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킹투하츠와 은신상플/(은신)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은신상플)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22

그랑블루08 2013. 2. 7. 00:05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22

 

 

 

 

<silver님께서 주신 당기못 대문짤_감솨감솨해요.^^>

 

 

 

<디씨 그러하다 횽이 주신 당기못 대문 짤....감솨감솨합니다.^^>

 

 

 

56

 

 

* 배경음악은 이적의 <다행이다>입니다.

 

이적-<다행이다>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마주보며 숨을 쉴 수 있어서

그대를 안고서

힘이 들면 눈물 흘릴 수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대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어줘서

 

거친 바람 속에도

젖은 지붕 밑에도

홀로 내팽개쳐져 있지 않다는 게

지친 하루살이와

고된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게

언제나 나의 곁을 지켜주던

그대라는 놀라운 사람 때문이라는 걸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나눠먹을 밥을 지을 수 있어서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저린 손을 잡아 줄 수 있어서

그대를 안고서

되지 않는 위로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대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어줘서

 

거친 바람 속에도

젖은 지붕 밑에도

홀로 내팽개쳐져 있지 않다는 게

지친 하루살이와

고된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게

언제나 나의 곁을 지켜주던

그대라는 놀라운 사람 때문이란 걸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

 

 

 

 

 

1

 

 

 

“잠깐만요. 근위대장님!!!!!”

 

밖에서 궁중실장님의 목소리가 크게 들리는가 싶더니,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그곳에 은시경이 서 있었다.

헐떡헐떡 숨을 몰아쉬며, 미간에 잔뜩 힘을 준 채, 슬픈 건지, 괴로운 건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재신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정신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답지 않게, 시경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두 주먹에는 이미 핏줄이 터질 듯이 올라와 있었다.

무언가를 참고 있는 듯, 저 위로 솟아올라오는 감정을 가까스로 밀어 넣으며, 시경은 자신의 공주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주치는 듯했던 공주님의 시선은, 시경과 얽히자마자 피해버린다.

 

왜.......도대체 왜........

 

당장 묻고 싶은데, 쉽사리 입을 뗄 수가 없다.

두렵다.

저 입술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그것이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애꿎은 주먹만 움켜쥔 채 서 있기만 한다.

 

몇 번이나 올라오려는 말을 누르고, 몇 번이나 터질 것 같은 감정을 삭이며, 몇 번이나 마른 침을 삼키면서

시경은 자신을 다독였다.

그러나 드러난 목소리에는 이미 그의 두려움이 스며들어 있었다.

 

“공.주.님.........”

 

겨우 뱉은 말은 자꾸만 꺼끌꺼끌하게 나와서 자신의 귀에도 거슬리기만 한다.

 

“할..말....있으면 해요.”

 

쥐어짜는 듯이 나온 자신의 목소리와는 달리, 공주님은 담담하다.

그 담담함이 두렵다.

그 담담함 뒤에 올 그 말이 두렵다.

시경은 그 담담함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면 조금은 잡고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시간을 조금은 붙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자꾸만 마음이 약해지기만 한다.

심장이 자꾸만 소리를 낸다.

서걱 서걱 대며, 자꾸만 생채기를 낸다.

 

할 말.........

 

 

“도대체, 왜......”

 

감정 조절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눌러놓아도, 감정은 감춰질 수 없다고 자꾸만 아우성을 쳐댄다.

탁하고 강한 음성이 차가운 방안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러시는....... 겁니까?”

 

말하는 것도, 서 있는 것도,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는 것도 고통이다.

그러나 더한 고통은, 그녀를 볼 수 없는 것....그보다 더 큰 고통은 없다.

그녀가 아실까.....그녀가 정말 아실까........

 

두려운 듯 시경의 눈을 언뜻 바라보던 재신이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숙여진 얼굴만큼 시경의 가슴도 저 나락 아래로 깔려 들어가는 것만 같다.

마치 자신에게 사형 선고라도 내리는 것만 같다.

주먹을 쥔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설마....설마.....아니다. 아닐 거다.

 

“미안....해요.........”

 

“공...주...님.........”

 

미안하다고, 하신다. 내게.

도대체 뭐가, 왜........

심장이 터질 듯이 뛰어댄다.

나는 못 들었다. 아무 것도 못 들었다.

 

하아...........

 

저 안에서부터 상처받은 심장이 소리를 낸다.

깊게 가라앉은 숨소리에서부터 고통이 배어나온다.

 

나는......나는........

 

 

 

 

 

2

 

 

 

 

공주님의 선배는 오랜만에 피니까 자꾸 당긴다며, 담배를 피러 또다시 밖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까 화장실에 가신 공주님께서 나오셔야 하는데 나오시지를 않는다.

점점 불안해져서, 혹시 넘어지신 건지, 화장실 쪽에 누군가 접근이 있었던 건지, 점점 안절부절 못하게 된다.

안 되겠다 싶어 일어서려는데, 옆에 앉아 있던 혜원 씨가 내 팔을 잡아 당겼다.

 

“앉아요.”

 

“예?”

 

“너무 유난 떨지 말고, 좀 기다리고 있어요.

알아서 잘 하고 오실 테니까....

그리고 원래 여자들 오래 걸리니까, 좀, 있어 봐요.

얼마 됐다고 이래요?”

 

시경의 잔에 소주를 부어주며, 혜원은 뭘 이렇게 안절부절 못하느냐고 타박을 준다.

 

“그래도......너무 오래 계시면.......”

 

“거~진짜!! 공주님도 사람이거든요?

자꾸 이러면 공주님 더 싫어하신다는 거, 몰라요?”

 

“예? 아, 예.”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남자인 내가 화장실 앞을 얼쩡거리면, 더 불편하실 수도 있다.

 

“자꾸 입술 깨물지 마요.”

 

“예?”

 

“은시경 씨 입술, 그러다 하나도 안 남아나겠네.”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있었나 보다.

곤란하면, 쑥스러우면 하는 내 버릇.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공주님과 관계된 일에서는 늘 이 버릇이 또다시 드러나고는 한다.

 

“공주님하고 얘기는 잘 됐어요?”

 

“무슨....얘긴지......?”

 

“한 달.....동안 뭐할 건지....뭐 등등......기억 찾기도......”

 

“아......예..........”

 

“풋~”

 

우물쭈물하는 시경을 보던 혜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왜.........그러십니까?”

 

“은시경 씨, 진짜 웃긴 거 알아요?

사랑에 빠진 남자는, 다 이런 거예요?

당당하게, 반듯하게 앉아 있다가, 공주님 얘기만 나오면, 사람이 확~풀어져요.

눈에서 하트가 뿅뿅 나온다구요.

와, 웃겨서, 나 완전, 이 장면 만화로 그리고 싶어요. 큭큭큭큭........

그렇게 좋아요? 큭큭큭”

 

“.................예.”

 

뻘줌한 듯, 얼굴을 붉히던 시경이 “예”라고 대답하자, 혜원은 또다시 기겁을 했다.

놀라웠다. 공주님이 아니었다면, 이 남자는 평생 이런 모습, 모르고 살지 않았을까 싶었다.

잠깐 봐도 알 수 있었다. 이 남자가 얼마나 딱딱하고 단단한 남자인지, 또 얼마나 강인한지,

왜 군인 남자라고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수트로는 도저히 가릴 수 없는 근육들이 어깨에도 팔에도 가슴에도 단단하게 잡혀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군인이었다.

이런 남자가, 사랑 앞에서는, 한없이 부드러워진다.

 

그래, 그러니까.......이런 남자니까, 내가 봐줬다.

우리 공주님 남자로 내가 인정해줬다.

 

“어!!!!”

 

밖으로 나가고 있는 재신을 발견하고는 시경이 다시 일어서려 하는데, 혜원이 다시 팔을 잡았다.

 

“그냥, 놔둬요.”

 

“밖은 아무래도 위험합니다. 제가......."

 

"언니도 있고, 밖에 근위대원들도 있을 거 아니에요?

그냥 좀 있어 봐요. 나 좀 믿고........”

 

“예?”

 

“아까 무슨 얘기했어요?”

 

“언제...말입니까?”

 

“아까.....두 사람 있을 때, 둘만 먼저 와 있었다면서요. 현영 언니 오기 전에.....

무슨 얘기했어요.”

 

“....예전에 만난...여자에 대해......물으셨습니다.”

 

“에엣? 은시경 씨, 여자 있었어요?”

 

혜원은 왠지 이 군인 남자는 여자 경험이 없겠거니 하고 있었다.

지독하게 서툴고, 지독하게 정직했다.

나이 서른이 넘은 남자의 사랑법이 마치 스무 살의 사랑처럼 정직했다.

불속에라도 자신을 내던질 것처럼, 그는 자신을 그 사랑 안으로 던져 넣고 있었다.

 

“없습니다.”

 

여자가 있었느냐는 말에 시경의 얼굴이 확 굳어진다.

 

“그럼, 뭐, 할 말도 없었겠네요.”

 

“그런데, 그게........”

 

“네?”

 

“잠깐 만난 사람은 있었습니다.

사귄 건 아닌데, 1년 반 정도 친구처럼 영화도 보고 연락도 하고......”

 

“그걸 공주님께도 얘기했어요?”

 

“예....공주님께서 물어보셔서........”

 

대답을 하는 시경의 얼굴이 어두웠다.

이거 이거 뭔가 감이 왔다.

공주님 또 오지랖 넓게 뭐라고 얘기했을지 눈에 선했다.

 

“혹시, 은시경 씨, 그 여자분 많이 좋아했어요?”

 

“예? 아닙니다. 절대. 그런 건.

그냥....사귈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상대 쪽에서 전 아니라고 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그냥 그렇게 친구처럼 지냈습니다.”

 

“은시경 씨가 직접 대시를 했다구요?”

