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신상플) 야누스의 달(Januarius) 13 -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You Are My Lady - 정엽
넌 어디에 있니
어느새 낙엽은 바래졌는데
네가 떠나던 그 날
몸서리치게도 두렵던 그 밤
온통 내 맘에
모질게 남아 미련해진 내맘에
자꾸만 네가 내게로 돌아올 것 같아
바보처럼 기다리기만 해
you are my lady, you are my lady
보고 싶어 그리워하는 말
you are my lady, you are my lady
네가 있던 그 자리로 돌아와
네가 좋아하던 말
나와 웃던 네가 울었던 그 날
내겐 하나 둘 모두
또렷하게 기억이나 모든 게
하지만 지금
내 손엔 네손이 아닌데 이렇게
그게 참 가슴이 아파 네가 없는 게
내 품에 네 맘이 없는 게
you are my lady, you are my lady
보고 싶어 그리워 하는 말
you are my lady, you are my lady
보고 싶어 미치도록 이렇게 널
this is my lady you are my lady
가사 출처 : Daum뮤직
36
휘몰아치는 그를 받아내느라 지쳐버린, 그리고 긴장이 풀려버린 재신은 그의 품 안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잠결에 느껴지는 자신의 이마에, 볼에, 입술에 입을 맞추는 그의 입술이 좋아서, 더 달콤하게 빠져들었다.
얼마를 잤는지.....
등과 어깨로 부드러운 입술이 느껴졌다.
간지러워서 몸을 빼려 해도, 뒤에서 허리를 바짝 안고 있어서 뺄 수도 없었다.
그의 혀가 목을 간질이며 입을 맞춰왔다.
하아......
신음이 터져나왔다.
그 소리를 듣던 시경이 그녀를 자신을 바라보게 돌려눕혔다.
그의 눈이 까맣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눈을 감는 그녀에게 시경의 입술은 다가와, 그녀의 이마에, 그녀의 눈썹에, 그녀의 코에, 그녀의 빨개진 뺨에,
그리고 너무나 촉촉하고 달콤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춰왔다.
소중한 사람을 대하듯, 그의 입술은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정신이 들고나서의 그는 늘....이렇듯 섬세했다.
“안....잤어요?”
“예.”
“안 피곤해요?”
입술 끝으로 그가 미소를 짓는 것도 같은데, 그는 이내 재신의 입술 위에 또다시 입을 맞추어버린다.
“안 잔 게 아니라, 못 잤습니다.”
“왜요?”
그녀가 묻고 있었다.
뭐라고 대답해 드려야 할까.......
눈앞에 있는 당신 때문이라고 하면, 뭐라고 하실까.....
시경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녀의 입술만을 빼앗고 있었다.
입을 맞추어도 다 채워지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은 그랬다.
달콤하고, 달콤해서.......가슴을 저릿하게 했다.
입을 맞추면 맞출수록, 가슴이 저려왔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시경의 품으로 안겨 들어왔다.
부드러운 서로의 살결을 느끼며 그렇게 서로를 품었다.
다시금 잠에 설핏 빠져든 재신을 시경이 깨웠다.
“으응......”
일어나기 싫다는 듯, 소리를 내는 재신을 시경이 침대에서 일으켜 앉히고는 품에 가만히 안았다.
그는 이미 자켓까지 걸친 채, 옷을 다 입고 있었다.
“일어나셔야 합니다.”
시경은 어린 아이를 달래듯이, 자신의 가슴에 기대어 앉은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착륙 시간, 얼마나 남았대요?”
“이제 30-40분 정도 남은 것 같습니다.
옷....입으셔야죠.”
그래 그러면 곧 누군가 들어올 수도 있다.
근위중대장은 옷을 다 입고 있는데, 나 혼자 나체로 누워 있는 것도 참....그림이 희한하겠다 싶었다.
재신은 천천히 아까 궁중실장이 놓고 간 속옷과 원피스를 걸쳤다.
