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신상플)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25
<silver님께서 주신 당기못 대문짤~~ 감솨감솨합니다.^^>
<디씨 그러하다 횽이 주신 당기못 대문짤~~저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__)>
(은신상플)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25
*배경음악을 틀고 봐주세요.
1) 걷고 싶다 / 조용필
2) 출국 / 하림
3)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 하림
4) Say I love you / 포맨
1) 걷고 싶다 / 조용필
이런 날이 있지 물 흐르듯 살다가
행복이 살에 닿은 듯이 선명한 밤
내 곁에 있구나 네가 나의 빛이구나
멀리도 와주었다 나의 사랑아
고단한 나의 걸음이 언제나 돌아오던
고요함으로 사랑한다 말해주던 오 나의 사람아
난 널 안고 울었지만 넌 나를 품은 채로 웃었네
오늘 같은 밤엔 전부 놓고 모두 내려놓고서
너와 걷고 싶다 너와 걷고 싶어
소리 내 부르는 봄이 되는 네 이름을 크게 부르며
보드라운 니 손을 품에 넣고서
불안한 나의 마음을 언제나 쉬게 했던
모든 것이 다 괜찮을 거야
말해주던 오 나의 사람아
난 널 안고 울었지만 넌 나를 품은 채로 웃었네
오늘 같은 밤엔 전부 놓고 모두 내려놓고서
너와 걷고 싶다 너와 걷고 싶어
소리 내 부르는 봄이 되는 네 이름을 크게 부르며
보드라운 니 손을 품에 넣고서
난 널 안고 울었지만 넌 나를 품은 채로 웃었네
오늘 같은 밤엔 전부 놓고~ 모두 내려놓고서
너와 걷고 싶다 너와 걷고 싶어
소리 내 부르는 봄이 되는 네 이름을 크게 부르며
보드라운 니 손을 품에 넣고서
2) 출국 (出國) / 하림
기어코 떠나버린 사람아 편안히 가렴
날으는 그 하늘에 미련따윈 던져버리고
바뀌어버린 하루에 익숙해져봐
내게 니가 없는 하루만큼 낯설 테니까
모두 이별하는 사람들
그 속에 나 우두커니 어울리는 게
우리 정말 헤어졌나봐
모르게 바라보았어 니가 떠난 모습
너의 가족 멀리서 손 흔들어 주었지
하늘에 니가 더 가까이 있으니 기도해 주겠니
떠올리지 않게 흐느끼지 않게
무관심한 가슴 가질 수 있게
도착하면 마지막 전화 한 번만
기운 찬 목소리로 잘 왔다고 인사 한번만
그저 그것뿐이면 돼 습관처럼 알고 싶던
익숙한 너의 안부 거기까지만
이별하는 사람들
그 속에 나 우두커니
어울리는 게 정말 헤어졌나봐
모르게 바라보았어 니가 떠난 모습
너의 가족 멀리서 손 흔들어 주었지
하늘에 니가 더 가까이 있으니 기도해 주겠니
떠올리지 않게 흐느끼지 않게
무관심한 가슴 가질 수 있게
다른 눈의 사람들 속에서
외로워져도 서러워도 나를 찾지 마
모르게 바라보았어 니가 떠난 모습
너의 가족 멀리서 손 흔들어 주었지
하늘에 니가 더 가까이 있으니 기도해 주겠니
떠올리지 않게 흐느끼지 않게
무관심한 가슴 가질 수 있게
3)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 하림
언젠가 마주칠 거란 생각은 했어
한눈에 그냥 알아보았어
변한 것 같아도 변한 게 없는 너
가끔 서운하니
예전 그 마음 사라졌단 게
예전 뜨겁던 약속 버린 게
무색해진대도 자연스런 일이야
그만 미안해하자
다 지난 일인데
누가 누굴 아프게 했건
가끔 속절없이 날 울린
그 노래로 남은 너
잠신 걸 믿었어
잠 못 이뤄 뒤척일 때도
어느덧 내 손을 잡아줄
좋은 사람 생기더라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이대로 우리는 좋아 보여
후회는 없는 걸
그 웃음을 믿어봐
믿으며 흘러가
다 지난 일인데
누가 누굴 아프게 했건
가끔 속절없이 날 울린
그 노래로 남은 너
잠신 걸 믿었어
잠 못 이뤄 뒤척일 때도
어느덧 내 손을 잡아줄
좋은 사람 생기더라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이대로 우리는 좋아 보여
후회는 없는 걸
그 웃음을 믿어봐
먼 훗날 또 다시
이렇게 마주칠 수 있을까
그때도 알아볼 수 있을까
라라라 라라라
이대로 좋아 보여
이대로 흘러가
네가 알던 나는
이젠 나도 몰라
4) Say I Love You - 포맨
입을 맞춰도 불안하고 품에 안아도 초조하고
잠이 들 때도 꿈처럼 사라질까 밤새 뒤척이고
보면 볼수록 겁이 나고 겁이 날수록 더 보고 싶고
사랑할수록 니가 날 떠날까봐 두려워지나봐
사랑을 다줘도 불안한 건 남자야
넌 너무 모르지 남자의 사랑을
사랑할수록 더 보고 싶고 보면 볼수록 더 안달나고
평생 내 여자로 만들고픈 조급한 마음인 걸
평생 내 여자로 살아줄래 나 말곤 없다고 말해줄래
조금도 불안해 하지 않게 한 번 더 말해줄래
Say I love you..
사랑할수록 닮아가고 날이 갈수록 더 좋아져
함께 할수록 나 너 없인 못살아 너 책임져
사랑을 다줘도 불안한건 남자야
넌 너무 모르지 남자의 사랑을
사랑할수록 더 보고 싶고 보면 볼수록 더 안달나고
평생 내 여자로 만들고픈 조급한 마음인 걸
평생 내 여자로 살아줄래 나 말곤 없다고 말해줄래
조금도 불안해 하지 않게 한 번 더 말해줄래
Say I love you..
Say I love you.. Say I love you..
약속해줘 You are the only my love..
한 여자만을 사랑하니까 내겐 그 여잔 너 하나니까
자꾸만 니 사랑을 보채도 날 미워하지는 마
평생 내 여자로 살아줄래 나 말곤 없다고 말해줄래
조금도 불안해 하지 않게 한 번 더 말해줄래
Say I love you.
1
나는 사랑에 빠진 한 남자가 되었다.
나의 고통은 바로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이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중에서-
“가야......해요........미안해요.”
그녀의 목소리가 온 몸을 휘감아 돌며, 자꾸만 심장을 무너지게 한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떤 생각도, 어떤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바보 같이, 미친 듯이 기다릴 뿐......
그녀가 내게 돌아오기를........
내 속에서 뜨거운 불이 타오른다.
블라지미르*를 불태웠던 그 불이 나를 태우고, 내 심장까지 태웠다.
하늘이 검게 타들어간다.
공기가 차갑게 식어만 간다.
그녀가 없는, 그녀가 사라진 이곳은 얼음처럼 쩡하고 갈라지고 만다.
나는.....나라는 존재는......더이상 없다.
하아...........
시간이 흐르는 소리가 심장 속에서 울려대는 것 같다.
1분 1초가 내 심장 속에 바늘을 꽂아대는 것만 같다.
그녀는 오지 않는다.
1초가 쌓여, 1초들이 내 심장 속으로 침잠해 들어오지만, 그녀는.....이곳에...없다.
나는, 나는.........이제.......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나는.......정말......살아갈 수는 있는 걸가.......
검은 하늘 아래, 별조차 보이지 않는 어두운 하늘 아래, 심장을 움켜쥔 한 남자만이 웅크리고 있었다.
“은.....시경...씨........”
까만 밤, 까만 하늘 아래, 그녀가 서 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내 여자라고 부르고 싶은.......아름다운, 나의, 공주님이.......내 눈 앞에 서 계셨다.
*블라지미르 - 이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의 주인공. 16살의 나이에 21살의 지나이다에게 한 눈에 반해, 열정적이지만 또한 가슴 아픈 첫사랑을 경험한 소년
2
전화가 왔다.
제주도에서 그의 말을 들은 이후로, 다른 사람의 전화를 받는 게, 남자의 전화를 받는 게 이상했다.
뭔가 내가 잘못을 하고 있는 듯해서.......
마치 진짜 남자 친구 몰래 바람을 피는 듯해서.......
뭔가 찝찝하게 느껴졌다.
상우 오빠였다.
“상우 오빠.”
“재신아! 나, 한국이야.”
“어, 한국 왔구나.”
“너, 오늘 저녁에 시간 돼?”
“어?”
시간...있냐는 오빠 말에 나도 모르게 주저하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분명 다른 스케줄은 없었다.
그러나 선뜻 없다, 라고 말하기도, 또는 안 된다,라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재신아........
나, 너 만나려고 들어왔는데.......”
어쩌면....이대로는 안 될지도 모른다.
제주도에서 분명 오빠는 내게 고백했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아주 오랫동안 품은 마음이라고......
그 날...그 옛날 들었더라면....어땠을까....
상황이 바뀌었을까.......
이도 저도 아닌 지금 이 상황......