 

“그건 아니고, 친구들이 잘 해보라고 하니까, 상대방 쪽에선 아니라고 한 거였습니다.”

 

“그럼, 왜 계속 만났어요?”

 

“그쪽에서 자주 연락도 했고, 친구처럼 지내다보니.......”

 

혜원은 뭔가 감이 왔다.

이 군인 남자가 그 여자와 어떤 사이였는지, 또 이 얘기를 듣고 공주님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게다가 그 반응을 보고 이 군인 남자는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지,

안 봐도 뻔했다.

 

하여튼, 이재신, 너도 좀 당해봐야 돼.

이 오지랖, 어휴~~~!

 

“안 봐도 알겠네요. 공주님 분명 답답해했을 테고, 자기가 있었으면 다리를 놨네 안 놨네 했을 테고,

그거 보면서 은시경 씨는 속이 뒤집어졌을 테고.......”

 

군인 남자, 아무 말이 없다.

역시...이재신 일을 쳐도......어휴.....

그러면서도 이 군인 남자는 창밖으로 공주님만 바라보고 있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눈이 애잔하다.

그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영혼의 주인이, 저기 있다고, 말이다.

아무도 그녀를 대신할 수 없다고, 말이다.

목숨을 거는 사랑을 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니 미워도 도와줘야겠다고, 혜원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가지 말고 그냥 여기 있어요.”

 

“예?”

 

“내 말 들어요. 오늘, 이재신 공주님 한 번 테스트 해봐야겠네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공주님을 테스트하다니......”

 

“그런 게 있어요. 저 둔팅이는 이렇게 해야 돼요.

그러니까, 그냥 앉아 있어요, 은시경 씨는.

지금부터 은시경 씨는 공주님 쪽 쳐다보면 안 돼요.”

 

“예?”

 

“그냥 날 봐요.”

 

“이유가, 뭡니까?”

 

“내 말 들어요. 적어도 내가 공주님과 당신, 한 달 상황 만들어 준 거 같은데....

아니에요?”

 

그건 사실이었다.

혜원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그렇게 공주님을 잡고 애원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그냥 사라져야 된다고 생각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믿어요.

난, 당신과 공주님, 제발 잘 되길 바라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니까........”

 

시경은 그래도 불안한 듯, 갈등을 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혜원의 말을 듣고 있었다.

혜원이 자신과 공주님 사이를 지지해주고 있다는 걸, 사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공주님, 오늘 좀 이상했어요.”

 

“예? 어디 불편해 하신 거라도 있으셨습니까?”

 

시경은 자신이 뭔가 놓친 건가 싶어서 순간적으로 불안해진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니니까 걱정 말아요. 그런데 이상해요. 여러모로.

바로 이곳으로 오지 않은 것도 이상하구요.

아까 화장실 간다고 일어설 때도 이상했고.

여자의 직감으로는 확실해요. 공주님 마음에 변화가....아니지, 스스로 눈치 채기 시작하는 단계 정도랄까요?”

 

“무슨...........?”

 

어쩌겠나, 이 남자, 분명 눈치는 없는 것 같다.

아니다. 어쩌면 자신의 감정이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자신의 감정의 깊이 앞에서, 저렇게 달려나가기만 하는 감정 앞에서

상대의 감정을 살필 여력도, 여유도 없을지도 모른다.

 

“보지도 못한, 게다가 남자가 사랑한 것 같지도 않은 여자에 대해서 질투를 할까요?

아니면, 자신이 알고 있는, 너무나 좋아하는 어떤 여자에 대해서 질투를 할까요?

그리고 그 여자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그 여자는 현재 자신의 눈앞에 남자와 함께 있어요. 어떨 거 같아요?”

 

시경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누가 누구를 질투하고 있는지는 확실했다.

 

“방금 얘기한 걸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뭐가요?”

 

“사실은.....아까 공주님께서 제 예전 상황을 물으셨을 때, 제 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도저히 공주님의 첫사랑을 물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도저히 질투가 나서 물을 수 없다고, 공주님께서 떠올리시는 것만으로도 힘들다고,

그래서 물을 수 없다고, 그것이 공주님과 제 차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요?”

 

“사실은......그 말은....제 투정이었을지 모릅니다.”

 

“그 때를 떠올리는 것도 싫다?”

 

“............예.”

 

“공주님이 기억하지 못해서....그런 거예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첫사랑과의 일은 기억하시면서, 저와의 일은....기억하시지 못하시니까.......

그게 저를 질투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제게는 있는 추억이라는 것이 공주님께는 없는 거니까요.

함께 기억하지 못한다면, 추억이라 말할 수 없으니까요.

추억은 함께 공유하는 거지, 혼자만의 것은 아니니까, 제 추억조차 빼앗긴 것 같습니다.”

 

“은시경 씨, 지금부터 만들어가도 늦지 않아요.”

 

“예. 압니다. 머리로는 충분히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고, 또 공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것도, 정말 벅차도록 감사합니다.

그런데.......이상우 씨를 떠올리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이런 마음이 터지고 맙니다.

추억은 관계를 만들죠. 나눌 수 있는 관계, 떠올려보는 관계.......

그런데 제게는 그게 사라진 겁니다.

나눌 수도 없고, 떠올린다 한들, 저 혼자 하는 상상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건 이미 추억이 아닌 거죠.”

 

“추억을.....질투하는 거군요.”

 

“그럴지도.....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살다 보면 다른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자신에게는 그 사람과의 관계가 쌓이고, 기억이 되고, 결국엔 세월에 묻어 추억이 된다.

그러나 상대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추억이 될 수 있을까.

아무리 세월에 묻어 쌓아둔다 해도, 착각이지 않았을까 하고 의심하게 되지 않을까.

스스로도 혼란스러워지지 않을까.

마치 혼자만의 꿈을 꾼 것처럼.......

백일몽처럼,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고 바스러지는 먼지 같이 사라져버리는 기억처럼 말이다.

 

“은시경 씨, 두려워하지 말아요.

당신은, 내가 만나 본, 공주님의 남자들 중에서 대적할 사람이 없어요.”

 

“예?”

 

시경의 얼굴이 조금은 찌푸려진다.

아, 그렇군. 공주님의 남자들.......

 

“뭐예요? 공주님의 남자들이라 그래서, 또 질투하는 거예요?

뭐가 이렇게 정직해요? 하기야, 은시경 씨는 운명 같은 사랑을 하고 있으니, 모든 남자가 적이죠?

걱정하지 마요.

공주님은 공주님이에요. 늘 곁에 남자들이 있었어요.

그러나 단 한 번도 공주님, 심각하게 만나신 적 없어요.

그게 더 마음 아파요. 마음을 다 주지 못해요. 공주님은.........”

 

마음을 다 주지 못해요. 공주님은......

 

그 말이 자꾸만 시경의 가슴을 쳐댄다.

그러나 내게는.....내게는.......

 

 

공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자신은 그렇게 가볍게 사람 만나지 않는다고, 장난으로 사람 만나지 않는다고.......

싫증내실 거라고, 지겨워지실 거라고, 장난감 취급당하고 싶지 않다고 어리석게도 두려워하는 내게 공주님은 아니라고,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왜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말씀하셨었다.

믿지 못했다.

그 때는......

공주님의 마음을.....전혀....믿지 못했다.

내 사랑이 너무 커서, 버려지는 순간을 견딜 수가 없어서 시작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은시경 씨 당신은 특별해요.

공주님이 바닥까지 내려가서 다 내려놓고 잡은 사람이, 은시경 씨, 당신이에요.”

 

“.........그건......예전의.....일입니다. 현재가 아니라........”

 

혜원이 시경의 팔을 툭 친다.

 

 

“이거 보세요. 근위대장님. 예전에 반했다면, 지금도 반할 수밖에 없어요.

공주님이, 한 달 만나자는 거, 장난인 거 같아요?

단 한 번도 그런 적 없었어요. 공주님은 이미......시작됐어요.

당신이 공주님 남자들 중 갑이라니까?”

 

혜원이 자신을 보며 웃고 있다.

마치 그 미소가 자신에게 격려를 해주고 있는 것 같다.

공주님께서 돌아오실 거라고, 자신을 다시 돌아봐 주실 거라고.......

감추려고 해도, 수줍은 미소가 올라온다.

 

 

 

 

띠딩.

시경의 휴대폰에 문자가 도착했다.

 

문자를 살펴보던 시경의 얼굴이 심하게 굳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미 그 자리에 공주님은 안 계셨다.

달려 나가려던 찰나, 현영이 들어와서 앉았다.

 

“공주님께서는........”

 

“먼저, 들어간대요.”

 

“예?”

 

“은시경 씨는 더 있다가 오라던데요?

참, 문자 한다던데 안 왔어요?”

 

<은시경 씨, 피곤해서 나 먼저 들어갈게요.

은시경 씨는 더 놀다가 와요.>

 

 

알 수 없는 차가운 바람이 시경의 가슴을 얼려버렸다.

방금 전까지 설레던 마음은 이미 사라지고, 자꾸만 심장이 얼어가는 것만 같아서 시리기만 한다.

 

 

 

 

3

 

 

 

아침부터 시경은 재하의 방에서 시달리고 있었다.

근위대원들 조례 이후, 재하는 또다시 시경을 불러들여, 일본 쪽 정보통과 연락해보라며 성화였다.

그쪽 우익들이 혹시 예전 클럽 M과 연결되고 있는 건 아닌지 뒷배를 알아보라며 일거리를 안겨주고 있었다.

그 때 재하에게 전화가 왔다.

 

“아, 안녕하십니까? 장회장님께서 어쩐 일로.....”

 

“예. 저희야 뭐 그렇죠.”

 

“예? 재신이요? 아, 예. 재신이 수술 결과가 좋아서...

뭐 그래도 아직 재활 중입니다만........”

