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신/단편) 소개 上
1
“은시경 씨!!! 제발요? 네? 네?”
“전, 싫습니다. 공주님”
“아, 진짜, 너무 하네. 그게 그렇게 어려워요?”
“예. 아무리 공주님이라도 이렇게 개인적인 부분까지 간섭하실 수는 없습니다.”
강하다. 역시.
단 하나의 허점도 없다.
어떻게 공략하지?
분명히 애인은 없는데 말이야.
“솔직히 말해 봐요. 숨겨놓은 애인 있는 거예요?”
“예..예? 아, 아닙니다.”
그 전까지 딱딱하게 안 된다고, 바늘 구멍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딱딱하게 굴던 시경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진다.
어, 이거 뭐야? 있는 거야?
“이거 이거, 진짜 수상한데.....
진짜 있는 거 아니에요?
뭐, 숨겨놓은 애인 있다면, 그만 조를게요.
그러니까, 있는 거죠? 그죠?”
재신의 큰 눈이 유독 반짝인다.
그 눈을 바라보던 시경의 입에서 기어코 한숨이 새어나오고야 말았다.
그런 시경을 재신은 이상하다는 듯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하아......정말 없습니다.”
“진짜 없는 거야?”
“네.”
그럼 아깐 왜 얼굴이 빨개진 거지? 이상하네.
“좋아요. 그럼 없으니까, 하면 되겠네. 해요. 그냥.
내가 이만큼 얘기하면, 좀 하겠다. 진짜!”
“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재신이 투덜대듯이 또 다시 졸라대지만, 여전히 시경은 끄덕도 없었다.
재신이 해달라고 하면 할수록 시경의 미간은 점점 좁아지고, 표정이 점점 어둡게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신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걸 어떻게 성사시키지, 그 하나에 모든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다.
심지어 나중에는 오기까지 생겼다.
아니, 공주가 해주겠다는 데도 안 한다는 저 배짱은 뭐야?
게다가 애인도 없다며?
그러다 재신의 머리로 섬광처럼 하나가 지나갔다.
“그럼, 은시경 씨, 그거, 정말 사실이었군요.”
아까까지는 아이처럼 졸라대던 공주님의 목소리가 굉장히 실망한 듯 잠겨들었다.
시경은 뭔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마른 침을 삼켰다.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은시경 씨, 왜 그러는지 알 거 같아요.”
뭔가 안다는 듯한 공주님의 말이 자꾸만 시경을 불안하게 한다.
“은시경 씨, 좋아하는 사람은 있지만, 사귈 수는 없는 상황인 거죠?
내 말 맞죠?”
“예..예? 아....니....지금...무슨......”
그토록 단정하고 군인 아니면 도저히 다른 일을 할 수도 없을 만큼 각진 남자가 갑자기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장난처럼 말했을 뿐인데 시경이 심하게 반응해오자, 재신은 자신이 더 놀랐다.
어, 이거 진짜인 거 아냐?
“은시경 씨.....”
재신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더니 묘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시경은 아까부터 따끔거리던 목 때문에 침조차 삼키기가 어렵다.
“항아 언니....좋아하죠?”
“예에? 아, 아닙니다. 그런 거.”
“맞네, 뭐. 지금 은시경 씨가 말한 게 그렇잖아요.
숨겨둔 애인은 있는 것 같은데, 아니라고 하지.
그러면서 내 얘기는 거절하지. 딱 맞잖아요.
소문이 사실이었어. 은시경 씨가 정말 오빠말처럼 언니를 좋ㅇ...”
“하겠습니다!!”
“네? 뭐라구요?”
재신은 자신의 말을 끊으면서 들어온 시경의 대답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답답한 남자가 방금 뭐라고 한 거지?
“공주님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언제, 어디로 가면 됩니까?”
재신은 순간 자신이 들은 말을 의심했다.
그렇게 졸라도 안 되더니, 항아 언니라는 말에 한방에 오케이가 떨어질 줄은 몰랐다.
아주 순간적으로 정말 항아 언니 좋아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갔지만, 그래도 하겠다는 말에 좋아서 금방 헤벌쭉해졌다.
환하게 웃는 재신의 표정을 보던 시경이 또 한 번 작은 한숨을 뱉어낸다.
“아~ 하겠다구요? 와아~~잘 생각했어요. 진짜 잘 생각했어!!!!”
