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17
<배경음악>
1. 더킹 ost - Dead line
2. 더킹 ost - Breach
3. 더킹 ost - 타는 마음
4. 더킹 ost - Lovely Yours
1
공주님...나의 공주님...
재신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깨고 나서야 그 목소리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는 이 남자의 것이란 자각이 든다.
몸을 추스르며 침대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어둠이 익숙해지고 나니, 곁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눈을 감고 앉아 있지만, 그의 자세는 변함이 없었다.
그의 성품을 말해 주는 강직한 어깨도 주먹을 쥔 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져 있는 그의 손도 모두 그가 고지식한 군인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굳게 닫혀 있는 그의 눈, 뭔가 긴장한 채 미간에 주름을 만들고 있는 그의 짙은 눈썹, 날카롭게 솟아 있는 그의 코와, 그의 고집이 느껴지는 굳게 다문 입술, 베어낼 듯한 그의 턱이 재신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의 모습을 뚫어질 듯 바라보던 재신의 가슴 속에 든 의문은 하나였다.
그가 살아 있나.....
두려움.
아 그러한 단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심연의 어두운 발작이었다.
또다시 심장이 경련을 일으키듯이 뛰었다.
마치 발작하듯이 뛰어대는 심장 때문에 재신은 숨도 제대로 못 쉰 채, 왼쪽 가슴을 꽉 누르고 눈을 감았다.
고통이 싸하고 지나가고 나서야 재신은 겨우 다시 눈을 떴다.
그랬다. 그것은 고통이었다.
심장을 발작시킬 만큼 격렬하게 움직이는 고통.
그 어떤 것도 기억나지 않지만, 간헐적인 조각난 편린들로는 그것을 ‘기억’이라고 부르기도 어렵지만,
무의식은 그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놈을 안았을 때, 재신은 모든 것을 놓았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최소한의 희생과 최대한 효과라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진실을 그녀는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 죽음은 대한민국의 국익에 당당한 역할을 해줄 것이며, 앞으로 진행할 오빠의 통일 정책에 엄청난 힘을 실어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앞일이 창창한 이 젊은 남자들의 인생도 구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재신은 그렇다고 믿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자신을 놓을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가 재신을 밀치는 순간,
그리고 그가 폭탄을 감싸고 그 남자를 덮고 있는 그 순간,
그게 아니라는 것을, 머리끝까지 서던 그 섬뜩하다 못해 심장을 멈추게 만드는 충격을 느낀 순간 알게 되었다.
심장이, 섰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파르르하고 떨리던 심장이 겨우겨우 비틀어 짜듯이 겨우 펄떡거리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심장이 멈추었었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다.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지만, 재신에게 그 순간은 영겁의 시간과 같았다.
귀에는 공기가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 모든 것이 웅웅대고만 있었다.
그런 것이었다.
나도 알지 못하는 어느 순간에, 내가 겪은 경험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심장이 더 이상 뛸 수가 없어서 겨우 파르르 떨릴 뿐 경련을 일으키는 고통이라는 것.
그래서 숨을 쉬고 싶어도 숨을 쉴 수가 없어서, 폐가 팽창하다 못해 터져버릴 것 같은 느낌.
그것은 ‘고통’이 아니었다. 그것은 ‘죽음’ 그 자체였다.
재신은 분명 협상의 법칙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아까 그곳에서 재신은 생각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배운 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이성적으로 반응했다.
몇 번이나 곱씹으며, 테러범의 상황을 알아채려 노력했다.
그리고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처음부터 그는 심한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살고 싶은 의욕도 없었고, 오로지 복수 그 자체에만 몰두해 있었다.
자신이 지금 살아있는 이유는 은시경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오로지 단 하나의 집념, 그것밖에 없었다.
심지어 은시경을 죽이려는 것도 아니었다.
은시경에게도 자신의 고통을 선사하겠다는, 어떻게 보면 어이없는 복수.
분명 재신은 그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이 어떻게 복수가 될 수 있을까.
그렇게까지 해서 그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재신은 무엇보다도 먼저 근위대원들을 생각했다.
그들이 섣불리 총을 가지고 덤벼들지 않도록, 총을 던지게 했다.
적어도 근위대원들이 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만큼 테러범은 마음이 느슨해질 수밖에 없다.
테러범은 자기가 모든 키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
그 또한 노릴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재신은 무력한 장애인일 뿐이니 그에겐 위협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만큼 테러범은 긴장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은시경이 나타나면서부터 사태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아니, 재신 스스로의 마음이 조급해졌는지도 모르겠다.
근위대원들은 섣불리 움직일 것 같지 않았지만, 은시경은 모른다.
그가 어떻게 나올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아니나 다를까, 놈은 은시경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은시경이 덤벼들도록, 그리고 덤벼드는 은시경을 보면서, 놈은 폭탄을 터뜨릴 심산이었을 것이다.
재신은 그래서 더 심장이 떨렸다.
더 더 냉철하게 사태를 봐야 한다고, 놈이 원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지금 놈이 하려는 일이 절대 복수가 될 수가 없다는 것을 각인시켜야 한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목소리가 떨려나오지 않도록, 니 생각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담담하게, 시크하게 보여줄 수 있도록, 재신은 자신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나는....연극을 하고 있다.
그렇게 자기 암시를 걸었다.
그의 심장과 폭탄은 연결이 되어 있었다.
섣불리 그를 쏘아서도 죽여서도 안 되었다.
다친다면, 그는 서슴없이 리모컨을 눌러 버릴 것이고, 죽어버린다면, 폭탄은 바로 터져서 모두가 죽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창밖으로 레이저 광선이 보이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
저들은 알지 못한다.
지금 이 상황을.
밖에서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겠지만, 이 모든 일은 내 선에서 끝나야 한다.
재신은 몇 번이나 다짐했다.
나만이 이 문제를 풀 수 있다.
어쩌면 그도 시대의 희생양인지도 몰랐다.
환영받지 못하며 태어난 그가 유일하게 인정받은 두 존재를 떠나보내고 나서는 살 이유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는지도 몰랐다.
놈에게 알려야만 했다.
지금 이 짓은 복수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 이렇게 죽는 것이 얼마나 허무하고 어리석은 짓인가에 대한 것을.
스스로 죽는 것이 무력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토록 허무하게 죽어야 하는지,
그것이 왜 복수가 되는지,
그것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지 설득해야 했다.
내가 죽는 것이 은시경에게 아무 복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고,
동시에 내가 삶에 집착이 없다는 것도 보여주어야 했다.
내가 했던 말들이....완전히 연극이었다고만 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놈에게 말하는 동안, 난 나도 모르게 그 감정에 이입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나의 저 깊은 무의식이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어쩌면, 아주 오래 전 어느 날, 난 이런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고.
그러니 이렇게 명예롭게 죽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그 진심이 놈에게 전해졌을지도 모른다.
내가 죽더라도, 그는 눈 깜짝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그리고 난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는 것도,
그래서 같이 죽어주겠다고,
그래서 스스로가 왜 죽어야 하는지, 그것이 왜 복수가 될 수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도록 만들면 되었다.
어머니 같았던 봉봉을 대신해서 그를 안아 주며, 어쩌면 난 삶과 죽음을 반반씩 느끼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신께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서, 이놈은 이미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버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편 이놈이 리모컨을 누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어렴풋이 들었던 것도 같다.
순간 생각했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차라리 다행이라고.
그러나 그 순간에는 몰랐다.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왜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는지. 몰랐다.
바닥에 부딪치며 생긴 상처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심장의 충격은 과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지옥. 그 자체.
죽음. 그 자체.
놈을 안고 있을 때보다도, 놈에게서 떨어져 나와 바닥에 뒹굴면서 죽음이란 게 무엇인지 맛보고야 말았다.
내 눈 앞에 그 사람이 놈을 덮은 채 엎드려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그랬다.
이것이 죽음이구나.
온 세상이 캄캄해지는 이 느낌이 죽음이구나.
고통스럽다고 말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아프다, 죽을 것 같다, 그 어떤 말도 내뱉을 수 없는 지금 이 순간이 ‘죽음’이구나.
그렇게 나는 나의 ‘죽음’을 맞닥뜨렸다.
모든 세계가 멈추고, 시간이 멈추고, 숨이 멈추고, 심장이 멈추는 그 순간.
오로지 심장을 관통하는 예리한 고통만이 살아서 내 모든 신경을 찢어대고 있었다.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눈물도 흘릴 수 없었다.
공기조차 찢어질 듯 비명을 지르고, 내 세포 하나하나가 불에 타서 재가 되는 순간.
알았다.
내가 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
그제서야 알았다.
원망에 찬 그의 눈을 보며 말했다.
