 접으실 분들이야.”

 

시경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자신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직접 듣는 것은 아무리 알고 있더라도 상처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널 선택하실 리도 없지만, 널 선택하셔서도 안 된다.

넌, 대한민국 왕실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아.”

 

입술을 깨물고 있는 시경의 눈에 물기가 어른거렸다.

그러나 규태는 자신의 말을 그만둘 수가 없다.

아들 놈의 마음을 지금 끊어놓지 않으면 안 된다.

 

“대한민국은 어차피 왕실만 존재한다.

다른 귀족들은 없어. 오로지 타겟은 왕실이 되는 거다.

그러니 저 엄청난 세금으로 굳이 왕실이 존재해야 하는지 여전히 의문을 품는 자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언제든지 왕실은 없앨 수 있다.

단숨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국민투표라도 실시한다면 어떻게 될 거 같으냐?

왕실 스스로가 존재 가치를 증명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어.

단순히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으니 남아야 한다는 논리는 지금 이 사회에서는 어울리지 않아.

반드시 그 역할이 있어야 해.

또 그 역할을 하려면, 반드시 자본이 바탕이 되어야만 하지.

그런데 니가 왕실을 위해서 그 자본을 댈 수 있다는 거냐?”

 

“.....................”

 

“그래, 공주님이 너를 진짜 좋아한다고 치자.

그렇다고 너를 부마로 삼으실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 전하께서 인정하실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좋다. 백번 물러서, 공주님도 전하도 인정해 주신다고 치자.

왕실의 종친들은, 수상이나 내각 쪽에서 옳다구나 해줄 것 같으냐.

왕실이 힘이 있을 것 같으냐?

왕실도 결국에는 돈의 논리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 패를 쥐고 있는 논리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공주님께서 너를 선택해서 왕실에 존폐위기가 생긴다면, 공주님이 정말 너를 선택할 거 같으냐.

자신의 손으로 자기 오빠를 왕좌에서 끌어내릴 것 같으냐, 이 말이다.”

 

쩡하고 가슴 속에 유리가 깨져버렸다.

현실을 직시한다는 것은 정말 잔인한 일이다.

 

“니가 믿는 전하의 일, 전하께서 원하시는 통일된 평화로운 대한민국.

그것도 모두 일장춘몽으로 끝나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좀 더 과장되게 말하자면, 니 마음 하나가, 대한민국 전체의 운명을 바꿔버릴 수도 있다.”

 

아버지는 쐐기를 박으셨다.

아무 말도 못하게, 아무 대꾸도 못하게.

주먹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모두가 그녀를 정리하라고 한다.

언감생심. 너 따위가 어떻게 감히 품느냐고 한다.

 

나는.....나는......그런데.......나는........

그녀를 놓을 수가 없는데.........

그녀를 놓고서는 살 수가 없는데..........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시경의 앞에 사진 하나가 놓였다.

 

“뭡니까?”

 

“대법관을 지내신 내 대학 선배님의 여식이다.”

 

“아버지!!!!”

 

“사람으로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만 치유될 수 있다.

그러니까.......”

 

“싫습니다.”

 

“시경아!”

 

“차라리, 절 더러 다시 죽으라고 하세요.”

 

“너 지금 아비 앞에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싫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모셔다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조심해서 내려가세요.”

 

미칠 것 같았다.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오피스텔로도 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보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 같았다.

 

시경은 운전대에 앉으며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풀어서 옆자리에 던져버렸다.

그러나 목울대를 답답하게 하는 그 느낌은 없어지지 않았다.

비가 와서 길이 질척대고 있었지만, 시경은 엑셀레이터를 미친 듯이 밟았다.

그렇게 그녀가 있는 곳까지 왔다.

 

세상이 까맣게 물든 그곳에, 오로지 그녀만이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오면서 생각했었다.

왜 자신은 그녀를 사랑하게 된 걸까.

그녀를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왜 나는 그녀를 사랑하게 된 걸까.

 

그런데 시경은 또다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강렬한 빛에 몰려들 수밖에 없는 수많은 불나방들처럼,

죽을 걸 알면서도 달려들 수밖에 없는 하루살이들처럼,

자신도 그러하다는 것을......

그렇다고 그 빛을 탓할 수는 없다는 것을........

너무나 아름답게 빛나는 별을 사랑하는,

그 수많은.......하찮은.........사람들 중 하나라는 것을.........

 

그래도 소리치고 싶었다.

그래도 자신은 조금은 다르지 않았느냐고.......

적어도 한 번은 자신을 바라봐 주지 않았느냐고.......

아무리 평범해도, 아무리 하찮아도,

당신은........나를 봐주었었다고..........

그래서 소리치고 싶었다.

 

왜 피하느냐고.......

피하지 말라고........

나를 싫어하지 말라고........

아름답게 빛나는 당신을 사랑한, 그저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남자들 중 하나가 아니라,

그래도 조금은 다르게 여겨달라고.......

그렇게 그녀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두.....사람........잘 어울려요.

잘.....됐으면, 좋겠어요. 혜원이 정말 좋은.......아!"

 

그러나 그녀의 말은 잔인했다.