그와 사귀는 것도 아니다. 또 안 사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상우 오빠를 마냥 기다리게 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다.
난....두 남자를 모두 농락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진실로 나쁜 여자인지도 모른다.
“재신아.....”
“응......오늘 보자.
나 어디로 갈까....”
“시간 돼?
그럼 내가 차 가지고 궁으로 갈게.
괜히 돌아다니면, 눈에 띌 수도 있고.....”
“응......”
“5시쯤....내가 그쪽으로 갈게.”
“알았어. 오빠...좀 이따 봐.”
전화를 끊고 고민을 했다.
그에게 말해야 할까.......
그의 검은 눈이 떠오르자, 심장이 파르르 떨려온다.
눈을 감았다.
상우 오빠를 반드시 만나야만 했다.
그래야 했다.
그래야 나도....그도, 그리고 상우 오빠도,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상우 오빠는........내 어린 시절의 추억 그 자체였다.
나의 소녀시절을 함께 한.........아주 오랜 추억........
그는 내게 늘......알 수 없는 그리움으로, 생각하면 따뜻한 기억으로, 그렇게 가슴 한 쪽에 남아 있었다.
첫사랑....이라는 말에 참으로 걸맞은 남자였다.
그러나.......지금.....이 남자는......잘 모르겠다.
만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기억을 해낸다면, 그래도 추억은 있겠지만, 기억을 잃어버린 지금, 그는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낯선 사람이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시간이라는 술에 담가두는 것이라 생각한다.
오래 묵으면 묵을수록 진한 향과 깊이를 더해지는 술이 되는 것.......
시간이 녹아있지 않은 관계는 그래서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때까지.....그렇게 살아왔다.
아주 오랫동안, 엄청난 시간을, 수많은 계절을 함께 해보지 않은 사람과는 믿음도, 마음도, 관계도 이어가지 않았다.
아주 오랜 나의 철칙이자, 수많은 시행착오에서 나온 뼈아픈 깨달음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철칙도, 뼈아픈 경험도, 내 신조도 모두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 한 남자를 만났다.
그 강렬함은 내 영혼 저 깊은 곳까지 침범하고 빼앗아버리는 것 같다.
한순간 두려워졌다.
지금......내가 괜찮은 건지.......
지금 이렇게 가고 있는 것이 맞는 건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한순간의 흔들림인지, 외로움 때문인지, 아니면 미안함 때문인지.......
무엇보다 더 이상 이렇게 미적대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그 남자에게도, 그리고 상우 오빠에게도, 내게도, 뭔가 결단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순간 고통스러운 그가, 내 방으로 들이닥쳤다.
“이재신!!!!!”
“..................”
“가지 마..........”
쿵......소리를 내며, 무언가가 저 가슴 안으로 깊이 내려앉았다.
그것은.......내 심장소리였다.
3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밥을 먹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이야기를 나누었다.
상우 오빠 친구 레스토랑이라 별실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있을 수 있었다.
“너.......할 말....있지?”
어쩌면 상우 오빠는 나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쓴 커피를 입 안 가득 삼켜 넣었다.
그 쓴 맛이 정신을 온전히 깨워주었다.
“재신아?”
“..................”
“..................”
“왜 그때 아무 말도 안 했어?”
그 때........
나의 스무 살.....그리고 이 사람이 24살이었던 그 해.
온 세상이 반짝였던 그 때.........
세상이 내 것이라 자만했던 그 때.......
4
열아홉의 5월이었다.
그 날은 점점 여름의 기운을 뿜어내던....그런 오월의 푸르른 날이었다.
교문 밖이 시끌시끌하다.
또 누가 온 건가.....
재벌 고등학교다 보니 나름 내로라 하는 사람들이 찾아오고는 했다.
오늘은 또 누구래?
재신은 이 시끄러움이 그저 귀찮기만 하다.
여전히 아이들은 재신의 앞에서 정중한 척 위선을 떨었다.
여학생들은 재신 옆에서 약간의 아양을 떨어대고 있었고,
남학생들은 어떻게든 재신의 마음에 들고자 알짱대고 있었다.
이 학교는 심지어, 예비 부마 학교라는 말까지 듣고 있었다.
재강이 이곳에서 왕비를 만나면서 더욱 이러한 기대는 커져가기만 했다.
물론 고등학교를 다닐 시절에는 그런 사이는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이후 영향을 끼친 건 사실이었다.
심지어 어정쩡한 외국에 유학을 가느니, 대한민국왕립고등학교가 훨씬 낫다는 말도 있었다.
교육적인 측면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왕족들이 의무적으로 다녀야 하는 학교다 보니 더 그런 것도 있었다.
재신은 그저 한숨만 나왔다.
재하가 학교를 다닐 때는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었다는 전설이 전해져온다.
일주일에 한 명씩은 여자가 바뀌었다는 둥, 둘이 어디까지 갔다는 둥, 여럿 울렸다는 둥,
재하는 고등학생이 아니었다는 둥, 정말 소문은 일파만파에 눈덩이처럼 불어나기만 했다.
그런 재하였으니, 재신이 들어온 이후에는 재신의 남성편력은 어떨지 난리도 아니었다.
작년까지는 디스.패.치까지 붙어서 실시간 감시를 하기도 했다.
어떻게든 공주의 스캔들을 찍어보겠다는 일념이기도 했다.
거의 1년 반을 난리를 치던 기자들도, 워낙 단조롭게 학교를 다니는 재신 때문에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정말 공부와 동아리 활동만 하나보다고 기자들이 인정할 정도였다.
그야말로 단조로웠다.
지금은 고3이라 더 심하기도 했지만, 정규 수업을 듣고, 이후 밴드부 동아리 활동을 하는 게 다였다.
보컬이었으니, 축제 때 발표회 하는 정도 외에는 별 다른 건 없었다.
물론 왕립고등학교 축제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기자들이 오는 것은 기본이었고,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몰리고는 했다.
그리고 재신이 전면 보컬로 나선 작년부터 재신의 밴드 발표는 가장 인기 있는 핫한 이슈가 되었다.
그래도 재신은 심드렁했다.
어떻게든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아이들이, 한심해 보이기도 했다.
내게 친구라는 것이 정말 존재할까.........
이미 초등학교 때, 아니 유치원 때 포기해 버린 일이다.
어서 졸업이나 하고, 유학을 떠나는 것이 꿈 아닌 꿈이 되어버렸다.
이 왕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서, 나도 사람답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그 때문에 궁에서 하는 영어 수업에 그토록 매진하고 있었다.
어쩌면, 열네 살 가을에 잠시 외국 생활을 했었던 그 때를 잊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저 평범한 소녀로 있을 수 있었던 그 시절을, 잠시 잠깐이었지만, 그 자유와 평화를 잊을 수가 없었다.
열다섯 봄, 여전히 겨울의 차가운 기운이 스며들던 3월, 아빠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아마 계속 그 자유를 만끽했을지도 모른다.
교문을 나오니, 스포츠카 한 대가 멋들어지게 서 있었다.
꽤 비싸겠는데....
딱 봐도, 몇 대 안 되는 한정품인 것 같았다.
또 누군가 골빈 재벌2세가 왔나 보지....
에효......
재신은 두리번거리며, 근위대원들을 찾는데, 오늘따라 멀리 세웠는지 잘 보이지도 않았다.
뭐지?
뭐, 안 오면 나야 좋지만.....
한 번씩 답답할 때면, 담을 타넘고 도망가 버린 일들도 많았다.
그 역시 고3이 되면서는 끊었지만......
한번만 더 근위대원들을 따돌리고 도망가면
큰오빠가 유학을 보내주지 않겠다고 아주 단호하게 선언하지만 않았다면,
여전히 담을 타넘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굳이 안 보인다면, 찾을 이유는 없지.
재신은 오랜만에 자유를 만끽하며 교문을 나와 거리를 향해 몇 걸음 떼고 있는 그 때,
“이재신!”
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들었다.
어!!!
뭔가 익숙한........뭔가.....가슴이 자글거리는.....그런 느낌.....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확인하기 위해서 고개를 돌려야 하지만, 재신은 섣불리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왠지.....이 순간이 착각일까봐, 착각이더라도, 이 기대감을 계속 품고 싶은 작은 욕심에,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재신아!”
어느 틈에 그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나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올려다본 그곳에, 그가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쿵.쿵.쿵.쿵........소리를 내며 빠르게 뛰는 내 심장소리가 들렸다.
그가 왔다.
열아홉, 5월이었다.
5
열일곱, 그가 떠났다.
한국에서 유학을 준비하던 그가 21살의 나이에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오빠, 나 좋아?”
“당연하지.”
피식대며 내 머리를 쓰담쓰담하던 그에게 나는 그저 어린 꼬맹이에 불과했다.
재하 오빠의 동생인 이제 겨우 고등학생이 된 아주 어린 여자 아이.
그에게 나는 그런 어린 동생이었을 것이다.
“아니 나 참.....진~짜 좋아하냐니깐!!”
내가 골을 내면, 웃으면서 내 머릴 흐트러뜨리면서 볼까지 꼬집고는 했다.
이 무슨 시추에이션인지.......
“그럼, 진짜지.”
