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18
<* 위에 있는 배경음악을 누르시고 들으면서 봐주세요.>
1. 허영생 - 사랑해요, 미안해요.
나즈막히 그대를 불러 봐요
눈을 감고 그대를 안아 봐요
들리나요 느낄 수 있나요
그대 잡을 끈을 놓지 못했죠 바보처럼
숨을 쉬듯 언제나 그대를 찾아 헤매이죠
습관이 돼가죠 버릴 수 없죠 난
사랑해요 아프고 아파도
사랑해요 지우고 지워도
그대 그리움이 오늘도 하얀 눈꽃 되어 날아
그대 곁으로 난 가요
보이나요 느낄 수 없나요
그대 내게 다시 돌아오기를 그러기를
사랑해요 아프고 아파도
사랑해요 지우고 지워도
그대 그리움이 오늘도 하얀 눈꽃 되어 날아
그대 곁으로 난 가요
미안해요 아프고 아팠죠
미안해요 지킬 수 있다면
하루를 채워가듯 살게요 그대 그림자로 이젠
그대 곁으로 난 가요
2. 거미 - 그대라서
사랑하면 안돼 마음주면 안돼
불안해 그만해 내가 내게 말해
그대 서 있는 곳 반대로 돌아서서
걷고 또 걸어도 어느새 난 제자리에
벌써 늦은 걸 너무 잘 알아
설마 하던 내가 그대를 원하잖아
빗물처럼 눈물처럼 내 그대가 흘러
마른 내 가슴을 적시며 스며들어와
지금까지 미뤄둔 한 가지 그대를 사랑하는 일
시작하고 싶어요
느린 걸음으로 그대가 다가와도
내가 더 서둘러 멀어지려 해보지만
벌써 늦은 걸 너무 잘 알아
설마 하던 내가 그대를 원하잖아
빗물처럼 눈물처럼 내 그대가 흘러
마른 내 가슴을 적시며 스며들어와
지금까지 미뤄둔 한 가지 그대를 사랑하는 일
시작하고 싶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우리
다쳐버려도 아파도 좋으니
그대라서 그대여서 고마울 뿐이죠
아주 오랜 시간 나 하나 지켜준 사람
미안해요 이제야 알아서
미안한 맘보다 더 그대를 사랑할게요
그댈 사랑하니까
1
“우리....한 달만......만나...볼래요?”
심장이, 쿵......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난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것일까.
그녀가 내게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손 안에 있는, 내 입술 아래 있는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난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것일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녀를 잡은 끈을 놓지 못해서,
이렇게 또다시 그녀를 향해서 손을 내밀고야 마는 어리석은 나에게,
그녀의 말은 내 심장을 터져버리게 한다.
2
“근위대장님, 사진 진짜 잘 나오셨습니다.”
근위대원 하나가 멋도 모르고 신문 한 장을 들고는 시경에게 들이밀자, 동하가 옆에서 눈치를 주며 신문을 확 뺏는다.
“왜? 그러십니까? 염 대위님?”
“야, 눈치가 없으면, 입이라도 다물고 있어!! 저기 옆에 가서 찌그러져 있거나.”
동하가 험악하게 한 마디 하자, 근위대원은 바로 기가 죽어서 눈치를 살피다가 방을 나간다.
그러나 이미 시경의 눈에는 신문의 사진이 들어와 버렸다.
동하가 뒤로 가리기 전에, 시경이 신문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거기에는 두 개의 사진이 나란히 올라와 있었다.
누가 진짜 공주님의 기사?
제목도 자극적이었다.
한 쪽에는 시경이 쓰러진 공주님을 안고 올라가고 있는 장면, 다른 한 쪽은 상우가 한 쪽 무릎을 꿇고 기사의 예를 다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런 상우를 보며 공주님께서 미소 짓고 계셨다.
기사를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둘을 비교하면서, 누가 진짜 공주님의 기사냐, 그런 것이겠지.
일개 근위대원과, 영국에서 실제로 Knight 작위를 받은 재벌 2세는 사실상 비교 대상도 될 수가 없었다.
시경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그러니까 안 보시는 게 낫지 말입니다.”
동하가 시경의 손에 있는 신문을 확 가져가 버린다.
“괜찮으십니까?”
“뭐?”
“........괜찮으신가 해서......”
“근위대원이, 괜찮고, 안 괜찮고가 어디 있어?”
“그래도......”
“염동하! 니 일이나 제대로 해라. 상관 신경 쓰지 말고.”
“아니, 전.....”
“염.동.하.”
“예. 알겠습니다.”
염동하가 방을 나가고 나서야, 은시경은 숨을 길게 내뱉었다.
사실 시경은 이미 인터넷에서 본 기사들이었다.
댓글들은 참혹했다.
어디 일개 근위대원과 영국 여왕에게 인정받아 Knight 작위까지 받은 재벌 2세가 비교나 될 수 있느냐는 댓글이 대부분이었다.
그 중에는 사람을 신분으로 가를 수 있느냐는 댓글들도 간혹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히 상우의 편이었다.
시경은 지금 현실이라는 것을 맞닥뜨리고 있었다.
자신이 멋도 모르고 꿈꾸었던 세계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꿈이었는지, 인터넷 기사는, 그리고 그 밑에 달린 댓글들은 정확히 알려주고 있었다.
댓글들은 말하고 있었다.
포기하라고....
니 따위가 꿈꿀 분이 아니라고.....
평범한 군인 나부랭이가 사랑할 분이 아니라고......
공주님을 마음에 품은 것조차 불경죄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2년 전 그토록 도망가고자 했던 현실을 그는 지금 눈으로, 피부로 직접 보고 느끼고 있었다.
“근위대원이 있는데 왜 제가 나섰느냐고 하셨습니까?
왕실은 한 사람의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근위대원도 대한민국의 국민이자, 내가 보호해야 할 국민입니다.
왕실은 대한민국 국민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이 왕실의 유일한 존재의 이유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대한민국 왕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왕실이!! 대한민국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왜 근위대원이 있는데도 공주님께서 테러범을 감싸 안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공주님은 국민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셨다.
대한민국의 국민.
공주님께서 지키셔야 하는, 보호해야 하는 그녀의 국민.
그 말이 시경을 무너지게 만들었다.
그래도 적어도 자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왜 왔느냐고, 당신도 남겨지는 괴로움을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는 말씀에서 시경은 알 수 없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적어도 아주 조금은, 자신을 신경 쓰시고 계시는 게 아닐까, 자신은 조금은 특별한 게 아닐까,
시경은 자신도 모르게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주님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계셨다.
시경 자신은, 공주님에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수많은 대한민국의 국민들 중 하나였다.
공주님께서 스스로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국민.
남자가......아니었다.
처음부터 욕심이었는지 모른다.
처음부터 감히 상상해서도, 가슴에 품어서도 안 되는 감정이었다.
하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포기.......라는 걸 내가 할 수 있을까.
내가.......공주님을 놓고 살 수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쪼여온다.
나는, 도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 때 차라리 죽었어야 했다.
이 국가를 위해서, 전하를 위해서, 그 날 죽어버렸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랬다면, 지금 같은 고통은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공주님께 말도 안 되게 들이대는 이따위 짓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감정이 무섭다.
너무나 무섭다.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통제가 되지 않는 이 감정이라는 것이 너무나 무섭다.
아무리 독하게 결심을 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이 감정이라는 놈이 너무나 두렵다 못해 소름이 끼친다.
공주님이라는 이 세 글자만 떠올려도, 미친 듯이 뛰어대는 이 심장이라는 놈을 할 수만 있다면 없애 버리고 싶다.