재신은 반가운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시경의 손을 양손으로 덥석 잡고는 흔들어대었다.
“공...공주....님!!!”
시경의 목소리가 눈에 띌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시경의 얼굴이 눈에 띄게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어...어?
재신은 순간 잡고 있던 시경의 손을 놓았다.
자신이 시경의 손을 잡았다는 것이 놓고 나니 더 뚜렷하게 손끝에 감각으로 퍼져간다.
갑자기 재신의 얼굴에도 열이 오르는 듯했다.
“그..그럼...내가 연락 다시 할게요. 그럼, 난 바빠서......”
재신은 자신이 왜 이리 당황하는지도 모른 채, 후다닥 공주궁 안으로 뛰어 들어가 버린다.
시경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자신의 손에 주먹을 몇 번이고 힘을 주어 잡았다.
부드러운 손길이 다시금 아스라이 떠올랐다.
얼굴에 또다시 열이 올라오는 듯하다.
한참을 공주궁 밖에 서서, 시경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2
시경은 멍청하게 며칠을 보내고 있었다.
동하가 보기에 뭔가 얼이 빠져 보이기도 했고, 때로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신 거냐고 물어봐도 고개만 흔들 뿐, 딱히 대답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정신을 차리고 있을 때는, 공주님이 근처에 오실 때 정도랄까. 사실 이것도 동하가 보기에는 다른 버전의 얼빠진 행동이기는 했다.
혼이라도 나셨나.
사실 요즘은 그래도 잘 지내시는 편인 듯했는데, 또 아닌 듯했다.
공주님도 그다지 품위가 없으셨습니다, 를 외쳤으니, 사실 그 뒷일은 말해서 뭘 하겠는가.
감봉에 정직을 안 당하는 것만도 감사할 일이니, 저토록 공주님 눈치를 보는 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근데 저 모습이 눈치를....보는 건가?
뭔가......멍한데.......
그러다 공주님이 들어가시고 나면, 또다시 한참을 그쪽만 보고 계시다 다시 한숨을 퍽퍽 쉬는 걸 반복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저래 진짜.
차라리 공주님께 깔끔하게 사죄를 하시는 게 낫지 않나.
옆에서 보는 동하가 더 답답할 지경이었다.
“차라리, 공주님께 딱 깨놓고 석고대죄를 하십시오.”
“뭐?”
보다 못한 동하가 결국 한숨만 푹푹 쉬고 있는 시경에게 한마디 하고야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공주궁으로 들어가신지가 언젠데, 계속 그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한숨만 쉬어대는 자신의 상관이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정 직접 하시기 힘드시면, 제가 대신 전해 드릴 수도 있지 말입니다.”
“염동하! 지금 무슨 소리야?”
“아, 진짜. 중대장님이 이렇게 닭 좇던 뭐마냥 계속 그렇게 끙끙대고 계시는데 어쩝니까?
그렇게 걱정되시면, 공주님께 사죄를 하시는 게 속편하지 말입니다.”
“뭐?”
“홍대도 가시고, 아, 맞다, 저번에 성곽 어디 갔다 오신 후로, 잘 지내시는 줄 알았더니 아니지 말입니다.
그러길래, 말 조심 좀 하시지 말입니다.
아무리 중대장님이 대쪽 같다 하셔도, 이건 뭐, 가릴 건 가리셔야지, 품위가 없으셨다는 둥, 그런 말씀은 아무래도 문제가 있지 말입니다.”
“염동하!!! 그런 거 아니니까, 좀, 빠져 있어!!!”
“예? 그럼...왜?”
그 때 시경의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던 시경의 얼굴이 다시금 붉어지고 있었다.
“어, 공주님이십니다!!”
“어..어......염동하, 넌 좀 나가 있어.”
“예? 제가 말입니까?”
“아, 아니다. 내가 나갈게. 넌 여기 있어.”
뭔가 허둥지둥 당황한 듯, 복도로 뛰어나가는 시경을 보던 동하가 뭔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상한데, 뭔가 이상해.
왜 저러시지.......
공주님 전화를 왜 여기서 못 받으시고 나가시는 거야.
그것도 얼굴이 벌게지셔서는.......
왜 저래 진짜?
자꾸만 이상한 촉이 올라와서 동하는 복도로 나간 시경을 기웃댄다.