 

재신이라는 말이 재하의 입에서 나오자, 그때부터 시경은 계속 긴장이 되고 있었다.

뭘까...장회장.....혹시 L그룹의?

왜 그 그룹 회장이 아침부터 전화가 와서 공주님 안부를 묻는 것인가.

촉은 자꾸만 안 좋은 쪽으로 발달되는 것 같다.

 

“아, 상우 말씀이세요?

하하하하....상우는 그냥 제 친구죠. 자꾸 스캔들 나서 큰일인데요?

예전부터 소꼽친굽니다. 재신이하고는 친남매에 가깝죠.”

 

갑자기 재하의 얼굴이 심하게 찌푸려지고 있었다.

 

“예. 그럼요.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아주 많이 도와주셨더군요.

덕분에 왕실이 튼.튼.해질 것 같습니다.”

 

재정지원을 언급했다?

그것도 아침부터 국왕전하께 전화까지 해서?

이건 뭔가 요구할 게 있다는 건데.......

시경의 심장이 자꾸만 쿵쾅쿵쾅 뛰어대기 시작한다.

뭘까........

 

“예. 뭐, 아직까지는........애가 좀......그렇죠. 예.예.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늘 이렇게 대한민국 왕실을 신경 써주셔서........그럼.......”

 

재하는 전화를 끊자마자 휴대폰을 책상 위로 던져버린다.

 

“전하!!!”

 

“이것들이.....!!! 아 짜증나!”

 

재하는 계속 분이 안 삼켜지는 듯, 씩씩대고 있었다.

뭔가 공주님과 연관된 일 같은데, 시경은 도저히 물어볼 수가 없었다.

 

똑똑.

 

“뭐야?”

 

“전하, 지금 조반 준비가 다 끝나서, 다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 알았어. 야, 은시경!”

 

“예?"

 

"너도 가자.”

 

“아, 아닙니다. 전......”

 

“시끄러워. 너도 따라와. 너도 못 먹었잖아, 아침부터 나한테 시달린다고.

내가 아무리 악덕 사업주라도, 밥은 먹여줘야지. 따라와.”

 

더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시경은 공주님을 뵐 수 있다는 생각에 재하를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영선과 항아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재신은 시경이 따라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놀란 듯 바로 얼굴을 숙여버렸다.

 

“저기, 재신이 옆에 앉으면 되겠네.”

 

재하가 시경을 재신이 옆에 앉혔다.

앉으면서 재신을 흘낏 보지만, 재신은 숟가락을 들고 연신 밥만 먹고 있을 뿐이었다.

 

“야, 이재신, 너 굶었냐? 오빠가 왔는데 보지도 않냐?”

 

“봤거든? 밥 좀 먹자. 늦게 온 사람이 누군데......”

 

“여튼...저거저거.....”

 

재하가 뭐라고 더 궁시렁대려다, 항아가 무섭게 노려보자 바로 깨갱하며 자신도 숟가락을 들었다.

 

“참, 이재신, 너 선볼래?”

 

“푸흡~!!!! 뭐?!!!!!! 켁켁”

 

재신은 밥 먹다가 사래가 들린 듯, 연신 기침을 하며 물을 마셨다.

시경은 재하의 말에도 놀랐지만, 재신이 기침을 하자, 그게 더 걱정이었다.

 

“얘는.......뭘 그리 급하게 먹다가 사래가 들리고 그래?”

 

영선은 걱정되는 듯, 재신의 등을 두드려준다.

 

“어...엄마. 이제 괜찮아.

무슨 소리야? 오빠. 뭔 선을 보래?”

 

“그래, 재하야. 갑자기 선이라니, 무슨 얘기니?”

 

영선도 의아하다는 듯, 재하를 바라본다.

 

“L그룹 장 회장이 자기 막내 아들이랑 선보잰다.”

 

시경이 조용히 숟가락을 놓았다.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다.

아까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선......이었구나.

왕실에 기부한 것에 대해서 그렇게 얘기를 해댈 때는 분명 대가를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공주님......에 대한 요구였다니.......

 

“그게 무슨 소리니? 상우는 어쩌고?”

 

“상우라니 엄마? 아직....둘이 그런 사이도 아니고, 또 재신이 마음도 모르고......

그런데 스캔들이라도 나면 안 되지.

게다가 장 회장도 상우 얘기 묻던데.......”

 

“그래...그렇긴 하네.

재신아, 니 마음은 어때? 선 볼 거야?”

 

영선이 재신에게 묻는 순간,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재신의 입술을 향해 있었다.

재신의 오른편에 있는 남자는, 타들어가는 가슴으로 재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재신은 그를 향해 얼굴 한 번 돌리지 않았다.

 

“에휴....내가 이번에 너무 나섰나봐.”

 

“그걸 이제 알았냐? 그래서 선, 볼래 안 볼래?

장 회장 꽤 집요하던데......왕실 기부까지 들먹여서 내가 열 받아서 확~하려다 겨우 참았다. 어휴.....”

 

“생각....해볼게......”

 

“오올~ 이재신. 너, 살짝 정치적이다?”

 

“그렇지 뭐.”

 

그 순간이었다.

 

시경이 일어섰다.

 

“어, 은시경!”

 

“죄송합니다. 전하.

할 일이 있어서 저는 먼저 일어서겠습니다.”

 

“뭐야? 밥도 거의 안 먹었잖아?”

 

“아닙니다. 충분히... 먹었습니다.

대비마마, 왕비마마.......공...주님......

먼저, 가보겠습니다.”

 

식당을 나와 시경은 정신없이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쾅........

 

책상을 내려친 오른쪽 주먹이 뒷골이 일어설 만큼 얼얼하다.

이내 벌겋게 부어오른다.

아픔이 느껴지고서야 겨우 정신이 든다.

 

마치 지뢰밭에 서 있는 것 같다.

한 발도 제대로 내딛을 수가 없다.

온 천지가 지뢰였다.

폭발해 버릴 것 같은, 그 위험한 지뢰밭 속에 자신 혼자 버려진 것만 같다.

 

 

 

 

4

 

 

 

 

공주님께 하루 종일 연락이 되지 않았다.

솔직히 아침부터 시경 스스로가 정신이 없었다.

아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L그룹과의 선이야기로, 시경은 이미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 사이 공주님은 재활치료를 받으시러 병원에 가셨고, 시경은 재하가 아침부터 맡긴 임무를 처리하느라 자신을 혹사시키고 있었다.

 

사실 재신을 만나 물어보고 싶었다.

어제 왜 혼자 가셨는지.....왜 자신에게 같이 가자고 하시지 않았는지.......

아무리 피곤하셨더라도 자신에게 얘기하셨을 텐데......

뭔가 마음에 안 드신 건지, 이래저래 걱정이 되고 있었다.

 

공주님께서 궁으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자마자, 시경은 바로 궁으로 돌아왔다.

공주님의 방 앞까지 갔지만, 피곤해하신다는 궁중실장님의 말을 들으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니 재활 훈련을 매일 하고 계시니 안 피곤하실 수 없겠다 싶기도 했다.

그렇게 공주님을 뵙지 못한 채, 아침이 왔고, 식당에서 선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식당에서 먼저 일어서 버린 게 무례하지 않았나 싶어, 시경은 오후가 되자, 공주님께서 돌아오시는 대로 찾아뵈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루종일 안절부절 못하던 시경은 공주님께서 돌아오셨다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공주님의 방으로 찾아갔다.

 

“죄송합니다. 근위대장님. 공주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 저, 잠깐만 뵐 수 없을까요?”

 

“공주님께서, 근위대장님이든 그 누구든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쉬셔야 할 듯합니다.”

 

“혹시, 몸이 많이 안 좋으신 겁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쉬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궁중실장님은 자신의 할 말은 끝났다는 듯,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틈틈이 쉴 때마다 공주님 방으로 와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같은 대답이었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결국 그렇게 하루가 가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시경은 식당에 오실 공주님을 기다렸다가 만나야겠다 싶어서 식당 앞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그런데 공주님은 오시지 않았다.

이미 이른 아침에 방에서 식사를 하시고, 오후 행사 때문에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병원으로 향하셨다고 했다.

그때부터였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벌써 만 하루 반이 지나도록 공주님과 대화조차 나누지 못했다.

이틀 전, 공주님께서 혼자 궁으로 돌아가신 이후, 공주님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어제 아침 식당에서 뵈었던 것도 전하께서 같이 가자고 하시지 않으셨다면,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그곳에서도 공주님은 내게 단 한 마디도 하시지 않으셨다.

아니 시선조차 마주치려 하시지 않으셨다.

 

설마.....피하고....계신 건가....나를.........

 

입술이 바짝바짝 타고 있었다.

목이 따끔따끔거렸다.

설마......공주님께서, 나를 피하신다고.......?

왜, 도대체 왜?

 

공주님께서 병원에서 돌아오시는 시간까지 시경의 심장은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 어떤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재하의 닦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알아야만 한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지.......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지......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공주님께서 돌아오셨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뛰어갔다.

말리는 궁중실장님의 말도 듣지 않았다.

영창을 가도 좋았다.

근위대장이 무례하게 공주님의 방을 침범했다고 해도, 그래서 이 직을 놓아야 한다고 해도,

뛰어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거부를 한다 해도, 그녀가 들어오지 말라고 명령을 한다고 해도,

그 명령을 어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를 보지 못한다면, 죽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녀의 허락도 없이, 나는 그녀의 공간 안으로 침범해 들어갔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미안....해요.........”

 

“공...주...님.........”

 

재신은 시경의 시선을 피한 채, 또다시 대답이 없다.

 

“...............뭐가.......말씀이십니까?

도대체...뭐가....미안하시다는 겁니까?”

 

두려움....그래 두려움이었다.

공주님께서 나를 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바로 달려오고 싶었다.

그러나 그만큼 오고 싶지 않았다.

