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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신/단편) 그는 왜 고개를 돌리고 있을까 (하) - 전체 공개 버전

그랑블루08 2012. 12. 25. 03:16

(은신/단편) 그는 왜 고개를 돌리고 있을까 (하)

 

 

 

 

49

 

 

다시 겨울 - Sweet Sorrow

겨울이 내린 거리엔 모두가 들뜬 모습뿐
그대만 그대만, 내게만 내게만, 없는거야 그런거야

혼자가 외롭긴 해도 어떻게든 살아지더군
그러다 그러다, 힘들면 힘들면, 네 기억만 붙들고있어

눈 오던 겨울밤의 인사
쓸쓸했던 그대 Merry Christmas
그대의 마지막 배려였나요

나에겐 그대만이 나 오직 그대만이
나를 살게하는 이유 내 모든 꿈이라고
아직도 그대만이 내 삶의 전부라고 믿어요
다시 돌아와 줄 순 없나요

모른 척 살아야 한대 더 이상 아프지 않게
그러다 그러다, 덧나고 덧나면, 오늘처럼 무너지고있어

눈 오던 겨울밤의 인사
쓸쓸했던 그대 Merry Christmas
내게는 마지막 오해였나요

나에겐 그대만이 나 오직 그대만이
나를 살게하는 이유 내 모든 꿈이라고
아직도 그대만이 내 삶의 전부라고 믿어요
그대여 그대여 너무 늦은건가요

그대만이
그대만이 결국엔 그대만이
휘청거리는 내 맘을 안아줄 수 있어요
아직도 그대만이 내 삶의 전부라고 믿어요

다시 돌아와줘 그대

Merry Christmas



가사 출처 : Daum뮤직

 

 

 

 

 

1

 

 

 

으음.....하아..........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자꾸만 입술 사이로 야한 소리가 새어나오고야 만다.

마치 낯선 여자의 목소리인 듯, 자신의 목소리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재신은 자신이 너무나 낯설었다.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감각들이 다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나 아팠다.

그러나 아픈 만큼, 설레기도 했다.

 

“공주님, 제 여잡니다.

절대로 아무에게도 안 빼앗깁니다.

제 겁니다. 공주님.”

 

자신의 불안을 말끔히 없애주는, 그의 고백이 자꾸만 가슴 저 안까지 맴돌며 가슴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그가 내게 소유욕을 보여줄 때, 이렇게 집착해 올 때,

뭔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솟아올라오는 것 같았다.

정말 사랑받고 있다는......정말 이 남자가 나 때문에 죽을 것 같구나 하는....그런 느낌.

 

 

 

---------------중략-------------------

 

 

 

조금은 급하게, 조금은 서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도 그 서툴게 다가오는 것이 좋았다.

그의 서툰 손길에는 그의 설렘이, 그의 두려움이, 그리고 그의 온전한 마음이 들어 있었다.

서툴면서도, 아까워하는 그의 손길이, 자꾸만 두근거리게 했다.

나를 만지면서, 그것을 아까워했고, 두려워했고, 그렇게 자신이 다가가도 되는지 머뭇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또한 그만큼 못 참아 했다.

나 때문에 미쳐가는 그가 좋았다.

 

 

------------------------------중 략--------------------

 

 

 

어쩌면 이 모든 건 모두 자신의 변명일지 모른다.

그녀를 갖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 앞에 모든 것은 다 변명이었다.

갖고 싶다.

온전히 갖고 싶다.

그래서 그 누구도 그녀를 빼앗지 못하게 자신만의 여자로 만들고 싶었다.

다른 남자라는 생각만으로도 숨을 쉴 수가 없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어떻게 내가 빼앗길 수 있을까.

어떻게 이 사람을 내가 놓칠 수 있을까.

 

 

-----------------중 략-------------------------

 

 

징징징징......

 

아까부터 바닥에 규칙적인 진동 소리가 나고 있었다.

시경의 옷은 침대 바로 옆에 던져져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다.

 

 

“시경 씨, 잠깐만....”

 

“왜 그러세요? 공주님?”

 

갑자기 재신이 시경을 부르자, 시경은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본다.

 

“나, 전화 받아야 할 거 같아요.”

 

“받지 마세요. 공주님.”

 

“안 돼요. 아무래도 큰오빤 거 같아.”

 

큰오빠라는 말에 시경이 바로 경직된다.

 

“풋~ 큰오빤 겁나나 보죠?”

 

“아니...저...그게....”

 

시경은 아쉬운 듯 재신의 몸에서 비켜나더니, 폰을 찾아서 가지고 왔다.

역시 큰오빠였다.

 

“응. 오빠.”

 

“재신이 너,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늘 부드럽던 재강의 목소리가 경직된 듯 딱딱했다.

 

“어? 오빠 전화 많이 했어? 잠깐만.”

 

부재중 전화가 9통이나 찍혀있었다.

 

“뭐야? 열 통이나 한 거야?”

 

“열 통 채워도 안 받으면 에든버러에 비상 걸려고 했다.”

 

“오빠!!!!”

 

“그러니까 왜 이렇게 늦게 받았어? 걱정 되게.....”

 

오빠의 목소리에서 걱정이 묻어나오자, 재신은 죄책감 같은 것이 들기도 한다.

 

“나? 잤지.”

 

“벌써 잤다고?”

 

“응. 나 요즘 논문 쓴다고 계속 밤샜잖아.

잠도 못 자고 행사 왔는데.

어휴 나 참. 2세들이 얼마나 꼬이는지 피곤해 죽을 뻔했잖아.

자꾸 꼬이길래 아프다 그러고 객실에 올라와서 잤어.”

 

“진짜 잔 거 맞아?”

 

“아니, 큰오빠, 작은오빠 닮아가? 왜 이렇게 동생을 못 믿어?”

 

재신의 목소리가 피곤한 듯 조금은 허스키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공부하고 있는 막내 동생이 안스러워서 재강의 목소리가 조금은 풀린다.

 

“많이 피곤해? 잠도 좀 자면서 해.”

 

“어휴, 오빠, 모르는 소리한다.

공부엔 왕도가 없잖아. 밤 안 새면 논문은 안 나와.

어쩔 수 없지 뭐. 내 미모가 깎이는 한이 있더라도, 밤 새가며 해야지...에효.....”

 

재신이의 한숨 소리에 재강의 마음은 자꾸만 약해지고 있었다.

그만 두라고 말하고 싶기도 했다.

그래도 자기가 그토록 좋다는 데, 이 놈 성미에 꼭 끝까지 하려 할 거고....

이것 참.......

 

“근데 오빠, 나 큰오빠한테 실망했어.”

 

재신의 목소리가 굳어 있었다.

재신의 말에 재강도, 그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시경도 놀란다.

 

“무..무슨...소리야? 오빠가 왜?”

 

재강은 이미 재신의 손아귀에 들어오고 말았다.

 

“난, 큰오빠가 이런 사람인 줄 진짜 몰랐어.

정말 실망이야.”

 

“야, 재신아. 오빠가 뭐가? 자꾸 전화해서 그래?

아니, 그거야 오빠가 걱정되니까......그...근위대원들도...갔고......”

 

재신은 뭔가 낌새를 채고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수많은 근위대원들 중에 왜 굳이 은시경을 보냈는지, 또 필요하지도 않은 근위대원을 왜 보냈는지,

게다가 지금 뭔가 불안해 하면서 전화를 이토록 많이 하는 이유도,

모두 뭔가 이상한 촉이 왔다.

 

결국 큰오빠의 입에서 근위대원이라는 말이 나왔다.

오빠는 지금 근.위.대.원에 대해 신경 쓰고 있다는 거다.

이럴 때일수록, 더 세게 나가야 한다.

 

“그래, 그 근위대원. 도대체 왜 보낸 거야?

여기 인원으로 충분했잖아. 굳이 왜 보내?”

 

“아, 아니.....그게......인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아무래도 위험할 수도 있고......”

 

“무슨 소리야? 겨우 하루 하잖아. 근데 보낸 인원도 그래. 3명?

이건 보낸 거야, 만 거야?”

