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킹투하츠와 은신상플/(은신)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은신상플)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29 - ‘사랑’이 ‘사랑하다’가 될 때

그랑블루08 2013. 11. 1. 05:57

 

(은신상플)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29. ‘사랑’이 ‘사랑하다’가 될 때

 

 

 

 

 

 

<silver님께서 주신 당기못 대문짤~~ 감솨감솨합니다.^^>

 

 

<디씨 그러하다 횽이 주신 당기못 대문짤~~저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__)>

 

 

* 저 위에 있는 배경음악을 틀어주세요.

 

설렘주의보 투어리스트 | 2013년 3월 여행

 

놀이공원 긴 줄에도 즐거운,
나른한 봄햇살 아래
카라멜 팝콘같이 달콤한 네 목소리.
어쩌면 좋아. 괜찮은걸까.
가슴은 또 왜 이리 떨려.

마주앉은 페리휠을 채우는,
따뜻한 봄 바람결의
분홍 솜사탕같이 포근한 웃음소리.
어쩌다 너가 좋아진걸까.
멋대로 들뜬 날 달래가며.

* 나와 하늘 위를 나는 건 어때.
나와 구름 위를 걷는 건 어때.
오늘 하루 나와 있는 건 어때.
이런 나란 남자 너에겐 어때.

싱그러운 풀내음이 머무는,
눈이 부신 정원 가득
라벤더 꽃잎처럼 향기론 네 휘파람.
그냥 이대로 말해버릴까.
하루는 또 왜 이리 짧아.

네가 기댄 나의 어깨 너머로,
밤하늘의 불꽃놀이
보랏빛 호수처럼 찬란한 오늘 하루.
우리 이대로 떠나버릴까.
멋쩍은 웃음만 맴돌리며.

* 반복

+ 나의 맘이 조금 앞서면 어때.
오늘부터 너를 따라갈텐데.
서로 말도 없이 웃으면 어때.
오늘부터 매일 함께 할텐데.

 

 

 

 

 

1.

 

 

 

 

공항으로 이동하는 동안, 그리고 왕실 전용기에 오르는 동안,

재신과 시경의 사이에는 뭔가 어색한 기운이 흘렀다.

재신은 의식적으로 시경을 바라보지 않으려 했고, 말조차 건네려 하지 않았다.

사실 얼굴을 보기가 겁난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어쩌다 곁눈으로 아닌 척 슬쩍 쳐다보니, 시경은 언제나처럼 건조하고 딱딱한 은시경적인 자세로 근위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어휴.......

 

재신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자신과 단 둘이 있을 때의 그와, 이렇게 공식적인 자리에서 보는 그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감정 같은 건 없는 듯이 전형적인 군인 같은 그가 재신과 있을 때면 자신의 가슴 저 안까지 숨겨두었던 감정을 폭발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재신은 자꾸만 가슴 저 안이 간질간질거리며 무언가가 온 몸의 감각을 깨우며 흘러다녔다.

또다시 되살아나는 감각.....

그의 손이, 그의 입술이 주던 감각이 자신의 입술을, 자신의 몸을 훑던 그 강렬하던 감각이 되살아나서, 그녀의 가슴을 울렁이게 했다.

 

“공주님, 얼굴이 붉어지셨는데, 열 있는 거 아니세요?

해열제 드릴까요?”

 

재신의 작은 변화까지 살피고 있던 동욱에게 그만 걸리고 말았다.

재신은 붉어진 얼굴로 그저 더워서 그렇다고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동욱에게 보내던 미소 끝에 그와 눈이 마주치자, 재신은 황급히 얼굴을 돌렸다.

잠깐 스쳤을 뿐인데, 잠깐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자꾸만 심장이 뛰어대었다.

심장이 고장난 것만 같다.

 

 

하아.......

 

시경은 아까부터 재신이 신경 쓰여서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차에서부터 전용기에 타서까지 재신은 그를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에서 불리는 이름은, 오로지.....김동욱.....

솔직히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다가오길....

그녀의 입술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길....

예전처럼...그 날들처럼...그 그리운 날들처럼 그렇게 자신만을 찾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공주님은 그러지 않았다.

마치 동욱이 곁에 없으면 불안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공주님은 필요한 게 있으면 계속 동욱에게 말했고, 동욱은 공주님이 뭘 필요하시는지 말하지 않아도 아는 듯이 행동했다.

칸사이 공항에 내려 포럼이 열리는 호텔에 당도하기까지 시경의 가슴을 자꾸만 답답하게 했다.

 

공주님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동욱이 나왔다.

동욱은 시경을 보자 고개를 숙이고는 지나치려 했다.

 

“잠깐만 나 좀 보자.”

 

동욱을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간 시경은 단도직입적으로 이제부터 자신이 공주님을 호위하겠다는 말부터 던졌다.

어쨌든 자신은 근위대장이고, 동욱은 그 아래 소속이다.

명령에 당연히 복종하는 것이 군대의 룰.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그러나 동욱의 대답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싫습니다.”

 

“뭐?”

 

군대에서 절대로 해서도 안 되는, 아니 들을 수 없는 말이 동욱에게서 나왔다.

 

“공주님 호위는 접니다. 근위대장님께서는 근위대장님 일을 하셔야 하는 게 아닙니까?”

 

버럭하려는 찰나, 다시 나온 동욱의 말에 시경은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번 임무는 공주님을 보호하고 호위하는 것이 가장 주된 일이다.”

 

그러나 그 말에도 동욱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얼마 되셨습니까?”

 

“뭐?”

 

“공주님 곁에 계셨던 게, 합쳐서 얼마나 계셨던 겁니까?”

 

시경은 무어라고 답하기가 어려웠다.

얼마나 있었는지, 얼마나 그 곁을 지켰는지 애써 세어본 적은 없었다.

아니, 그 기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지금 그러나 동욱은 그것이 마치 중요하다는 듯이 묻고 있었다.

 

“기껏해야 4개월 좀 넘으셨습니까?”

 

그랬다. 5월 23일에 복귀했으니, 이제 겨우 4개월이 넘었을 뿐이다.

동욱은 그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아, 그렇군요. 2년 전도 있었군요. 그 때는 얼마 정도 되셨습니까?

제가 알기로, 근위대장님께서 들어오신 건, 2012년 3월 그렇다면 공식적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던 날이 5월 23일. 역시 길어야 3개월이십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전, 1년이 넘었습니다. 근위대장님도 그러십니까?”

 

시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동욱이 지금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점점 알 것 같았다.

 

“근위대장님은 4개월, 3개월, 합쳐서 7개월 정도 되셨습니다.

그러면 공주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알다.......

조금은 충격적인 말인지도 몰랐다.

나는 정말 공주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동욱의 질문이 정확하게 시경의 심장을 꿰뚫었다.

 

“공주님이 뭘 필요로 하시는지, 다리 아프실 때, 어떤 찜질을 해야 하는지,

공주님께서 저혈압이 있으셔서 사탕이나 초콜렛을 드셔야 하시는 건 알고 계셨습니까?