“뭐하러 왔어....또 죽으려고? 또?”
그 사람이 물었다.
“왜...그러셨습니까....왜.........”
“당신을.......살리고 싶었으니까..........
또 죽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당신도...........남겨지는 괴로움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으니까...........”
대한민국 공주라는 그 어쩔 수 없는 자리가 잡게 해주었던 마지막 줄을 놓으면서 재신은 생각했다.
그놈이 하려던 건, 진짜 복수였다고.
은시경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자신을 죽이는 것이 왜 복수인지, 자신은 알아버렸다고.
기억을 잃고, 감정을 잃고, 시간을 잃고, 그 모든 것을 잃었지만,
단 하나 저 안 가득 절대로 잊지 못하는 것, 죽어도 잊을 수 없는 그것이 있다는 것을.
그것은 ‘죽음’과 같은 지옥의 고통이라는 것을.
그것만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알아버렸다.
심장이 또다시 경련을 일으켰다.
파르르거리는 심장의 경련이 또다시 재신을 고통스럽게 한다.
흐읍!!!
알 수 없는 공포가 몰려왔다.
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의자에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둠 사이로도 자신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보인다.
그래도 확인하고 싶었다.
지금 이 고통은 과거에 새겨진 고통일 뿐, 현재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의 손이 점점 그의 얼굴로 다가갔다.
그의 볼을 건드리려는 순간, 갑자기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
“아얏!”
그녀의 비명소리가 낮게 울렸다.
“공주님!”
그의 검은 눈이, 심연의 바다와 같이 너울대고 있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자신의 볼 근처에 있는 그녀의 손을 움켜잡고 있었다.
“아!!!”
그녀의 입에서 다시금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나오고서야 그의 손에서 힘이 서서히 빠진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는 않았다.
그녀의 왼손과 팔목을 살펴보던 그가 갑자기 일어섰다.
탁자 옆 구급상자를 가지고 와서는 침대 옆 램프를 켜고 그녀의 팔에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왼쪽 손바닥과 새끼손가락 쪽 옆면은 벌겋다 못해 보랏빛으로 피멍이 들어 있었다.
팔목과 팔꿈치 위쪽으로도 온통 상처로 퉁퉁 부어 있었다.
넘어지면서 왼쪽으로 바닥을 짚은 모양이었다.
소독약을 바르고 연고를 바르는 시경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한숨을 쉬며 입술을 깨무는 시경을 재신은 묵묵히 바라보기만 한다.
“이제 그만해요. 어차피 멍든 거라 연고 안 발라도 돼요.”
“.......................”
시경은 괜찮다는 재신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약을 바르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시경을 지켜보던 재신이 조용히 물었다.
“왜, 여기, 있어요?”
순간 약을 바르던 시경의 동작이 정지했다.
그러나 여전히 재신의 손을 잡고 있다.
“은시경 씨가 왜, 내 방에 있어요?”
재신은 재차 물었다.
그의 눈이 서서히 재신을 향하고 있었다.
약한 스탠드 불 속에서도 그의 눈이 짙어지고 있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숨을.........쉴 수가 없어서요.”
“네?”
하아...........
그의 한숨소리가 온 방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은시경 씨........”
“제 눈으로........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어서요.”
“무슨.......말이에요?”
재신의 손을 잡고 있는 시경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상처 부위가 아파왔지만, 재신은 내색하지 않았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공주님께서........살아계신다는 걸........
공주님께서 숨 쉬고 계신다는 걸........
확인하지 않으면, 제가 죽을 것 같으니까요.”
그의 눈빛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감정의 겹이 한 켜 한 켜 쌓여가고 있었다.
“공주님..........”
가슴 저 안을 건드리는 듯한 그의 낮은 음성이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아까.........하신 말씀, 무슨 뜻인지 여쭤 봐도 됩니까?”
“무슨?”
“기억.........하신 겁니까? 그 말씀.”
그의 음성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기대....그래 기대였다.
“당신을.......살리고 싶었으니까..........
또 죽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당신도...........남겨지는 괴로움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으니까...........”
나를 살리시고 싶었다는 그 말씀.
다시 죽게 하고 싶지 않았다는 그 말씀.
남겨지는 괴로움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는 그 말씀이 계속해서 심장을 두드려대고 있었다.
기억..........나신...........것일까.
어쩌면, 아까 기억하신 게 아닐까.
괴롭더라도, 너무나 고통스럽더라도, 나라는 존재를, 나에 대해 가지셨던 그 감정의 자락을,
기억하신 게 아닐까.
고통 가운데에서도 그 기대는 내 심장을 춤추게 했다.
기억하실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내 앞에서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애써 담담한 척을 하려고 해도 내 심장은 실망감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래........말도 안 되는 기대였다.
“그럼, 아까 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남겨지는 괴로움........그 말씀은 왜 하신 겁니까?”
“Not my mind, but my heart.”
“예?”
“기억은 머리에서 지워진 거지만, 고통은 다른 영역이에요.”
시경에게 잡히지 않은 재신의 오른손이 그녀의 왼쪽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여기, 이곳에 새겨져 있더군요. 당신의 죽음이.”
“!!!!!!!!!!!!!”
“이건 기억이 아니더군요.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아는, 그런 게 아니었어요.
머리로 아니까, 기억이 나서 고통스러운 게 아니더군요.
그건, 심장에 새겨져서 나을 수 없는 상처더군요.”
“공..주님.........”
그래 그랬다. 지금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처럼.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쓰라린 왼손의 상처처럼.
스치기만 해도 죽을 것처럼 펄떡대는 이 심장에 새겨진 고통이 맞다.
“그래서 난 오늘..............2년 전, 어느 날의 어느 순간을, 느꼈던 것 같아요.
당신의 죽음이라는..........그 순간을............
난 그 때 그 순간에, 당신의 죽음을 내 심장에 새겨 넣었나 봐요.
모든 것을 지워도, 이것만은 지워지지 못하게, 문신처럼 새겨 넣었나 봐요."
그것은 살면서 겪는 죽음이라는 고통.
죽음이라는 것을 육체적인 감각으로 평생 겪어내야 하는 형벌.
그것이었다.
시경은 재신의 손을 끌어 당겨 자신의 입술을 대었다.
그의 손의 떨림이 재신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공주님......”
이어지는 그의 음성은 낮게 갈라져서 나오고 있었다.
마치 신음처럼, 그의 고통이 담겨있는 듯, 억지로 소리가 뱉어지고 있었다.
그는...........울고........있었다.
재신에게 자신은 오로지 고통의 흔적일 뿐이었다.
시경은 오늘에서야 자신의 존재가 그녀에게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그것은 문신과도 같은 생채기였다.
나을 수도 없고, 없앨 수도 없는 문신.
오로지 형벌과 같이 주어진 상처의 고통.
공주님에게 자신의 존재는 그런 것이었다.
추억도, 사랑했던 시간도, 감정도 모두 사라지고,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형벌 같은 고통.
그뿐이었다.
자신이 살아돌아와 지금껏 바랐던 것이 얼마나 철면피의 짓이었는지, 여실히 느낄 뿐이었다.
어떻게 내가 감히 그녀의 사랑을, 그녀의 관심을 다시 바랄 수 있는가.
어떻게 내가 감히 다시 기억을 떠올려달라고 떼를 쓸 수 있는가.
그는 오늘 정확하게 알아버렸다.
이 엄청난 깨달음은 순식간에 자신을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감히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감히 자신이 어떤 불경한 마음을 품은 것인지.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딘지, 정확하게 알게 해주고 말았다.
그러나 아무리 그녀에게서 떨어져야 한다고 해도, 마음은 그 거리를 내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또한 시경은 여실히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2
다음 날 아침 일찍, 시경은 어제 마지막까지 공주님과 함께 있었던 7명의 근위대원들을 은밀히 불렀다.
“어제, 여러분들은 근위대원으로서 침착하게 잘 대응했다.
그것은 충분히 칭찬받을 만하다.
그런데, 오늘 난 근위대장으로 여러분들에게 명령이면서 동시에 부탁할 말이 있다.”
그들은 모두 군기가 바짝 들어간 채 근위대장 앞에 서 있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중압감이 그들을 누르고 있었다.
어제 그곳에 있었던 그들만이 느낄 수 있었던 그 무엇.
“여러분은 어제, 공주님께, 목숨을 빚졌다.”
그것이었다.
그들이 느꼈던 중압감은 바로 목숨의 빚이었다.
“어제...공주님께서는......”
시경은 말을 하다가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 말을 하는 것도 힘든 듯 보였다.
“공주님께서 하신 행동은,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서, 희생하신 것이었다.
모두,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또한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주군을 지키지 못하고, 도리어 주군에게 빚을 지고만 상황이었다.