쿵쿵거리는 심장을 달래며.
흠흠.....몇 번이나 목을 가다듬다가 시경은 겨우 전화를 받았다.
“예. 공주님.”
“뭐야? 은시경 씨. 왜 이렇게 늦게 받아요.”
“아...그게...흠흠.....나와서 받느라....죄송합니다.”
“뭐, 죄송할 건 없구요.
며칠 전에 말했던 거, 기억하고 있죠?”
“예?”
“아, 진짜!! 이러지 말고 좀!!! 말했잖아요. 소개팅!!!”
“예........”
소개팅이라는 말에 시경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확 잠겨든다.
마치 실망이라도 한 것처럼 가라앉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 재신에게까지 시경의 목소리가 어둡게 느껴졌다.
“은시경 씨? 왜...그래요? 혹시...하기 싫어서..그래요?”
“아, 아닙니다. 약속 드렸으니, 약속 지키겠습니다.”
시경이 싫어하는 듯해서, 재신도 조금은 미안해지기도 했다.
그래도 눈 딱 감고 하는 수밖에 없다.
죽어도 안 한다던 이 남자가 그래도 한다고 한 게 어디야.
“은시경 씨 이번 주 토요일 2시, 홍대 내가 저번에 갔던 클럽 근처 바예요.”
“예? 낮부터 술집에서 만난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거든요? 낮에는 커피도 팔아요.”
“아, 예.”
“흠흠...그리고.....혹시 은시경 씨 친구, 그러니까 절친 있어요?”
“예?”
“은시경 씨랑 진짜 친한 친구 있냐구요.”
“예. 있습니다.”
“그럼, 혹시 그 사람은 애인 있어요?”
“없습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공주님과 대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시경은 불안해진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이런 불안감은 늘 틀리는 법이 없다.
“그래요?
그럼, 그 사람도 그날 데려오면 안 돼요?
그 사람 시간이 안 되면, 다시 맞춰봐도 되고.”
“다른 분이 또 나오시는 겁니까?”
“응. 그렇게 됐어요.”
“근데 왜 제 친구를.....”
“음....2대 2로 하면, 은시경 씨가 뻘줌해 할 테니까
은시경 씨 친구면, 덜 뻘줌하고 그럴 거 같아서요.”
“물어는 보겠습니다만, 제 친구도 이런 걸 별로 안 좋아해서 확답은 못 드리겠습니다.”
“뭐, 그것도 은시경 씨 능력인 거죠.”
“그런데, 다른 분은 누가 나오시는 겁니까?”
“누굴까요?”
재신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그 장난기가 묻어 있는 목소리를 듣자, 설마 하던 시경은 점점 더 불안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말씀해 주십시오. 누가 나오시는지.”
“누구긴 누구예요. 나지.”
“예?”
“나도 나간다구요. 나도 애인 없는데, 그러니까...나ㄷ.....”
“공주님께서 그러면 제 친구와 소개팅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그건, 안 됩니다!!!”
“왜, 안 돼요?”
“그건.........”
“뭘 그렇게 깊게 생각해요? 그냥 하루 놀자구요. 콜?
은시경 씨 소개팅 시켜주면서, 나도 은시경 씨 친구랑 그냥 가볍게 만나서 노는 거죠.
참, 절대로 나라고 얘기하면 안 돼요. 절대로!”
“하아....공주님을 뵈면, 공주님인 줄 당연히 알 겁니다.”
“의외로 사람들 몰라요. 닮았다고 생각하지. 설마 진짜라고는 생각 안 해요.
어쨌든 절대로 말하지 말아요.
무조건 은시경 씨가 친구 꼬셔서 데리고 나와요!!!! 알았죠?”
그대로 끊어버리는 전화.
갈수록 답답해던 가슴이 자꾸 묵직해진다. 가슴에 돌을 얹은 것처럼, 무겁다.
3
됐다!! 이제 그 곡은 내 거다!!!
처음 들을 때부터 내 곡이다 싶었다.
내가 부를 수 있게 해달라고 해영 언니에게 6개월을 졸라댔지만, 끄덕도 하지 않았었다.
6개월 동안 곡 달라고 해영 언니에게 조르고 또 졸랐었다
바쁘다고 싫다고 말하던 언니가, 어느 날 술을 마시다 말고, 제안을 했다.
