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 -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눈이 내린다.
광야 같이 얼어붙은 이곳에
어마어마한 양의 폭설이 내린다.
이 눈들은
겨우내 억지로 고개를 내밀고 있던 새싹을 덮어버리고
꽃피우려던 봉우리를 가둬버리고
무서운 기세로
이 세상을 얼려버린다.
그러나 이 광야에서
씨를 뿌리는 사람이 되어,
육사의 말처럼,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
나를 다스리고,
내 주변을 다스리고,
그리하여 이 광야를 다스릴 수 있도록,
상처받고 아픈 마음을 동여맬 수 있도록,
고통스러워도 절망하지 않는 용기를,
무너뜨려도 다시 일어서는 믿음을,
가두어져 있어도 길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배우려 한다.
하얗게 내린 눈 위로,
이제 길은 보이지 않는다.
루쉰의 말처럼,
처음 딛는 대로 길이 된다.
누군가 따라올 수 있도록, 그런 길을 갈 수 있도록,
신중하게, 정직하게, 진실되게
한 걸음 떼어야 한다.
또 눈이 내린다고 한다.
그러나 길은
그것을 덮는 자의 것이 아니라,
그 길을 내는 자의 것이다.
'영혼과 삶 > 시와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실 (0) | 2013.02.18 |
---|---|
이런 내가 되고 싶다. (0) | 2013.02.08 |
산다는 일도. (0) | 2012.06.29 |
말하지 않아야 할 때 (0) | 2011.07.20 |
용기가 필요하다 (0) | 2011.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