공주님이 걸으실 때, 어떤 모습을 싫어하시는지, 어떤 위치에 서 있기를 바라시는지.

공주님 친구분은 어떤 분이 계시는지, 어떤 걸 좋아하시는지, 아십니까?

조금씩 걷게 되신 후에, 공주님의 발이 얼마나 혹사를 당하셨는지,

그래서 목발을 짚고 걸으실 때도, 어떤 포즈일 때 발이 아프신 건지, 아십니까?

아무리 아파도 아닌 척하고 계신 건 알고 계십니까?”

 

충격, 그래 충격이었다.

사랑한다는 것 외에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없다.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미소와, 자신을 쫓던 눈, 그리고 우울해 하던 모습들....

어느 순간 괜찮은 척하셨지만, 여전히 감추고 있는 모습들.

그러나 정작 자신은....그녀를....모른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시간 앞에서 약해진다.

 

“그럼, 제가 모시는 걸로......하겠습니다. 충성!”

 

자괴감........이었다.

사랑한다는 감정만으로 사랑을 할 수는 없다.

사랑한다고 외친다고 사랑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생활이다.

사랑은 감정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의 지속은 책임으로 이루어진다.

책임은......앎에서, 시작된다.

가슴을......치는 말이다.

 

 

 

 

2

 

 

 

도착하시고 나서 오후에 바로 연회가 시작되었다.

정식 포럼은 내일 오전이지만, 오늘은 연회를 통해서 각 나라별로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고 서로를 탐색한다.

공주님이 연회장 나타나자, 바로 웅성대기 시작했다.

불과 얼마 전에 엄청난 이슈를 만들어내셨으니 그럴 만도 했다.

각국의 인사들과 더불어 한국 측 재벌 자제들도 보였다.

시경의 신경은 자꾸만 곤두서고 있었다.

휠체어를 밀고 들어가는 동욱 뒤로 따라 들어가면서 시경은 공주님 주변으로 몰려드는 인물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공주님, 저, 기억하시겠습니까?”

 

휠체어에 앉아 있는 공주님께 눈을 맞추며 한쪽 무릎을 굽혀 앉는 남자.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혹시....L그룹 막내 아드님...아니세요?”

 

“예. 맞습니다. L케미컬 상무이사 장승줍니다.

기억....하시네요?”

 

“아....네. 당연히 우리나라의 주요한 기업을 이끌어가시는 분인데, 기억해야죠.

아마 작년 가을에 경제인포럼에서 뵈었던 거 같은데........”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셨네요.

그때 뵈었을 때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지셨습니다.”

 

L케미컬? 막내 아들....?

시경의 미간이 심하게 좁혀졌다.

이 남자가 맞다.

전하께 전화해서 공주님과 자신의 아들을 선보자고 했던, 왕실 기부까지 들먹였던 그 그룹이었다.

이 남자가 바로, 공주님과 맞선 말이 있었던 그 막내 아들.

재벌 특유의 여유와 젠틀한 분위기가 있었다.

이상우 씨와는 또 다른 준수한 외모에 서글한 인상의 남자였다.

 

공주님은 그 남자를 향해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주고 계셨다.

공주님으로서는 당연한 일인데, 왕실에 많은 돈을 기부하는, 어쩌면 중요한 기업들 중 하나인데,

그래도 시경은 가슴이 탔다.

시경 자신도 공주님께 그리 중요한 인물이 아닐 수도 있는데,

마치 자신이 공주님의 무엇이라도 된 듯이, 심장에 열이 솟구쳤다.

동욱 역시 이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티는 내지 않고 있었다.

근위대원이라면 사적인 감정을 닫고, 공주님을 보필하는 것이 맞는데, 요즘 시경은 자기 스스로도 자신이 제어가 되지 않았다.

 

그때 재신이 시경을 불렀다.

 

“은시경 씨!”

 

“예. 공주님.”

 

“나 좀 잡아줄래요? 너무 오래 앉아있었나 봐요.

사실 다들 내가 서는 모습을 보시고 싶으실 텐데......”

 

시경이 재신의 곁으로 다가가자 재신이 시경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경이 그 손을 잡으려는 찰나, 장승주라는 그 남자가 재신의 손을 가로채어 잡았다.

 

“어!!!”

 

“제가 공주님을 모실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아.....저......”

 

재신은 곤란해하고 있었다.

L그룹은 왕실에 주요한 후원기업이었다.

그 관계를 생각한다면, 매몰차게 대해서도 안 되었다.

골치 아파하고 있는 찰나, 시경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울려퍼졌다.

 

“실례합니다만, 공주님께서 걸으신 지 얼마 되시지 않아서,

아.무.나 부축하실 수는 없습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부축하면 잘못해서 넘어지실 수도 있는데, 이런 공개적인 석상에서, 그것도 국제 포럼에서 그런 일이 있다면,

대한민국을 위해서도 과히 좋지 못한 일이 될 겁니다. 그럼......”

 

멍하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그 남자를 정확하게 마주 바라보며, 시경은 그 남자 손에 잡혀 있는 재신의 손을 잡아 왔다.

공주님도 뭔가 황당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시경은 개의치 않았다.

지금 자신의 눈빛은 분명 남자의 시선일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보통은 공주님이 자신의 팔을 잡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의 오른손이 재신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재신이 놀란 듯 흠칫 하는 게 느껴졌지만, 시경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왼손으로는 그녀의 팔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재신의 허리를 더욱더 강하게 안았다.

 

그의 강한 팔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 공주님이 누구의 여자인지.....마치 소유권을 주장하는 듯, 자신의 여자를 함부로 넘보지 말라는 듯,

시경의 행동은 은연 중에 많은 것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장승주는 자신을 향해서 수컷의 눈빛을 보여주고 있는 시경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3

 

 

 

 

내빈들에게 어느 정도 인사를 다 마친 재신은 휠체어에 다시 앉았다.

주위를 돌아보던 시경의 눈에 공주님이 궁중실장과 함께 자리를 이탈하는 것이 보였다.

화장실이라도 가시는 것인가 싶어서 그냥 있을까도 싶었지만 그래도 만전을 기하는 것이 경험상 맞았다.

시경은 황급히 공주님의 뒤를 따라갔다.

 

“뭐야?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화장실로 들어가려다 멀찍이 떨어져 서 있는 시경을 발견하고는, 재신은 황당하다는 듯, 시경을 타박했다.

 

“일본입니다. 위험하실 수 있습니다.”

 

단호한 시경의 대답에 재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 동안 시경은 인이어로 근위대원들에게 대열을 정리하고, 다음 업무에 대한 명령을 내렸다.

그 사이 재신은 나와서 다시 연회장 쪽으로 향했다.