뒤로 자크가 있는 원피스라 재신이 스스로 올리려 하자, 시경의 손이 그녀를 말린다.
그의 손이 자크를 올려주는가 싶더니 어느 새 등 위로 그의 입술이 느껴졌다.
그 입술이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은...시경...씨.....”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등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의 손이 스칠 때마다 다리가 저릿해지고, 자글거렸다.
(삭제)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이었다.
아니,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을 너무나 쭈뼛하게 세우는 그런 감각이었다.
(삭제)
자꾸만 허리가 휘어졌다.
이 남자는 너무나 야했다.
내 속에 여자를 오롯이 깨워내고 있었다.
살면서 한 번도 알지 못했던 여성을, 나는 이 남자 때문에 만나고 있었다.
하아....하아......
야한 그녀의 신음을 시경의 입술이 먹어버리며, 짙고 깊게 키스를 하던 그는, 천천히 그녀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재신은 그의 입술이, 그의 손길이 떠나자 아쉬움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듯, 시경이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이제....진짜로 옷 입으셔야 합니다.”
“하~. 지금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기가 찬다는 듯 재신이 이야기 하자 시경의 얼굴이 빨개졌다.
허, 이 남자 보게.
또 얼굴 빨개지네.
“죄송...합니다. 그런데..........”
“그런데.......뭐요?”
“그게......공주님께서....너무....야하셔서.....도저히 참을 수가......”
“뭐야, 또 내 탓이야?
너무 한 거 아니에요? 달려든 건, 은시경 씨라구요.”
투덜투덜대는 재신의 원피스를 입혀주며, 그리고 등 뒤의 자크를 채워 준 시경이, 그녀를 뒤에서 안았다.
“뭐....예요?”
“공주님 탓, 맞습니다.
너무 아름다우셔서.......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의 고백 같은 말에 재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그는 그녀를 뒤에서 껴안고 있었다.
등 뒤로 그의 심장이 힘차게 뛰어대는 게 느껴졌다.
37
전용기에서 내리면서부터 그는 달라져 있었다.
아까 내실에서 그렇게 자신에게 달려들던 그 남자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는 충실한 근위중대장이었다.
예전 스물두 살의 봄, 다시 만났던 그 날, 그가 내 호위를 맡게 된 걸 알았던 그 날 같은 뭔가 알 수 없는 실망감이 밀려왔다.
미국으로 떠난 후,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던, 심지어 떠난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던 그 남자에 대해서,
어린 마음에 엄청나게 상처받았는지도 모른다.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이후, 잠깐 들어왔던 어느 날, 그가 있었다.
내 호위를 맡는다는.......
웃기지 않은가.
그 때는 다른 남자와 썸싱이 있을 때였는데도 여전히 어린 날의 치기가 남아 있었다.
“와, 오랜만이에요. 시경 오빠.”
“공주님.......그렇게 부르시면...안 됩니다.”
“아, 그렇지. 이젠 근위대원으로 들어온 거니까...오빠라고 부르긴 그렇죠?
알겠어요. 그럼...다른 근위대원들처럼, 은시경 씨라고 부를게요.”
뭔가 놀란 듯한 그를 남겨 두고, 그 때 내 곁에 있던 다른 남자의 팔을 잡았다.
마치 그에게 보란 듯이, 그 어린 날의 치기는 그토록 날이 선 듯 생경했다.
“잘 부탁해요. 앞으로.......”
최대한 밝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듯, 그를 대했다.
영혼이 없는 미소를 얼굴 가득 지어주며, 다른 남자의 팔을 잡고 그의 눈앞에서 돌아섰다.
내게 다가오는 남자들에게 한없이 웃어주며, 그의 눈앞에서 더 애교를 보여줬는지도 모른다.
그 이후, 단 한 번도, 그의 눈을 바라보지 않았다.
어차피 바라볼 기회도 별로 없었다.
1년에 한두 번 들어온 정도였으니......
사실 얼마 되지도 않았다.
들어와서도 며칠 묵지 않았다.