 

재강이 점점 재신에게 말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뭐라고 대답하기도 뭣한 상황이었다.

 

“솔직히 말이야. 오빠.

좋아. 오빠가 노파심에 보냈다고 치자.

근데 2박 3일?

그것도 오며 가며 하루 씩 비행기에서 보내고,

에든버러 행사에 하루?

와~~오빠 그러는 거 아니다~~”

 

“어...어?”

 

“이것 보게. 내가 큰오빠를 잘못 봤어.

오빤 그래도 사람을 생각하는 따뜻한 왕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봐.”

 

“재신아.......”

 

“오빠, 이코노미 타본 적 없지?”

 

“응?”

 

“그러니까 모른다고.

이코노미 타고, 하루 종일 와 봤어?

앉으면 다리가 앞 의자에 닿고, 남자들은 좁아서 더 힘든데,

게다가 구겨진 채로 계속 끼여서 20시간 가까이 타고 와봤냐고.

그렇다고 비즈니스 석을 끊어준 것도 아니면서,

이틀을 그 좁은 닭장에 앉혀 놓고, 여기 하루?

와~ 오빠, 악덕 기업주도 이런 기업주가 없다.”

 

“재..재신아...그..게.....”

 

재신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이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같다.

그러나 불안해서 시간을 많이 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면, 재신이 힘이 나지 않을까 싶기도 해서,

게다가 은시경 대위도 요즘 죽어가는 듯해서,

둘에게 잠깐의 선물을 주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또 긴 시간을 줄 수는 없었다.

이 어리고 예쁜 여동생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다.

남자는 다 늑대다.

 

“그래서? 계속 이 스케줄 고집하겠다고?”

 

“휴우.....알았어. 스케줄 조절하라고 할게.”

 

“어느 정도 줄 건데?”

 

“돌아와서 할 일도 있으니까, WOC 일도 있고,

너한테 보낸 근위대원들 2명이 WOC 소속이니까, 그렇게 시간을 많이 줄 수는 없어.”

 

“그래서, 며칠 줄 거냐고?”

 

“.......하루......”

 

“와~~!!!! 대~~단하십니다. 전하~~

하루? 겨우 하루?”

 

재신은 흥분하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러자, 진정하라는 듯이 시경이 재신의 손을 잡았다.

그 손길에, 재신은 옆에 시경이 있다는 걸 그제야 느끼고는 얼굴을 붉혔다.

 

 

------------------중 략----------------

 

 

 

 

“흠흠...오빠....알겠어. 일단, 나 피곤해서 잘래.”

 

“뭐? 그럴래? 그래. 좀 쉬어. 오늘 수고했어.”

 

재강도 사실 오래 전화를 해봐야 자신에게 좋을 건 없었다.

재신에게 말리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에, 녀석이 자겠다고 하자,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응. 응......”

 

재신은 대충 대답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시경 씨!! 왜 이래요? 전화하는데......”

 

재신이 예쁘게 흘겨보자, 시경은 그 모습도 너무나 사랑스러울 뿐이었다.

 

 

-------------------------중 략---------------------

 

 

   

 

 

2

 

 

 

시경이 눈을 떴을 때는 아직 동이 트기 전이었다.

공주님께서 자신의 방에 너무 머무르면 안 될 텐데....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재신은 너무나 곤하게 자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젯밤 그토록 재신을 못살게 굴었으니, 여린 그녀가 이렇게 지칠 수밖에없었다.

그러나 시경은 후회는 되지 않았다.

 

 

 

----------------------중 략--------------------

 

 

 

사랑의 흔적이 남은 그녀의 모습이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아니 더 색스럽게 느껴져 참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시경은 더 참지 못하고, 아직도 곤한 잠에 빠져 있는 재신의 입술을 다시 한번 또 머금었다.

 

으음......

 

재신의 입술에서 한숨 같은 신음 소리가 나왔다.

살짝 몸을 뒤척이던 재신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아얏!”

 

“공주님!!! 어디, 아프세요?”

 

“으응........좀....쓰려서........”

 

협탁 위에 놓인 스탠드 불을 시경이 켜자, 재신이 얼굴을 찌푸리며, 시트 안으로 얼굴을 넣어버린다.

 

“뭐야? 나, 더 자고 싶어.”

 

“.....더...주무세요.”

 

시경은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춘 후, 아랫도리를 챙겨 입은 뒤 욕실로 들어갔다.

 

벌써 씻을 모양인가봐.

 

재신은 그러려니 하며, 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시경이 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왔다.

 

 

------------------중 략--------------------- 

 

 

“공주님......”

 

“.......응?”

 

그의 손길에 재신의 목소리가 조금은 나른해져 있다.

 

“죄송합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뭐가? 죄송해요?”

 

“어제.......제가 너무........”

 

“너무 뭐?”

 

뭔가 쑥스러운 듯, 또 미안한 듯, 주저주저하고 있는 이 남자가 귀여워서 재신은 좀 더 놀려주고 싶다.

어제는 막 달라더니, 지금은 또 이렇게 순한 양처럼 이러다니......

이 남자야! 당신 어제는 짐승이었다고!!!

왜 이래?

 

“너무, 제 욕심대로 공주님......을....가져버려서......”

 

“풋~ 그래서, 후회한다구요?”

 

“후회하지...않습니다.”

 

조금은 단호한 말에, 재신의 눈이 동그래진다.

그 눈을 바라보다 다시 시경은 흠흠 하며 당황한 듯 목을 가다듬었다.

 

“나, 아프게 해 놓고, 그래도 상관없다고?”

 

아프다는 말에 시경의 눈이 다시금 걱정스럽게 변하지만, 그래도 눈빛만은 단단했다.

 

“공주님, 이제 제 여잡니다.”

 

“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 원래 시경 씨 여친이잖아요. 근데 뭐가 ‘이제’라는 거예요?”

 

“이젠 도망 못 가십니다.”

 

이 남자는 아직도 그렇게 불안한가 보다.

내가 그렇게 믿음을 못 준 걸까.

늘 이렇게 내가 불안한 걸까, 이 남자는.......

 

그의 손이 내 입술을 훑고 있다.

그의 눈이 깊게 잠겨만 간다.

 

“공주님, 이제 다른 남자한테 못 가십니다.

평생 제 곁에 계셔야 합니다.

전 죽어도 공주님, 못 놔드립니다.”

 

그가 내게 소유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이 가슴 설레면서도, 자꾸만 이 남자를 놀려보고도 싶다.

 

“나 참, 요즘 이런 건 아무 것도 아닌데?

내가...좀...늦은 편이지....

원래 시작하는 게 어렵지, 그 다음은...쉽다더만......”

 

“공주님!!!!”

 

재신의 도발에 시경은 바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의 미간에 주름이 지며, 또다시 그는 짐승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재신은 긴장해서 마른 침을 삼켰다.

 

“공주님, 제발...그런 말씀 마세요.

저 죽이고 싶으세요?

공주님은 쉽게 던지시는 말에, 전 죽습니다.

제 마음 아시면서, 제발, 그렇게 잔인한 말씀은...하시지 마세요.”

 

그의 눈이 고통스럽다.

바보, 왜 이렇게 이 남자는, 내 말 한 마디에 이토록 흔들려버릴까.

늘 딱딱하고 단단한 천상 군인인 이 남자가, 이렇게 흔들려버리니까, 자꾸만 괴롭히고 싶잖아.

 

재신은 자신을 아프게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목에 두 팔을 감아 자신에게 끌어온다.

 

“바보.....아직도, 내 맘을 이렇게 몰라.”

 

“예?”

 

“나, 은시경 씨, 아주 많이, 사랑해요.

이런 마음, 이렇게 누군가를 많이 사랑해 본 거,

처음이에요.”

 

“공주님.......”

 

시경의 목이 메는 것 같다.

아까까지 죽을 것 같던 심장이, 떨려서 이젠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전, 사랑한다는....말로는.......부족합니다.”

 

“응?”

 

“제 마음은, 공주님을 향한 제 마음은, 사랑한다는 말로는.....