시경은 떨어져 있다가 다시 공주님께로 발걸음을 옮기던 순간,

궁중실장님과 로비를 따라 걷던 공주님의 얼굴이 갑자기 사색이 되셨다.

궁중실장님이 앞으로 나서려 하자 공주님이 고개를 흔들고 계셨다.

뭔가가 있다.

공주님께 다가가는데 로비 끝에서 울리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朝鮮人がそうで。 (조센징이 그렇지)

イジェハがもともと卑怯なやつじゃない。(이재하가 원래 비겁한 놈이잖아.)

どこに自分が来ないし、足の不自由な賣女を送って。”(어디 지가 안 오고, 다리 병신을 보내.)

 

그 말에 시경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공주님께서 다 듣고 계신데......

 

움직이려는 그를 그제서야 발견한 듯, 재신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팔을 잡았다.

 

“놔둬요.”

 

“공주님.....”

 

재신이 시경을 말리고 있는 그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들의 대화는 이어지고 있었다.

 

“そう、なんか昔ならその娼婦でもそれなりのメリットがあったのだろう。(그래 뭐 옛날이라면 그 년도 나름 메리트가 있었겠지.)

体つきがよく出来た。(쭉쭉 빠졌던데...)

そうしたって...足の不自由なばかなのに...(그래봤자...병신인데...)

彼女が身を売るとしても、誰が好きよ。(그 여자 몸로비를 한다고 해도, 누가 좋아하겠어?)

体つきが良くても, 不具であるだけだ。(몸이 쭉쭉 빵빵이라도 병신이잖아.)

それではゲームオーバーだよ。(그럼 게임 오버야.)

まあ、一晩一緒に寝るぐらいはならない。”(뭐, 하룻밤 잘 정도는 되지.)

 

“そうです。”(맞습니다.)

 

"近衛隊のやつらと回りながら1泊ずつ寝ているんじゃないの。"(근위대 것들하고도 돌아가면서 하룻밤씩 자는 거 아니야?)

 

"そうなんでしょう。(그럴 겁니다.)

以前に遊ぶだけ遊んだと聞きましたが、男うわさ悪いことで有名ではないですか。"

(예전에 놀 만큼 놀았다고 하던데 남자 소문 안 좋기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くすくすそうだね。” (킥킥 그렇지....)

 

시경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재신이 말릴 새도 없이 시경은 이미 그들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시경의 입에서는 한국말이 나왔다.

 

“なんだ。”(뭐야?)

 

그의 말에 차관의 말에 장단을 맞추던 비서가 기분 나쁘다는 듯이 툭 던졌다.

 

“何というのだよ、いきなり韓国語でしゃべったらどうすればいいんだ。" (뭐라는 거야, 갑자기 한국어로 지껄이면 어쩌라는 거야.)

とにかく無知な軍人たちとは。”(하여튼 무식한 군인들이란.....)

 

짜증난다는 듯이 차관이 비서를 향해서 얼굴을 찌푸리자 비서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시경 뒤에 서 있던 공주를 발견하고 만 것이다.

 

두 남자는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재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미소를 지었다.

그들 특유의 가식적인 미소가 소름끼치도록 가증스러웠다.

그들이 대충 고개만 숙이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시경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何ですか。” (뭡니까?)

 

뭐 이런 무례한 놈이 다 있냐는 듯이 비서가 한 마디 던졌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냥 들어가시는 겁니까?”

 

시경은 여전히 한국말로 하고 있었고,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내 말을 못 알아듣습니까?”

 

“How rude! (정말 무례하군요.)

Speak either Japanese enough for us to understand, or through an interpreter. (알아듣게 말을 하든가, 통역가를 데리고 얘기를 하든가 하세요.)

You did very rude behaviors in the parliamentary vice-minister's face." (차관님 앞에서 너무 무례하시군요.)

 

비서가 영어로 시경에게 전달하자 시경의 얼굴에는 차가운 미소가 서렸다.

 

"Oh, fortunately you can speak English." (아, 다행히 영어는 할 줄 아는군요.)

 

“How dare you behave so rudely?” (어떻게 감히 이렇게 무례하게 행동하는 겁니까?)

 

“Sure, Then let me debate about "the rudeness" from now on."(뭐, 그렇다면 무례에 대해서 이제 말해보면 되겠군요. )

 

"How dare you say such a thing to my face?" (지금 감히 뭐라고 하는 겁니까?)

 

"I said, discuss the rudeness." (무례에 대해서 말해보자는 겁니다.)

 

"When did we act so rudely? (우리가 뭐가 무례했다는 겁니까?)

Do you have any evidence?" (증거 있습니까?)

 

"Of course.

Unfortunately, 無知な軍人たち who you said do understand your language, although you guys can't do Korean."

(당연하죠.

안타깝게도, 당신이 말한 그 무식한 군인은 적어도 당신 나라 말은 할 줄 알거든요.

두 분은 한국어를 모르시겠지만,)

 

"What!!!" (뭐?)

 

“秘書の仕事を遂行するには、少なくとも隣の国の言葉はわか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か。

(비서일을 수행하려면, 적어도 옆 나라 말쯤은 알아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国の防衛も忙しい無知な軍人もそのくらいはしが、机に座って何をしたんですか。”

(나라 지키기도 바쁜 무.식.한 군인도 그 정도는 하는데, 책상에 앉아서 뭘 한 겁니까?)

 

유창한 시경의 말에 두 남자의 얼굴이 심하게 붉어지지만, 그렇다고 딱히 변명을 할 수도 없었다.

 

“次官はとても実力がない秘書をお持ちですね。 (차관께서는 아주 실력이 없는 비서를 두셨군요.)

あなたたちは結局、競争力がないですね。(당신들은 결국 경쟁력이 없군요.)

言葉が競争力だが、少なくとも悪口するか否かくらいは知っ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んじゃないですか”

(말이 경쟁력인데, 적어도 욕하는지, 아닌지 정도는 알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의 말에 비서의 입에서 욕이 나왔다.

그러나 시경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감정이 없다는 듯, 냉정하게 촌철살인 같은 말들을 그것도 매우 유창하게 뱉어내고 있었다.

 

“謝罪してください。”(사과 하시죠.)

 

그의 말은 정중한 듯 했지만, 어조는 전혀 정중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경 앞의 두 남자는 멈칫 댈 뿐, 반응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시경이 저 너머를 흘낏 보더니 영어로 크게 말하기 시작했다.

 

“Apologize to the princess of Great Republic of Korea for insulting her highest dignity"

(대한민국 공주님의 최고의 존엄함에 대해 모독한 것을 공주님께 사과하십시오.)

 

그들 근처로 C.N.N 기자가 지나가다가 시경의 목소리를 듣고 방향을 틀어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방금 시경이 한 말은 그대로 그 기자의 귀에 들어갔다.

 

“What happened, sir? oh, princess!"(무슨 일입니까, 아, 공주님!)

 

기자가 나타나자 두 남자는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뭔가 점점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웅성대기 시작하자, 그들의 수장이 연회장 밖으로 나왔다.