혹시 이 말을 듣게 될까봐......

혹시 이 말을 하실까봐, 도저히 올 수가 없었다.

 

지금도.....보고 싶어 죽을 것 같은 마음만 없었다면, 여전히 나는 저 말 때문에 오지 못했을 것이다.

 

“공주님.....한 달이라고 분명, 약속 하셨지 않습니까?”

 

“은시경 씨....지금...무슨 소리하는 거예요?”

 

“이제......그만.......하시고 싶으신 겁니까?”

 

시경은 참고 참았던, 아니 마음 저곳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의구심을 결국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난.....난....그런 뜻이.....아니에요.”

 

“그러면, 도대체.....왜 이러시는 겁니까?

제가.......뭘....잘못한 거라도,

마음에 안 드시게 행동한 거라도, 있는 겁니까?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공주님.”

 

“그런 ...거...아니에요.”

 

“공주님!!!!”

 

“은시경 씨......그냥...잠시만, 정말 잠시만, 나....내버려두면 안 돼요?”

 

“안 됩니다!!”

 

“은시경 씨.....”

 

“잠시라고 하셨습니까?

공주님께는 잠시겠지요.

제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십니까?

공주님께서 분명 한 달이라고 하셨죠.

저는 하루 하루 지나가는 게 지옥 같습니다.

공주님과 같이 있을 수 있는 날들이 하루씩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 마음을 아십니까?

점점 생명이 줄어드는 것 같은, 그 마음을.....공주님께서...아십니까?”

 

“은시경 씨....난..난......”

 

“공주님의 마음과 제 마음은 다릅니다.

공주님은 한 달....그저 지나가면 그만이실 겁니다.

제게는......제게는요, 공주님.

이 한 달은.....하아.......제 평생........가장 붙잡고 싶은.....시간입니다.

또 돌리고 또 돌려서라도, 이 시간을 붙잡고 싶습니다.

시간을 흐르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지는 태양을 붙잡아서라도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

 

시경의 한숨이 깊다.

한숨 속에서도, 숨소리 속에서도 그의 고통이 오롯이 배어나온다.

 

“그런데 잠시라고 하셨습니까?

그 잠시가, 제겐.....잠시가 아닙니다.

이렇게.....또 하루가 지나가 버렸습니다.

생명이 꺼져가듯이, 시한부의 삶처럼, 그렇게 하루가.........또 지나가버렸습니다.”

 

“미안해요...........”

 

탄식과 같은 그의 말 앞에서 재신은 미안하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그것이 더 시경을 미치게 했다.

 

“얘기해주세요. 왜 이러시는 건지.........

알고 싶습니다. 아니, 고치겠습니다. 공주님. 제발.......알려주세요.”

 

시경의 마음은 어쩌면 다른 말을 외치고 있었다.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은......제발 자신을 버리지 말아달라는......

제발 자신을 내치지 말아달라는 애끓는 애원이었다.

 

“하아........내 탓이에요.

전부 다 내 탓이에요.

나도....혼란스러워서......뭘 어떻게 해야 할지....나도 정말....모르겠어요.”

 

그곳에는 시경만큼이나 혼란스러운 재신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있는 한 여자 때문에 심장이 타들어가는 시경이 있었다.

 

 

 

 

 

5

 

 

 

 

“언니, 나 먼저 가야겠어.”

 

창 너머로 시경과 혜원을 바라보던 재신이 갑자기 현영을 향해서 던진 말이었다.

 

“그래? 그럼, 내가 은시경 씨한테 얘기할.....”

 

“아니야!!!! 얘기하지 마!!!”

 

“뭐?”

 

현영은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가려던 걸음을 멈추었다.

 

“나 혼자 갈게. 저 사람은 더 있다가 오라고 해.”

 

“무슨 소리야? 왜 너 혼자만 가겠다는 거야?

한 달간 만나는 사이기도 하지만, 저 남자, 너 호위하는 근위대장이잖아.”

 

“지금......은 근무시간 아니잖아.

내가 가자고 해서 온 거지.

그리고.......잘....놀고 있는데, 나 때문에 가자고 하긴.....싫어.”

 

“재신아........”

 

“언니 미안, 잠깐만......”

 

재신은 건너편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근위대원 두 명에게 오라고 손짓을 한다.

그러자 바로 달려와서 재신에게 고개를 숙였다.

 

“나, 지금 바로 갈게요.”

 

“그러면 근위대장님께 저희가 연락을.....”

 

“아니, 아니에요. 근위대장님은 볼일이 있어서, 나만 먼저 갈게요.

나 먼저 가는 거 알면, 근위대장님도 불편하실 테니, 아직 보고하지 말아요.

내가 따로 연락할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바로 이쪽으로 차 대기시키겠습니다.”

 

차를 기다리는 동안, 현영은 새로 담배 한 가치에 불을 피우며 깊이 연기를 들이마셨다.

 

“재신아......”

 

“응?”

 

“아까 그 얘기, 은시경 씨에게 해주고 싶기도 했지만.....사실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었어.”

 

“무슨 소리야?”

 

“드러내지 않고 그렇게 꽁꽁 숨기니까 곪아 터지는 거야.”

 

“무슨 소리냐니까?”

 

“은시경 씨는, 살아 돌아오면서, 뭔가 변화되고 있는 거 같아.

그런데 너는......아니야.”

 

“뭐?”

 

“넌......쿨한 척, 괜찮은 척하고 있지만, 넌 그저 꽁꽁 싸매고 있을 뿐이야.

어쩌면, 재신아, 넌 2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하지 못했어.

걷게 되었지만, 여전히 걷지 못해.

니 마음은 여전히 2년 전에 갇혀 있는지도 몰라.

겉으로만 괜찮은 척하고 있을 뿐, 니 상처에서 넌 단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어.”

 

그 때 차가 바로 앞에 와서 섰다.

멍하게 서 있던 재신이 근위대원이 다가오자, 그대로 차에 타버린다.

 

“재신아!!!”

 

“갈게. 미안해. 잘 얘기해줘.”

 

“난 니가 더 걱정돼.

재신아, 사람은 쿨할 수 없어. 그게 사람이야.”

 

“오늘 고마웠어. 나 갈게.”

 

재신은 마치 못 들은 척, 웃고 있었다.

그러나 현영은 알고 있었다.

지금 재신은 마치 파티에 나온 공주님처럼 자신에게 미소 짓고 있다는 것을........

그 예의 공주님 가면을 쓰고, 왕실의 테두리 안으로, 재신은 또다시 가장 안전한 울타리 안으로 숨어버렸다.

 

 

 

 

6

 

 

 

 

재신은 자신의 지금 심정을, 이 감정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니 자신이 지금 왜 이렇게 가슴이 무거운지, 왜 이렇게 심장에 돌이 매달린 것처럼 답답한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게 기분이 나쁜 건지, 아니면 체한 건지, 그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

 

궁에 도착하자마자 그도 역시 따라왔다.

문밖에 있는 걸 알았지만, 도저히 그를 만날 수 없었다.

 

재신은 생각했다.

피곤해서 그래. 피곤하면 예민해지잖아. 자고 나면 괜찮을 거야. 자고 나면.......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다.

머리가 찌끈 거릴 지경이었지만, 잠은 오지 않고, 결국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고 말았다.

피곤한 몸으로 식당에 앉아 아침을 거를까 말까 고민하는 와중에, 그가 들어왔다.

은시경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 무거운 체기는 더욱 강하게 몰려왔다.

머리가 마치 바닥으로 깔리는 듯했다.

그러나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들어가지도 않는 밥을 마치 기계처럼 꾸역꾸역 입으로 밀어넣고 있었다.

 

그 때 오빠가 선을 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가 나를 뚫어지게 보는 것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도저히 바라볼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기분이 뭔지, 왜 그의 눈을 바라볼 수 없는 건지 그 어떤 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이 자리를 피하고 싶다, 그 생각 하나뿐이었다.

그 때, 그가 먼저 일어나서 나가버렸다.

 

나를 부를 때는......주저 주저 하듯이, 그러나 뭔가 목이 메어오는 듯이, 천천히 부르고 있었다.

그가 공...주......님이라고 나를 부르던 목소리가 자꾸만 귓속을 울려대고 있었다.

 

“나도 먼저 나갈게. 재활가야 돼서......”

 

“너, 요즘 왜 그렇게 재활 열심히 하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일은 무슨 일....그냥......열심히 하면 좋은 거잖아.”

 

“이상하잖아. 수술 성공한 지가 언젠데, 이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왜 지금 갑자기 이렇게 그야말로 미친 듯이 재활 치료를 받는 건데?

왜, 신경 쓰이는 누.구. 라도 생긴 거야?”

 

“그런 거 아니라고!! 나 바빠.”

 

재신은 당황한 듯 얼버무리며 목발을 짚고 밖으로 황급히 나왔다.

재하는 뭔가를 안다는 듯이 자꾸 이상하게 웃고 있었다.

 

재신이 목발을 짚으며 방으로 돌아가는 동안 수행 궁인 둘이서 계속 수다를 떨어대고 있었다.

 

“야, 아까 봤니 봤어?

근위대장님.........느무~ 멋지더라.”

 

“내 말이......정말 젠틀하시잖아.”

 

“넌 좋겠다. 오늘 계탔다 계탔어!!! 아, 부러워!!”

 

“그러게 그렇게 친절하시다니....목소리도, 넘~좋지?”

 

두 궁인의 이야기를 아닌 척하고 듣고 있던 재신이 갑자기 목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앗, 공주님.”

 

“무슨 일이길래, 계탄 거예요? 나한테도 애기해 주지?”

 

“아, 그게......아까 근위대장님께서 제가 미끄러질 뻔하는 걸, 잡아 주셨어요.”

 

그 순간이 다시 떠오른 듯, 그 궁인은 얼굴이 빨개졌다.