“좋아. 그럼, 너 얼마 전에 술 마실 때 따라 왔던 근위대원 소개시켜줘.
그럼, 그 곡 너 줄게.”
누구를 말하는 거지?
은시경 아니면 염동하였다.
순간 떠오른 건 은시경이었지만, 재신은 이상하게 먼저 염동하를 입에 올렸다.
“혹시 염동하...중위 말하는 거야?”
“염..동하? 아, 아닌데. 이름이...뭐더라....진짜 이쁜 이름이었는데.......”
이쁜 이름이라는 말에 바로 누군가 떠올랐지만, 재신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누구?”
“왜 있잖아? 눈썹 진하고, 되게 잘 생겼고, 근데 엄청 답답하고 딱딱한 남자.
흉통도 장난 아니고!!
아, 맞다! 생각났어. 그 왜 소설가랑 이름 비슷해.
은희경이랑 비슷한데......아 그래그래, 은....시? 경? 맞지 맞지!!”
“아, 은시경 씨......”
재신은 은시경이라는 이름이 기어코 나오고 나서야 겨우 호응을 해준다.
“역시, 술 취해도 잘생긴 남자 이름은 외우고야 마는 이 근성!! 큭큭큭....
어쨌든 이재신, 은시경, 그 사람 소개시켜 주면 그 곡 너 줄 테니까.....잘 해봐.”
어휴......
“뭐야, 왜 한숨이야?”
“그 남자가 하려고 할지 모르겠다.”
“안 되면, 공주의 명령이다, 해버려.”
“그 사람은, 그런 거 안 통해.”
그가 거절을 할까. 하겠다고 할까.
머리에 드는 생각을 흔들어 내버리고는 그를 어떻게든 설득해 봐야겠다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겨우겨우 성공해서 해영 언니에게 연락을 했더니, 이 언니가 다른 주문을 더 하고 말았다.
“언니!! 그 남자 된대. 하겠대.”
“그래? 역시 공주님의 힘이구나.
참, 근데 그 날 넌 안 나와?”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나가?”
“원래 소개팅은 2:2로 해야 재밌는 거야.
둘이서만 만나면 뭐가 재밌냐?”
“와, 이거 언니 너무 비싸게 군다.
겨우겨우 허락 받아냈단 말야.
근데 다른 남자랑 2:2라고 하면 하겠냐?”
“그래? 그럼, 그냥 없던 얘기로 하지 뭐.”
“뭘?”
“곡 말이야.”
“아~~ 진짜 이 아줌마 정말 너무 하네.”
“나 아직 처자다.”
“여튼.....
아니, 말도 없고, 그런 사람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랑 붙여 놔.”
“그 사람 친구 데려오라 그래.
그럼 되잖아.”
“은시경 씨 친구?”
순간 재신도 괜찮다 싶었다.
그 사람 친구면, 은시경 씨에 대해 잘 알겠지.
어릴 때도 이 상태였는지 궁금하기는 해.
자신도 모르게 재신은 뭔가 재미있는 일이 생긴 것처럼 낄낄대고 있었다.
4
“야, 임마! 너 까먹겠다. 뭐가 이렇게 연락이 안 돼?”
건형에게 전화를 걸면서도, 시경의 마음은 받지 말라는 심정이었다.
바쁜 녀석이니 못 받지 않을까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건형도, 오랜만에 시경이 연락 오자, 하던 회의까지 접고 전화를 받고 있었다.
“미안하다. 궁에 일이 많아서.”
“그래 그래. 니가 지금 대한민국 궁을 홀로 지키시지.
대단하십니다.
근데 웬일이야? 바쁘다는 놈이?”
“너, 요즘 만나는 여자 있어?”
“무슨 소리야? 갑자기 전화해서는...
만나는 여자야 많지. 다들 일로 만나는 게 문제지만.”
“소개팅.....할래?”
“뭐? 너 임마 방금 뭐라 그랬냐?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냐?”
“제대로 들은 거 맞아.”
“갑자기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야.
은시경이. 천하의 은시경이 나한테 여자를 소개시켜 준다고?
야, 너 설마 요즘 연애 하냐?”
“아니.”
“근데? 이런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냐?”
“.......나도 하거든.”
“뭘? 소개팅?”
“응.”