요즘 온통 그의 말들로 들쑤시고 있는 장본인이었다.

시경과 재신을 보자, 정중한 척 그럴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옆에 있는 통역가에게 뭐라고 말하자 통역가가 바로 한국어로 전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우리 쪽 사람이 귀국에 무슨 무례한 행동을 했습니까?”

 

部下職員管理を間違えたんです。”(부하직원을 잘못 관리하셨습니다.)

 

“それが何のことです。”(그게 무슨 말입니까?)

 

시경이 일본어로 바로 말해오자, 상대도 바로 일본어로 물어왔다.

 

“部下の管理ができないのは結局、直属上官の問題じゃないですか。”(부하 관리가 안 되는 건 결국 직속상관의 문제가 아닙니까?)

 

시경은 단호하고 냉정했다.

주변에 한국인 기자들까지 모이자, 시경은 다시 한국말로 공식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들의 사람들이 공주님을 모독했습니다. 대한민국 왕실은 그것을 그냥 넘어가지 않겠습니다.

대한민국 공주님께서 지금 전 세계적으로 어떤 아이콘이신지 모두 다 너무나 잘 알 것입니다.

영국의 왕실조차 대한민국의 공주님께 존경을 표하셨습니다.”

 

시경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번역되어 각 기자들에게, 그리고 자신의 앞에 있는 국수주의자들에게 하나하나 전해지고 있었다.

 

“또한 당신은 우리의 존엄한 공주님만을 욕한 게 아닙니다.

육체적으로 약한 전세계의 모든 분들을 욕한 것입니다.

그런 말을 입에 담은 당신들은 정신적인 장애를 가진 것입니다.

당신들 같이 썩은 정신을 가졌을 바에야, 바른 정신에 몸이 약한 게 더 세상에 이로울 것입니다.

적어도 몸이 약할 지언정, 사람답게 사람을 위하는 위대한 일을 행하시니까 말입니다.”

 

시경의 말에 곁에 서 있던 서양의 기자들이 질문하기 시작했다.

 

“Would you explain in more detail how they said to the situation?"

(이 상황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장애를 딛고 지금도 노력하고 계시는 공주님께 이 두 분이 모욕을 하셨습니다.

몸이 장애가 아니라, 마음이 장애인 것이 더 문제라는 것을 이 분들이 명확하게 보여주셨습니다.”

 

“What!!! Did they insult the princess' disability?"

(예? 공주님의 장애를 이들이 모욕했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용기 없는 자들이 진정 용기 있는 자를 업신여긴 초유의 사태입니다.”

 

“Insulting the princess's disability is an important issue that cannot me ignored as a reporter's conscience.

(공주님의 장애에 대해 모독한 이 상황은 기자의 양심으로서 간과할 수 없습니다.)

I will write a cover story on this situation right away.”

(당장 커버스토리로 기사를 내겠습니다.)

 

모인 기자들의 반응은 모두 단호했다.

차관도 비서도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둘은 그들 앞에서 90도로 허리를 꺾어 사과했다.

그러나 시경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이렇게 단순하게 넘어갈 문제는 아닌 듯합니다.

대한민국 왕실에서 공식적으로 요청하겠습니다.”

 

 

황망해 하고 있는 그들을 놔두고 시경은 재신의 휠체어를 뒤에서 밀어주며 그 자리를 떠났다.

특히 C.N.N 기자는 자신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부르라며 증인이 되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재신이 말렸다.

그들의 입장을 기다려보겠다, 잘못하면 국제관계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다, 조금만 참아달라며 기자를 설득했고,

기자는 알겠다며 그러나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자신을 이용하라고 거듭 당부하고 포럼장 안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포럼장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잠시 쉬시다가 나오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의 단호한 표정에 재신도 고개를 끄덕였다.

시경은 재신이 앉아 있는 휠체어를 밀어 재신의 방으로 들어가자, 재신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뱉었다.

 

“괜찮으십니까, 공주님.”

 

아까까지 대한민국의 권리를 대변하며 날카롭고 냉정하게 말하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걱정이, 따뜻함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아빠가 예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쥐를 몰 때는 피할 구멍은 만들어 주고 몰아야 한다구요.”

 

“무슨....뜻입니까?”

 

차라리 화랑의 임전무퇴였다면 더 알아듣기 좋았을 것이다.

적을 끝까지 섬멸해야 하는 군인에게는 낯선 말이었다.

 

“쥐도 몰리면 고양이를 문대요.”

 

“그러면 물리지 않도록 확실하게 처리하면 되지 않습니까?”

 

의아스러운 듯 고개를 드는 시경을 향해 재신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나도 아빠에게 그렇게 말했어요.

 

그런데 아빠는 살다 보면 더럽고 치사해도 한번쯤 물러나주어야 할 때가 있다셨어요.

그래서 늘.....이런 일들, 더럽고 치사한 일들을 당해도

그래, 내가 한 발 물러서주마, 했더랬죠.

그게 답답해도, 우린 왕족이니까, 억울해도 그런 마음들 함부로 내놓으면 안 된다고 그렇게 배웠어요.”

 

“아까.....그러면.....”

 

“응. 솔직히 이렇게 속시원하게 붙어본 건 처음이에요.

뭔가 허무하고, 또 속시원하기도 하네요.”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아니에요. 은시경 씨 덕분에 가슴을 꽉 막고 있던 돌덩어리가 내려간 것 같아요.

고마워요.”

 

“공주님, 그건 고마워하실 일이 아닙니다.”

 

“응?”

 

“공주님께서 모독을 당하신 겁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존경받으시는 분을

아니 전 세계에서 존경받는 위대한 분을 그들이 감히 모독한 겁니다.”

 

시경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존경...씩이나요? 내가....그러기엔....”

 

“아닙니다. 공주님.

제가 만나본 어떤 여성, 아니 어떤 사람보다도 공주님은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십니다.”

 

“은시경 씨......”

 

“공주님은, 용기라는 것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아직 난.....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내 한 몸 가누지도 못해요.”

 

“공주님!

그 사람이 존경스러운 건, 성공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결과와 상관없이, 노력하고 있는 것,

계속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

좌절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도전을 해내고 있는 것,

그것 때문입니다.

공주님은, 제가 본 그 누구보다도 위대하십니다.”

 

재신의 가슴에서 뭔가 뜨거운 게 올라오고 있었다.

나를, 내 노력을,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그런 울컥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 목이 메었다.

 

모두가 말했었다.

내가 노력하는 건 당연한 거라고,

너는 국민의 비싼 세금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라고,

그러니 살아있다면 그 의무를 다하라고,

그것이 아무리 힘에 부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숙명이라고,

그렇게 의무만을 강요당했다.

그런데 그는 그러한 노력들을 봐주고 있었다.

그래서 자꾸만 울컥하고 올라왔다.