시경은 또다시 펄떡대며 뛰고 있는 심장을 지그시 누르며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마자 자신의 눈앞에 맑게 웃고 있는 그녀가 있다.
눈물이 날 것만 같다.
3
그 남자가 그녀에게 고백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안 보려 해도, 아무리 고개를 돌리려 해도, 보이고야 만다.
내 눈을 탓하고, 내 귀를 탓하지만, 그녀를 향한 모든 것들에 내 오감은 열려 있다.
그것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듣고 싶지 않은 것도 보고 들어야 한다.
그 남자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도 모르게 움찔하고 만다.
안 보려 해도 다 보이는 이 상황이,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내 처지가 처량하다 못해 한심하게 느껴진다.
처음으로, 정말 처음으로 근위대에 들어온 것을 후회했다.
언제나 자랑스러웠던 이 근위대가 처음으로 싫었다.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모습도, 다른 남자와 같이 식사를 하며 웃고 있는 것도, 또 저렇게 다른 남자와 손을 잡고 있는 순간도, 모두 내 눈으로 담아야 하는 이 현실이, 이 위치가 싫었다.
미친 놈.....
속에서 욕지거리가 올라온다.
웃기지 않은가. 나는 아니라고, 나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녀로부터 멀어져야 한다고 그토록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 하나에 바로 무너지고 만다.
주먹을 꽉 쥐고 있어도, 아무리 어금니를 깨물어도, 두 사람의 대화에서, 두 사람의 모습에서 나를 떼놓을 수가 없다.
"장난.....아니야. 나,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
“오빠!!!! 지금 기자들 쫙 깔렸어.”
“상관없어.”
“오빠!!”
“재신아! 나, 뭐든 할 수 있어.”
“어?”
“너 위해서라면, 나, 뭐든 할 수 있다고.
너만.....내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내 모든 걸 버릴 수도 있어.”
“오빠........”
“필요하면, 나........이용해도 돼.
그렇게라도, 내가........너에게 필요한 존재였으면 좋겠다.
처음으로.......내가 재벌 2세라는 게 감사했어.
이런 걸로라도, 네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
내 모든 걸 다 바쳐서, 널......가질 수 있다면, 그랬으면 좋겠어.”
남자의 고백이었다.
어쩌면 너무나 진솔한 고백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두려웠다.
어깨가 떨릴 만큼, 내 심장이 타들어갈 만큼, 두려웠다.
그녀를 정말로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그 엄청난 크기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다.
자신을 이용해도 된다고, 공주님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게 감사한다는 그 말에 가장 공감하는 것은 나일지 몰랐다.
어쩌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고백일지 모른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고백일지 모른다.
그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지금 서 있는 나의 위치가 그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내 모든 것을 이용해서라도, 내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그녀 곁에 있고 싶다고,
그런 고백을 하고 싶었다.
그 남자는 할 수 있는 고백을, 나는 할 수 없었다.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을 펴서 내려다보았다.
하얗게 질려 있는 내 손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텅빈 손일 뿐이었다.
오로지 맨몸 하나, 맨손 하나......
이걸로 난 그녀에게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날처럼 그녀를 위해서 몸을 던지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가슴에 찬바람이 분다.
가슴 속까지 얼어버리는 것 같다.
그녀는 대한민국의 공주님이셨고, 나는 그녀를 지키는, 일개 근위대원일 뿐이었다.
4
제주에 온 지 벌써 사흘 째 밤. 그러나 시경은 오늘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동하가 오늘은 무조건 방에 들어가셔야 한다는 강압에 억지로 방에 끌려 들어와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눈을 붙일 수도, 심지어 침대에 누울 수도 없었다.
심장에 큰 바위가 얹힌 듯, 숨을 쉬는 것도 힘겨웠다.
하아.......
한숨을 크게 내쉬는 것조차 힘이 든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은시경입니다.”
“박혜원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그럼 내가 왜 전화했는지도 알겠네요.”
“예?”
“은시경 씨 지금 또 도망가는 거예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도망가고 있는 거 아니에요?
공주님 진가, 이제 확인했으니까....
물러서지 않고, 자기 비하하지 않고, 그렇게 자기 할 일 하고 있는 거, 맞아요?”
혜원은 또다시 시경의 가장 아픈 부분을 짚어내고 있었다.
“..........적어도, 제가 감히 품을 분은 아니라는 건..... 알게 됐습니다.”
“은시경 씨, 내가 주제 넘는다는 거 알아요. 그래도 난 말해야겠어요.”
“......................”
“공주님, 대단하신 거, 진짜 어떤 분이신지 정확하게 볼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왜, 은시경 씨까지 공주님을 왕실의 사람으로만 보려고 해요?”
“공주님이십니다. 그건 너무 당연한......”
“뭐가 그렇게 당연해요?
공주님이 태어나고 싶어서 그렇게 태어나셨어요?
태어나면서부터 공주님은 평생 의무에만 시달렸어요.
은시경 씨도 직접 봤잖아요.
공주님 어떻게 살아가고 계시는지.
숨도 못 쉬고, 의무에만 끌려 다니시는 거, 봤잖아요.
그런데 왜, 은시경 씨까지 공주님을 그렇게만 보면 어떡해요?”
“절더러!!!!”
시경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강하게 나왔다.
“어쩌라는.....말입니까?”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감정이 드러나고 말았다.
“도망가지 말라고, 말했잖아요! 내가!”
“공주님을......위하는.......길입니다. 제 주제에...맞는....일이기도 합니다.”
“하! 뭐라구요? 주제? 공주님을 위해요? 하~! 나 참 정말 어이가 없어서!”
혜원의 목소리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휴대폰을 통해서도 혜원의 화가 느껴졌다.
이 여자는 뭐가 이리도 쉬운가. 뭐가 이리도 당당한가.
지금 내게 무엇을 하라는 것인가.
나는 어제 분명히 봤었다.
공주님 앞에서 무릎을 꿇던 그 남자를.
그리고 그 남자가 일으킨 엄청난 파급 효과도.
무릎을 꿇고 있었지만, 누구보다도 당당하던 그 남자를, 그 남자의 배경을, 그리고 그 남자의 무시할 수 없는 위치를,
보고야 말았다.
공주님께 어울리는 사람은, 누가 보더라도 그 남자였다.
인터넷 기사 댓글에 달렸던 것처럼, 그 누가 보더라도, 나는 “감히”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또다시 나를 몰아세운다.
내가 그녀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이 여자는 아니라 한다.
그래서, 날더러 어쩌라는 것인가.
정말 죽을 만큼, 참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날더러 더 어쩌라는 것인가. 날더러!!
“내가 은시경 씨를 잘못 봤네요. 정말 잘못 봤어. 내가 지금 이 시간에 잠도 안 자고, 왜 이러고 있는지.....”
“.........................”
“그래서요. 당신의 결론이 뭐예요? 공주님 놓아주는 거? 참, 잡고 있다고도 할 수 없죠.
그저 예전의 기억으로 공주님에 대해 감정이 있는 당신과, 감정을 잃어버린 공주님 사이에 뭔가가 있긴 있나요?”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기억...이라니요? 단순히....제가 2년 전 기억 때문에, 제 감정을...착...각하고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공주님께 제가 어울리지 않다고 할 수는 있어도, 적어도 제 마음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그 누구도, 제....하아......사랑에 대해, 모독할 수는 없습니다.”
“모독? 하하......정말 웃기네요.
누가, 누굴 모독하는 건데? 지금?
당신! 지금 도망가는 거 맞잖아!!
공주님이 저렇게 위대하신지 몰랐다.