“그럼, 지금 2대2로 하자고 얘기하는 거냐?”
“어. 그렇게 됐다.”
“큭큭큭....내가 살다 살다 니 놈한테 이런 얘기를 다 듣고.
와~ 이거 진짜 특종이다.
동창놈들 모일 때 꼭 얘기해야지. 와! 이건 진짜 내가 직접 들었는데도 믿기지가 않네.
야, 나 꼭 간다. 꼭.
니가 왜 이런 결심을 했는지,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해야지.”
“할....거야?”
“이놈 보소. 야, 임마 너 진짜 웃긴다.
나한테 소개팅 할래 라고 물은 건 니놈이거든.
근데 지금 이건 뭐야? 이 실망스러운 목소리 톤은 어쩔 거야.”
“하아.....아니다.
그럼, 이번 주 토요일 2시 돼?”
“응. 뭐, 안 되더라도 만들어야지.
어쨌든 공판만 없으면 가능해.
어디로 가면 되는 건데?”
“홍대 쪽이야. 정확한 장소는 나중에 문자로 넣어줄게.”
“알았다. 야, 근데 기대되는데?
도대체 어떤 여자길래, 천하의 은시경이 소개팅을 다 하고......”
“토요일에 보자.”
뭐라고 자꾸 놀리고 싶은 건형의 말을 시경은 잘라내고는 전화를 끊었다.
자꾸만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가슴에 자꾸 돌이 내려앉아서 숨도 쉬기 어렵게 한다.
5
건형이 바 안으로 들어오자, 검은 수트에 각 잡힌 채 앉아 있는 시경이 보였다.
저 자식은 어디에 있든 군기 작렬이다. 내 참.
“어, 왔어?”
“미안하다. 스케줄 조정하는 데 힘들었다. 좀 늦었지?”
“괜찮아. 어차피 공...아..아니....여자분들도 좀 늦어진다고 했으니.....”
“그래? 그럼 다행이고.”
둘이 멀뚱하게 앉아 있는데, 시경이 뭔가 불안해 보인다.
“뭐야? 무슨 할 말 있어?”
건형은 시경을 안다.
아버지끼리 대학 친구셨고, 아주 어려서부터 불알친구로 지내왔다.
초, 중, 고를 다 같이 다닐 정도로 희한하게도 붙어 다녔었다.
비록 시경이 육사를 갔지만, 뒤에 사시 준비할 때도, 같이 준비하기도 했다.
결국 붙어놓고서도 저 놈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팽개쳐 버렸지만.
건형은 알고 있었다.
시경이 사시를 친 이유는 단 한 가지라는 것을.
오로지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그래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사시는 오로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한 도구였다.
자신이 능력이 없어서 법조계로 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로지 사시 통과를 통해서 보여준 것이었다.
그리고는 단칼에 버리고는 바로 군으로 들어갔다.
어쨌든 난 놈은 난 놈이었다.
육사도 전체 톱으로 들어가서 톱으로 졸업한 놈이니, 말해본 들 뭘 하겠는가.
그런 놈이 지금 내 앞에서 물을 몇 번이나 들이키며 긴장하고 있다.
오랜 내 촉은 알고 있다.
지금 이 놈은 평생 겪어보지 못한 감정이라는 것을 겪고 있다는 것을.
흥미롭다.
이런 이 놈을 본다는 것도......
정말 살다 살다 이 놈의 이런 꼴도 다 보다네. 나 참.
“말해라.”
또다시 컵에 든 물을 마시고는 드디어 이 놈이 입을 뗀다.
“건형아.”
“뭐야?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분위기 까는데?”
“미안하지만, 부탁 하나 들어줘야겠다.”
“야, 임마, 부탁 들어달라고 애걸복걸해도 될동말동인데, 들어줘야겠다?
이게 민간인한테도 명령질이냐?”
건형이 농담처럼 던지는 말에도 시경의 얼굴은 여전히 굳은 채로 풀릴 줄 모르고 있었다.
그제서야 건형이 진지하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오늘 만나는 그 사람, 좋아하지 마라.”
“뭐?”
건형은 방금 들은 말을 이해할 수가 없다.
소개팅하는 여자를 좋아하지 말라니.
아니, 그러면서 소개팅 하라는 건 도대체 어느 나라 룰이란 말인가.