그녀는 내가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다른 여자와 잘해 보라고, 내게 어울리는 여자는 다른 여자라고,

그토록 잔인한 말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잡고 벽에 더 세게 밀쳤다.

내 화를 나 역시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그녀가 미웠다.

그렇게 나를 밀어내는, 그녀가...........너무나 미웠다.

 

어떻게....내게....그 말을 할 수 있는지........

그토록 내 마음을 보여줬는데.......

어떻게 내게 다른 여자와 잘 해보라고 말할 수 있는지.......

그녀에겐 내 마음이 우스운 건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지......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은...시경 씨......"

 

"전,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누구를 품고 있는지, 전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래도, 모르시겠습니까?"

 

눈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더 정확하게 알려드려요?"

 

이성을 놓아버린 난 그녀의 입술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그녀의 숨결이 바로 느껴졌다.

닿을 듯이 그녀의 입술 앞에 머물렀다.

 

"제가 뭘 하고 싶은지,

공주님만 보면, 뭘 하고 싶은지,

이제 아시겠어요?

제겐 다른 여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들리지 않는 그녀에게,

내가 아무리 사랑한다고 말해도 모르는 그녀에게,

나는 또다시 이렇게 다가가고야 만다.

제발, 내 마음을 보라고.

내가 지금 어떤 마음을 품는지 봐달라고,

나는 또다시 이렇게 그녀에게 다가가고야 만다.

 

"다른 건 참을 수 있습니다.

공주님께서, 다른 사람을 좋아하실 수도 있고,

또, 절 좋아하시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적어도, 제 마음 가지고 마음대로 판단하시지는 마세요.

적어도 제 마음은 제 거니까, 그걸 가지고, 장난치진....마세요."

 

적어도 내 마음만은 농락하지 않길 바랐다.

날 기억하시지 못해도, 또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내 마음만은 내 마음에 대해서만은 알아주시길 바랐다.

그녀는, 아무리 말해도 내 마음을 모른다.

내가 어떤 심정으로 그녀를 품고 있는지,

지금 내 심장이 어떤지, 내가 얼마나 그녀의 입술을 훔치고 싶은지,

지금도 이렇게 미칠 듯한 향기로 얼마나 나를 들뜨게 하고 있는지,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녀의 입술만 보인다.

입 맞추고 싶다.

그녀를 느끼고 싶다.

그녀를 가지고 싶다.

품고 싶다.

미칠 듯한 욕망 앞에서 내 손은 이미 그녀의 입술을 훑고 있었다.

거기서 끝냈어야 했다.

이제 내 마음 가지고 장난치지 마시라는 말만 남기고 돌아섰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느끼고야 말았다.

그녀의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에 손을 대고야 말았다.

태초에 금기의 사과에 손 댄 것처럼, 나는 그 유혹 앞에서 또다시 무릎 꿇고 말았다.

 

그녀의 입술 위로, 다가가고야 말았다.

그녀의 입술을 맛보고 싶었지만, 그래도 일말의 이성이 남아서, 적어도 손가락은 떼지 못하게 했다.

코끝을 간질이는 그녀의 향기가, 한숨을 내쉬는 그녀의 숨결이, 바들바들 떨리는 그녀의 입술이 손가락 사이로 느껴졌다.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술이, 그녀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도 같다.

손가락에 느껴지는 그녀의 부드러움은 곧장 심장 저 아래로 내려가, 또다시 심장을 정신없이 뛰게 만든다.

알싸한 저릿함이 심장을 또다시 관통했다.

 

나의......공주님.......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놀란 듯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떨렸다.

그 모습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욕심내고 싶다.

정말로 갖고 싶다.

미칠 것만 같다.

 

그녀의 입술에 놓인 손은 떨어질 줄 몰랐다.

갖고 싶다는 내 야수 같은 욕망 앞에서 그녀의 몸은 떨고만 있었다.

계단으로 내려오는 소리만 없었다면, 나는......어떻게 되었을지, 나 자신도 알 수가 없다.

 

나는......미친 놈처럼, 밖으로 나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정말.....미친 놈이다.

정말.....미쳐버렸나 보다.

 

그녀를......가지고 싶다.

그녀를......욕심내고 싶다.

 

그 순간 생각했다.

그녀를 안아서 내 차에 태워 도망가버리고 싶다고........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서 그녀를 품어버리고 싶다고.......

 

 

나는.......미친 놈이다.

 

검은 하늘 아래, 검은 짐승처럼 시경은 눈을 감았다.

감은 두 눈 사이로, 그녀의 입술이 떠올라 또다시 그를 미치도록 만든다.

 

 

 

 

 

 

 

 

 

 

 

3

 

 

 

 

“어쨌든, 차관은 수면 아래로 알아서 잘 퍼뜨려 봐.

무기 잔치가 될 거라고 말야.”

 

“예.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은근히 말을 흘려.

이재하가 테러 때문에 골머리를 앓더라고.

북한 강경파 소행 아닌가 생각도 하더라...뭐 그런 얘기도 흘리고.”

 

“전하, 그런데 그쪽에서 일단 참석한다고 해도, 저희 의견을 따라줄까요?”