피식 피식 웃고 있는 걸로 봐선 이건 장난임에 틀림없다.
아니 단순히 여동생으로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열일곱 살짜리 애를, 스물이 넘은 남자가 좋아할 리는 없을 것이다.
오빠 옆에 얼마나 괜찮은 언니들이 많은지 알고 있다.
오빠는 유학 준비 때문에 한국에서 대학에 입학하지 않았을 뿐, 괜찮은 대학생 언니들과 어울려 놀기도 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에 비해 나는 정말 애송이일 뿐이다.
그의 말대로,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에휴........
어릴 때부터 오빠였다.
재하 오빠처럼, 오빠........
재하 오빠한테보다도 더 징징대고는 했다.
재하 오빠는 아무래도 자기 일에 바빠서, 뭐, 대부분이 여자문제였지만,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사실 그게 더 고맙다.
괜히 귀찮게 간섭을 해대면, 그게 더 숨 막히는 일이다.
아빠가 그렇게 가신 후, 재강 오빠는 너무 아빠같이 예뻐해서 이건 뭐, 그냥 아빠다.
늘 우쭈쭈 모드니, 용돈 탈 때 가서 애교만 부려주면 된다.
진짜 오빠 같은 오빠가 상우오빠였다.
힘들다고 투덜대면, 등 두드려주고, 열 받게 한 남학생이 있으면, 내 옆에서 괜히 거들먹거려주고,
시험 치기 전, 쪽집게 과외처럼 벼락치기를 도와주고......
오빠는 내게 그런 사람이었다.
진짜 오빠 같은 사람.......친남매 같은 사람.....
어렸을 땐, 상우 오빠랑 재하 오빠가 바뀌었으면, 하고 바랐던 적도 있다.
상우 오빠가 우리 작은 오빠라면, 정말 인생이 편했겠다 싶기도 했다.
그러나 중3이었던 작년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상우 오빠가 우리 오빠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정말 감사하다는 기도까지 드렸다.
상우 오빠는 내게 친오빠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남자......친구.....라고 부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런 바람들이 스물스물 기어들어오고 있었다.
왕실 중학교, 왕실 고등학교가 같이 붙어있다 보니,
한국에 돌아와야 했던 중2때는 오빠들과 거의 붙어 다녔다.
어차피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애들도 없었고, 누군가 내게 다가오는 것 자체가 피곤한 일이었기 때문에
늘 오빠들과 함께 있었다.
그러다 중3이 되면서 오빠들이 졸업하고 나니, 학교에서 빈자리가 이만 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처음엔 그저 곁에 있다가 없어서 그런 건가 싶기도 했다.
궁에서 만나는 오빠 모습에 내가 두근대기 시작하는 것을 안 순간,
오빠가 다른 여대생들과 소개팅 한다는 얘기를 듣고, 소름이 돋았던 그 순간,
알게 되었다.
내가 상우 오빠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단순히 외로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우 오빠는....절대로 친오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예뻐? 마음에 들었어?”
소개팅을 하고 온 날, 그는 궁에 들렀다.
그런 그에게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뭐가? 누구?”
“지금 장난 쳐?
나, 다 알거든?
오빠, 소개팅 했다며?”
“풋.......”
“웃지 말고!!! 얘기를 하라고!!!
이쁘더냐니까?”
골이 나서 꼬치꼬치 묻는 내게, 오빠는 늘 그렇듯이 그저 내 머리를 쓰담쓰담하며 흐트러뜨린다.
“이쁠 리가 있니?”
“뭔 소리야?”
“안 이쁘더라. 완전 호박이더라....”
“그.....래?”
“응. 그래서 다시는 안 하려고.....
유학 준비도 해야 되는데....
재하만 아니었으면 안 나갔어.
안 그래도, 다시는 안 한다고, 한번만 더 부르면, 각오해야 할 거라고 말해뒀어.”
“흠흠.....그으래?.....”
그렇게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고서야 안심을 했었다.
정말로 오빠는 그 이후로 다시는 소개팅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나는 내 마음을 알게 되었다.
내 첫사랑이 드디어 시작되었다는 것을.........
중3.......열여섯의 나이.....
어쩌면 너무 늦게 시작한 첫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때 이미 커플인 애들도 많았으니......
그러나 내게는 요원한 이야기였다.
믿을 사람도, 친한 사람도 없었던 내게 커플이든, 짝사랑이든, 모두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그저 피곤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아이들의 반응이, 남학생들의 접근이, 피곤하고 귀찮았고, 힘들었다.
그저 나를 내버려뒀으면 좋겠다고, 그런 생각들만 했다.
알고 있었다. 저 아이들의 시선에서 나는 그저 장식용 인형일 뿐이라는 것을.....
그 눈에는 어떠한 진정성도 없다는 것을........
초등학교, 어린 날, 어느 기억 속에서 나는 사람과의 관계를 닫아버렸다.
나와 친하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전리품 같이 자랑하기 위한 도구라는 것을.......알아버렸다.
그 이후였다.
그 누구에게도 마음의 곁을 내주지 않았던 것은.......
차라리 모두에게서 마음을 닫고, 딱 무례하지 않을 만큼만 사람들을 대했다.
누구도 특별하지 않았고, 또 누구도 무시하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인간관계가 풀렸다.
그렇게 내 학창시절은 흘러가고 있었다.
그랬던 내게....내 빗장을 열고 들어온 첫 번째 사람이었다....그는.......
시험을 도와주며, 때로는 내 친구가 되어주며, 재하 오빠가 해주지 못하는 친오빠가 되어주며,
그는 내 첫사랑이 되어갔다.
그에게 나는 그저 어린 귀여운 여동생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늘 내 말이면 다 들어주고는 했다.
늘 쫑알쫑알 말이 많은 내 얘기에 귀기울여주고, 귀엽다는 듯, 늘 내 머리를 쓰담쓰담 해주고는 했다.
그 손길이 좋으면서도, 불만이기도 했다.
마치...꼬마아이 머리 쓰다듬듯이......그랬으니.......
그렇게 1년을 더 보내고 난 후,
그는 대학에 합격하고 나서도, 9개월 정도 더 한국에 머물렀다.
원래는 내가 중3이던 9월에 갔어야 했지만, 그는 가지 않았다.
왜 가지 않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내 곁에 아직 있는 그가 좋았다.
그저 나 때문일 거라고, 아니 나 때문이었으면 좋겠다고, 혼자 기대하며 좋아하고 있었다.
고등학생이 될 나를 위해서 그는 과외 교사라는 명목으로 자주 궁에 왔었고,
자연스럽게 나와 어울리고는 했다.
그의 마음이 어땠는지, 나는 모른다.
그저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좋았을 뿐이다.
곧 가야 한다는 걸, 그가 미국으로 떠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저 오늘은 아니길 바라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유예할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다.
고1 올라가던 열일곱의 그 봄......
그가 떠난다는 말을 전해왔다.
그의 말에 내 대답은 간단했다.
“응........”
“재신아?”
“응?”
“그게 다야?”
“뭐가?”
“나 미국 간다는데, 대답이 응, 이게 다냐고.”
“오빠 어차피 작년에 갔어야 하는 거잖아.”
“그래서.....?”
“아니...그렇다고......”
내 심드렁한 대답에 그는 물끄러미 바라만 본다.
이 사람이 무슨 생각인지, 어떤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지....늘 궁금하다.
지금 이순간도....
떠나야한다고 말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도 나랑 헤어진다는 게 조금은 섭섭할까.....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된다.
“재신이, 너....너무 담담해서, 나, 좀 서운할라 그런다.”
“칫.......”
서운해 하는, 뭔가 섭섭해 하며, 내 말을 기다리는 그의 모습을
조금은 두근대며 바라볼 뿐, 나는 그 어떤 말도 더 하지 못했다.
난 그저 열일곱의 어린 소녀였을 뿐이었다.
6
“야, 이재신, 너 뭐하냐?”
노크도 없이 예의 없이 방에 들어온 재하 때문에 재신은 접던 종이를 후다닥 감추었다.
“신경 끄셔!”
“뭐야, 이재신, 너, 종이학 접는 거야?
우와 대한민국 얼음공주께서 웬일이래?
뭔 일이냐, 도대체!!!”
“시끄러!!! 나가! 나가!!!!”
“야, 야, 이건 뭔가 엄청난 일이잖아.
얼음공주 이재신이 종이학을 다 접고,
기사로 흘릴까?”
“미쳤어! 죽을래? 작은 오빠?
그러다 오빠 니 명에 못 사는 수가 있다?”
“너, 설마 이거.......”
“아니야, 아니야....무슨 소리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이거 상우 줄 거 맞지?
야, 귀신은 속여도 이 오빠는 못 속인다~”
그러더니 재하가 방금 전에 정성들여 만든 금색 종이학을 휙 빼앗아 든다.
“오빠!!!!
그거 내놔!! 당장 안 내놔!!!!
야, 이재하!! 너 죽을래?”
재신이 뭐라고 하든 재하는 꿋꿋하게 종이학을 펴고 있었다.
사실 들어올 때, 재신이 접고 있는 종이학 안에 뭔가 글이 적혀 있는 걸, 슬쩍 봤었다.