도저히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시경의 입술이 그대로 재신의 입술로 깊이 깊이 다가왔다.

달뜬 입맞춤 소리만 그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2

 

 

 

“중대장님, 들으셨습니까?”

 

아침을 먹기 위해 호텔 스카이라운지 층에 올라와 있던 동하가 은시경을 보자 툭하고 던진다.

 

“뭘?”

 

“저희 일정 하루 밀렸답니다.”

 

“아........”

 

뭔가 더한 반응이 나올 거라 기대했던 동하에게, 시경의 이 반응은 그다지 만족스럽다고 할 수 없었다.

 

“뭡니까? 중대장님은 아셨습니까?”

 

“어? 아...아니.....”

 

동하는 아니라고 말하는 시경을 못 믿겠다는 듯이 이리저리 훔쳐본다.

 

“뭐, 어쨌든, 우리 공주님, 넘 좋으시지 않습니까?

공주님께서 전하께 부탁드렸답니다.

역시 우리 공주님이시죠?”

 

“염동하!!!”

 

“예, 예?”

 

“말, 조심해라.”

 

시경의 눈이 날카로웠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동하가 눈만 껌뻑거린 채, 억울하다는 듯, 시경을 보자, 시경은 뭔가 울컥하고 올라온다.

이 자식이, 어디서!!!

 

“야, 염동하, 너, 말버릇! 좀 안 고칠래?”

 

“뭘 말입니까?”

 

“너 방금.....그러니까......공주님을 함부로 말했잖아.”

 

“예? 함부로 말입니까? 제가 언제 말입니까?”

 

이 자식이!!!

 

“니가 방금..........하아......우리.....공주님이라고 했잖아!!”

 

“예에? 그게 잘못된 겁니까?”

 

“야! 염동하!!!!”

 

시경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때쯤,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들 뒤에서 들렸다.

 

“우리 공주님이지. 그럼, 남의 공주님인가?”

 

공주님이셨다.

 

염동하와 김동욱이 공주님을 보자 바로 일어서서 고개를 숙였다.

시경은 공주님과 눈이 마주치자, 바로 얼굴이 확하고 붉어진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노란 스웨터에 청바지를 입은 그녀는, 마치 대학생 같았다.

그녀에게서, 봄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흠흠......나오셨습니까, 공주님.”

 

겨우 가슴을 진정시키며, 시경이 공주님께 인사를 건네지만, 떨리는 목소리는 감춰지지 않았다.

 

“나, 여기 앉아도 되죠?”

 

“예?”

 

재신은 대답도 듣지 않고, 시경의 옆자리에 앉아 버린다.

그러고 보니, 곁에 궁인들이 보이질 않았다.

 

“궁중실장님과 궁인들은 같이 안 오셨습니까?”

 

“아, 아까 일찍 내려가서 식사하고 오라고 했어요.

내가 좀....오.래. 누.워. 있느라.......”

 

재신이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을 하자, 시경의 얼굴은 이제 달아오르다 못해, 익어버릴 것처럼 붉어졌다.

 

뭐야, 이 남자.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야?

이거 뭔가 바뀐 거 아니야?

내가 부끄러워해야지! 왜 자기가 부끄러워 해!!

아, 진짜 이 남자!!! 어떻게 낮과 밤이 이렇게 다르지?

낮에는 순한 양이고, 밤에는 짐승이야?

 

짐승이라고 떠올린 순간, 어젯밤의 짜릿했던 순간이 떠올라, 재신의 얼굴도 홧홧해진다.

 

“음음....나도 이제 먹어야지.

은시경 씨, 나 야채랑, 과일이랑 좀 가져다 줄래요?”

 

“예? 예. 알겠습니다.”

 

시경이 음식을 가져오는 동안, 재신은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염동하와 김동욱과 함께 화기애애하게 떠들고 있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릴수록 점점 열이 올라오고 있었다.

과일을 담으면서도, 계속 시선은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가 웃는 게 보인다.

너무나 아름답게 웃는 그녀의 모습이, 자꾸 불안하게 만든다.

염동하 저 자식은 왜 저렇게 공주님께 가까이 있는 건지,

김동욱 저 놈도 외국물 좀 먹었다고, 은근히 공주님께 편하게 대하는 것 같다.

모두가 적이었다.

사방팔방 모두 적밖에 없는 듯했다.

화가 나고, 초조하고, 불안하고.......

뭐가 이런 건지, 나라는 인간이 왜 이렇게 쪼잔한 건지, 왜 이렇게 불안한 건지......

어젯밤 그토록 그녀를 안았으면서, 그녀의 전부를 가졌으면서, 그녀의 처음을 받았으면서,

나는 왜 이토록 불안할까.

정말.......난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한국에 돌아가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게 아니까 싶었다.

혹시나 이러나 의처증 같은 거라면, 정말 큰일이다.

이렇게 계속 공주님을 숨 막히게 한다면, 자유분방한 그녀라면 떠나고 말 것이다.

 

자신이 이럴 줄은 정말 몰랐다.

친구 녀석들이 문자에 목을 매고, 전화를 걸고, 여자 친구를 관리할 때도, 작작 좀 하라고, 핀잔을 주곤 했었다.

심지어, 여자 친구에게 숨을 쉴 수 있는 틈을 좀 주라며, 그렇게 못 믿으면, 여자 친구가 도리어 떠날 거라고 훈수까지 두곤 했다.

그 사람의 영역을 지켜주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조언까지 했었는데,

정작 자신이 이럴 줄 몰랐다.

자신은, 이때까지 봐왔던 그 어떤 친구 녀석들보다 더했다.

아니, 너무 심했다.

 

정말 걱정이다.

정말 자신은 정상이 아니다.

정말 정신과 상담이라도 받아봐야겠다.

공주님께서 내게 질리시기 전에, 고쳐야 한다.

 

그러나 테이블로 돌아오면서 세 사람의 웃음 소리를 들으면서는 또다시 올라오는 질투라는 감정에 시경은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진짜, 진짜, 은시경 씨가 정말 그랬어요?”

 

“중대장님, 장난이 아니셨습니다. 휴대폰만 맨날 보고, 한숨 쉬고 난리도 아니었다니까요.”

 

동하의 말에 자리에 앉던 시경의 눈초리가 올라간다.

 

“뭐? 요?”

 

“예? 중대장님?”

 

“말투..........조심해라.”

 

“아, 예. 시정하겠습니다.”

 

시경의 목소리가 뭔가 화가 난 듯, 잠겨 있자, 재신은 시경의 팔을 툭툭 치며, 웃는다.

 

“은시경 씨, 너무 그러지 마요.

그리고 나랑 얘기하는데 뭐. 난, 다, 나, 까 싫다구요.

무서워. 막 싸우자, 하는 것 같다고....그러니까 그냥 놔둬요. 네? 네?”

 

재신이 웃으면서 자신의 팔을 살짝 치자, 그러면서 애교 있게 물어오자, 시경의 얼굴은 다시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시경과 재신을 보던 동하는 뭔가 조짐이 좋지 않았다.

 

아닌데, 이거 아닌데.....

에이, 설마, 이건 아니지, 아닐 거야. 당연 아니지.

 

“그리고 딴 건 없어요?”

 

재신의 말에 생각났다는 듯, 이번엔 동욱이 입을 뗐다.

 

“저희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론은 한 가지더라 말입니다.

지금 은시경 중대장님, 분명 원거리 연애 하시는 거, 확실하지 말입니다!”

 

그 말에 시경이 놀란 듯, 둘을 본다.

 

“이것 보십시오. 공주님. 중대장님, 뭔가 찔리시는 표정이지 않습니까?”

 

“염동하, 그만 해라.”

 

시경이 또다시 당황한 듯, 염동하에게 주의를 준다.

그런 시경을 보는 것이, 재신은 즐겁다.

이 남자, 은근히 귀엽다.

이렇게 포커페이스가 안 되는데, 이렇게 온통 다 들켜 버리니까, 큰오빠도 눈치를 채는 거지....어휴 어쩌겠어. 거짓말이 안 되는데......