 

“뭐, 일단 불러놓고, 언론으로 족쳐야지.

이건 이재신 손에 달린 거라.......

재신이를 믿어봐야지.

아, 근데, 진짜 한 건 터져주면 더 좋긴 한데......

그 놈들이 꼼짝도 못할 건수가......제대로 터져주기만 하면.........”

 

재하는 며칠 째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재하 앞에 서 있는 비서실 차관도, 근위대장 은시경도 모두 답답한 마음은 똑같았다.

 

“조작이라도 하고 싶단 말이야.

그때 동네 문방구에서 사온 폭탄 가지고 장난친 놈 말야.

그 놈이랑 어떻게 클럽 M이랑..아니지 그 놈들 이름 바꿨지.

M 소사이어틴지 뭔지랑 연관만 지으면 좋을 텐데........”

 

“전하......”

 

시경이 조용히 재하를 불렀다.

 

“알았다고. 내가 뭐래? 그냥 해본 소리야.

그럼, 차관 넌 일단 언론 부풀리기나 좀 해둬.

나가 봐. 은시경 너는 남고.”

 

 

비서실 차관이 나가고 나자, 재하의 목소리 톤이 좀 더 가라앉았다.

 

“알아 봤어?”

 

“예. 지금 예전에 만났던 몇 명과 접촉 중입니다.”

 

“별 다른 건 없고?”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M 소사이어티, 라이언 데릭스 회장은 어쨌든 지금은 몸사리고 있는 중이랍니다.

제주 공항에 테러 미수한 놈과도 별 연관은 없어 보입니다.”

 

“아우씨. 도대체 그럼 뭐야. 이거.

또 다른 군산복합체가 이제 일어서고 있는 거야?

M 소사이어티가 움츠리는 동안, 패권 다툼이라도 하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리 M소사이어티가 예전만 하지 못하다고 해도

영향력은 여전히 엄청납니다.

군수물자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서,

새롭게 루트를 모색하려는 경우도 잘 없습니다.”

 

“알았어. 계속 알아봐.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인물들 자료는 다 받고, 체크해 봐.”

 

“예. 전하.”

 

“다국적 기업. 지들이 국가 위에 있는 줄 알지.

어디 이 대한민국이 호락호락한지 한번 붙어보자고.

이제 이틀 후야. 우리가 이제 놀아줘야지.

근데, 은시경!”

 

“예. 전하.”

 

“너, 이번에 호위 어떡할 거야?”

 

“예?”

 

“대한민국 국왕을 호위할래, 아니면 제주 포럼에 가서 재신이 호위할래?”

 

“제가.....선택할 수 있는 겁니까?”

 

“그래, 대한민국 국왕이 일개 근위대장에게 특별~히 선심 쓴 거지.

어떡할 거야? 제주 포럼 갈래?”

 

“대한민국 왕실 근위대 조항 제2조 1항.

대한민국 왕실 근위대장은 대한민국 국왕 전하의 안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여 목숨을 바쳐 대한민국 왕실을 수호한다.”

 

“그래서?”

 

“왕실 근위대장의 임무는 대한민국 국왕 전하를 호위하는 일입니다.”

 

“둘째 날에 상우 온다.”

 

시경은 순간 움찔한다. 재하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마지막 기회다. 어떻게 할래?”

 

“전하 곁에 있겠습니다.”

 

“상우가 온다니까? 제주도야. 무슨 일이 일어날 수도 있어.”

 

재하는 사랑이냐 일이냐를 묻고 있다. 아니, 재하와 재신 중에 선택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시경의 선택은 재하였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대한민국 왕실 근위대장이었다.

 

“대한민국 왕실 근위대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습니다.

전, 전하를 모시겠습니다.”

 

“후유~ 그래, 이게 은시경이지.”

 

그래서 재하는 은시경답다고 생각했다.

죽었다 살아나도, 여전히 은시경은 은시경이었다.

심장이 세 번이나 바뀌어도, 이 놈은 은시경이다.

 

“예전에 내가 형한테 말한 적이 있거든.

형하고 아주 비슷한 놈 하나 있다고 말이야.

고지식한 아이디얼리스트에다가 답답한 놈 있다고.

근데 웃기는 게 말야.

너랑 이렇게 얘기하고 있으면, 진짜 형이랑 얘기하는 거 같다.

어찌 이리도 답답한지, 원.”

 

선왕 전하와 닮았다는 말에 시경은 놀라며 재하를 바라본다.

 

“감히....어떻게 제가......”

 

“그래서.....너란 놈은.......우리에게 아킬레스건이라는 거다.”

 

“예?”

 

시경은 재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재하는 그걸 굳이 설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

 

“참, 은시경!”

 

“예?”

 

진지하던 재하의 눈빛이 다시 장난스럽게 바뀐다.

그런 재하를 바라보던 시경이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혜원이 어때?”

 

“예?”

 

“예쁘지? 혜원이.

너 안고 울었다며?”

 

시경은 아무 말 없이 얼굴이 굳어진다.

 

“둘이 안 닮았냐?”

 

“누구 말씀이십니까?”

 

“재신이랑 혜원이.

둘이 다르면서도 분위기가 닮았어.

