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킹투하츠와 은신상플/(은신)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은신상플)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21

그랑블루08 2013. 1. 22. 06:23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21

 

 

 

 

 

<silver님께서 주신 당기못 대문짤_감솨감솨해요.^^>

 

<디씨 그러하다 횽이 주신 당기못 대문 짤....감솨감솨합니다.^^>

 

 

 

 

<*배경음악을 틀고 봐주세요.^^>

1. 성시경 - 내게 오는 길

2. 박정현 - 세상 그 누구보다

3. 브라운 아이드 소울 - 그런 사람이기를

 

 

<1. 성시경 - 내게 오는 길>

 

지금 곁에서 딴 생각에 잠겨 걷고 있는 그대

설레는 마음에 몰래 그대 모습 바라보면서 내안에 담아요

사랑이겠죠 또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 없죠

함께 걷는 이 길 다시 추억으로 끝나지 않게

꼭 오늘처럼 지켜갈께요

 

사랑한다는 그말

아껴둘껄 그랬죠

이제 어떻게 내맘 표현해야 하나

모든것이 변해가도 이맘으로 그댈 사랑할께요

 

망설였나요

날 받아주기가 아직 힘든가요

그댈 떠난 사랑 그만 잊으려고 애쓰진마요

나 그때까지 기다릴테니

 

사랑한다는 그말

아껴둘껄 그랬죠

이제 어떻게 내맘 표현해야 하나

모든것이 변해가도 이 맘으로 그댈 사랑할께요

 

눈물이 또 남아있다면 모두 흘려버려요

이 좋은 하늘아래 우리만 남도록

 

사랑할 수 있나요

내가 다가간만큼

이젠 내게 와줘요

내게 기댄마음

사랑이 아니라 해도 괜찮아요 그댈 볼수 있으니

괜찮아요 내가 사랑할테니

 

 

<2. 박정현 - 세상 그 누구보다>

 

세상 그 누구보다 박정현 | 스파이 명월 Part.2 (KBS 월화드라마) 허락도 없이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 사람은 이런 날 모르죠 너무 모르죠 바보

 

세상 그 누구보다 널 사랑해 가슴을 파고드는 그 말

나의 눈동자에 맺혀있는 눈물이 나의 사랑이야 이 눈물은 너야

 

허락 없이 시작한 이 사랑을 난 사랑해요

더 아파도 계속 할래 난 끝까지 할래 끝이 없어도

 

심장이 뛰면 사랑도 같이 뜁니다

그 사람을 못 보는 지금도 사랑은 뛰죠 계속

 

세상 그 누구보다 널 사랑해 그대는 아직 모르네요

나의 입술위로 흘러내린 눈물은 너무 뜨거운데 이 눈물이 난데

 

그대만을 담아둔 내 가슴이 터져버려도

난 끝까지 계속 할래 난 그래도 할래 끝이 없어도 널 사랑 합니다

 

발 등위로 떨어진 눈물이 다시 나를 다시 울리고 있어요

그게 사랑이란 걸 알고 있지만

 

세상 그 누구보다 널 사랑해 가슴을 파고드는 그 말

나의 눈동자에 맺혀있는 눈물이 나의 사랑이야 이 눈물은 너야

 

허락 없이 시작한 이 사랑을 난 사랑해요

더 아파도 계속 할래 난 그래도 할래 끝이 없어도

 

 

 

 

<3. 브라운 아이드 소울 - 그런 사람이기를>

 

그런 사람이 너이기를 다시 없을 나의 사랑 이기를

멀리 그대가 보일때쯤 마음은 몇번이나 기도했었지

 

지나간 날 그 안에서 헤매이던 날 안아주었던 손 잡아주었던

너의 고마운 그 마음 이제는 놓치지 않을수 있게

내가 너의 손을 꼭 잡을테니

 

항상 감사할거야 우리의 날들을

함께 걷는 지금 이거리 풍경까지도

세월 지나 언젠가 이 길을 다시 지날 때

너의 손을 잡은 사람 내가 될수있기를

 

그대 힘이 들 때 언제든 기대어 쉴수 있는곳 나이기를

 

지나간 날 그 안에서 헤매이던 날 안아주었던 손 잡아주었던

너의 고마운 그 마음 이제는 놓치지 않을수 있게

내가 너의 손을 꼭 잡을테니

 

항상 감사할거야 우리의 날들을

함께 걷는 지금 이 거리 풍경까지도

세월 지나 언젠가 이 길을 다시 지날 때

너의 손을 잡은 사람 내가 될수 있기를

 

오래도록 니곁에 아름다운 니 곁에 늘 내가 있기를

 

세월 지나 언젠가 이 길을 다시 지날때

너의 손을 잡은 사람 꼭 잡은 사람 지켜줄 사람

내가 될수 있기를

 

 

 

 

 

1

 

 

 

 

 

아침부터 재하의 집무실은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했다.

 

“전하, 은시경입니다.”

 

“어, 왔냐?”

 

아침부터 은시경을 찾던 재하는, 근위대 조례조차 접게 하고 불러들였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뭐긴 뭐야? 늘 그렇지. 상황이 늘 꼬여.”

 

재하가 말을 더 이을 수 있도록, 시경은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다.

그러나 머릿속으로는 며칠 전부터 불거진 여러 가지 사건들을 떠올려보고 있었다.

전하께서 이렇게 아침부터 머리 아파하시며 답답해하시는 걸 보면, 단순한 문제인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각....에서, 무슨 문제라도........”

 

“그렇지. 뭐가 웃기게 말이야. 지들은 지들이 애국자라고 말하고들 있지만,

웃기는 건, 그 놈들 조상들은 다 친일파더라는 거지.

웃기지 않냐? 이 놈의 나라?

어떻게 나라 팔아먹은 놈들은 계속 잘 돼.

전부다 ‘꺼삐딴 리’야. 그런 것들이 꼭 잘 먹고 잘 살지.”

 

“일본에서 이번에 우익이 장악한 것 때문에 그러십니까?”

 

“......후우.....그래. 골치가 아프다.”

 

“.......................”

 

“은시경!”

 

“예. 전하.”

 

“너, 그냥, 내 밑으로 와라.”

 

“예?”

 

“비서실장이 공석이니까, 정말 미추어버리겠다.

뭔가 믿을 놈이 받쳐줘야지, 이건 뭐, 손발도 안 맞지, 아직 일도 서툴지, 내가 뒤치다꺼리 하고 있다고!”

 

“전하, 전 군인입니다.”

 

“그래서?”

 

“저는, 전하를 곁에서 지키겠습니다.”

 

“야!!! 지키는 것도 다양한 거야.”

 

“전하..........”

 

“어휴.....내가 이 목석같은 놈을 두고 무슨 소리를 하겠냐.”

 

“수상 쪽에서 무슨 요구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렇지, 늘. 지들이 일 저지르고, 왕실이 뒤치다꺼리 하라는 거지.

나 참, 왕실이, 지들 똥 닦아주는 데야?

열 받아서 진짜!!!”

 

아무래도 내각 쪽에서 이번 사태를 뭔가 풀어보라고 왕실에 요구한 것 같았다.

왕실은 늘, 최전선에 서 있었다.

수면 아래, 검은 속내들 가운데, 늘 그 최전방에 서서 그들의 말도 안 되는 요구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재하는 이 성질에 안 맞는 일들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싫은 건 싫다, 미쳤냐 이렇게 쏘아줘야 하는 제 성미를 죽여 가며 살려니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그 왜 있잖아. 또라이 3인방. 새 총리랑 옛날 동.경. 지사, 그리고 그 진짜 개또라이 오.사.카. 출신 말이야.

그 놈들 완전히 미쳤더만.

한 놈은 기미 가요를 부르질 않나, 그 시절로 돌아가야 된다고 하질 않나, 한 놈은 위안부, 강제 연행 증거가 없었다고 헛소리를 지껄이질 않나.

근데 그놈들 하고 잘 얘기를 해 보란다. 내 참, 어이가 없어서.”

 

시경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북한과 군사 협정을 제대로 해나가려면, 결국 주변국에 대해 신경 쓸 수밖에 없다.

통일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주변국들의 승인을 얻어야지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안티를 내걸고 있는 일본을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게다가 중국과 미국 두 나라가 G2가 되는 걸 극구 반대하고 있는, 아니 두려워하고 있는 일본 입장에서는

극우만이 살 길이었을 것이다.

군국주의를 외치는 인물들이 강력한 파워를 지니게 된 요즘 일본은 혐한이 장난 아니게 퍼져가고 있었다.

그들에게 북한은 테러국에 다름 아니니, 통일은 무슨, 아예 군사 협력조차 길길이 반대하고 있었다.

 

“미친 놈들! 관계 개선은 개뿔!

가서 독도는 우리 땅이다, 외치고 올 판인데,

수상 나부랭이들은 좀 잘 구슬리란다.

아, 진짜 열 받아서! 내가 내 명대로 살 수가 없다. 정말!”

 

“그래도......결국 통일까지 생각하시려면, 관계 개선은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누가 몰라? 그러니까 더 열 받지.

여튼 그 놈들 만나면, 어떻게든 아작을 낸다, 내가.”

 

“전하........”

 

“아주 교묘하게 말이야. 그 놈들 아예 정신 못 차리게 쑤셔줘야 한다고.

그러려면, 은시경, 니가 필요하다고!!!”

 

“저 아니라도 능력 있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어휴~~ 됐다. 말을 말자. 어쨌든 난 내 의사 전달했으니까, 그런 줄 알고 있어!”

 

“전하!!!”

 

“시끄럽고, 나가. 열 받아서 흥분했더니, 머리 아파.

항아한테 안마라도 해달라고 해야지.”

 

정말 머리가 아픈 듯, 재하가 관자놀이를 붙잡고 있자, 시경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섰다.

그때 재하가 시경을 다시 불러 세웠다.

 

“야, 은시경. 나 오늘 오후에는 계속 회의다.

그러니까 들어올 필요 없어.”

 

“예? 그래도 근위대장이 호위를 해야......”

 

“호위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야, 어차피 궁에서 내각 수뇌부하고만 회의하는데, 니가 왜 필요해?

넌, 니 할 일이나 해.

곧 바빠질 테니, 지금 시간 주는 걸 고마워해라.

내 나름의 배려니까, 그런 줄 알아.

마음의 준비나 하고 있어!”