 

“풋~ 은시경 씨, 티가 다 나나 보네요. 연애하는 거.

그렇게 좋아요? 애인이 이쁜가봐. 한숨 팍팍 쉬어가며, 맨날 기다리고......

많이 이뻐요?”

 

재신은 당황하는 은시경을 보려고 재미로 던진 말이었다.

그러나 재신은 잊고 말았다.

은시경이 어떤 인물인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재신은 순간 잊고 말았다.

 

“예. 공주님.”

 

“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십니다.”

 

시경의 눈은 온전히 재신만을 향하고 있었다.

그 눈을 보던 재신이 먼저 눈을 돌렸다.

그러다 접시에 놓인 과일을 먹기 시작했다.

 

정말 이 남자. 미치겠다.

뭐가 이렇게 돌직구야.

맞아. 돌직구 은시경이잖아. 거짓말 못하고....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어.

 

그래도 재신의 심장은 쿵쿵 뛰고 있었다.

이 남자의 돌직구는 늘 이렇게 심장을 떨리게 한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남자의 진심이 자꾸만 설레게 한다.

재신의 양볼이 빨갛게 변하고 있었다.

 

그런 둘을 보던 동하와 동욱은 이거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이건 정말 뭔가 이상했다.

뭔가 놀리는 듯한 공주님께서, 중대장님의 한 마디에 고개를 숙이곤 음식만 드시고 계셨고,

중대장님은 그런 공주님을 정말 자신의 여자를 바라보듯이, 온갖 애정을 담아 보시고 계셨다.

 

눈빛이, 저런 눈빛이 아니었는데.....

중대장님의 눈빛은 저런 눈빛이 아니었다.

저렇게 풀려 있지도, 저렇게 들떠있지도 않았다.

늘 단정했고, 딱딱했고, 단 하나의 오차도 허용치 않겠다는 날카로움이 있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중대장님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보고 있다는 듯이 공주님을 보고 있었다.

보고 있는 것조차 아까워죽겠다는 듯이, 자신의 여자를 보는 듯이, 그런 눈빛을 하고 있었다.

 

동하와 동욱은 서로를 바라보다 침을 꼴딱 삼켰다.

 

이거, 뭐지?

 

“참, 두 사람은 오늘 뭐할 거예요?

내일 돌아가는 거잖아.”

 

“예? 예? 저희야 뭐.......”

 

공주님의 물음에 동하가 말을 흐린다.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두 사람, 애인 있어요?”

 

“예? 저희 말씀입니까? 저흰 없습니다. 은시경 중대장님만 있으시죠.”

 

“그래요? 잘 됐네.

나 따라온 궁인 두 사람이, 에든버러 구경을 하고 싶다는데, 같이 좀 다녀줄래요?

아무래도 아름다운 여성들이라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예? 예? 저희야 감사할 따름이죠. 공주님!!!”

 

둘의 목소리가 날아가고 있었다.

안 그래도 어제 행사 때 눈여겨 보고 있었다.

정말 공주님의 수행 궁인이라 그런지, 정말 미모가 출중했다.

계속 바라보면서 침을 흘리고 있었는데, 이건 정말 공주님께서 직접 오작교가 되어주신다니.......

동하도 동욱도 입을 헤벌쭉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면 공주님께서는.......?”

 

그러고보니 공주님께서는 그러면 무얼하실 건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중대장님께서 호위를 하시면 되지만, 좀 미안해지기도 했다.

 

“나? 풋~ 난, 남자친구랑 데이트 할 건데요?”

 

“예? 공주님, 남자친구 있으셨습니까?”

 

난데없는 재신의 말에 동하가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응. 있어요.”

 

“그럼, 그분도 여기 오셨습니까?”

 

“그럼요.”

 

재신이 시경을 바라보자, 시경의 얼굴이 다시금 붉어진다.

그러나 재신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공주님이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

아직도 이런 상황이 잘 믿기지가 않는다.

공주님이 정말 내 애인이 된 것이, 내 여자가 된 것이, 자꾸만 꿈만 같아서 믿기지가 않는다.

 

그 때였다.

그녀가 내 손에 깍지를 껴왔다.

그러면서 환하게 웃으신다.

그 미소에 숨이 멎는 것 같다.

 

“공...공주님!!!”

 

자신의 손을 잡는 공주님 때문에 시경은 심장에 마비라도 올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동하와 동욱은 그 이상의 충격이었다.

지금 자신들이 보고 있는 게 뭔지, 지금 무슨 상황인 건지, 전혀 판단이 되지 않았다.

 

재신은 시경과 맞잡은 손을 들어 올리며, 놀라서 입을 벌리고 있는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에게 선포하듯이 말을 던졌다.

 

“여기 왔잖아. 내 애.인.”

 

시경은 잡히지 않은 손으로 찬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이거...이거......보고서도 못 믿겠습니다.

지금......은시경 중대장님과...지금..공주님...그러니까........”

 

동하가 말을 더듬고 있었다.

동욱은 아예 어떤 말도 못하고 있었다.

 

“응. 은시경 중대장의 원거리 애인이 바로 나예요.

이 남자, 많이 티냈을 텐데...아닌가?”

 

재신이 예쁘게 웃자, 또다시 시경은 그녀에게 빠진 듯,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일 줄을 모른다.

그런 중대장을 앞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동하와 동욱은 멘붕이 올 지경이었다.

세상에, 그래도...어떻게 공주님과....

정말...대애애애애박~이었다.

와....정말 대박이다. 대박......

속으로 숱하게 대박이라 외쳐대고는 있지만, 중대장이 무서워서 입밖으로는 한 마디도 뱉지 못했다.

그저 사람일이란 모르는 것이라 수십 번도 더 생각해볼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궁인들이며 여자들이 추근덕대도, 단 한 번도 안 흔들렸나 싶기도 하다.

상대가 공주님인데, 그 누가 눈에 들어올 수가 있을까.

 

“중대장님....정말 대단하십니다.”

 

동하가 겨우 한 마디를 뱉었다.

 

“어?”

 

“정말........너무너무 대단하십니다.”

 

동하는 그 말밖에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정말 이건 대박도, 이런 대박이 없었다.

이건 부럽다라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아니, 그런 가벼운 어휘로는 다 표현이 안 되었다.

공주님이다.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우신 대한민국 유일한 공주님.

그런데 그 공주님이 중대장님만 바라보고 계신다.

사랑에 빠지신, 여느 여자들처럼, 중대장님만 바라보고 미소 짓고 계신다.

 

계속 손을 잡고 있기가 뭣하셨는지, 공주님이 손을 빼려고 하신다.

그런데 이건 또 뭔가!

중대장님이 그 손을 더 세게 잡고 계셨다.

중대장님의 손에 힘줄이 돋아나고 있었다.

 

“....시..경..씨......”

 

뭐, 시경 씨!!!!!

아, 이건 진정 멘붕이다.

시경 씨라니, 어떻게 시경 씨....

공주님이 시경 씨라고 부르시다니......

 

동하도 동욱도, 미친 듯이 물을 들이켰다.

동욱은 안 되겠는지, 얼음까지 와그작와그작 깨먹고 있었다.

 

아, 미치겠다.

세기의 로맨스를 생눈으로 바로 앞에서 지켜보는 것은, 보통 담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 대박 뉴스를 어떻게 하지.....

정말 미추어버리겠눼.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그 심정이 이해가 된다.

어디에 가서 외치고 싶다.

 

대나무 숲이 필요하다.

 

 

 

3

 

 

 

“어디 갈까요? 우리?”

 

재신의 손은 여전히 시경의 손에 잡혀 있었다.

 

내려오면서 사람들이 오면 시경은 손을 놓았다가,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는 계속 그녀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자꾸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는 그가, 재신은 좋았다.

 

 

“공주님, 어디 가시고 싶으세요?”

 

렌트를 한 재규어의 운전석 옆 자리를 재신에게 열어주고는 자신은 운전석에 타면서 시경이 재신에게 물었다.

 

“음....그 호칭은 별론데?”

 

“예?”

 

“공주님이라고 부르면, 다 알 거예요.

여기도 유학생들 많단 말이야.”