예전에 반짝반짝 빛나신다는 건 알았지만, 너무너무 아름답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공주님은 나보다 더 괜찮은 남자를 만나야 한다.
나같은 남자는 공주님에게 해만 끼칠 뿐이다.
자, 지금 이거 맞지? 대단하신 당신의 결론?”
“...........................”
혜원의 말은 하나하나 내 가슴에 와서 박혔다.
어쩌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듣고 있는지도 몰랐다.
내가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그 생각들을 다른 이의 입으로 내가 듣는다는 건, 생각만 하고 있을 때와는 또 다른 고통을 준다.
“내가, 지금 이 시간에 왜 이러고 있는지 알아?
솔직히 말이야. 당신! 정말 내 눈 앞에 있었으면, 나한테 죽도록 맞았어!!!
당신 같은 남자 때문에 말이야.
이렇게 자기 비하에 빠져서 도망이나 가려는 당신 같은 남자 때문에 말이야!!!!
공주님이......우리....공주님이....하아.........어땠는지, 당신이 알아?
당신이 깨지도 못하고, 죽어 있던 그 시간에, 우리 공주님이 어땠는지 당신이 아느냐고!!!!
내가 진짜!!! 그 때 공주님이........그러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렇게 이 시간에 당신한테 전화해서 이 난리를 피우지도 않았다고!!!
그런데, 뭐? 공주님을 위해서 놓아줘? 도망을 가?
어떻게!!! 감히!!! 당신이!!!
당신에게는 죽어도 그럴 수 있는 권리는 없어!!!”
혜원의 목소리가 울먹이고 있었다.
나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신이 누워 있던 그 시간, 알려 줄까?
당신이 죽은 줄 알았던.....그 시간 공주님이 어땠는지 알려줘?
당신이 그걸 알면, 지금처럼, 그 따위 말 못해.
놓아줘? 공주님을 위해서? 하아~ 진짜....어떻게 그 딴 말을 할 수가 있어?
그 때도 그랬어? 공주님 마음이 우스워 보여?
자기 감정은 모독하지 말라느니 하면서, 공주님 마음은 우스워?
..........밤마다............밤마다.........우셨어.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전화기를 붙들고, 그렇게 몇 시간을 울기만 하셨어.
당신이.......공주님의....마음을 알아?
혜원아..........혜원아..........내 이름만 겨우 부르시며 우셨던, 공주님 마음을....당신이....아우...진짜.....”
시경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마치 고장 난 것처럼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두들겨 패고 있는 것 같았다.
심장이 쪼여들어 와서 숨을 쉴 수도 없었다.
전화기 너머로 혜원은 거의 통곡 같은 울음을 뱉고 있었다.
“난 말이야. 너무 무서워서, 매일 매일 공주님과 통화를 했어.
이러다......정말......삶을 놓으실까봐, 너무 무서워서 살아계신 지 확인하려고 매일 전화를 했다고.
공주님은 내 이름만 부르시며 울기만 하셨어.
그 날 말이야. 공주님 손목에 생채기 낸 날.............
하아........그날은......정말........우시지를 않더라.
그 때 하신 말씀이 뭔 줄 알아?
당신이 자신의 꿈에 찾아오지를 않는대.....
한번이라도 찾아오지, 찾아오지를 않는다고,
그래서 당신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서, 미칠 것 같다고,
당신이 준.....그...빌어먹을 놈의 비디오 보면서! 또 보고 또 보고 해도,
밤에 와주질 않아서 당신 얼굴 까먹을까봐 걱정된다고..........
나중에 만났을 때, 못 알아보면 어떡하냐고.......
알겠어? 그 날이었다고!!!! 당신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서 미칠 것 같다던 그 날!!!
그날 손목을 그으셨다고!!
근데, 당신이 뭐? 공주님을 위해서 놔줘? 진짜....아우씨.......
어디서 감히 놔줘? 당신한테 그럴 권리가 어디 있어? 어?
차라리, 공주님 싫다고 해!! 그래서 놔주겠다고 해!!!
그러면 봐줄게. 그건 인정해 줄게. 욕 좀 하고 놔준다고!
그게 아니라면, 당신은 절대로 돌아설 권리 따윈 없어!!!”
“............하아..............”
“......................”
“.......................”
“내가........그 시간을 함께 하지 못했다면, 나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그랬을 거야.
그래, 당신이 아니라, 상우 오빠라고 그랬을 거야.
상우 오빠, 그래 당신도 알 거야. 공주님 첫사랑이야.
그런데 상우 오빠 스캔들 기사 뜨고 했을 때, 공주님 신기해했지, 가슴 아파한 거 아니었어.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았다고.
그런데, 당신은.......아니야.
물론 강도가 다르지. 당신은 죽었으니까.
그래도 말이야. 죽은 사람은 죽고, 산 사람은 또 사는 거야.
당신 때문에 마음은 아프지만, 살 수는 있다고.
그렇게 세 번씩이나 못 견뎌서 목숨을 끊을 정도는 아니라고!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하실 분이 아니었다고.
도대체 뭐가!!! 그 강하신 공주님을 그렇게 만들었냐고!!
도대체 당신이란 남자가 뭐길래!!!!
근데, 당신은 또!! 도망가? 또 공주님을 위한다며 도망간다고?”
“제게..........그럴 권리 없다는 거, 압니다.
그렇지만 공주님은 지금 기억이 없으십니다.
저에 대한 마음도, 감정도........없으십니다.
그런 상황에서, 제 마음은.......부담만 되실 뿐입니다.”
“좋아. 그럴 수 있다고 쳐.
그래서, 당신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놓고 끝내겠다고? 이 상태로 그냥 끝! 해버리겠다고?
당신 스스로가 바닥까지 내려가서 공주님 잡아 봤어?
왜? 찌질하게 느껴져?
아, 이 사람은 내게 마음이 없구나, 그러니 접자.....
뭐, 그게 쿨한 거 같아? 그게 공주님 위하는 거 같냐고?
포기할 거면, 정말 놓아줄 거면, 아무 미련 없게 완전히 끝까지 가보란 말야.
적어도 그래야, 공주님도, 당신도, 미련은 없을 거 아니야!”
혜원은 내게 지금 바닥까지 내려가라고 한다.
지금보다 더 바닥이....내게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이 바닥까지 내려가서 공주님을 잡는 것일까....
설사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하더라도, 내가 감히 공주님께 그리해도 되는 걸까.
“잡아. 끝까지 내려가서 잡아.
적어도 확실하게 끝까지 가보고, 확실하게 차이란 말이야.
그냥 혼자 끝내고, 혼자 접고, 혼자 놓지 말고,
당신의 바닥을 보여주고, 끝내.
그렇게 확실하게 차이고 나면, 그 때 끝내.
적어도 끝내는 건, 공주님이지, 당신이 아니야.
당신에게는 그럴 권리 없어!
적어도, 그날의 공주님...을 안다면, 당신은.......끝까지 가봐야 돼.
그래도 안 되면, 그건 인연이 아닌 거겠지. 그 땐 미련 없이 떠나.
그러면, 그렇게 끝까지 가봤으면, 공주님께도 당신에게도 미련조차 안 남을 거야.
운명이려니 하고 받아들이게 될 거야.
그러니까 끝까지 가서 확실하게 잡아보고 끝내!
공주님은 기억도 없는데, 비겁하게 자기 혼자 끝내지 말라고!!”
바닥까지 내려가서 그녀를 잡아보는 것.
그것이 도리어 그녀를 힘들게 만드는 일이지 않을까......
두려움이 밀려오는데, 혜원은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
끝까지 내려가서 잡아 봐야, 놓을 수도 있다고 한다.
놓는다는 것, 그것은 불가능하다.