그러니 그만큼 마주칠 일도 없었다.
궁 밖에서 나를 지키는 검은 정장을 한 숱한 근위대원 중 하나였을 뿐이다.
아니 철저히 그렇게 대했다.
치기라고 하기에는 나는 그토록 옹졸했다.
38
엄마는.......앓아누워 계시다가 결국 나를 보러 정문까지 나오셔서는 실신하시고 말았다.
우리는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너무나 많은 일을.......
그리고 또 더 많은 일을 겪어야 할 것이다.
작은 오빠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다가와서 나를 안아주었다.
그 품이 자꾸 울컥하게 했다.
이러다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아서 오빠 품에서 나오려는데, 오빠의 말이 가슴을 쿵하고 쳐버렸다.
“우리는........살아 있기만 하면 돼.”
“작은 오빠.......”
“그걸로 충분해.
우리의 역할은.......살아 있는 거야.
그러니까......재신아, 넌.......니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역할을 해낸 거야.”
그 말에 눈물이 툭...하고 떨어졌다.
그래, 살아 있으니 되었다.
나머지는......중요하지 않다.
명예도, 수치도....그 무엇도, 살아서 일으켜 세우고 지워나가면 될 것이다.
사실은 명예도, 그 수치를 견뎌내며 그 위에 세워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궁에 도착하자마자 재신은 주치의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종합 검진을 받기 위해서였다.
고민하던 재신이, 검사를 거절했다.
특히 산부인과에 대한 모든 검사를 거부했다.
“공주님....그래도 검사를.......”
“됐어요. 아무 일.....없었으니까......그쪽은 빼고 다른 신체 부위에 대해서만 하죠.”
주치의가 설득해 봐도, 그녀는 거부했다.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듯, 다른 검사를 진행했다.
일련의 과정이 끝나고 나서, 옷을 갈아입으며, 재신은 궁중실장만 남기고 모두 물렸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은......비밀을 꼭 지키셔야 합니다.”
“예. 공주님.”
“극비로....그 누구도 알지 못하게.......사후 피임약을 구해주세요.
오늘 내로........”
“공...공주님!!!!!! 설....설마.....그 놈들이......그런......일이.....!!!!!”
모두를 물리고 옷을 갈아입으실 때, 실장은 뭔가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공주님의 피부는 유독 하얗고, 그만큼 연약했다.
작은 자극에도 붉어지시곤 하셨는데, 그녀의 벗은 몸에 붉은 자욱들이 곳곳에 드러나 있었다.
그렇다고 멍이 든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건...마치.......
그까지 생각하다가, 이건 정말 불경스럽다며, 실장은 스스로의 생각을 지웠다.
그랬는데, 공주님이 사후 피임약을 구해달라고 하시니, 이건 분명한 것이었다.
그 미친 놈들이 감히...공주님을......!!
패닉에 빠질 듯한 궁중실장을 재신이 단호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거, 아니에요.”
“공주님! 지금...분명...약을 구해달라고......”
“그래요. 그건.......하아......
그곳에서 성관계는 있었어요. 그러나 실장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건 아니에요.”
“공주님, 납치당하신 상황에서....이건 분명히....이런 불경한 일은........”
“그놈들에게......당한 거.....아니에요.
내...의지였어요. 그러니까 더 이상은 말하지 말아요.
그리고 오늘 내로 빨리, 아무도 모르게 구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공주님.......”
어려서부터 모셔왔던 공주님이었다.
그 순결한 공주님을......이렇게까지 내몰아야 하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고, 속에 썩어들어가는 듯 고통스러웠다.
대비마마께서 아시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실지......
전하는........
궁중실장은 흐르는 통곡 같은 눈물을 닦으며 자신을 진정시켰다.
자신만 굳게 입을 다물면 된다고.......
저 여리디 여린 공주님도 견디고 계신다고.......
그렇게 다짐했다.
궁중실장 앞에 단아하게 앉아 있는 공주님은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순결한 분이셨다.