근위대원으로서 그들 하나하나는 한편으로 그들의 가슴을 무겁게 만드는 상황이었다.
그들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들었던 상황.
그러나 그 때, 유일하게 근위대장만 공주님을 위해서 몸을 던졌다.
거기에 있었던 그 누구도 그리하지는 못했다.
그것이 그들을 더욱더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목숨의 빚.
주군과 상관에 대한 목숨의 빚. 그것이었다.
“어제, 테러범이 했던 말들은, 지금 이 시간부로 그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
국가 기밀임과 동시에, 거기에는 테러범 스스로 지어낸 거짓 역시 포함되어 있다.
그 어떤 말도 나가서는 안 되고, 혹여! 밖으로 나갔을 시에는,
지금 여기에 있는 제군들의 목숨을 담보할 수 없다.
입을 여는 순간, 죽기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모두,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그들은 그 어떤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사실 기자들이 와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말했지만, 그 무엇도 발설할 수 없었다.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근위대장이 말한 대로, 그들은 공주님께, 자신들이 지켜야 할 자신의 주군인 공주님께 목숨값을 빚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있었던 모든 일과, 거기에서 들었던 모든 말은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것이었다.
자신들이 입밖으로 내어 감당할 것이 아니었다.
동욱은 어제 그곳에서 자신이 처음 공주님을 보았을 때, 왜 그리 어두운 표정이셨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근위대장과 연관된 일인 줄은 몰랐다.
아니다. 그건 아니다.
뭔가 불안함이 있었다.
근위대장님이 돌아오시면서부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있었다.
아무도 자신에게 정확하게 얘기해주지는 않았지만, 근위대장님과 공주님 사이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이미 두 사람의 공기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나 애써 외면하고 싶었다.
전하께서 근위대장님을 배려하시는 것도, 공주님께서 근위대장님에 대해 신경 쓰시는 것도, 자신의 눈에 두 사람이 자꾸만 서로를 살피는 것도,
모두 외면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그 진실을 목도하고 말았다.
돌이킬 수 없고, 눈 감을 수 없는 진실이었다.
어젯밤 동하에게 자신이 목도한 진실에 대해서 어렵게 입을 열었다.
“염동하 대위님, 아까......두 분......혹시........”
“그래. 니가 오기 전에..........”
“그럼, 아까 테러범이 말한 건, 모두 사실인 겁니까?”
“대체로.”
사실.
두 분이 사랑하시는 관계였다는 것도, 또 공주님께서 기억을 잃으셨다는 것도, 모두 사실이었다.
“그러면, 지금은........?”
“그건, 나도 몰라.
그래도, 김동욱, 니가 거기 끼일 군번은 아니다.
두 분.........그렇게 함부로 생각할 수 있는 가벼운 사이, 아니야.”
늘 건들건들거리며 장난치며 말하던 동하조차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지금 근위대장님은 자신들을 향해서 그 어떤 말도 발설하지 말라는 함구령을 내리셨다.
그 알 수 없는 무게감 때문에 동욱은 근위대장님의 권위에 도전할 수는 없었다.
아니 지금 자신이 품은 이 마음조차,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싶기도 했다.
지난 1년, 아니 그 이전부터 오로지 목표는 공주님이었다.
미국에서 유학하다가 굳이 다시 육사로 들어온 이유도 공주님이었고,
그 난리를 치면서 궁에 들어온 것도, 궁에 들어와서도 제2중대에 들어가겠다고 또 난리를 친 것도 공주님 때문이었다.
자신의 오랜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 자신의 꿈이 거의 실현된 것이라고, 그토록 자신했었다.
적어도 자신은 꿈을 향해서 한 발 한 발 왔고, 어느 순간 그 꿈에 손이 닿을 거라고, 말도 안 되는 희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공주님께서 자신을 보시며 웃으시고, 또 자신을 편해하시는 딱 거기까지.
1년 동안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자신이 아무리 공주님께 마음을 표현해도, 공주님은 딱 그곳에 멈춰 서 계셨다.
아무리 노력해도 더 이상 다가갈 수도 없었고, 또 다가오시지도 않았다.
영국에서 그 날, 공주님을 뵙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나았을까.
그 때 공주님을 향한 동경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지금 이 고통은 없는 걸까.
그러나 동욱은 이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지금 이 남자를, 자신은 죽어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동물적인 본능으로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공주님과 이 남자는 마치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여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자신들도 모르게 서로만 바라보고, 서로만 찾고, 같은 곳을 향해 움직이고, 그래서 결국에는 함께 있어야만 하는 운명.
그 운명의 끈을 동욱은 보고야 말았다.
3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급히 재신의 방으로 들어온 근위대장이 소리를 버럭 지르고 있었다.
궁인들과 근위대원들이 있는 곳에서 근위대장은 대한민국 공주에게 감히 화를 내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서 치장을 끝낸 공주님이 천천히 일어나 근위대장을 향해 돌아섰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유일한 공주가 그 아름다운 위용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웠고, 우아했으며, 위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근위대장님! 오늘 정식 일정대로 진행합니다.”
“절대!! 안 됩니다. 공주님!!!!!”
아침에 잠시 근위대 일정을 조정하고, 지침을 내리고 온 사이, 근위대원 하나가 시경에게 보고했다.
일정 취소라고 얘기하고 있는데, 근위대원 하나가 공주님께서 일정을 그래도 하시겠다며 지금 준비 중이시라는 얘기를 전해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시경은 피가 거꾸로 흐르는 심정이었다.
어제 그 일을 당하시고서도 다시 포럼을 진행하시겠다니, 그건 정말 미친 짓이라고, 시경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가 일정은 취소되었다고 여기고 있었다.
국익, 시경에게는 그 따위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공주님의 안위만이 걱정될 뿐이었다.
어떻게 지금 그대로 진행하실 수가 있단 말인가.
그녀는 왜 이렇게 자신의 안위를, 목숨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잠시 숨을 고르던 재신이 다시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근위대장님. 이번 포럼은 대한민국 통일 정책에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반드시 진행해야 합니다.”
“어제! 그런 일을 당하시고도, 지금 그대로 진행하시겠다는 겁니까?
공주님은 왜! 공주님의 안위를 생각지 않으십니까?”
“근위대장님! 테러범은 어제 잡혔고.
지금 우리는 지금 이 호기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확실하게 대외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적기예요.
그러니까.........”
“안 됩니다. 공주님!!! 잡혔다고 해도,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절대로 참여하셔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은.시.경. 소.령!!!!!”
모두가 공주님과 근위대장의 대화를 들으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근위대장님은 너무나 완강했다.
상대가 공주님이신데도, 전혀 물러섬이 없었다.
원래부터 강직한 분이시니, 자신의 소신대로 하실 분이었다.
왕실의 안위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도 내놓은 분이니, 아마 공주님도 근위대장님의 고집을 꺾으실 수는 없을 거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고 싸해지는 상황에서 어떻게 자신들이 처신하고 있어야 할 지 두 분을 보며 눈치만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바로 그 순간, 공주님은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강하고 건조한, 그러면서도 권위에 가득 찬 목소리로 근위대장의 직위를 부르고 있었다.
근위대장에게 상황을 설명하며 이해를 구하던 그 이전의 목소리와는 확연히 달랐다.
숨을 죽이게 만드는 단호함이 공기를 살얼음판으로 만들고 있었다.
“은시경 소령! 소령은 감히 대한민국보다 위에 있는 것인가!”
“!!!!!!!!!!!!!!!”
“나는 지금 대한민국 국민 이재신으로 여기 서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이곳에, 대한민국 왕위계승서열 1위 이재신으로 서 있는 것이다.
나 역시 대한민국보다 그 위에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감히 일개 근위대가 대한민국 위에 있겠다는 건가!!!”
“공주님!!!!”
“위험하다고? 그래서? 그래서 해야 할 일을 다 팽개치고, 내 의무를 다하지 않고,
대한민국이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다는 인간이, 과연 대한민국의 왕실이라 할 수 있는가?
위험해? 그러면 말리기 전에, 근위대원이면 근위대원으로서의 역할을 해!!!
왕실을 지켜야 한다면, 지켜!!!!
그래서 근위대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해!!!
난, 대한민국 왕위계승서열 1위 이재신으로서 내 의무를 다할 테니까!!!!!!”
“!!!!!!!!!!!!!!!!!”
“국왕전하라 할지라도,
그 누구도 감히 대한민국보다 그 위에 있을 수 없다!!!”
숨을 막히게 하는 권위.
그 어떤 토도 달 수 없게 만드는 권위였다.
니가 감히 대한민국보다 위냐는 말씀에 시경은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지금 니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말씀하시고 계셨다.