생김새는...좀 닮은 것 같기도 해.

둘 다 눈이 크니까......

그러고 보니 진짜 닮았네.”

 

“다릅니다.”

 

재하는 능글능글거리다가 시경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역시 하는 표정을 짓는다.

 

“뭐?”

 

“아주 많이 다르십니다.”

 

“무슨 소리야?”

 

“박혜원 씨는 밝으십니다. 거리낄 게 없으신 듯 보입니다.

그러나, 공주님은.......”

 

시경은 속에서 나오는 한숨을 잠시 내쉰다.

 

“......공주님은......너무 큰 무게가 있으십니다.

아무도 범접할 수도 없는, 그런 무게감이 있으십니다.

늘....자기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용기를 가지시고,

자신보다 더 큰 대의를 위해서 희생할 기회를 엿보십니다.

공주님은.....그래서 그 누구와도 비교되실 수 없으십니다.”

 

시경은 한자 한자 또박또박 힘을 담아서 이야기를 한다.

재하는 한편으론 웃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뭉클하기도 한다.

마치 자신에게 “전하는 이미 가장 힘센 왕이십니다!”라고 외치던 그 때의 은시경을 보고 있는 듯도 하다.

 

“넌, 재신이가 그렇게 좋아?

재신이밖에 안 보여?

저렇게 기억도 못하는데?”

 

“너무 밝은 빛을 보면, 주위에 어떤 것도 안 보이죠.

제겐 그렇습니다.

공주님이 너무 빛나셔서, 다른 어떤 것도 반짝이지 않습니다. 제겐.”

 

그 순간이었다.

밖에서 “공주님”이라고 외치는 궁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재하와 시경이 문 쪽을 바라보자 곧 재신이 목발을 짚고 들어왔다.

 

들으셨을까.

 

시경이 재신을 바라보지만, 재신은 시선을 피했다.

 

 

 

 

4.

 

 

 

 

“들었냐?”

 

재하는 약간은 붉어진 듯한 재신의 얼굴을 살피다 한 마디 툭 던져본다.

 

“뭘 들어? 방금 왔어.”

 

“그~래?”

 

재하는 예의 다 안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제주포럼 때문에 오라고 한 거야?

내가 알아야 될 게 더 있어?”

 

사실 재신에게 충분히 얘기가 전달되어 있었다.

그러나 재하가 지금 재신을 부른 것은, 나름 은시경에 대한 배려이기도 했다.

재신이 계속 시경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피하지 말고, 부딪쳐서 해결 보게 해주고 싶었다.

쫑이 나든, 잘 되든, 뭔가 부딪치면서 일이 진행되어야지, 이렇게 피하고만 있는 건, 재신이답지 않았다.

그래서 재하가 어쩔 수 없이 나선 것이었다.

재하는 했던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 재하를 보며, 재신은 한숨을 쉬었다.

결국 자신이 또 속은 건가 싶기도 하다.

아니면, 걱정돼서 저러는 거겠지 싶었다.

그래서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 말라고, 잘 할 거라고 다짐 섞인 말들을 몇 마디 해 주고는 방문을 나섰다.

 

“그럼, 저도 나가보겠습니다.”

 

재신이 나가자, 시경은 재하의 말은 듣지도 않고 바로 따라 나가버린다.

 

“어휴, 저 놈 저거, 이젠 아예 습관이 됐네, 습관이.

대한민국 전하를 모시는 거 어쩌고 저쩌고 그러더니, 저거 봐.

대한민국 전하를 아~주 우습게 보는 거지. 저게!!!”

 

 

시경이 밖으로 나오자, 천천히 걷고 있는 공주님이 보였다.

시경이 공주님 뒤로 따라붙자, 수행궁인들이 주위를 피해주었다.

 

“지금, 뭐죠?”

 

시경이 가까이 다가오자, 재신은 날을 세웠다.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뭐라구요?”

 

재신은 기가 막혔다.

지금 은시경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신에게 잘 다녀오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제, 분명 그런 행동을 해놓고서도, 그는 편안한 표정이었다.

얼마 전만 해도 자신이 보면 쑥스러워하곤 했었다.

그런데 요즘 그의 분위기가 달라보였다.

진짜...선수 아니야?

 

“이것 봐요. 은시경 씨. 나한테, 사과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결국 재신은 터뜨리고 말았다.

그의 뻔뻔한 태도가 재신을 더욱 열받게 했다.

 

“공주님께..잘못한 건 맞지만, 죄송하지는 않습니다.”

 

“은시경 씨!!!”

 

“벌을 내리시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가 다시 낮게, 허스키하게 깔렸다.

 

“저는 분명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계속 궁에 있으면 불편하실 거라고......

잡으신 건, 공주님이셨습니다.”

 

그는 재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재신이 보면, 피하던 그였는데, 오늘은 피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에 도리어 재신이 흔들렸다.

 

“그래도 공주님께 드린 약속은, 지켰습니다.”

 

그는 당당했다. 사과할 마음은 단연코 없어보였다.

아니, 도리어 나에게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는 지금 내게 화를 내고 있는 건가.

 

“그날, 적어도, 제 욕망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는 짧게 고개를 숙이고는 저만치 뚜벅뚜벅 걸어가 버린다.