 

“전하,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전, 군인입니다.”

 

“아, 또 그 얘기냐? 안다고, 알았다고!!! 일단 지금은 나가!!!!”

 

 

 

 

2

 

 

 

 

어쩔 수 없이 인사를 하고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시경은, 마음 한 구석이 무겁다.

비서실장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께서 하실 때도, 그냥 그런가 보다 생각했었지, 자신이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자리가 아니다.

자신은 군인이다.

사실 근위대장의 자리도 임시라고는 하지만, 버거웠다.

다시 근위중대장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래도 전하께서 믿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시니, 그 말씀에 순종한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비서실장은..........

 

머리가 찌끈찌끈거린다.

 

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네.”

 

들어온 사람은 궁중실장이었다.

 

“아, 궁중실장님,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제주도에서 올라와서부터 궁중실장님께서 뭔가 시경을 불편해하고 있었다.

시경 역시 그걸 느끼고 있었다.

지금도 시경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약간 비켜서서 이야기를 건넸다.

 

“근위대장님, 공주님께서 메모를 전해주라고 하셔서.......”

 

“예? 이걸 왜 궁중실장님께서 직접?

궁인이나 근위대원을 시키셔도 될 텐데요.”

 

“저, 아무래도.......공주님께서 조용히 전달하시고 싶어하셔서요.”

 

“아, 예.”

 

편지 봉투를 받고 나서도, 궁중실장님은 계속 나가지 않고 서 있었다.

 

“보시고, 확답을 제게 바로 전해주시면 됩니다.”

 

“예? 예. 알겠습니다.”

 

공주님의 메모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오늘 같이 성당에 갈 수 있는지, 또 다른 하나는, 저녁에 친구를 만나는데 같이 갈 수 있는지 여부였다.

 

“두 가지 다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전화로 하셔도 되실 텐데..... 왜 이걸 굳이 궁중실장님께 부탁드렸는지.....”

 

“아까 근위대장님께 연락을 드렸는데, 전하를 뵙고 계신다고 해서요.

또 공주님은 몇 시간 동안 재활 치료를 받으시니 계속 연락이 안 되실 듯해서 그러신 듯합니다.

아무래도 근위대장님 일정이 어떻게 되실지 모르니, 여러 경우에 수를 생각하셔서 제게 부탁하셨습니다.

안 되시면, 또 상대방 쪽과도 약속을 다시 정하셔야 하는데, 상황을 알 수 없어서 그쪽 분들이 미리 나와 계셔도 곤란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제게 상황을 알려주시면, 제가 병원으로 가서 말씀드리면 됩니다.”

 

“아, 아닙니다. 오늘 제 일정이 모두 취소가 되어서, 오늘은 제가 공주님 수행을 해도 될 듯하니, 그쪽으로 제가 바로 가겠습니다.”

 

“그러시겠어요? 그러면 그렇게 알고 가겠습니다. 그럼......”

 

 

궁중실장은 시경을 역시나 똑바로 보지 못한 채, 약간 비스듬하게 시선을 내리더니,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시경은 얼떨떨하게 서 있는데 갑자기 궁중실장이 돌연 시경의 앞으로 걸어왔다.

 

“저, 근위대장님.”

 

“예?”

 

“이거.”

 

시경이 뭔가 싶어보니 거기에는 스트로베리라고 적힌 동그랗고 작은 연고통 같은 것이 책상에 올려져 있었다.

 

“이게 뭡니까?”

 

“공주님께서도 쓰시는 건데 근위대장님도...”

 

궁중실장은 뭔가 부끄러운 듯 얼버무리더니 급히 나가버렸다.

 

“공주님?”

 

시경이 자세히 살펴보니 입술 보호제인 듯 싶었다.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자, 공주님 입술에서 맡았던 달콤한 향기가 났다.

 

“이걸 왜 내게?”

 

갑자기 사경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혹시 어젯밤..............

 

 

혹시.

아시는 건가.

 

아무도 없는 차 안에서 둘만 앉아 있었던 그 시간.....

자신을 향해 웃어주던 공주님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또다시 퓨즈가 끊어져 버렸다.

마치 자신의 여자인 양, 갖고 싶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그 순간이 떠올라서, 또다시 시경의 가슴은 또다시 설레고 만다.

 

 

 

 

궁중실장은 근위대장 집무실을 나오자 크게 한숨이 나왔다.

도대체 자신이 지금 뭐하고 있나 싶기도 했다.

잘하는 짓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왕실의 보안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싶었다.

 

어제도 얼마나 아찔했던가.

 

공주님과 근위대장이 저녁이 늦어서야 궁으로 돌아오셨다.

궁에 들어오셨다는 보고를 받고 혹시나 싶어 궁중실장은 수행들을 물리고 혼자서 주차장 쪽으로 나갔다.

도착하셨다는 보고를 받은 지 한참 지난 것 같은데 어디에도 안 보이셨다.

이상하다 싶어 주차장에 세워진 차들을 살펴보던 찰나, 궁중실장은 아연실색을 하고 말았다.

근위대장의 차 안에서 두 남녀가 서로를 붙든 채 진하게 키스를 하고 있었다.

공주님은 운전석 옆에 앉으신 채로 근위대장의 품에 안겨서 서로의 입술이 떨어질 줄 몰랐다.

저러다 공주님 숨 막혀 죽으시면 어쩌나 걱정이 될 정도였다.

게다가 아무리 기다려도 끝이 날 기미도 안 보이니 이러다 들키는 건 시간 문제였다.

 

궁중실장은 굳은 결심을 한 채 전화기를 들었다.

 

“예, 궁중실장님.”

 

한 치에 흐트러짐도 없는 금위대장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들려왔다.

 

“도착하셨어요?

방금 주차장에 왔는데 안 계셔서....”

 

“아, 예. 주차했습니다. 바로 공주님 모시고 나가겠습니다.”

 

그렇게 전화를 끊더니 근위대장은 차에서 내려 공주님을 휠체어에 태웠다.

궁중실장도 그제야 본 듯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는 있었지만 어둠 속에서도 두 사람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궁중실장은 속으로 이를 어쩌나 다 들키겠네 싶어 노심초사하고 있을 뿐이었다.

 

공주님의 휠체어 뒤로 향하다가 궁중실장은 낯익은 향기에 기함을 하고 말았다.

자신의 옆을 스치는 근위대장의 입술에서 공주님의 향기가 나고 있었다.

오늘 아침 자신이 드렸던 그 립밤의 향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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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꾸 입술이 건조해지는 것 같아요.”

 

공주님이 갑자기 얼굴이며, 입술에 신경을 쓰신다 싶을 찰나, 아니나 다를까 입술이 건조해졌다며, 계속 거울로 비추어보고 계셨다.

 

“혹시, 괜찮은 립밤, 뭐 없어요? 내 건 다 떨어졌어요.

추워서 그런가, 자꾸 건조해지는 거 같애.”

 

궁중실장은 안 그래도 드릴까 말까 고민하던 립밤 하나를 공주님께 내밀었다.

 

“와? 이거 내가 좋아하는 건데. 이거 새 거네요?

궁중실장님 쓸 거 아니에요?”

 

“아닙니다. 공주님. 사실 공주님 립밤이 다 되신 듯해서, 드리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와, 고마워요. 참, 저번까지는 오리지널만 썼는데, 스트로베리는 그러고보니 처음이야.

이것도 향, 좋은데요?”

 

궁중실장은 공주님 몰래 한숨을 쉰다.

그 일을 목격한 이후, 아무래도 공주님 입술이 혹사를 당할 듯 싶어 준비한 것이었다.

오리지널을 좋아하시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오리지널은 아무래도 번들거릴 수 있어서 혹시나 상대분 입술에도 묻는다면, 그것도 낭패다 싶었다.

왕실의 비밀을 지키는 것이, 궁중실장의 의무였다.

그러다보니 이런 것 하나까지도 신경이 쓰였다.

결국 공주님께서 좋아하시는 브랜드 중에서 조금 매트한, 그러나 향이 좋은 스트로베리를 선물해 드린 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공주님께서는 좋아하시면서 바르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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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궁중실장은 향에 대해서 생각지 못했다.

같은 향이 근위대장의 입술에서도 퍼져가고 있었다.

 

하나를, 더 사다드려야 되는 건가.....

 

이러다가 궁에 있는 모든 궁인들이 알게 되지 않을까 두려움이 엄습하고 있었다.

그러나 궁중실장은 몰랐다.

자신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거의 개코에 가깝다는 것을........

결국 스트로베리 향 립밤을 하나 더 구입해서 바로 다음 날 근위대장에게 선물하는 것으로 이 일은 일단락 지었다.

 

 

 

 

3

 

 

 

 

병원을 찾은 은시경은 공주님께서 재활하고 계신다는 재활훈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공주님은 특별히 따로 재활 훈련을 하고 계셨다.

아무래도 일반인들에게 재활하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이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나중에 사진이라도 찍힌다면, 그 역시 곤욕스러운 일이 될지도 몰랐다.

병원 안, 특별히 따로 마련된 재활실 안에서 공주님께서는 치료를 받고 계셨다.

 

재활실 밖에 서 있던 근위대원들은 은시경을 보자 바로 경례를 붙였다.

염동하 대위와 함께 전하의 명으로 외부 근무를 서고 있는 김동욱 대위를 대신해서 다른 근위대원들이 서 있었다.

 

“공주님은?”

 

“안에 계십니다.”

 

“하신 지 얼마나 되셨나?”

 

“지금 이미 한 시간 삼십 분을 넘기셨습니다.”

 

“뭐? 그렇게 오래?”

 

“예.”

 

시경은 한 시간 반이나 넘었다는 말에 얼굴을 심하게 찌푸렸다.

이런 재활을 지금 매일 하시겠다니, 몸이 건강한 사람도 힘든 일이다.

게다가 시경 자신이 재활을 해본 사람이다.

그러니 그 강도와 어려움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지금, 안에는 누가 있나?”

 

“공주님과 담당 의사만 있습니다.”

 

“그래?”

 

시경은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네” 하는 맑은 목소리가 들린다.

 

“공주님, 은시경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네? 은시경 씨? 아, 잠깐.....”

 

공주님께서 뭔가 당황하신 듯하셨지만, 시경은 바로 문을 열었다.

 

문을 연, 시경은 지금 눈 앞에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서 믿기지가 않았다.