공주님은 왕실의 권위로 말씀하시고 계셨다.
누구든지 그 권위를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말씀하고 계셨다.
대한민국 왕위 계승 서열 1위의 자격으로 일개 근위대원에게 자리를 지키라고, 본분을 다하라고 말씀하고 계셨다.
그저 목발을 짚고 나가시는 공주님의 뒤를 호위하는 것 외에, 그녀 앞에서 고개 숙이는 것 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시경은 철저하게 자신의 위치를 절감하고 있었다.
포럼장 앞에서는 각국의 취재진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급작스럽게 들은 듯, 카메라를 들고 뛰어 오고 있는 취재진들도 있었다.
그들도 몰랐을 것이다.
공주님께서 포럼을 진행하시겠다고 하신 것을.
이토록 강경하게 나오실 수 있다는 것을.
“공주님, 들어가시기 전에 한 말씀만 여쭤보겠습니다.
공주님께서 테러범을 몸으로 감쌌다고 들었습니다.
왜 그러셨는지, 말씀 좀 해주십시오.
근위대원들도 있는데, 공주님께서 왜 그런 희생을 감행하셨는지 말씀 좀!!!”
천천히 걸음을 옮기시던 공주님께서 갑자기 멈추어 서셨다.
그리고는 그 질문을 한 기자를 향해 얼굴을 돌리셨다.
“왕실이 왜 존재한다고 생각하세요?”
“예?”
질문을 한 기자가 도리어 질문을 받자 놀란 듯 아무 말도 못한다.
공주님은 우아한 미소 속에 단호한 음성으로 대답하셨다.
“근위대원이 있는데 왜 제가 나섰느냐고 하셨습니까?
왕실은 한 사람의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근위대원도 대한민국의 국민이자, 내가 보호해야 할 국민입니다.
왕실은 대한민국 국민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이 왕실의 유일한 존재의 이유입니다.”
공주님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기자진을 향해서 미소를 띠면서도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대한민국 국민이 대한민국 왕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왕실이!! 대한민국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국민이 왕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왕실이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그보다 명쾌한 답은 없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그것을 몸으로 보여준 왕실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온전히 걷지도 못하는, 그래서 목발에 의지하며 겨우겨우 걸을 수밖에 없는 가녀린 공주가
그것을 입으로,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연약해 보이기만 하는 이 가녀린 여성은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서 고매한 영혼의 향기로 주변을 감동시키고 있었다.
그녀가 단상까지 걸어가는 동안, 포럼장에 있던 기자들과 내빈들이 모두 일어섰다.
그녀가 한발을 내디딜 때마다, 그 힘겨운 동작을 지켜보면서 그들은 생각했다.
우리 모두 그녀에게, 이렇게 연약한, 공주에게 빚을 졌다고.
그들은 모두 군산복합체의 주축들이었다.
이곳에 나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테러의 위협이 있었으니, 이 작은 나라의 공주가 나오든 말든, 그녀가 모임을 주최하든 말든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못했다.
무시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자신들은 몰랐다고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을 하고 있는 M소사이어티도 그녀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테러범은 예전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소속이었었고, 놈이 몸에 두르고 있던 TNT 폭탄 역시 그들의 뇌관과 그들의 패스워드로 작동하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저 연약한 공주는 그 좌중에 있던 모두를 구하고 스스로 목숨을 내놓았다.
감동을 받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자신들의 자존심 문제이기도 했다.
끝까지 위협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은 저 어리고 여린 여자도 나와서 포럼을 진행하겠다는데,
자신들은 그런 그녀에게 목숨을 구걸해놓고서 이곳에 나오지도 않는다면, 언론에서 어떻게 나올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단상에 진짜 오르는지 보러 온 각국의 군산복합체의 주축들은 그녀가 걸어들어오자 자신들도 그녀를 따라 포럼장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4
재신은 단상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
그녀가 목발을 짚고 걷는 모습까지 전세계로 생중계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파리해보였지만,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외모가 아니라, 그녀의 외모로도 감출 수 없는 빛나는 영혼 때문이었다.
그녀가 단상에 올라 미소를 짓는 순간, 포럼장의 문이 열리고, 상우가 들어왔다.
이미 단상 위에 서 있는 그녀를 보자, 상우가 낮게 한숨을 뱉더니, 그녀가 있는 바로 앞자리까지 걸어들어왔다.
그녀는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건 마치 자신은 괜찮다고, 걱정 말라고 다독이는 미소 같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가장 가까이에 서 있으면서 시경은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자신의 목숨이라도 바치기 위해,
단상 옆 최대한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대한민국 왕실의 대표로 온 이재신입니다.
반갑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서 이곳에 서 있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단아한 그녀의 목소리가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다.
“사실 제가 준비해온 연설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아시다시피, 어제 우리 모두 경미한 일을 겪었지요.
그리고 생각해봤습니다.
지금 이곳에서 저는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까.
무엇이 내가 이곳에 서 있는 이유일까.
그래서 전 제가 준비해온 연설이 아니라 다른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단상 옆,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시경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달랐다.
이제까지 봐왔던 공주님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자신이 제대로 공주님을 보고 있었던 게 맞는지, 의심이 되기까지 했다.
어쩌면 박혜원 씨의 말처럼, 자신은 공주님을 제대로 보고 있지 못했는지도 모른다고, 이제야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이야기할 겁니다.
평화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강력한 힘으로부터 온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게 더 강해져야 한다구요.
그래서 첨단무기로 더 강하게 방어해야 한다구요.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이야기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지금 대한민국의 평화는 안보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지 협력 체제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누구도 전쟁을 일으키지 못할 만큼 강력한 무기로 방어해야만 한다고, 지금 대한민국의 평화 정책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입니다.
힘이 있으면 강해진다고 하셨습니까?
첨단 무기가 여러분을 강하게 하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여기 누가 있나 보십시오.
여러분은 서로가 아실 겁니다.
지금 이곳이 무기 판매의 각축장이 되고 있다는 것을요.
맞습니다. 최소한의 방어를 위한 무기는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안보를 평화를 담보할 수 있을까요?
어제, 우리는 그 실체를 보았습니다.
아무리 강한 무기를 가지고 있어도, 평화는 오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테러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정면돌파를 하고 있었다.
적어도 평화포럼인 척 위장하고 싶어하는 그들에게 너희들의 속셈은 무기 판매가 아니냐고, 대놓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녀의 이야기에 항거하지 못했다.
“그 누구도 내게서 행복을 빼앗아갈 수는 없습니다.
내 다리를 빼앗아가고, 내 가족을 빼앗아가고, 내 사랑하는 이들을 빼앗아가고,
그래서 내 목숨까지 빼앗아간다고 해도,
절대로 내가 선택한 행복만큼은 빼앗아 갈 수는 없습니다.
내가 선택한 이 대한민국의 평화와, 세계의 평화라는 행복은,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내가 죽는다면, 내 뒤에서 또 다른 이가 나와 그 행복을 선택할 것입니다.
테러를 막는 것은 무력이 아니지요.
테러를 막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한 영혼입니다.
죽인다면, 죽겠습니다.
저를 죽이십시오.
그럼, 아시게 될 겁니다.
제 뒤에 누가 있는지, 누가 서 있는지, 누가 또 다른 내가 될 것인지,
알게 될 겁니다.
당신은, 내 몸을 죽일 수는 있어도, 내 영혼은 죽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나와 함께 하는 영혼들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죽지 않는 영혼, 절대로 죽일 수 없는 영혼,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대한민국의 평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평화’입니다.”
그녀는 모든 강한 것들을 향해 가장 강력한 경고를 날렸다.
그녀는 세상 가장 약한 것들의 대표이자, 가장 연약하고 흔들리는 것들을 상징했고,
힘없는 나라의 표본이었으며, 동시에 가장 밑바닥의 여성의, 그리고 장애의, 전범이 되었다.
그리고 곧 그녀는 그 모든 한계를 이겨내는 위대한 영혼을 보여주었다.
그 무엇보다도 강렬하게 메시지는 전달되었다.
남북한의 공조 작업은 계속될 것이며, 군사협력체계는 추진될 것이라는 것을, 그 어떠한 말보다도 강력하게 전해졌다.
그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하게, 그 누구도 반대하지 못하게, 전세계 모두에게 전달했다.
좌중은 순간 정적이 맴돌았다.
반대도, 찬성도, 그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다.
그 순간, 공주님의 카리스마에 모두가 압도당하고 있을 뿐이다.
감히 그 어떤 말도, 어떤 표현도 용납되지 않았다.
맨 앞에 앉아 있던 상우가 천천히 일어났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주위에서는 후레쉬가 터지기 시작했다.