혹시나 해서 펴보니, 역시나였다.
휘유~~
종이학의 안쪽 면을 읽던 재하가 휘파람을 휘익 하고 불었다.
“야!!!!!!!! 이재하!!!!”
“와~~~. 이재신.....큭큭큭큭.....
미치겠다, 진짜...
뭐? 큭큭....”
“야, 내놔 빨리 내놔!!!!”
“너, 이런 말도 다 할 줄 아냐?
상우 오빠, 나중에, 나랑 꼭 결혼해----큭큭큭큭...
뭔 고1이 벌써 결혼이야?”
“야!!!!!!!!”
재신은 재하에게 대롱대롱 매달려서 문제의 그 종이학을 겨우 다시 빼앗았다.
씩씩대고 있는 재신의 앞에서 재하는 웃는 데 바빴다.
“와...진짜 이거 기사감이다. 기사감.
대한민국 얼음공주 이재신이 드뎌 사랑에 빠져서 결혼해달라고 프로포즈까지 하고...큭큭...”
“그런 거 아니라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맞네? 프로포즈...결혼해 달라며?”
“,.....학으로 접어 놨으니까, 못 볼 수도 있지.”
“야, 기가 막힌다.
못 볼 거면 뭐하려고 적은 거야.”
“그냥........여튼 시끄러!!
이재하 너, 상우 오빠한테 한 마디라도 하면, 죽~~어!!!”
주먹을 부라리는 재신에게 재하는 끝까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야, 너 솔직히 상우, 보라고 적은 거잖아.
이 오빠님이 얘기해주지. 우리 막냇동생을 위해서....”
“야, 이재하!! 미쳤어?
이런 건, 그냥 내버려두는 거야!!! 이재하!! 너 한 마디라도 해봐!!
나 큰오빠한테 다 이를 테니까...어디 한번 해보자구!!”
재하는 손만 휘휘 젓더니 낄낄대며 나가버렸다.
그렇게 재신은 상우를 보내기 위한 이별을 준비했다.
마지막으로 궁에 들린 상우에게, 재신은 종이학을 내밀었다.
“나, 못 나가는 거 알지?
내가 아무리 틴에이저라도, 기자들은 그런 거 생각 안 하니까.....”
재신은 장난스럽게 손으로 목을 그으며,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얘기를 건넸다.
“이거.....뭐야?”
“흠흠....내가 오빠의 학업을 위해서, 열심히 학님을 접었다고.
마지막에 거의 밤새다시피 했으니까...
꼭꼭 잘 간직해야 돼! 알았지?
오빠, 이거 받아서, 공부 대박~터진다.
장학금 받고 난리 나겠네.”
장난스런 말에도 상우의 얼굴은 심각했다.
“에이 오빠...대한민국 공주가 이렇게 열심히 만들어줬는데,
고맙다는 말도 안 해?”
“......고마워.”
“뭐야? 엎드려 절 받기야?”
“......진짜 고마워.”
상우의 목소리가 울컥거리는 듯했다.
내 착각인 걸까.......
재신은 애써 밝은 척, 농담을 툭툭 던진다.
그렇게 가볍게 그를 보내주고 싶었다.
“에휴....내가 딱 공항에 나가서, 대한민국 공주 스캔들 한번 쫙 내줘야 하는데....
오빠를 봐서 참았다.
공부 하러 가는 사람.......앞길 막을 수도 없고.....
여튼 잘 갔다 오고, 공부 열심히 하고....
회장님 믿고 놀지 말고, 제대로 공부해서 대박치고 와.
장학금도 받고, 알았지?”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는다.
아....그 미소를 보는데,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오빠, 이제 가.
공주방에 오래 있으면, 오빠들 난리나.
대한민국 국왕한테 쫓겨날 수도 있다?”
재신이 일어서며 작별을 고하자, 상우도 마지못해 일어난다.
“재신아....”
“응?”
“우리 재신이, 한번 안아보자.”
재신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기도 전에 상우가 재신을 품에 안았다.
꼬맹이동생과 이별하듯이, 상우는 재신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오빠 없어도, 공부 열심히 하고,
얼굴만 예쁘고, 머리가 텅 비면 안 되니까, 지혜로운 대한민국 공주님이 될 수 있게,
우리 자랑스러운 공주님이 될 수 있게,
그렇게 노력해야 돼.
알겠지?”
그의 가슴에 안긴 채로, 응응, 하며 대답을 한다.
“그리고 재신아.....”
“응?”
“아니야.....”
“뭐래?”
피식 김새는 재신을 상우가 꼭 껴안더니, 재신의 머리위에 입을 맞춘다.
“우리 꼬맹이 공주님, 오빠 올 때까지 울지 말고.”
“쳇...내가 애야?”
“그럼, 아직 꼬맹이지....”
“쳇쳇.......”
그렇게 그를 보냈다.
돌아서는, 방을 나가는 그의 모습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돌리는 나를, 그는 몇 번이나 돌아보며 나갔다.
그렇게 내 열일곱과 열여덟은.........그가 없는 채로 지나갔다.
늘.....비슷하게, 평범하다 못해 지루하게
특별할 것 없는 일상들이........이어져갔다.
그리고.....열아홉의 5월에.......그가 돌아왔다.
7
“재신아....오빠 왔는데, 안 반가워?”
그가 내 곁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짧아진 머리만이 그가 달라진 모습이라는 걸 알려줄 뿐, 그는 여전히 상우 오빠였다.
내게 한없이 웃어주는, 우리 진짜 오빠 같은 오빠.
“뭐야.......지금.......”
“뭐긴 뭐야, 나 돌아왔다니까?”
너무 반가우면 눈물이 난다는 걸, 그 때 처음 알았다.
아쉬운 것도, 안타까운 것도, 없었던 내게, 그는 그 처음을 가르쳐주었다.
“어, 재신아, 너 울어?”
“울긴 누가 울어? 나 고3이거든. 건드리지 마시지!!!
눈에 뭐 들어갔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눈을 비볐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내 눈 앞에는 그가 있었다.
내가 열아홉, 그는 스물 셋.
주위에 웅성거리는 소리도, 점점 가까이 다가와 우리를 빤히 바라보는 아이들도,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까까머리, 공익 군인 아저씨는, 그렇게 내 곁에서 나의 남은 열아홉과 스물을 함께 했다.
군대 문제 때문에 오빠는 내가 열아홉이었던 그 봄에 들어왔다.
학기를 급하게 끝내자마자, 오빠는 바로 훈련소에 들어가 4주간의 훈련을 받고, 바로 공익근무를 시작했다.
예전에 재하 오빠랑 같이 야구를 하다 팔뚝을 다친 이후, 팔뚝에 박혔던 심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는 바람에, 공익으로 빠지게 되었다.
22개월 근무.
고3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고3 학생과, 공익 근무 요원이 함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내가 졸업을 하면........그와 조금은 더 가까운 사이가 되지 않을까.....
그런 꿈을 꿨던 것 같다.
찬란한 백일몽을.....꿨던 것 같다.
사실 고3이라고 해도, 다른 학생들처럼 수능을 준비하고 있지는 않았다.
난 아예 대학부터 영국으로 유학가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도움을 받아, 영어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고, 영국 수능시험인 GCE(General Certificate of Education)를 준비했다.
왕족이라는 어드밴티지 때문에 웬만해서는 합격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실력에서 뒤지고 싶지는 않았다.
열아홉의 겨울....와도 좋다는 합격 메일을 받고, 그때부터 열심히 놀기 시작했다.
그쪽은 가을학기 시작이라 고등학교 졸업 후 6개월은 영어를 준비한다는 핑계로 열심히 놀았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식 때는......오빠에게서 사귀자는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
그렇게 들떠하며 기다렸지만, 오빠는 아무 말도 없었다.
내가 미성년자라서 그렇다고, 그래도 오빠는 내게 관심이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막상 졸업하고서도, 그가 아무 말이 없자,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그에게 단순히 귀여운, 어린 동생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3월이 가고, 4월이 와도,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의 얼굴에 조금씩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는 것.
늘 나를 향해 환히 웃어주던 그의 얼굴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일까.
아주 오랜 경험이, 그에게 묻지 말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지금 이대로 내버려 두라고........
무서웠을까.......
그의 입에서 나올 말들이.......
나는......그에게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아닌 척, 여전히 귀여운 동생인 척하며, 아무 것도 모르는 척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불안은 쌓여 가고, 불안이 쌓인 만큼, 오빠와 나 사이는 조금씩 벽이 올라오고 있었다.
“오빠, 나, 소개팅 할까?”
여느 때처럼 영어를 봐주러 온 오빠에게, 넌지시 운을 뗐다.
순간.......그가 입으로 가져가던 커피 잔을 그대로 멈추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순간이지만, 아주 찰나지만, 그의 눈빛은 분명 흔들렸다.
아니, 흔들렸다고 믿고 싶었다.
“응? 왜 아무 말이 없어.”
그의 얼굴에서는 그 어떤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리고 천천히 커피잔을 책상 위에 놓았다.
“해.”
“어?”
방금 그가 한 말을 내가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소개팅....하라고.”
“뭐?”