나를 내 노력을 내 힘듦을 이해하고 대단하다고 말해주는 한 사람의 위로자를 만나

자꾸만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재신은 고개를 숙였다.

 

“......이제 가요.”

 

“예. 알겠습니다.”

 

그래 또다시 내 의무를 다한다.

그래도 다행이다.

어깨를 다독이는 손길이 있어서, 그런 위로자를 주셔서 정말로 다행이다.

 

 

포럼장 안으로 들어가기 전, 재신이 그의 손을 잡고 휠체어에서 일어섰다.

문을 열려는 그를 잡으며, 그녀가 말했다.

 

“내일 오전 일정 끝나면, 다른 건 없죠?”

 

“예. 내일 오후엔 특별한 일정이 없습니다.”

 

“그럼....은시경 씨는요?”

 

“예? 전 공주님 호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업무입니다만.....”

 

“내일.....오후에 그럼, 나 호위할 수 있죠?”

 

“예. 무슨 다른 일정이라도 있으십니까?”

 

“내일 나랑 데이트.......할래요?”

 

그 말을 처음엔 제대로 못 알아들었다.

분명 데이트라는 말은 들었지만, 그것이 실제로 사용하는 그 의미가 맞는지 순간 믿을 수가 없었다.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며 얼어있는 시경에게 재신은 쇄기를 박았다.

 

“내일 점심 식사 후부터 시간 비워 놔요.

그 시간, 내 거니까......”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시경의 눈을 피하며 문 안으로 들어가는 재신의 볼도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4

 

 

 

 

9월의 오후는 가을이라고 하기에는 여름처럼 무더웠다.

아침 일정을 마치고, 정찬까지 재신은 자신의 할일들을 했다.

각계의 인사들에게, 각 나라의 대표들에게 예의 아름다운 미소를 날리며, 그녀의 임무를 다하고 있었다.

그녀 앞에서는 모두들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재하의 명령을 따랐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서 일본 최고의 국수주의자가 허리를 90도로 꺾어 사과를 했다.

그 날 물의를 일으킨 차관은 감봉에 강등되고, 비서는 잘렸다고 했다.

역시 말단이 다 책임을 지고 끝난 상황이었다.

어쨌든 일은 이쯤에서 마무리 하고 언론에는 내지 않는 걸로 합의를 봤다.

 

호텔 1층 로비로 내려가, 재신은 차를 기다렸다.

시경이 차에서 내려 재신이 탈 수 있게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은시경 씨가 운전하고, 다른 근위대원들은 쉬도록 해요.”

 

“예? 공주님, 그건 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근위대원들이 다 같이 가면 더 위험하니까, 내 말 들어요.

그리고 나, 앞에 탈 거예요.”

 

시경은 더 말리고 싶었지만, 공주님의 단호한 표정을 보자, 어쩔 수 없다 싶었다.

저러실 때는 정말 전하와 너무나 닮으셨다.

운전석 옆 자리에 공주님을 태워드리고, 운전석에 앉자, 재신은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넣고는 이대로 가라며 시경을 재촉했다.

 

유니버셜 스튜디오 재팬.

 

그녀가 찍은 주소는 놀이공원이었다.

어쩌면 다리를 다치신 이후 아예 못 가보셨을 것 같았다.

왠지 시경의 마음이 짠해졌다.

 

“뭘 그렇게 봐요?”

 

“예? 아닙니다. 출발하겠습니다.”

 

가까웠다.

평일이라 밀리지도 않고 20분 만에 도착했다.

시경이 재신이 앉은 쪽 좌석의 문을 열고 재신에게로 다가왔다.

 

“어! 뭐하는 거예요?”

 

“안아서 내려드리겠습니다.”

 

“은시경 씨!!!”

 

재신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는 재신을 안아서 내렸다.

그의 스킨향이 재신의 코를 자극했다.

 

“아, 잠깐만요. 나 그냥 땅에 내려줘요. 잠시 서 있고 싶어요.”

 

시경은 재신의 말에 땅에 내려드렸다.

재신은 발을 땅에 디디고 있으면서도, 시경의 목을 감싸고 있던 팔을 풀지 않았다.

약간 어정쩡한 상태로 시경은 재신의 팔에 안겨 있었다.

 

재신이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시경은 자꾸만 얼굴이 홧홧해지는 듯 뜨거워졌다.

 

“흠흠...왜, 그러십니까? 공주님.”

 

“설마 그렇게 가려고?”

 

“예?”

 

“갈아입을 옷은 가져온 거죠?”

 

그녀의 눈은 어서 가져왔다고 대답하라는 강요가 느껴졌다.

 

“따로 가져온 옷은 없습니다만....”

 

“설마, 그렇게 검정색 양복 입고, 넥타이 매고, 그렇게 보디가드 흉내내며 들어가겠다고?

너무 한 거 아니예요?

이건 뭐, 여기 누가 있다, 라고 대놓고 소리 지르는 거랑 뭐가 달라요?

아무리 외국이라도, 내가 도착한 거 다 아는데,

휠체어 밀고 나타난 여자 뒤에 근위대원 같은 사람이 있으면,

뭐구나 싶어서, 보지, 온 동네 방네 소문 내려고 작정했어요?”

 

그러고 보니 공주님은 청바지에 노란 스웨터를 입고 계셨다.

그저 오늘 굉장히 앳되어 보이신다고, 이렇게 입으셔도 예쁘시다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사실 그까지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곳에 올 거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물론 이곳에 오는 걸 알았다고 하더라도, 자기 주변머리에 다른 옷을 챙겨올 정신도 없었다.

아무래도 공주님은 단단히 화가 나신 것 같은데.....

 

“그러면 다시 돌아가서 옷을 바꿔 입고 오겠습니다.”

 

“아...진짜!!! 은시경 씨 답답해.

가을이라서 너무 늦게까지는 안 연단 말이에요.

게다가 지금 시간 봐.

벌써 3시가 다 되어 가는데,

얼마 놀지도 못하잖아.

그냥 들어가요.

대신......”

 

“예?”

 

“이리 와 봐요.

일단 위에 재킷 벗어요.”

 

시경은 공주님이 매의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자켓을 벗었다.

그녀가 보고 있으니, 이런 사소한 행동들도 긴장이 되었다.

뭔가 쑥스러워 하고 있는데, 재신이 갑자기 시경의 넥타이를 잡았다.

 

“내가 풀어줄게요.”

 

넥타이를 푸는 재신.....

그런데 한 쪽을 잡아 당겼지만, 매듭이 걸렸는지 잘 내려오지 않았다.

어.....하며 재신이 손으로 풀어내려는데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뭔가 점점 야릇해지고 부끄러워지고 있었다.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처음엔 부끄러워하는 그를 놀려줄 생각에서 넥타이를 풀어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넥타이가 풀리지 않자, 점점 당황이 되기 시작했다.

그도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자꾸만 목을 가다듬는 그의 앞에서 자꾸만 손이 미끄러져 매듭은 풀리지 않고, 재신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부끄럽고 쑥스러운 순간......