공주님이 흰 가운을 입은 남자의 품에 꽉 안겨 계셨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화가 난 은시경의 목소리가 재활실 안에 크게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의 울림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은시경은 공주님의 허리를 잡고 자신의 품으로 안아왔다.

 

“공주님, 이 분은 누구신지.......”

 

자신의 품에 안기신 공주님을 빼앗듯이 데려가 버리는 은시경을 황당하다는 듯이 보던 의사가 공주님께 묻고 있었다.

 

“저......왕실 근위대장님이세요.”

 

재신은 난처하다는 듯이 대답을 건넸다.

 

“은시경 씨, 이 분은 김인훈 선생님이라고, 내 주치의세요.”

 

화가 나 있는 은시경을 납득시키려는 듯, 공주님은 의사라며 소개를 하지만, 찌푸려진 은시경의 미간은 펴질 줄 몰랐다.

 

“의사라 하더라도, 지금 공주님께 굉장히 무례하게 행동하신 겁니다.”

 

“아니, 은시경 씨, 지금 훈련하다가 내가 넘어지려하니까 잡아주신 거예요.

이상한 상황, 절~~대 아니라구요.”

 

재신은 화를 내고 있는 이 남자를 달래보려고 하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시경은 화가 난 듯, 의사를 계속 노려보고만 있었다.

 

“오해하시지 마세요. 요즘 공주님께서 보행 연습을 하고 계시거든요.

봉 없이, 사람의 손을 잡고 걷는 연습을 하시는 중입니다.

옆에서 부축해 주는 사람의 손을 잡고, 단상이나, 연회장에 나가실 수도 있으니, 이런 연습을 해 두시면,

아무래도 공개적인 석상에서 훨씬 나아진 모습을 보이실 수도 있으니까요.”

 

의사는 어떻게든 이 상황에 대해서 변명해 보려, 무섭게 노려보는 근위대장을 향해서 상황을 설명했다.

 

“그래서, 이렇게 함부로 공주님 보체에 접촉하신 겁니까?”

 

그러나 그 어떤 노력도 시경에게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 의사는 정말 너무나 새파랗게 젊었다.

그리고 이렇게 문을 닫아놓고, 외부에서는 안의 상황을 전혀 알 수 없는 이런 공간에서 공주님과 단 둘이, 훈련을 하고 있다는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밖에서 볼 수 있게 유리라도 되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이런 식으로 계속 공주님께서 연습해 오신 건지, 게다가 이 앞에서 공주님을 바라보는 이 의사라는 남자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공주님께 눈웃음을 치는 듯한 그 눈빛도,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선생님,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재신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만하자고 의사를 향해서 말할 수밖에 없었다.

더 있다가는 시경이 어떻게 나올지 불안하기만 했다.

정말, 이 남자, 이렇게 저돌적이었나 싶어서, 깜짝 깜짝 놀라고만 있다.

 

“예? 그러시겠어요?”

 

“네. 내일 같은 시간에 뵐게요.”

 

지금 나가달라는 듯한 재신의 말을 알아듣고, 의사도 인사를 하고는 급히 재활실을 빠져나갔다.

더 있다가는 근위대장이 총이라도 뽑아들 것만 같아서 약간은 오금이 저리고 있는 중이었다.

정말 근위대는 장난이 아니다 싶은, 그런 마음이 들고 있었다.

 

“은시경 씨.”

 

“예, 공주님.”

 

남자가 나가자, 시경의 목소리도 조금은 누그러진 듯했다.

정말 이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하나 싶다.

이건 지금 질투를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충성심에서 이러는 건지......

재신도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허리를 잡고 있는 손에는 변함없이 힘이 들어가 있었다.

참, 어이가 없어서, 자기는 이렇게 내 허리를 꽉 잡고 안고 있으면서, 남은 안 된다는 거야?

원래 이래?

이 남자 알고 보면, 소유욕 쩌는 거 아니야?

아 생각해 보니, 이 남자가 대놓고 얘기했다 싶다.

자신은 소유욕도, 집착도 심하다고......

절로 한숨이 나온다.

 

“나 좀, 피곤한데, 저기까지 같이 좀 걸어가요.”

 

재신은 의자가 있는 곳으로 눈짓하자, 시경은 재신을 바로 안아서 들어버린다.

 

“아니, 은시경 씨!!! 걸어가겠다구요. 나, 지금 재활 중인 거 안 보여요?”

 

재신이 버럭 하자, 그제야 멋쩍은 듯, 재신을 내려놓고, 손을 내밀었다.

재신은 아무 말 없이 시경의 손을 잡고, 천천히 한 걸음 씩 떼었다.

다섯 걸음 정도를 걷자 의자에 당도할 수 있었다.

재신은 한숨을 쉬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옆 의자를 손으로 탁탁 친다.

 

“은시경 씨도, 앉아요.”

 

“전, 괜찮습니다.”

 

“아, 진짜. 내가 목이 아파 그래요. 좀 앉아 봐요.”

 

“예.”

 

재신은 의자 옆에 놓아둔 물을 벌컥 벌컥 마셔댄다.

마치 화를 삭이려는 듯 보여서, 시경은 조금 긴장이 된다.

 

“도대체, 왜 그랬어요?”

 

“예? 뭐가 말씀이십니까?”

 

“의사 선생님께, 도대체 왜 그런 거예요?”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지........”

 

재신은 말을 말자 싶었다.

도대체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이 단호한 군인 남자에 대해서 자신이 뭐라고 더 말해 본 들 싶었다.

 

“아까 재활 훈련 중이었어요.”

 

“예.”

 

“지금, 단상이나 이런 데 올라갈 때, 목발 없이 걸어가는 훈련하고 있다구요.

저번까지는 팔짱을 껴야 겨우 됐지만, 이젠 손을 잡고서도 열 걸음 정도는 갈 수 있어요.”

 

그 말에 시경은 대단하다는 듯, 눈을 빛낸다.

 

“정말 대단하세요. 공주님.”

 

“아니, 내가 그런 얘기 듣자는 게 아니구요.

은시경 씨, 내 말은, 아까 그 상황, 그렇게 이상한 상황 아니라구요.

몇 걸음 그렇게 같이 연습하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서 비틀대니까 선생님이 나를 잡아주신 거예요.

그런데 은시경 씨가 그렇게 화를 내니까, 뭔가 이상해졌잖아요.”

 

“잡은 건, 아니었습니다.”

 

“뭐라구요?”

 

“그 남자가, 공주님을....하아..... 안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건 붙잡다가.......”

 

“계속 그렇게 그 남자와 단. 둘.이.서 연습하셨습니까?”

 

“네? 그..그건 아니에요.

원래는 여자 선생님도 계시는데, 가끔 체크하시러 주치의 선생님께서 오시거든요.

아, 근데...이게 아니잖아요.”

 

재신은 이 상황이 뭔가 싶었다.

자신이 분명 은시경을 다그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상황은 역전되어 있었다.

도리어 은시경이 재신을 다그치고, 재신이 이에 대해서 쩔쩔매며 변명을 해대는 형국이었다.

 

“앞으로는......안 됩니다.”

 

“네? 뭐가요?”

 

“의사라 하더라도, 남자와 단 둘이서만 훈련하시는 건, 절.대.로 안 됩니다.”

 

“은시경 씨!!”

 

“근위대원이 안에 들어와 있거나, 아니면 여자 선생님과 하세요.”

 

“아니, 어떻게 그렇게 해요?”

 

“제가......하겠습니다.”

 

“뭘요?”

 

“그게 안 되시면, 제가 들어오겠습니다.”

 

“풋~ 어떻게 은시경 씨가 들어와요?

오빠는 어쩌고? 은시경 씨, 근위대장이에요. 대한민국 전하를 모시는.....

그런데 어떻게 맨날 나 훈련할 때 들어오겠다는 거예요?”

 

“아, 저....그건......전하께 일단 말씀 드려보고, 허락을 받으면.....”

 

“어휴~ 알았어요. 알았어.

단 둘이 안 하면 되는 거죠?”

 

“예.”

 

시경은 재신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을 한다.

 

재신은 이 남자가 정말 어이가 없었다.

자신의 눈치를 보며, 이렇게 살뜰히 챙기는 듯하면서도, 안 된다고 할 때는 정말로 단호했다. 군인 아니라고 할까봐, 저러는 건지.....

그 살벌함은, 정말 옆에 있는 사람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정말 두 얼굴의 사나이였다.

 

재신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자, 아까 그 고집스러운 위엄있던 군인은 어디로 갔는지 또다시 재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나, 더 해야 돼요. 그럼 은시경 씨가 도와줄래요?”

 

“예.”

 

재신은 시경의 손을 잡고 몇 번이나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수십 번도 더 넘어지셨지만, 좀체 고집을 꺾지 않으셨다.

시경이 몇 번이나 붙잡아 드리지 않았다면, 공주님의 무릎은 남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미 훈련을 시작하신 지 2시간이 넘었지만, 공주님은 계속 훈련을 고집하셨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힘을 다해 하시는 건지.....

물론 재활은 중요하다.

그러나 재활이라는 것이 이렇게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재활은 체력 싸움이다.

체력이 되어야 훈련도 가능한 건데, 공주님의 허리는, 잡아본 손목은 너무나 가늘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은 몸으로 그녀는 최선을 다해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몇 걸음만 걸어도 땀이 비오듯이 쏟아졌다.

그것이 안타깝고 또 안타까웠다.

지금도 충분하신데, 이렇게 휠체어에서 일어서시게까지 되었는데, 이젠 목발로 걸어다니시기까지 하시는데,

공주님은 더더를 외치고 계셨다.

그것이 대단하다 싶으면서도, 시경의 마음 한 자락에 찬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

자신의 손에서 조금씩 멀어지는 듯한 불안감이 자꾸만 시경의 마음을 시리게 했다.

 

마지막 열 걸음을 채우며 아까 앉았던 의자로 걸어가서, 결국 공주님은 기진맥진하신 채, 앉으신다.

시경이 건네주는 물을 마시고는 눈을 감고, 힘든 숨을 가쁘게 쉬고 계셨다.

온 몸이 땀으로 완전히 젖어서, 양 볼로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살아 있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시경의 마음에 맴도는 생각은 한 가지였다.

 

예전, 사고가 나시기 전처럼, 그녀는 살아있었다.