상우는 마치 주변에 아무도 없는 듯이 공주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마치 그가 영국 여왕의 앞에서 Knight 작위를 받던 그 때처럼, 영국 왕실의 여왕에게 예를 다하던 그 때처럼, 그는 무릎을 꿇고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는 마치 거룩한 의식을 치르듯이, 그녀를 향해 예를 갖추고 있었다.
그것은 모두의 가슴에 이상한 파장을 일으켰다.
이 작은 나라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 공주를 향해서, 그 작은 체구로 인간의 존엄성을 보여주는 이 여성을 향해서, 예를 표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목숨을 빚진 데 대한 부채 의식을 주고 있었다.
상우의 태도는 무언의 압력처럼 옆으로 옆으로 퍼져가고 있었다.
그녀의 권위 앞에 모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혼을 향한 경외였다.
공주님은 완전히 날아오르셨다.
공주님은 천상의 별로 완전히 귀환하셨다.
그녀의 자리에, 그녀만이 있을 수 있는 그 자리에, 당당히 오르셨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이토록 높이 날아오르시는 이 순간, 시경은 혜원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혜원은 바로 이 순간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예언하고 있었다.
“공주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세요.”
“그러나 은시경 씨가 믿고 있다고 해도, 눈으로 확인하진 못했을 거예요.
은시경 씨가 만난, 그 공주님은, 어쩌면 정말 가장 최악인 상태였을 테니까.
공주님의 진짜 모습일 수도 있지만, 공주님의 진가를 은시경 씨는 아직 보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곧 알게 될 거예요.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공주님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은시경 씨도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될 거예요.”
혜원의 말은 정확했다.
그랬다. 나는 몰랐다.
전혀 몰랐다.
이제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녀를 내 울타리 안에 가두려고 했다.
그녀는 연약하지만 연약하지 않았다.
그녀는 부스러질 듯 가녀렸지만, 가녀리지 않았다.
그녀는 지켜주어야 했지만, 도리어 다른 사람을 지켜주었다.
그녀는 그런 존재였다.
나의 공주님은.......위대한........분이셨다.
이제 난 내 길에 대해........고민해 보아야 한다.
내가......공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철저하게 냉정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혜원은 내게 물었었다.
“지금은요. 지금은 안 그럴 자신 있어요? 공주님의 대단함 때문에 물러나지 않을, 자기 비하하지 않을, 그런 자신 있냐구요.”
“세상에서 제일 웃기고 찌질한 놈이, 그런 놈이에요.
지 스스로 움직이려 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고, 여자가 성장하는 걸 막아서, 자기 옆에 두려는, 그런 놈. 세상에서 가장 나쁜 놈이라구요.
그렇게 자기가 작으면, 죽도록 노력하면 되잖아요.
대단한 존재를 사랑했으면, 그 대단한 존재 근처에라도 가게, 미친 듯이 노력하면 되는 거죠.
충신은 그런 거 아닌가요?
난....죽도록 노력해서, 죽기 살기로 노력해서, 공주님께서 일하실 때, 그 옆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어드릴 거예요.
공주님이 가지신 비전, 내가 이루어드리고 말거예요.
몸이 약해지셨다고, 마음까지 약하다고, 판단하지 마세요.
위대한 일은, 몸으로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신념으로 하는 거니까요.”
너는 물러서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너는 자기비하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혜원은 또다시 시경에게 묻고 있었다.
아니다. 혜원이 아니었다.
공주님께서 묻고 있었다.
물러서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자기비하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넌, 그녀의 충신인가?
죽기 살기로 그녀 옆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라.
자격을 논하기 전에, 죽기 살기로 노력부터 해라.
혜원의 말은 그야말로 수학의 명제처럼 정확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머릿속의 명제일 때 가능한 것이다.
감정을 가지고, 실제를 보는 사람의 입장은 또 다를 수밖에 없다.
이젠 신분 차이는 그저 추상적인 거리감이 아니었다.
눈으로 보고, 확인한 절대적인 거리였다.
저 크기를 내가 감히 따라갈 수 있을까 라는.......
왜 혜원이 내게 그렇게 말했는지, 왜 공주님이 그토록 위대한 분이라고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난 혜원의 말대로 공주님께 반짝반짝 빛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그녀의 크기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혜원이 왜 내게 충신이냐고 물었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혜원이 공주님의 충신이 되겠다고 왜 그렇게 당당하고 단호하게 말했는지,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공주님은 그저 왕실의 혈통만을 보여주고 계신 것이 아니었다.
공주님은, 그야말로 왕의 재목이었다.
그리고 공주님은 묻고 계셨다.
너는 지금 내 충신이 될 준비가 되었느냐고.
나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시경은 물러설 수 없는, 정리되지 않는 엄청난 깊이의 감정이라는 놈과,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멀리 계신 그 절대적인 거리를 일깨워주고 있는 이성이라는 놈의 간극 앞에서
그 어떤 판단도 내릴 수가 없었다.
이성은 말하고 있었다.
너무 큰 그릇을 마음에 담아버렸다고.
그러나 니가 감당할 그릇이 아니라고.
죽기 살기로 노력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있고, 처음부터 가당치도 않은 것도 있다고.
그의 이성은 지금 맞닥뜨린 엄청난 거리감 앞에서 정신을 차리라며 날카롭게 소리를 치고 있었다.
저기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상우가 보였다.
고개를 숙였던 상우가 공주님을 향해 서서히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공주님의 눈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곳에 자신은 없었다.
그는 그저 방관자일 뿐, 그녀에게 자신은 없었다.
본분. 그가 할 본분은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를 내 여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근위대원으로서 그녀를 지키고 보호하는 것. 필요하다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녀의 안위를 지켜내는 것. 그것이었다.
그런데......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심장은 펄떡펄떡대며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그녀 없이 살 수 있느냐고......그래도 사랑하지 않느냐고........
그녀를 다른 남자에게......빼앗길 수 있느냐고......
그걸 지켜볼 자신이 있느냐고.......
그러면 넌 살 수 있겠느냐고.......
그렇게 펄떡대며 절규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정말 진심으로, 지금 공주님을 향해서 무릎을 꿇고 웃고 있는 그 남자가 미치도록 부러웠다.
너무나 부러워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머리는 놓아야만 한다고 말하지만 심장은 놓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 이율배반적인 감정 앞에서 시경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을 미친 듯이 질투하며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5
기사가 실시간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전세계에 생방송으로 진행된 공주님의 연설은 전세계인을 감동시키고도 남았다.
CNN과 BBC 등 각종 메이저 방송사들은 그녀의 연설을 분석하며 수십 번도 더 그녀의 연설 전체를 반복해서 방송하고 있었다.
국내 언론 역시 자랑스러운 공주님이라며, 모든 헤드라인이 공주님 관계 기사로 도배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례적으로 영국 왕실이 공식적으로 이에 대해 입장을 표명해 왔다.
아무래도 영국 왕실은 가장 먼저 무릎을 꿇고 주군 앞에서 기사의 예를 갖춘 상우의 행동에 대한 입장을 표명할 수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상우의 국적과 상관없이, 영국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우는 영국에서 굉장한 우대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외국인이지만, 영국 여왕에게 직접 Knight 작위를 받은 몇 안 되는 유명인으로서, 그가 취한 태도가 합당한가 아닌가에 대한 말들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그러한 예는 오직 그에게 작위를 내린 영국 여왕에게만 해야 할 행동이었다고 말하는 보수 언론들도 있었다.
그런데 늘 별 말이 없던 영국 왕실이 공식적으로 이 사건에 대해 입장을 표명해 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녀는 왜 인간이 위대한지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약하고 여리다고 말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국민들에게
그녀는 보여주었다. 인간이 왜 위대할 수밖에 없는지를......
대한민국은 그녀를 장애를 가진, 아름답지만 가슴 아픈 존재로 여겼지만,
그녀는 위대한 영혼으로 자신의 국민을 지켜내었다.
육체의 한계는 영혼의 위대함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님을, 그녀는 몸소 보여주었다.
그녀는 위대하다. 그러므로 그녀의 국민들도 위대하다.
영국의 왕실은 그녀에게 깊은 감사와 존경을 표하는 바이다.
상우에 대한 말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영국 왕실은 뉘앙스로 상우의 태도를 지지하고 있었다.
더 이상 이를 두고, 상우의 자격에 대한 논의는 하지 말라는 암묵적인 지지였다.
그리고 이어 영국의 여왕이 직접 언급한 발언은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지금 한 어머니가 세 명의 왕을 키워내었다.
과거의 왕은 열정을 가지고 평화를 꿈꾸어낸 왕이었고,
현재의 왕은 천재적인 두뇌로 범접치 못할 기획력으로 그 평화를 이루어가고 있는 왕이고,
그리고 지금, 미래의 왕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지켜낸 위대한 왕이다.
