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킹투하츠와 은신상플/(은신)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은신상플)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19

그랑블루08 2012. 10. 30. 04:33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19

 

 

 

 

 

 

 

 

*배경음악을 틀고 읽어주세요.

1) 포맨 - Baby Baby

2) 김동률 - 아이처럼-김동률

 

 

Baby Baby - 포맨

 

이유를 몰랐어 왜 내가 변했는지 한참 생각했어

너와 나 만난 이후로 나 변한 것 같아 아주 많이 말이야

이 노래 들리니..

 

니가 너무 고맙잖아 oh baby 니가 너무 예쁘잖아

눈을 뗄 수가 없어 내 눈엔 너만 보여

너만 계속 바라보고 싶잖아 난 정말 oh baby

 

하루가 지나고 또 다시 만나고 그러다 헤어지고 또 다시 만나게 되고

너무 좋은 거야 마냥 웃기만 해 이런 내가 보이니

니가 너무 고맙잖아 oh baby 니가 너무 예쁘잖아

눈을 뗄 수가 없어 내 눈엔 너만 보여

너만 계속 바라보고 싶잖아 난 오 정말

 

내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해서 oh baby

이런 날이 끝나지 않길 모든 게 다 변하지 않길

 

니가 너무 고맙잖아 oh baby 니가 너무 예쁘잖아

눈을 뗄 수가 없어 내 눈엔 너만 보여

너만 계속 바라보고 싶잖아 난 오 정말

 

 

 

아이처럼-김동률

 

 

사랑한다 말하고 날 받아줄 때엔

더 이상 나는 바랄 게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해놓고

자라나는 욕심에 무안해지지만

또 하루 종일 그대의 생각에 난 맘 졸여요

샘이 많아서 겁이 많아서

이렇게 나의 곁에서 웃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서

너무 좋아서 너무 벅차서

눈을 뜨면 다 사라질까봐 잠 못 들어요

 

 

주고 싶은데 받고 싶은데

남들처럼 할수 있는 건 다

함께 나누고 싶은데

맘이 급해서 속이 좁아서

괜시리 모두 망치게 될까봐 불안해 하죠

 

 

웃게 해줘서 울게 해줘서

이런 설렘을 평생에 또 한 번 느낄 수 있게 해줘서

믿게 해줘서 힘이 돼줘서

눈을 뜨면 처음으로 하는 말

참 고마워요

내게 와줘서 꿈꾸게 해줘서

우리라는 선물을 준 그대

나 사랑해요

 

 

 

 

1

 

 

 

 

영원히 계속 될 것 같은 키스.

그러나 시경의 목 위로 감겨 있던 손이 스스륵 내려온다.

살그머니 입술을 떼고 바라보니, 공주님은 긴장이 풀리신 듯 눈을 감고 계신다.

 

“공주님.....”

 

나지막이 공주님을 불러보지만 공주님의 눈은 떠지지 않고 있었다.

 

하아....

 

시경의 입에서 얕게 한숨이 나온다.

벽에 기대어계셨던 공주님의 머리는 시경이 밀어붙이느라 바닥에 닿아 있었다.

시경의 손이 공주님의 볼을 살그머니 만져보지만, 공주님은 약간 눈썹만 움직이시더니 곧 잠에 빠져드시는 듯했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시경은 아무래도 바닥에 머리를 대고 계시는 게 불편하실 듯해서 자신의 다리 위로 공주님의 머리를 올려드렸다.

그랬더니 공주님은 편하신 지, 시경의 품으로 자꾸 안겨온다.

 

자신의 다리에 머리를 베고, 편한 듯 주무시고 계시는 공주님을 바라보니, 자신도 자꾸만 나른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고 계신 공주님께 자꾸만 시선이 간다.

주무시고 계시는데, 자신 때문에 깨실지도 모르는데,

속으로는 몇 번이나 이러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자꾸만 그 붉은 입술에 입을 대고 싶다.

결국 시경은 그녀의 입술을 다시 한 번 더 머금고야 만다.

한숨처럼 그녀의 입술에서 숨이 뱉어지지만, 시경은 그 숨마저 삼키며,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다시 한 번 더 자신의 입술로 머금고 있었다.

시경의 가슴이 자꾸만 저릿해 온다.

꿈이라면, 깨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영원히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고.......

가슴에 바람이 부는 것 같다.

 

 

 

 

해가 떠 있었다.

눈이 부신 듯해서 눈을 뜨고 나서도 재신은 한동안 여기가 어딜까 고민을 해야만 했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져서 위를 보니, 그가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다.

 

그제야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남자와 자신이 이제 어떤 사이가 된 건지, 감이 온다.

 

그리고 자신이 잠이 들기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굴에 갑자기 열이 확 올라온다.

 

나, 키스하다, 잔 거야?

 

잠을 계속 못 잤었다. 이 남자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정작 이 남자와 키스를 하다가 잠이 들다니......

도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할까.

엄청나게 이런 쪽으로 밝은 여자라 생각할까, 아니면 나무처럼 뻣뻣한 여자라 생각할까.

어느 쪽이든 최악이다.

 

아, 쪽팔려서 이 남자 얼굴은 또 어떻게 보지?

 

어쩌지....재신은 자꾸만 주저주저하며,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시경을 살핀다.

그도 벽에 기대어 잠이 든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면 그가 모르지 않을까....

진짜 어떻게 이 남자 다리를 베고 자냐, 진짜 이재신, 너도 참....어휴.....

혼자 속으로 궁시렁 궁시렁 대며, 바닥을 짚은 손에 힘을 주고는 아주 조금 머리를 들어올려 본다.

 

“깨셨....습니까?”

 

분명 아까까지 눈을 감고 있었던 시경이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있다.

 

“어...어.......”

 

이건 대답이라고 해야 할 지, 그저 혼자서 내는 신음소리라고 해야 할 지, 내 입에서 나온 소리를 내가 들으면서도 이건 뭔가....싶다.

 

“대답하신....겁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재신을 더 뻘줌하게 만들고 있었다.

얼굴까지 열이 올라오는 듯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는 재신을 잠시 살펴보더니, 그녀가 일어날 수 있도록 그녀의 어깨와 허리를 잡고 일으켜 앉혀준다.

재신은 그가 하는 대로 그저 내버려두면서, 시선은 도저히 그를 향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았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던 시경이 갑자기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건다.

 

 

<예, 근위대장님.>

 

“공주님 모시고 그쪽으로 갈 거니까 차 대기시켜.”

 

<그러면 어디에 대기하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지금 백사장 쪽에 있지?”

 

<예.>

 

“거기까진 내가 모시고 갈 테니까, 백사장 끝에 대기시켜.”

 

<예. 알겠습니다.>

 

 

재신은 그의 전화내용을 듣다가 기가 막힌다.

공적인 이 남자과 사적인 이 남자는 전혀 다른 사람 같다.

아까까지 자신에게 그토록 들이대더니 지금은 다시 근위대장으로 돌아가 있다.

 

“뭐야, 다들 이 근처에 있었던 거예요?”

 

“예. 공주님께서 계시는데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 다들 어디에 있었던 거예요?”

 

“절벽 위쪽과, 백사장 양쪽 끝에 근위대가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원래대로의 은시경으로 돌아가 있었다.

아니, 근위대장 은시경 소령으로 돌아가 있었다.

 

“뭐야? 그런데 나한테 여기서 그랬다는 거야?”

 

재신이 자신의 입술을 만지작거린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사무적으로 대답하던 시경의 얼굴이 확~하고 붉어진다.

아까까지는 재신이 뭔가 뻘줌해 하고 있었다면, 지금부터는 다시 입장이 바뀌고 있었다.

 

“흠흠........가시죠. 공주님.”

 

“응? 나 목발 없는데? 가져오라고 그래요.”

 

“싫습니다.”

 

“뭐야?”

 

“제가 업어드릴 겁니다.”

 

그의 말투가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업어드리겠다가 아니라, 업어드릴 겁니다라........

 

이거 봐. 이 남자. 자꾸 스킨십하려고 하네.