이 자식이 궁에 오래 있더니, 머리가 돌아버린 건가.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좋아하지 말라고.
그냥 하루 만나고 스치는 걸로 생각하라고.”
그리고는 입을 다문다.
건형은 뭔가 감이 오고 있었다.
이 놈이 이럴 때는 더 물어봐서는 안 되겠다는.
“누구 때문에 그러는 건데?
나야? 아니면 그 여자 때문이야?”
“두....사람 다........”
“2:2라더니 이미 파트너는 있는 거야?
결국 이거군.
너랑 그 여자는 아는 사이고, 각각 자신의 친구를 각자에게 소개시켜준다....라?
뭔가 묘한데?”
시경의 눈이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 자식이 지금 당황하고 있는 거다.
이 놈이. 사시 합격하고 나서 연수원 들어가지 않겠다고, 아저씨께 말씀드릴 때도 떨지 않았던 놈이다.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았던 놈이다.
그런데 이 놈이 흔들리고 있다.
이 자식, 뭔가 있다. 분명.
그 때였다.
입구 쪽에서 재신과 해영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빛이 난다.
시경의 눈이 재신을 향하는 걸 본 순간, 건형은 오늘 자신이 누구를 만나러 왔는지 알게 되었다.
오렌지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하늘 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그 사람은 마치 빛을 몰고 다니는 것 같았다.
빛이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사람이 건형을 향해서 활짝 웃고 있었다.
그 미소를 바라보던 두 개의 심장이 덜컥 하고 내려 앉는다.
눈에 띄게 멈칫하는 시경을, 그 흔들리는 눈빛을, 재신과 함께 들어오던 해영이 바라보고 있었다.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자리에 앉은 재신에게 건형이 바로 물었다.
“혹시.....”
“네?”
다시 시경을 한 번 보던 건형은 재신에게 결심한 듯, 운을 떼었다.
“공주님....아니신지.....”
그 말에 재신은 바로 웃어버린다.
“큭큭큭큭....나 그런 말 진짜 많이 들어요.
아니에요.
아니다. 이참에 그냥 공주 흉내내고 다닐까, 언니? 큭큭.”
“야, 너 그러다 잡혀가. 너 왕실 모독죄야.
너 저번에도 당해놓고 이러냐?”
해영이 타박을 주자, 다시 까르르 웃는다.
건형은 그런 재신을 보는 것이 혼란스러웠다.
분명, 그녀는 공주님이었다.
그런데 아니라니. 이토록 닮았는데.
그녀의 주변에는 분명 빛을 몰고 다니는 아우라가 있었다.
예전 법조인 모임 행사에서 잠시 참석하셨던 공주님을 먼발치에서 뵌 적이 있었다.
분명 공주님이 맞다.
그런데 아니라니.....
세상에 이토록 닮은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에요. 저, 닮았다는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그 때문에 지금 이 앞에 있는 이 남자한테 팔목도 꺾였어요.”
“예? 시경이가요?”
“제가 무대에서 공주님 욕 했다고 다짜고짜 제 팔을 뒤로 확~꺾었다구요.”
“진짜야? 너, 여자한테도 그래?”
재신의 말에 건형은 기가 막혀 하며 시경에게 말하자, 시경은 얼굴이 확 붉어진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두 사람 아는 사입니까?
어떻게....?”
“아, 제가 클럽에서 노래 부르다가 만났어요.
제가 공주님 욕해서, 이 분이 욱하셨거든요.”
“그런데 그 이후 이렇게 서로 연락하시게 된 겁니까?”
“음....그렇게 됐네요.
뭐, 따로 연락할 일은 없지만, 보시다시피...
제 팔을 꺾은 김에, 남자 소개시켜달라고 했죠.”
“그럼.....시경이도 괜찮지 않습니까?”
그 말에 시경의 목울대가 눈에 띄게 움찔거린다.
건형은 그런 시경의 모습을 날카롭게 관찰하고 있었다.
“지금 초면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제 팔을 꺾었다니까요?
난, 무서운 남자는....No, thanks예요.”
무서운 남자라는 말에 시경은 금세 놀란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아니, 고통스럽다는 표정이 맞을지도 몰랐다.
억울하면서도 상처받은 듯한 표정이었다.
“저봐, 저런 표정 짓는다고 속으면 안 돼요.