 

재신은 벽에 기대어 심장을 누르고 있었다.

궁인들이 달려와 그녀를 부축할 때까지 재신은 쿵쿵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있었다.

 

 

 

 

5

 

 

 

 

재신이 재하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려다 멈칫했다.

 

그가 말하고 있었다.

재신 자신과 혜원이는 다르다고......

전혀 비교될 수 없다고......

언제든지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용기를 가졌다고.....

그 무게감이 재신을 다르게 한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 남자의 말에 재신은 자꾸만 울컥한다.

그는 나를 제대로 봐주고 있었다.

아니, 훨씬 더 밝은 쪽으로 봐주고 있었다.

적어도 내 노력을 알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마치 그 날, 자신의 손목에 입을 맞추며, 눈물을 흘렸을 때처럼, 위로하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하아..........

 

 

그랬던 그는, 나를 향해서 또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없이 따뜻했다가, 또 한없이 차가워지기도 했다.

아니, 차가운 게 아니라, 내게 화내고 있었다.

 

“그날, 적어도, 제 욕망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의 말이 그가 돌아선 후에도 계속 맴돌았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했다는 약속이 뭔지 바로 알지 못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성곽에서와 같은 일은 없을 거라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 날 키스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그는 내게 키스하고 싶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언니, 지금 시간 괜찮아요?”

 

갑자기 문을 두드리고 들어온 재신을 보며, 항아가 놀란 듯, 또 반가운 듯 활짝 웃어준다.

 

“공주님 아니십네까? 어서 들어오시라요.

아가씨께서 어인 일이십네까?”

 

“바쁘신 거 아니었어요? 괜히 제가 방해하는 거 아니에요?”

 

“일없슴다. 일은 뭔 일이 있갔습네까?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 거이, 아니디요?”

 

항아는 바로 재신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히며, 어깨를 토닥토닥한다.

그러면서 왜 이리 말랐느냐며, 자꾸 말라서 속상하다고 재신의 어깨를 자꾸 보듬는다.

 

“무슨 일 있디요? 날레 속시원히 털어내보시라요.

대한민국 왕비이기 이전에, 내레 아가씨 가족입네다.

기카니 어서 속시원히, 탈탈 털어내보시라요.”

 

“언니.....나 어떡하죠?”

 

그 말을 하는 순간, 이미 재신의 눈은 젖어버렸다.

항아는 재신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어떤 말도 다 들어주겠다고, 괜찮다고, 어서 말해보라고 한다.

 

“언니,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자꾸 무서워요.

도대체 뭐가 무서운지도 모르겠는데, 왜 이렇게 피하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앞뒤 맥락도 없이 툭툭 던지는 말을 들으면서도 항아는 재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다.

 

“은...시경 동지.......때문, 맞디요?”

 

재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항아는 알고 있다. 지금 재신이 누구 때문에 이렇게 자신을 찾아왔는지, 왜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다.

 

“전,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아요.”

 

“아가씨가...은시경 동지를 아주 많이 사랑하셨습네다.

기건, 이미 알고 계시디요?”

 

“그렇다고 해도 전...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아요.

전에 사랑했다고 해서, 지금도 의무감처럼 사랑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기카면.....다시....지켜보시디요.

아가씨가 예전에 실수하신 건디, 그거이 아니믄 지금도 사랑하실 만한 사람인디.

기러면 되디 않갔습네까?”

 

재신이 입술을 깨문다.

자신 속에 있는 두려움을 결국에는 꺼내놓고 만다.

 

“언니........난.......그 사람이 무서워요.

내가 그 사람 때문에 죽으려고 했던 것도 무서워요.

내가.....어떻게 나 자신을 죽이려고 했는지.......

그 사람 때문에 그런 마음이 들었다는 것도, 너무 무서워요.

그래서......기억이 나는 것도 무서워요.

그때, 그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도 무섭고, 그 사람에 대한 예전 내 마음을 알게 되는 것도 무서워요.

그렇게 나 자신을 파괴시키는.....그런 것도......사랑일까요?

그 사람도, 예전에 나를 피했었대요. 그 사람도.......무섭지 않았을까요?

그냥....이대로 기억하지 말고......이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지내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나쁜 거예요?”

 

항아는 재신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 안았다.

재신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였다.

그런 재신의 어깨를 토닥여 준다.

 

“우리 아가씨........하고 싶은 대로 하시라요.

마음 가는 대로 하시믄 되는 거디요.”

 

재신의 어깨를 토닥여 주는 항아의 입에서도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미 항아의 눈에는 흔들리는 재신의 마음이 보였다. 거부하는 것도, 두려워하는 것도 이미 감정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또한 피하고 싶어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녀는 무서운 거다.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도 죽으려고 했던 자신의 행동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거다.

그리고 그 이유가 된 그 사람이 두려운 거다.

재신은 이렇게 된 게 차라리 낫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 마음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기억을 잃은 것도, 하늘의 뜻인가........

항아는 재신이 가여워서,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도 싶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들면서도, 재신만을 올곧게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가 너무 안 되어서, 가슴이 저릿해지는 항아였다.