 

“......남자니까요.”

 

혼잣말처럼 궁시렁거리는 말을 들었는지, 그가 담담하게 대답을 한다.

 

“뭐라구요?”

 

“남잡니다. 저.”

 

그 말에 이상하게 재신의 가슴이 쿵쿵하고 뛴다.

누가 뭐래? 남자지, 그럼....하면서도 재신의 가슴은 자꾸만 쿵쿵대고 있다. 남자라는 그 말이, 왜 그렇게 두근대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자신과 은시경은 한 여자와 한 남자로 마주하고 있다는 건, 명확했다.

그의 등에 업히면서, 그의 따뜻한 등에 머리를 기대면서도, 혹시나 두근대는 자신의 심장소리를 들킬까봐 긴장이 되는 재신이었다.

신기한 사람이다.

딱딱한 듯하면서도, 공식적으로 말하는 듯하면서도 그는 이상하게 사람의 심장 저 안까지 들어와 내려앉는 그런 말들을 해서는 사람을 헤집어 버린다.

 

 

 

 

 

2

 

 

 

 

두 사람 주변에는 무언가 이상한 아우라가 있었다.

다른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둘만의 아우라.

그래서 근위대장이 명령하는 말이면, 깐깐하기로 소문난 궁중실장님도 이상하게 그의 말에는 꺾이시고는 했다.

그런 상황이니 다른 근위대원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었다.

 

공항에 내려서 왕실 전용기가 있는 곳까지 의전차로 이동한 재신은, 차에서 내리려 목발을 내오라고 시켰다.

그런데 그녀의 말은 바로 무시되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녀의 앞좌석에 타고 있던 그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한다.

 

“어? 근위대장님. 나, 저 정도는 걸을 수 있어요.”

 

그랬다. 전용기의 계단이 가파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못 오를 정도는 아니었다.

일반 비행기라면 좀 힘들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전용기의 계단은 그나마 짧은 편이니, 앞 뒤에 궁인들과 근위대원들이 부축하면 얼마든지 오를 수 있었다.

아니, 원래 그래 왔었다.

 

“안 됩니다.”

 

“무슨 소리예요?”

 

“이번에 너무 무리하셨습니다. 바로 왕실 주치의께 가셔야 하니, 그 사이에라도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내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그대로 나를 안아 올렸다.

 

“은시경 씨!!”

 

주변에 있던 궁중실장이나 궁인들, 다른 근위대원들은 그저 눈을 내리깔고 그의 명령을 듣고 있었다.

 

“나 참, 이 남자의 명령이 공주보다 더 세다, 이거야?”

 

“그럴 리가요. 공주님.”

 

그는 그대로 나를 안아들고는 전용기의 계단으로 간다.

 

“은시경 씨, 원래 이런 사람이에요?”

 

“예? 무슨 말씀이신지.......”

 

“원래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거예요?

그리고 계속 나, 막 안고........”

 

내가 작게 속삭이는 말에 그의 얼굴이 붉어진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듯하면서도, 또 이렇게 수줍은 소년처럼 얼굴이 붉어진다.

그의 다이나믹한 모습에 재신은 계속 놀라고 있다.

처음 그를 만나고, 그에게 했던 말이 맞는 것 같다.

강직한 남자와 수줍은 소년이 함께 존재하는 남자. 그는 그랬다.

그래서 이러겠지 싶어서 다가가면 전혀 다르게 반응해서 사람을 놀라게 하곤 한다.

그것이 이 남자의 매력일지도 모르겠다.

 

이 남자의 매력?

 

하아....이재신....너, 참 웃긴다.

 

재신은 자신 속에서 떠오르는 상념들 때문에 더 놀랄 뿐이다.

그리고는 애써 다짐한다.

1달 제대로 사귀기로 한 거니까, 진짜 연인이라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거라고,

자신이 이상한 게 아니라고.....

애써 자신을 납득시키려고 한다.

 

 

왕실 전용기 안에는 작게 내실이 마련되어 있다.

원래는 없던 것이었으나, 아버지 때부터 만드셨다고 한다.

엄마와 연애결혼을 하셨던 아버지는,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연애 하냐며, 방해 받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내실을 마련하셨다.

웃기게도 그 내실에는 우리조차도 들어갈 수 없었다.

예전에는 큰 오빠 내외가 외국으로 나갈 때 사용했다가, 지금은 작은 오빠네가 사용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가지 않더라도, 아무래도 밖은 근위대원들도 궁인들도 있으니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혼자서 이동할 때, 피곤해서 자고 싶을 때는 내실 안을 이용하고는 했다.

 

 

그런데 지금 시경이 재신을 내실 안으로 옮기고 있었다.

 

“은시경 씨!”

 

내가 그를 부르지만, 그의 눈은 내가 아니라 뒤에 따라 들어오고 있던 궁중실장님과 궁인들을 향하고 있었다.

 

“공주님께서 쉬셔야 하니, 내실에 모시겠습니다.

따로 부르실 때까지는 들어오시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예? 그럼 제가.......”

 

“아닙니다. 제가 공주님 곁에 있겠습니다.

며칠 전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고.......”

 

공주님께서 내실에 계신다면, 궁중실장은 자신이 곁에서 모시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근위대장이 공주님 곁에 계시겠다고 하니 뭔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음에 나온 말 한 마디, 불미스러운 일이라는 말 한 마디에, 궁중실장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만큼 그들 모두에게 제주 포럼에서의 사건은 너무나 크고 깊게 박혀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대상으로 근위대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중요한 건, 지금 이 모든 상황을 근위대장이 지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작 공주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그러나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사실 공주님도 궁중실장과 궁인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는 시경을 재미있다는 듯이 보고 계셨다.

모두가 근위대장의 말을 들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분위기였달까.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불러주세요.

그럼 쉬십시오. 공주님.”

 

궁중실장과 궁인들은 재신에게 인사를 하고 내실의 문을 닫고 나갔다.

 

재신은 사실 시경이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 너무나 신기했다.

그들이 모두 나가자, 그제야 재신이 시경을 향해서 입을 뗐다.

 

“뭐야? 뭐 하려고?”

 

“공주님, 마음 편히 쉬게 해드리려고 그랬습니다.”

 

“쉬어?”

 

그가 앉아 있는 재신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헉!!

 

재신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의 얼굴이 자신의 얼굴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다.

서로의 가슴이 닿을 듯 말 듯하게, 얼굴이 닿을 듯 말 듯하게 가까이 온다.

 

지금.....뭐야.......

 

어!!

 

재신의 의자가 뒤로 넘어간다.

순간 재신의 얼굴에 열이 확 오른다.

설마...이 남자....뭐 하려고.......

 

침도 못 삼킨 채, 그의 짙고도 검은 눈을 바라보고만 있는데, 재신의 눈을 깊이 깊이 바라보던 그가 다시 멀어진다.

작게 한숨을 내뱉는 것 같기도 하다.

그가 의자를 내려준 대로 비스듬하게 누운 자세로 재신이 시경을 바라본다.

 

“은시경 씨는?”

 

“예?”

 

“어디 있으려구요?

아까 궁중실장님껜 여기 있는다면서요?”

 

“아...예.”

 

그가 재신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여전히 각진 자세로 앉아 있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예요?”

 

“예?”

 

“은시경 씨도 누워야지. 내가 기댈 수가 없잖아요.”

 

재신이 좌석 손잡이를 곁눈질한다.

그래도 시경은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다.

 

“좌석 손잡이, 들어올리라구요.

그래야 기대지.”

 

생각해보니, 그가 알 리는 없겠다 싶다.

오빠와 같이 전용기를 타고 갔더라도, 각자 따로 앉았을 테니, 좌석 손잡이를 올릴 일은 없었을 테고.

사실 두 자리라고는 하지만, 일반 비행기의 비즈니스석보다도 더 넓게 만들어두어서, 사실상 두 자리라고는 하지만, 두 자리 반 내지는 세 자리에 가까웠다.

