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킹투하츠와 은신상플/(은신)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은신상플)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31 - 청춘이여, 실패하라

그랑블루08 2013. 12. 25. 00:00

 

(은신상플)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31 - 청춘이여, 실패하라

 

 

 

 

 

 

<silver님께서 주신 당기못 대문짤~~ 감솨감솨합니다.^^>

 

 

<디씨 그러하다 횽이 주신 당기못 대문짤~~저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__)>

 

 

 

<배경음악을 꼭 틀고 봐주시길...>

 

 

133

 


Silent Night - Mariah Carey

Silent Night
Holy Night
All is Calm
All is Bright
Round yon virgin Mother and Child
Holy infant so tender and mild
Sleep in heavenly peace
Sleep in heavenly Peace

Silent Night
Holy Night
Son of God
Oh love's pure light
Radiant beams from thy holy place
With the dawn of redeeming grace
Jesus Lord at Thy birth...
Oh Jesus Lord at thy birth

Sleep
Sleep
Sleep in heavenly peace
Sleep in heavenly peace
Sleep in heavenly peace
Peace
Sleep
Sleep
Sleep in heavenly peace

가사 출처 : Daum뮤직

 

 

 

 

 

1

 

 

 

 

 

“얼마나 머물렀던 겁니까?”

 

재하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사무적이었다.

아니 약간은 화가 난 듯도 했다.

 

“한 시간 정도 계셨습니다.”

 

“그 이후에는?”

 

“밖에 나오셔서 계속 공주님 객실을 지키며 서 계셨습니다.”

 

“잠도 안 자고?”

 

“예.”

 

“아니, 지가 왜 거기서 고생을 사서 해?

나 참, 이해가 안되는 놈이야. 여튼.

그래서요? 그 다음은? 근위대원들과 교대는 하긴 했습니까?”

 

“보고 들은 바로는 아침 6시가 되어서야 방으로 가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 참, 이 놈 참!”

 

분통을 터뜨리는 재하 앞에서도 보고를 하고 있는 궁중실장의 얼굴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다.

그런 궁중실장 앞에서 재하는 감정을 내보이지도 못하고 답답해하고 있었다.

답답한 놈!!

거기서 문 앞에서 뭐하겠다는 거야?

일을 치든가?

아니지. 일을 치면 안 되지.

 

그래도 말이야. 어? 문 앞에 서 있으라고 내가 거기 보낸 줄 알아?

남자라면 뭐라도 해야지.

나 참! 뭐 이렇게 꽉 막힌 새끼가 다 있냐?

 

“더 물어볼 말씀이 없으시면, 복귀 하겠습니다.”

 

혼자 열 내고 있는 사이, 궁중실장은 이만 나가보겠다며 사무적으로 말을 건넸다.

 

“예. 그러세요.

궁중실장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전하. 그럼...”

 

“아, 잠깐만요. 궁중실장님.”

 

“예. 전하.”

 

“근위대장 내 방으로 오라고 해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전하.”

 

 

 

재하의 호출로 시경이 방에 들어서자마자, 들은 말은 욕이었다.

 

“어휴~ 이 병신!!!”

 

“예?”

 

재하는 아예 대놓고 욕을 해댔다.

 

“야, 너 거기 밑에 있는 물건 떼라.

넌 남자도 아니다, 새끼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경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그런 모습도 재하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너 뭐하는 놈이야?

밤에 잠이나 자지, 뭐 했어?”

 

“예...예?”

 

시경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알고...계시는 걸까....

 

“재신이 방문 앞에서 새벽까지 지키고 서 있었다며?

야! 너 명성왕후 찍냐?

니가 무슨 무사냐?

얼척이 없다, 얼척이!

가서 잠이나 자지.

근위대장이 거기서 뭐 하는 거야?

근위대원들 어차피 교대 근무하는 건데, 니가 거기서 그럴 필요가 뭐가 있어?”

 

“...................”

 

“야!!! 욕해서 삐졌냐?”

 

“......아닙니다.”

 

“어휴...내가, 어? 대한민국 국왕인 내가 니 눈치나 보고...어휴....끓는다, 끓어!”

 

“불안해서.....그랬습니다.”

 

“뭐?”

 

“그렇게 지키지 않으면........”

 

시경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런 시경을 재하는 낱낱이 살피고 있었다.

 

“야, 너, 거기 가서 별일은 없었지?”

 

재하는 놀려줄 겸, 한 마디 더 툭 던졌다.

 

“보고 드렸지 않습니까?

예전 차관 비서의 일은......”

 

“야!!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사람 열 받게 하려고

내가 지금 그걸 묻는 거냐?

너네 둘 말이야. 재신이랑 너! 이 답답한 놈아!!!”

 

“...............”

 

갑자기 시경은 입을 다물었다.

분명 아니면 아니라고 말할 놈인데 싶어 재하는 뭔가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야! 왜 대답을 안 해?

야! 너 설마!!! 뭔 일 있었던 거야?”

 

“.......생각하시는 그런 일......”

 

시경은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말입니다.”

 

뭔가가 있었다.

재하의 눈에는 보였다.

분명 재신이와 은시경 사이에 뭔가가....미묘한 변화가 보였다.

 

“그러면, 너네 왜 그러는 거야?

싸웠냐?

내외 하는 것도 아니고, 말도 안 하고, 눈도 안 마주치고...

싸우기라도 한 거냐고?”

 

“하아......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시경은 한숨 같이 말을 내뱉고는 바로 나가버렸다.

재하가 무슨 말을 하든 관계가 없다는 투로, 어떤 말도 들리지 않는다는 태도로 나가버렸다.

그런 모습이 재하를 못내 신경 쓰이게 했다.

 

저 자식! 뭔 일 있었구만.

어휴! 하여튼 내가 저 두 놈 때문에 내 명에 살 수가 없다, 살 수가!!!

 

 

 

2

 

 

 

 

“너무 귀여워요

세상에 발이 어떻게 이렇게 작지....

애고애고...귀여워서 어째.....이걸...”

 

재신은 연신 조카가 귀여워서 거의 삼킬 듯이 뽀뽀를 해대고 있었다.

그런 재신을 귀엽다는 듯, 항아가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이리 주시디요.