 

“그래도......”

 

“그럼, 우리 데이트 하지 말까요?

각자 방에서 쉬고, 그냥 한국 갈래요?”

 

“예? 아, 그건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공주님.”

 

공주님은 골이 나신 듯, 뾰로통하게 말씀하신다.

아, 어쩌지.....뭐라고 부르지......

 

“공주님은 안 돼. 그럼, 시경 씨랑 안 놀 거야.”

 

“공주님!!!”

 

“나, 들어갈래요.”

 

“아, 아닙니다. 고쳐보겠습니다.”

 

“뭐라고 부를 건데?”

 

“예? 그것까진 아직....생각을.......”

 

이 남자는 아마 계속 이러고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이런 거까지 지도해줘야 하나....

아, 이 남자 하나하나 가르쳐야 하다니.....

뭐, 그래도 재미는 있다.

당황하는 것도, 놀려먹는 것도, 또 그러다 상남자처럼 내게 달려드는 것도.........

 

“재신아.......”

 

“예?”

 

갑작스런 공주님의 말에, 아니 공주님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말에 시경은 뻥이 진 채, 공주님만 바라보고 있다.

 

“불러 봐요. 재신아.......”

 

“예에? 제가 공주님을.....감히.......

이건, 안 됩니다. 공주님. 이건 정말 불경.......”

 

“하, 불경? 웃기시네. 이 남자.

어젠 뭔데요? 그럼.

어젠 그렇게 밤새 난리더니, 오늘은 그깟 공주님 안 부르면 불경이라고?”

 

“저...그..그건......”

 

재신의 시선이 뜨겁다.

애써 그 시선을 피하며, 시동을 켠다.

 

“은시경 씨!! 나, 아직 대답 못 들었어요!”

 

시경은 바로 문을 잠갔다.

 

“어, 뭐야? 문도 잠근 거야?”

 

“나중에....내리면.....그 때 부르겠습니다.”

 

“진짜? 진짜지? 약속한 거예요?”

 

“예. 공주님.”

 

“어디 가시고 싶으세요?”

 

“에든버러 성으로 가봐요.

네비에 쳐보면 나올 거야.

여기서 가까워요.”

 

 

 

 

 

<사진출처 : http://gall.dcinside.com/list.php?id=travel_europe&no=1391>

 

 

 

매표소에는 여전히 긴 줄이 이어져 있었다.

그가 표를 사오는 동안, 나는 무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약간은 긴장한 채 서 있었다.

대체로 외국인들이라 상관이 없어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썬글라스에 모자에 중무장을 했다.

모르겠지, 싶지만, 아무래도 전세계를 여행 다니는 어마어마한 한국인들의 무리에 대해서는 정말 속수무책이었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동양인이 한 명 섞인 남자 2명이 자꾸 내 쪽을 힐끗힐끗 보고 있었다.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고 있는데, 그 중 동양인이 내게 다가왔다.

 

“How are you?"

 

남자 하나가 인사를 건네자, 난 그저 고개만 끄덕했다.

 

내 눈치를 살피던 그 남자가 갑자기 한국말을 해왔다.

 

“혹시.....한국분 아니세요?”

 

“네? 아, 네.”

 

역시 난 토종 한국인이었던 거야.

바로 이렇게 알아버리네.

모르는 척, 일본어라도 지껄였으면 됐는데, 당황한 나머지, 바로 한국어가 튀어나와버렸다.

 

“와, 왠지 한국분이실 것 같았어요.

동양인들 중에 세련된 분들은 전부 한국인이거든요.”

 

“....네.”

 

“저, 초면에 죄송하지만, 혹시 혼자 오셨어요?

아니면 친구분이랑 같이.....?”

 

전형적인 수작이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막 들이대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저 혼자 있는 여자에게 말 걸어보는 딱 그런 느낌이었다.

 

“아, 저 남자친.......”

 

남자친구랑 같이 왔다고 말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재신아!!!”

 

내 이름인데, 분명 내 이름.......

이 목소리는 분명 시경 씬데.......

헉!!! 이 남자가 정말 내 이름을 불렀나? 그랬나?

 

내 귀에 헛 게 들리는 건가?

뭐지 뭐지?

 

앞에 다른 남자가 있거나 말거나, 온통 내 관심도는 오로지 시경 씨였다.

정말 내 이름을 부른 걸까, 그런 걸까?

 

“무슨 일이시죠?”

 

그는 오자마자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남자를 향해서 경계하는 듯 날카롭게 물었다.

 

“제 애인에게 무슨 볼 일이라도?”

 

“예? 아, 이 여자분께서 혼자 오셨나 해서......

아, 죄송합니다.”

 

남자는 당황한 듯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자신의 무리로 돌아갔다.

친구들이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그 남자의 뒤통수를 때려주며 놀리고 있었다.

그러나 재신의 눈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방금, 이 남자, 분명 뭐라고 그랬는데......

 

“시경 씨.......”

 

“흠흠......재신아, 가자.”

 

그의 손이 재신의 손을 꽉 잡았다.

깍지를 낀 손가락 사이로 자꾸 설렘이 묻어온다.

 

“응.......시경....오빠......”

 

순간 그가 걷던 걸음을 멈춘다.

한참 서 있던 그가 고개를 돌리며 재신을 바라본다.

그의 얼굴이 붉게 변해 있다.

 

“방금........”

 

“음......재신아라고 불렀으니까......

그러니까.....말을 놨으니까....그러면 뭔가...시경 씨라고 말하면 안 어울릴 것 같고......

또 시경 씨가 재신아라고 부르면, 뭔가 보상 같은 것도 있어야 할 것 같고.....

음.....여튼......자꾸 묻지 마요.”

 

재신의 얼굴도 자꾸만 뜨거워진다.

 

“빨리 와요. 여기 다 보려면 최소 3시간은 돌아다녀야 한다구요.

이러다 해 떨어지겠어. 빨리 가요.”

 

시경은 재신의 손에 이끌린 채 다시 나란히 걸어간다.

심장이 자꾸만 두근두근 뛰어댄다.

시경.......오빠......

정말...내 여자인 듯해서, 정말 내 여자가 된 것 같아서, 자꾸만 설렌다.

 

 

 

 

4

 

 

 

에든버러 성은 아름다웠다.

중세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한 듯, 그런 웅장함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전망대 앞에 서서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여기....참......묵직하게 해요.”

 

“응?”

 

“에든버러 성.....벌써 몇 번 째 와보는지 몰라요.

여기 오면, 나를 자꾸 추스르게 돼요.

정신 차리라고. 내가 누군지 알아야 한다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꾸만 도전을 줘요.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저력에 대해서, 그 투쟁의 역사에 대해서.....

약한 나라일지라도, 끝까지 자긍심을 가지고 싸웠던 이 사람들에 대해서.....

자꾸만 깨닫게 돼요.”

 

시경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더 힘을 주어 잡았다.

 

“있죠. 그리고 이곳에 서면 반성을 하게 돼요.

그래도, 이렇게는 되지 말자. 절대로 되지 말자.

끝까지 싸워내자. 내 나라, 내 조국.........

끝까지 싸워서, 부끄럽지 않게 내 나라를 후세에게 물려주자.

뭐 그런 다짐이요.”

 

그녀의 얼굴에 뭔가 단호함이 묻어나온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시경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

 

“하아..........”

 

그의 입에서 한숨이 묻어나온다.

 

“이런 공주님이라서, 이런 공주님을 모실 수 있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뭐야? 다시 공주님이야?

이렇게 공주 막 안아도 돼요? 이거 불경죈데?”

 

“제가 평생 모시겠습니다.

공주님께서 하시고 싶으신 일 다 하실 수 있도록, 제가 평생 지켜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공주님께선 걱정 마시고, 앞만 보고 가세요.

뒤는 전부 제가 맡겠습니다.”

 

“뭐야, 이 남자.......”

 

자신을 품에 꼭 끌어안고 있는 이 남자 때문에 자꾸만 울컥 한다.

나를 자신의 여자로 생각하면서도, 또한 내 비전에 대해서 공감하고 존중하는 남자.