그래서 부부가 사용할 때는 좌석을 완전히 180도로 눕혀 침대처럼 사용할 수도 있었다.

좌석손잡이를 완전히 젖혀서 의자 뒷면에다 붙이면 침대가 되었다.

어쨌든 이걸 자신이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시경이 재신의 의자에 맞추어 자신의 의자를 뒤로 눕혔다.

그러자 재신이 기다렸다는 듯이 시경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그가 얼지 않을까 생각했던 재신은 보기 좋게 자신의 예상이 빗나가고 말았다.

그의 손이 재신의 손으로 다가왔다.

손을 깍지 채 잡는 시경 때문에 재신은 순간 움찔하고야 말았다.

이 남자가 이렇게 적극적이었던가.

생각해 보면 그는 때때로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몰아붙이며 다가오기도 했다.

수줍은 듯 그렇게 먼발치에 있는 듯도 하다가

자신의 감정에 뭔가가 툭하고 끊어지고 나면 두려울 정도로 다가왔다.

 

“어, 지금 뭐하는 거예요?

근위대장이......이래도 되나?

이게 호위예요?

지금 공주 호위하는 거 맞아요?”

 

“지금은 아닙니다.”

 

“네?”

 

“지금은, 내 여자 곁에 있는 겁니다. 근위대장이 아니라......”

 

장난치려던 공주님이 도리어 얼굴이 붉어진다.

 

이 남자, 정말 선수 아닐까. 분명.......

 

“이러려고, 다 내보낸 거예요?”

 

“예.”

 

너무나 당당하게 ‘예’라고 말하는 이 남자 때문에 재신은 도리어 어이가 없다.

 

‘이봐 이봐...이 남자......보통이 아니야.’

 

풋~

작게 재신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새어나오자 눈을 감고 있던 시경이 눈도 뜨지 않은 채로 입을 뗀다.

 

“주무세요. 공주님. 피곤하시잖아요.”

 

“한 시간이면 가는 걸, 뭐.”

 

“그래도 주무셔야 합니다.”

 

“나 아까 자서 괜찮아요.

은시경 씨나 눈 좀 붙여요.”

 

“공주님도 그러셔야죠.”

 

웬만해선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재신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원하는 대로 눈을 감고 그의 어깨에 기댄다.

넓고 단단하고 따뜻하다.

 

마치 예전 세상 모든 것들 앞에서 자신을 지켜주던 두 사람이 떠오른다.

두 사람을 모두 보내고 나서 내겐 이제 마음 놓고 기댈 사람이 없나 보다 하고 있었다.

작은 오빠는 남은 자로서 모든 무게를 지고 가고 있다.

그래서 내 무게까지 더하게 해주고 싶진 않았다.

이미 나라는 존재는 작은 오빠에겐 상처였다.

그래서 적어도 내가 그 상처를 더 짓무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엄마는....엄마는.....그저 마음이 아프다.

괜찮다고, 무사하다고, 전화를 드렸을 때도, 엄마는 아무 말씀도 못하시고, 꺽꺽대며 울고만 계셨다.

속으로 삭이고만 있는 엄마니까, 그래서 이젠 내가 더 엄마를 보듬어주고 싶다.

나 이제 다 컸다고, 늘 애만 먹이던 그런 철부지 막내 아니라고, 이젠 내가 엄마의 여리고 마른 어깨를 안아주고 싶었다.

 

기억이 끊어진 그 시점부터 나는 변화해왔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 스스로 이 모든 무게를 지고 가야 한다고.

이젠 어깨를 내줄 아빠도, 큰오빠도 없으니까, 이젠 내 스스로 내 무게를 지고 가야 하는 거라고,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다짐했다.

 

그런데 지금 내게 어깨를 내어주고 있는 이 남자가, 이 남자의 따뜻하고 단단한 어깨가 자꾸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세상에 내가 기대어도 될 어깨 하나는 주신 것인가 싶어서.

다른 어깨는 모두 거두어 가셨어도, 그래도 또 다른 어깨를 나를 위해 준비해 두셨나 싶어서,

가슴이 자꾸 뭉클해진다.

 

 

 

 

 

“공주님, 공주님!!”

 

궁중실장이 내실문 밖에서 계속 공주님을 불러보지만, 아무 대답이 없으셨다.

주무시나 싶어서 문에 노크까지 해보지만 여전히 기척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궁중실장이 문을 열고 들어가다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는 기함을 하고 말았다.

 

그곳에는 공주님과 근위대장님이 서로 꼭 껴안은 채 주무시고 계셨다.

근위대장님의 팔이 공주님의 어깨를 감싸고, 공주님은 근위대장님의 가슴에 폭 안긴 채로 단잠에 빠져계셨다.

 

“궁중실장님, 공주님 아직 기척 없으세요?”

 

뒤에서 궁인 몇 명이 들어오려고 하자, 궁중실장이 황급히 막으며 내실 문을 닫고 나왔다.

 

“일단 자리에 앉아 있어.”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겨우겨우 진정시키고 나서, 궁중실장은 근위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궁중실장님.”

 

“곧 착륙할 것 같아서 연락드렸습니다.

공주님께서 준비하셔야 할 것 같아서.......”

 

“예, 알겠습니다. 공주님 아직 주무시는데, 5분만 더 이따가 들어오십시오.”

 

5분 후에 들어가 본 내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공주님도, 근위대장님도 멀찍이 앉아계셨다.

괜히 궁중실장의 얼굴만 자꾸 홧홧 열이 올라온다.

 

“궁중실장님, 어디 편찮으세요? 얼굴에 열이 있으신 거 같아요. 빨간데......”

 

“아, 아닙니다. 공주님.”

 

평상시와는 달리 궁중실장님의 목소리가 떨려나오자, 재신은 이상하다는 듯, 자꾸 궁중실장의 얼굴을 살핀다.

궁중실장은 공주님도, 근위대장님도 쳐다볼 수가 없다.

계속 열이 올라오는 통에, 자꾸 손부채만 부치고 있었다.

 

 

 

 

3

 

 

 

역시나 공항 앞은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근위대원들이 주위를 삼엄하게 원을 돌며 막고 있다고는 해도, 취재 열기가 뜨거워서 그들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시경은 공주님의 바로 옆에서 공주님을 감싸며, 그 무리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고 있었다.

처음 공주님을 보고 공주님께 질문을 해대던 기자들이 갑자기 은시경 근위대장이다! 라며 그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사실 은시경이 살아 돌아온 이후, 언론에 노출된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기자들이 얼굴을 보자마자 알 정도로 알려진 건 아니었다.

그 때문에 공주님도 시경도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사실 이것은 인터넷의 파워였다.

그 문제의 공주의 기사 사진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상우의 배경이 워낙 유명해서 당연히 상우 편으로 기울던 네티즌들이, 그 엄청난 수사력을 발휘해서 결국 은시경의 신상명세를 파악하기에 이르렀다.

중요한 건 그들이 보기에도 은시경이 너무 잘생겼으니,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야 라고 파헤치기 시작한 것이다.

웬만한 배우 뺨치는 인물에, 엄청나게 화려한 이력까지.

게다가 어디선가 본 듯한데 싶었던 네티즌들은, 드디어 그를 어디에서 본 건지 알게 되었다.

바로 국왕을 살리고 대신 총을 맞아, 근 2년 동안 죽어 있었다던, 바로 그 근위대장이었다.

그러자 네티즌들이 벌떼같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 때는 증명사진 정도로만 나와 있어서, 아, 그런가 보다 하다가, 이번에는 공주님을 안고, 걸어가는 움직이는 그를 사진으로 보자, 네티즌들이 열광하기 시작한 것이다.

멋지다에서부터, 역시 근위대원은 얼굴보고 뽑는다에서, 머리까지 좋단다에서, 엄청나게 화려한 그의 배경과 학력까지

단 하루만에 은시경은 유명인물이 되었고, 네티즌들에 의해 하나하나 까발려지기 시작했다.

 

정작, 공주님과 은시경만 그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맞닥뜨린 현실에 당황하고 있을 뿐이었다.