이 세 사람은, 21세기 현재, 왕실이 존재해야 할 이유를 몸소 보여주었다.
그래서, 어머니로서의 그녀가 부럽다.
그것은 영국 여왕이 어머니로서의 마음을 보여준 것임과 동시에, 대한민국의 세 자녀가 모두 왕의 재목임을 만천하에 공표한 것과 같았다.
전 세계의 각광.
새로운 평화의 코드. 이재신 공주.
왕실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게 하다.
시대의 아이콘이 되다.
분단된 나라, 가장 작은 나라에서, 가장 힘든 역사를 가지고 그 속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장애를 얻기까지.
죽지 않는 영혼.
죽일 수 없는 영혼.
그녀를 표현하는 헤드라인 뉴스의 수식어들은 날로 화려해져가고 있었고, 국민들의 열광은 따로 표현할 필요도 없었다.
그것은 이틀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최소한의 희생과 최대한의 효과.
그녀가 원한 대로, 전하가 원한 대로, 그렇게 명백하게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그녀의 희생조차 언론에 이용되었다.
6
재신은 상우와 함께 조식부페를 먹은 후, 호텔 앞 정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주변으로 근위대원들이 배치되어 삼엄한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오빠, 오래 있으면, 스캔들 나."
사실 상우는 1박 2일 일정으로 제주도를 잠깐 동안만 다녀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원래는 3박 4일 일정으로, 포럼 둘째 날부터 재신이와 함께 있을 생각이었는데, 영국쪽 상황이나, 그룹의 상황으로 볼 때, 돌아가는 것이 맞을 수도 있었다.
아버지는 당장 영국으로 돌아오라는 입장이었다.
겨우 쌓아놓은 이미지를 다 깎아먹을 수도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아직은 대한민국 왕실과의 관계를 밝히기엔 이른 감이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재신이는 그 상황을 아니까, 아버지가 시키시는 대로, 오늘 오후에 바로 영국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하고 있는 중이었다.
"스캔들...아니잖아."
"응?"
"스캔들 아니라고.
스캔들은 둘 사이가 아무 것도 아닐 때 나는 거지.
적어도 난, 확실하거든."
"오빠......."
재신은 이런 상우가 낯설기도 하다.
예전의 상우는 따뜻했지만, 자신에게 이렇게 감정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때로 그의 눈을 보면, 내게 호감이 있구나 싶기도 했지만, 그는 절대로 입밖으로 자신의 감정을 내뱉지 않았다.
그래서 재신은 자신이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자신의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 날 선이라고 나간 자리부터 상우는 달라져 있었다.
예전엔 전혀 하지 않던 감정들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래서 낯설 수밖에 없었다.
"어제.....못 와서 미안하다.
처음부터 왔었어야 했는데........"
"아니야."
"그래도 다음부터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뭘?"
"아무 생각도 않고, 몸부터 날리는 거."
"어?"
"너 옛날부터 그랬잖아. 생각하지 않고 몸부터 날렸잖아."
"오빠!!!"
"장난.....아니야. 나,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
상우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오빠!!!! 지금 기자들 쫙 깔렸어.”
“상관없어.”
“오빠!!”
“재신아! 나, 뭐든 할 수 있어.”
“어?”
“너 위해서라면, 나, 뭐든 할 수 있다고.
너만.....내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내 모든 걸 버릴 수도 있어.”
“오빠........”
“필요하면, 나........이용해도 돼.
그렇게라도, 내가........너에게 필요한 존재였으면 좋겠다.
처음으로.......내가 재벌 2세라는 게 감사했어.
이런 걸로라도, 네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
내 모든 걸 다 바쳐서, 널......가질 수 있다면, 그랬으면 좋겠어.”
고백....이었다.
그의 고백.
어린 시절......그토록 듣고 싶었던, 그 사람의 고백이었다.
그 시절, 그 때 들었더라면 좋았을 그 고백을, 돌고 돌아 10년이 훌쩍 지나고서야 듣고 있다.
“오빠.....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얘기해.”
“오빠, 영국에서 나 만나러 자주 왔을 때, 그때도 같은 마음이었어?”
“내 마음은 단 한 번도 변한 적 없었어.”
“근데.....왜........”
“왜 말하지 않았냐고? 그 때 왜 널 잡지 않았냐고?
내가........부족하다고 느꼈으니까.
더 완벽해져서, 공주님의 남자로 그 누가 보더라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난 다음에
너에게 가고 싶었으니까.........”
시간은 지금도 흐른다.
일초, 일초......쌓여가면서, 순식간에 모든 것을 과거로 만들어버린다.
흐름 속에서 과거는 쌓여가고, 감정은 무뎌진다.
만약 영국에서 오빠가 내게 말했다면 나는 어땠을까.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일어났다면'이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 안다.
그래서 생각했다.
늘......지금....이 순간,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그 감정 그대로 과거가 되어버린다고.
햇빛을 뒤로 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 사람이 보인다.
또 하나의 과거........
시간은 흐르고 과거는 겹겹이 쌓여간다.
그리고 그 과거는 또다시 멀어지려 한다.
나는 기어코 움찔하던 그의 어깨를 보고야 말았다.
상우 오빠를 만날 때도, 기자회견을 할 때도, 그는 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돌아보면 보이는 그 자리에 늘 서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내 눈을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
늘 내게 등을 향하고 있었다.
오로지 그의 몸짓만이 나를 보호하려한다는 걸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는 지금.......또다시 과거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런데 왜 난...2년 전........한 여자의 마음이 보이는 걸까.
그 여자의 마음이 어땠을 지 보인다.
그는 그렇게 뒷걸음을 쳤겠구나.
그렇게 한 여자의 마음을 아프게 했겠구나.
그리고 그 여자는 그 남자가 왜 뒷걸음치는지 모르고 자신의 장애를 한탄했겠구나.
그러나....2년이 지나 모든 기억을 잃은 여자의 눈에는......그 모든 상황이 객관적으로 보인다.
냉정한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의 태도를.........
공주라는 신분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있는 한 남자의 어깨를.
그러나 그 어깨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그 여자의 몫이 아니었다.
스스로 일어서지 못하는 자를 그 누구도 일으켜 세울 수는 없는 법.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오빠가 내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는 것을.......
그리고 오빠가 내게 고백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을.......
그래서 그의 어깨가 움찔 흔들렸다는 것을.........
나는......알고 있다.
7
재신은 가기 싫다는 상우 오빠를 윽박지르다시피 해서 보냈다.
곧 다시 궁으로 가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하며 그렇게 상우는 공항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렇게 또 하루가 저물었다.
밤이 깊어가도록 재신은 잠이 오지를 않았다.
모든 일정이 끝났고, 또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성과를 얻어내고 나니, 뭔가 허탈감이 몰려왔다.
오빠가 원했던 것처럼, 가장 강력한 한 방이 나왔지만, 그래서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효과를 얻어내었지만,
재신은 뭔가 허무했다.
언론에 의해 포장되고 있는 왕실도, 그리고 위대한 영혼이라며 치켜세우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도 허무하기만 했다.
결국 이 또한 언론의 장난이 아닌가 싶었다.
제주도로 당장 오겠다는 오빠를 뜯어말리면서
니가 제정신이냐며, 넌 이 나라의 국왕이라고 정신 차리라고
버럭버럭 소리쳐서 겨우 말려놓고 나서도,
사실 재하 오빠도, 나도 이번 일로 확실하게 언론플레이를 하면 되겠다고 머리를 굴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둘 다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커왔으니까......
아주 작은 상황도 놓치지 않고 써먹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아마 오빠도 씁쓸했을 것이다.
동생의 안위를 걱정하면서도, 동시에 이번 상황을 언론에 확실히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자리에 대해서,
씁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빠도 그랬을 것이다.
WOC 남북한 훈련 중에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어야 했던 오빠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가장 효과적으로 죽자고.......
그리고 그 죽음조차 국익을 위해서 이용해야 한다고.......
우리의 운명이었다.
뭔가 모든 게 허무하게 느껴졌다.
오빠도 나도, 어쩌면 우리 개인의 삶이란 없을지도 모른다.
하나의 실타래를 풀고 나니 또 이렇게 인간인지라 허무한 감정이 밀려오고야 만다.
그래서 제왕의 길은 고독하다고 했던가.
나보다 오빠는 더 하겠거니 싶다.
우리는 다른 듯 닮은 길을 걷고 있으니까.......
시계가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곧 동이 틀 것 같다.
지금은 나가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천천히 산책이나 하자 싶어서
재신은 주섬주섬 옷을 입고는 목발을 짚고 나섰다.