그래서 이 남자가 좋은 건지도 모른다.

걱정 말라고, 늘 뒤를 지켜주겠다는 든든한 그의 말이 자꾸만 가슴을 울컥하게 만든다.

어쩌지.....이 남자가 너무 좋다. 정말 좋다. 이 남자가 없으면 못 살 것 같다.

 

“재신아........”

 

그가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사랑한다. 재신아.

평생.......당신의 남자로.....살게 해줘.

평생 당신만 보며, 당신만 사랑하며, 당신 때문에 설레며, 그렇게 살게 해줘.

그러니까, 나, 버리지 마.

평생 다른 남자 보지도 마.

나만 봐.”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쳐댄다.

아 정말 이 남자, 상남자에서 찌질남까지 너무나 버라이어티하게 변한다.

이렇게 자신 없는 듯 말하면서도, 자신만 보란다.

버리지 말라는 말을 저토록 당당하게 강하게 하다니....

정말 이 남자답다 싶다.

 

“바보, 바보, 여튼.....시경 오빠 바보!!!”

 

바보라면서 자꾸만 그의 품으로 안겨 들어오는 그녀가 너무나 사랑스럽다.

그녀는 모를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큰지, 자신의 마음을 안다면, 그녀는 부담스러워서 도망갈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경은 자꾸만 자신의 마음을 참으며, 꾹꾹 누르며 조금씩만 보여주려 노력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성의 판단일 뿐, 자신의 욕망은 그런 그의 이성을 비웃으며 저앞으로 달려가 버린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에든버러의 성에서, 아름다운 노을빛 사이로 사랑이 번져간다.

 

 

<사진출처 :http://www.tournews21.com/news/view.html?section=82&category=131&no=4156

 

 

 

 

 

5

 

 

 

“은시경 대위는 아직입니까?”

 

재강의 물음에 왕실주치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전하. 아무래도 심한 독감인 듯합니다.”

 

“그렇게 고단했던 건가.”

 

재강은 사실 은시경이 오면 바로 문책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스케줄 전체를 보고 받을 생각이었는데, 입국하면서 이미 모든 게 어긋나 있었다.

시경은 비행기 안에서부터 고열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공항에 내려 입국하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열에 들끓자, SAS에 대한 여러 주의사항들 때문에 입궁 자체가 금지된 채, 병원에서도 격리되어 있어야만 했다.

그렇게 열이 들끓고, 며칠 정신까지 놓을 정도로 심하게 앓았다.

처음에는 동료들의 문병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며칠 후 어느 정도 열이 떨어지고, SAS가 아니라는 확정이 나자, 그제서야 동하도 문병을 갈 수 있었다.

 

“중대장님, 정말 완전 오지게 앓으십니다. 괜찮으십니까?”

 

“응.....”

 

짧게 대답했지만, 이미 목소리는 많이 쉬어 있었다.

 

“공주님께 연락해야 하는데......”

 

“아니, 지금 몸이 이런데 무슨 연락입니까?”

 

“염동하......너 공주님께 문자 좀 보내라.”

 

“예? 뭐라고 말입니까?”

 

“내가.....그래, 휴대폰을 잃어버렸다고......

그리고 집에 내려갔다 오는 바람에, 연락을 못 드렸다고....연락드려.”

 

“나 참, 어지간한 열남 나셨습니다. 열남비 하나 세워드려야지 말입니다.”

 

“염.동.하.”

 

“예..예. 알겠습니다. 바로 문자드리겠습니다.”

 

시경은 그제서야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쉰다.

자신이 아프다는 걸, 공주님께 알려드리고 싶지 않았다.

걱정하실까봐 그러는 것도 있지만, 이렇게 나약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지금, 몸이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아픈 것이다.

알고 있었다.

또다시 그녀를 기다려야 하는 시간들......

그걸 또 어떻게 견뎌내어야 할지......

공항에서 짧은 인사만으로 돌아설 때, 이미 예견했었다.

순간 근위대를 그만 두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녀 곁에 있고 싶다.

그녀와 같이 있고 싶다.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몸이 아픈 게 더 나은 것 같기도 했다.

며칠간 정신 없이 열에 들떠서 그나마 정신을 잃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가슴의 통증이 점점 심해진다.

이 가슴 가득 뜨겁게 올라오는 이 열병은, 그녀를 향한 그리움이었다.

벌써 이렇게 가슴이 욱씬거리는데, 자신은 또 어떻게 참아낼 수 있을 것인가.

 

 

 

 

6

 

 

“대한민국 근위대 제2중대장 은시경, 전하께 복귀 신고 드립니다.

충.성!”

 

“충성.”

 

재강의 눈에도 시경의 얼굴은 반쪽이었다.

일주일 내도록 입원했다가 나왔으니, 게다가 심한 열병이었다니, 뭐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은시경 대위, 이제 몸은 좀 괜찮습니까?”

 

“예. 전하. 죄송합니다.”

 

“뭐가 말입니까?”

 

재강의 목소리가 다시금 날카로워져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시경의 말간 눈이 재강의 눈과 마주쳤다.

시경의 눈은 거리낌이 없었다.

 

그래, 뭔 일이 있었겠어.

그저 하루였는데.

게다가 수많은 궁인들과 근위대원들이 있었는데.....

에든버러 성에 놀러간 게 다지.

그 정도는 뭐, 연애하는 사이에 그럴 수 있지.

게다가 지금 이 남자는 은시경 대윈데......

 

애써 재강은 자신을 추슬렀다.

생각해 보면, 은시경 대위이기 때문에 영국에 보낼 수 있었다.

만약 재하 같은 놈이었다면, 죽어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재신이 힘들어하고, 눈앞에서 재신이 남자친구가 죽어가더라도 눈도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은시경이었다.

답답할 만큼, 자신과 닮은 은시경이었다.

그러니 괜찮다 싶었다.

이렇게 진중한 남자라면, 또 이렇게 답답할 만큼 고지식한 남자라면 믿어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재신이는........잘 지내던가요?”

 

재강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툭 던진 말에, 시경의 눈이 눈에 띄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 남자의 고통이 스며들고 있었다.

 

“예. 공주님.....께서는 잘 지내고...계셨습니다.”

 

공주님이라는 말만으로도 뭔가 울컥한 듯해서, 멈칫하고 말았다.

전하 앞에서 절대로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되는데, 공주님이라는 호칭만으로도, 자신의 심장은 죽을 듯이 뛰어댄다.

 

겨우 겨우 인사만 드리고 나오며, 시경은 문밖에서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어떻게 지내지.......

이러다...정말 심장에 무리가 오지 않을까....싶었다.

 

자신은 금기를 건드렸다.

그녀를 가지고 나면, 이 두려움이, 이 불안함이 가실 줄 알았다.

조금은 마음이 안정될 줄 알았다.

아니, 그것은 정말 오만한 착각이었다.

자신은 짐승이었다.

밤마다 그녀 때문에 몸부림을 쳤다.

 

 

-------------중 략-------------------

 

 

 

그렇게 일어난 아침이면,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와의 아침 통화에서도, 자꾸만 자신의 욕망이 드러나는 듯해서 오래 전화를 할 수도 없었다.

공주님께서 뭐라고 하실까.

이런 자신을 아시면 얼마나 실망하실까.

자꾸만 자신은 타들어가는 듯하다.

 

-------------중략----------------

 

시경의 밤은 자꾸만 하얗게 새고만 있다.

 

그렇게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지날 때쯤......이제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 때쯤,

온 세상이 따뜻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기 위해 분주할 때,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다.

한동안 논문 준비 때문에 그녀가 너무나 바빠서 거의 연락을 못하고 있었다.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지만, 자신의 이런 음흉한 짐승 같은 마음을 들키는 것보다는 낫다 싶었다.

 

<시경 씨, 나, 시경 씨한테 크리스마스 선물 보냈어요.>

 

<예? 제게 선물 보내셨어요?>

 

<응. 친구 편으로 보냈으니까, 내 친구한테 직접 받아야 해요. 알겠죠?>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분을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12월 24일 밤 9시, 우리 처음 만났던 홍대 클럽 옆에 있는 바에 가면 돼요.