 

“근위대장님, 지금 인터넷 네티즌들이 난리 난 건 아십니까?

훈남에 멋진 근위대장님에 대한 얘기가 장난 아니게 퍼지고 있습니다.”

 

“육사 엘리트 코스에 전체 수석. 아버지는 전직 비서실장님이셨던 은규태 비서실장님.

그런데 궁에 계시는 이유가 뭡니까?

더 좋은 곳으로도 얼마든지 가실 수 있으셨을 텐데요.

게다가 사시도 합격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때까지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던, 그가 방금 질문한 기자를 향해서 한 마디 대답을 한다.

 

“위대한 왕실이 존재하는 곳에, 제가 있는 것이 이상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가장 위대한 곳에, 가장 위대한 분을 모시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그보다 더 영예로운 일은 없습니다.”

 

그의 시선이 재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자들의 감탄사가 나오면서 연신 셔터가 터졌다.

 

그렇게 지나가던 그곳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안 그래도 휠체어를 탔어야 했는 게 아닐까 걱정하던 시경의 우려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목발을 짚고 천천히 걷고 있던 재신이 약간 비틀거리더니, 순간 어! 소리와 함께 한쪽으로 기우뚱한다.

순간 시경이 바로 허리를 붙들어서 문제는 없었으나, 난감한 순간이었다.

사람들에 밀려서 힘을 너무 받은 구두가 결국 문제를 일으키고 부러진 것이다.

 

그때 시경이 바로 인이어로 명령을 내렸다.

 

“지금, 전대원은 공주님 주변을 에워싼다.

그리고 기자들에게 사진 금물이라고 언급하고,

지금부터 만약 사진을 찍을 시, 왕실의 명령을 어기는 것으로 간주, 체포될 수도 있다고 얘기할 것.

이상이다!”

 

시경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근위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공주님 주위로 원을 그리며 포진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어안이 벙벙한 기자들에게 시경이 강하고 딱딱하게 사무적인 언어로 전달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는 사진을 찍으실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 왕실의 이미지가 국익과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아실 겁니다.

공식적으로 기자회견을 할 테니, 지금부터는 단 하나의 컷도 용납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이를 지키지 않을 시, 왕실의 명령을 어긴 것으로 간주, 즉심에 넘겨질 수도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은시경 근위대장의 말은 그 주변 전체에 크게 울릴 정도로 우렁찼다.

뼛속까지 군인이라는 것을 그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지금 이 남자의 말대로 즉심에 부칠 것 같은 그런 위압감이 느껴졌다.

눈 앞에 특종을 보고서도, 기자들은 셔터를 누를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은시경 근위대장의 말은 위엄이 있었다.

 

그 말을 마치자마자 시경은 바로 공주님을 안아들었다.

 

“은시경 씨!!!”

 

시경이 눈짓을 하자, 그 주변으로 근위대원들이 원을 그리며 대형을 유지했다.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공주님은 근위대장의 목을 껴안고 안겨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기자들은 그 광경을 눈으로 박아 넣을 뿐, 셔터를 누를 수가 없었다.

특종인데, 이거 진짜 특종인데......

아무리 아까워도, 도저히 셔터를 누를 강심장은 되지 못했다.

 

시경에게 안겨 나가면서 재신은 얼굴이 자꾸만 뜨거워진다.

 

“아, 정말...사진 찍히면 안 되는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듯이 나온 말에 시경이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사진 안 찍힐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재신은 자꾸만 두근두근댄다.

당연한 일인데, 구두굽이 부러졌고, 그래서 분명 자신을 안아 나가는 수밖에 없는 일인데,

그래도 자꾸만 심장이 뛰었다.

 

 

 

 

 

“아, 그리고 근위대장님은 내 옆에 타세요.

나 좀 기대게.”

 

재신을 차 뒷자리에 태워주고 자신은 앞좌석에 타려던 시경이 재신을 바라본다.

재신의 말에 놀란 듯하면서도, 약간은 기쁜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서 재신은 한쪽 눈을 찡긋한다.

 

“출발해.”

 

운전석에 앉아 있던 동하가 시경의 명령에 대답하며 바로 출발을 한다.

차 안에 뭔가 어색한 침묵이 도는 듯해서, 동하가 룸미러로 뒤를 힐끔 보지만, 공주님과 근위대장님은 서로 각자 창문 쪽을 바라보며 아무 말이 없다.

 

분명 기대신다고 했는데......

 

분명 무언가가 있는 이상한 분위기였다.

늘 썸을 타는 사람들에게는 그 특유의 느낌적인 느낌이 있는데 말야.

 

동하는 뭔가가 있다 싶지만, 애써 입을 다문다.

자신의 바람이야, 두 분이 어서 예전처럼 잘 되시길 바라지만.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잘 되셨다고 할 수는 없다.

잘 되시려다가...그만......에효....

그래도 두 분 마음은 확실했는데, 공주님께서 기억만 찾으시면 되는데, 의외로 그 한번 봉인된 기억이라는 것이 잘 돌아오지 않는 것 같다.

근위대장님은 며칠 사이에 얼굴이 핼쑥해지신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잠을 못 주무셨으니.....

아마 제주도에 내려오신 동안 단 한숨도 못 주무셨을 거다.

내가 정말 답답해서......

남녀 사이는 둘이 풀어야 하는 거니, 자신이 나설 수도 없고....

그런데 이번 일로 뭔가 뭉실뭉실 올라오는 게 있지만, 티내면 안 되겠지 싶다.

그때였다.

공주님의 휴대폰이 울렸다.

 

“어, 상우 오빠!”

 

상우 오빠라는 말에 앞에서 운전하던 동하도, 또 옆에 앉아 있던 시경도 모두 움찔한다.

 

<재신아, 지금 서울 도착한 거야?>

 

“응. 어떻게 알았어?

나 이제 공항 나와서 궁으로 가는 중이야.”

 

<어떻게 알긴? 계속 전화했으니까 알지.

계속 꺼져 있길래, 비행기 타고 있나 보다 했지.

몸은, 괜찮아?>

 

“어. 괜찮아.”

 

<목소리는 피곤해 보이는데?>

 

“잠을 많이 못 자서 그런가봐. 잠이야 궁에 가서 자면 되지 뭐.

걱정 안 해도 돼.

어!!”

 

<무슨 일이야? 재신아? 재신아?>

 

“아..아무...일도 아니야....어, 오빠 얘기해.”

 

아무 일도 아닌 건 아니었다.

오빠에게 전화가 온 것도, 이 남자 앞에서 상우 오빠의 전화를 받아야 하는 것도 모두 신경이 쓰였다.

그렇다고 온 전화를 안 받을 수도 없는 것이고.

전화기에 상우 오빠 이름을 부르고 나서 아차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창문을 바라보던 그도, 그 이름을 듣는 순간, 휙 돌아보다 내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을 바라보느라, 내가 지금 무슨 대답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채로 건성건성 말하고 있었다.

온 신경은 그에게로 쏠려 있었다.

그가 다시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괜찮다고, 어서 상우 오빠를 안심시키고 어서 끊어야겠다고 생각한 그 순간이었다.

 

아.......

 

그의 손이 내 손을 잡았다.

깍지를 낀 채로 강하게 잡아왔다.

시선은 여전히 창문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의 모든 마음은 나를 향하고 있다고 그 손이 말하고 있었다.

 

쿵..쿵.....

 

심장이 울려댄다.

그의 손가락이 재신의 손가락으로 얽혀든다.

그의 손이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여자라고......

지금 내 옆에 그가 있다고......

다른 남자 보지 말라고.....

흔들리지 말라고......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앞에 염동하 대위가 있지만, 그는 끄떡도 없었다.

 

“오빠, 나 차 안이라......”

 

<아, 알았어. 나중에 통화하자.

그리고 오늘은 좀 쉬어. 너 너무 지쳐 보여.>

 

“응. 알았어. 고마워.”