살아서 펄떡 펄떡 숨 쉬는 물고기처럼, 그녀는 살아있었다.

그것이 대단하고, 또 그것이 불안하게 한다.

 

 

“공주님.......”

 

“응?”

 

눈을 뜨지 않은 채로 재신이 대답을 한다.

 

“왜 이렇게 열심히, 하시는 겁니까?”

 

“뭐를요? 재활?”

 

“예.”

 

재신이 그제야 눈을 뜨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시경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러더니 그의 팔을 잡아 당겨 그 팔을 의지해서 시경의 앞에 바로 선다.

갑자기 자신의 앞에 서서 그녀가 올곧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시경이 도리어 눈빛이 흔들리고 있다.

 

“열심히 하고 싶으니까요.”

 

“예?”

 

“내가 노력하는 여하에 달려 있대요. 재활은........”

 

“그건 맞지만, 지금 너무 무리하시고 계십니다.”

 

“무리, 아니에요.”

 

“공주님........”

 

“목발을 짚으면서부터는 마음이 많이 해이해졌어요.

열심히 해도, 완전히 걷게 되지는 못하겠지, 싶었어요.

의사 선생님이나 주변에서, 열심히만 하면 걸을 수 있다고, 목발 없이 천천히 걷는 것도 가능하다고 얘기하시기도 했지만,

그 말을 믿지 못했어요.

사실 그럴 확률은 없거든요.

아니, 아직 그런 사람이 없는 것일 수도 있구요.

내가 줄기세포 수술 성공의 대한민국 1호니까.......”

 

시경도 이 마음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재활을 하는 동안, 만약 공주님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자신은 없을지도 몰랐다.

오로지 온전한 몸으로 공주님을 만나야 한다는 그 생각 하나를 붙잡고, 미친 듯이 재활을 했었다.

의사들이 미쳤다고 말할 정도로, 전하께서 오셔서 말릴 정도로, 그렇게 미친 듯이 몰아쳤다.

그 마음에 조금이라도 불가능하면 어쩌나 싶은 불안이 몰려올 때면, 새벽에도 재활훈련장에 나갔다.

다들 미친 게 아니냐고, 뇌에 이상이 생긴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시경은 자신을 몰아붙였다.

그러다 결국 새벽, 재활훈련장에서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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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은시경! 너 미쳤냐? 너 다시 골로 가고 싶어?”

 

“전하........”

 

그 말을 듣고 자신을 보러 급히 온 재하는 시경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너, 미쳤어? 너 심장 이식 그게 장난인 줄 알아?

몸이 적응을 해야 할 거 아니야?

도대체 너 왜 이래? 뭣 때문에 이러는 거야?

자연의 시간이라는 게 있어. 그렇게 막무가내로 집어넣으면 되는 줄 알아?

몸도 받아들일 시간이라는 게 필요한 거잖아.

왜 이렇게 무식하게 설치는 거야?”

 

“이러지 않으면.......불안하니까요.”

 

“뭐가? 뭐가 불안한데? 살아났잖아. 너, 겨우 살았다고 임마!!”

 

“전하, 전.....숨만 쉬는 걸로는 부족합니다.”

 

“은시경!!”

 

“지금 이 모습으로는............절대로 안 됩니다.

손도 제대로 못 움직이고, 다리도 제대로 못 움직이는 이 상태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뭐가, 안 된다는 거야?”

 

“...........이대로는........지켜드릴 수가.........없습니다.......”

 

“야, 이 자식아! 그건.........어휴........”

 

재하도 뭔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닫고 말았다. 재하도 알고 있었다.

이놈이 왜 이렇게 미련하게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고 있는 건지........알고 있었다.

오로지 재신이 때문이었다.

이놈은 자신의 몸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절대로 재신이를 보려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놈은 그래서 사생결단으로 자신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었다.

 

“이, 미련한 놈!!! 그러다 죽으면 끝이다!!!”

 

“.............이대로 머문다면, 그야말로 전, 죽은 겁니다.”

 

“야, 너 지금 무슨 소리야? 내가 너 살리려고 어떻게 했는데, 지금 그게 내 앞에서 할 소리야?”

 

“전하........돌아가지 못한다면, 전 죽습니다.”

 

“야, 은시경! 지금도 돌아갈 수 있다고......”

 

“전하, 아시지 않습니까? 이런 모습이라면, 저는........안 됩니다.

이런 모습으로는, 그분을.......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뵐 수 없다면.......저는.....저는.......하아..........죽습니다......전하.........”

 

 

이놈이 재신이의 안부를 물은 이후, 몇 개월만에 처음으로 재신이를 입에 올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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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공주님 앞에 그런 모습으로, 그렇게 나약한 모습으로 갈 수가 없었다.

만약 재활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공주님을 다시 뵐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미친 듯이 자신을 괴롭혔다.

공주님을 볼 수 없다. 공주님을 만날 수 없다.

그것만으로도 죽을 것만 같았다.

공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의 죽음이었다.

그래서 두려워질 때마다, 자신이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하는 게 아닌가 절망이 느껴질 때마다 재활훈련실로 향했다.

죽음과 같은 고통이었지만, 공주님을 못 만날지도 모른다는 그 두려움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시경은 지금 이곳에 공주님과 함께 서게 된 것이다.

지금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공주님의 아름다운 눈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면, 이제는 가능하다고 믿게 되신 겁니까?”

 

“가능한지, 어떤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요.

그리고........”

 

무언가 결심한 듯, 재신의 눈이 시경의 눈을 더욱 또렷하게 쳐다보고 있다.

시경은 재신의 눈이 자신을 향하자, 떨리는 듯 자꾸만 눈빛이 흔들린다.

 

“당당하게 일어서고 싶어졌어요, 나.”

 

“지금도 그 누구보다, 당당하십니다. 공주님.”

 

“풋~. 은시경 씨, 아닌 척하면서 진짜 닭살 멘트 많이 날리는 거 알아요?”

 

“진심....입니다.”

 

“알아요. 알아. 어엇 근데 나 너무 오래 서 있었는지, 다리가 후들후들거려요.”

 

재신이 힘든 듯, 약간 다리가 흔들리자, 시경은 급히 재신의 허리를 잡아 자신의 품 안에 안아 버린다.

 

“다행입니다.”

 

“뭐가요?”

 

“이렇게 안아도 되는 명분이 생겨서요.”

 

“어, 은시경 씨, 나 지금 안으면 안 되는데.......”

 

“예? 왜 그러십니까?”

 

“나, 지금 땀 냄새 작렬이야. 지금 이러면 안 돼요.”

 

“그러면, 나중에는 되는 겁니까?”

 

“은시경 씨!!”

 

“괜찮습니다. 전.

제겐 공주님 향밖에 나지 않습니다.

너무 달콤해서, 이러다 제가 죽을 것 같습니다.”

 

“으으....오글오글거려요.”

 

공주님은 정말 오글거리시는 듯 몸을 부르르 떠시기는 하셨지만, 그래도 시경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었다.

아까까지 이 방에 창문이 없다고 욕하던 군인은 어디로 가고, 지금은 창문이 없어서 다행이라는 한 남자만 자신의 여자를 품에 안고 서 있을 뿐이었다.

 

 

 

 

 

4

 

 

 

 

 

병원에서 샤워를 하고 다시 옷을 갖춰 입는 데도 시간이 꽤 흘렀다.

시경이 준비가 끝난 공주님께 다가갔을 때, 공주님은 전화를 하고 계셨다.

 

“어, 그래? 그럼, 좀 일찍 볼까? 알았어. 그러자.”

 

전화를 끊은 재신은 시경에게 약속이 좀 당겨졌다며, 성당은 못 가게 됐다고 전한다.

 

“아, 근데 은시경 씨.”

 

“예.”

 

“아무래도 이 사람들, 완전 말술이거든요.

그래서 뭔가 배를 채워넣고 가야 할 거 같아요.

나 훈련 너무 열심히 해서 뱃가죽이 등에 붙었어요.

배고파.”

 

“그러면 궁으로 들어가셨다가......”

 

“아니 아니. 홍대 근처에서 보기로 했으니까 그 근처에서 밥 먹어요.”

 

“예? 아무래도 사람들이 있을 텐데요.”

 

“음.....내 단골집 있어요.

아니다. 아예 만나는 그 장소에서 밥 먹지 뭐.

거긴 내 아지트라서 어차피 아는 사람들만 오거든요. 바로 거기로 가요.”

 

 

공주님의 아지트라는 곳은 뭔가 어둑어둑해서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구석구석 후미진 곳이 많아서 도리어 사람들의 눈에 띄지는 않을 듯해서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그래도 사람들에게 너무 눈에 띄면 좋을 것 같지가 않아서, 시경은 다른 근위대원들은 바깥 쪽에 위치시켰다.

술을 파는 곳인 듯 싶었는데, 공주님은 순두부찌개를 시키시더니 정말 폭풍 흡입을 하시기 시작했다.

원래 이렇게 잘 드셨나 싶을 정도로 잘 드셨다.

 

“왜요? 뭘, 그렇게 봐요? 사람 먹는데?”

 

“아니, 정말 잘 드셔서요.

이렇게 잘 드시는 걸, 뵌 적이 없는 듯해서.......”

 

“응? 그랬나? 그러고보니, 나 요즘 밥량이 많이 늘었어요.

재활, 넘 열심히 해서 그런가봐. 이러다 살 엄청 쪄서 얼굴 못 알아보는 거 아니에요?”

 

“공주님, 너무 마르셨어요. 좀 찌셔야 돼요.”

 

“아니야.......정말 이러다 얼굴, 가로 세로가 서로 경쟁할지도 몰라.”

 

“예?”

 

“몰라요? 가로, 세로 경쟁하는 거?

왜 똥그래지다 못해서, 가로가 더 길어진다구요.”

 

“풋~”

 

“어, 어~~ 은시경 씨, 지금 웃은 거예요? 와와~~~

그렇게 보기 힘들다는 은시경 씨가 웃는 걸, 내가 보는구나.

좀 이렇게 웃어요. 보기 좋은데........”

 

“예.”

 

웃고 있는 시경의 모습이 왠지 가깝게 느껴진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재신은 조금은 개인적인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은시경 씨, 내가 처음, 아니죠?”

 

“예? 갑자기 무슨.....?”

 

“예전에 좋아했던 사람, 있긴 있었죠?”