그러다 팔목이라도 나가시면 큰일납네다.”

 

“앙...너무 귀여워서.....놔 줄 수가 없는데...

우리 왕자님...왜 이리 예쁘죠?

언니 닮아서 이쁜 거야.

절대로...아빠 닮지 마라.

저 못된 성미...절~~대로 닮으면 안 돼!!!”

 

풋....

 

재신의 말에 웃던 항아는 재신에게서 아이를 받아 젖을 물렸다.

그 모습을 재신은 뭔가 뭉클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따뜻한...아주 사람다운 모습이랄까.

가장 사람다운 정경이랄까.

그랬다.

어쩌면 태초부터 한결 같았던 그 모습 앞에서 뭔가 뭉클하고, 뭔가 저릿해 왔다.

 

“우리 공주님, 고조 얼른 혼인 하셔야겠습네다.”

 

“네?”

 

“이리 아기가 이쁜데, 어서 순풍 하나 나으시디요?”

 

“에이, 언니 무슨 소리예요?

남자도 없는데.....”

 

그 말에 항아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 물었다.

 

“남자, 없습니까?”

 

“네?”

 

“정말, 남자 없는 거, 확실한 겁네까?”

 

항아의 눈이 재신의 저 마음 안까지 살피듯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재신은 그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알아....보셨습네까?”

 

“뭘요?”

 

“예전에 가졌던 그 마음이...정말이었는디,

아가씨가 품을 만한 사람인디 말입네다.”

 

하아......

 

고개를 숙인 채 재신은 대답이 없었다.

 

“일본에서 무슨 일이, 있었구만요.”

 

“네...네?”

 

재신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잘...모르겠어요.”

 

“아직도 감정을 모르겠다, 이 말씀이십네까.”

 

“그게 아니라.....

하아.....

지금은...좀....다른 일이....

언니...조금만 더 정리되고 나서 얘기해요.

미안해요.”

 

재신의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아니......슬퍼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더 물어볼 수가 없었다.

 

 

 

 

 

3

 

 

 

 

“너, 알고 있었지?”

 

재하는 안 되겠는지 이제 동욱까지 불러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예? 뭘 말씀하시는지....”

 

“재신이와 은시경 둘 사이 말이야.”

 

“....예.”

 

“둘이 도대체 일본에서 뭔 일이 있었던 거야?

왜 저래 둘이?”

 

“아무래도...”

 

“뭐?”

 

“두 분 싸우신 것 같습니다.”

 

“뭐어? 싸워? 둘이?”

 

“예.”

 

“허참.....좋아.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두 분이 서로 쳐다보시지도 않고, 말씀도 안 나누십니다."

 

"또?"

 

"근위대장님께서 원래 말씀이 없으시기는 하지만, 요즘 표정이 더 어두우십니다.

가끔 한숨을 쉬신다거나, 멍하게 계실 때도 많습니다."

 

"재신이는?"

 

"공주님께서는 생활에서 다르게 행동하시는 면은 없습니다만...."

 

"근데?"

 

"오랫동안 공주님을 호위해 와서 느끼는 건데.......

공주님께서 너무 밝으십니다."

 

"뭐? 밝으면 괜찮은 거잖아.""

 

"그게 아닙니다. 전하.

공주님께서는 마음이 안 좋으실수록, 우울하실수록, 걱정이 많으실수록,

더 밝은 체하십니다.

요즘 공주님께서 대외활동에서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습니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밝으십니다.

공주님, 지금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실 겁니다."

 

"흐음.....김동욱, 너도 쓸만한 데가 있긴 있군.

그래서 결론은?"

 

"예? 아까 말씀드렸듯이, 두 분 싸우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쯧쯧....김동욱, 니가 그러니까 아직 연애를 못하는 거야."

 

"예?"

 

동욱은 재하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게 아니야. 분명.....다른 큰 일이 있었어."

 

"무슨 말씀이신지...."

 

"됐어. 널 데리고 내가 뭔 말을 하겠냐. 나가봐."

 

동욱이 어리둥절해 하며 나가자, 재하의 표정이 조금은 심각해졌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일이 둘 사이를 위해서 좋은 일인지, 아니면 완전히 파토를 낼 일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겉으로 보이는 현상만으로는 안 좋아 보이기는 한데........

 

 

 

 

 

4

 

 

 

 

 

그의 눈도 본 적이 없다.

그는 언제나 고개를 숙이고만 있다.

분명.......뭔가가 있는 거다.

이상하게 재신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기만 했다.

 

왜 그러는 걸까...

내가 그날...실수...한 걸까...

아니면, 내게 실망한 걸까.....

 

생각하면 할수록 재신은 자꾸만 작아지기만 했다.

 

바보 같아.....내가....

 

남북한 공조 시스템에 대해서는 이제 각국의 반응이 호의로 돌아서고 있었다.

물론 일본이 어쩔 수 없이 승인했으니, 다른 국가에서 굳이 반발할 이유도 없었다.

가장 난국이었던 일본을 이번 기회에 승복하게 한 셈이니, 나쁘지 않았다.

심지어 재신은, 이 정도 일에 이만한 결과라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그 다음은......하아......

 

재신은 자신의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몇 번이나 메시지 창을 열고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다 말았다.

 

뭐라고 말할 것인가.

나한테 실망했냐고....이제 마음이 변한 거냐고...

나한테 뭐 화난 거 있냐고....

물어야 하나.

그런 것을 묻는 것도 우스웠다.

 

사실 재신은 그날 밤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 기억은 그의 말이었다.

 

"제가...감히.....공주님을 가져도 됩니까?"

 

그 말이 생각날 때마다, 얼굴에 열이 오르고, 심장이 뛰어대었다.

아무리 약이었다지만, 그와 내가 어떻게 그렇게까지 갈 수 있었는지......

그러나 재신은 자신의 행동을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남자보다 그녀가 더 적극적이었다.

그의 손길도, 그의 입술도, 너무나 자극적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그에게 더 엉겨들었다.

 

그런 모습에 실망한 걸까....

아니면....내가......육체적으로......아니었던...걸까......

이래저래 마음이 심란하기만 했다.

 

그 날 이후, 그는 내 얼굴을, 내 눈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공식적인 말을 전할 때도, 그는 내 눈을 보지 않았다.