그의 더운 입김이, 숨결이, 그녀의 이마로 날아와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트리고 사라졌다.

마치 한참이 걸린 듯, 두 사람은 똑같이 얼굴이 빨갛게 익어 있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풀어내고는.......재신의 손이 목에서 떠나자, 시경은 들고 있던 자켓과 넥타이를 차 안에 던져 넣었다.

 

“이제....흠흠.... 가시죠. 공주님.”

 

“뭐야, 이대로 간다고....?

아참, 정말 답답하네.

이봐요. 그렇게 목 끝까지 단추 채워서 어쩌자는 거예요?

놀러온 건데, 일하러 온 사람 같잖아요.”

 

시경은 그녀의 말에 어쩔 수 없이 하얀 와이셔츠의 첫 번째 단추를 열었다.

 

“세 번째까지.....”

 

“예?”

 

재신의 말을 이해 못 한 듯 그가 묻자, 재신은 붉어진 얼굴을 돌리며, 덧붙였다.

 

“열....라구요....단추.....너무.....일하는 사람 같으니까.....”

 

“아...예....”

 

시경은 그녀가 말한 대로, 그 아래 단추도 풀었다.

그리고 손목단추를 풀어서 몇 번 접어 올렸다.

그런 그의 모습을 재신은 눈도 떼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처음엔 뭐 이렇게 고지식하고 답답할까 싶어서 이래라 저래라 시켜본 것이었다.

그런데 셔츠의 풀린 단추 사이로 그의 가슴이 드러나자,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의 맨살이, 그리고 근육이 그대로 밖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군인이니까 당연한 건데, 셔츠 사이로 드러난 그의 가슴은 자꾸만 그녀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팔을 걷어올리자, 팔뚝의 근육들도 그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딱 깨놓고 말해서 멋있었다.

 

분명 근위대원 복장에 답답한 군인이었는데,

셔츠 단추 몇 개 풀고, 소매 좀 걷었을 뿐인데 분위기가 달라보였다.

 

재신은 자꾸만 더웠다.

 

왜 이렇게 덥지?

 

재신은 연신 손부채를 부치며 붉어진 얼굴을 식히려 했지만, 열은 자꾸만 더 올라오고 있었다.

뒤에서 자신의 휠체어를 밀고 있는 그가 너무나 신경이 쓰였다.

 

“공주님......”

 

갑자기 귀 옆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에게 조용히 묻기 위해서 그가 재신에게 가까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네? 네? 왜요?”

 

그의 얼굴이 너무나 가까이 다가오자, 재신의 심장은 또다시 미친 듯이 뛰어대었다.

 

“많이 더우시면, 실내로 바로 들어갈까요?”

 

“아, 아니에요.

그냥 바람 쇠는 게 나아요. 신경 안 써도 돼요.”

 

내가 왜 이러지...정말.....

 

자꾸만 가슴이 쿵쿵 거리며 뛰어대었다.

 

안으로 들어가는 길.....

뭔가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만 같아서 재신은 신경이 쓰였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까지 썼으니 못 알아볼 것 같긴 한데, 불안하기는 했다.

 

오후라서 그런지,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도 많았다.

그들이 자꾸만 시경을 돌아보며 자기네들끼리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말들이 재신의 귀에 자꾸만 들어왔다.

 

“あの男, 本当にかっこいい.....もし韓国の俳優さんじゃないの?" (저 남자 진짜 멋있다...혹시 한국 배우 아니야?)

 

"そうね...ハンサムはハンサムだ...何か見慣れたりして....” (글쎄...잘생기긴 잘생겼다...뭔가 익숙하기도 하고.....)

 

여학생들의 말이 재신은 자꾸만 신경 쓰였다.

그들이 보기에도 이 남자가 잘 생겨 보이는구나 싶었다.

그들이 말한 핸섬......

그는 그래. 잘 생긴, 어디를 가나 눈에 띄는 남자였다.

재신은 자신의 두 다리를 내려다 보았다.

 

같이 걸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자꾸......이 남자 앞에서 작아지는 것 같다.

나답지 않게.......

정말 왜 이럴까......

 

 

 

 

 

5

 

 

 

 

“은시경 씨, 잠깐만 멈춰줘요.”

 

Sea zone 쪽에서 재신은 멈춰 달라고 부탁했다.

시경이 휠체어를 멈추자,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재신은 시경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여기.......물 앞에 가볼래요?”

 

워터월드 존 근처에서는 여름이면 물을 뿌려대고는 했다.

그만큼 시원했고, 그만큼 속이 뚫리기도 했다.

오는 동안, 애니메이션 원피스 해적복장을 한 직원들이 물총을 들고 다니고 있었다.

아마 물을 뿌려댈 모양이었다.

 

시경은 재신을 부축해서 부두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나름 그것도 물이라고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9월인데 마치 여름 같아서 다들 물놀이에 빠진 듯 젖은 채 다니고 있었다.

 

그때였다.

 

직원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ウォーター・タイム!!”(워터 타임!)

 

그리고 일제히 물총으로 사람들에게 물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걸어다니면서, 부두에 떠있는 배 위에서 엄청난 물줄기들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온몸이 젖어들었다.

시경이 순간 재신을 자신의 품 안으로 안아, 등으로 물줄기를 막았다.

젖은 그의 가슴이 재신의 눈앞에 있었다.

 

“아!”

 

당황스러운 마음에 재신은 시경을 밀어내었다.

 

“공주님!”

 

자신도 모르게 시경은 공주님이라 외치고 말았다.

 

몇몇 한국인 관광객들이 있었는지, 이쪽을 바라보았다.

아니, 한국인 관광객들이 아니더라도 한류열풍 때문에 그 정도 단어는 알고 있는 듯했다.

뭔가 수군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시경은 재신을 안아 그곳을 벗어나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우주 스페이스관으로 아이들이 들어오는 곳이었다.

우주다보니, 공간이 어두웠다.

 

검은 천으로 뒤덮여 있는 곳으로 시경은 재신을 안고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안에는 오락실처럼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어서 그 모니터로 우주를 관찰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시경은 검은 천으로 끝까지 휘장을 쳐서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도록 했다.

어차피 이 스페이스관 자체가 어두워서 밖에서 보일 것 같지도 않았다.

 

좁은 공간.......

물에 젖을 대로 젖은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기도 어색했다.

재신은 그와 부딪치지 않으려 오락기기의 옆면에 기대어 섰다.

그러나 그의 시선을 피하려 고개를 돌렸다가 더 난감해지고 말았다.

물에 젖어 와이셔츠가 살에 달라붙어 그의 가슴이 눈에 그대로 들어왔다.

재신의 얼굴에 또다시 열이 확 올라왔다.

사실 난감한 건 시경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얇은 스웨터가 물에 젖으면서, 아름다운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물기에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자꾸만 손이 뻗어 나가려 해서 시경도 몇 번이나 침을 삼키고 주먹을 쥐고 있었다.