 

“이런...감정은........정말 처음입니다.”

 

이 와중에도 시경의 말에 재신은 심장이 쿵쿵 뛴다.

이 남자 이제 시도 때도 없이 애정표현이다.

 

“아니, 에효.....그래도 좋아한 여자, 조금이라도 호감 간 여자는 있었을 거 아니에요?”

 

“..........................”

 

“음, 대답 안 하는 거 보니, 확실히 있었네.

얘기해 봐요. 몇 명이었어요? 만난 여자가?”

 

“예? 아...아니, 정말 그런 거 없습니다.”

 

“진짜, 내가 사귄 거 얘기하라는 게 아니라, 그냥 한 번씩 만나 본 거라든가, 약간 마음으로 호감이 갔던 여자라든가,

얘기해 봐요.”

 

“하아......공주님, 사실 여자를 사귀어 본다든가, 그래 본 적은 정말 없습니다.”

 

“그런데요?”

 

“그게......여자 쪽에서 연락이 와서 만나 보거나 한 적은 있습니다만, 정말 사귀거나 그런 건......”

 

“그러니까, 지금 내가 궁금한 게 그거라니까요?

연락이 와서 만난 여자는 몇 명인데요?”

 

“후우.....그렇게 몇 번 본 여자는 몇 명 됩니다만, 세어 본 적은, 없습니다.”

 

“뭐야? 은근히, 바람둥이잖아.”

 

“아,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거!!”

 

바람둥이라는 말에 시경은 정말 질색을 하며 손사래를 친다.

정말 공주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되는데 싶어서, 억울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는 심정으로 공주님께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풋~~! 뭐야, 그렇게 정색하지 않아도 돼요.

알았어요. 알았어.

그런데 그렇게 만났는데, 그래도 그 중에 조금이라도 호감 가는 여자는 없었어요?”

 

“공주님.......”

 

시경의 목소리가 거의 애원에 가깝다.

그래도 재신은 끄떡도 없었다.

 

“얘기 해 봐요? 네? 재밌잖아요. 그냥 재미로 궁금해서 그러는데 뭐.......응?”

 

재신이 눈웃음을 치며 살살 꼬시자, 시경은 또다시 그런 재신을 넋을 잃은 채 바라보고만 있다.

정말 재신을 보고만 있어도 넋이 빠지는 것 같다.

그런 재신 때문에 판단을 할 수가 없다.

 

“대학 때, 농활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요?”

 

“동아리끼리 연결이 돼서, 여름마다 가는 거였는데, 거기서 여대에 다니던 한 여학생을 만났습니다.”

 

“그런데요?”

 

“가녀려 보이는데, 의외로 일을 잘 하길래, 대단하다 생각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이 제게 연락을 해와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와와~ 그래서 만났어요?”

 

“예. 그 때 친구 녀석들이 부추겨서 3대 3으로 소개팅 비슷하게 하게 됐습니다.

저와 그 여학생은 짝이 되어서, 그렇게 몇 번 친구들과 같이 만난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요? 은시경 씨, 은근히 할 건 다 한 것 같은데요?”

 

“아, 아닙니다. 공주님, 그런 거......”

 

또다시 곤란한 표정을 짓자, 재신은 어서 말해 보라는 듯, 또 시경을 재촉한다.

 

“그 때 친구 녀석들이 둘이 잘 해보라고, 사귀어보라고 그렇게 말하기도 했었는데, 그 여학생은 아니라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었습니다..”

 

“잠깐만요. 그러니까 3대 3으로 자주 만났는데, 같이 있던 은시경 씨 친구들이 사귀어 보라고 했다구요?

다 있는 데서?”

 

“예.”

 

“근데 그 여자분은 거절했다구요?”

 

“예.”

 

“아니 그럼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데요?”

 

“전 그 여학생이 제게 관심이 없구나 싶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그 후에는 안 만났어요?”

 

“동아리에서 농활을 가니까 그 때마다 보기도 했고, 가끔 전화 연락을 서로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은시경 씨 마음은 어땠는데요? 전화를 계속 한 거 보면, 나쁘진 않았던 거죠?”

 

“하아.....공주님.......”

 

시경은 점점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뭔가 알 수 없는 그런 마음이었다.

 

“얘기해 봐요. 뭐 어때요? 옛날 일인데......응? 얘기해 봐요.”

 

공주님은 점점 재미있어 하시는 듯이 보였다.

그것이 자꾸만 시경의 마음을 가라앉게 했다.

 

“이 정도면 괜찮겠다 싶기도 했습니다.

주변에 친구들이 다 여자친구가 있으니, 저도 있어도 괜찮겠다 싶었고,

말도 잘 통하고 하니 사귄다면 사귈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사귄다면 사귈 수도 있겠다니......이 무슨.....여튼, 그래서요?”

 

재신은 사귄다면 사귈 수도 있다는 말에 참, 어이가 없었다.

무슨 남자가 좋아서가 아니라, 이 정도면 됐다 싶은 심정으로 사람을 만나는 건지......

여튼 그 다음이 궁금해서 시경을 계속 재촉해댔다.

 

“그랬었는데, 여학생은 아니라고 하니, 또 아닌가 보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자주 연락이 오니까, 한번씩 같이 밥을 먹거나 영화를 보거나 하기는 했습니다.”

 

“음...그게 얼마나 갔어요?”

 

“한....1년 반 정도 된 것 같습니다.”

 

“1년 반요? 그냥 그렇게 전화하고 밥 먹고, 영화 보고 한 게 1년 반이나 됐다구요?

그럼, 거의 사귄 거 아니에요?”

 

“그건....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편하게 만나 밥 먹고, 영화 보는 친구 같은,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 여자분이 자주 연락했었어요?”

 

“가끔....했었습니다. 후배기는 했지만, 그냥 친구 같은...그런 분위기였습니다.

저도 가끔 밥 먹자거나 영화 보자고 전화하기도 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연락 안 해요?”

 

“예? 예. 지금은 끊어졌습니다.”

 

“어쩌다가요?”

 

“띄엄띄엄 연락하기는 했었는데, 제가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한 다음 소대장이 되면서 완전히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다시 연락은 안 해봤어요?”

 

“예. 사실 소대장이 되면서는 작전에 투입돼서 정신없이 바빴기 때문에 그런 쪽으로 신경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또 사실 제가 연락하기보다 그쪽에서 연락을 하는 편이 많아서, 그쪽 연락을 몇 번 못 받으면서부터 연락이 안 왔습니다.”

 

“그럼, 바빠서 연애도 못했다는 거예요?”

 

“그렇다기보다는...저...그게......”

 

재신이 당황하고 있는 시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자신을 바라보는 재신의 눈. 그 눈이 너무나 크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때쯤, 그 눈에 빨려 들어가듯이 보고 있던 그 때쯤 재신이 입을 열었다.

 

“음......그 여자분이 은시경 씨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예? 그냥 친구......였을 것 같습니다만......”

 

“그냥 친구요?”

 

“예. 제게 관심이 없다고도 했으니.....”

 

“아니, 지금 은시경 씨, 그 말을 그냥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거예요?”

 

“예? 무슨 말씀이신지......”

 

“어우, 답답해. 이러니 연애를 못했죠.

그 여자분, 분명히 은시경 씨 좋아했어요.”

 

“예?”

 

“그 여자분, 기다렸다구요.

은시경 씨가 사귀자고 말해주길요.”

 

“분명 싫다고......”

 

“아니, 그때는 친구들이 이야기한 거잖아요.

은시경 씨는 아무 말도 안 한 거고.

그러니까 은시경 씨 입으로 듣고 싶었던 거라구요.

그래서 계속 연락하고 보고 밥도 먹고 영화도 본 거지.

마음에도 없는 남자랑 1년 반씩이나 누가 그런대요?

그것도 여자 쪽에서 계속 연락해 가면서.....

어휴 답답해.......”

 

“공주님.......”

 

“아, 내가 있었으면, 확실하게 해결해 줬을 텐데........”

 

재신은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한숨이 나왔다.

몰라도 어떻게 이렇게 모를 수가 있나 싶었다.

관심이 없었던 건지, 뭐를 몰라서 그랬던 건지, 대쉬를 해보지도 않고, 지레 포기하고 만 것도 답답했고, 그 상대편 여자도 정말 속이 터졌겠다 싶었다.

이건 뭐, 아무리 분위기를 내려 해도, 상대는 전혀 모르니, 정말 기운 빠졌겠다 싶었다.

그럴 때는 눈치 빠른 친구가 옆에 있어야 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나 보다 싶었다.

그러니 이 두 사람을 그냥 내버려뒀지.

내가 있었으면, 확실하게 맺어줄 수 있었는데......

 

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시경의 미간이 심하게 찌푸려지고 있었다.

 

 

“..................”

 

“어? 은시경 씨? 혹시 화 났어요?”

 

“뭐, 말입니까?”

 

“네?”

 

“뭘 해결해 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아, 난 그냥....그러니까 답답해서요.

분명 두 사람 서로 좋아했던 거 같은데, 서로 말을 못해서 그랬던 거 같아서요.

게다가 은시경 씨는 그 여자분이 자신을 좋아했는지도 모르고 있으니, 답답해서....

그냥 해본 소리예요.

마음에 담지 말아요.”

 

정말 재신은 순수한 마음이었다.

이 답답한 남자를 어쩌나 싶은 마음에, 안타까워서 마치 친구랑 수다를 떨며, 나 부르지 그랬냐, 라는 심정으로 말한 것이었으나,

시경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 순간, 재신도 조금은 알아차렸다.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그는 계속 재신에게 감정을 시도 때도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처음이라고, 이런 마음은 진심으로 처음이라고, 그래서 놓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끊임없이 말하는 사람 앞에서,

자신은, 왜 그 여자랑 잘 해보지 못했냐고 말한 셈이었다.

내게 좋아한다고, 이런 감정 처음이라고 말하는 사람 앞에서 다른 여자와 잘해보라고 말한 꼴이었다.

 

이재신....너도 참......눈치 없다....에효....

 

 

 

“그렇게 확인시켜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묵묵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그가 겨우 입을 떼고 한 말이었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러시지 않아도......압니다.”

 

그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그의 목소리가 무거운 만큼, 재신의 심장도 뭔가 저 안 깊숙이 가라앉고 있었다.