마치 벽과 얘기하는 것 같았다.

이제 그의 눈에는 내가...안 보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순간 가슴이 뛰었다가, 금세 실망감이 자리했다.

 

 

"뭐야! 이재신! 어떻게 연락이 없어?"

 

"미안해...좀 바빴어."

 

"그래, 어련하실까. 이번에도 화끈하게 한 방 하셨던데, 공주님?"

 

"......아니야...."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목소리에?"

 

"아니야......저.....혜원아......"

 

"왜? 뭐, 물어볼 거 있는 거 같은 뉘앙스네."

 

"그래....좀 난감한 질문이기는 한데, 꼭 좀 대답해 줄래?"

 

"알았다규. 물어봐, 내가 뭔들 대답 못해줄까.

내 첫경험이라도 얘기해 준다. 이 언니가. 큭큭"

 

".....후우....그래....그거...."

 

"뭐! 지금 뭐라고 했어? 진짜 첫경험을 묻겠다는 거야?

야!! 이재신, 너 이제 버진 뗀 거야?"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물어보고 싶어서....."

 

"그럼 그렇지. 그래, 물어봐. 이 언니가 다 알려주마."

 

"...너...첫경험 때......술 마시고...했었다고 했지?"

 

"그래. 내가 참...그 썩을 놈 때문에...어휴.....

내가 어렸으니 그랬지......몰라. 그건 왜?"

 

"너.....그 남자랑 했던 거...기억 나? 술 취했다며?"

 

"뭐, 솔직히 말하면.....기억이 완전히 안 난다는 건, 거짓말이지.

왜 기억이 안 나겠냐? 내가 좋아했던 남잔데, 술기운에 에라 모르겠다, 했던 것도 있었을 거야.

첫사랑이잖아. 둘 다 어렸고....."

 

"술 취해서 기억 안 난다며?"

 

"그건 그러니까.....필름 끊기듯이, 한 장면 한 장면, 뭐 생각나는 건 있어.

다는 아니지만......"

 

"깨어나서......어땠어? 술에 취했으니까....별 느낌 없었어?"

 

"야, 어휴...이 답답한 아가씨야. 그럴 리가 있겠니?

하기야, 니가 버진인데, 어찌 알겠냐.....이 언니가 가르쳐줘야지.

이재신 양.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몸은 아는 법이야.

그리고 생살을 찢었는데, 안 아프겠냐? 생각을 좀 해봐라."

 

"그래도, 술 취했었다며?"

 

"야, 장난 치냐? 너 마취주사 맞으면 나중에 안 아프디?

마취 깨고 나면 아파죽잖아. 똑같은 이치야."

 

"................."

 

"이재신, 왜 아무 말이 없어? 야! 야!"

 

".....어....."

 

"왜 그래? 너? 무슨 일, 정말 있었는 거 아니야?"

 

"아니야....혜원아, 미안, 나 뒤에 일정이 있어서 끊어야 돼.

미안해."

 

"미안하기는....붙잡고 있었던 내가 미안하지.

살아있음, 됐어."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지만, 재신에게도, 또 그 말을 한 혜원에게도,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알고 있었다.

 

"미안...나중에 궁에 한 번 들러줄래.

얼굴이나 좀 보면서 이야기하자."

 

"좋지. 나도 이번에 맡은 프로젝트 끝나면 바로 갈게.

여튼, 건강 좀 챙기고."

 

"그래. 고마워. 너도."

 

 

 

재신은 전화를 끊고 나서,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었다.

결론은....확실했다.

 

 

 

 

 

5

 

 

 

 

 

"다녀 와!"

 

"예? 제가, 말입니까?"

 

의문을 제기하는 시경의 발언에 황당한 건 도리어 재하였다..

 

"이거 보게.

야! 너 일본 갈 때는 보내달라고 그렇게 떼를, 떼를 쓰더니,

지금 이 태도는 뭐냐?"

 

"그 땐...워낙 사안이 위험해서...."

 

"지금은 괜찮고?

재신이 저번 사고도, 제주도였다."

 

"그렇지만......"

 

"못 가겠는 이유, 논리적으로 딱 50개만 대봐.

그러면 너 안 가게 해 줄게."

 

"........가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시경의 얼굴이 어두웠다.

분명 이제 계약 연애가 얼만 남지 않았다고, 그토록 안타까워하던 그 놈이 맞는지,

재하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에서 분명 무슨 일이 있었다.

뭔가...심경을 변화시킨.....

 

"너네, 며칠 남았냐, 이제?"

 

".....제주도 행사 당일이, 마지막 날입니다."

 

"그럼.....오늘까지 합쳐서 사흘이란 거군."

 

"....예."

 

"너...그런데......좀...이상하다."

 

"..................."

 

"야! 은시경!"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결심한 듯 시경의 목소리가 낮게 잠겨 있었다.

재하는 뭔가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 놈이!!! 도대체 무슨!!!!

 

 

 

 

 

6

 

 

 

 

 

행사에 행사......

재신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행사를 다 치러낼 수밖에 없었다.

항아의 출산으로 인사할 곳은 많고, 항아가 다니기는 어려우니, 아무래도 자신이 갈 수밖에 없었다.

대비 역시 움직이고는 있었지만,

웬만해서는 재신을 원했다.

지금 그녀는 가장 강력한 핫이슈였다.

그러니 그녀 스스로도 어떠한 선택을 할 수도 없었다.

 

청춘 콘서트라고 했다.

대학생들, 젊은이를 위한, 청춘 콘서트.

거기에 올해의 인물인 자신이 초대된 것이다.

처음엔 거절할까 생각도 했다.

시간도 너무 촉박했다.

당장 며칠 남지도 않았는데, 주최 측은 내 얘기를 하면 된다고, 편하게 생각하라고 했다.

그러다....결국 장애인협회와 함께 한다는 말에 바로 승낙을 했다.

 

그날은....그와의 마지막 날이었다.

어쩌면....그 마지막은 오지 않으리라고, 그 어느 순간부터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고 있다는 것을, 재신도 모를 수가 없었다.

그와의 관계에서 고민할 것은 자기 자신이라 생각했었지, 그 사람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재신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확신할 수 있다고 자신했었다.