이곳은 늘 올 때마다 느끼지만, 정원이 아름다웠다.
작은 연못도, 길가에 심겨진 나무도 꽃도, 정원이라기보다는 숲속의 작은 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이슬이 내린 듯, 세상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재신은 미끄러질까 조심하며, 천천히 숲길로 한 걸음씩 걸어 들어갔다.
재신이 이 길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다와 닿아 있기 때문이었다.
숲이 끝나는 그곳에는 바다까지 내려갈 수 있는 절벽이 있었다.
절벽에 돌계단을 만들어 두어서 그 계단을 다 내려가면, 바로 바닷가가 펼쳐졌다.
마치 나만의 바다가 펼쳐지는 듯해서, 재신은 제주도에 오면, 늘 S 호텔을 고집하고는 했다.
그러고 보니, 제주도에 이렇게 머물면서 있어본 건, 근 2년 만에 처음인 것 같았다.
그 사이에도 제주도에 올 일은 있었지만, 당일로 들렀다 올라가고는 했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수술과 재활 때문에 바빠서 이런 외부 일정 자체가 없기도 했었다.
이마에 땀이 조금씩 맺히기 시작하자, 저 끝에 절벽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보였다.
아.........
그러나 재신은 잊고 있었다.
지금 자신은 이곳으로 내려갈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기억 속에 있는 절벽으로 내려가는 돌계단은 충분히 목발을 짚고도 내려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기대가 만들어낸 착각이었다.
계단은 너무나 가팔랐고, 절벽은 너무나 높았다.
피식.......
재신의 입에서 웃음이 나왔다.
아직은 멀었다.
재신은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는 아까부터 조용히 따라오고 있는 그에게 말을 건넸다.
"왜, 따라와요?"
"아셨....습니까?"
그의 낮은 목소리가 조금씩 푸르게 변하는 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는 멀찍이 떨어져서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호텔방에서 나올 때부터 그는 내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알은 체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거의 이틀이었다.
그는 거의 이틀 동안 공식적인 말 외에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를 보려고도 하지 않았고, 나를 외면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그는 단 한 순간도 내 곁에 있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정말 그 어떠한 순간에도, 그는 내 곁에 있었다.
내가 소리를 지르면, 언제든지 달려올 수 있는 그곳에, 그가 있었다.
"다른 근위대원 시켜요. 내가 정 불안하면.....
근위대장님이 이렇게 따라다니지 말구요."
그제서야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본다.
그러나 금방 다시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
"제가 하고 싶습니다."
"왜요? 은시경 씨가 호위는 최고인가요?
대한민국에 그렇게 인재가 없나?"
"대한민국 군인 중에 저보다 나은 군인들, 분명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적어도, 공주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제가 어떻게 할 지, 확실히 저는 아니까요."
쿵........하고 재신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리고........이렇게 공식적으로, 공주님을 가까이에서 뵐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는 그녀의 앞으로 와서 앉으며 등을 내밀었다.
"뭐예요? 나, 지금 들어갈 거예요."
재신의 거절하는 말에도 그의 등은 그를 닮아 고집스럽게 그녀를 향해 있었다.
"은시경 씨."
"내려가시고 싶으시잖아요. 공주님."
바닥에 목발이 떨어지는 소리가 조용히 새벽의 적막을 갈랐다.
그리고 재신은 그의 등 뒤에서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도 긴장한 것일까.
그는 그녀를 업고, 가파른 절벽의 돌계단을 내려갔다.
재신은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 이곳에 와서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의 방문 앞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하고 있었지만,
그가 지금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는지, 재신은 알고 있었다.
나는 정말 나쁜 여자인지도 모른다.
그의 마음을 알면서, 그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다가오는 그의 마음에 위로받고 있다.
혼자서 이 많은 일을 담당해야 하는 그 무게가 숨을 쉬지도 못할 만큼 눌러대고 있었는데,
그는 이렇게 그의 등을 내밀어 내게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따뜻하고, 흔들리지 않는 등을 내게 내밀어주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당신에게는 늘 내가 있다고, 그러니 이 등으로 늘 당신을 지키겠다고
언제든지 당신을 향해서 이렇게 늘 기다리고 있겠다고,
그의 등은 말해주고 있었다.
그의 따뜻한 등에 얼굴을 기대고 절벽을 향해 넘나드는 파도 소리를 들었다.
위로가 되었다.
그의 따뜻한 등도, 끊임없이 쳐대는 파도 소리도, 어김없이 푸르러지는 새벽녘 하늘도,
모두 재신에게는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공주님........."
그의 등에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응?"
"공주님...전....혼자 남지 않을 겁니다."
"......................."
"만약...공주님께서 그 남자를 안았을 때, 폭탄이 터졌다면,
저도....함께였을 겁니다."
"무슨.......말이에요?"
"제가....다른 여자 만날 거라고.....하셨죠?
그런 일은.......없을 겁니다.
저도...이 세상에 없을 테니까......
공주님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으니까요.
전...비겁합니다.
공주님은 혼자 계시게 해 놓고, 저는 정작....그렇게 못합니다."
그의 말이 절벽을 내려가는 내내 재신의 심장을 쳐댄다.
어쩌면, 그는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는.......그 때 같이 죽으려 했을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그의 진심이, 재신을 자꾸만 먹먹하게 만든다.
재신은 바닷가를 거닐고 싶어 했지만, 시경은 결국 바닷가 정자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정자 안 마루 위에 그녀를 앉히고, 쿠션을 가지고 와서 그녀의 등 뒤에 둘러주었다.
그리고는 벽장 안에 들어있는 담요를 꺼내 와서 그녀의 무릎에 덮어주었다..
재신은 그가 하는 대로 몸을 맡기고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정자의 창 너머로 바다가 넘실대고 있었다.
재신은 바다를 쳐다보며 기대어 앉아 있고, 시경은 그런 재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서 있었다.
"뭐 하는 거예요?"
"예?"
"이리 들어와서 앉아요."
"아닙니다. 여기 있겠습니다."
"은시경 씨. 내가 피곤해서 그래요. 이리 와서 좀 기대게 해줘요. 빨리........."
피곤하다는 그녀의 말에 시경은 신발을 벗고, 그녀 곁에 가서 앉았다.
재신은 옆에 앉은 시경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시경의 오른팔이 재신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푸른 파도가 넘실대고, 하늘이 푸르러 오는 그곳에서 그들은 한참을 연인처럼 그렇게 서로를 의지한 채 앉아 있었다.
"은시경 씨, 만약에 폭탄이 터졌다면, 오늘 우리가 보는 저 하늘도, 저 바다도, 모두 볼 수 없었겠죠?
생각해 보면 이 시간은 내게도, 은시경 씨에게도 어쩌면 주어지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시간이네요."
재신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시경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재신은 그의 손길에서 두려움을 읽어낸다.
주어지지 못했을 시간.
어쩌면 그 누구도 현재를 장담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지금 이 순간은, 주어지지 못할 지도 모르는, 늘 기적 같은 것이 아닐까.
이러한 시간들 켜켜이 쌓여간 후, 과거가 된 미래에, 나는 오늘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은시경 씨.......이 시.....혹시 알아요?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예?"
"시 제목이에요.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발견했는데, 이 시가 이상하게 가슴에 남았어요.
내 얘기 같기도 해서.........."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 최영복
나 태어나
잠시 머문 가슴
그 포근함이 세상
무엇이 대신
할 수 있을까.
그리워서 하도
그리워서
두 눈 감고 먼
기억 속을 더듬어도
지금까지
당신의 얼굴
목소리
기억하지
못하였네.
정말 우연이었다. 이 시를 본 것은.
처음 보는 시였는데, 제목이 왠지 나를 끌어당겼다.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마치 내가 그에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시는 말하고 있었다.
너무나 그리워서 당신의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너무 그리워하면, 기억할 수가 없다고.......
그 말이 왜 그렇게 내 심장을 저릿하게 했는지 모르겠다.
그에게 읊어주면서도, 그립다는 말 앞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목이 멜 듯했다.
그에게 시를 읊어준 후,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하아..........
그의 입술에서 한숨이 새어나온다.
내 눈 바로 앞에 그의 얼굴이 보였다.
꼭 감은 눈도, 날카로운 듯 단아한 그의 코도, 그의 베일 듯한 옆선도, 내 눈 바로 앞에 있었다.
".....내가....은시경 씨 얼굴...잠깐만 만져 봐도 돼요?"
"............................."
무슨 용기로 내가 이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 순간 그랬다.
그의 얼굴을 만져보면, 어쩌면 기억이 나지 않을까.......
모르겠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꼭 감은 눈이 파르르 떨렸다.
한참 아무 말이 없던 그가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였다.