 

“은시경 씨.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공주님과 제 차이가, 뭔지 아십니까?”

 

“네?”

 

“저는......공주님 첫사랑....물을 수가 없습니다.”

 

“은시경...씨....”

 

“물으면, 제가....견딜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질투가 나서........

공주님과 이상우 씨......

공주님께서 이상우 씨를 얼마나 좋아하신 건지, 어떤 만남을 가지신 건지,

그리고 공주님께서 하셨다는...그 선물이라는 것도,

전부....다......질투가 납니다.

공주님께서 처음으로 마음을 주셨다는 것도, 그것도 다.......속이 상합니다.

그래서, 들을 수가 없습니다. 묻지도 못하겠습니다.

혹시 아직까지 그 추억을 깊게 가지고 계시면 어쩌나 싶어서, 겁이 납니다.

괜히 물었다가, 추억만 헤집어서 공주님께서 다시 그 추억을 아름답게 떠올리실까봐 저는 묻지도 못합니다.

그런 것들 하나하나 질투가 나고, 두렵습니다.

그런데 공주님은 아니시죠.”

 

“은시경 씨.”

 

“공주님은, 제가 누구를 만났든, 누구를 좋아했든, 상관, 없으시죠?”

 

“난....난.....”

 

“그게 공주님과 제, 차이입니다.”

 

 

명확했다.

공주님과 나의 차이는, 정말 명확하게 드러났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들을 공주님은 거침없이 물으셨다.

그리고 남의 이야기를 듣듯이, 아무 사심 없이 들으시며 안타까워 하셨다.

그것이 차이였다.

마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

내 스스로는 아무리 이 한 달을 진짜라고 믿고 싶어한다고 해도, 현실은 한 달이라는 시한부라는 것을 뼈저리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공주님의 시간과 내 시간은 다른 것이다.

마음이 담긴 시간과 그렇지 않은 시간은 전혀 다른 것이다.

시간은, 착각하지 말라고, 차디차게 말하고 있었다.

 

 

 

 

5

 

 

 

“어, 뭐가 이렇게 심각해?”

 

재신과 시경의 뒤로 한 여자가 들어왔다.

 

“어, 언니 왔어?”

 

“재신아, 너 얼굴 까먹겠다?”

 

“미안 미안......”

 

“혹시 이 분이 니가 말한 그......?”

 

언니라는 분은 흘낏 나를 보신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한민국 왕실 근위대장 은시경이라고 합니다.”

 

나는 일어서서 정중하게 인사를 드렸다.

 

“풋~”

 

그런데 내 인사를 듣자마자, 그 분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셨다.

 

“아, 미안해요. 은시경 씨.

난 재신이랑, 같이 밴드 활동했던 이현영이라고 해요.”

 

“예전에 밴드하실 때는 못 뵈었던 것 같습니다만.....”

 

“아 예전? 아 그 때 말이군요. 2년 전에.....

그땐 내가 애 낳고 산후조리하느라 못 다녔어요.”

 

“예.”

 

“근데 정말 듣던 대로네요.”

 

“예?”

 

“정말......듣던 대로예요.”

 

알 수 없는 말을 하던 공주님의 선배는 앉자마자 소주를 시키셨다.

 

“내가 말했죠? 말술이라고.......”

 

그 말에 시경이 작게 미소를 짓자, 현영은 놀란 듯 말했다.

 

“뭐야? 잘 웃네.”

 

“어?”

 

재신은 무슨 말인가 싶어서 재차 물어본다.

 

“은시경 씨, 잘 웃는데?”

 

“예?”

 

그러자 시경이 다시 무슨 말인가 싶다.

 

“아, 그게 얘가 그랬거든요. 잘 안 웃는다고, 좀 딱딱하다고......

근데 아니네요. 웃기도 하네요?”

 

“아...저......그게.......”

 

시경은 그 말에 조금 얼굴이 어두워진다.

아무래도 자신이 재미가 없다보니, 공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듯했다.

 

“은시경 씨, 오해하지 말아요.

원래 말수가 없다고 그런 거 뿐이에요. 천상 군인이라고 그랬는데, 언니가 오버를 하네요.”

 

재신은 혹시 시경이 오해할까봐 바로 말을 덧붙였다.

 

“큭큭.....재신아, 너, 은시경 씨 눈치 디게 본다?”

 

“아, 아니, 언니, 그게 아니라.......”

 

“아니 웃겨서 그래. 거침 없는 이재신이, 이런 적도 있나 싶어서....큭큭......”

 

재신은 언니의 어깨를 툭 치면서 시경을 바라본다.

시경도 재신을 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서 변함 없을 것 같은, 그 마음이 느껴져서 조금은 부끄럽고, 또 조금은 뿌듯한 그런 마음에 재신은 황급히 또 소주 한 잔을 털어넣었다.

 

“야, 천천히 마셔!”

 

“괜찮아. 사돈 남말 하시네. 말술은 언니거든요? 지금 오자마자 지금 몇 잔 한 줄 알아?”

 

“난 원래 그러는 거고........”

 

남편 이야기, 아이 키우는 이야기, 일상에 대한 이야기.

재신과 현영은 일상적인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시경은 아까부터 받은 잔으로 그저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있었다.

누군가 사랑을 하고, 그렇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면서 생기는 소소한 싸움들과 재미들까지.......

평범한 사람들이 누리는 것들에 대해서.......

가슴 깊이 담고 있었다.

자신에게 이런 평범한 행복이 올 수 있을까......싶은 마음에, 조금은 울컥거리기도 한다.

애써 그 마음을 지워보려 남은 소주잔을 털어 넣으며, 올라오려는 욕심들을 억지로 눌러본다.

 

“와, 언니 정말 힘들겠다,

진석이 형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 하네,

아니 육아를 어떻게 혼자서 해, 언니가 집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지, 집에만 있어도, 주부가 얼마나 힘든데, 그걸 안 도와준단 말이야,

세상에 진석이 형, 간이 배밖에 나왔구나,”

 

“그러게, 이 남자가 그런다. 진짜.”

 

현영은 열이 받는 듯, 담배 있냐며, 시경에게 물어온다.

없다는 말을 듣자, 잠시 사러 갔다 오겠다며, 결국 바를 나섰다.

 

“우리만 너무 얘기해서 재미 없죠?”

 

“아닙니다. 재미있습니다.”

 

“뭐가요? 재미있을 게 없잖아요.”

 

“그냥......사는 이야기 하시는 게, 남편 분과 아이 키우시는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그게 재미있다구요? 그냥 지지고 볶고 사는 거잖아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재신을 시경은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여전히 맑은 눈으로, 입술 가득 미소를 품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이 사람을, 평범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안에 가둘 수 있을까.

 

“제게는, 이 평범함이 제가 가지고 싶은 유일한 선물입니다.”

 

“응?”

 

“평범한 일상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건 아니라는 걸.....알게 되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함께 한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남들 사는 것처럼 살아보는 게,

제가 가장 소망.....하는 일입니다,.... 공주님......”

 

뭐라고 대답을 해주어야 하는데, 막상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다.

이 남자가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아서, 그 마음이 느껴져서 가슴이 저릿해진다.

 

“오늘 왜 저를 부르셨습니까?”

 

그래, 그게 나도 궁금했다.

나는 오늘 왜 이 남자를 부르고 싶었을까.

나를 공주가 아니라 그저 한 사람으로 봐주는 내 지인에게 왜 이 사람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사실은....오늘 성당에서 신부님께 같이 듣고 싶은 얘기가 있었어요.

은시경 씨와 같이 성당에 갔던 날, 그 날 신부님께서 그러시더라구요.

기억을 가져가신 분이, 필요하실 때 다시 주실 거라고.

기억을 가져가신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러니 기억을 가져가신 이유를 찾아보라구요.”

 

“기억을 가져가신 이유......말씀입니까?”

 

“은시경 씨와 나, 한 달 동안 기억을 찾아보기로 한 거니까,

왠지 그 말씀을 우리 두 사람 다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어쩌면 기억을 가져가신 이유를 찾는 게, 나한테만 국한된 건 아니다 싶었어요.

왠지 은시경 씨와 내가 함께 찾아야 할 이유가 아닐까......해서요.”

 

그녀가 함께라고 한다.

나와 함께 찾아야 하는 이유.

한편 설레면서, 또 한편 가슴이 아파오기도 한다.

잊을 수밖에 없었던 그 이유는, 나임에 틀림이 없다.

 

“언니랑 만나는 데까지 은시경 씨를 부른 건.......사실 나도 정확하게는 모르겠어요.

그냥.....언니를 만나면 조금은 실마리를 풀 수 있을까 해서요.”

 

 

“무슨 실마리? 내가 열쇠를 쥐고 있는 거야?”

 

현영이 어느 틈에 담배 냄새를 풍기며 들어왔다.

밖에서 피고 들어온 듯했다.

 

“언니, 들었어?”

 

“그래. 워낙 심각하게 얘기해서 못 끼어들었다.

이 사람이, 그 이유야? 니가 기억을 잃어버리게 된?”

 

“아, 아니......그게 아니라, 은시경 씨도 나랑 같이 찾아야 할 것 같아서.......그 이유에 대해서......”

 

“그래서 은시경 씨는 그 이유 찾았어요?”

 

갑자기 현영이 자신에게 물어오자, 시경은 놀란 듯 버벅대고 말았다.

 

“아, 저........”

 

“죽었기 때문이라는, 그런 상투적인 이유말구요.”

 

“!!!!!!!!!!”

 

현영은 적나라하게 그 이유를 드러내고 있었다.

 

“만약에, 당신의 죽음을 재신이가 못 견뎌서 기억을 지웠다면, 지금은 돌아와야 하지 않나?

당신이 이렇게 살아 돌아왔으니까......

그런데도 안 돌아온다는 건, 다른 이유라는 거겠죠.

당신의 죽음 말고 다른 이유........”

 

시경은 그 어떤 말도 하기가 어려웠다.

2년 전 자신의 모습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녀를 거절하고, 그녀를 아프게 하고, 그녀를 답답하게만 했던 기억들뿐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를 놓지 못해서, 어떻게든 그녀를 잡을 수 있는 명분을 얻으려 중국으로 떠났던 것까지, 어쩌면 자격지심과 열등감의 표현들이 아니었을지.......

할 말이, 아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재신, 너 힘들었겠다.”

 

“어? 무슨 소리야? 언니?”