어쩌면 놓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게 되는 걸까?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할게.
당신. 용기가 뭔 줄 알아?
사랑하는 감정, 가슴에 묻고 돌아서는 게 용기인 줄 알아?
그거, 도리어 쉬워.
왠 줄 알아? 적어도 내 자존심은 지키는 거거든.
죽어도, 내가 찌질해지는 건 안 하겠다는 거지.
근데, 그게 사랑이야?
웃기지 마! 그 따위가 사랑이라고 말하면, 그건 사랑은 개뿔, 그 근처에도 못 가 본 애들이나 하는 소리야.
사랑은 말이야. 처음부터 찌질한 거야.
처음부터 내가 바닥이 되는 거라고.
그 사람 앞에서 완전히 바닥이 되지 않는데, 어떻게 그게 사랑이야?
지 감정에 취해서 좋아하다가, 지 자존심에 조금이라도 상처가 나면 접어버리는 게 무슨 사랑이야?
어떻게 사랑이 고고할 수가 있고, 쿨할 수가 있어?
사랑은 처음부터 찌질하고 구질구질한 거야.
그렇게 내가 나라는 인간적인 자존심까지도 다 버리고 완전히 바닥을 쳐보는 거야.
그렇게 나를 다 버리고 그 사람을 잡아보는 게 사랑이라고.
끝까지, 그렇게 바닥 치면서 잡아보는 게 진짜 용기 아니야?
누가 자신을 버리고 싶어? 누가 자기 자존심 버리고 싶냐고?
그런데도 그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니까, 그 사람 앞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무릎 꿇을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렇게 잡아보고, 그렇게 나라는 자존심 다 버리고, 그렇게 잡아도, 아니라면,
그 땐 떠나도 돼. 당신은 끝까지 내려가서 잡은 거니까........
끝까지 내려가서 잡아봤다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쪽팔리는 짓도 아니야.”
용기.
혜원은 말한다.
돌아서는 것이 용기가 아니라 나를 버리고, 그 사람 앞에서 바닥까지 내려가서 잡아보는 것......그것이 용기라고.
그러나 내 사랑이....그런 구질구질한 내 사랑이 그녀를 지치고 힘들게 한다면......
그건 싫었다.
적어도, 그녀에게 내 모습이 조금은 괜찮게 비춰지고 싶었다.
그 역시 욕심일지도 모른다. 자존심이라는 욕심.
“자존심이라는 건 말야.
한국에서 대학 다닐 때 우리 스승님 말로는 말이야.
미친 여자 머리에 꽂힌 꽃이래.
지 혼자만 대단하고 좋다고 보지만, 남들이 보기엔, 미친 여자 머리에 꽂힌 꽃이라는 거지.
아무 소용도 없고, 그야말로 있어서 더 문제가 되는 거 말이야.
그렇게 자기를 버려보지 못했다면, 사랑한다고, 사랑했다고, 함부로 말하면 안 돼.
사랑은....그렇게 철저하게 낮아지는 거니까.....
그렇게 낮아져보지 못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야.
공주님은....당신에게 그 바닥을 보이셨어.
정말로 낮아지셔서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셨어.
자존심 따위 다 버리셨고, 당신을 바닥까지 내려가셔서 잡으셨어.
당신은? 당신도 그래? 당신도, 그런 사랑을 하고 있어?”
혜원의 마지막 말이 계속해서 시경의 머리를 울리고, 가슴을 울리고, 심장을 쳐댄다.
공주님은 나에게 그 바닥을 보이셨다고......
정말로 낮아지셔서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셨다고......
자존심 따위 다 버리시고, 나를 사랑하셨는데, 나는 지금 그러고 있느냐고......
그녀의 방문 밖, 어느 새 시경은 그 앞에 와 서 있다.
보초를 서고 있던 근위대원이 시경에게 인사를 하자, 자신이 있겠다며, 그를 돌려보냈다.
그렇게 어두운 밤 속에 시경은 홀로 서 있었다.
5
달칵......
아직 동이 트지 않은 무렵, 그녀의 방문이 조용히 열렸다.
그녀가 목발을 짚고 천천히 나오고 있었다.
시경은 벽 뒤쪽에 물러 서 있었다.
그녀는 주변을 살피지도 않은 채, 긴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그녀를 보며, 시경은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정원을 향해서 천천히 발걸음을 떼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호텔 정문에 서 있던 근위대원이 그녀의 뒤를 호위하며 따르려 하자, 시경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5시, 아직 동도 트지 않아 여전히 어둠이 내려앉은 그곳을
불빛에 반짝이는 연못과 나무와 꽃을 따라 그녀가 걸어가고 있었다.
시경은 그런 그녀의 뒤를 역시 조용히 따르고 있었다.
저기 그녀의 가녀린 등이 보였다.
정말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것만 같은 두 팔로, 그녀는 목발을 짚고 스스로의 힘으로 걸어가고 있다.
시경의 눈에는 그녀의 뒷모습이 자꾸만 아프게 박혀온다.
사랑이라는 것은 놓고 싶다고 놓아지는 것도, 도망가고 싶다고 도망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신이 주신 가장 큰 축복이자 가장 큰 저주.
헤어날 수 없는 감정의 늪.
누군가에게는 큰 축복이 될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평생 동안 절대로 헤어 나올 수 없는 늪과 같은 저주일 수도 있다.
그녀를 피해보려고 했다.
그녀를 놓아보려고 했다.
아니다. 그것이 아니다.
그녀를 놓아보는 척을 해보았다.
그녀를 보지 않는 척, 그녀를 마음에서 밀어내는 척을 했다.
그것은 그러려는 일종의 제스추어일 뿐, 내 마음을, 내 심장을 속일 수는 없었다.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다면,
나 자신도 속일 수가 없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였다.
내 육체를 그녀에게서 멀리 떼놓는 것.
이렇게 그녀 주위에 맴돌면서 그녀까지 숨 막히게 하지 말고,
그녀를 아프게, 그녀를 힘들게 하지 말고, 떠나는 것.
그렇게 몸이라도 그녀에게서 떨어뜨려놓는 것.
어쩌면 그녀를 위해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했다.
이틀간.......
누군가에게는 이틀이었지만, 내게는 수억 겁의 시간과도 같았다.
1분 1분이 내게는 뜨거운 사막에서 독수리에게 심장을 쪼이는 벌거벗은 남자의 시간과도 같았다.
이 시간들을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이 시간들을 이젠 끝내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왜, 내게 이런 저주를 주셨느냐고,
처음부터 이런 감정이란 것을 주지 않으셨다면,
적어도 숨 쉬고 살 수 있었지 않았느냐고,
내가 그렇게 큰 죄를 지었느냐고,
하늘을 향해서 울분을 터뜨리기도 하지만, 결국엔 난 그 제자리에 서 있다.
어디로 도망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못하고,
멀어진 만큼 더한 고통에 시달리며, 그곳에서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마지막이라 생각했다.
내게는 큰 용기를 내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잡아 보는 것.
마지막으로 내 마음을 표현해 보는 것.
혜원의 말처럼, 죽도록 매달려보고, 차이면 깔끔하게 떠나야 한다.
매달려보지 않았다는 건, 결국 혜원의 말처럼 난 완전히 바닥까지 내려가지 않은 것이니....
사랑에도 내 모든 것을 내준 것이 아닌 것이니...
어쩌면 난 아직까지 날 완전히 놓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한다고 하지만, 난 아직도 내가, 내 마음이, 내 상처가 더 우선이었을지도 모른다.
내 삶이 그랬을지도 모른다.
뭘 그리 나약하게 살아왔을까.