그것은 어쩌면 오산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잘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 시작이 제주도였으니, 끝도 제주도에서 내야겠지.

관계가 유지될지, 끝낼지는 그곳에서 결판이 날 것이다.

 

분명 오빠는 알고 그를 내 호위로 보낸 것이다.

어쩌면 오빠의 배려일지도 몰랐다.

 

"확실히 해."

 

"뭘?"

 

"계속 갈 건지, 아니면 완전히 끝낼 건지.

지금처럼, 계약이니 어쩌니 하지 말고,

갈 거면 확실하게 가고,

아니면, 미련이 있더라도, 완전히 끊어내!"

 

오빠의 말은 단호했다.

그러나 오빠의 말이 맞았다.

이런 미적지근한 관계는 그에게도 나에게도 해가 될 뿐이다.

 

그렇게 행사 당일 아침, 재신은 전용기로 제주도에 도착했다.

시경은 예의 그 공식적인 태도로 재신을 대하고 있었다.

저 사람은 사람이 아닌건가 싶을 정도로 그의 태도는 딱딱했다.

그와 말을 나누면 나눌수록 가슴이 시려왔다.

 

행사는 오후 3시.

 

대기실에서 급하게 준비한 원고를 읽는 내내, 재신의 시선은 시경에게 가 있었다.

장소를 확인하며, 인이어로 명령을 내리는 그의 모습이 재신에게는 낯설었다.

저 남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걸까....

저 남자의 머릿속엔 내가 있긴 한 걸까.....

 

이재신...정말...바보 같다.

 

어느 순간 재신은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러나 웃기게도, 그를 따라다니는 자신의 시선 끝으로 그의 말이 떠올랐다.

 

“공주님!

그 사람이 존경스러운 건, 성공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결과와 상관없이, 노력하고 있는 것,

계속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

좌절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도전을 해내고 있는 것,

그것 때문입니다.

공주님은, 제가 본 그 누구보다도 위대하십니다.”

 

그럴까. 지금도 그럴까.

여자로서 흥미가 없어졌다고 해도, 그래도 그럴까.

 

문 앞에는 이미 휠체어가 놓여 있었다.

재신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시경은 재신이 지나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서 있었다.

재신은 시경의 곁을 천천히 지나가다가 멈춰 섰다.

재신의 시선은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시경이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재신도 느끼고 있었다.

 

“아직도......그래요?”

 

“예? 무슨...말씀이십니까?”

 

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재신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웃기지.......이 목소리조차......은시경스럽다고....그래서 좋다고 느끼는 나는........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시경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받으며 시경의 울대가 울렁였다.

 

“.....당신이 말한 것처럼.....여전히.....내가......내 도전을 해내고 있나요?”

 

순간 시경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눈이 재신을 깊게 바라보다가 다시 허공으로 떠나갔다.

그러나 재신은 그 짧은 순간, 그의 눈빛이 자신의 영혼 저 안까지 깊게 꽂혔던 것을 놓치지 않았다.

자신의 숨을 순간 멈추게 했던 강렬했던 그의 검은 눈을 재신은 숨도 쉬지 못한 채, 받아내었다.

 

“공주님은.....늘.....빛나셨습니다. 그리고....지금도....여전히 그러십니다.”

 

한 글자 한 글자 그는 또박또박 그녀의 가슴으로 전해왔다.

재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밖으로 나갔다.

됐다...이거면....

 

 

 

목발을 짚고 천천히 단상으로 향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청춘이라는 이름의 청중들은 모두들 일어서서 박수를 보냈다.

그것은 일종의 존경의 표시였을 수도 있다.

 

그녀는 단상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그녀를 위한 배려였다.

 

“스물여덟 해를 살아가고 있는, 이재신입니다.”

 

그녀의 인사는 간결했다.

대한민국, 왕실, 공주 이 모든 이름을 다 떼고 그녀는 청춘의 이름으로 그곳에 앉아 있었다.

 

“모두들 의아하셨을 겁니다.

제가 드린 제목....

청춘이여, 실패하라.

좀...놀라셨나요?”

 

그녀의 말에 여기저기에서 호응하는 말들이 들려왔다.

문쪽과 복도쪽은 카메라와 취재기자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그녀의 삶의 이야기를 듣게 된, 최초의 시간인지도 몰랐다.

 

“청춘....에게 들려드릴 이야기를 청탁받았을 때,

전...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까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주최측에서 말씀하시더라구요.

제 얘기를, 인간 이재신의 삶을 말해달라고요.

어쩌면, 전....2년 전, 그날의 저와 그 이후의 저로 나뉠지도 모르겠습니다.”

 

좌중이 고요해졌다.

그 사건은...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모두가 가진 생채기였다.

 

“전...오늘...‘산다’는 것의 힘에 대해.....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큰오빠에 대한 이야기도, 김봉구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은 감추어졌지만,

절벽 위에서 떨어져야 했던 이야기들은 가감 없이 흘러나왔다.

그리고...그녀는 감추었던 고백을 시작했다.

 

“삶을....놓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아니, 그런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사실...기억을.....잃었습니다.

너무나 아팠던...순간이라 그런가 봅니다.

신께서 ‘망각’이라는 선물을 주셔서, 제게서 그 고통의 기억을 가지고 가셨습니다.

그렇게 눈을 떴을 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이전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운지, 알지 못하지만,

살아남았으니, 살아야 한다고...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재신의 눈은 가까운 벽에 서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그를 향해 있었다.

그녀의 눈이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날의 의미를 아는 유일한 남자였다.

그렇게 그녀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이렇게 살아남았다면, 누군가의 목숨을 어깨에 지고 있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무리 해도 실패할 뿐인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런데.......그곳에 답이 있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것은 실패였습니다.”

 

실패...그랬다. 재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실패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느낀 순간,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지금, 이 청춘들과 나누려 했다.

지금도 하고 있는 그녀의 실패를...지금 이곳에서 나누려 했다.

 

“제가 일어설 수 있는 가능성. 제가 완전히 걸을 수 있는 가능성...

10%도 되지 않습니다. 한 자리 숫자라더군요.