순진한 남자인 척하면서 약한 여자 팔목 확 꺾는다구요.”
“그날은. 고..공....흠흠....잘못하신 게 맞지 않습니까!”
“아, 예예 알았어요.
그리고, 약속 지켜요, 은시경 씨!”
재신이 시경을 바라보며 눈짓을 하자, 움찔하며 시경이 다시 헛기침을 한다.
재신이 너무 시경을 닦달하는 것 같자, 해영이 재신을 결국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재신아 너 팔목 꺾인 걸로 진짜 뒤끝작렬이다.”
재신?
어, 공주님 성함인데?
“이름이.....재신? 맞으십니까?”
건형이 놀란 듯 묻자, 재신은 늘상 겪는 일인 듯 천연덕스럽게 대답을 한다.
“나참....이름까지 이래서 더 오해 받아요.
근데, 저희 엄마가 공주님 이름으로 지은 거예요.
제가 공주님보다 한 살 어려요.”
“예.......”
재신의 설득에 건형도 어느 덧 받아들이게 된 건지, 네 명은 화기애애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주로 재신과 건형이 말을 주고받다가, 해영이 끼어들기도 했고, 해영이 어쩌다가 시경에게 말을 건네면, 그제서야 시경은 단답식으로 대답을 겨우 하곤 했다.
재신은 건형과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아무 말 없이 물만 마시고 있는 시경이 신경 쓰였다.
자신 때문인지도 몰랐다.
공주 앞에서 소개팅을 하려니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싶었다.
소개팅하라고 한 게 나니까, 제대로 해줘야 하지 않나 싶기도 했다.
그리고 건형과 따로 만나면서, 시경에 대해 물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시경이 앞에 있으니, 시경에 대해 물어 보는 게 아무래도 눈치가 보였다.
“저, 이제 찢어지는 게 어때요?”
“예...예?”
시경이 들고 있던 물을 탁자에 놓았다.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지, 탁자에 금이 갈 듯 쾅~하고 소리가 났다.
“어...어!! 은시경 씨, 진짜 힘 좀 빼고 살아요.
군인인 거 아니까.....
내가 그랬죠. 은시경 씨 무섭다고..........”
“아, 죄송합니다.”
시경이 황급히 사과를 한다.
그래도 그의 눈은 뭔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재신은 그런 그를 못 본 척하고는, 건형에게 나가자며 일어섰다.
“공......”
“은시경 씨!!!!!”
순간 시경의 입에서 “공”이라는 말이 나오자, 재신은 황급히 은시경을 불렀다.
“박.건.형 씨랑 전 나갈 테니까.
은.시.경 씨는 여기 있는 언니랑 재미있게 놀아요. 알겠죠?
내가...나중에 연락할게요.”
“저..저...잠시만요.....”
시경이 뭔가 재신을 잡아보려 하지만, 재신은 바로 일어서며 건형을 재촉했다.
“나가요. 박건형 씨.
나랑 나가는 거, 싫진 않죠?”
그녀가 건형을 향해서 미소짓고 있었다.
그 미소에서 빛가루가 떨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싫다니요? 저야 영광이죠.”
건형의 말에 재신이 풋 웃으며, 가방을 챙겨서는 먼저 걸어나간다.
시경은 나가는 재신과 건형을 계속 보고만 있다.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녀의 뒷모습만 쫓고 있었다.
“은시경 씨!”
“예...예?”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오해해요.”
“뭘 말입니까?”
“방금 은시경 씨 시선....말이에요.
직업의식이 투철한 거예요? 아니면...다른....뭐라도..”
“아닙니다. 습관입니다.
그리고 뭣보다 공주님께서 나와 계시니 제가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습니다.
지금 근위대원들도 못 데리고 나온 상황이라......”
“어릴 때부터 친한 사이라면서요.”
“예.”
“그럼, 걱정 안 해도 되지 않나?”
“예?”
“건형 씨, 믿을 만한 사람이라면서요. 그럼 공주님 걱정 안 해도 되잖아요.”
“....예....그렇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시경의 시선은 자꾸만 두 사람이 나간 문을 향한다.
해영은 한숨을 작게 쉴 뿐이었다.
6
“술 마시자.”
그날 밤, 건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늘 마시던 곳에 가 앉아 있으면서 둘은 아무 말 없이 술만 마시고 있었다.