 

“그리구요. 글쎄, 괜찮으시냐고, 발 다치신 건 아니냐고, 막 물어보시더라구요.

전 옆에서 부러워 죽을 뻔 했어요.”

 

“그렇게.....근위대장님이 괜찮아요?”

 

“아니, 공주님 아시잖아요.

지금 근위대장님 인기, 궁 안에서 최고예요.

저번에도 말씀드렸었는데.......궁 안 최고의 상남자라구요.”

 

“신기하네. 잘 웃지도 않고, 말도 잘 하지 않는 무뚝뚝한 군인이 왜 인기가 있을까.”

 

“아유~ 공주님 모르는 말씀마세요.

아까도 얘 잡아주시면서, 미소 지으신 거 보셨으면, 어휴.....진짜......정말 뻑이 가요. 공주님.”

 

“근위대장님이.......웃었다구요?”

 

재신은 믿기지 않았다. 진짜 잘 웃지 않는 남잔데, 자신도 이 남자가 웃는 걸 몇 번 본 적이 없는데

궁인들에게는 그렇게 실실 잘 웃고 다녔나 보다.

 

“그럼요. 게다가 얼마나 말씀도 따뜻하게 해주시는데요?

무뚝뚝하시다는 건, 진짜 아니에요. 늘 저희한테 말도 잘 걸어주시고, 수고한다고 꼭 말씀해주시고....

여튼 너무너무 좋아요.”

 

“음.....왠지 듣고 보니 바람둥이 같은데?

여자들한테 웃어주고, 친절하고......관리 하는 거 아니에요?”

 

“공주님~~ 그런 관리라면 계속 당하고 싶어요. 완전 완전 좋아요.”

 

“저, 근데 공주님.....”

 

아까 자신을 잡아주었다고 말한 궁인이 조심스럽게 재신을 불렀다.

 

“얘기해요.”

 

“저, 진짜......근위대장님...그...공주님 친구분과 애인 사이세요?”

 

“네? 무슨 소리예요? 아니에요 그런 거.......”

 

“그죠? 아니죠? 어휴~~! 다행이다. 전 진짜 사귀시는 줄 알고.......”

 

“그 때 보자마자 안은 것 때문에 루머가 퍼졌나 보네.

살아 돌아온 걸 보고 혜원이가 감격해서 그런 거예요.

절~대 사귀는 거 아니에요.”

 

“소문 난 거........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공주님.”

 

“응? 그럼, 뭐가 또 있어요?”

 

“그게요. 사람 눈빛을 보면, 감정이 느껴지잖아요.

공주님 친구분과 근위대장님 같이 계신 거 보면, 좀....그런 게 느껴지더라구요.”

 

“그런...거....라니......뭐가......?”

 

“근위대장님께서 유독 공주님 친구분과 계실 때, 훨씬 편해 보이세요.

저희한테도 친절하시지만, 은근 예의를 많이 갖추시거든요.

그런데, 공주님 친구분께는 좀 더 편해 하시는 거 같았어요.

뭔가 오래된 친구나...연인 같이요.”

 

다른 사람들 눈에도 그렇게 보였나 보다.

나만의 착각은 아니었던 거야.

갑자기 재신의 숨이 자꾸만 차올라오는 듯했다.

 

“어, 공주님, 얼굴이 붉어지셨어요?

어디 안 좋으세요? 얼굴 표정도 안 좋으신데......”

 

“아니에요. 피곤해서 그래.

빨리 방으로 가야 되겠어요.”

 

속이 자꾸만 답답했다.

재활을 가서도, 돌아와서도, 잠을 못 자서 그런지, 가슴이 자꾸만 묵직했다.

정말 돌을 가슴에 매달아놓은 것 같았다.

 

의사 선생님도 물었다.

무슨 걱정 있느냐고.......

얼굴에 그늘이 가득하다고.......

 

걱정.......

도대체 무슨 고민이 나를 이렇게 만드는 걸까.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걸까.

 

그가 몇 번이나 찾아왔다.

그러나 그 때마다 그를 돌려보냈다.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볼 수가 없었다.

뭔지 알 수 없는, 기분 나쁜 무언가가 내 속에서 자꾸만 꿈틀대고 있었다.

 

그렇게 또 하루가 가고, 그는 막무가내로 방으로 들이닥쳤다.

 

 

 

 

 

7

 

 

 

 

“하아........내 탓이에요.

전부 다 내 탓이에요.

나도....혼란스러워서......뭘 어떻게 해야 할지....나도 정말....모르겠어요.”

 

“도대체 뭐가..... 공주님 탓이라는 겁니까?”

 

그의 목소리가 고통스럽다.

그의 고통이 오롯이 재신에게도 느껴진다.

그래도 재신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공주님!!!”

 

시경은 어느 새 소파에 앉아 있는 재신의 앞에 와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재신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재신의 두 손을 잡았다.

그제야 놀란 재신의 눈이 시경의 눈과 마주쳤다.

 

“말씀해 주세요. 공주님.

저 이러다, 정말 숨막혀 죽을 것 같습니다.

제가....고치겠습니다. 제발......말씀해 주세요.”

 

무엇을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지금 이렇게 피하고 싶은 이 감정을, 이 상황을 말해야 할까.

내 바닥이 드러날까 두려운 이 상황을, 그저 피하고픈 이 상황을 말해야 할까.

생전 처음 느껴보는 이 기분 나쁜 실체를 자꾸만 감추고만 싶은데,

그는 자꾸 내게 드러내라고 한다.

 

그래도 이 남자 앞에서, 이토록 애절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 남자 앞에서

정직하게 조금은 나를 드러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내 스스로도 잘 모르겠는 이 마음을....이 상황을......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싶었다.

 

“은시경 씨.....나, 쿨해야 한다는 강박이......있나 봐요.”

 

“예?”

 

“나는 공주니까 괜찮아, 라고.....나는 왕실의 일원이니까, 나는 로열패밀리니까......

늘 괜찮아.....이렇게 자꾸만 괜찮다고 말하는......그런 강박이 있는 거 같아요.

사실.......강박인지 몰랐어요.

그저 쿨하려고 노력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정말, 괜찮아...라고 여러 번 반복하고 나면, 괜찮아지곤 했어요.

너그러워야 한다고, 쿨해야 한다고, 그렇게 나를 다독이면, 그렇게 되는 것 같았어요.”

 

시경의 손이 재신의 손을 좀 더 힘주어 잡았다.

마치 힘들었겠다고 위로하는 듯이, 시경은 아무 말 없이 재신의 손을 꼭 잡아주고 있었다.

그 손이 따뜻했다.

어쩌면 그래서 재신은 조금 더 자신을 보여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 근데.....지금.....내 바닥을 보고 있는 거 같아요.”

 

“무슨...말씀이세요? 바닥이라니요?”

 

“나........쿨해지지가 않아요.”

 

“공주님......”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쿨해지지가 않아요.

자꾸만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무겁고, 잠이 안 오고, 화가....나는 거 같아요.”

 

그래, 쿨해지지가 않는다.

늘 나는 괜찮다고 말해왔던 것들이, 전혀 말을 듣지 않는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무엇이 이토록 불편한 것일까.......

그 실체를 들여다보는 것도 내게는 버겁다.

 

그의 눈은 정직하다.

눈빛만으로도 그의 마음이 보인다.

그는 내게 온통 자신의 마음을 다 내놓는다.

어떻게 이렇게 투명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영혼까지 보여주는 이 남자 앞에서, 나는 또 무엇이 이토록 못마땅한 것일까.

난 무엇을 이토록 믿지 못하는 것일까.

 

어쩌면, 의심하는 것이, 내게 습관처럼 박혀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묻고 싶다.

그에게, 내 이 불편한 마음을 드러내고 싶다.

 

“내가...불편해요?”

 

“공주님...전........”

 

“그럼 내가 편해요?”

 

“.........편하지는....않습니다.”

 

“그럼, 불편한 거네.

다른 사람들은 다 편한데, 난 불편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많이 웃어줬어요?”

 

그래, 이것이 내가 피하려던 바닥이다.

이 말을 피하려, 그를 보지 못했던 거였다.

말하고 나서야, 툭 튀어나오고 나서야, 그제야 알 것 같다.

내가 불편했던 이유, 내가 피했던 이유, 이것이었다.

 

“예?”

 

“어쨌든 난 불편하다는 거네.”

 

“공주님은.......편할 수가 없습니다. 제게......”

 

“무슨 말이에요?”

 

“공주님을 보고 있으면, 긴장이 됩니다.

자꾸 심장이 뛰고, 가슴이 두근거려서, 떨리기만 합니다.

저도.......편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떨리는 것만이라도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공주님 앞에서 조금은 덜 바보 같을 텐데........

공주님께 바보 같아 보일까봐, 자꾸....걱정이 됩니다. 전......”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편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건지도 모른다.

 

“그럼.....자꾸 관리하는 건, 하지 마요.”

 

“예, 관리라니요? 공주님.”

 

“은시경 씨, 팬 관리 한다던데?

궁인들한테 막 친절하게 웃으면서?”

 

결국에는 내놓고 말았다.

이 남자를 보지도 못하고, 재신은 얼버무린다.

 

“공주님!”

 

시경의 눈빛이 조금은 기대에 찬 듯 흔들린다.

그리고 이내 재신의 손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 눈을 감았다.

한참 그렇게 눈을 감고 있던 시경이 눈을 떴다.

여전히 그의 입술은 재신의 손에 머물고 있었다.

 

“공주님.......”

 

“왜요?”

 

재신은 여전히 시경을 보지 못한 채로, 약간은 새초롬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웃는 게......싫으십니까?”

 

“................”

 

“대답해 주세요. 싫으십니까?”

 

“...........그런......거........같아요.........”

 

하아..........

 

시경의 입에서 또다시 깊은 한숨이 터져나왔다.