그건 사실 의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수치화한 것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포기할까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포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내가 일어섰기 때문에 내가 완전히 걸을 수 있기 때문에 힘이 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안 되더라도,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어도,

계속해서 노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대신 하늘을 감동시키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0.1%로 99.9%를 전복시키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내 노력으로 기적을 만들어내겠습니다.

실망하지 않겠습니다.

좌절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내 마지막 날, 내가 걷고 있지 못하다고 해도,

내 삶은 헛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늘을 감동시키지는 못했다고 해도,

누군가에게 나는....힘이 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감동은 성공한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실패할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노력하고 도전해서

또다시 실패하는 그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내게 한 사람이 가르쳐주었습니다.”

 

재신은 자신을 놀란 듯 바라보고 있는 그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눈을 바라보며, 그녀는 영혼의 고백과 같은 말들을 이어갔다.

 

“실패는 특권입니다.

도전하고 노력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특권.

그러니...나는 그 특권을 내 평생을 두고 누릴 것입니다.

 

예. 전 실패하겠습니다.

오늘 노력해서 실패하면, 내일 또 노력하겠습니다.

내일 노력해서 실패하면, 모레, 그리고 그 다음날,

그렇게 저는 매일매일 실패하겠습니다.

그래서 내 평생, 내가 눈 감는 마지막 날까지 그리 한다고 해도,

저는 그 마지막 날까지 실패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실패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오직 시도한 자만이, 몸부림치며 노력한 자만이,

홀로 피눈물을 흘리며 나아간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바로 실패니까요.

그러니 저는 이 특권을 제 죽는 날까지 누릴까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저를 보며 그 실패를 함께 누리게 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래서 어느 날,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다면,

실패의 특권이 모여, 실패의 줄기들이 모여,

그렇게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다면,

예. 저는 계속 실패해나가겠습니다.

이 특권을 평생 누리겠습니다.

 

청춘이여! 실패하라!!

그리고 시도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이 놀라운 특권을 누려라!!!

 

여전히 청춘을 살고 있는. 스물여덟 해를 살아온, 그리고 오늘도 실패하고 있는 한 여자가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축복입니다.”

 

그 순간 많은 학생들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감동 그 이상의 감동이었다.

실패하겠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그것이 실패라며,

하늘을 감동시켜서라도 실패하겠다는 한 여린 여인의 당찬 시도에

그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재신의 눈에서도 눈물을 흘러내렸다.

그것은 실패자의 눈물이 아니라, 도전자의 눈물이었다.

나, 이렇게 살겠다고,

이 땅의 젊은이들을 향해서 외치는 하나의 소리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한 남자의 시선과 얽혀들었다.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

여전히 깊고 깊은 눈을 한, 검은 눈동자의 사내를 재신은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그 사내도 오롯이 바라보고 있었다.

 

 

 

 

7

 

 

 

 

기운이 다 빠졌다.

 

호텔로 이동하니 5시 30분을 향하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쉬고 저녁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객실로 올라가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경....오빠.....맞죠?"

 

어떤 여자가 시경에게 다가왔다.

재신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꽤 세련된 스타일의 여자가 시경을 향해 웃고 있었다.

 

"와~ 맞네. 시경 오빠. 나, 연희예요."

 

"어...진짜 오랜만이다."

 

"뭐야. 뭐가 이렇게 멋있어진 거예요.

이런다고, 나한테 연락 끊은 거야?"

 

"아...그게 아니라......미안.

그게 그 때는 임관하자 마자 소대를 맞게 돼서 정신이 없었어.

몇 번 훈련 다녀오고 나니, 그렇게....

아, 죄송합니다. 공주님. 공주님께서 계신데....."

 

공주님이라는 말에 시경의 앞에 서 있던 여자의 눈이 심하게 커졌다..

 

"우와...공주님 맞으시군요.

설마 설마했는데,

정말....아름다우세요. 공주님!"

 

"고마워요...근데..누구신지.....은시경 근위대장님과 잘 아시는 분이신가 봐요."

 

"아, 그럼요. 동아리 선후배예요.

한창 둘이 데이트도 많이 했는데....풋.....

시경 오빠가 바빠서 절 차버렸네요.

송연희라고 합니다. 지금 OO 패션잡지에서 일하고 있어요."

 

"연희야! 그게 아니라....."

 

시경은 당황한 듯 재신의 눈치를 살폈다.

그 때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도착했다.

 

"그럼...두 분 얘기 나누세요. 전 먼저 올라가볼게요."

 

재신은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다.

아무렇지 않은 척, 객실 안까지 와서,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재신은 침대 위로 쓰러졌다.

 

불쾌....했다.

지금 이 감정......

시경과 그 여자의 대화가 자꾸만 리플레이되고 있었다.

데이트....동아리 선 후배....임관 후 연락 두절......,

그 모든 말들이 섞여서 한 가지 결론을 내고 있었다.

 

시경의...첫사랑....

그는 아니라 했지만, 어쩌면 그도 사귀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스스로 거절당했다고 생각해서 더 진전이 없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송연희라는 그 여자는....그가 만났던 첫 번째 여자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하아....

 

머리가 깨질 것처럼 웅웅거리고 있었다.

 

재신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답답증이 몰려왔다.

 

둘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아직까지 만나는 거야?

도대체 뭐야?

 

재신은 안 되겠다 싶어서 저녁을 핑계로 내려가기로 했다.

1시간이나 지났는데, 도대체 둘이 뭔 얘기를 하는 건지...

오랜만에 보니 좋은 건지....

자신이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수행원들과 함께 그렇게 식당이 있는 로비층의 버튼을 눌렀다.

 

"땡"

 

문이 열리자 재신은 레스토랑이 있는 왼쪽으로 향하는 척하면서 카페 쪽과 바깥쪽을 살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멀리 간 건가......

 

점점 답답해 오는 상황에서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재신의 마음은 얼어붙고 말았다.

 

레스토랑으로 가는 길 쪽 사이에 화장실이 있는 복도에서 누군가 전화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전화 대상의 이름이 불리는 순간, 재신은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시경 오빠......"

 

그 여자였다.

 

"응.....사실.....아까는 부끄러워서....말을 제대로 못했어.

나 사실....오빠가 먼저..다시 만나자고 말해줘서 진짜 기뻤어."

 

다시...만나?

 

"나...사실...오빠 못 잊고 있었어.