 

“이 남자, 너 좀 힘들게 했겠다고.”

 

“예?”

 

“아주 잠시 봤지만, 은시경 씨, 예전엔 지금보다 더 했겠죠?

자존감.......”

 

“무슨 말씀이신지.......”

 

“스스로 자신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마음요. 자.존.감.

자신감 말구요. 내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고 그리고 인정하고 안아주는 그 마음요.

내 부족함을 인정하고, 내 부족함까지도 안아줄 수 있는 그 마음요.

은시경 씨는 지금도 그게 부족하다구요.

아마 2년 전엔 더 했을 것 같은데요.”

 

“.............................”

 

현영의 말에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허를 찔린 지도 몰랐다.

내가 이토록 미친 듯이 일에 매달리는 것도,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살아왔던 것도,

어쩌면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은 자꾸만 자격지심을 만들어 내었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 얘기하고 싶은 건, 당신의 모자람이, 상대방에게 미안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예?”

 

“모자람은 당연한 거예요. 인간이 완벽하다면, 다른 사람을 만날 이유가 없지요.

특히나 영혼의 반려자는........

당신의 모자람은 당연한 거니까, 너무나 당연히, 그 모자람을 반려자는 받아들여야 해요.

그건 미안해 할 문제가 아니에요.”

 

모자람은 당연하다.

나 역시 모자란 인간이다. 그러나 내 모자람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짐을 지우고 싶지는 않다.

당연한 것이 아닌가.

남자라면, 그 누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부족함을, 그 모자람을 짐처럼 얹어주고 싶을까.

 

“영혼의 반려자라는 말을 썼지만, 난....가끔...이 관계는 퍼즐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없는 부분은 상대방이 와서 채워주고, 내게 많은 부분은 상대방에게 가서 넣어주고.......

반려자(伴侶者), 그 뜻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은시경 씨, 반려자 뜻, 알아요?”

 

“아....배우자라는 뜻 아닙니까? 같이 함께 있는 친구 같은........”

 

“그렇죠. 그런데 그 어원까지 따져보면, 참 재미있어요.

반(伴)자도 반(半)이 사람을 만난 거죠. 그런데 이 반을 나타내는 반(半)자는 떨어진 한 부분이라는 뜻도 있어요.

떨어진 조각이 사람과 붙는 것, 그것이 짝이 된다는 거죠.

려(侶)자도 마찬가지예요. 음률 려(呂)가 사람을 만나서 짝 려(侶)가 된 건데, 이 뜻도 원래 등뼈라는 뜻이에요.

등골의 뼈, 서로의 몸을 지탱해주는 등골의 뼈인 거죠.

그것이 짝이고 벗이 된다는 거.......

 

그러니까 영혼의 반려자는, 떨어진 조각으로 내 부족함을 채우고, 내 떨어진 조각으로 그 사람의 부족함을 채우는,

서로를 지탱해주는 등뼈의 관계라는 거죠.”

 

반려자라는 뜻에 대해서, 그 깊이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이런 식으로 서로를 채워주는 존재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현영의 말은 시경을 점점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헷갈리면 안 되는 게 있어요.

채우는 것은 좋은 것만이 아니라는 거요.

떨어진 조각은, 내 슬픔일 수도 있고, 내 아픔, 내 상처일 수도 있어요.

그걸 같이 채우는 것이 바로 반려자예요.

내 상처를, 내 아픔을, 내 슬픔을 같이 채우지 못한다면, 그걸 내가 그 사람에게 꺼내놓지 못한다면,

나는 그 사람을 반려자로 생각지 않는다는 거예요.

은시경 씨는, 당신이 반려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모자람을 대신 져달라고 말할 수 있나요?”

 

“저...전.........”

 

한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모자람은 내 스스로 채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런 나의 부족한 면들이, 그 모자란 면들이 너무나 싫었다.

어서 이 부분을 채워서 인정받아야 되겠다고, 어쩌면 늘 안달이 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그 부분을 내 사랑하는 이에게 내놓는다는 말인가.

그 부끄러움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은시경 씨 얼굴 표정을 보니, 알 것 같아요.

자존심 강하고, 책임감 강하고, 성실하고, 또 완벽해야 하는 사람이니까.......

내 얘기 하나 해줄까요?”

 

“언니, 설마.......”

 

“그래, 그 얘기.......

재신이는 아는 얘기예요.

뭐 그리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내가 지금은 남편이 된 그 사람에게 결혼을 얘기하면서 얘기한 거라,

왠지 은시경 씨에게 들려주고 싶네요.

또 재신이에게도, 조금은 다르게 들리지 않을까 해요.”

 

“언니 굳이...그 얘기까지는 안 해도 돼.”

 

“아니야, 너와 은시경 씨, 두 사람 다에게 필요한 얘기야.

나 사실 중학교 1학년 때, 성폭행을 당했어요.

오빠랑 같이 새벽기도를 갔었어요.

어린 마음에 기도하고 싶어서 갔었는데, 그 때 술취한 어떤 놈을 만났죠.

오빠는 뇌에 손상이 온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맞아서 길바닥에 쓰러졌고, 저는, 인근 학교 화장실에서.....그 짓을 당했죠.”

 

“!!!!!!!!!!”

 

“지금은, 살다가 팔 하나 부러진 것과 같다, 다리 하나 부러진 것과 같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아주 오랜 세월, 그건 극복할 수 없는 상처였어요.

원망도 많이 했었죠.

내가 뭐가 잘못돼서 그러신 거냐고, 뭣 때문이냐고, 살아는 계신 거냐고, 어떻게 신이 살아 있는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남자처럼 다니기도 했고, 이 세상의 모든 남자를 증오하며, 급진적인 여성학에 빠지기도 했어요.

때로는 칼을 가지고 다니기도 했죠.

누구든지 걸리면, 죽여버리겠다고, 그런 마음을 품고도 살았어요.”

 

원망....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사람은 왜 내게 이런 자신의 치부까지 드러내는 것일까.

듣고 있는 시경조차 듣기가 힘들 정도인데, 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 사람은 이 상황을 어떻게 견뎌낸 것인지 감히 가늠을 하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말이에요.

세상은 그런 게 아니더라구요.

나만 그렇게 상처가 많은 게 아니더라구요.

모두가 자기 나름의 상처를 안고 살더라구요.

부모님으로부터, 형제로부터, 태어날 때부터, 아니 처음부터 장애를 입기도 했고, 재신이처럼, 후천적 장애를 얻기도 하구요.

그렇게 모두들 자기만의 상처를 안고.....살아가더군요.

내 상처는 그 모든 모자람들 중 하나더군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 수많은 상처들 중 하나.........

그러나 그 상처는 평생, 절대로 치유될 수 없는 생채기죠.

 

그래서 그 당시에는 남친이었던 남편에게 말했어요.

내 상처는 나 혼자만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분량은 오로지 50%밖에 안 된다,

당신이 내 반려자가 되고 싶다면, 나머지 50%를 책임지라구요.

 

당당하게 말했어요.

내 상처는 내 것이 아니다,

내 상처의 반은 당신이 책임져야 한다,

그것을 미안해하지도 말고, 그것을 감추려하지도 말고, 드러내서 반반씩 나누어 책임지는 것,

그것이 반려의 의미라는 것을, 그 때 알았어요.

나는 내 상처의 반을 해결했으니, 당신이 내 나머지 반을 책임지라고........

그리고 나는 당신의 모자람의 반을 책임지겠다고.

그것이 안 된다면, 떠나라고,

당당하게 요구했어요.”

 

“하아..........”

 

이 사람이 왜 내게 이 얘기를 하는지 조금씩 알 것 같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부족함에 대해서 나 혼자 지니고 있는 것에 대해서,

또 내놓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을 힘들게 만드는 것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러나 어떻게 내 상처를 당연히 상대가 책임질 수 있는가.

어떻게 내 짐까지 그녀에게 맡으라 할 수 있는가.

 

“당신의 모자람이든, 자격지심이든, 상처든 그 무엇이든지 간에, 100% 당신의 것이 아니에요.

만약 당신이 상대에게 당신의 상처를, 그 부족함을 내놓을 수 없다면, 내 반을 책임지라고 당당하게 요구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반려자로 맞을 수 없어요.”

 

“전.....전.........”

 

“은시경 씨 성격이라면 힘들 거예요.

나도, 그랬어요. 그런데 반려자가 된다는 건, 내 자존심 세운다고 되는 게 아니었어요.

내가 100%가 아니에요. 내 스스로 혼자서 100% 다 책임질 수 없어요.

당신의 떨어진 조각을 그 사람에게 건넬 수 있어야, 반려자가 될 수 있어요.

이건, 재신이 너도 마찬가지야.”

 

“어?”

 

“너도, 나랑 같은 상황이야.”

 

“난.....언니......하아......물리적으로도 상처가 있잖아.......

그러니까 상대방을 더......힘들게 하게 될 거야.”

 

“이봐, 너도 문제잖아, 이렇게.

정신적이든, 물리적이든, 그 부족함은, 그 상처는 같은 거야.”

 

“언니, 난.......평생 상대방에게 족쇄가 될 수도 있어.”

 

“이봐, 이봐!!! 이재신!! 내가 너 이렇게 곪아 터졌을 줄 알았다.

상대방은 말이야. 니가 50%는 책임져달라고 당당하게 말해주길, 아마 죽도록 바라고 있을 거다.”

 

현영이 시경을 흘낏 보지만, 시경은 고개 숙이고 있는 재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저 남자는.......자신에게 그 기회가 와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거다.

 

“이재신, 너! 니 반려자 만나려면 말이야.

50%는 니가 책임지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돼.

그 반려자가 여기 앞에 있는 이 남자가 될 지, 다른 남자가 될지 모르겠지만 말야.”

 

그 말에 놀란 듯 고개를 드는 재신과 그녀를 아프게 바라보던 시경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혀 들었다.

그의 눈은 재신을 향해서 말하고 있었다.

자신이었으면 좋겠다고,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자신이었으면, 정말로 좋겠다고, 그렇게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현영은 지켜보며, 한숨을 쉰다.

 

“참, 둘이 똑~~같다. 내놓지 않는데, 뭐가 해결되겠니?

신부님 말씀이 맞네. 기억을 잊을 이유가 있었네,

2년 전과 똑같이 계속 그 상황에서 답보 중이라면 기억도 돌아올 이유가 없는 거겠지.”