생각보다 담담한 그의 반응이 나를 차갑게 얼어붙게 만들었다.
난.....역시.....그에겐.....아무 것도 아니었던 걸까.......
“진...짜야?”
“그래. 이제 재신이 너도 스무 살인데, 소개팅도 하고, 한국 있는 동안만이라도,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는 게 좋지.
너 지금 계속 궁에만 쳐박혀 있잖아.
나가서 소개팅도 하고, 친구들도 만나고 해.”
“..................”
“재신아?”
“오빠....나 오늘 좀 피곤해. 쉬어야겠어.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아닌 척 해보려 해도, 목소리가 굳어가는 걸, 감출 수가 없었다.
보통은 왜 그러느냐며 물어볼 그였지만, 그는 그저 쉬라며 그렇게 나가버렸다.
그런 그를 보며, 울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어보지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새벽녘까지 잠이 오지 않았다.
실망감인지, 배신감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자꾸만 올라와서 울컥하게 만들었다.
화가 났다.
그의 태도는 뭘까.......
나는 그저 어린 동생인 뿐인 걸까......
그에겐 내가 귀찮은 게 아닐까.....
재하오빠 동생이니까 어쩔 수 없이 거절하지 못해서 내 곁에 있어주는 게 아닐까....
생각을 하면 할수록,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마치 심장에 돌을 매단 것 같이, 화가 나는 것인지, 속이 상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자꾸만 올라오고 있었다.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그렇게 여명이 돋아올 때까지, 가슴을 움켜쥐고만 있었다.
띵동.
이른 새벽....이제 겨우 여명이 돋아오는 새벽에, 문자가 왔다.
<하지 마. 소개팅.>
아까까지 부여잡고 있던 미치도록 아프게 했던 심장이, 이제는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시작되는 줄 알았다.
그렇게 오래도록 행복할 줄 알았다.
8
그 날, 그 때로부터 8년이 흐른 지금........그와 나는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앉아 있다.
그 날, 스무 살이었던 나는.....어느 덧, 스물여덟이 되어버렸고, 스물네 살의 청년은 어느새 서른둘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시간 속에 잠겨 있었다.
“그 때.........나 왜 안 잡았어?
기다려 달라고, 아니면 기다리겠다고 그 말만 하면 됐잖아.
왜 안 했어?”
“.....................”
“상우 오빠!”
“......내가.....못 나서 그래........”
“얘기해줘.
난, 분명히 거절이라고 생각했어.”
“그 때.....상희가.......”
“상희 언니?”
“재하랑 얘기가 있었어.”
“뭐?”
아버지가 상희를 재하의 짝으로 생각하고 계셨었다.
그 사실을 안 이후, 떠나는 그녀를 잡을 수 없었다.
어떤 말도, 어떤 약속도 할 수 없었다.
좋아한다, 는 그 말조차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영국으로 떠나는 걸 보면서도
이것이 우리의 삶이었다.
집안에서 원하는 대로 그렇게.....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굴레.....
재벌로서 누리려면, 그만큼 그 굴레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거 아니 재신아.....
나, 니가 준 종이학, 다 열어 봤어.”
“어?”
“그런데 없더라.”
“................”
“재하가 늘 말하던 그 종이학.....없었어....”
그리워서 죽을 것 같은 날이면, 종이학을 펼쳐서 보고는 했다.
“야, 재신이가 너한테 결혼하자고 쓴 종이학 있는 거, 아냐?”
“뭐?”
갑자기 걸려온 재하의 전화에, 재하의 말에, 내 가슴은 미친 듯이 뛰어대고 있었다.
“잘 찾아봐. 무슨 색인지는, 절~~~대 안 가르쳐 준다!”
그날 밤부터였다.
미치도록 보고 싶어지는 날이면, 종이학을 하나하나 펴보았다.
혹시 재신이가 남겨놓은 마음이 있을지, 내게 자신의 마음을 비춰준 말이 있을지, 그렇게 두근두근 대며 찾고는 했다.
그러나 아무리 몇 번은 펴보아도 없었다.
그 엄청난 학들을 다시 다 펴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재하가.....놀린 건가......
그놈이 그래도 그런 놈은 아니다.
분명.......알고 말한 게 틀림없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그 말을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라도, 재신의 마음을 내가 빼앗았다고.....재신이의 마음 속에 내가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다 미쳤다고 했다.
합격하고서도, 9개월이 넘도록 학교로 가고 있지 않은 나를 보며, 부모님도, 주변 친구들도, 지금 뭐하는 짓이냐고 했었다.
그러나......갈 수가 없었다.
그 아이 때문에........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내가 미친 건가.....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주 어린......꼬맹이 같은 동생일 뿐이라고, 그렇게 몇 번을 되뇌어도, 차올라오는 감정은 그게 아니었다.
중학교 2학년짜리, 열다섯의 꼬맹이가 자꾸 여자로 보였다.
하늘하늘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며 걸어가는 아이를 볼 때면, 정말이지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는 했다.
로리타 콤플렉스인가.......
겨우 중학교 2학년짜린데.....너무나 어린 동생인데.....
상희보다도 더 어린데......
내가 정말 미친 건가.......
그래도,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감싸고 싶었다.
다시 웃게 해주고 싶었다.
열다섯, 그 소녀가 검은 옷을 입고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참고 있는 그 모습을 본 순간,
그 소녀를 달래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국상(國喪)........
의연히 국상을 치러내던,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울음을 참던, 그 소녀를, 내 가슴에 담았는지도 모르겠다.
소녀가 커가고 있었다.
주위의 모든 빛을 끌어모은 듯, 소녀는 빛이 났고, 소녀가 빛이 나는 만큼, 내 가슴은 자꾸만 타들어갔다.
주위에 남자애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재신이 또래 남학생들.......
겁이 났다.
재신이에게 나는 오빠 친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텐데....
재신이 입장에서 나는 나이 든 노땅일 뿐인데.....
그녀 옆에 모여드는 남자애들 때문에 신경이 이만저만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재하를 설득했다.
재신이가 선왕전하의 서거 때문에 억지로 한국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으니, 친구도 없을 거라고.....
그리고 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막내가 가장 힘들 거라고......
이럴 때 오빠가 같이 있어줘야 한다고......
내 말에, 그 장난꾸러기 같은 재하가 진지해졌다.
고맙다고.....
솔직히 자신도 재신이 너무 눈에 밟힌다고.....
자기가 졸업한 후가 너무 걱정된다고......
그렇게 우리는 재신이를 늘 끼고 다녔다.
재신이를 남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남자애들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우리가 재신이 옆에만 있어도, 다른 남자애들은 다가올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재신이 주변을 방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빛은 숨길 수 없는 법, 재신이의 빛은 모두의 눈을 멀게 할 만큼, 환하게 퍼져 나가기만 했다.
그런 재신이를 곁에서 지켜보며, 가슴만 태우고 있었다.
열다섯, 열여섯, 열일곱........
떠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비리그에 합격을 하고, 가을이면 들어가야 하는데, 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재신이의 곁에서 미적미적대는 동안, 소녀는 점점 아름다워져 갔다.
열일곱의 소녀는, 작은 발걸음에도, 내게 지어주는 환한 미소에도, 툭툭 던지는 장난치는 목소리에도,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어떻게......소녀의 곁을 떠날까.......
내가 없는 동안.......소녀는 남자를 만나겠지.........
나 말고,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뭔가가 끓어올라오는 듯했다.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대학을 가고 나서도, 결국 군을 핑계로 돌아오고 말았다.
팔꿈치 수술 때문에 어차피 4급이었고, 이미 공익근무를 결정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대학 졸업을 하고 공익을 하라고 했지만, 내가 빡빡 우겨서 다시 들어왔다.
소녀는 19살........이제 소녀라기보다 성숙한 아가씨가 되어 있었다.
교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며, 터질 듯한 심장을 움켜 잡았다.
어떻게 변했을까.......
너무나 두근대며, 설레 하며 기다리는 그곳에, 빛이 뿌려지는 듯, 걸어오는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다.
아니 소녀가 아니었다.
성숙한, 아름다운, 아가씨........
그렇게 나는 나의 소녀가 아름답게 커가는 것을 옆에서 지켰다.
공익 근무가 마치면, 재신이의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는 했다.
열다섯, 그 어렸던 소녀가, 열아홉이 되고, 스물이 되어가는 것을, 가슴 두근대며, 아니 자꾸만 가슴 밖으로 나오려는 내 감정을 억지로 누르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녀가 졸업을 하면, 고백을 하리라......내 여자친구가 되어달라고,
나만의 여자가 되어달라고, 고백하리라고,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차올라오는 마음을 눌러오고 있었다.
“상우, 너, 재신 공주, 좋아하는 거냐?”
어느 날, 아버지는 서재로 나를 불러 다짜고짜 물어보셨다.
그 물음 앞에서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들킬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이미 알고 계셨을 거다.
궁을 그리도 자주 같으니.....뭔가 이상하다고 느끼셨을 거다.
심지어 왕립고등학교로 퇴근하는 아들의 모습에서 뭔가를 느끼지 않으셨다면 더 이상했다.