고마워...나....오빠한테 잘 할게.....

서울 가면 바로 연락할게."

 

 

재신의 휠체어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궁중실장은 그런 재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8

 

 

 

 

저녁 시간에 보이지 않던 시경에게서 문자가 왔다.

 

“공주님....카페에서 잠시 뵙고 싶습니다.”

 

그 남자다운 문자였다.

재신은 뭔가 알 수 없는, 뭔가 이상한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조금은....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아까 그 여자의 목소리가 또다시 떠오르자, 재신은 쓴웃음을 지었다.

뭘.....기대하는 거야.....

 

카페 한 켠, 방처럼 되어 있는 곳에 그가 앉아 있었다.

천천히 재신이 목발을 짚고 들어가자, 시경이 일어섰다.

 

“나가요...답답해요......”

 

밤이라 바람은 차가웠다.

그래도 야외 카페라 속은 시원했다.

안에서.....밝은 빛 속에 앉아 있기에는 그녀의 마음이 너무나 스산했다.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 사이로 바다냄새가 스며들었다.

그날...이 떠올랐다.

그날...그 때도...이렇게 바다 냄새가 났더랬다.

벌써...한 달이 되어버린......

 

시경도 재신도 한참을 그렇게 묵묵히 앉아있었다.

 

“공주님.......”

 

이윽고 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재신은 그를 바라보지 않은 채, 여전히 파도 소리가 가득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달.........”

 

그 말에 재신의 심장은 쿵...하고 내려앉았다.

그 목소리에서 왠지...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만 같았다.

재신의 눈이 천천히 그를 향했다.

그러자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그의 눈이 흔들리는 듯하더니 이내 시선을 피해 다 식어버린 커피를 향했다.

 

“감사....했습니다.”

 

낮게 잠겨들고 있었다.

그녀는 기다렸다.

그의 다음 말이 나오기를......

그녀가 기대하는 말을, 그녀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 아니 모른 척 한 채, 그렇게 기다렸다.

 

“행복...했습니다....공...주님.......”

 

한참을 기다려나온 그의 말은...행.복.했.다.는 과거형이었다.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 건지, 재신은 알고 있었다.

한 달은 현재가 아닌, 과거였다.

무언가, 말해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그는 말하지 않았다.

가슴에 싸하고 통증이 지나갔지만, 재신은 묵묵히 앉아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은시경 씨......”

 

재신의 눈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시경 역시 그녀의 눈을 두려운 듯 마주보고 있었다.

 

“나도......행복했어요.”

 

그의 미간이 좁혀지는 걸 보며, 재신은 그저 저 미간을 펴주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그건......내 역할이 아닌데.....

 

짙은 그의 눈썹과 그의 날카로운 콧날, 그리고 수려하게 빠진 그의 턱선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새삼...이 남자...참...잘 생겼구나.......싶었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의 심장을 소리나게 만드는 그의 검은 눈을 바라보았다.

그 검고 깊은 눈을 향해 웃어주었다.

그의 눈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재신은 상관이 없었다.

 

“은시경 씨......우리가....함께 한 한 달 때문에....

나한테 매여 있을 필요....없어요.”

 

그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지만, 재신은 여전히 담담한 척 말을 이었다.

 

“어쩌면...그 한 달은....당신과 내게 꼭 필요했었는지도 몰라요.

정리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었는지도 몰라요.

조금은 아쉬웠을, 당신과 나의 추억에......마지막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그런 시간이었는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이제......공주와 근위대장으로......돌아가요.......”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됐다....이거면.....

이제...그의 새로운 시작을 축복하면...끝나...

그러니까...어서.....끝내자....

 

재신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겨우 입을 뗐다.

 

“........행복하길......빌게요.”

 

재신은 목발을 짚고 천천히 걸어나왔다.

이재신...그래도....그 말은 못 해줬다.

그 여자와 행복하라고...그 말만은 할 수가 없었다.

됐다.

그래, 이제 끝났다.

 

 

 

 

 

 

9

 

 

 

 

 

방....

어떻게 올라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괜찮다고,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고, 아무리 되뇌어도,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바보 같이......정말 바보 같이....

 

실연......

이제야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이미...너무 많이 열어버렸다는 것을...

너무 많이 마음을 줬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고 있었다....

 

그날......차라리....그가 나를 안았더라면....

그가 정말...나를 가졌더라면....

책임지라고...떼라도 쓸 수 있었을까....

 

아니다....

그는...그럴...사람이 아니다......

쓴웃음이 나왔다.

 

전화가 울렸다.

 

“오빠.....”

 

“이재신! 너 목소리 왜 이래? 울었어?”

 

“아, 아니야. 누워 있다가 받아서 그래.

왜?”

 

“......................”

 

뭔가 눈치 챈 것인지, 재하가 아무 말이 없었다.

 

“오빠?”

 

“은시경, 떠난다.”

 

“무슨...말이야, 그게?”

 

재신은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떠나다니...그가....무슨....?

 

“은시경 떠난다고.

궁에 못 있겠단다.”

 

“왜...나 때문에?

내가 그렇게 싫대?”

 

저 속에서 화가 올라왔다.

떠나다니......어떻게 이렇게 쉽게 결정내릴 수 있는지.....

 

“이재신! 하아...이 바보 같은 것들 때문에, 내가 미치지.

야, 난 몰라. 니들이 알아서 해.

내가 알려주는 건 이까지야.

왜 떠나려는 건지, 너 때문인지, 니가 싫어서인지,

직접, 물어 봐!!!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재하는 화가 난 듯 전화를 끊어버렸다.

 

떠나?

궁을?

나 때문에 오빠까지 떠나겠다고?

 

재신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싫었겠지...꼴도 보기 싫겠지.....

첫사랑도 찾았으니...그랬겠지.

그래도...사람이 그런 게 어딨어?

공과 사도 구분 못해. 그 정도밖에 안 돼?

 

화가 머리끝까지 난 재신이 자신의 객실문을 벌컥 열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그녀의 객실문 바로 앞에는........완전히.....넋을 잃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이 초췌했다.

그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고통스러워 하고 있었다.

 

아니야..아니야..그건 내가 보고 싶어하는 모습일 뿐이야.

 

그녀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그런 그녀를 아프게 바라보았다.