아버지로부터의 인정. 늘 화두처럼 내게는 성취할 목적처럼 내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성취할 목적이었던 만큼, 그것이 성취되지 못했을 때의 상실감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내게는 그것이 생채기처럼 남아 풀리지 못한 채 쌓여만 갔는지 모른다.
어쩔 수 없이 주저하게 되는 이 마음들은, 자신 없어지는 이 마음들은 내게 트라우마처럼 저 깊이 가라앉아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게 그녀를 잡을 용기나 있는 것일까.
천천히 걷고 있는 그녀의 등을 잡을 용기가 내게 있을까.
그녀의 뒷모습이 자꾸 가슴을 시리게 한다.
"왜, 따라와요?"
절벽에 다다랐을 때, 한참 동안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서 말을 걸었다.
"아셨....습니까?"
"다른 근위대원 시켜요. 내가 정 불안하면.....
근위대장님이 이렇게 따라다니지 말구요."
내가 그녀를 따르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시경은 눈을 들어 그녀를 그제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맑은 눈을 보는 순간, 자꾸만 올라오는 감정이라는 놈 때문에 또다시 눈을 내리깔고 말았다.
"제가 하고 싶습니다."
"왜요? 은시경 씨가 호위는 최고인가요?
대한민국에 그렇게 인재가 없나?"
그녀는 묻고 있었다.
왜 당신이 나를 따르느냐고. 왜 당신이어야 하느냐고.
대한민국 왕실 근위대원은 없는 거냐고.
그래 맞다. 수많은 근위대원들이 있다.
그러나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존재는, 나외에는 없었다.
적어도 나는, 나를 아니까......
그녀의 위험 앞에서 내가 어떤 행동을 보일지, 나는 아니까......
아니, 내 무의적인 행동을 믿으니까.......
"대한민국 군인 중에 저보다 나은 군인들, 분명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적어도, 공주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제가 어떻게 할 지, 확실히 저는 아니까요.
그리고........이렇게 공식적으로, 공주님을 가까이에서 뵐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나는 내 마음을 그녀에게 보인다.
그녀 앞에서 등을 내밀었다.
한참을 머뭇대던 그녀가 내 목을 그러안자, 저 안에서부터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온다.
그 숨은 다시 떨림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너무나 가벼워서 자꾸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 가녀린 몸으로 그녀는 무엇을 그토록 감내하려는 것일까.
절벽 아래를 보던 그녀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처연하던 그 표정.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던, 그 황망하던 표정을.......
그것에 섞여들던 인생의 허무함을 나는 읽어내고야 말았다.
빛 속에 서 있지만, 그늘을 숨겨야만 하는 그림자인 그녀를 읽고 말았다.
그래서 그림자가 되고 싶었다.
그녀의 그늘을 다 담아 낼 수 있는, 그러한 그림자가 되고 싶었다.
그녀의 그늘과, 그녀의 그림자까지 모두 안을 수 있는, 그 모두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녀의 마음 한 자락에 위로를 건네고 싶다고,
감히 생각했다.
"공주님........."
"응?"
"공주님...전....혼자 남지 않을 겁니다."
"......................."
"만약...공주님께서 그 남자를 안았을 때, 폭탄이 터졌다면,
저도....함께였을 겁니다."
"무슨.......말이에요?"
"제가....다른 여자 만날 거라고.....하셨죠?
그런 일은.......없을 겁니다.
저도...이 세상에 없을 테니까......
공주님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으니까요.
전...비겁합니다.
공주님은 혼자 계시게 해 놓고, 저는 정작....그렇게 못합니다."
그래서 그녀를 향해서, 꼭 하고 싶었던 말을 내놓았다.
혜원의 말이 맞았다.
혼자 남겨진 공주님의 심경을, 나도 조금은 느껴본 것 같다.
그래서 두려웠다.
혼자....남을 수 없겠구나......
오로지 내가 생각한 건 이것 하나였다.
그녀 없는 세상에, 혼자 남을 수는 없다는 것.
그것이 그 놈을 향해서 뛰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마 나는 평생 그럴 것이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내가 살기 위해서,
그녀를 위해 달리게 될 것이다.
그녀를 업어주면서, 또 그녀를 정자 안에 눕히고, 담요를 덮어주면서 생각했다.
이렇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이렇게 그녀의 다리가 되고, 그녀의 그늘이 되고, 그녀의 쉼이 되고,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녀가 나를 본다.
서 있는 나를 향해서, 마치 예전처럼 미소를 짓는다.
나를 향해서 손짓을 한다.
그녀 곁에 오라고.....
마치 그 말은 내게 그녀의 자리 한 켠을 내어준 듯, 떨리게 한다.
피곤하다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그녀를, 마치 내 여자인 양,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고 내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내 어깨에 살포시 얹힌 그녀의 무게만큼, 나는 삶이라는 것을 느낀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저 멀리 동이 밝아오는 저 하늘과, 여전히 푸르게 파도를 쳐대는 바다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감히 갖고 싶다는 마음을 들게 한 사람과,
그곳에서 나는 살아있다는 것을, 삶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내가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또 동시에 절망했다.
심장의 두근거림은, 저릿해지는 심장의 고통을 자꾸만 동반한다.
그녀가 읽어준 시.
그녀의 이야기 같다는 시 때문에......눈물이 날 것만 같다.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 최영복
나 태어나
잠시 머문 가슴
그 포근함이 세상
무엇이 대신
할 수 있을까.
그리워서 하도
그리워서
두 눈 감고 먼
기억 속을 더듬어도
지금까지
당신의 얼굴
목소리
기억하지
못하였네.
감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이 순간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아서 뜰 수가 없었다.
당신은 나의 그리움인데,
나는, 당신의 그리움입니까...
제가 감히 그럴 수 있습니까....
하아..........
저 안에서부터 깊은 숨이 새어나온다.
".....내가....은시경 씨 얼굴...잠깐만 만져 봐도 돼요?"
그때였다.
그 말을 듣고도 한참,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머리에서 되풀이되고 나서야 그 말이 무엇인지 인지하게 된 나는, 그녀의 의도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이 내 이마에 닿았다.
뭘 어찌해야 할지, 두 주먹에 힘만 꽉 주며, 정신없이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나는 부들부들 떨며 앉아있었다.
그녀의 손이 닿는 곳마다, 불이 붙는 것 같았다.
내 안의 모든 열들이, 내 모든 오감들이 그녀의 손끝을 따라다니는 듯했다.
아니다.
그녀의 손끝이 내 모든 오감들을 불러내고 있었다.
심장이 불타오르는 듯하다.
자꾸 무언가가 저 속에서 올라올 것만 같아서, 자꾸 울컥거리는 것 같아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런데 그녀는 내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내 볼을, 내 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에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부드럽고도 나른해지는, 그러면서도 심장을 뛰게 만드는, 그녀의 손길이 내 입술에 닿았다.
그녀의 손끝이 조금은 파르르 떨리는 듯도 하다.
주저하며 떨어지던 그녀의 손가락 끝이 다시 내 입술선을 따라 다가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내 사랑이 터져버린다.
그녀의 손을 잡고 그 위에 입을 맞췄다.
“공주님......”
그녀를 불러보았다.
눈물이 쏟아질까 싶어, 눈을 뜰 수도 없었다.
“공주님.........”
또다시 그녀를 불렀다.
단 세 자의 음이 내 심장으로 들어와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나를 쳐댄다.
“공주님..........”
나는 또다시 그녀를 부르고 말았다.
당신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데.......
나는......나는......
“하아.........공주님........”
심장을 긁어대는 한숨이 터져나온다.