처음 미국으로 대학을 갈 때도, 9개월이나 있다가 들어가는 것도,
굳이 오지 않아도 되는데, 와서 공익을 하겠다는 아들의 태도에,
늘 궁에 가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는 자식의 모습에
충분히 아실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께.......바로 진실을 말해버릴까......
공주님의 남자가 되게 해달라고,
내가 재신이를 갖게 해달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하게 해달라고.....
그렇게........
나는 혼자만의 단꿈에 빠져 있었다.
그 다음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은......그 이후 내 삶을 시궁창으로 박아 넣었다.
“접어라!”
“예?”
“너와, 공주는 안 된다.”
“지금....무슨 말씀이세요?!!! 저와 재신이가 안 된다니요?
뭐가, 뭐가 안 된다는 말씀이세요?”
“상희........왕제비가 될 거다.”
“예???”
“예전, 선왕전하 계실 때부터 언질이 있었던 얘기다.
이제 상희도 스물한 살이고, 곧 왕제도 군에 갈 테니.......
군에 갔다 오면 정신도 들테고......
군에 가기 전에 뭔가 약혼이라도......”
“아버지!! 상희, 겨우 스물한 살이에요. 근데 무슨 약혼이에요?”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 세계 몰라? 십대 후반에 이미 짝은 다 정해져.
20대 초반에 약혼을 걸어놔야, 회사에도 좋고, 흔들릴 염려도 없고.....
그러니, 그런 줄 알아라.”
“아버지!!! 상희 얘기는 들어보셨어요? 재하 마음은요?
두 사람 마음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어리석게 굴지 마라.
약혼이든 결혼이든 정해진 대로 하고, 알아서 연애를 하든 하면 되는 거지.
언제, 마음 어쩌고 하며 따지면서 살았어?
너도, 그러니까 어서 접어라.”
“아버지!!!!”
“니가 재신이, 마음에 둔 거, 알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안 된다.”
“왜, 저는 안 되는데요? 상희가 아니라, 제가.....부마가 되어도 되는 거잖아요.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시고, 아시면서도 가만히 계셨던 거 아닙니까?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러시는 건데요?
어차피 왕제비가 되든, 부마가 되든, 왕실과 친분을 쌓는 건 똑같잖아요?”
“달라.”
“뭐가...다르다는 말씀이세요?”
“재신이는.......왕이 될 확률이 거의 없어.”
“예? 그건 어차피 재하도.......”
“아니야. 내가 알기로는........지금 국왕은 아이를 갖지 못할 확률이 높아.”
“지금 무슨 말씀이세요?”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측근에게 들었어.
왕비가 아이를 가지기 힘들다고 말이야.
그렇다고, 지금 국왕이 이혼을 할 스타일도 아니고.....
그렇다면, 결국 재하가 왕이 되겠지.”
“아버지!!!!!!”
“어쨌든 너보다는 상희가, 우리한테는 더, 유리하다.”
그래도 설마 했다.
아닐 거라고,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상희나 재하는 서로 관심이 없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재하야 워낙 여자를 밝히니까, 상희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는 있었다.
그러나 상희가 재하 같은 타입을 마음에 들어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상희가 사랑에 빠졌다.
모든 정황이 날더러........그녀를 포기하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재신이와 나.......
그 애매한 사이......
소개팅을 하겠다는 재신이에게, 안 된다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렇게 문자를 보내고 말았다.
그러나 그러지 말아야 했다.
아버지와 전하께서는 한 번씩 오찬을 하시며 점점 상황을 현실화시키고 있었다.
나는......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녀를 놓을 수도, 잡을 수도 없었다.
왕실에서 겹사돈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대한민국 왕실은 곧 대한민국이다.
그러한 대한민국 왕실을 우스갯거리로 전락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도 재신이를 보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5년이나 이어온 감정이었다.
한 순간에 접을 수도, 접힐 수도 없는 마음이었다.
미친 듯이 달려가는 이 마음을........스스로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시간은 잔인하게 흘러갔고, 그녀를 잡지도 못하면서,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끊임없이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날이 왔다.
“오빠, 나 이제 영국 가야 돼.
단기로 어학연수도 해야 하고, 수업 전에 준비도 해야 한대.”
“그래. 넌, 가서 잘 할 거야.”
“그게....다야?”
“응.”
“다른 말, 뭐 할 거 없어?”
“.........건강하게, 잘 지내.
공부도 열심히 하고..........”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걸 알고 있었지만, 다른 말은 더 할 수가 없었다.
아니다, 그녀의 얼굴이 어둡다는 것도, 내 착각일지 모른다.
다른 말을 하고 싶었다.
좋아한다고, 아니, 사랑한다고....너밖에 없다고......
그러니 기다려 달라고......
조금만 더 내가 강해지고 나면, 내가 내 스스로 설 수 있을 수 있게 되면,
내가 너를.......내 여자로 가질 수 있게 해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갑자기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알았어. 오빠도 공익 근무 잘 하고........
공항에는 나오지 마. 괜히 스캔들 나.
여기서 빠이빠이 하자.”
그렇게 마무리되면 안 되는 거였다.
난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을까.
그녀가 나를 좋아한다고, 예전부터 좋아했다고.....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오빠, 왜 그러는 거냐고, 내게 화내주길 바랐던 걸까.......
생각해 보면, 그녀가 나를 좋아했는지, 어떤지는 모른다.
나는.....그녀에게 그저 오빠 같은 존재였는지 모른다.
같이 있으면 편하고, 이야기 잘 들어주고, 진짜 오빠 같은......그런 존재가 아니었을까.....
스물넷의 나는.....그렇게 무력했고, 어리석었다.
그녀가 왕실과 국민들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는 것을, 공항 기둥에 기대어 지켜보았다.
앞으로 나서지도 못하면서, 나는 뒤에서 그렇게 괴로워하며, 자책하며 그녀를 보내야만 했다.
우리는.......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그러나.......우리는 분명 알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 흐르던 그 수많은 감정들을........
그러나 한번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채, 천천히 시간 속으로 잠겨 갔다.
놓을 수 있을 줄........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었다.
결국 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영국으로 찾아가기도 했다.
아무 말도....할 수 없으면서, 그녀를 잡을 수도 없으면서,
그저 너무나 보고 싶어서 날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도 철저히 오빠와 여동생이었다.
나는 너무나 나쁜 오빠였다.
재하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기를......그 누구보다 바랐다.
그리고.......그 바람은.....기적처럼 이루어졌다.
그렇게 내게......다시 기회가 온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일찍.....이 기회를 잡았더라면,
준비가 되지 못했더라도, 아직 당당한 모습이 아니더라도,
조금은 철면피처럼 그녀에게 다가갔더라면,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우리는 서로의 첫사랑이다.
첫사랑이라서 아팠고, 첫사랑이라서 그리웠고, 첫사랑이라서 아스라했다.
첫사랑이라서 주저했고, 첫사랑이라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두려웠고, 첫사랑이라서 자신이 없었고, 그러나 첫사랑이라서 또한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수많은 시간을 돌고 돌아, 이렇게 재신이를 앞에 두고 있다.
“.......재하가.....거짓말, 한 거니?”
재신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
“내가........안 넣었어.”
“............그랬구나.......난......그것도 모르고...........”
“그거........아직.......가지고 있어.”
“뭐?”
“그냥........추억 같은 거야. 오빠는......내......첫사랑이니까........”
상우는 가슴이 울컥거린다.
첫사랑........
그 말이 가슴을 뛰게 하고, 동시에 가슴을 무너지게 한다.
이미 지나버린........그런 것일까.......
“오빠, 나 오빠한테 할 말 있어.”
“...........해.”
“나......어떤 사람이......자꾸 신경 쓰여.
그 사람과 예전에 어땠는지, 하나도 기억도 못하는데.....자꾸 신경이 쓰여.
죽었다가 살아왔는데, 내가 하나도 기억을 못해.
그게 그 사람한테는 상처......일거야.”
“..............그게......재신이 니 잘못은 아니잖아.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고.......기억이 안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그래, 나도 알아. 그런데.......왠지.......그 사람에게도, 내게도 기회를 줘야 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
“너....지금.....무슨........”
“하아........이 말, 오빠한테는 꼭 해야 할 것 같았어.
나, 그 사람과 한 달......만나기로 했어.”
“뭐? 지금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한 달간만 만나보자고, 내가 제안했어.”
“왜? 도대체 뭐 때문에, 그런 건데?!!!!”
“그 사람.......내가 기억을 못해서......아파......
그게 내 눈에도 보여.
그 사람이 아픈 게, 그 사람이 상처받는 게 너무 많이 보여.
비록 기억을 못해도, 한 달간 그 사람과 같이 있어보고 싶어.
또 그렇게 같이 있으면서 내가 기억을 찾을 수도 있고.”
“그러면, 기억 찾겠다고, 지금 이러는 거야?”
“따지고 보면, 그 이유도 크지.
그 사람과 한 달을 지내다 보면, 기억이 날 수도 있으니까........”
“그럼, 한 달 후에는 어떻게 되는데?
그 때까지 기억이 안 나면 어쩔 건데?
그러면 끝나는 거 아니야?”
“그건...........”