39
병원에서 나오는 길, 그가 차문을 열고 내가 타길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타자 그는 내게 고개를 숙이고는 앞 좌석에 앉았다.
그의 시선은 앞에 고정된 채, 움직임이 없었다.
그는 지금 그 때의 그로 돌아간 듯하다.
그럴지도.....
그는 여전히 제2중대장이라 한다.
대한민국에 도착한 순간, 그는 철저하게 근위대원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럴 것이다.
그는 군인이다. 아니 군인이었다.
지금은......모르겠다.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는 거냐고......
당신의 마음은, 누구를 지지하고 있는 거냐고......
그 또한 물어볼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물어보지 못하게 했다.
진실을 알게 될까봐, 나는 두려운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진실을 내게서 멀리 떨어뜨려 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와 나......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대한민국 안에서......
적어도 표면적인 위험이 제거된 상태에서.....
그와 나의 관계는 뭘까.....
그가 지금 내게 보이는 충성심이.......내 마음을 무너지게 한다.
40
재신과 시경이 궁에 도착하자, 시경은 바로 재하에게 불려갔다.
집무실에서 재하는 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시경이 들어서자, 재하가 천천히 몸을 돌려 시경을 뚫어질 듯 바라본다.
그 시선에 시경은 긴장한 채 서 있었다.
“너......은시경 맞냐?”
“예. 이곳에서는 은시경입니다.”
“그렇지....그렇겠지.....그곳에서는.....야누스...였나?”
“지금 이곳에서도 여전히 야누스입니다. 전하.........”
“훗.....그래, 야누스지......
난....널......어떻게 생각하는 게 맞을까.......”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시경의 말에 재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심장까지 들여다 볼 듯,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어쩌면, 넌....너 스스로가 흔들려버렸을 수도 있어.
넌 지금...엄청나게 많은 니가 만들어낸 정체성들 때문에 니 정신 자체가 데미지를 입었을 수도 있어.”
“아마.....그럴 겁니다.”
“재신이....설마 했다. 정말....설마...했어.”
“저는, 분명 경고 드렸습니다.”
시경의 태도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래도.......”
과거.....그 때.......예상은 했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현실로 닥치는 것은 전혀 달랐다.
그것을 재하도 시경도 느끼고 있었다.
인간이 계획한 대로 그대로 될 수는 없었다.
그것이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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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보내신다면, 전 철저히 그곳 사람이 될 겁니다.”
“그래.”
재하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그리고.....지금보다 더한 상황을 제 스스로 그들에게 제안하게 될 겁니다.
제가 아는 모든 왕실의 정보를 제공할 것이고,
필요하다면 그들이 이번에 실패했던.......공주님을 납치하는 일도, 제가 추진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하아......”
재하의 한숨이 깊었다.
그러나 재하의 앞에 서 있는 그의 신하의 눈빛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니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디까지야.....?”
“목숨......정도입니다.”
“뭐?”
“나머지는.......전혀....지켜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 놈이라면, 정말 그럴 것 같았다.
철저히 그쪽 사람이 되겠지.......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만약 이 놈이 마음을 바꿀 수도 있다.
다른 놈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래도...이 놈이라면......
재하는 고민을 끝냈다.
“은시경...한 가지만 부탁하자.
대한민국도 중요하고, 왕실도 중요해. 그리고 남북한 문제도 중요하다.
그러나....가장 중요한 건, 너 자신이다.”
“무슨...말씀이십니까....”
“니 목숨은....지켜라...”
“!!!!!!!!!!!!!!!!!!!”
그때까지 전혀 변함없이 서 있던, 은시경의 눈빛이 처음으로 심하게 흔들렸다.
“함부로 던지지 마.
대한민국도, 왕실도, 니 목숨 이후야.
일단...살고 봐야 돼.
니 목숨은 걸지 마라.
니가 위험하다면, 대한민국도, 왕실도 버려도 된다.”
“전...전.....”
“살아야!!!