참고 참았던 내 심장이 결국 제 소리를 내고 만다.
“............사랑....합니다. 공주님.......”
여전히 눈을 감고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그랬다.
혜원의 말이 맞았다.
내가 어떻게 그녀를 떠날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어떻게 그녀를 놓고 살 수 있다는 말인가.
내겐 그럴 권리가 없다.
내 모든 걸 다 팔아서, 내게 가진 것이 있다면 그 모든 걸 다 주고서라도 그녀를 가질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겐 가진 것이 없다.
돈도, 지위도, 명예도, 위치도, 그 어떤 것도 없다.
내가 가진 모든 것.
나라는 인간의 가장 처절한 그 바닥을 드리는 것 외에 내가 그녀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나는 내 안의 모든 용기를 끌어 모아 그녀를 향해 내 사랑을 또다시 전하고야 만다.
“공주님께 제 마음, 부담이라는 거 아는데.......
저도 제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눈을 떴다.
나를 향해 놀란 듯, 조금은 아픈 듯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과 마주했다.
그녀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내 마음을, 내 아픔을 안다고......
아닐지도 모른다. 내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내 욕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녀가 내 마음을 아파하고 있다고......
기억과는 상관없이, 나라는 남자에 대해서, 조금은, 아주 조금은 아파하고 있다고......
그녀의 눈이 내게 용기를 내게 했는지도 모른다.
“한번은 돌아봐주신다면서요?
한번은 다시 생각해 주신다면서요?
제게.....약속하셨잖아요. 공주님.”
성곽에서 가슴 떨려 하며 물었던 그 말을 그녀에게 건넸다.
누구는 내게 어찌 그토록 구질구질하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무슨 남자가 그토록 찌질하게 구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게 사랑은 그러하다.
그토록 구질구질하고 비참하다.
그래도 그것이 구걸이라고 해도, 그러고 싶다.
그래서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한 일도 할 수 있다.
내 생에 이런 사랑은 없을 것이다.
내 인생에 그녀 외에 사랑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이토록 절박할 수밖에 없다.
“공주님.....한 번만......정말...한번만..저...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욕심인 거 압니다.
제가 감히 공주님께 품어서는 안 될 감정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렇지만, 한번만.......다시...봐주시면...안 되겠습니까?
분명 지켜보려고만 했는데.......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공주님을 보면 늘 무너지고 맙니다.
공주님이 너무 아름다워서........공주님밖에 안 보여서.......
제가........공주님을..............너무...사랑해서.......
저도...절....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마치 당연한 것처럼 그녀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당신을 너무나 사랑한다고......
그러니 다시 봐달라고....
당신이 그렇게 약속하지 않았느냐고.....
나는 감히 그녀에게 당당하게, 당연한 것처럼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손을 놓지 못한 채, 그녀의 손에 입술을 대면서, 나는 어쩌면 그 뒤를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혜원이 말했던, 어쩌면 마지막으로 바닥까지 내려가서 잡아보는 용기.
나는 어쩌면, 내 무의식으로는 이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이런 용기를 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이성은 그녀의 거절을 예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안 되겠다고 하면, 나는.....이제....이것으로....적어도 그녀 앞에서만은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
몸이라도 그녀에게서 떼놓아야 한다.
그러다가 그녀가 그 남자와 결혼......을 하시고 나면.....그래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갖게 되시면....
그 어느 날.......즈음에는 돌아와도 될까.
그 때쯤은........그림자처럼, 그녀의 뒤에서, 그녀가 이룬 가족의 울타리 저 밖에서 그녀를 조금은 지켜봐도 될까.
그렇게 나는 내 사랑의 바닥을, 그녀에게 감히 드러내고야 말았다.
“우리....한 달만......만나...볼래요?”
그에 대한 답이었다.
아직은......떠나지 말라는 그녀의 대답이었다.
내게 또다시....시간이라는 것이 주어진 순간이었다.
신의 축복이자 저주였던 나의 사랑이.....저주에서 다시 축복으로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6
“우리....한 달만......만나...볼래요?”
내 손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지만 않았다면, 난 그가 내 이야기를 듣지 못한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한참을 내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뜻입니까?”
한참 만에 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낮게, 거칠게 갈라진 듯, 조금은 고통스러운 듯 뱉어졌다.
“말 그대로예요. 은시경 씨와 나, 한 달 동안만 만나보자구요.
근위대장과 공주로서가 아니라, 한 남자와 한 여자로........”
한 남자와 한 여자라고 말하는데, 나도 모르게 목이 메는 것 같다.
어쩌면, 그 어느 날, 내가 간절히 바랐던.....일인지도 모르겠다.
이 남자가 뭐라고 말할 지......자꾸 긴장이 돼서 목이 탄다.
“왜, 저와 만나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무슨 이유입니까?”
그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의심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자신을 놀리는 것이 아닌지, 사랑한다고 하니 안 됐다고 생각해서 이러는 게 아닌지.....
그래,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이 말을 하고 싶었다.
“나, 재수 없을 수도 있어요. 나도 알아요.
그런데....나 말이에요.
나, 당신을 기억하고 싶어요.”
“예?”
그래 맞다. 그것이었다.
난 이 사람을 기억하고 싶다.
그랬구나.......어쩌면 나도 모르게 나가는 말들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고 나갔던 그 말들이 도리어 더 정직한 말이기도 했다.
어쩌면 저 안에 감추어두었던 나도 모르는 무의식이 내뱉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해 보자.
이재신답게, 부끄러워말고, 정직하게.
“나, 솔직하게 말할게요.
나 솔직히, 예전엔 두려웠어요.
기억을 꺼내는 게, 당신을 꺼내는 게 두려웠어요.
그 때 내 모습이 어땠을 지, 고통이 어땠을 지, 상상만 해도 무서웠어요.
그런데, 지금은....꺼내고 싶어요.
그 고통이...어떨지는 이젠 나도 알아요.
사실 며칠 전, 그 고통을 알아버렸어요.
당신이 테러범을 몸으로 덮고 있는 동안, 난 알아버리고 말았어요.
그런데 그 고통을 느끼고 나니, 도대체 당신이 내게 어떤 사람이었길래, 이런 고통이 있을 수 있는지, 알고 싶어졌어요.
당신이란 사람이 내게 어떤 존재였는지 알고 싶어요.
어떤 마음이었길래, 이런 마음이 들 수 있는지, 이런 고통을 느낄 수 있는지, 그 마음을 알고 싶어요.”
그랬다.
그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면, 난 이 말을 그에게 건넬 엄두도, 아니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를 기억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내게 그 기억은 두려움이었다.
무의식이 스스로 막고 있는 고통과 같은 기억.....
그래서 피하고 싶었다.
차라리 새로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런데......그 날 이후, 그것이 아니었다.
문신과 같이 심장에 새겨진 그의 죽음의 고통.
난 이 고통을 어떻게 견뎌내었을까.
아니, 이 남자는.....도대체 내게 어떤 존재였길래, 이런 고통을 줄 수 있었을까.
알고 싶었다.
그 때의 이 남자를......
그 때의 이 남자와 나를........
그 때의 내 마음을, 내 감정을.......찾고 싶다. 기억하고 싶다.
사실 이것이 가장 정직한 내 대답이다.
지금 내 마음을 가장 정직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그 이상은......나도.....모르겠다.
아직은........
너무나 느릴지도 모르고, 그에게는 상처일지도 모르는데, 그가 거절한다고 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왜냐고 더 물어본다면, 난 대답할 말이 없다.
아직...내 마음도 잘 모른다.
나는.....느리다.......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데........
내 스스로가 너무나 혼란스러운데.......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대답과, 가장 큰 용기인데......