 

상우 오빠와의 전화를 급히 끊고 나서도 그는 여전히 재신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아무래도 눈치가 보여서 손을 빼보려고 하지만, 그는 더 힘주어 손을 잡는다.

단단한 그의 마음처럼, 절대로 변하지 않을 그의 마음처럼, 그의 손은 따뜻하고 크고 단단했다.

 

재신이 그를 바라보지만, 그는 창문을 향한 채로 그녀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러나 재신이 자신을 보는 걸 아는 듯, 그녀의 손을 좀 더 꽉 잡아 쥔다.

 

재신은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그의 단단한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었다.

그의 어깨가 움찔하는 게 느껴진다.

꽉 잡고 있던 그의 손이 그제야 자신의 손을 놓아준다.

그러더니 그의 팔은 재신의 어깨를 안아 자신의 품 안으로 더 기대게 한다.

룸미러로 이 상황을 보던 동하가 흠칫 놀라다가 시경의 눈과 마주치고는 헛기침을 하며 바로 정면을 바라본다.

동하에게 앞을 보라며 주의를 주면서도, 시경은 재신을 자신의 품으로 더 안아오며, 자신의 여자인 양,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근위대장님이 공주님을 안고 계셨다.

물론 공주님이 피곤하셔서 기대셨을 수도 있다.

백번 양보해서 피곤에 지친 공주님이 옆자리에 있는 근위대원에게 기대실 수도 있다. 아, 물론 근위대장님이시긴 하지만 어쨌든 그렇다고 치자.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아직 대한민국 헌정 사상 없을 법한 일이지만 그래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천하의 염동하도 기함을 하고 말았다.

은시경의 오른쪽 손이 공주님의 어깨를, 그리고 가는 팔을 천천히 쓰다듬고 있었다.

동하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공주님은 겉옷을 벗고 얇은 블라우스만 걸치고 계셨다.

목이 많이 파여서 거의 어깨 근처까지 하얀 맨살이 드러나 있었다.

그런데 이 목석 같다 여긴 은시경 근위대장님이 공주님의 어깨와 팔을 쓰다듬다니.

헉!!

동하는 방금 본 상황을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설마! 설마! 은대장님이 설마!

시경의 엄지손가락이 공주님의 맨살이 드러난 목과 어깨쪽을 쓰다듬고 있었다.

더 놀라운 건 공주님께서 가만히 계신다는 거였다.

시경의 손이 자신의 맨살에 닿자 흠칫 놀라시면서도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시고 계셨다.

공주님의 볼이 조금씩 붉어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시경을 말리지는 않았다.

 

괜히 자꾸 더워져서 땀이 흐르고, 목이 칼칼해지는 동하였다.

 

 

 

 

 

4

 

 

 

 

궁에 의전차가 도착하자마자 재하와 항아, 궁인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시경이 공주님 쪽 차문을 열고 휠체어에 공주님을 앉히자, 갑자기 누군가 뛰어와서 재신을 안았다.

그 사람은 대비였다.

아니다.

대비가 아니라, 한 어머니였다.

한 쪽 신이 벗겨진 지도 모르고, 정신 없이 뛰어와 자신의 딸이 무사하다는 걸 온 몸으로 느끼고 싶은 평범한 엄마였다.

 

단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여주신 적이 없었다.

대비마마는 평민 출신이라는 어쩔 수 없는 꼬리표를 평생 달고 사셨다.

그랬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교양’을 강요당했다.

왕족으로서의 품위를 강요당하면서, 지아비의 죽음 앞에서도, 큰 언덕과도 같던 큰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마음껏 울 수가 없었다.

차 안에서 혼자 눈물을 삼켜야 했고, 혼자 남은 침실에서 이불을 쥐어뜯으며 슬픔을 삼켜야 했다.

그렇게 지켜낸 자리였다.

대비라는 자리는 그랬다.

평범한 지어미이지도, 평범한 어머니이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슬픔을 삭이고 삭여서 자신의 속에 꾹꾹 담아두시던 대비마마가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수많은 궁인들과 근위대원들 앞에서

자신을 놓았다.

자신의 굴레를 놓고, 한 어미가 되었다.

 

꺽꺽대는 어머니의 통곡 앞에서 재신도 목 놓아 울 수밖에 없었다.

 

“재신아........아이고....우리...강아지....내 새끼........”

 

엄마의 울음 앞에서, 재신은 그저 무장해제된 채로, 체면도, 품위도 생각할 틈도 없이 엄마를 붙들고 우는 것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미안했다.

너무나 죄송했다.

자신 때문에 겪은 엄마의 고통이 전해졌다.

가녀린 어깨가 바르르 떨리고 있는 엄마가 가슴에 아팠다.

어린 시절 그토록 강하게 우리를 지탱해주셨던 엄마의 어깨는 몰라보게 말라 있었다.

 

“미안해.....엄마......미안.......내가 잘못했어.”

 

“니가....니가 뭘 잘못해?

내 죄다. 전부 내 죄야.”

 

“뭐가 엄마 죄야? 엄마가 뭘 잘못했는데........”

 

“.......왕족만....아니었으면......내 새끼들......이렇게 고생시키지 않아도 되는데.....

그게 뭐라고.........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처음으로 엄마 입에서 왕족에 대한 한탄을 들었다.

적어도 절대로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재신과 대비 옆에 서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재하가 얼굴을 돌린다.

그러나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는 없었다.

왕족으로서의 굴레.

권리보다는 의무로만 쌓여있는 굴레.

 

한 평생 그녀가 겪어내야 했던 굴레였다.

남편을 먼저 앞세워 보내야 했고, 자랑스러웠던 아들과 며느리가 비명 횡사하는 걸 보아야 했고,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여전히 내 품에 안겨 재롱을 부릴 것 같은 막내 딸은 절벽에서 떨어져서는 겨우 살아났지만, 다리를 잃어야 했고,

작은 아들까지 사지에 보내야 했으며,

작은 며느리와 자신은 미친 살인마에게 납치까지 당해야 했다.

그래도 살아야 했다.

아니, 당당하게 살고, 당당하게 죽어야 했다.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마치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사람이어서는 안 되었다.

왕족은 사람이어서는 안 되었다.

 

그런 대비의 고통이, 그곳에 서 있던 모두에게 전해졌다.

왕족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 속에 어떤 마음을 잠재우며 죽여가며 살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왕족이기 이전에, 한 사람이고, 한 어머니라는 것을

그곳에 서 있던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엄마, 걱정 마. 나 안 죽어. 절대 안 죽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다시는 안 죽어.

엄마, 미안해. 정말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미안해.......미안해, 엄마.....”

 

재신의 말에 대비는 그저 등만 쓸어준다.

재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대비는 알고 있었다.

재신은 기억하고 있지 못하지만, 2년 전 자신에 대해 사죄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억을 하지 못해서, 그저 넘겨버렸던 그 일을,

그러나 엄마의 마음에 엄청난 생채기가 되어버린 그 일을,

이제야 꺼내어 사죄하고 있었던 것이다.

 

재신도 도저히 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기억이 없는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말하지 못했다.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저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그것은 대비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재하도 끄집어내지 않을 그들만의 불문율이었다.

그렇게 그들 모두에게 상처였다.

남은 사람들에게 어떤 상처가 되는지, 재신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남편은 산에 묻고,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재신은 오늘 그것을 또 한번 보고 말았다.

흔들리지 않던 자신의 어머니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그녀도 가녀린 한 평범한 어머니였다는 것을 알고야 말았다.

늘 든든하다 여겼지만, 그녀도 여리디 여린 가슴에 자식을 묻은 한 많은 여자였던 것이다.

 

 

 

 

5.

 

 

 

 

울어서 심신이 지친 재신은 왕실주치의의 진료를 받고 자신의 침실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었다.

링거를 맞으며 잠시 잠이 든 것 같은데, 벌써 몇 시간이 훌쩍 지난 듯했다.

아까 시경은 재하가 불러서 따라 들어간 이후 소식이 없었다.

 

이미 저녁이 되어 혼자서 방에서 미음을 대충 먹으며 끼니를 떼우고 나니 정신이 말똥말똥해진다.