그 다음 일을 도모할 수 있으니까......
돌이키는 것도, 바꾸는 것도, 살아야 할 수 있어.
그러니까...니가 우선이다.”
“전하!!!!”
“그러니까...엄청난 부채 의식을 가지고도, 살아 반드시!
그래서 내 사람으로.....돌아와.....”
42
그랬다, 설마 했다.
그런데 정말......은시경은.....철저하게 야누스가 되어 갔다.
공주의 납치도, 은시경 스스로 한 일이다.
다른 루트로 들은 바로는 은시경이 제안해서 추진된 일이라고까지 했다.
물론 먼저 경고한 것도 은시경이었다.
그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듯했다.
어디까지가...맞는 걸까....
그래도...재하는......은시경을 믿고 싶었다....아니...믿는다.
그 날, 그를 보내면서, 살아서 돌아오라고, 왕실을 버려야 한다면 버리라고 한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재하였다.
“난...은시경, 널 믿어.”
“전하.....”
“니가 어떤 말을 해도, 니가 어떤 행동을 해도, 난...너 믿어.
그러니까.....알아서 해.
난 믿을 거니까......배신을 하든 말든 니 알아서 하라고.
그리고 말이야. 니가 진짜로 나를 배신해도...난.....죽을 때까지 널 믿을 거야.”
“................”
“니가 날....죽인다고 해도....난...널 믿을 거야. 은시경.......”
“왜...그렇게까지 저를 믿으시는 겁니까.....”
묵묵히 듣고 있던 시경이 낮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야.....내가......숨을 쉴 수 있거든......
그래도 은시경이라는 그 강직한 놈이....내 사람이라고 믿고 있어야, 내가.....살 수가 있어......”
시경의 눈빛이 흔들리는 듯 재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넌...목표가 분명한 놈이야. 그 목표를 위해선, 넌 엄청나게 얼굴을 갈아끼우겠지.
그래도 그 목표가 널 미치지 않게 해주겠지......”
시경은 아무 말이 없었다.
재하도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아까의 말들이 그들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는 이 시간을 기다렸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서로의 말을 가슴에 담았다.
“전하......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래.”
“그 전에 하나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재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경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딱딱한 어투로 내용을 전달했다.
“이곳에 있는 동안, 김항아님께 제가 접근 할 겁니다."
“뭐?”
“잊으셨습니까? 제가 그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이유 하나가, 김항아님이었다는 걸.....
그러니......전하도....견디셔야 합니다.”
시경은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아니, 어떤 감정도 없는 것처럼, 재하에게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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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위대장이 향후 일정 호위 문제로 재신의 방을 방문했다.
병원에서 오자마자, 재신은 이미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음 스케줄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이 왕족으로서의 삶이었다.
다독일 시간도, 치유할 시간도, 그들에게는 사치였다.
“공주님, 예전대로 그대로 진행하겠습니다.”
“네. 알겠어요. 근위대장님.
그러면, 제 호위는 누가 맡게 되는 거죠?”
“그대로입니다.
제2부중대장인 김동욱 중위가 계속해서 제2중대장 대리를 맡게 됩니다.”
“제2중대장이 돌아왔잖아요. 그런데 왜.....?”
“아, 못 들으셨습니까?
제2중대장 은시경 대위는 김항아님을 모시는 걸로 직책이 변경되었습니다.”
“네? 왜요? 제2중대장은 내 호위잖아요.”
“그게 은시경 대위가 요청하고, 전하께서 승인하셨습니다.”
“은시경 대위가, 직접, 요청했다구요? 항아 언니를 호위하겠다고?”
“예. 그렇습니다.”
“아...알겠어요. 고맙습니다. 근위대장님.”
“그럼, 쉬십시오. 공주님.”
재신은 혼란스러웠다.
지금....이게 무슨 소린지......
그가 직접 항아 언니를 호위하겠다고 했다니.....
당연히 나를 호위할 줄 알았다.