“재신 씨.....”
재신 씨라는 말에 시경이 고개를 들어 건형을 바라본다.
시경은 놀란 듯하면서도 눈빛이 어둡게 잠겨 있었다.
“재신 씨, 잘 들어갔어. 걱정 마.”
“응.”
대답은 했지만, 재신 씨라는 말에........시경은 가슴이 덜컥거린다.
자신은 단 한번도 그렇게 불러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이 놈은 아무렇지도 않게, 재신 씨라고 부른다.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놈인데, 이 녀석 아버지도 판사셨고, 우리 아버지도 그러셨는데,
그리고 둘다 같은 학교 다니면서, 사시도 같이 치고, 같이 붙고.....
그렇게 모든 게 비슷하게 살아왔는데
다른 게 있다면, 이 녀석은 변호사가 된 것이고, 나는 근위대로 들어왔을 뿐인데
그 차이가 이토록 큰지 몰랐다.
이 녀석의 입에서는 재신 씨가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지만, 나는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이 가슴을 자꾸만 묵직하게 눌러왔다.
“넌 오늘 재미있었냐?”
“뭐, 그럭저럭.”
그럭저럭이라며 대답하는 시경의 말과는 달리, 표정이 썩 좋지가 않다.
오랜 지기인 건형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근데 표정이 왜 그래?”
“표정? 나 원래 없잖아.”
“글쎄, 표정이 없는 게 아니라 있으니까 이러는 거지.”
“뭐?”
“시경아, 나 아무래도 너랑 한 약속, 못 지키겠다.”
“무슨 말이야?”
시경은 불안함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건형의 눈빛이 진지해져 있었다.
“나, 계속 만나고 싶다. 재신 씨.”
불안한 듯 뛰고 있던 심장이 쿵.......소리를 내며 떨어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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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왜 단편이 단편이 아닌 걸까요?
분명 가볍게 시작하려 한 글이었는데, 점점 길어지더니 결국 둘로 잘라야 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말았다지요.
이미 24장이나 되어서 여기서 끊고 후편을 가지고 와야겠다 싶었습니다.
뒷 부분도 많이 적어놓았는데, 중간 에피를 덜 적어서 다 올리질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상, 하편으로 구성해서 다음에 하편을 올릴게요.
사실 이 글은 제 마감 자축 글로 토요일 오전에 일 끝나고 오후에 와서 갑자기 필이 와서 적은 글이랍니다.
그런데 쓰다가 기절해버렸어요.
잠을 며칠 동안 아예 못 잤더니 바로 기절을 해버리더라구요.
그래서 그 때 던져두었다가, 일요일까지 계속 기절 상태라, 못 건드리고,
월욜도 너무 바빠 못 건드리다가, 이제야 잡고 썼는데,
이런, 왠 걸...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분명 가볍게 쓰기 시작했는데, 왜 쓰면 쓸수록 심각해지는 건지.....ㅠㅠㅠㅠㅠ
사실 하편의 상황을 쓰고 싶어서 쓰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 상편의 상황이 길어졌네요. ㅠㅠㅠㅠ
사실은 당.기.못 너무 오래 기다리시는 듯해서 단편이라도 빨리 쪄야지 싶어서 적었는데요.
이것도 장난이 아니네요.
어쩌다가 단편이 2편이 되어버렸습니다.
어쨌든 요 단편으로다가 조금만 참아주시길...
당.기.못은 조금 더 기다려주시길.....ㅠㅠㅠㅠㅠ
일하다가 당.기.못의 감정 상태로 다시 이입되려니, 체력적으로 엄두가 안 나서요.
공주님과 은시경의 이야기는 쓰고 싶고, 당.기.못은 쓰려니 엄두가 안 나고,
그래서 시작한 이야기가 이 단편인데요.
문제는 이 단편도 이토록 길어지니, 제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싶기도 합니다.
그래도, ㆅㆅㆅ 단편에는 늘...제 로망을 담는 그릇이라서뤼.....
그저 제 로망 퐝퐝~~넣어봅니다.
비루하더라도 즐감해주시길.....(__)
하편은 목요일에 가져올게요.
오늘 밤도 평안하시길.....(__)
+) 참 은시경의 친구는 바로 박건형 씨....ㆅㆅ 뮤배라 친하신 듯해서 넣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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