거기서 기다리면, 혜원이라고, 내 친구가 갈 거예요.>

 

<예. 알겠습니다.>

 

<시경 씨,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

 

<공주님도 메리 크리스마스 하세요.>

 

공주님께서 보내셨다는 선물.......

저번부터 말씀하셨다.

논문 때문에 너무나 바쁘다고.....

혹시 연말에는 오실까 기대도 했었지만, 공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기대를 접었다.

그저 바라기는 설에라도 들어오시길.....

설마 그 때는 오시겠지, 그 마음뿐이었다.

 

혜원 씨라면 알고 있다.

영국에서 잠깐 뵌 적이 있었다.

공항에서 공주님 친구분이 나와 계셔서 인사만 한 적이 있었다.

그분은 나오셨는데........

공주님은 못 나오셨나 보다.

 

또 다시 깊은 한숨이 쉬어진다.

 

보고 싶다. 정말 보고 싶어서 미쳐버릴 것만 같다.

 

 

 

7

 

 

 

시경은 멍하게 앉아 있었다.

약간은 어두운 바 안.

혜원 씨도 내 얼굴을 알 테니, 알아서 찾아오시지 않으실까 싶었다.

곧 크리스마스인데, 그녀에게선 아무 연락이 없다.

며칠 전, 문자를 주신 이후, 그녀에게선 또 연락이 없었다.

 

그녀의 마지막 문자는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였다.

그 단어가 이토록 서글프고 싸늘할 줄은 몰랐다.

문자로 찍혀 있는 글자는, 자꾸만 시경을 쓸쓸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없는 크리스마스.

그 이후, 뭔가 멀어진 듯한 그녀.

어쩌면 시경 자신도 연락을 잘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자꾸만 마음이 담길까봐, 보고 싶어 죽을 것 같다고 말해 버릴까봐, 그러다 공주님께서 정말로 질리실까봐, 길게 통화할 수가 없었다.

그녀 역시 그랬다.

연락이 없었다.

전화통화는 점점 멀어지고, 간간이 문자만 올 뿐이었다.

 

꿈만 같다.

그날 그곳에서 그녀를 안았던, 온전히 내 여자가 되었던 그 순간이......

다시는 못 올 순간처럼, 자꾸만 가슴에 생채기를 낸다.

이렇게 나는 또 몇 달을 살아야 할까.

이렇게 견딜 수 있을까.

몇 달만에 한 번 보고 또 기약 없는 기다림을 할 수 있을까.

 

시경은 자꾸만 답답해져 오는 마음에 얼음물만 벌컥 벌컥 들이키고 있다.

 

“뭐야? 안 추워요?”

 

시경은 순간 얼어붙었다.

아니다. 이 목소리는....

아니다. 이젠 헛 게 들리는 거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

 

천천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그녀가 서 있었다.

아름다운 나의 공주님이, 그곳에 서 계셨다.

 

 

 

 

 

재신은 달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난 후, 재신은 엄청나게 앓아누웠다.

자신이 태어나서 이렇게 아파본 적이 있었는지.....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가 알면 걱정할 텐데.....

다행히 그도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하루 하루 고역이었다.

길을 걸어도, 책을 들여다보다가도, 그 남자가 떠올랐다.

 

정말 미칠 것 같은 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 재신은 지도교수님을 찾아갔다.

 

나, 무조건 봄에 졸업시켜라.

나 무조건 졸업할 거다.

적어도 크리스마스 전까지 논문 끝낼 거다.

죽으라면 죽겠다.

2달 동안, 죽었다고 생각하고 달리겠다.

제발 졸업만 시켜 달라.

나 이러다 죽겠다.

 

눈물까지 글썽이는 그녀 앞에서 지도교수님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걱정하시는 교수님 앞에서

재신은 목놓아 울어버리고 말았다.

재신은 이런 자신이 용납이 되지 않았다.

뭘 한다고, 교수님 앞에서 눈물바람이냔 말이다.

예전에 여자들이 교수님을 찾아가서 눈물로 호소한다고 했을 때, 분노해마지 않던 재신이었다.

이것들이 여자 욕 다 먹인다고, 그런 게 어디있냐고,

뭐가 그렇게 나약해 빠졌냐고 그렇게 욕을 해댔던 재신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이럴 줄 몰랐다.

울고 있는 자신이 또 한심해서 더 울어 버렸다.

 

엉엉 울고 나자, 도리어 재신은 부끄러워졌다.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논문을 쓰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의 남자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건 아니다. 정신 차리자.

 

재신은 죄송하다며, 이런 나약한 모습을 보여서 정말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고 나오려 했다.

그런데 교수님은 재신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원래 논문이란 그런 거라고.....

남자들도 운다고.....

괜찮다고....

그렇게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러고는 재신은 정말 잘하고 있는 거라며, 솔직히 왕실 사람이라 조금은 편견도 있었지만,

이렇게 열심히 해 줄지는 몰랐다고 대견해 하셨다.

 

교수님은 재신에게 조금은 냉철하게 얘기해주셨다.

1달 후, 결정하자고.

1달 동안 논문을 써보고, 내용이 안 된다면, delay라고, 그러나 내용이 알차다면, pass 시켜주겠다고 말이다.

그래서 재신은 희망이 생겼다.

이 분이라면, 이상한 논문으로 통과는 시키지 않으실 거라고.

정말 괜찮을 때만 pass해 주실 거라고.

그러니 난 희망을 가지고 미친 듯이 달리면 되는 거라고.

그렇게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시경과 연락도 끊다시피 했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흔들릴까봐 문자만 했다.

그저 독하게 한 달을 살았다.

평균 수면 시간이 2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교수님과 미팅이 있을 때는 쪽잠을 자며, 며칠 동안 잠을 안 자고 버텼다.

오로지 시경만 생각했다.

돌아갈 수 있다.

내 남자 옆에 멋지게 돌아갈 거다.

그 하나의 목표가 재신을 달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남자 곁에 왔다.

 

바에 들어서자 그의 등이 보였다.

단단한 그의 등을 보자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내 남자였다.

미치도록 보고팠던 내 남자.

그의 곁에 섰다.

그러나 그는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내가 말을 걸 때까지 그는 곁에 누가 섰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심지어 얼음물만 들이키고 있었다.

 

“뭐야? 안 추워요?”

 

그가 서서히 나를 돌아보았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그는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검은 눈이, 깊게 깊게 가라앉고 있었다.

화가 난 것일까.

미간이 조금은 찌푸려진 것도 같고, 표정이 어두운 듯도 했다.

반가웠던 마음이 조금은 식고 있었다.

이 남자, 내가 온 게 싫은 걸까.

왜 이러는 거지.....

뭔가 조금씩 불안함이 몰려올 때쯤......

그의 손이 내 손을 잡고 갑자기 바의 입구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 어!! 시경 씨, 잠깐만요, 어어~~!!”

 

그는 내 손을 잡은 채, 자신의 차로 끌고 가더니, 바로 운전석 옆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도 운전석에 앉더니, 그대로 차를 출발해버렸다.

 

뭐지, 왜 이러는 거지?

아무 말도 안 하고 와서 화난 건가?

호위 없이 왔다고...그러는 걸까.....

아 진짜 답답하기는......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재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화가 난 듯, 어금니를 꽉 깨물고 앞만 보며 달리고 있었다.

평소 그답지 않은 듯했다.

뭔가 평소답지 않았다.

뭔가 거칠게 차를 몰고 있었다.

궁으로 가나 보다 하고 앉아 있던 재신은 점점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곳이 나오자 도대체 어디를 가는 건지 조금씩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화가 난 것 같은데, 말도 걸 수 없었다.

이 남자 앞에서만은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이 낯설었다.

자꾸 이 남자의 눈치를 보게 된다.

마치 그 날 같았다.

영국으로 출발하기 전날, 그와 함께 성곽에 다녀왔던, 바로 그날처럼, 이상한 긴장감에 몰려 있었다.

그날도 그는 이런 분위기였다.