 

“공주님..저......심장 터질 것 같습니다.”

 

“네?”

 

“더 묻지 않을 겁니다.

그냥 제 마음대로 생각하겠습니다.

공주님께서.......질투 하신 거라고........

그렇게 제 마음대로 생각할 겁니다.”

 

“..................”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입을 뗄 수가 없다.

아니라고, 그런 거 아니라고,

그러고 싶은데, 재신은 이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자신이 없다.

 

 

그 때였다.

 

똑똑.

 

“들어와요.”

 

“공주님 준비하셔야 됩니다.”

 

궁중실장님이 정색을 하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시경은 아까 정신없이 들어온 게 민망해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어요. 은시경 씨도 가봐요.”

 

 

 

 

 

 

 

 

8

 

 

 

“드레스는 이걸로 할까요?”

 

궁인들이 내온 드레스들은 하나 같이 얌전하고 조금은 정숙해 보이는 옷들이었다.

뭐, 예전 같으면 과감한 걸 입었겠지만, 다친 이후로 재신은 노출이 적은 정숙해 보이는 옷들을 고르고 있었다.

그저 피트하게 몸에 붙어서 실루엣을 살려주는 정도로 만족하고 있었다.

평상시대로 약간 디자인만 다른 옷을 고르고는 준비를 하고 있는데, 재하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이, 준비 잘 돼가?>

 

“뭐야? 갑자기? 새삼스럽게.”

 

<요즘 잘 나가시는 이재신 공주를 위해서 내가 특별히 최고의 호위를 보내주지.>

 

“무슨 소리야?”

 

<은시경 보내준다고.>

 

“어? 왜?”

 

<왜는 무슨 왜야? 너 오늘 폐회 인사 니가 해야 되잖아.>

 

“근데?”

 

<야, 너 오빠한테까지 속이냐?

저번에 나랑 걷는 연습할 때보다 더 늘었다며?>

 

아, 김인훈 선생님과 통화했구나. 싶었다.

 

<단상까지 혼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던데?

옆에서 부축만 해주면, 아니야?>

 

“잘 모르겠어. 거기 단상이 어떤지 상황에 따라 다르지.”

 

<내가 알기로, 거기면 꽤 괜찮아.

무대처럼 뒤에 휘장이 있어서, 그쪽에서 나오면, 단상까지 열 걸음이면 될 거야.

게다가 계단도 없고.....

그 정도면 너, 목발 없이 되잖아.>

 

계단만 없으면 가능도 하다.

갑자기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어쩌면 단순히 일어선 모습이 아니라, 목발을 짚은 모습이 아니라

아주 천천히더라도 걷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은시경 보낸다고.

너 아무나 잡고 못 가잖아.>

 

오빠의 말은 그거였다.

의사 선생님이나 오빠 외에 나를 잡고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은시경 씨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빠가 이러는 거였다.

 

“알겠어. 해볼게. 근데 안 될지도 몰라.”

 

<은시경이라면, 니가 중간에 버벅대더라도, 어떻게든 단상 위에 세워줄 거다.>

 

 

아, 어쩌면 정말 걷는 모습을 전국민들에게 보여드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모습이 누군가에게 희망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람이라면, 내가 실수하지 않도록 해줄 것이다.

재신은 두근두근대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흰 드레스를 여며 입기 시작했다.

 

“아, 잠깐만요.”

 

“예? 공주님? 뭐 불편하신 거라도.....”

 

“혹시 지금 시간 돼요? 얼마나 남았어요?”

 

“이동하시는 데 식장 안까지 들어가시는 것까지 생각해서 잡으면 1시간 정도니까

아직 30분 정도는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면, 나 옷 다른 거 고를게요.”

 

“예? 지금요?”

 

“네. 지금 드레스실에 연락해서 새로 들어온 드레스들 다 올려 보내라고 하세요.”

 

“예? 예. 알겠습니다.”

 

 

급하게 올라온 드레스들은 앞서 골랐던 드레스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한동안 계속 정숙한 스타일들만 고수했더니, 들어오는 드레스들도 거의 그런 것들이었다.

 

“다 비슷하네요.”

 

“아, 공주님, 근데 이 옷은 뒤가 좀 달라요.”

 

가져온 궁인이 검정 드레스를 들어 앞뒤를 보여주니, 확실히 앞 스타일과 뒤 스타일이 확연히 달랐다.

뒤는 확실히 파격적이었다.

 

“이걸로 할게요.”

 

“진짜 이걸로 하실 거예요?”

 

“응.”

 

공주님의 갑작스러운 선택에 옆에서 시중들던 궁인들도 궁중실장님도 놀라고 있었다.

요즘 재활도 열심히 하시고, 식사도 많이 하셔서 그런지, 확실히 핏은 예전보다 훨씬 좋았다.

왜 갑자기 평상시와는 다른 드레스를 입으시는 건지 알 수 없는 채로 궁인들은 공주님의 준비를 도울 뿐이었다.

 

숄을 걸치고 현관으로 내려가자, 시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재신을 위해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고, 시경은 운전석 옆 자리에 탔다.

가는 내내 둘은 아무 말도 없었다.

재신은 궁금해졌다.

이 남자, 이 옷을 보면 뭐라고 할까.

평상시 스타일대로라면, 굉장히 보수적일 거 같던데........

 

연회장에 도착하니 이미 기자진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시경이 재신이 내릴 수 있도록 부축해주자, 재신은 숄을 벗어서 시경에게 건넸다.

숄을 받아들던 시경이 순간 얼어붙은 듯, 심각한 표정으로 재신의 드레스를 보고 있었다.

 

아마 가슴 부분에 타원형으로 파인 걸 보고 그러는 건가 싶었다.

이건 약관데........

재신은 시경의 팔을 잡고 밖으로 나와서는 기자들을 향해서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기자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지고 있었다.

대한민국 공주님의 귀환이었다.

예전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공주님의 귀환이었다.

시경은 그제서야 재신의 등이 완전히 드러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시경의 얼굴은 굳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더니 시경의 손을 잡고 몇 걸음 걷던 재신을 꽉 잡은 채, 멈춰 선다.

 

“왜 그래요? 은시경 씨?”

 

“숄을.....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왜요?”

 

“이건...좀......아닌 것 같습니다.”

 

시경의 얼굴이 잔뜩 굳어져 있었다.

아니 굳어진 정도가 아니라 인상까지 쓰며 찌푸리고 있는 시경의 얼굴을 보자, 재신은 이상하게 기분이 상하고 있었다.

 

“뭐가 아닌데요?”

 

그래도 사진 기자들을 의식해서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재신이 묻지만, 시경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공주님께서 입으실 의상으로는.......격에....안 맞는 것 같습니다.”

 

격?

순간 재신의 기분이 확 상하고 말았다.

지금 내게 격을 따지고 있는 거야?

재신은 뭔가 울컥 올라오는 마음으로 알 수 없는 오기로 말을 뱉고 말았다.

 

“왜요? 안 예뻐요?”

 

“예? 아니....그런 건 아니지만...이건.....”

 

“은시경 씨 보여주려고 입었는데.......

아니지, 벗었다고 해야 하나?”

 

“공주님!”

 

시경이 당황한 듯 눈이 커지는 게 뻔히 보이지만, 재신은 애써 얼굴을 돌리며, 예의 미소를 지었다.

포토존 앞에 휠체어를 가져올 때까지, 재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시경의 팔에 의지한 채,

마치 예전 다치지 않았던 화려했던 어느 날처럼 그렇게 도도하게 서 있었다.

 

 

 

 

 

<이윤지 갤러리 ㅇㅇ횽 짤_ 감사합니당, 혹시 안 되시면 얘기해주세염, 바로 내리겠슴돠 (__)>

 

 

 

경제 포럼은 지루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어차피 그들 모임은 그저 형식적인 것이었다.

그들의 우호를 다지고, 왕실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뭐 그런 것.

그리고 약간의 정치적인 행보 같은...그런 것들이었다.

그러나 재신이 이곳에 참여한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재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재하의 노력이기도 했다.

제주 평화 포럼 때 확실하게 인지도를 올린 재신을 확실히 띄워주기 위한 퍼포먼스에 가까웠다.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을 때, 약간은 이슈가 되고 있을 때, 재하는 또 다른 이슈를 기획하고 있었다.

어차피 왕실은 이미지 싸움이었다.

약간의 쇼가 가미된 이미지와 홍보의 싸움.

그러니 지금보다 더 적절한 때는 없었다.

재신이의 재기는, 대한민국 왕실의 재기처럼 보일 것이다.

지금은 재신이 어디를 가든, 전세계의 언론들이 주목하고 있었다.

잘만 이용한다면, 얼마든지 이슈가 되고도 남았다.

그걸 왕실과 통일 정책에 잘 이용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인지도를 쌓고, 영향력을 쌓았을 때, 그 사람의 한 마디는 여론 몰이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그런 인물을 왕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보탬이 될 수밖에 없다.

절대적인 지지, 게다가 장애를 딛고 일어난 희망의 아이콘이 된, 죽지 않는 영혼, 죽일 수 없는 영혼으로

어마어마하게 포장되고 있는 재신이라면,

재신이의 입지를 좀 더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가장 중요할 때, 대한민국을 위해서 재신이의 한 마디는, 재신이의 행보는 사용될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재하는 끊임없이 이미지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 아니라, 사실은 감성적인 동물이라는 것을 재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재신도 너무나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재하가 원했던 쇼는 폐회 인사였다.

단상 뒤, 휘장이 쳐져 있는 곳에서 단상까지 걸어가는 데 열 걸음.