재신은 자신도 모르게 휴대폰에 신경이 간다.

메시지음이 울려서 보면, 친구들이나 아는 사람들의 안부 메시지였다.

알게 모르게 실망을 하고 있는 자신이 이상했다.

 

도대체 누구이기를 바란 거야?

 

하아........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온다.

알고 있다.

내가 지금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

그런데 정작 그는 연락이 없다.

 

문자 하나라도 남기면 어디가 덧나나?

 

문득 든 생각에, 재신은 순간 화들짝 놀라고 만다.

이거야 말로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전형적인 상황인 거다.

남자에게 연락이 오지 않아 삐지는 여자 상황.

아, 너무 전형적이다.

 

정말 웃긴다.

1달, 만나보자고 한 건 자신이었다.

물론 한 남자와 한 여자로 만나보자고 했다.

또 진짜로 사귀는 사람들처럼 연인처럼 만나보자고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들이 그렇게 되어보려고 한다고 해서, 진짜 연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재신 자신의 지금 행동은 이미 진짜 연인의 상황이었다.

 

도대체 나 왜 이러는 거지?

 

자신이 이상하다며,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을 펼쳐 들었다.

당연히 이건 글이 아니라 활자였다.

읽어도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점점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뭐야, 어떻게 문자 하나가 없어?

이거 뭐지? 나 거절당한 건가?

돌아와 보니, 뭔가 마음이 변한 거야?

그럼, 그 키스는 뭐야?

아까 그렇게 키스에 손까지 잡아놓고....마음이 변했다고?

 

점점 생각하면 할수록 열이 채였다.

그렇다고 열 받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이재신 왜 이래? 왜 이렇게 안달을 해?

 

그리고 이렇게 열 받아 하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한숨이 나왔다.

 

어떻게 아무리 계약연애라지만, 한 달 동안은 그래도 진짜 연인처럼 지내기로 해놓고,

연락이 없지?

내 명령이어서 그랬다는 거야?

아님 벌써 밀당 들어간 거야?

좋아. 나도 몰라. 나도 버티는 거 하나는 끝내준다고.

 

혼자서 골이 난 재신은 이런 자신도 마음에 안 들고 가슴만 답답해서 결국 목발을 들고 꾸역꾸역 나왔다.

궁중실장님이며, 궁인들의 만류에도, 정말 잠시만 나갔다 오겠다고 통사정을 해서 겨우 나왔다.

가끔은 누가 위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공주인 자신이 이토록 싹싹 빌어야 하다니......

 

그리고는 언제나처럼 재신은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후원의 뜰, 자신에게 자신답게 해주는, 평화를 주는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와 있었다.

시경이 벤치를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아까까지 화가 났던 마음도, 툴툴대던 심보도 사라지고, 오로지 반가움만이 가슴 저 안에서 피어 올라왔다.

 

“왜, 여기 있어요?”

 

자신의 곁에 재신이 왔다는 것을 안 순간 스쳐지나가는 그의 감정의 울렁임들.......

그 감정의 울렁임이 재신에게도 전해져 온다.

재신은 그의 눈을 빗겨서 벤치로 향해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재신이 벤치에 앉아도 시경은 그런 재신을 그저 서서 바라보고만 있다.

그런 시경이 답답한 지, 재신은 자신의 옆 자리를 툭툭 치며, 앉아요 하며 그를 잡아 당긴다.

그제서야 겨우 재신의 곁에 앉는 시경에게 재신이 툭하고 말을 던졌다.

 

“다른 사람 같아.”

 

“예?”

 

“오늘 낮에, 나한테 그런 남자, 맞아요?”

 

“아...저....그게......”

 

붉어지는 남자의 얼굴.

 

“마음 바뀐 거예요? 아깐 그냥 공주가 그러니까 명령 들어야지 싶다가,

생각해보니 억울한 건가?

싫으면 물러도 돼요. 내가 그렇게 강압하는 건 아니...”

 

“아닙니다. 그런 거!!!”

 

너무 강하게 나온 말에, 재신도, 또 그 말을 내뱉은 시경 자신도 놀라고 만다.

 

“아, 저....전.....”

 

절대로 안 된다는 듯 버럭 대는 그의 태도도, 자기 태도에 자기 스스로 놀란 듯 당황하는 그의 모습도, 왠지 재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반나절, 계속 답답했던 마음이 뻥~하고 뚫리는 느낌이기도 했다.

 

“무르는 건, 절대로 안 됩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공주님, 이제 돌이키실 수 없다고 말입니다.”

 

조금은 딱딱하게, 조금은 걱정스럽게 자신을 보는 시경을 향해서 재신은 이쁘게 미소짓는다.

 

“누가 무른대요?”

 

“그러면 왜...그런 말씀을......?”

 

“은시경 씨가 싫으면 그러라는 거죠.”

 

“전, 절대로 그럴 수가 없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공주님.

제 마음이 어떤지, 이미 다 아시지 않습니까?”

 

나한테....뭔가 새디스트적인 성질이 있는 걸까.

왜, 난 이 남자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게 좋을까.

이 남자가 나 때문에 괴로워하는 게 왜 이렇게 가슴이 저릿해지는 걸까.

 

“근데 진짜 왜 여기 나와 있어요?”

 

어쩌면 재신은 이미 그 대답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 남자의 입술로 듣고 싶었다.

 

시경의 눈이 천천히 재신의 눈을 바라본다.

눈이 감정을 담고 있다는 걸, 말보다도 더 진한 감정이 배어나올 수 있다는 걸, 재신은 이 남자를 보고서 알게 되었다.

이 남자는, 눈빛조차도 정직했고 올곧았다.

올곧은 그의 눈이 자신만을 보고 있었다.

 

“아시지 않습니까? 공주님.”

 

나지막이 저 아래로 깔리는 소리는 재신의 심장 저 아래로 잠겨와 떨리게 한다.

 

“공주님.....보고 싶어서......”

 

“그럼, 나한테 연락하면 되잖아요.

전화를 하든가, 문자를 하든가, 아, 카톡을 하든가...

왜 나한테 연락을 안 해요?”

 

그렇게 뭐라고 귀엽게 쫑알쫑알 대고 있는 재신을 시경이 한참 쳐다본다.

 

“은시경 씨?”

 

“그래도 됩니까?”

 

“네? 뭐가요?”

 

“제가......공주님께 연락드려도....괜찮은 겁니까?”

 

“아, 진짜 이 남자 봐.

아까까지...나한테....한 건 뭐고, 지금 이 컨셉은 뭐예요?”

 

장난스러운 재신의 태도와는 달리, 시경은 진지했다.

 

“사실.....오늘은 꿈을 꾸는 것 같습니다.

제주도에서, 비행기 안에서, 꿈을 꾼 것 같습니다.

마치 제가 꿈꿔서는 안 되는 걸, 꿈꾼 것 같아서, 돌아와 보니, 명확하게 보입니다.

 

공주님께서 제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도대체 무슨 의미로 말씀하신 걸까......

 

공주님의 마음은......아닌데, 저만 이렇게 다가가는 것이, 공주님을 힘들게 해드리는 게 아닐까.

제가 지금 너무 나가고 있는 게 아닐까 싶고,

제 마음을 이토록 다 보여드려도 되는 건지......

그래서 공주님을 두렵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자꾸만 걱정이 됩니다.”

 

시경의 고백 같은 말에 재신의 심장이 또 한 번 쿵하고 떨어진다.

그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안다.

그렇다고 자신이 딱 뭐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열두 번도 더 마음이 바뀝니다.

미친 듯이 공주님께 다가갔다가, 이렇게 내 마음 내키는 대로, 내 욕심대로 공주님께 다가가면 안 된다고,

제 안의 제가 저를 막습니다.

그런데....아무리 막으려도 해도, 막아지지 않는, 그런 마음도 있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된다고 아무리 머리로 막아보려고 해도, 안 돼서, 자꾸만 공주님을 힘들게 해 드리는 제 안의 제가.....있습니다.”