그의 얼굴로 향하는 재신의 손도 떨리고 있었다.
재신은 그의 이마를, 그의 강직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의 진한 눈썹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어본다.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의 감은 눈 사이로, 그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날카롭게 떨어지는 그의 코선을 따라 내려오면서 부드럽지만 강인한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가 어금니를 꽉 깨문다.
그래 이 사람은 화가 날 때면, 이렇게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는 듯했다.
화가 난 걸까....긴장을 하는 걸까.....아니면 뭔가를 참아내고 있는 걸까.
재신은 긴장한 그의 턱을 풀어주려는 듯, 턱선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꽉 깨물고 있는 어금니 부분을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러자 어금니를 깨문 채 긴장하고 있던 그의 턱이 조금은 풀어지고 있었다.
턱선을 손등으로 훑으며 재신 손은 다시 그의 입술 쪽으로 다가왔다.
강한 듯 부드러운 그의 입술이었다.
단호하게 다물려 있는 입술이지만, 때로 그의 입술은 너무나 거침없었고, 남자의 향기를 내고 있었다.
주저하던 재신의 손은 용기를 낸 듯, 천천히 그의 입술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본다.
잠을 못 자 피곤한 듯, 그의 입술이 약간은 까칠하다.
그것이 못내 재신을 안타깝게 한다.
그래 내가 본 그는 늘 이랬던 것 같다.
이렇게 그는 이렇게 강직하게, 자기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때로는 엄청난 감정의 회오리 속에서 나에게 다가오기도 했다.
그의 얼굴을 손으로 느껴보며, 재신은 이상하게 마음이 울컥한다.
나...왜....이러지?
이상하게 마음이 아릿하게 저려 온다.
손의 감각 사이로 그의 얼굴이 기억되고 있었다.
내 손은 이제 기억할 것이다.
이 사람을........
이 사람의 얼굴을.......
지금 이 사람의 떨리고 있는 눈을.......
꼭 다문 그의 입술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의 입술을 맴돌고 있는 그녀의 손이 그에게 잡힌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그는 그녀의 손바닥에 입술을 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공주님......”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지듯이 신음처럼 터져나왔다.
“공주님.........”
“공주님..........”
“하아.........공주님........”
그는 몇 번이나 그녀를 불렀다.
가슴 속 저 안에서부터 긁어대는 신음처럼,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그가 부르는 공주님이라는 음성이 자꾸만 재신의 가슴에 파장을 일으킨다.
“............사랑....합니다. 공주님.......”
그는 재신의 손을 잡고, 눈을 감은 채로 입을 맞추었다.
손바닥 가득히 저릿하게 몰려왔다.
“공주님께 제 마음, 부담이라는 거 아는데.......
저도 제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녀의 손바닥에 입술을 맞추던 시경이 천천히 눈을 떴다.
재신의 눈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감정이 휘몰아치는 심연의 바다였다.
그의 고백은.........늘 이렇게도 절절하고도 깊었다.
그 깊음이 재신의 저 가슴 깊은 곳까지 내려앉아 흔들어댄다.
“한번은 돌아봐주신다면서요?
한번은 다시 생각해 주신다면서요?
제게.....약속하셨잖아요. 공주님.”
약속. 그를 돌아보겠다는 약속.
아, 성곽에서의 그날이었다.
그가 내게 처음으로 입을 맞추었던 날.
내게 하는지도 몰랐던 고백을 받았던 날.
약속인지도 모르고 했던 나의 약속.
그가 떨리던 음성으로 물었던 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이었다.
만약에 공주님이라면, 정말 만약에 공주님이라면......
그 말을 듣고 있을 때는 몰랐다.
그날 그가 내게 직접 묻고 있었다는 것을.
그가 내게 진심으로 묻고 있었다는 것을.
그가 그토록 가슴 터져했다는 것을.
“공주님.....한 번만......정말...한번만..저...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욕심인 거 압니다.
제가 감히 공주님께 품어서는 안 될 감정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렇지만, 한번만.......다시...봐주시면...안 되겠습니까?
분명 지켜보려고만 했는데.......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공주님을 보면 늘 무너지고 맙니다.
공주님이 너무 아름다워서........공주님밖에 안 보여서.......
제가........공주님을..............너무...사랑해서.......
저도...절....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틀 동안 그는 내게 낯선 사람처럼 대했었다.
말도 하지 않고, 눈길도 주지 않고, 그토록 정리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냉정한 거리에 있었다.
그래서 저 남자, 이제 나와 확실히 금을 긋는 건가 싶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이재신 정말 웃긴다. 너무나 웃긴다.
그가 그렇게 냉정하게 정리해버린 걸까봐, 뭔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있었었나 보다.
자신의 눈을 뚫어질 듯 보고 있는 그를 향해서,
눈빛이 깊다 못해 아프기까지 한 그를 향해서,
그리고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고 입맞춤하고 있는 그를 향해서,
단 한 순간도 놓지 않고 강하게 어깨를 감싸쥐고 있는 그를 향해서,
재신은 입을 열었다.
“우리....한 달만......만나...볼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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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늘은 45장입니다.
분량만 늘어난 듯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사실 이번 편을 2편으로 나눌 수도 있었으나, 이렇게 천천히 연재하는 주제에 나눈다면, 기다리다 지쳐 쓰러지실 듯해서
한 번에 다 담았습니다.
그러니 늦게 가져왔어도 용서해 주시길.....
2
드디어 17회로 2부가 끝이 났습니다.
저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1부는 기억을 잃은 공주님이 다시 돌아온 은시경을 만나고, 그 이후 영상편지를 보시고나서 은시경과 자신의 관계를 알게 된 상황까지였고,(1회~9회)
2부는 공주님이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알게 되면서부터 조금씩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시는 상황, 바로 오늘 올린 17회까지였습니다.(10회~17회)
저번에도 말씀드렸듯이
<당.기.못>은 총 4부로 진행될 듯합니다.
그렇게나 지지부진하게 오래 끄느냐고 답답해 하실까봐 걱정입니다.
별 내용도 없으면서 분량만 늘어나고 있네요. 에효.....
3부, 4부도 1부, 2부 정도의 분량이 될 듯합니다.
그러다 이건 아니다 싶으면 확 줄여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지금은 써지는 대로, 글이 가는 대로 내버려둘까 합니다.
3
16회, 17회는 그야말로 공주님을 위한 회였습니다.
그만큼 심혈을 기울이고 싶었지만, 끙끙대고는 있었으나 제가 쓰고 싶은 만큼은 나오지 못한 듯합니다.
훨씬 더 카리스마 있게, 훨씬 더 멋있게 그리고 싶었으나,
역시 저는 비루한 손고자였습니다.
그러니 포기할 부분은 포기해야 한다고, 오늘도 거듭거듭 제 자신을 설득했습니다.
사실 17회는 공주님의 아픔을.....기억이 아니라 심장에 문신처럼 새겨진 고통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쓰다보니 공주님이 너무 아파서, 또 쓰기가 많이 힘들었습니다.
심장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는 것처럼 펄떡펄떡대는 경험을 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아주 가끔...저는 그렇습니다.
심장이 너무 갑자기 펄떡거려서 그 순간만큼은 심장을 꼭 누르고 숨을 헐떡여야 합니다.
공주님은 발작처럼, 그것을 느낀 겁니다.
자신을 밀치고 테러범을 덮던 은시경을 보면서, 어떤 기억도 나지 않는데 오로지 심장이 그 고통을 기억해냅니다.
오로지 고통만. 그 순간의 죽음과 같은, 발작과 같은 고통만,
아주 선명하게 공주님께 보여줍니다.
그래서 전.......16회도, 17회도, 공주님이 많이 아팠습니다.
8회에서 은시경 때문에 숨이 막힐 뻔했다면,
17회는 공주님 때문에 너무 짠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4
17회에 나왔던 시는 재신이의 말처럼 정말 우연히 인터넷에서 찾았습니다.
<당.기.못>을 연재한 이후에, 포털에서 <당.기.못>을 검색해보다가 우연히 이 시를 발견했습니다.
같은 제목의 시가 있길래 참 신기하더라구요.
그런데 시의 내용이 너무나 재신이의 마음 같더라구요.
그래서 가지고 와 보았습니다.
그리워서 너무 그리워서 당신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나 짠하게 하더라구요.
5.
3부는 달콤쌉싸름합니다.
그래도 달콤이 쌉싸름보다는 훨씬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6.
사족이 너무 깁니다.
글로 말해야 하는데, 또 잡설로 주저리주저리 풀어내고 있습니다.
널리 양해해 주시길......
여전히 읽어주시고, 기다려주시고, 또 댓글로 나누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16회 답글도 곧 달겠습니다.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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