그곳에서 걸어나오는, 이제 휠체어도, 목발도 던지고, 오로지 자신의 걸음으로 걸어나오는 쇼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윤지 갤러리 ㅇㅇ횽 짤_ 감사합니당, 혹시 안 되시면 얘기해주세염, 바로 내리겠슴돠 (__)>

 

 

 

 

재신이 포럼장에 앉아 있는 동안도, 대부분의 남자들의 시선은 재신을 향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 드러난 너무나 색스러운 등과 가슴부터 흘러내리는 아름다운 곡선은 남자들의 혼을 빼놓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벽 쪽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시경의 가슴은 자꾸만 타들어갈 뿐이었다.

공주님은 마치 작정하고 오신 것 같았다.

빛이 없어도 공주님께는 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

공주님 때문에 주변은 모두 어둠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그 빛 앞에서는 감히 반짝일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근위대원들조차 멍하니 공주님을 쳐다보다가 시경에게 주의를 듣기까지 했다.

추잡스러운 회장이라는 늙은 여우 같은 놈들도 공주님의 몸을 훔쳐보고 있었다.

공주님은 그들을 향해서도, 하나하나 미소를 지어주고 계셨다.

너무나 당연한 거지만, 공주님께서는 당연히 그러셔야 하지만, 싫었다.

저런 미소를 띠는, 저런 웃음을 지어주는 공주님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공주님의 옆에 앉아 아예 대놓고 공주님의 등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S그룹의 신임 사장은 정말 한 대 쳐주고 싶기까지 했다.

몇 번이나 울컥해서 발이 움직이려는 걸 억지로 참고 있었다.

정신차리라고, 제발 정신차리라고, 집중해보려고 해도, 시경의 가슴은 자꾸만 끓어오르고만 있었다.

 

포럼 마지막 발표가 시작되자, 시경은 휠체어를 가지고 가서 공주님을 태워 밖으로 나왔다.

무대 형식이 독특했다.

단상 뒤 휘장 뒤로, 입구와 연결된 문이 있어서, 입구에서 바로 단상으로 나올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공주님은 입구에서 단상 뒤 휘장 안에 잠시 계시다가, 그곳에서 단상으로 열 걸음 걸어나오셔서 폐회사를 하시면 되었다.

그리고 인사를 하실 때는 다들 돌아서 입구로 걸어오는 동안, 역시 바로 휘장 쪽에서 기다렸다가 입구로 바로 나가 서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전하는 이 모든 걸 계획하고 이곳을 쇼의 장소로 생각했던 것이다.

확실하게 실수하지 않고, 공주님의 귀환을, 재기를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구조였다.

 

시경은 휠체어를 밀고 입구 밖으로 나가서 다시 단상과 연결이 되어 있는 문을 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공간이 좁았다.

휠체어가 들어가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접이식 작은 간이 의자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휠체어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여기 잠시 서 계시다가 걸어 들어가셔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응. 괜찮아요.”

 

재신은 시경의 부축을 받아 일어서서는 휘장 안으로 들어가자, 시경도 따라 들어와서 입구와 연결되어 있는 문을 닫았다.

휘장 사이로 슬쩍 보니 거리는 확실히 가까웠다.

열 걸음이 안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

 

시경이 뒤에서 재신에게 숄을 덮어준다.

 

이 남자도...참.......

 

“나갈 때는 안 할 거예요.”

 

“예.”

 

 

 

생각보다 마지막 순서가 빨리 끝나서 재신은 시경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바로 단상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재신이 환하게 웃으며 걸어나오자, 다들 일어서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영웅이 된 대한민국의 공주님이 자신의 장애조차 이긴, 그야말로 인간 승리의 아이콘으로 전세계에 이름을 새기게 된 순간이었다.

 

단상에 무사히 도착해서 재신은 폐회의 말을 간단히 하고 인사를 했다.

사실 말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오늘의 쇼는 성공적이었다.

아마 내일 모든 헤드라인은 공주님의 기적으로 나갈 것이었다.

조금은 과장과 허위가 있는 쇼였지만, 그렇다고 거짓도 아니었으니, 재하가 계획한 이 쇼는 확실히 성공적이었다.

이것이 곧 왕실의 재기로 이미지화될 것이다.

또한 재하는 철저히 그것을 이용할 것이다.

다시 돌아서 휘장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재신은 흔들리지 않으려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헉헉.......”

 

휘장 안으로 들어오자, 재신은 입구와 연결된 문에 기대어 숨을 헐떡였다.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요. 조금...힘들어서....

생각보다 걷는 게 힘들어서요.

나 괜찮았어요? 안 흔들렸어요?”

 

“예. 아주 잘 걸으셨습니다.”

 

“그래도 너무 느렸어요. 뭐, 첫술에 배부르겠어요?

다음엔 스피드를 좀 빠르게 하도록 연습해야겠어요.”

 

“지금도 충분하십니다.”

 

시경은 작은 접이식 의자를 펴서 재신을 앉히며 숄을 걸쳐주었다.

 

“어휴, 어쨌든 잘 끝나서 다행이에요.

오빠가 원하는 대로 그림이 나왔을래나......”

 

“많이 힘드시면, 나가셔서 휠체어에라도 앉아계시는 것이......”

 

“아니에요. 쇼는 확실히 해야 돼요.

나중에 인사 다 끝나고 휠체어로 이동하더라도, 입구에서는 서 있는 게 나아요.

조금만 참으면 사람들 올테니까..... 그리고 이 의자로도 충분해요.”

 

“아, 잠시만요. 공주님.

그래, 말해.”

 

인이어로 근위대원의 보고가 들어오고 있었다.

 

<근위대장님. 입구 가기 전에 서명하는 목록이 있어서,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그래 알겠다. 근처까지 오면, 바로 연락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뭐래요? 입구 쪽으로 다 왔대요?”

 

“아닙니다.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그래요?”

 

양문으로 되어 있는 입구 문은 커텐이 쳐져 있어서 밖에서는 안을 볼 수가 없었다.

한쪽 문은 고정된 채 있고, 다른 쪽 문으로 출입을 하는데, 혹시나 싶어서 반쪽을 살짝 열어두고 있었다.

어차피 커텐이 쳐져 있으니 누가 있는지를 밖에서는 모를 일이었다.

 

그 때 갑자기 문틈 사이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재신이 급하게 일어서면서 숄이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주울 생각도 없이 재신은 커튼 사이로 밖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소리만 들릴 뿐,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 때 궁인이 입구 쪽으로 다가와서 재신에게 알렸다.

 

“공주님, 조금 더 계셔야 될 것 같아요.”

 

“그래요? 그럼 오기 전에 나한테 바로 얘기해줘요.”

 

“예. 걱정 마세요.”

 

궁인이 멀어지는 걸 보면서 재신은 한숨을 쉰다.

 

“어휴. 의외로 오래 걸리네. 그래도 언제 올지 모르는데........”

 

그래도 불안한 듯, 커텐 사이로 밖을 살피던 재신은 치마를 밟은 듯 휘청이고 말았다.

그러자 시경이 바로 뒤에서 재신의 허리를 잡아 넘어지지 않도록 단단하게 받쳐주었다.

여기까지는 정상적이었다.

분명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재신이 비틀거렸으니, 넘어지지 않도록 근위대장이 붙잡아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재신이 이미 균형을 잡고, 한 쪽 팔로 문을 잡고 지탱하고 있는데도, 시경은 여전히 재신의 허리를 뒤에서 잡고 있었다.

그 순간부터 조금씩 공기 가운데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 다 얼어붙은 상태로 그 상황을 유지한 채, 서로의 호흡을 굉장히 가까이에서 느끼고 있었다.

 

 

 

 

 

<이윤지 갤러리 ㅇㅇ횽 짤_ 감사합니당, 혹시 안 되시면 얘기해주세염, 바로 내리겠슴돠 (__)>

 

 

 

등으로 차가운 금속이 느껴졌다.

그의 자켓에 달려 있는 단추인 듯했다.

 

그제서야 재신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좁은 밀폐된 공간에서, 등이 훤히 드러난 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그 여자의 허리를 꽉 안고 있는 한 남자.

 

하아.........

 

그녀의 귀로 그의 숨소리가 지나간다.

이상했다.

뭔가 간질간질한 기분.........

야릇하기도 하고, 간질거리기도 해서, 도망가고 싶은, 피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간질거림이 온 몸을 헤매고 다니고 있기도 했다.

조금씩 숨이 가빠져 오고 있었다.

곧 사람들이 나올 텐데.......

놓아달라고 해야 하는데......

 

그러나 재신은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뛰고 있었다.

그 심장 소리 사이로 그의 숨소리가, 조금은 거칠어진 그의 한숨이 자꾸만 섞여들고 있었다.

 

흡!!!!!

 

그때였다.

부드러운 무언가가 그녀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순간적으로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녀는 한쪽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알 수 없는 소리가 입속에서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그를 부를 수도 없었다.

자꾸 목구멍 사이로 갸르릉 거리는, 신음 소리가 흘러나올 것만 같아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부드럽고 뜨거운 그의 입술이 어깨 위에 내려 앉아 입맞추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불이 나는 것 같았다.

 

그 날이 떠올랐다.

벽장에 숨어 있었던 그날.......

애써 숨겨 왔던 그날의 진실.......

그도 나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해 왔던 진실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날.....그는 내 어깨에 입술을 대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어쩌다 보니 닿았을 거라고, 애써 아니라고 끊임없이 설득했다.

 

그러나 오늘은....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의 입술이 서서히 등의 선을 따라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다리는 이미 후들후들 떨리며 휘청거리고 있었다.

이러다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비틀대자 그녀의 허리를 감은 손에 더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머리 끝까지, 발가락 끝까지, 자꾸만 간지럽고 저릿한 감각들이 흘러다니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만큼, 감각은 솟아올라오고 있었다.

이런 감각들이 내게 존재했었는지 전혀 알지도 못했던 그런 감각들이었다.

그의 입술이 흐르는 대로, 재신의 감각도 흐르고 있었다.