 

“.......................”

 

“.......................”

 

“........힘들지...않아요.”

 

“예?”

 

“힘들지 않다구요. 나.”

 

“공주님.......”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어요.

나,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이런 제안 하지 않아요.

아니, 사실 이런 제안을 한 것도 처음이구요.

이런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은시경씨니까, 은시경씨라서 할 수 있었어요.

과거에 당신이 내게 어떤 존재였는지, 적어도 조금은 알게 되었으니까......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는 몰라요.

도대체 이게 무슨 마음인지도 몰라요.

그래도, 나 이렇게라도 당신을 잡고 싶었어요.”

 

공주님께서 자신을 잡고 싶다고 말씀하신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다.

 

“더, 솔직하게 말할게요.

당신이....내게서 멀어지는 것 같아서.....무서웠어요.

그게 싫었어요.

당신을 잡고 싶었어요.”

 

“저를....잡으신 겁니까.......”

 

“응. 그랬어요. 잡고 싶었어요. 당신, 내게서 멀리 떠나지 않게......

그러니까...지금처럼 그렇게 다가와줘요.

나도......조금씩 다가갈게요.

조금 더디더라도, 기다려줘요.

느려도, 한 발 한 발, 나 열심히 당신에게 가고 있어요.”

 

하아.......

 

시경이 한숨을 뱉는다.

 

“은시경 씨?”

 

“공주님....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응. 얘기해요.”

 

“어제.....이상우 씨가 공주님께 고백하는 거, 들었습니다.”

 

“그랬어요?”

 

재신은 알고 있었지만, 담담하게 대답한다.

 

“그런데 왜 제게 그 말씀을 하셨습니까?

공주님 첫사랑의......고백을 들으셨는데, 왜 제게 한 달 간 만나보자고 하셨습니까?”

 

그가 묻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대답해야 한다. 정직하게, 솔직하게.

 

“누군가의 고백을 들었는데,

이상하게 그 고백을 다른 남자가 들었을까봐 신경이 쓰였어요.

그 사람의 어깨가 움찔거리는 걸 봤는데, 나 때문일까, 나 때문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

 

“혹시 그 사람이, 이 고백 때문에 오해해서 나를 떠날까봐 무서웠어요.

그래서.......잡고 싶었어요.”

 

“그 남자보다, 제가......더.....신경 쓰이셨습니까?”

 

“.........그랬어요.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시경의 손이 천천히 재신의 얼굴로 올라온다.

재신의 이마를, 눈썹을, 그리고 부드러운 볼을, 그리고 그를 자꾸만 설레게 하는 그녀의 입술을 쓰다듬는다.

부드러운 감촉이 시경의 손을 타고 저 안 깊숙이 스며 들어와서 심장을 떨리게 한다.

몇 번이나 재신의 입술 위를 유영하는 그의 엄지손가락이, 재신의 가슴까지 설레게 한다.

이 남자는 감각적이다.

이 남자의 손끝이 스칠 때마다 이때까지 알지 못했던 감각들이 모두 일어서는 느낌이다.

그래서 그 느낌이 설레면서도 두렵다.

아직 감정도 알기 전에,

감각들이 먼저 다가서서 이성을 잠재우고 몸이 먼저 다가서는 느낌.

 

그의 눈이 점점 재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깊고 검은 그의 눈동자가 재신에게 점점 다가와 재신을 삼켜버릴 것 같았다.

재신은 눈을 감았다.

그의 눈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 깊이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입술로 내려앉는 그의 감촉에 재신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그에게 길들여져 버렸다.

그의 입술에 이토록 길들여져 버렸다.

부드럽고, 강하고, 때로는 이토록 휘몰아치는 그의 입술이, 자꾸만 심장을 뛰게 만든다.

부드럽게 감기는 그의 혀 사이로, 재신은 또다시 수줍게 그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의 혀와, 그의 입술과 얽혀들 때면,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남자 은시경.

오롯이 그를 느낄 뿐이었다.

단단하다 못해, 절대로 정도를 벗어나지 않을 것 같은 한 남자가, 내게 매달리는 것이, 나 때문에 이토록 자신의 감정을 다 쏟아내는 것이,

좋은지도 모른다.

숨이 차올라오지만, 그의 입술은 멈출 줄 모른다.

정신이 점점 더 아득해질 무렵, 그가 입술을 놓아준다.

그리고는 내 팔을 잡아 당겨 그대로 자신의 품 안으로 껴안는다.

 

하아........

 

“참으려고 했는데, 참아지지가 않습니다. 공주님.”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다 쏟아내는 남자라니.......

처음 봤을 때는 몰랐다.

아, 아니다.

그때도 그의 눈은 깊었다.

그의 목소리는 내 심장 저 언저리까지 내려앉았었다.

차가워 보이지만, 단단한 군인이지만, 그의 속에는 이토록 열정적인 남자가 들어앉아 있었나 보다.

 

“....후우...그러게요. 우리 오늘 첫날인데....벌써 3번째예요.

은시경 씨,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그를 놀리고 싶어서, 조금은 괴롭혀 주고 싶은 내 악동 기질이 결국 나오고야 만다.

그러나 나는 또다시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고 말았다.

 

“빠르지 않습니다.

제게는 2년이나 참고......또 참은......시간입니다.”

 

그의 2년......

이런 마음으로 참아온 거라면, 이런 감정의 깊이를 참고 또 참아온 거라면,

그의 말이 맞다.

그에게는 빠르지 않다.

아니 도리어 너무 느린 거다.

 

재신은 그의 품에 더 파고 든다.

그 몸짓 때문에 시경의 가슴은 벅차오르다 못해 터질 것만 같다.

 

“그러니까........이제 안 참아도 돼요.

내가.....당신의 2년, 다 보상해줄게요.

그러니까.....이제는 참지 말아요. 은시경 씨.”

 

그녀는 모를 것이다.

지금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지금 이 말만으로도, 자신의 마음이 다 보상되었다는 것을......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어도 된다는 것이, 사랑한다고 말해도 된다는 것이,

그리고 이렇게 손을 내밀어 그녀를 안아도 된다는 것이,

얼마나 기적 같은 것인지, 그녀는 모를 것이다.

 

비록 한 달이라 하더라도,

비록 그녀의 마음이 아직 내게 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괜찮다.

 

느려도 한 발 한 발 내게 오시겠다고 하셨으니,

그 걸음이 아무리 느려도 기다릴 수 있다.

오시기만 한다면, 내게 와주시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지금처럼, 자신의 남자를 대하듯이, 이토록 자신을 내맡기며, 내 품에 안겨계시니까......

그것으로 충분하다.

당신이라는 꿈을 내게 주셔서, 당신을 꿈꿀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

그것이 자꾸만 울컥 대게 하고, 이렇게 당신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가 않아서 자꾸만 확인하고 싶다.

그래서 그녀를 놓아줄 수가 없다.

 

그의 가슴에 안겨 있는 재신의 귀에 미친 듯이 뛰는 그의 심장소리가 들린다.

 

 

 

 

“공주님, 사실은 네 번쨉니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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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고 글에 댓글 달아주신 걸 보고 깜놀을 했습니다.

다들 엄청나게 기다리셨나보다 했습니다.

 

어쩝니까....

그토록 기다려주셨는데, 이 꼬라지라서 죄송합니다.

 

이건 뭐 오그리토그리입니다.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제대로 쓰기도 어렵고....

오그리토그리에 분량만 많습니다. 36장에서 스톱했습니다만, 별 내용도 없습니다.

그저 오글오글......

 

사실 이 글을 쓰다가, 다시 일하다가 계속 반복을 했다지요.

내일 할 일을 앞두고 제가 이 글을 마무리하겠다고 했던 것은, 그래도 거의 다 되었다 생각해서였는데

그리고 사실 이번 주 내내 정신 없이 바쁜 관계로

그나마 오늘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그러나 그것은 제 불찰이었습니다.

생각보다 일이 많아서, 집에 가지고 와서도 몇 시간이고 일만 해댔다지요.