“재신아, 진짜 사귀는 것도 아니잖아.
너, 지금 그 남자한테 미안해서 그러는 거잖아.
기억 못하니까, 그게 미안해서......그래서 그러는 거잖아.”
“.......................”
“왜 이렇게까지 널 희생하려는 건데?
그 남자한테 뭐가 그리 미안한 건데?”
“.........................”
“재신아..........”
상우의 목소리가 안타깝게 울리고 있었다.
“그런 거.......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넌 지금 아무 감정도 없으면서, 미안하다는 마음 때문에 이러는 거라고.
내가 널 모르니?
이재신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모르냐고?
넌, 의리 빼면 시체인 놈이야.
니가 적어도 예전에 좋아했다는 그것 때문에, 그 남자한테 의리를 지키려는 거잖아.
지금 이러는 건, 너에게도, 그 남자에게도 좋은 게 아니야.
그래서? 그 다음엔 어떻게 할 건데?
그 남자에 대한 기억도 없고, 감정도 없는데, 그래도 미안해서, 의리 지킨다고 계속 그 남자를 만날 거라고? 그런 거야? 그럴 거냐고?”
“아니야.”
“뭐?”
“감정 없는 거, 아니라고.”
“이재신!!!”
“나도, 모르겠어. 오빠. 나 정말 모르겠는데, 기억 안 나는 것도 맞는데......
나, 이 남자, 잡고 싶었어.
이러다 이 남자 떠나버릴까봐, 그게 무서워서 잡았어.
그래서 내가 한 달만 만나보자고 했어.
적어도 시간을 유예하고 싶었어. 내가 기억 못한다고, 그 사람, 지쳐서 도망가 버릴까봐, 그게 무서워서 내가 잡았어.”
“너, 너.........”
“아무 감정 없는 거 아니야. 나도 알아.
그러니까.....오빠, 미안해.
오빠 마음 알면서, 내가 그냥 가만히 있으면 예의가 아닌 것 같았어.
미안해.........”
“이재신, 그러면 하나만 묻자.
아직 기억도 없고, 그 남자에 대한 마음도 정확하지 않는데, 그 남자 잡겠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널 떠난다고 해도, 그 남자 잡겠다고?
한 달 후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미안해....”
“재신아, 너랑 나, 몇 년인지 아니?
도대체 몇 년 동안 우리가 이어온 지 알아?”
“미안해. 오빠한텐 정말 미안해.”
지금 여기 앉아서도, 그 남자가 걱정이 돼.
그 남자가 속상해 할까봐, 그 남자가 마음을 다쳤을까봐.....
미안해, 오빠.......
재신은 차마 이말까지는 하지 못했다.
그러나 상우에게는 재신의 마음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녀가 떠나고 있다는 것을, 그녀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미안해.....그 한 마디가 상우의 가슴을 잔인하게 찢어대고 있었다.
재신은.......확인해야만 했다.
자신의 지금 이 마음을......누군가가 자꾸 신경 쓰이는 이 마음을......
도대체 이 마음이 뭔지, 자신이 왜 이러는 건지, 알아야만 했다.
막상 그가 오기 전까지, 그가 가지 말라고 하기 전까지는.....몰랐었다.
자신의 오랜 첫사랑을 만나보면, 조금은 확실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지금 이 마음이 단순히 흔들리는 것인지.......
죽었다가 살아온 한 남자가 이토록 한결같이 깊은 마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고마워서 이러는 것인지.......
아니면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아쉬움인지.......
곁에 있으니까........외로워서 이런 것인지.......
확인해야만 했다.
그리고.....또한 상우 오빠에게 말해야만 했다.
그와 한 달간 계약처럼 만나기로 했다고는 해도, 만나는 건 만나는 거다.
상우 오빠에게 말하는 것이, 그에게도, 상우 오빠에게도 옳은 일인 듯했다.
그런데, 그랬는데,
한쪽 가슴 켠에 아스라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이 첫사랑을 앞에 두고서도 재신은 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이재신.......가지마!!!!
그 말이, 그 목소리가, 자신을 뒤에서 껴안던 그의 품이 자꾸만 떠올랐다.
재신의 귓가에 울리던 그의 깊은 한숨소리가 지금도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열여섯........
그 어린 나이에 시작되었던.......
5년 넘게 이어온 첫사랑 앞에서도 그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곁에 있는 것처럼.....그의 목소리가 울려댔다.
가지말라고.....자신을 잡던......그의 검은 눈빛이......
너무나 깊게 가라앉던 그의 눈빛이........
지금 이곳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궁까지 데려다 주는 동안, 상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재신이 도착한 걸 보고 저 멀리서 근위대원들이 휠체어를 가지고 뛰어오고 있었다.
그들을 보던 상우가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뱉었다.
“나는......기다린다. 재신아.”
“어?”
“난........늘 그 자리다. 재신아.
한 달.....그래.......그 한 달, 잘 만나고, 잘 정리하고 내게 와.
기억도 찾고.......
그렇게 그 남자와 정리하고 와.
난......처음처럼......그렇게 기다리고 있을게.”
“오빠..........”
“우리 꼬맹이 공주님........”
상우가 재신의 머리를 그 어린 날처럼 쓰담쓰담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 옛날........서로의 첫사랑이었던 그 때처럼........
9
그가 그곳에 앉아 있었다.
왠지 그곳에 있지 않을까......싶었다.
그곳.......
후원의 벤치에......그가 머리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가슴이 저릿해진다.
그의 고통이.......내게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내 가슴을 따끔따끔거리게 했던, 내 가슴에 마치 돌이 얹혀 있는 듯, 가슴을 답답하게 했던,
그 마음의 정체를 내 눈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은.....시경...씨........”
그가 서서히 얼굴을 들어 나를 바라본다.
검은 하늘처럼 검게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가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숨이.......멈추는 것 같다.
그의 시선 앞에서, 숨을 쉴 수가 없다.
그의 존재감이 내 온 몸을, 내 영혼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심장을 심하게 두드릴 만큼, 그의 존재는 나를 제압해 왔다.
“나, 왔어요.”
겨우 겨우 그 긴장감을 이겨내려, 온 힘을 다해 말을 뱉어내었다.
그 말이 마치 신호인 것처럼, 그가 성큼 성큼 내게 다가왔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가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대기 시작했다.
그 긴장감을 이기지 못해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목발을 쥐고 있는 손이 파르르 떨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눈이, 그토록 심연의 바닥으로 가라앉은 그의 검은 눈이, 검은 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말라고.......도망가지 말라고........아니 도망갈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내 앞에서 멈출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거침없이 다가와 내 팔을 그대로 잡아 당겼다.
어둠 속에서 목발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공기 중에 울려퍼졌다.
그러나 그 순간, 이미 나는 그의 가슴 속에 안겨 있었다.
그의 한숨소리가, 가슴 속에서 울려 퍼졌다.
“제게..... 오신 겁니까?”
“네?”
“몸도, 마음도, 모두 제게 와주신 겁니까?
흔들리지 않고, 마음까지 가지고 오셨습니까?”
마음까지.......
나는 그의 품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또다시 저 영혼 안에서부터 울려퍼지는 그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나, 얘기했어요. 은시경 씨랑 나, 한 달 동안 만나기로 했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응.......얘기했어요.
그리고.......아까......그렇게 가서......미안해요.”
그 순간, 그의 입술이 밀려왔다.
부드러운 입술이 그대로 내 입술 안까지 깊이 들어와 내 혀까지 감싸 안았다.
그의 입술은 언제나 자극적이었다.
그의 입술 안에 있을 때면, 나는 내가 아니게 된다.
자꾸만 그에게 매달리게 된다.
그의 목을 감싸고, 그의 입술을, 자꾸 깊이 들어오는 그의 혀를 벅차하며 받아들이고만 있을 뿐이다.
목에서 자꾸만 가르릉 소리가 나는 것도 같다.
서로의 숨을 나눠 가지며, 숨 쉴 틈조차 아깝다는 듯이, 그의 혀는 내 안으로 자꾸만 깊이 들어와서 얽혔다.
그와의 키스........
부드럽고, 애잔하고, 서글픈.....가슴 저 바닥까지 자글자글해지는 키스....
눈물이 날 것만 같다.
그 때 알았다.
내 곁에 누가 있건 없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는 것을.......
상우 오빠에게 얘기하면서 생각했었다.
오빠에게는 차마 애기하지 못했던 사실......
이 남자가 돌아오기 전이었다면, 나는........오빠의 마음을 받아들였을 거라고.......
그러나.......이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연히 알게 되었다.
내 곁에 누가 있건 없건 간에, 나는........이 남자에게 한 달을 제안했을 것 같다.
정말 다행이다.
누군가를 배신하지 않아도 되어서......정말 다행이다.
내 곁에 아무도 없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의 입술 아래에서 나는.........세상의 모든 것을.........잊는다.
오로지, 검은 하늘....반짝이는 별 아래, 이 남자 하나만이 오롯이 남아 있다.
가져도 가져도 불안하다.
그녀의 입술에 낙인을 찍듯이 다가가도 불안하다.
입을 맞추면 맞출수록 가슴의 고통은 더욱더 커지기만 한다.