심지어 오빠가 다른 사람을 호위하게 하겠다고 해도, 내가 빼올 판이었는데,
그가 스스로 요청했다니.......
뭔가 불안한, 뭔가 미심쩍은.....무언가가 가슴 저 안에서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예전.....오빠에게서 들었던 말이 순간 머리로 지나갔다.
“그 자식, 완전 여자 킬러야.
저게 항아도 꼬셨다니까?
뭐야? 너도 꼬시디?”
항아 언니를 꼬셨다던 오빠의 말을...그때는 무슨 소린가 하며 넘겼었다.
내가 믿으려 하지 않자 오빠는 말했었다.
WOC 훈련 때, 노래까지 불러주며 꼬셨다고.......
그랬나.....그랬던 건가.........
“전, 사랑하는.....사람을......볼 수 없다는 게......
가장......겁이 납니다. 공주님......”
“견딜 수.......없을까봐......
견디지 못할까봐......
그게 가장......겁이 납니다.”
그의 말이 재신의 심장을 자꾸만 찔러대며,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44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한 재신은 급히 방으로 돌아왔다.
그저 머리가 복잡했다.
단순하게 살아야 하는데, 자꾸만 머릿속에서는 뭔가가 자꾸 꼬이고만 있었다.
그 때 전화가 왔다.
국제 전화.....
어!!!!!
순간 알 수 없는 예감에 재신의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휴대폰을 잡는 손이 달달 떨려 왔다.
86130............
86.....이면, 중국이다.
130은 중국 내 휴대폰 번호......
숨이 헉 하고 막혀 왔다.
두려웠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패닉이 온 듯,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데 휴대폰은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받아야 한다.
나는....대한민국....공주다.
그러니까.....당당하게 받아야 한다.
감히 내가 납치 따위로.......흔들리지 않는다는 걸,
이 따위로는 대한민국 왕실을 흔들 수 없다는 걸, 보여주어야 한다.
“.....여보세요.”
“와우~~~~ 우리 공주님이 직접 받으시네.....”
순간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누...누구죠? 당신.......혹시.......”
“그새 잊으셨으면 섭하지. 우리 이미 통성명한 사인데...응?”
수장이었다.
목소리만으로도 온 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그는....두려웠다.
사람이라도 죽일 수 있을 만큼,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뭐야? 왜 전화한 거야? 무슨 볼일이 또 남았어?”
“어....왜 이러시나? 우리 좋게 헤어졌잖아. 이러면 곤란하지.”
“당신과 더 이상 할 말 없으니까, 전화하지 마.”
“어이어이 공주님.....지금 끊으시면 안 되지.
나도 바빠서 말이야. 이 말만 하고 금방 끊을 거야.”
“뭐?”
그의 목소리가 소곤거리듯 나직해졌다.
그게 더 섬찍하도록 무서웠다.
그는 정말 악마 같았다.
“공주님.......메일로....내가 선물 하나 보냈으니....꼭 열어봐.”
소곤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온 몸을 타고 다니는 듯, 온 몸이 덜덜 떨렸다.
재신의 손에서 휴대폰이 떨어졌다.
쿵 하며 떨어져 내린 그 소리가 그녀의 세계 전체를 흔들리게 하고 있었다.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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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9장입니다.
야누스 평소보다 좀 길게 나왔네요.
다들 답답해 하셔서 전체 상황을 알 수 있는 꽤 많은 내용이 이번 회에 나왔습니다.
역시 2부이기 때문에, 두 사람을 둘러싼 주변 상황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지요.
1부는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집중했다면,
2부는 두 사람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 나올 듯합니다.
이 글 읽기 어렵다는 분들이 여전히 많으신데.....
계속 읽어주시는 님들은 진정 용자십니다.
부족한 글....읽어주시고 애정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도 평안하소서 (__)
+) 오늘은 사실 전체 버전과 친구 버전을 나눌 이유가 없었을 수도 있는데,
앞부분 약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누었네요. 그대로 올릴 수도 없고.....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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