 

그 말을 듣는 두 사람은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한 사람은 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고, 한 사람은 그런 그녀를 가슴 아프게 바라보는 것뿐........

 

“스스로 일어나려 하지 않는 사람을 일으켜 세울 수는 없어.

억지로 일으켜 세워도 결국 쓰러지고 말지.

남은 절대로 널 일으켜 세워줄 수 없어.

니 스스로 일어나야 해.

적어도 일어나고 싶다는 의지를 가지고 내 발에 발목에 무릎에 힘을 주고 일어나야 한다고. 그래야 옆에서 도와줄 수 있어.

잊으면 안 돼.

상대에게 100%를 주고 의지하는 게 아니야.

그건 내 발에는 그 어떤 힘도 주지 않고 상대방에게 나를 끌어올려라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거야.

50%는 내 힘으로 책임지고, 그래서 당당하게 나머지 50%를 상대에게 책임지라고 해야 되는 거야.

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의 전부야.”

 

50%의 스스로 일어나는 힘과, 50% 상대에게 자신의 떨어진 부분을 줄 수 있는 용기.

세상에 상처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또 어느 시인의 말처럼 흔들리지 안고 피는 꽃이 어디 있겠는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왜 기억이 돌아오고 있지 않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알지 않는다면, 그것을 반성해 보지 않는다면,

내 기억은 절대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6

 

 

 

 

“우와~~!! 진짜, 늦었지? 미안 미안!! 우리 공주님!!

현영 언니, 오랜만이에요?

은시경 씨도? 후훗”

 

혜원이도 오라고 연락을 했었는데, 다른 볼일이 있어서 늦는다고 하더니 이제야 나타났다.

 

“뭐야, 나빼고 맛있는 거 다 먹은 거야?”

 

현영과 시경 옆에 자리를 잡은 혜원은 남아 있는 음식을 넉살도 좋게 집어 먹는다.

 

“더 시켜줄게. 이거 너무 적게 남았어. 먹다 남은 걸 어떻게 먹어?”

 

“나 참, 이 공주님 보세요. 우리가 언제 찬 밥, 더운 밥 가렸어?

이거, 궁에 돌아오시더니, 호랑이 담배 피는 시절을 다 잊은 거야?”

 

“아니야. 얘는....배고프지? 맛있는 거 시켜.”

 

“됐습니다. 난 공주님처럼 날씬 체질이 아니라서, 다이어트 해야 되네요.

술이나 먹지 뭐. 사장님, 여기 소주 일 병 추가요!!!”

 

혜원이가 오자 어두웠던 분위기가 뭔가 활기차지고 있었다.

늘 그랬다.

혜원이는 이렇게 주위를 밝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어, 어, 은시경 대장님, 벌써 취한 거예요?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아닙니다. 몇 잔 하지도 않았는데요.”

 

“나 참......또 여기서 무게 잡는 거예요?”

 

“나갈 무게도 별로 없습니다.”

 

“와아~~ 은시경 근위대장님, 넉살이 좋아지셨습니다?”

 

혜원은 시경의 농담에 놀라워하며 시경의 잔에 소주를 들이부었다.

시경의 표정이 아까와는 달리 뭔가 편안해 보였다.

재신과 있을 때와는 또다른 표정이었다.

 

언제부터 이 두 사람이 이렇게 편안하게 지내게 된 걸까.

아, 저번에도 벤치에서 웃으면서 얘기하고 있었지.......

아무래도 현영 언니는 처음 보니까 어려웠을 테고......

나는 아무래도 공주니까 힘들었을 테고.......

 

재신이 목발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시경은 놀란 듯 자신도 일어선다.

 

“공주님!”

 

“아, 앉아 있어요.”

 

“예? 나가실 거면, 제가 같이......”

 

“무슨 소리예요? 화장실도 따라오겠다고?”

 

“아.....저.......”

 

화장실이라는 말에 시경의 얼굴이 붉어진다.

 

“아, 진짜 공주님, 은대장님 그만 좀 놀려.

나랑 같이 갈래?”

 

혜원이 재신에게 타박을 주며 같이 가자고 한다.

 

“아니. 혼자 갈 수 있어. 제발....이러지 마. 나 혼자서 뭐든 다 하는 사람이야.”

 

“알았어. 알았다고.”

 

재신은 뭔가 걱정스러운 듯 자신을 지켜보는 은시경을 뒤로 한 채,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상했다. 자신의 지금 이 마음이.....

도대체 뭔지......

뭔가 체기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무거웠다.

이상하다. 정말.......

아까까지는 괜찮았는데, 체한 건가?

 

손을 씻고 심호흡을 한 후, 화장실에서 나와보니, 현영 언니는 보이지 않고, 혜원이와 은시경 씨만 남아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혜원이가 웃으면서 은시경 씨의 팔을 툭 때리기도 하며, 뭔가 친밀해 보였다.

밝고, 즐거운 둘만의 분위기가 있었다.

이상하게 그 자리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바의 밖으로 나오니, 현영 언니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왜 나왔어?”

 

“답답해서.......”

 

“왜?”

 

“그냥......오래 안에 있어서 그런가봐......”

 

“흐음....그래?”

 

현영 언니의 말이 뭔가 묘했지만, 재신은 눈을 들어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입 밖으로 하얗게 김이 몽글몽글 나오고 있었다.

 

창으로 혜원이와 은시경 씨가 보였다.

따뜻하게 웃고 있는 시경의 얼굴을 보자, 재신의 심장이 쿵......하고 떨어져 내린다.

 

나.....왜 이러지.....

나.....이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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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너무 늦었습니다.

12월도 1월도 마감에 엄마 일까지 이래저래 정신이 없었네요.

오늘 그래도 51장이니 용서해주시길......

 

 

1

 

 

처음 시놉을 잡으면서 저 위의 현영의 말을 써두었습니다.

7개월도 더 된 이야기가 드디어 오늘 수면 위로 나왔네요.

시놉으로 처음 잡고 나서, 계속 조금씩 살을 덧붙이면서 늘 울컥하고는 했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제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이야기 2가지가 섞여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같은 상황을 겪은 것인데,

제 선배 언니의 얘기가 저는 너무나 오래 남아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이 반을 극복하고, 나머지 반은 상대가 극복해야 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던 언니의 이야기가

제게는 너무나 큰 반향으로 남아있습니다.

처음 드라마에서 공주님과 은시경의 상황을 보면서, 저는 이 언니의 이야기를 떠올렸답니다.

두 사람 모두 같은 상황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지요.

 

 

2

 

 

은신 통신.....

지금 12시님 방에서 댓글이 폭발하고 있다는 풍문을 듣고 있습니다.

답변하신다고 고생하신 파지님과 밥팅님, 그리고 거의 노가다에 가까운 편집을 하시느라 졸지에 벼락을 맞으신 12시님,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처음 질문을 받았을 때, <당.기.못>이 아직 끝난 상황이 아니라서 좀 애매한 면이 많았습니다.

잘못하면 스포가 될 수가 있어서, 그 때문에 좀 더 힘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바로 등장한 첫사랑에 대한 질문.......

21회에 등장해야 하는데, 이것이 질문으로 바로 나오니 난감하더라구요.

그래서 적절한 선에서 스포를 피해가며, 또 <당.기.못>에서도 적절히 답변과는 경계를 짓기 위해,

이래저래 좀 애를 먹었습니다.

이미 여러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저는 시놉을 전체 완성해 놓고 쓰기 때문에, 세부 에피소드나, 중요한 대사들은 이미 시놉으로 만들어두거든요.

그 때문에 댓글에서 어떤 장면을 보고 싶으시다고 말씀하시거나 하실 때, 약간 애매할 때가 있습니다.

가끔은 비밀 댓글로 몇 회에 나올 거라 말씀드리기도 하지만, 이게 참.....애매하더라구요.

문제는 제가 빨리빨리 연재를 하면 괜찮을 텐데......

워낙 느리게 연재를 하다보니, 보시는 분들도 답답하시고, 시놉을 알고 있는 저도 답답하고.....그렇게 되는 듯합니다.

그래도 스포를 모르시는 것이 더 재미나지 않을까....살포시 그렇게 생각해 봅니다.

 

은신 통신 비하인드와 인터뷰 전문은 정리되는 대로(조금 시간이 걸릴 수도.....) 올려드리겠습니다.

 

+) 시경이 여자 만난 이야기는(첫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듯해서요...) 저희 남편 이야기를 시경이에 맞게 각색해 본 겁니다.

제가 그 얘기를 듣다가 답답해서, 공주님처럼 반응했다지요ㅎㅎㅎㅎ

남편 이야기는...나중에 재미로 한 번 해보도록 하지요....ㅎㅎㅎㅎ

 

3

스트로베리 얘기는 19회 마지막 사족 끝까지 가보시면, <더보기>로 올려둔 이야기였습니다.

이 걸 본 내용에 넣어달라고 요청하시는 분들도 계셔서 재미로 넣어보았습니다.ㅎㅎㅎ

 

4.

위에 대문 짤은, 첫 번째 것은 silver님께서 핑크로 다시 AS 해서 주신 거구요.

두 번째 것은 디시 그러하다 횽께서 보내주신 겁니다.

두 분께 얼마나 감사한지 정말 모르실 거예요.

너무너무 감사해요.^0^

 

5.

배경음악 2번과 3번은 모두 젬마님께서 보내주신 겁니다.

배경음악 때문에 글을 더 술술? 쓸 수 있었어요. 너무너무 감사해요.^^*

 

6.

여튼 이렇게 느리고 느린 글, 여전히 읽어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또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도대체 왜 <당.기.못>을 여전히 읽어주시는 걸까......

의리일까......뭐 그런 생각들이 들어요.

사실 저도 이렇게 길게 쓰다가는 죽을 거 같아요. ㅠㅠㅠㅠㅠㅠㅠ

제 스탈이 시놉 상으로 정해진 이야기는 무조건 한 회에 넣는다는 주의라서.......

내용은 점점 길어지고, 한 회의 양은 늘어나고......그렇게 되네요.

51장........이 따우로 연재하면 안 될 듯합니다.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할 듯요. ㅠㅠㅠㅠㅠㅠ

 

여튼 의리의 은신러님들, 감사합니다.

며칠 후, <은신통신>으로 다시 찾아뵐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