화가 난 듯,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처럼 그의 이마에는 힘줄이 서 있었다.

입에서는 한 번씩 한숨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뭐가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내가 뭔가 많이 잘못한 것일까.

그에게 말하지 않고, 근위대원들 없이 입국한 것 때문에 이러는 걸까.

아니면 연락도 제대로 안 해서 그러는 걸까.

그래도 뭔가 억울했다.

자신도 할 말은 많았다.

얼마나 열심히 왔는데, 이렇게 오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잠도 못 자고 이렇게 달려왔는데,

그는 화만 내고 있다.

어떻게 만났는데, 지금 우리 두 달만에 보는 건데, 어떻게 이렇게 화만 내고 있는 건지.......

자꾸 속상해서 울컥거리고만 있다.

 

재신이 속상해 하는 사이, 차는 어느 곳에 서 있었다.

시경은 잠시 차안에 앉아 있었다.

내리라는 건가, 아님 앉아 있으라는 건가.

재신이 뭔가 혼란스러워 한 사이, 시경은 이미 내려서 재신이 앉아 있는 차문을 열고 있었다.

재신은 그가 문을 열어주는 대로, 차 밖으로 나와서는 지금 이 남자의 상태가 어떤가 싶어서 살피고 있었다.

시경은 재신의 손을 또다시 잡고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시경 씨.......”

 

재신의 목소리가 떨려나오고 있었다.

무엇 때문이라고 말이라고 해주면, 마음이 조금은 편할 텐데, 무작정 화만 나 있는 사람을 상대하려니, 재신의 마음도 가시방석이었다.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그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재신이 빠져나가려고 하면 할수록, 그의 손아귀 힘은 더 강하게 쥐어왔다.

나중에 손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에게 끌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그는 재신의 손을 놓지 않았다.

재신의 얼굴은 보지 않은 채로, 그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꽉 쥐고 있었다.

 

1225호.

그 앞에서 그는 전자도어의 문을 열었다.

 

그의....집이었다.

처음 와 보는 그의 오피스텔.

재신의 등 뒤로 도어락이 닫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의 손에 손이 잡힌 채로, 그의 집안으로 들어선 재신은 바들 바들 떨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긴장감에,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강한 힘에, 자꾸만 가슴이 떨려왔다.

그의 이름을 부르려고 해도 입이 떼지지 않았다.

그 때, 그가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풀어내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러나 그는 내 손을 잡은 채, 여전히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하아......

 

한참을 그렇게 서서 한숨을 내쉬는 그를 더 이상 지켜보기가 어려웠다.

 

나가야겠다.

오로지 그것만 생각했다.

그의 손을 있는 힘껏 뿌리쳤다.

그러자 그가 놀란 듯, 내 손을 놓쳤다.

그 순간 돌아서서 전자도어의 버튼을 눌렀다.

아니 누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손이 더 빨랐다.

그의 손이 내 손을 잡고 바로 벽으로 돌려세웠다.

등으로 딱딱한 벽이 느껴졌다.

 

그의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왜 이렇게 화가 나 있는 거지?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섭섭함에 자꾸 눈물이 나오려할 즈음, 그래서 눈앞이 뿌옇게 흐려질 즈음,

그의 입술이 내 입술로 내려앉았다.

화가 나서 거칠게 다가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부드러웠다.

그의 입술은, 기억보다도 더 부드러웠고 섬세했다.

기억보다도 더 달콤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첫날 키스를 하고, 그 다음 만난 날, 하룻밤을 보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그와 함께 숨결을 나누고 있다.

아까 차올라왔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의 입술이 내 눈물을 머금었다.

 

“오늘....공주님.....궁에....못 들어갑니다.”

 

“시경..씨......”

 

 

 

------------------중략---------------------

 

 

 

  

 

하아...하아.....

 

가쁜 숨을 내쉬는 내 입술에 그의 입술이 또다시 내려앉았다.

 

“시....경...씨.....”

 

힘겹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또 한 번 더 내 입술에 입을 맞춘다.

그의 검은 눈에 온전히 내가 담겨 있다.

내 남자였다.

오롯이 나만 보는, 나 때문에 미치는, 내 남자였다.

 

“공주님, 이제 저, 영국에 못 보내드립니다.”

 

“시경..씨......”

 

“이제 못 가십니다. 제 곁에서 단 한 발짝도 못 떨어지십니다.”

 

그의 눈이 단호했다.

 

“공주님, 절대로 못 보내드립니다.

제 곁에 계셔야 합니다.

전 이제......공주님 이렇게 만져야겠습니다.

이렇게 안아야겠습니다.

공주님의 몸 하나하나까지 제 걸로 만들어야겠습니다.”

 

재신의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이 남자의 진심.

그의 진심을 대할 때마다 마치 심장이 요동을 치듯이 뛰어댄다.

 

“.....어떻게....안 가......”

 

그를 다독이듯 재신이 어렵게 입을 떼자, 여전히 시경은 단호했다.

 

“꼭 가셔야 한다면, 저랑 함께 가세요.”

 

“어? 무슨 소리예요?”

 

“공주님, 저와 결혼하셔야 합니다.”

 

“뭐? 뭐라구요?”

 

지금 그가 청혼을 한 건가?

지금 이 상황에서 그가 내게 결혼하자고 한 건가?

결혼해 달라도 아니고, 결혼해야 한다니.....이건 또 무슨 소린 거야.

 

 

------------중 략----------------------

 

 

 

“대답해주세요. 공주님.

저와 결혼한다고......제 곁에 있겠다고......말씀해주세요.”

 

이 남자 때문에 정말 미칠 것만 같다.

 

----------중략----------------

 

 

“하아.....하아.....시경 씨........”

 

“대답해주세요. 공주님.”

 

“응......응........”

 

 

 

------------------중 략---------------

 

밖으로 하얗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그들의 첫 번째 크리스마스였다.

 

 

 

 

 

 

 

 

<남은 이야기>

 

“재신이 연락 됩니까?”

 

“전하....아직.......”

 

재강은 안절부절 못한 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인터넷은 지금 난리가 나고 있었다.

왕실에서 막으려고 해보지만, SNS의 파급력이란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굉장했다.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사진에, 가타부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말은 끊임없이 꼬리를 달며 이어지고 있었다.

 

비즈니스 석에서 대한민국 공주님을 봤다는 누군가의 증언과

택시를 타고 홍대클럽에서 내리셨다는 택시기사의 증언,

그리고 홍대 바에서 누군가 남자를 만나셨다는 종업원의 증언,

그 후 그 남자의 손에 이끌려 차를 타고 나가셨다는 홍대 클럽을 가던 연인들의 증언까지,

심지어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라는 후문까지,

그 가운데 네티즌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당연 이것이었다.

남자가 정말 잘 생겼더라는.......

몸이 좋더라 에서, 흉통이 작렬이더라, 얼굴은 연예인 뺨치더라, 옷의 태가 살아 있더라,

공주님 손을 끌고 가는데, 박력이 끝장이더라는 말까지.......

 

둘은 어디에 갔을까......

혹시.......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대한민국 가장 아름다우신 공주님과 어느 멋진 남자의 사랑 이야기에

온 국민이 목을 매며 애타게 증거를 찾아 헤매는

2012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였다는 풍문이 전해내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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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그는 왜 고개를 돌렸을까> 하편을 가지고 왔습니다.

55장이네요. 아마 한 편이 이렇게 긴 건 처음인 듯합니다. ㅠㅠ

달려도 달려도 끝이 나질 않아서, 이거 오늘 정말 올릴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래도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비한 건데, 꼭 크리스마스에 올려야 하는데, 걱정하고 있었는데 결국 이렇게 올리네요.

전체 공개 버전이라, 55장이지만, 좀 짧습니다. 중략이 좀 되었다지요. 양해해주시길.....

 

일단 올려두고 나중에 다시 수정해야 할 듯합니다.

그저 즐감해주시길........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행복하고 따뜻한 성탄절되세요.^^

 

+) 근데 이거 중략이 너무 많아서 내용 이해가 되실지...그것도 걱정임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