그가, 받아줄까?
더 묻지 않고, 지금 내 마음 이대로 받아줄까......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나는 떨고 있다.
마치 고백을 하고, 그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난 자꾸만 떨게 된다.
어쩌면 난 불안했던 건지도 모른다.
이틀 간 그의 모습을 보며, 그가 떠나버리는 건 아닐까, 혼자 정리해버린 건 아닐까.
나는 아직 혼란스럽고, 아직 두렵고, 또 아직 기억도 없는데.......
그래서 나는 이렇게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그를 잡았다.
그래도 그가 거절한다면, 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재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 한 달 동안, 공주님과 저는 무슨 관계인 겁니까?”
한참 만에 그는 내게 물었다.
왜 그러느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우리의 관계가 뭐냐고 물었다.
“연인...인 거죠.
한 남자와 한 여자로......그렇게 만나 보는 거예요.”
대답을 하면서도 자꾸 입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것 같다.
“진짜.....연인인 겁니까?”
“네. 그 한 달 동안은 그렇게 해요.
진짜 연인처럼, 그렇게 있어 봐요. 우리.”
하아........
그의 한숨소리가 깊다.
그 한숨소리가 조금은 떨리는 것도 같다.
“지금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고 하시는 겁니까?”
“네. 알고 있어요.”
“1달 동안은 적어도 공주님이 제 여자가 된다는 겁니다.
다른 남자를 만나서도 안 됩니다.
저만 만나셔야 합니다.
그래도 상관......없으시겠습니까?”
“네.”
“그러면 1달 동안은 공주님은 저를 거부할 권리가 없다는 것도 아십니까?
중간에 제가 싫어지셔도, 제게 싫증이 나셔도, 1달 동안은 계속 제 여자가 되셔야 합니다.
그러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재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지금이 돌이키실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내가 내 입으로 얘기한 거예요. 그러니까.....약속은 지켜요.”
시경의 눈이 점점 검게 짙게 변하고 있었다.
재신은 그 눈의 깊이만큼 심장이 점점 더 빠르게 뛴다.
“지금부터 공주님은 거부할 권리가 없으십니다.
이젠 내 여자에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할 겁니다.”
“은시경 씨.......”
그의 얼굴이 재신의 얼굴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재신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난다. 그러다가 재신의 등이 벽에 닿았다.
더 움직일 곳도, 피할 곳도 없었다.
분명 자신이 말한 것이었다.
“도망가셔서도 안 됩니다.
이젠 공주님께는 그럴 권리, 없습니다.”
가라앉은 듯, 조금은 쉰 듯한 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키스......
입술에 부드럽게 내려앉는 시경의 입술.......
그의 입술은 너무나 부드러워서 마치 깃털 같이 놓였다 떨어졌다.
깊이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치 그때처럼, 내 숨을 삼키고 내 전부를 삼킬 듯이 다가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나 달랐다.
부드럽게 다가왔던 입술이 다시 떨어졌을 때, 도리어 의아한 것은 재신이었다.
재신은 감았던 눈을 다시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재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에 놓였다.
아주 조금 더 머물다 다시 떨어진다.
하아......
재신의 입술에서 한숨이 나온다.
세 번째 다시 그의 입술이 다가오자, 재신의 두 팔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마치 다시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이, 재신의 팔이 그를 안아왔다.
그의 입술에 아주 잠깐 미소가 지나가는 것도 같다.
“이젠.....도망...안 가시는 겁니까?”
여전히 재신의 입술을 머금은 채로 시경이 말을 건넨다.
“.....도망..... 안 가요. 이제.......”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경의 입술은 아까와는 달리 깊고 거칠게 다가왔다.
그랬다. 그의 입술은 이랬다.
이런 느낌이었다.
이토록 가슴이 떨리고, 이토록 온 몸을 저릿하게 만드는.......
그래서 이성이라는 것을 놓고, 그에게 매달리게 만드는......
그런 것이었다.
시경에게도, 재신에게도 첫키스였다.
일방적인 것도 아니고,
기억에 없어서 미안해하는 마음도 아니고,
다른 이의 대신이라 오해하는 것도 아니고,
은시경이라는 한 남자로,
이재신이라는 한 여자로,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는 시작.
그러한 첫키스였다.
그의 입술은, 그의 혀는,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재신의 안 깊숙이 따라들어왔다.
재신은 바들바들 떨면서도 자신의 혀에 얽혀드는 그의 혀를 받아들였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감질날 정도로 부드럽게 엮어지는 그의 혀에 재신의 입술에서는 한숨 같은 신음소리가 나오고 있었지만,
그는 놓을 줄을 몰랐다.
진정으로 자신의 여인을 품은 듯이, 그는 자신의 온 마음을 내놓으며,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적어도....한 달은......이 여인은......내 것이다.
내 여자다.
그것이 시경을 미치도록 만들었다.
마치 자신의 것인 양, 그렇게 낙인이라도 찍는 심정으로 그녀의 입술에 매달렸다.
힘겨워하면서도, 자신을 받아들이는 그녀를, 자신의 품 안 가득 깊이 안으면서, 이 여인을 죽어도 못 놓을 자신이라는 것을 가슴 깊이 새기며, 더욱 깊이 깊이 그녀에게로 들어갈 뿐이었다.
길게 햇살을 뿌리며 푸르게 물드는 하늘과,
변함없이 하얀 물살을 내비치며 파도를 몰아치는 파랗다 못해 쩡하고 갈라질 듯한 바다와,
서로의 입술과 서로의 혀와 서로의 영혼이 얽혀들고 있는
한 남자와 한 여자.
오늘의 태양이 새로운 세상을 밝히고 있는 그 때
그곳에 그들이 있었다.
오늘은 오늘의 태양이 뜬다는....아주 오랜 명언처럼......
그들에게도........새로운 날이.......그렇게 선물처럼 축복처럼 주어졌다.
<러블리희원맘님께서 그려주신 일러스트~~~ 너무너무 이뻐요. 정말 감사합니다. 진정 능력자, 금손님이십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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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는 이 뒤에 열 장 정도 더 써둔 게 있는데, 이미 35장이 되어 버려서 잘랐습니다.
그래도 이 둘의 첫 시작이 좀 더 강조되어도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시놉을 짜고, 그 시놉을 지켜서 쓰는 편입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필이 딱 오는 부분이 있으면, 그 부분부터 먼저 쓰게 되거든요.
그래서 중간 부분 쓰다가, 뒷부분 쓰다가, 그러다 필 꽂히면, 다른 회차 먼저 쓰다가 그러게 됩니다.
이번은 좀 그런 게 많았던 회였습니다.
18회를 적다가 필이 꽂혀서 3부 다른 부분들 적다가, 그래서 다른 회차를 열심히 적는 뭐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다지요.
결국 이 얘기는 제가 왜 이토록 늦었는지에 대한 제 비루한 변명이었습니다.
글이라는 것도, 뭔가가 내리지 않으면, 단 한 자도 적을 수 없는 것이라.......
제 비루한 변명일지라도 용서해주시길......ㅠㅠㅠㅠㅠ
2
당.기.못의 은시경과 공주님은...나름...조금씩 진도를 나가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만,
보시는 분들은 또 다르시겠지요?
한 가지 부탁드릴 말씀은, 모든 이야기에는 개인의 취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처음부터 말씀드린 게 있습니다.
저는 남정네가 한 여자를 너무나 사랑해서 혼자 가슴 아파하며, 절절해 하며, 끙끙대는 걸 좋아합니다.
또 제가 천성적으로 알콩달콩한 걸 못 그립니다.