쳐다보는 것조차 고통인 것처럼.....그의 눈은....젖어 있었다.

 

“왜, 여기 있는 거죠?"

 

“......공주..님........하아.....”

 

그의 한숨소리가, 그의 낮게 떨리는 목소리가, 재신의 가슴 저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뭐야 이 남자. 이제 와서 왜 이래......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니에요?

말해 봐요.”

 

“.......전......”

 

마치 신음처럼, 아니 절규처럼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공주님과......근위대장이라는 관계로......돌아갈 수가.....없습니다........”

 

재신은 그 말에 겨우겨우 참고 있던 분노가 터져버리고 말았다.

뭐? 이제와서......그래서 가겠다고?

 

“은시경 씨!!!! 당신 뭐야?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내가 잘못 봤네요.”

 

“예?”

 

시경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래서 떠나겠다고?

나한테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떠난다고?

내가 그렇게 싫어? 꼴도 보기 싫어?

당신은....공과 사도 구분 못 해?

왜, 왜 가는데? 

말해 봐!!!! 똑바로 말해보라고!!!!”

 

재신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점점 울음으로 변해 갔다.

 

“........사랑....하니까요......”

 

“뭐?”

 

“당신을........사랑하니까요.........공주님......”

 

“은...시경....”

 

“이젠......더 이상....참을 수...없으니까요......

이젠.....제가...제 자신을.....믿을 수 없으니까요.”

 

재신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저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한 남자의 절절한 고백이었다.

 

 

휘청대는 재신.....

그런 재신을 놀라서 잡는 시경.....

 

“공주님!!”

 

서로를 잡고 있는 뒤로.....문이 닫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러나 두 사람의 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무슨 말이에요? 그게?

당신.....그....첫사랑 만난 거잖아.

다시...만나기로 한 거잖아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설마...연희....말씀입니까...?”

 

“그래요. 당신의 첫사랑.”

 

재신은 그 말을 뱉으며 말이 이토록 쓸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누가!!! 첫사랑이란 말입니까!!!”

 

그가 화를 내고 있었다.

 

“도대체!! 왜!! 아직도 모르십니까!!!!

왜...아무리 말씀드려도, 왜 들으려 하시지 않습니까? 공주님!!!!

 

“..................”

 

“사랑한다고......아무리 말씀드려도....제 사랑이...공주님께는 들리지 않으십니까?

첫사랑.....하아.......

제겐....늘 당신입니다.

처음도 끝도....전..........공주님...당신입니다.

왜......아직도...모르십니까!!”

 

“아니야.......”

 

재신은 믿을 수 없었다.

이 남자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

분명, 그 여자가 말했다.

다시 만난다고........

뭐지.....지금......뭐지......

 

“행복했다고 했잖아......”

 

“공주님!”

 

“과거형이었잖아......

아까...나를 잡지도, 계속 만나자는 말도, 하지 않았잖아.....

그런데...지금 이게 무슨 말이야....”

 

“제가!! 하아.....”

 

고통스러운 그의 눈이 그의 입보다 먼저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신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공주님, 제가 어떻게.....그렇게 말씀드립니까......

지금까지....늘....말씀드렸습니다.

사랑한다고 말입니다.

공주님...아시지 않습니까.....

처음도, 끝도...제게는 당신이라는 것을......

 

그런데 말입니다.

이번 한 달은...공주님께서 모든 키를 쥐고 계셨습니다.

공주님께서 저를 받아주실지 말지 결정하는 거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저...공주님의 결정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지 않습니까?

제가 어떻게 더 공주님을 붙잡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모든 선택권은 공주님께 있지 않습니까?”

 

“난...난....

아니 난 분명 들었어요.

그 송연희라는 사람과 통화하는 거

분명 다시 만난다고.”

 

“연희와 전화한 적 없습니다.

휴대폰 번호도 모릅니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재신은 멍해졌다

그럼 지금까지 뭐였지

그가 내게 보여준 행동은 뭐지

그토록 차가웠던 행동들은 뭐야.

 

“당신. 분명 달랐어요.

차가웠잖아.

일본에서. 그날 이후 달라졌잖아.”

 

“제가. 제가 짐승 같았으니까요.

공주님 얼굴을 도저히 볼 수 없었으니까요.

그날 기억하십니까.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는 계십니까?”

 

그 말에 재신이 시선을 피했다.

그런 재신이 시경은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럼, 왜 피했어요? 나?”

 

“전, 공주님....전,

그날 공주님을 가지지 않은 걸 두고두고 후회했습니다.”

 

시경의 그 말에 재신은 그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날, 어쩌면 욕망으로 들떴을 자신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다.

 

“아십니까?

차라리 그날 제가 욕망에 미쳐버렸더라면 차라리 나았을 겁니다.

차라리 남자의 욕망이라고 정신을 못 차렸으면 좋았을 거라고 그렇게 두고두고 후회했습니다.”

 

“은시경.....”

 

“전 전 공주님. 그 미칠 듯한 순간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십니까.

지금 당신을 가지면 어쩌면 당신도 돌이키지 못 할지도 모른다고

당신도 어쩔 수없이 나를 선택할지 모른다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발목을 잡아 내 곁에 주저앉힐 생각만 했습니다.

어떻게든 당신을 빼앗기지 않으려

어떻게든 당신을 내 여자로 만들어

당신은 내 여자라고 그렇게 내게서 도망가지 못하게,

다른 남자에게 떠나시지 못하게 그렇게 족쇄를 걸고 싶었습니다.”

 

그랬던 걸까....

나는...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시경은 굳게 닫힌 그녀의 입술을 두려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말이 없는 그녀의 입술은.....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녀가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미칠 것만 같았다.

 

“지금도 후회합니다. 공주님.”

 

재신의 눈이 불빛에 흔들렸다.

 

“그 날.....당신을...제 여자로 만들었어야 했다고.....

지금, 이 순간도.....후회합니다, 전....”

 

한참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더 해야 할지, 어떻게 자신의 진심을 전해야 할지 그도 그녀도 알지 못했다.

시경은 1분 1초가 아까웠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녀를 놓아주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이토록 애타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아름다웠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오늘밤도 그녀의 눈은 맑고 투명하게 빛났고, 그녀의 피부는 마치 비칠 것처럼 투명했고,

그녀의 입술은.....하아......