 

 

 

 

 

 

 

 

 

 

 

 

6

 

 

 

 

재신은 분명 항아에게 기억을 찾고 싶지 않다고 말했었다.

항아도 재신에게 찾지 않아도 된다고 토닥여주었다.

그런데 정작 하루가 지나도록, 떠오른 말은 다른 것이었다.

 

“기카면.....다시....지켜보시디요.

아가씨가 예전에 실수하신 건디, 그거이 아니믄 지금도 사랑하실 만한 사람인디.

기러면 되디 않갔습네까?”

 

다시 지켜보다.

언니는 기억해내라고 하지 않았다.

그저 지켜보라고, 지금부터 지켜보라고 했다.

과거에 대해 연연할 필요도 없다고, 그런 아픈 기억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고 해 주었다.

과거를 놓되, 현재를 잡아보라고 다른 얘기를 해 주었다.

그 말이 계속해서 재신의 가슴 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지켜보다.

다시 지켜보다.

 

재신은 아까 낮에 재하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제주포럼이 내일로 다가오면서, 재하가 재신을 불렀다.

 

“어쨌든 별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조심해.

장난이든 어쨌든, 테러네 뭐네 말이 있었으니까.

따로 행동하지 말고.”

 

“응. 걱정 마.”

 

“은시경은 안 갈 거야. 내 호위하기로 했어.”

 

“그건 당연하지. 근위대장님인데.....”

 

“진짜야?

사실...이번에 일도 있고 해서, 은시경이 직접 가는 게 좋은데,

저 놈이 내 곁에 있겠다네.

공과 사는...진짜 확실한 놈이다.

마음으로는 너한테 가고 싶을 텐데.......

여튼...무섭다. 저럴 땐.”

 

“당연하잖아.

근위대장은 대한민국 국왕을 당연히 지켜야지.

오빠, 내일 수상이랑 내각이랑 만나서 담판 지어야 하잖아.

알고 보면, 클럽 M보다 내부의 적이 더 커.

아직도 항아 언니를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해대고, 꼬투리 잡고.....

무슨 일만 있으면, 북한 핑계대고.......에효.......

굳이 통일돼야 하느냐고, 무슨 이익이 있느냐고 저렇게 자기 이익만 챙기는 사람들 옆에서

오빠도 내일 힘들겠다.”

 

재하는 니가 웬일이냐는 시선으로 재신을 바라본다.

 

“그렇게 보지 마. 나도 대한민국 왕실의 공주야.

그런 것도 모를 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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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당연한 일이라고 담담하게 돌아섰던 재신이었다.

그러나 재신의 마음에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이 꿈틀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오빠를 선택했다.

근위대 전체에 비상이 걸릴 만큼 지금 제주포럼 호위에 신경을 쓰고 있는 마당에, 그는 내 호위를 거절했다.

기다리겠다던, 자신의 욕심은 더 컸다고 말하던 그 남자가 정작 중요한 일 앞에서는 냉철해져버렸다.

뭔가 서운하게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남자. 은시경.

그는....은시경이라는 사람은, 이런 사람인가 보다.

 

그에 대해 기억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또한 그에게 갑자기 반한 것처럼, 감정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재신은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뭔지 모르겠지만, 재신은 뭔가 풀고 가고 싶었다.

기억과는 상관없더라도, 저렇게 자신에게 화내고 있는 시경이, 신경 쓰였다.

 

 

그래서 그를 불렀다.

그는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외부에 나갔다고 했다.

돌아오는 대로 내 방에 들리라는 말을 전하고는 재신은 전화를 내려놓았다.

 

취소되었다가 다시 시작하는 일이니만큼 제주평화포럼은 중요한 일인 건 맞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가기 전에 뭔가 매듭을 짓고 싶을 만큼, 그렇게 긴장되는 일은 아니었다.

예전에도 서 봤던 포럼이었다.

 

재신은 자신이 지금 하려는 행동이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저 인간의 도리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공주님, 부르셨습니까?”

 

저녁 무렵, 그가 내 방에 들렸다.

저렇게 각진 채로, 가만히 서서 내게 고개를 숙이는 그를 보며, 며칠 전, 자신을 놀라게 했던 그가 맞는지 의심이 되기도 했다.

그는....정말......내게 화가 났던 걸까.

 

“무슨, 일이십니까?”

 

그가 재차 묻자, 휠체어에 앉아 있던 재신은 그가 서 있는 곳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은시경 씨. 나한테, 화난 거 있어요?”

 

“예?”

 

갑작스러운 재신의 말에 놀란듯 시경이 그녀를 바라본다.

 

“화난 거, 아니에요?”

 

입술을 깨물던 그는, 곧 “아닙니다”라며 조금은 딱딱하게 대답한다.

입으로는 아니라고 하고 있지만, 목소리에서는 화가 났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재신은 낮게 한숨을 쉬고는 다시 시경을 똑바로 쳐다본다.

 

“은시경 씨, 나, 여전히 기억나지 않아요.”

 

“알고...있습니다.”

 

“그리고 저번에 후원에서 말했던 것처럼, 여전히 내 마음은 똑같아요.”