글 쓰시는 분들마다 각자 잘 하시는 부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절절한 애정씬을, 또 알콩달콩한 연애씬을, 저처럼 애절하다 못해 사람 속 뒤집는 그런 씬을....유독 자신있어 하시는 분들이 있으실 듯합니다.
아니, 쓰시는 분들은 스스로 잘 못 느끼시지만, 읽으시는 분들은 아마 아실 겁니다.
개인의 취향은, 변하지 않습니다.
변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가슴이 뛰는 대로 쓸 수밖에 없으니까요.
제 스스로가, 이런 남정네에 가슴이 뛰는 것을.....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
이것이....바로 그 어쩔 수 없는 개인의 취향인 듯합니다.
그러니 이 역시 제 변명입니다.
왜 이토록 은시경은 아픈가.....라는 질문의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개인의 취향은 참으로 놀라운 게, 저는 좀 확실하고 단호한 편입니다.
제 취향과 안 맞으면, 사실 다시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무리 다른 분들이 좋다 하셔도, 제게 고통스러우면 보지 않습니다.
그 정도로 제 개취는 참 뚜렷하더라는 거지요.
아마 당.기.못도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
개취가 맞지 않으시면, 힘만 드실까봐 걱정입니다.
3
혜원이가 전화한 씬이 있습니다.
제겐.....이 부분 쓰는 게 고통이었습니다.
결국 한밤에 눈물을 몇 시간이고 뽑아내고야 말았다지요.
제겐 여전히 공주님이 고통입니다.
그 시간이 어땠을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턱하니 막힙니다.
어쩌면, 은시경의 죽음을 안 그 순간부터 제가 느낀 그 감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이후를 생각해 보면, 공주님 입장에서 은시경이 죽었다고 알게 된 이후를 생각해 보면,
그 고통은...어느 정도일까.
전 사실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적을 때마다 이 부분은 제 스스로도 엄청나게 각오하고 적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전 혜원이가 말하는 사랑이라는 거, 그것에 완전히 동감합니다.
사랑은 원래가 구질구질합니다.
인생이 구질구질한 것이듯이, 사랑 역시 구질구질합니다.
바닥까지 내려가 보고, 끝까지 잡아본 사람은, 더 이상 미련이 남지 않지요.
끝까지 가봤으니까요. 끝까지 참아보고, 또 끝까지 잡아보려 한 사람은, 끝도 낼 수 있습니다.
사랑은 쿨할 수 없습니다.
그게 쿨하다면, 사랑이 아닙니다.
구질구질하고, 처절하고, 바닥까지 내려가는 것,
자존심이라는 걸, 완전히 내놓을 수 있는 것,
그것이 진정한 용기이고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태어나서, 그토록 나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용기는 없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 역시 제 생각입니다.
생각은 다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적어도 제게 사랑은 그러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래도 마지막에 자존심은 지키라고.
맞습니다. 자존심은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그 자존심을 지키다가 잡지 못해서, 평생 후회하며 미련을 두는 것보다는,
그 순간, 마지막까지 바닥까지 내려가서 바짓가랑이라도 잡아보고,
그토록 내려가보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끝까지 잡아본 사람은, 더 이상의 미련이 없어지니까요.
평생 동안, 후회하지 않고 살 수 있으니까요.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본 사람은, 미련 따위는 절대로 남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정말 좋은 사람을, 내 인연을 다시 만나게 되니까요.
4.
공주님에 대해서입니다.
공주님의 입장에서 은시경은 새로운 사람입니다.
갑자기 나타난 새로운 사람입니다.
읽으시는 분들은 과거를 알고 계시니, 공주님도 은시경을 사랑하고 있다고 자꾸 과거를 소급하셔서 생각하시기 쉽지만,
지금 공주님은 은시경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 말은, 지금 공주님에게 은시경은 전혀 새로운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자꾸 신경이 쓰이는 사람이지요.
어떤 분들은 사랑에 쉽게 빠지시는 분들도 있으실 거고, 아주 느리신 분들도 있으실 겁니다.
자신의 감정을 아주 한참 후에 알게 되시기도 하고,
그 사람이 내게 마음이 있었다는 걸, 몇 년 후 혹은 십수 년이 흐른 후 알게 되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네. 후자는 제 얘기입니다.
전, 무지하게 느립니다.
그리고 무지하게 주저합니다.
그 때의 저는...아주 느리고, 주저했고, 두려움이 많았더랬지요.
남자로 다가오는 것에 엄청난 부담감을 느끼기도 했구요.
실제로 나를 좋아한다고 해도, 전혀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무신경하기도 했구요.
어쩌면 무신경할 수도 있고, 모르는 척하고 싶어서였기도 했을 듯합니다.
어쨌든 공주님은 지금, 갑자기 새로운 남자가 다가오고 있는 것에, 겁도 나고, 가슴도 두근대고, 그러면서 멀어지고도 싶고, 또 멀어지려하니 잡고도 싶고,
자신의 감정을 도통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사람 가지고 노나...싶기도 하실 겁니다.
그러나 상처가 있는 사람이라면, 사람에 대해 상처를 받아본 사람이라면, 공주님을 이해하실 겁니다.
쉽게 마음을 내줄 수 없는....그런 상황 말입니다.
공주님도 그러한 상황이지요.
공주님께 은시경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아무리 그 남자가 간절하다 하더라도, 쉽게 마음을 열 수 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저는 너무너무 오래 걸리는 사람이라서, 전 쉽게 마음을 못 엽니다.
끊임없이 물러서려 할 겁니다.
그 사람을 확실히 알기 전까지 쉽게 마음을 주지도 않을 겁니다.
은시경 입장에서는 피를 말릴 수도 있지만,
공주님 입장에서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라고, 전 생각합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쉽게 정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특히 의리를 지키는 사람들, 한번 사랑을 하면, 끝까지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남자를 택할 수 없습니다.
또, 만약 자신의 무의식 깊숙이 남자에 대한 상처가 있다면, 더욱 그럴 겁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떠나서, 이 역시 개인의 취향입니다.
맞지 않으신다면, 고통만 되실 겁니다.
5
배경음악에서 <크리스마스에도 눈이 올까요?>에 나왔던 ost를 가져왔습니다.
<사랑해요...미안해요...>는 은시경의 목소리로, <그대라서>는 이재신의 목소리로 여겨주시길.....
그러면 당.기.못을 읽으시는 데 조금은 더 이해가 되시지 않으실까 합니다.
6.
사족이 어마어마하네요.
이 야밤에 제가 이러고 있네요.
뭔가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나 봅니다.
그리고 주말을 지키려고 엄청 달렸다는 걸...알아주시길.....
결국 월요일 새벽에 올리고야 말게 되었네요.
오늘 출근은 어쩔...ㅠㅠㅠㅠㅠㅠ
10월, 11월, 제겐 참.....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느리게 느리게 진행되겠지만, 그래도 이 글들 끝까지 계속 써나갈 겁니다.
글이라는 것도, 필이 와야 쓰는 것이라, 저도 언제가 될 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시간도 무지무지 필요하지요.
왜 너는 이렇게 느리냐....하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아무리 앉아 있어도, 아무리 쥐어짜내려고 해도, 안 나오는 건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앉아 있을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글만 던져놓고 또 휭하니 비우고 있는 이 블로그에
늘 찾아주시고, 댓글로 힘주시는 님들......
여전히 <당.기.못>을 기다려주시고, 열심히 읽어주시고, 발도장~~열심히 찍어주시는 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늦어도 꼭 답글을 달 테니, 꼭 확인해주소서.
또 일주일이 시작되네요.
희망차게, 긍정적으로 새로운 월요일을 열어가시길......(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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