 

기기 옆면에 기대어 서 있던 재신이 갑자기 풋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공주님?”

 

“근데.....우리 왜 도망치는거죠?

어차피 근위대와 함께 놀러왔다고 하면 되는데......

굳이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생각해 보니 그랬다.

이렇게 서로를 의식하며 좁은 공간에 같이 서 있으면서, 도대체 우리가 왜 여기에 있을까 생각해 보니,

굳이 이러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단지 일본에 온 공주가 놀이공원에 놀러왔다면 끝날 문제였다.

은시경 씨는 당연히 근위대장이니 따라왔고, 너무 눈에 띌까 싶어 다른 근위대원들은 따라오지 않게 했다면,

아무 문제 없을 일이었다.

이렇게 지레 겁먹고 숨을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당황해서 숨은 걸까 싶었다.

 

“저....때문입니다.”

 

“응? 무슨 소리예요?”

 

“제가......감출 수 없으니까요.”

 

“은시경 씨......”

 

“처음.....알았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감추어지지 않는다는 걸....말입니다.“

 

"...................."

 

“아마......모든 사람의 눈에 보일 겁니다.

제 마음이.......

제 눈이 말하고 있을 겁니다.”

 

시경이 말을 멈추고 재신을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눈이 재신의 저 가슴 안까지 들어와 헤집어 놓고 있었다.

 

“......당신을......사랑한다고......”

 

쿵쿵쿵쿵.......

심장이 어느 새 재신의 규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뛰어대고 있었다.

벽에 기대어 있는 재신에게 시경의 입술이 천천히 다가왔다.

 

“사랑합니다..........공주님.....”

 

담백한 고백......그러나 심장을 울리는 고백이었다.

그의 삶이 담겨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화려하지도 않고, 미사여구도 없이, 흔히 듣는 말일 수 있는 말인데,

그의 입에서 뱉어진 그 말은......그 진심의 무게 때문에 깊게 깊게 가라앉아 울려댄다.

 

따뜻하고 저릿하게......

그의 입술이 재신의 입술 위에 내려 앉아 그녀의 가슴을 간질였다.

입술 사이로 깊게 들어와 그녀의 혀와 얽혀 들면서, 수많은 신음들을 뱉어내게 했다.

몇 번이나 마주치고 얽혀드는 그의 입술에, 재신은 자꾸만 자신을 놓을 것만 같았다.

누군가 들어올 것만 같아서 불안한 마음이 더 키스를 짜릿하게 만드는지도 몰랐다.

그에게서 겨우 놓여나 숨을 몰아쉬다가도 그녀를 놓지 못하고 자꾸만 다시 다가서는 이 남자 때문에

재신은 자꾸만 가슴이 자글자글거렸다.

 

“하아...하아.....은시경 씨...이제 나가요. 누가 들어올지도 몰라서 불안해......”

 

재신이 억지로 그를 밀어내며, 그의 손을 잡고 나가려는 듯 휘장을 잡으려 하자, 시경이 갑자기 그녀를 안아서 모니터가 있는 탁자 위에 앉혔다.

 

“은.....시경......”

 

놀란 재신의 부름에도, 시경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입술로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만 더........제가......가지겠습니다.”

 

그렇게 그의 입술은 또다시 그녀의 입술에 내려 앉아 그녀를 헐떡이게 만들었다.

뒤로 밀리는 그녀를 자신의 강한 팔로 허리를 휘감아 자신에게로 더욱 붙이고,

자꾸만 정신을 놓게 만드는 그녀의 황홀한 입술을 더욱더 깊게 빼앗았다.

몰아치는 그의 입술에 벅차 하는 그녀를 놓아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처럼, 분명 누군가 들이닥칠 수도 있는데, 시경은 자신의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자신도 어떻게 하지 못할 만큼, 그녀는 아름다웠고, 아름다웠고, 아름다웠다.

입술을 맞추면 맞출수록, 그녀의 혀와 얽히면 얽힐수록, 놓을 수가 없었다.

가져도 가져도, 가슴은 더 그녀로 고팠다.

 

 

 

 

 

6

 

 

 

 

 

두 사람은 밤의 퍼레이드까지 완전히 다 보고나서야, 호텔로 돌아왔다.

그곳에 있으면서 특별한 말을 주고받았던 것도 아니다.

그저 손을 잡고 걷고, 손을 잡고 앉아 있고, 그리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쯤, 그가 그녀를 이끌어 어느 모퉁이에서 입을 맞췄다.

감각만이 살아 있는 시간이었다.

맞잡은 손가락 사이에서, 맞댄 입술 사이에서, 감각은 서로에게 흘러다니며, 자꾸만 가슴을 저릿하게 했다.

해가 지고 밤이 깊어질수록, 뭔가 알 수 없는 간절함이, 자꾸만 두 사람을 감돌고 있었다.

 

차를 타고 오는 동안, 시경은 재신의 손을 잡고 있었다.

정말 연애하는 것처럼, 마치 사랑하는 연인의 손을 놓을 수가 없어서 익숙지 않은 일본의 도로에서도 왼손은 그녀의 손을 꼭 쥔 채로 운전을 했다.

예전엔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었다.

뭘 그리 유난을 떨까 싶기도 했던 행동들이었다.

운전할 때 오른손은 연인의 손을 잡아야 한다던 친구놈들의 말이, 그 때는 그토록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굳이 그렇게 잡고 싶으면, 내려서 데이트 하면서 잡으면 되지, 뭘 그리 유난을 떠는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그게 아니었다.

단 한 순간도 놓을 수가 없었다.

아니 잡고 있는 순간에도, 서로의 피부가 맞닿는 그 순간에도 그녀가 고팠다.

미치도록 그녀가 고프기만 했다.

 

뭐가 이토록 애달픈 건지.....

뭐가 이토록 아쉬운 건지.....

오후 내내, 밤이 되도록 손을 잡고 함께 거닐고, 그러다 참을 수 없어서 그녀의 입술을 수도 없이 훔쳐도,

여전히 고프고 고프고 또 고팠다.

 

호텔로 가는 길, 시경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휠체어만 아니었다면, 방까지도 손을 잡았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묵는 스위트룸에 도착하고서, 그녀가 휠체어에서 일어났다.

 

오늘 하루, 생각해 보면, 말은 거의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손으로 말하고, 입술로 전했다.

 

“오늘.....고생했어요. 은시경 씨도 가서 쉬어요.”

 

재신이 이젠 가서 쉬라고 해도, 시경은 선뜻 돌아서지지가 않았다.

자신이 왜 이러는 건지......스스로도 이해가 안 되면서도,

그녀의 손을 잡고 놓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냥 보낼 수 없는, 그 진한 아쉬움이, 또다시 재신의 허리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안으로 안아오게 만들었다.

 

하아......

 

그의 진한 한숨이 재신의 심장으로 내려앉았다.