 

시경이 재신을 빤히 바라보지만, 재신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런 재신을 보던 시경은 한숨을 뱉듯이 입을 열었다.

 

“저도........같습니다.”

 

그도 신음소리처럼 자신의 마음도 같다고 말한다.

나는 그에게 당신을 여전히 기억하지 못한다고, 그러니 지금은 아무 감정도 없다고 그렇게 말하고,

그는 내게 나에 대한 자신의 마음 역시 변함이 없다고, 여전히 나에 대한 마음은 정리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평행선 같은 그와 나의 관계.

그러나 재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용기내어 본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이런 자신이 옳은지 알 수 없어서, 또 긴장도 되어서, 자꾸만 주저하게 된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줘요.

사실은 꼭 하고 싶었던 말이에요.

내내 이 말을 못한 게 마음에 걸렸어요.

그래서 꼭 은시경 씨에게 하고 싶었어요.”

 

“무슨...........”

 

“많이 화냈지만, 또 지금도 화나지만,

분명 난 기억도 하나도 안 나지만요.

정말...난......당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기억 못하지만요.

그래도 이 말은 꼭 하고 싶어요.”

 

재신은 자신에게 다시 용기를 불어넣으며 호흡을 고른다.

 

“은시경 씨. 살아 돌아와줘서....정말 고마워요.”

 

“공....주님.......”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내 인생, 완전히 바닥칠 수 있는데.......

그래도 언젠가 내 기억이 돌아왔을 때, 완전히 바닥은 치지 않게,

살아 돌아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는 내 말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만은 촉촉이 젖어가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거예요.

그래도, 내 마음은 그래요.

당신이 살아줘서, 이렇게 내 앞에서 있어줘서,

당신은 변함없다고 말해줘서,

그래서 내 삶이 더 이상 비참하지 않게 해줘서,

정말........고마워요. 은시경 씨.”

 

“공..공주님......”

 

재신은 천천히 휠체어에서 일어나 시경의 바로 앞에 섰다.

그 사람과 자신 사이에 두 걸음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한 발짝을 그에게 내딛었다.

그의 눈이 커지는 게 보인다.

그 사람과 그녀 사이에 이제 한 걸음 정도 떨어져 있다.

재신은 작게 숨을 들이쉬고는 그의 눈을 바라본다.

 

“생각해봤어요.

내가, 만약에, 정말 만약에 기억을......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살아 돌아온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무엇을 했을까, 무엇을 말했을까.

화도 나고, 억울해도 했겠지만, 그보다도 더 당신이 살아돌아온 게,

너무너무 감사했을 것 같아요.”

 

재신은 다시 한 발짝을 그에게로 내딛었다.

이제 재신은 그의 몸에 닿을 듯이 가까이 서 있었다.

 

“너무 늦어서 미안해요.

기억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비록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한번은 꼭 이 말 하고 싶었어요.”

 

재신이 굳은 듯이 서 있는 시경을 두 팔로 안았다.

시경은 정말로 얼어버린다.

그의 심장소리가 쿵쿵대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있는 재신에게 울려대고 있었다.

 

“살아온다고, 수고했어요.

참 힘들게 견뎌내었을 텐데......그 힘든 시간들 견뎌내줘서 고마워요. 은시경 씨.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이렇게 살아나줘서, 정말...고마워요. 은시경 씨.

비록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이렇게 살아돌아와줘서,

그래서 더 이상 이재신의 인생에 불행이 없도록 만들어줘서,

더 이상 비참하지 않도록 만들어줘서, 정말......고마워요.

그리고 고맙다는 이 말......너무 늦게 해서......미안해요.”

 

그 순간이었다.

굳은 듯이 서 있던 그의 두 팔이 자신의 허리를 강하게 감싸 안은 것은,

너무 강하게 끌어안아, 숨을 쉴 수조차 없었던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랬다. 재신은 생각했다.

기억은 못한다고 해도, 적어도 이 말만은 하고 싶다고.

어떻게 자신은 이렇게 불행하기만 하냐고, 세상의 불행이란 불행은 모두 가져온 거냐며,

그에게 화냈었지만,

그래도, 그가 살아 돌아와줘서, 어쩌면 자신의 불행에 종지부를 찍어버린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적어도 고맙다는 말은 꼭 하고 싶었다.

너무 늦었지만, 그래도 꼭 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살아 돌아와서 아마 내게서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싶었다.

당신의 삶 자체가 고맙다고,

당신이 숨쉬고 있는 이 순간이 고맙다고,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았을까.

 

그날......내가 너무 잔인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가 살아돌아온 것조차 내가 부정해버린 건 아니었을까.

열심히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살아돌아왔는데, 기억을 못한다는 핑계로,

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버린 건 아니었을까.

 

항아 언니의 얘기를 들으며,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이었다.

살아돌아온...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는 걸.....

살아있는 당신의 존재 자체가 고맙다는 그 말을 하지 못했다는 걸......

그것이 미안했다.

 

많이 힘들게 살아 돌아온 그에게........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것은 죽음을 이기고 돌아온 그에 대한 예의였고,

그와 동시에, 예전, 어느 날, 그를 아주 많이 사랑했다던, 한 여자의 마음에 대한 예의였다.