가지고 싶다. 온전히 내 여자로 만들고 싶다.
자꾸만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내 욕심들을 나조차 어쩌지 못한다.
이렇게 그녀의 입술을 가지는 이 순간이 다시는 오지 않을까봐, 입을 맞추면서도, 그녀의 입술을 빼앗으면서도,
나는 불안해지기만 한다.
사랑이......이토록........불안한 것인지......정말 몰랐다.
이렇게 한 사람만을 바라보게 되는 것인 줄은..... 정말 몰랐다.
나는......그녀 앞에서 불이 된다.
나는......내 평생.......내 황혼의 시간에도 그녀를 놓지 못할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 가장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
그 순간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이다.
내 품에 그녀를 안고, 그녀를 온 몸으로 느끼며, 그녀의 입술에 내 영혼으로 낙인을 찍는....
이 순간........
순간이 영원처럼........
한 여자만을 가슴에 품고, ,평생을 살다 간 투르게네프처럼......나또한 그럴 것이다.
어느 먼 미래의 고백을..........지금 이곳에서 할 뿐이다.
사랑한다.......사랑한다.........사랑한다........
아무리 외쳐도, 내 영혼을 다 표현할 수 없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 말 외에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사랑합니다......공주님.......”
당신은 영원한 나의 현재이자, 나의 미래다.
그녀 앞에 서면 나는 뜨거운 불에 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를 불태우며 녹여버리는 그 불이 도대체 어떤 불인지는 알 필요가 없었다.
나로서는 불타며 녹아버리는 것 자체가 말할 수 없이 달콤한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소망했던 것들 중에서 과연 무엇이 실현되었는가.
벌써 내 인생에 황혼의 그림자가 밀려오기 시작하는 지금,
한바탕 휘몰아치고 지나간 봄날 아침의 뇌우에 대한 추억보다 더 신선하고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 이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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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번 회, 참 오랫동안 써 온 듯합니다.
25회는 사실, 처음부터 조금씩 구상해오면서, 앞 회들을 쓰면서도 꾸준히 써왔던 내용입니다.
재신의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
몇 번을 엎고 다시 쓰고 새로 구상하고 그러느라 품이 굉장히 많이 들었습니다.
분량도 어마어마하네요.
분량으로 치면, 상위에 랭크될 듯합니다.
누구나 첫사랑은 가슴에 품고 있을 듯합니다.
첫사랑은 첫사랑이기 때문에 서툴렀고,
또 첫사랑이기 때문에 아름다웠고,
첫사랑이기 때문에 애잔하고 그리운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재신에게도, 상우에게도, 첫사랑은 그럴 듯합니다.
그리고.....그 첫사랑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는, 그리고 그 첫사랑이 영원한 미래가 될 은시경에게도....그렇겠지요.
2
이번 회, 도대체 은신 이야기가 맞나 싶으실 수도 있을 듯합니다.
그래도 꼭 이 이야기를 쓰고 싶었답니다.
1, 9는 서로 닿아 있는 이야기입니다.
1은 시경의 시선에서, 9는 재신의 시선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9의 마지막 부분은 다시 시경의 목소리입니다.
그 사이의 이야기들 중, 4~7이 재신의 시선으로 보는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4는 19살, 고3,
5와 6은 17살, 고1,
7은 다시 19살에서 20살까지의 이야기입니다.
8은 상우의 시선으로 보는 과거입니다.
당기못의 한 회의 구성을 보시면, 아마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다들 아실 듯합니다.
처음과 끝이 보통 서로 수미상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런 구조가 두 번 들어왔습니다.
시경과 재신이 처음과 끝,
그리고 그 안에 19살 때의 처음과 끝....
뭐 그런 식으로 수미상관적으로 접근해보았습니다.
시간적으로 정리를 해보면,
재신은 중1 여름에 영국으로 가서 지냈습니다.
유학 가고 싶다고 너무나 떼를 써서 결국 재신의 아버지가 지고 말았다지요.
그렇게 영국에 가 있는 동안,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15살, 중학교 2학년이 된, 3월이었습니다.
재강이 왕위를 이어받으면서, 재신은 결국 들어와 있게 됩니다.
나가고 싶었지만, 아버지 임종을 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들어오게 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왕립중학교 2학년으로 다시 수업을 받게 됩니다.
그 때, 재하와 상우는 같은 부설학교인 왕립고등학교 3학년, 19살이었습니다.
상우는 유학을 준비했고, 20살이 되던 해, 재신이 16살, 중3일 때, 미국의 대학에 합격을 했습니다.
그러나 상우는 바로 떠나지 않고, 21살이 되던 봄, 그리고 재신이 17살 고등학교 1학년일 때, 미국으로 떠나게 됩니다.
그 후, 재신이 19살, 고등학교 3학년, 5월, 23살이 된 상우가 공익근무를 위해 돌아오게 됩니다.
재신 역시 영국으로 유학을 준비하게 되고,
20살 여름, 영국으로 떠납니다.
상우는 공익근무를 하며, 24살 그 이듬해 2월까지 한국에 머물다가 군복무를 마친 후, 미국으로 가게 됩니다.
혹시나 혼란스러우실까봐 다시 한 번 정리해 두었습니다.
3
왜 이렇게 은신의 이야기가 없나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둘의 첫사랑의 이야기가 꼭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첫사랑은 늘.....진짜 사랑을 위한 준비과정이 되기 때문이지요.
실수가 산경험이 되듯, 사랑도 실수하고, 실패해본 경험으로 진짜 내 사람을 잡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듯합니다.
만약 첫사랑과 결혼까지 하셔서 행복하게 살고 계시다면, 정말 성숙한 분이신 듯합니다.
실패의 경험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이미 그 사람을 잡을 눈도, 힘도, 용기도 있으셨던 거니까요.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사랑을 통해서 사랑을 배우고, 아픔을 배우고, 또 내 사람을 잡는 용기도 배우게 되는 듯합니다.
또한.....상처도 그만큼 커져서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려워지기도 할 수도 있고요.
이번 회는...참 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참을까 합니다.
나중에.....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보기 프로젝트로 다는 댓글에, 써둘까 합니다.
혹시 제 얘기가 읽으실 때 간섭이 될까봐, 나중에......달아볼까 합니다.
4
길다고 말씀드렸었는데, 이번 회는 사족까지 54장쨉니다.
징하게 쓴 듯합니다.
사실 더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지만, 결국 줄였습니다.
2회로 나누어 써볼까 고민도 했지만, 그것 역시 참았습니다.
재신과 상우의 이야기는 한 회 안에 끝내는 게 맞지 않나 싶었습니다.
쓰면서 느꼈습니다.
당기못의 재신은, 참.....사랑받은 사람이구나....하는.....
좋은 사람들과 아껴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참...행복했구나 싶었습니다.
열다섯부터 스무 살까지......그 질풍노도의 시기에 상우가 곁을 지켰고,
그 이후 친구처럼, 오빠처럼 꾸준히 관계를 이어왔다지요.
또 영국에서 공부를 할 때도, 혜원이라는 진정한 지인을 만나 인생을 나누기도 했고,
한국에서 틈틈이 밴드 활동을 하며, 자신을 진심으로 사람 자체로 대해주는 멤버들을 만나,
사람 사는 법을 배우기도 한 듯합니다.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에,
그리고 가장 아팠던 순간에, 은시경이 있었지요.
현재.....다시 일어서려는 순간에도, 그 곁을 은시경이 지키고 있네요.
희한하게도, 당기못을 쓰면 쓸수록, 재신이가 행복했구나, 그리고 행복하구나.....싶습니다.
저는 25회를 쓰면서, 이상하게 마음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늘.....힘든 일이 생기는 와중에도, 지켜주는, 또 위로하는 존재가....한 사람은 있다고.....
재신의 인생을 빌어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재신이 많이 더뎌서 답답하실 수도 있을 듯합니다.
제가......워낙 느린 편이라.....
전 사실, 바로 마음을 확인하고, 너 좋다~ 이렇게 바로 아는 게 불가능합니다.
제가 원래 그러니, 글도 그렇게 쓸 수가 없네요.
당기못은 느립니다.
마음을 아는 것도,
글이 전개되는 것도,
글을 올리는 것도,
모두 모두 느립니다.
느림의 미학을......즐겨주시길......
간절히 바라봅니다.
5
배경음악은.....나름 테마를 가지고 있습니다.
<걷고 싶다>는.......은신 두 사람의 테마곡이고,
<출국>은 상우의 테마곡,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는 상우를 만났을 때의 재신의 테마곡,
그리고 마지막 <Say I love you>는 시경의 테마곡입니다.
시경의 마음을....이보다 더 절실하게 표현한 곡이 있을까....싶습니다.
늘 부족한 글.....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_)
6
하나 더,
이번 회의 주제는 <첫사랑>입니다.
모두의 첫사랑.....서로가 서로의 첫사랑입니다.
투르게네프는 실제로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하며 평생 혼자 살았다고 하더군요.
이 <첫사랑>도 사실은 자신의 이야기에 가깝다고........
조금 내용은 다르지만, 그 열정과 불타는 마음만큼은.......
오늘 이 당기못 25회에 어울리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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