마치 폭풍 전야처럼, 재신의 심장이 두근두근대고 있었다.

 

“어떡하죠....공주님......”

 

시경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간질이며 지나갔다.

 

그의 한숨이 깊어진다 싶은 순간, 시경이 그녀를 안아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는 그녀가 피할 순간도 주지 않고 그대로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그의 힘에 밀려 재신은 소파에 눕혀진 채로, 그의 뜨거운 입술을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손이 스웨터를 헤치며 들어와 그녀의 맨살에 닿았다.

마치 불에라도 대인 듯, 그의 손이 스치는 곳마다 열이 나는 듯했다.

그의 손길에, 그의 입술에 자꾸만 신음이 새어나오고, 야한 소리들이 공기중에 섞여들었다.

그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스웨터를 밀어올리고 입술로 빨아당기려는 순간, 문밖으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공주님!!!”

 

동욱이었다.

둘은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 화들짝 놀라서 떨어졌다.

재신은 그 사이 옷을 추스렸고, 시경은 가서 문을 열었다.

방의 기운이 후끈했다.

재신도 시경도 얼굴이 빨갛게 익은 채, 서로를 바라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뭐, 하셨습니까?”

 

무심한 듯, 아는 듯 던진 동욱의 질문에 두 사람은 귀까지 목까지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동욱이 보기에 확실했다.

그 순간 시경의 휴대폰이 울렸다.

시경은 마치 구원을 받은 것처럼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재하의 전화가 이렇게 반가웠던 적은 처음인 것 같았다.

물론 왜 또 재신의 심장이 이러고 있느냐고, 도대체 이번엔 뭔 19금을 찍은 거냐고, 도대체 낮에는 뭐한다고 전화도 안 받은 거냐고

재하의 속사포 같은 분노를 받아야 했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싶었다.

 

시경은 오늘....처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왜 “사랑하다”인지......

사랑이 왜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여야 하는지.....

서른둘의 나이에 겨우 알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7

 

 

 

 

재하와의 전화를 끊고, 시경은 자신의 방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왔다.

열이 차올라오니, 어떻게 감당이 안 되었다.

9월, 아무리 여전히 덥다고 해도 밤의 기운은 차가웠다.

그래도 시경은 차가운 물을 틀어 샤워를 했다.

쨍한 그 차가움이 정신을 조금은 돌아오게 만들었다.

 

정말.....요즘은....내가, 내가 아닌 것 같다.

 

그러다 공주님의 입술이, 그 보드라운 살결이 또다시 떠오르자, 시경은 차가운 샤워기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또다시 퍼부었다.

 

 

 

샤워를 하고 나와 머리를 말리면서 공주님 상황을 체크했다.

박동수가 일정하고 느린 걸 보니 잠이 드신 것 같았다.

그래도 자기 전, 다시 한 번 둘러 봐야겠다 생각하며, 방문을 열고 나오는데, 동욱에게서 전화가 왔다.

 

“큰일 났습니다!!!!!”

 

“어? 무슨 일이야!!”

 

“공주님, 공주님이 사라지셨습니다!!!!”

 

“뭐!!!!!!”

 

순간 그토록 식을 줄 모르던 가슴의 열이 순식간에 얼어붙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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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애고애고 드뎌 당기못 29회 올립니다.

정말 80일만에 올리네요.

80일이면 세계일주도 가능한 시간인데...쿨럭....

 

여튼, 너무 늦어 죄송합니다.

사실 29회는 조각 방식으로 써두었습니다.

같은 장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써두는 바람에, 어느 쪽으로 최종을 정할지 여러모로 갈등을 많이 했네요.

여러 버전 중, 결국 이래 저래 조합하고, 이도 저도 마음에 안 들면 새로 써가면서 적었는데,

번역이 많아, 더 애를 먹었습니다.

능력자님들, 번역이 눈에 거슬리시더라도, 그저 얘가 비루하구나.....생각하시고 너그러이 넘어가시길.....ㅠㅠㅠ

 

 

2

29회는 아무래도 시경의 카리스마겠죠.

그 전과 비교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시경은 공주님 앞서 자신이 해결합니다.

16-17회에서의 에피와 나름 대구(對句)를 이룬다고 할까요.

 

그리고 터져나오는, 이제 제어가 안 되는....그런 마음이랄까요?

어쩌면 공주님과 은소령이 한 첫 번째 제대로 된 데이트가 아니었나 싶어요.

손만 잡아도 좋은....말도 필요 없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알고 보면 말도 거의 하지 않고, 계속 손만 잡고 다니고, 서로를 느끼고...그렇게 두근대고....

그러다 못 참으면, 구석으로 저돌적으로 끌고 가서 키스를 하고......

은소령의 사랑이......이렇게 시작되네요.

 

마음으로만 하던 사랑이, 이제 “사랑한다”라는 동사가 되는 상황이랄까요.

여튼 감정이 몸으로, 행동으로 표출되는 그 상황을 29회에 풀어보았습니다.

 

 

3

BGM은 <설렘주의보>입니다. 이 곡은 올 3월에 나오자마자, 29회의 BGM으로 정해놓았다죠.

이 노래만 들으면, 29회의 두 사람이 떠올라 그 때 적고 싶어서 근질근질했답니다.

문제는.....그 당시엔 29회까지 오려면 엄청 멀어서, 혼자 머리로만 상상하고 좋아라 했었다지요.

BGM 전체를 들으시면서 보셔도 되고, <설렘주의보>만 반복 재생해셔도 좋을 듯합니다.

 

또 내용 중에 유니버셜에서 물 뿌리는 건, 실제로 있는 이벤트?입니다.

여름엔 사람들에게 물을 뿌려서 온통 젖게 만든다지요.

그래서 전 늘 비닐 비옷을 챙겨갑니다.

 

 

4

걱정인 게, 워낙 마지막엔 비몽사몽 상태라.....이 글이 제대로 제가 쓰려고 했던 그 애잔함과 두근댐과 설렘을 담아내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오늘은 마무리 해보리라 싶어서 좀 무리다 싶어도 달려보았습니다.

한 번 끌어올린 감정을 또다시 묵혀 버리면, 이까지 올라가는 데 또 시간이 걸리니,

이왕 이렇게 된 거, 끝을 보자 싶었네요.

 

지금도 제가 무슨 소리를 주절 거리고 있는지, 오락가락합니다.

일단 올려두고, 나중에 정신 차리고 수정해야겠습니다.

어제도 2시간 겨우 잤는데, 오늘도 그래야 할 듯합니다.

 

오늘도 평안하시길.......

 

+) 참, 아직 여전히 <당.기.못> 보시는 분들, 29회 댓글에 슬쩍 살아 있다고 손 한 번 들어주시길......

은신러 분들이 제 블록에 오시는 이유도 <당.기.못>이 99.9%이실 테니, 이곳에 생존신고 비슷무리 부탁드려요.(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