일하면서 중간 중간 머리를 식히려 글을 쓰는데, 이건 뭐, 글 쓰다가 머리 식히려 일하는 꼴이니......

어쨌든 오늘이 아니면, 다시 일주일이 밀릴 듯하여, 제 자신에게 의무감이라는 바위를 얹어 주려 이렇게 예고를 올리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내가 미쳤지...하면서요.

생각보다 19회 쓰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네, 인정합니다. 저 알콩달콩 못 씁니다.

쓰면서도 이래도 되는 거야? 막 그러고 있습니다.

얘들 너무 붙어 있는 거 아니야 싶고, 막 떨어뜨려놓고 싶고,

은시경이 괴로워해야 되는데 싶고, 그렇습니다.

당.기.못의 분위기와 안 맞는 듯해서 다들 어색하지 않으실까 합니다.

 

그래도, 첫 날이니까, 계약이든 한달이든 어쨌든, 그들로서는 첫 날이니까

이렇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불안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곁에 있고, 한 달 만나자고 말한 상황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으니까요.

적어도 한 달 동안은 공주님이 내 여자가 된 것이니, 소유욕을 보여도, 내 여자라고 말해도, 그리고 내 여자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 거니까,

은시경의 마음은 뻥~터져 버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근데요. 생각해보니, 은시경과 공주님은 첫날이라지만,

이미 손도 잡았고, 안기도 많이 해봤고, 키스도 많이 해봤고....

뭐 그렇더라구요.

차근 차근 진도나갈 게 없더라구요.

이미 다 한 것들인데(이미 진도 나간 것들인데) 뭐 그리 머뭇될 것인가...싶더라구요.

 

워낙에 손발이 오글거려서 야밤에 쓴 커피를 내려 먹고 다시 앉아서는,

그래 니 마음대로 해봐라....

하면서 은시경에게 자유를 주었더니,

은시경이 이렇게 가더라구요.

은시경이 원하는 대로 해 주었습니다.

워낙 당기못에서 애를 먹었으니, 이 정도는 시경이가 원하는 대로 해줘도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2)

진도에 대해서.....

어, 은시경 선수야? 하실 수도 있지만, 전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연애해 보신 분들은 많이 아시겠지만, 선수들이(혹은 많이 사겨본 남자들이) 훨씬 더 진도가 느립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고, 조절도 할 줄 알고, 자신을 컨트롤하면서 밀당도 하는 거지요.

그런데 처음인 남자일수록 저돌적입니다.

자기 스스로 컨트롤이 안 되니, 이런 감정도 반응도 처음이니, 자신의 욕망이 불쑥 솟아나오고 만다는 거지요.

그래서 처음인 남자일수록 빠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 물론 어린 남자는 제외입니다.

어렸을 때 만난 남자는 진짜 쑥맥이라(건축학개론에 승맹이처럼)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승맹이도, 도둑키스까지 하더라능....음....

여튼..나이 든, 참을 만큼 참은? 게다가 2년 넘게 키워온 자신의 사랑이 이제 허락된 것이라면,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도 컨트롤할 수 없을 겁니다.

물론 개인차는 있겠으나, 순진한 남자일수록 진도가 빠르다는 것은, 아마 경험?해 보신 분들은 아시지 않으실까 합니다.

 

 

3)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19회는 은시경의, 은시경에 의한, 은시경을 위한 회였습니다.

그동안 이상한 아줌마 만나서 고생많았다고,

어깨 토닥토닥해준 회였달까요?

어쨌든 그래도 그간의 마음 고생에 대한 한풀이 회였다고나 할까요?

여튼 그랬습니다.

그러니 오그리 토그리, 손발이 오글오글거려도 용서해 주시길......

그리고 BGM은 제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두 곡. 그런데 정말로 그야말로 19회 은시경 테마라지요.

 

4)

늘 읽어주시고, 기다려주시고, 댓글로 힘주셔서 감사합니다.

친구신청해 달라는 무례한 부탁에도 흔쾌히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록 제가 일폭탄 때문에 빨리 빨리 댓글은 못 달고 있지만요.

그래도 한 번 이상은 말씀을 모두와 나눠본 듯합니다.

이제 제 블록 친구가 303분이 되었네요.

수많은 분들이 여전히 제 블록을 방문해주시고 계셔서 감사하고, 별 볼 일 없는 블록에 친구까지 맺어달라고 해서 송구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

느려도 끝까지 쓰겠습니다. (__)

 

+5)

음......사족을 하나 더 붙여봅니다.(아마 못 보실 수도 있지만, 붙여보는 쎈~쑤!)

마지막에 대해서 여러가지 의견이 분분하여....

여기서 퀴~즈!

(1) 오늘(넹...둘이 오늘 1일입니다) 이 둘은 몇 번 키스를 했을까요?

(2) 그리고 마지막 시경의 말은 무슨 뜻일까요?(공주님의 말씀을 되새겨 보세요. 포인트는 오늘! 입니다.)

    -> 약간의 힌트는.......사진입니다. ㅎㅎㅎㅎㅎ

 

열화와 같은 성원, 감사합니다.

제가 얼마나 늦게 왔는지, 당기못에서 제가 얼마나 은시경을 괴롭혔는지 뼈저리게 느낀 하루였습니다. (__)

 

 

더보기

공주님은 오늘 첫 날인데 키스를 3번이나 했다며 타박을 하시죠.

사실 오늘 공주님과 은시경의 키스는 

제주도 바닷가에서 키스를 나눈 것이 1번째,

공주님이 주무시는 동안 은시경의 도둑키스 한 것이 2번째,

그리고 지금 후원 벤치에서 3번째였습니다.

 

그렇다면, 공주님이 3번이라고 한 것은, 시경이 자신이 자는 동안 키스한 걸 알고 있다는 거지요. ㅎㅎㅎㅎ

그래서 3번이라고 한 건데,

후원에서 키스 후, 은시경이 공주님을 안고 있다가 4번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3번이나, 4번이나 라는 거죠.

게다가 공주님이 더 참지 말라고, 자기가 그 2년을 보상해 주겠다고까지 하시니,

키스하고 싶은 걸 꾹꾹 참지 않아도 되는 거지요.

그래서 카운트를 4번으로 다시 정정해주시고, 바로 키스.

그것이 바로 "응?"이라고 대답하신 후, 아무 대사가 진행될 수 없었던 이유랄까요.

그래서 바로 다시 입술을 맞춰주시고, 빨아당겨주시는 은시경 근위대장님을, 그리고 그 모든 걸 열심히 받아주시는 공주님을

사진 하나로 다 표현했습니다.

글이 없더라도, 그 다음 장면은 바로 이 두 사람의 키스가 이어지는 것이니,

그저 사진으로 감상하시라 올려두었답니다.

 

 

그런데 의외로 다르게 해석하시는 분들이 많으셔서.....

이렇게 사족까지 다시 달게 되네요.

글 접기로 올려두니 못 보시는 분들도 있겠지만...ㅎㅎㅎㅎ

 

어쨌든 공주님은 내일 입 퉁퉁 부어서 어쩔.....

은시경은 참아서 3번이었는데, 참지 말라 하시니, 이제 공주님 입술은 지꺼라며 물고 빨텐데...

점점 춥고 건조해지는 이 가을에 공주님 입술 지못미 ㅠㅠㅠㅠㅠㅠㅠㅠ

이렇게 많이 빨리고? 나면, 아마 공주님 입술 진짜 힘들 텐데요.

나중에 보다 못한, 궁중실장님이 넌지시 로즈버드 살브 스트로베리 립밤을 건네셨는데,

놀라운 건, 은시경 근위대장님께 스트로베리 향이 나더라능.....ㅎㅎㅎㅎ

그리하여 또 궁중실장님은 공주님 얼굴도, 은시경 근위대장님 얼굴도 한동안 못 쳐다보더라는 슬픈 전설이....

 

 

여튼....ㅎㅎㅎㅎ 20회 달려다 여기다가 달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