 

밖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데도, 시경은 여전히 재신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등에서 입술을 떼지 못했다.

 

“은....시....경.....씨.....”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서 재신은 억지로 입을 뗐다.

그러나 떨려 나오는 목소리는 감출 수 없었다.

 

순간 그의 입술이 등에서 떨어졌다.

안도감과 알 수 없는 아쉬움을 동시에 느끼며 재신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또다시 재신은 신음소리를 뱉고야 말았다.

이번에는 자신도 방어할 수가 없었다.

 

“하아..하아......”

 

시경의 손이 자신의 등을 천천히 훑어내려가고 있었다.

등 전체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등의 근육과 뼈와 매끄러운 살결을 그의 손은 하나하나 탐닉하며 만져보고 있었다.

저릿했다.

발가락이 간질거려서, 자꾸만 저 안이 서걱거려서 낯뜨거운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얼굴에 자꾸 열이 올라오는 것 같다.

 

그 순간이었다.

 

“공주님, 거기 계세요?”

 

“네? 네. 있어요.”

 

“이제 곧 나오시면 될 거 같아요.”

 

“알았어요. 고마워요.”

 

아까 왔던 궁인이 바깥 상황을 알려주고는 다시 문에서 떨어졌다.

후끈거리던 공기가 갑자기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열은 여전히 얼굴에 남아 자꾸만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 때 시경이 재신에게 숄을 걸쳐주었다.

 

재신은 그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로, 입구로 나갔다.

 

얼굴이 발그레한 공주님이 그들을 향해서 웃음짓고 있었다.

아까보다도 더 아름다웠다.

아니, 아름답다는 말보다 더, 뭔가 약간은 색기를 품은 듯이 색스러워보였다.

남자들이 공주님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온몸에서 알 수 없는 분위기가 풍겨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기사는, 그저 애만 타고 있을 뿐이었다.

 

 

 

 

돌아오는 길, 아무 말이 없었다.

아니 둘 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궁에 도착해서 휠체어에 공주님을 태울 때도, 시경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밤 공기가 차가워 자신의 겉옷을 벗어 공주님의 어깨에 걸쳐주었을 뿐,

문 앞까지 공주님을 모셔다 주면서도, 시경은 단 한 마디도 없었다.

또 됐다는 말조차, 안 춥다는 말조차 할 수가 없어서, 재신은 시경이 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두고 있었다.

 

재신은 고민하고 있었다.

잘 가라고 하면 될까....수고 했다고 말하면 될까.......

그의 눈은 또 어떻게 보며, 또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도 어색했다.

 

시경은 재신의 방까지 휠체어를 밀고 따라 들어왔다.

 

“.....은..시경 씨, 수고했어요.”

 

재신은 방에 도착하자 휠체어에서 내려, 은시경을 쳐다보지도 않고 인사를 건넸다.

도저히 못 보겠으니, 빨리 가달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러나 은시경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따라 들어온 궁중실장님도 뭔가 이상했는지, 그럼 쉬시라는 말만 남기고 방을 나갔다.

방에는 둘만 남아 있었다.

그래도 은시경은 마치 그 자리에 얼어붙은 것처럼, 아니 화난 사람처럼 서 있었다.

 

아, 옷......

 

그제서야 재신은 자신의 어깨위에 걸친 그의 옷을 생각해냈다.

 

“아, 내가 옷을 안 줬군요. 고마워요.”

 

재신은 어깨위에 걸친 옷을 벗어 그에게 건넸다.

그의 손이 천천히 옷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받아서 가겠거니 하는 그 순간, 그는 옷을 잡는 것이 아니라 재신의 팔을 잡아 당겼다.

 

아........

 

 

 

 

 

 

 

 

 

 

 

 

그의 옷이 바닥에 떨어지는 그 순간, 이미 시경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입술을 훔치고 있었다.

거칠게 다가오는 입술이었다.

숨을 쉴 수가 없어서 그를 밀어내보지만,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뒷걸음치면, 그는 몇 걸음 더 잡아당기며 다가왔다.

어느 새 재신의 등은 벽에 닿고, 그는 재신을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집요하게 그녀의 입술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의 혀는 자꾸만 도망치려는 그녀의 혀를 잡아서 자꾸만 얽혀들며, 그녀를 흥분시키고 있었다.

등에 입술을 맞췄을 때처럼 그녀의 온몸으로 저릿한 무언가가 자꾸만 흘러다니고 있었다.

그는 자꾸만 그녀의 감각을 깨웠다.

부드러운 입술이 얽혀들고, 뜨거운 혀가 감싸이면서 그녀의 목구멍 사이로 자꾸만 신음을 뱉게 만들고 있었다.

마치 알지 못하는, 다른 여자의 신음 소리처럼, 그녀의 귀에 아득하게 들렸다.

입이 맞춰지는 소리, 혀가 얽히는 소리, 그리고 거친 숨 사이로 뱉어지는 야한 신음 소리......

소리들이 자꾸만 그들을 더욱더 흥분시키고 있었다.

 

더 이상 숨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밀어붙여질 때쯤, 시경이 겨우 입술을 놓았다.

그것도 아깝다는 듯이 몇 번이나 입술을 다시 붙들며, 입술 언저리에서 자꾸만 맴돌고 있었다.

입술이 자꾸만 겹쳐지는 채로, 입술이 서로 닿인 채로, 서로의 숨을 나눠가졌다.

 

하아...하아......

 

살짝씩 부딪치는 입술 사이로 재신의 자극적인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아..........

 

그 순간 그의 손이 천천히 재신의 등을 위에서 아래로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녀가 놀라 입술을 벌리는 만큼, 그의 입술과 자꾸만 스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허리의 잘록한 부분까지......거의 엉덩이의 윗부분으로 내려오는 맨살까지.....쓰다듬는 손길에 재신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자지러질 듯이, 숨이 턱턱 막혀왔다.

 

하아..........

 

자신도 모르게 색스런 신음이 뱉어지지만, 그녀의 입술이 열리면 열릴수록 그의 손은 좀 더 그녀의 매끄러운 살결을 탐하고 있었다.

그녀가 입술을 움직여 신음을 뱉을수록, 그는 그런 그녀의 입술과 자신의 입술을 부딪치며 그녀의 몸을 탐할 뿐이었다.

 

서로의 입술이 살짝 떨어진 채로.....그러나 여전히 입술은 부딪치면서...그가 그녀의 입술 위에서 거친 숨소리를 뱉어내었다.

 

“다시는........이렇게 입지 마세요. 공주님.......”

 

놓기 싫은 듯 그녀의 붉은 입술에 다시 입을 맞추고는 나가는 은시경........

 

그리고 방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재신은 그 자리에서 스르륵 미끄러져 주저앉고 말았다.

 

 

 

 

 

 

 

 

 

 

 

 

 

 

------------------------------------------------------------------------------------

 

 

 

1.

드디어 제 블로그 방문자수가 40만이 넘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으로 이벵을 생각하다 결국 <당기못>을 생각보다 일찍?(죄송합니다ㅠㅠ 제게는 진짜 일찍입니다 흑....) 가지고 오게 되었네요.

사실 제가 지금 가져오면 안 되는데, 이걸 쓰면 안 되는데......

뒷일은 에라 모르겠다 두 눈 찔끈 감아 버렸습니다.

잠 며칠 안 잔다고..죽는 건 아니더라구요. ㆅ

 

결국 제가 미쳤어요. 미쳤어.

이번에도 52장.....저 진짜 어쩝니까....ㅠㅠㅠㅠㅠ

단편 이벵은 할 수 없고(당분간 <당기못> 집중입니다. ㅠㅠㅠㅠ)

당기못의 은신이 자꾸만 저를 꼬드기고,

여러 가지 와중에 결국 이렇게 일폭탄은 나몰라라 하고 이렇게 가지고 와버렸습니다.

 

그래도 칭찬해주실 거죠?

 

아마 이번까지만 이렇게 분량이 많고, 다음부터는 조금 줄일 것 같습니다.

(반드시! 꼭! 그래야 할 겁니다. 흑.......)

 

2.

이번 회는 사실 순서를 잘 생각하시면서 읽으셔야 할 듯합니다.

첫 장면은 현영과 같이 만난 이후 이틀이 지난 시점입니다.

그리고 2번부터 시경의 관점으로 현영과 만난 시점부터 다시 과거의 일이 이어집니다.

4번의 상황이 바로 첫 장면의 상황이지요.

5번부터는 재신의 상황입니다. 현영과 만난 시점부터 첫 장면까지 다시 이어집니다.

 

혹시나 노파심에서 순서를 밝혀봅니다.

 

3.

예전에 제가 올린 글 기억하실 분들도 계실 텐데요.

<은신과 잡담>에 <너무 아름다우신 거 아닙니까 공주님>이라는 글에서

이 드레스를 입은 공주님을 그리려고 했다는 걸 아셨을 겁니다.

여기에 들어갔습니다.

아시다시피, 시놉은 아주 오래 전에.........

 

4.

심심풀이로 해보는 은시경 배틀을 왜, 21회 때 했는지 22회를 읽으신 분들은 아실 듯합니다.

은소령, 정말......속 터졌을 듯합니다.

제가 느려서 그런 거지, 진정 은소령은....그렇지 않았다능요.....

여튼 참 절묘한 타이밍에서 은신통신을 해서........ㆅㆅㆅ

의외로 더 재미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기억나시죠? 제가 막 답답해했던 글.......

은소령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던 그 글......

아시다시피, 이 시놉은....이미........처음 시작할 때부터 있었다는 것을.....

단지 제가 느렸던 것뿐이라지요.

저조차도, 너무 느려 시놉으로 뒷얘기를 읽으며 마음을 다독였다는......

 

여튼.......이제......천천히....시작되고 있달까요.....

 

 

설이네요.

설 행복하고 즐겁게 잘 쇠시길.......(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