 

그저 고맙다고 그 말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말을 전해 줄 생각이었다.

이렇게 그를 안아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앞에서 고맙다고 말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일어서고 있었다.

내 바로 앞에서 놀라고 있는 그 남자를 보는 순간,

그의 눈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순간,

그리고 그의 눈이 조금씩 젖어가는 걸 본 순간,

아, 이 사람이.......이 말을 듣고 싶었구나.......

나는 기억을 잃었다는 핑계로 이 말을 해주지 못하고 있었구나.......싶었다.

 

그래서 그를 안아 주고 싶었다.

잘 살아왔다고, 고맙다고......그 말을 하며, 그를 보듬어 주고 싶었다.

그의 어깨가 외로워보여서, 혼자서 그 힘든 사투를 벌이고 돌아온 그에게

고생했다고, 수고했다고, 그래서 너무나 고맙다고,

그렇게 토닥이고 싶었다.

 

그래서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로 자신을 꽉 껴안고 있는 이 남자의 품을 거부하지 않고, 묵묵히 안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안고 있던 그가 내 허리에 둘렀던 팔을 풀고 나를 놓아주었다.

 

“공주님, 지금..........기억하시는 공주님이십니까?”

 

그의 목소리가 또다시 낮게 울렸다.

 

“네?”

 

“지금 저를 위해서 기억하시는 공주님으로 잠시, 계셔 주시는 겁니까?”

 

그의 검은 눈동자가 내 심장 저 안까지 들여다보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입을 뗄 수조차 없어서,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은...시...경...씨....”

 

그의 눈빛이 너무나 깊었다.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니 물러나는 듯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팔이 내 허리를 안고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시경의 얼굴이 바로 내 눈 앞에 있었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 바로 앞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저도 돌아와서 공주님께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습니다.”

 

“.................”

 

“보고 싶었습니다. 공주님.

하루 하루.......정말 미치도록 보고 싶었습니다.

2년 동안, 공주님이 저를 잊을까봐, 다른 사람을 사랑할까봐,

매일 매일을 지옥 속에서 보냈습니다.

그래서 늘......공주님 곁으로 달려오고 싶었습니다.

은시경.....이제야 공주님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랑합니다. 공주님. 나의 공주님.”

 

그의 눈빛이 깊어진다고 느껴진 그 순간, 내 입술 위로 그의 입술이 거칠게 다가왔다.

놀란 듯 물러나는 내 목을 한 손으로 잡고, 자신의 입술로 더 강하게 잡아당겼다.

마치 그 날처럼, 성곽에서 내 입술을 가졌던 그 날처럼, 그는 내게 다가왔다.

그는 마치 신음을 하듯이, 절규를 하듯이 내 입술을 가졌다.

내 안 가득히 들어와 도망가는 내 혀를 붙잡고, 자꾸만 부딪쳐오고 있었다.

자꾸만 섞여들면서, 쓰다듬으면서, 내 안으로 자꾸만 들어오고 있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서 있을 힘조차 없었다.

그에게서 자꾸만 미끄러지려 하자, 그는 나를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하아...하아.......이러지...말아요......”

 

“시작은........공주님이 하셨습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내게 또다시 다가왔다. 고개를 돌리려는 내 얼굴을 붙잡고, 미끄러지려는 내 허리를 붙들며, 그는 또다시 집요하게 내 입술을, 내 혀를 탐닉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가슴을 붙잡고, 부들부들 떨면서 그의 입술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

 

헐떡이는 숨소리만 방 가득......울리고 있었다.

재신은 그 남자의 품속에서 그의 입술을 하염없이 받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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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일폭탄들 속에서 계획되어 있던 하루 휴가로 부산을 다녀왔답니다.

그러나 일폭탄들 때문에 다녀온 후에도 이렇게 일을 한다고 밤을 새고 있네요.

내일 마감 일에, 아직 프로젝트 계획안이 덜 돼서 또 이러고 있습니다.

 

14회는 무지 오래 걸렸습니다.

그런데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네요.

계속 잡고 있기가 그래서 결국엔 이렇게 올리고야 마네요.

안 되는 글을 붙잡고 있다고 좋아지는 건 아니라는 걸 오랜 경험으로 알게 되어서 결국에 이렇게 올립니다.

 

오늘도 36장입니다. 분량만 길고, 내용도 없는...이 지루한 글을.....

열심히 읽어주시고, 댓글로 힘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 회는 7월 31일에 마감 두 개를 끝내야 가지고 올 수 있을 듯하네요.

 

저는 다시 야근 모드로 돌아갑니다.

 

오늘 하루도 평안하시길......

 

 

+) 본문 내용 중, 혜원이가 "스타가 자신을 좋아하면 못 믿을 거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아시님께서 제 글에 댓글로 남겨주신 걸 보고 제가 넣어보았습니다.

    정말 아시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가 자신을 좋아한다면 못 믿을 거 같습니다.

    좋은 말씀 나눠주신 아시님, 감사합니다. (__) 

 

+) 13회까지 주신 댓글에 답글 달았습니다. 늘 이렇게 댓글로 힘주셔서 넘넘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