가지지 못하면 죽을 것처럼 붉고 촉촉했다.

그녀의 팔을 잡고 있는 그의 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그러지 않으면, 그녀의 입술을 또다시 범해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입술만 아니라 그 이상도 범할지도 몰랐다.

자신은 짐승이다.

지독하리만큼, 욕망에 들끓는 수컷이었다.

그러니....나는 위험하다.

아름다운 그녀의 앞에서, 나는.....지독하게 위험한 짐승일 뿐이다.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는 그녀의 앞에서 시경은 심장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또한 그녀의 아름다운 입술이 굳게 닫혀 있어서,

그 모든 것들이 심장을 쥐어짜대고 있었다.

 

“아직도....이해가...안 돼......”

 

이윽고 그녀의 목소리가 맑게 울렸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시경의 눈이 두려운 듯 흔들렸다.

 

“여전히 이해가 안 돼요.

당신의 말대로라면, 왜....떠나겠다는 거죠?”

 

“하아...공주님....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당신은....내게.....물어보지 않았잖아요.”

 

“공주님은!!! 분명 제게 공주님과 근위대장으로 돌아가자고 하셨습니다.”

 

“그건........”

 

분명 모든 게 꼬여 있었다.

송연희라는 여자가 통화하는 걸 듣고, 재신 스스로도 오해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앉아 있었던 그 자리에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둘 다.......두려워하고만 있었다.

 

“그거 알아요? 은시경 씨.....

은시경 씨, 지금도 당신은...물어보지 않아요. 내게......”

 

그랬다. 시경 자신도 알고 있었다.

마치 고해성사처럼, 짐승 같은 자신의 욕망을, 그러나 그 이상으로 넘쳐서 사람을 미치도록 만드는 자신의 사랑을,

그녀의 앞에 토해내듯, 절규하듯 쏟아놓고 있었지만,

그는 정작 그녀에게 묻지 못했다.

겁이 났다.

끝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

그녀의 입에서 나올 그 마지막 단어가...무서웠다.

물어야 한다는 건.....알고 있다.

그러나.....두려웠다.

카페에서처럼...그녀가 그래도 아닌 것 같다고, 그저 필요한 순간이었다고 한다면,

자신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지금 이 순간도 알 수가 없었다.

 

견딜 수 없어서 떠난다고 했다.

시경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면, 자신은 견디지 못할 거라는 것을.......

어쩌면......총을 들이댈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런 위험한 자신을 그녀에게서 멀리 떼내어야 한다는...절박함 외에는 자신에게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당신은....여전히...나를 몰라......”

 

재신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뜻밖의 말이었다.

 

“공주님......”

 

재신의 눈이 시경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맑은 눈이 오롯이 시경을 담고 있었다.

시경의 심장이 점점 세차게 뛰어대기 시작했다.

꾹꾹 눌러두었던 기대가......자꾸만 올라오려고 했다.

그녀의 팔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도, 당신도 바보 같아.......”

 

시경은 목울대가 칼칼했다.

자꾸 저 아래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나.....그렇게 분방해 보였어요? 은시경 씨?”

 

“공....주님....그게..아니라.......”

 

“나....끊임없이 말했는데.......느리지만 그래도 당신에게 다가간다고.....

나 노력한다고...그렇게 말했는데........

그래서 나, 정말 노력했는데.......

당신에게는 안 보였구나.....”

 

“아..아닙니다...공주님....전.......”

 

“마음에도 없는 사람에게 이렇게 한 달 간 만나자고 할 것 같아요? 내가?

나, 그런 여자.....아니에요.

내가....왜 그렇게...죽자사자 재활하는지, 정말......몰랐어요?”

 

시경의 목이 메어왔다.

무언가가 툭...하고 끊어지고 있었다.

지금....공주님께서는 자신에게 다가오고 계셨다.

두려워 묻지 못했던 공주님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두려워 도망치고 있었다.

또다시...그렇게 도망치려고만 했다.

 

“웃기지......나......당신 때문에........제대로 걷고 싶었어.

한 달이.....다가오면 올수록....더 걷고 싶었어.

기억도 찾고 싶었어.

당신과의 추억.....내가 사랑했던 기억......되찾아 오고 싶었어.

내가 왜.....다시 기억을 만들어가자고 한 줄 알아요?

그거.....당신 때문이 아니었어요.

난...마치.....당신의 기억 속의 나와......경쟁하는 것 같았어.

어쩌면....그 기억 속의 나는.....멀쩡한 다리를 가지고, 멀쩡하게 살았겠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겁이 났어.

정말로 빛났던 나에 비해....지금의 나는.....초라할까봐.....자꾸만 겁이 났어.”

 

“하아...아닙니다. 절대....공주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애타하는 시경을 바라보는 재신의 눈에서 맑은 물방울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그런데 말이에요. 은시경 씨.....

여전히 기억도 돌아오지 않고, 나, 여전히 제대로 걷지 못하는데....

그런데......나.......당신, 못 놓겠어.”

 

“공...주...님!!”

 

“좋아해요....은시경 씨......”

 

또 한 방울,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말을 듣고 있는 시경의 눈도 젖어가고 있었다.

 

“기억도 없고, 여전히 이렇게 제대로 걷지도 못해도,

나, 당신이 좋아요.

고지식하고 답답한 당신을......

내가 좋아한다구요......

그러니까....가지..마.......

날.....떠나지 마......은...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의 입술이 그대로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부드럽고 촉촉하고 뜨거운 그녀의 입술 안으로 그의 입술이 몰려왔다.

그 입술 사이로 그의 터져나오는 고백이 섞여들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하아......나의....아름다운 공주님......”

 

입술과 입술 사이로 그의 고백이 자꾸만 흘러나와 재신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정신없이 밀려오는 그의 입술을 받으며, 아니 그의 심장의 고백을 받으며, 재신의 눈에서는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기억에 없다고, 어찌 그를 모른다 할 수 있을까.....

세월을 돌아 돌아, 기억을 넘어서서,

그는.....아름다운...나의...남자.....였다.

 

 

 

 

 

어찌 당신을 모른다 하겠습니까 - 최영복

 

 

단 하루라도 당신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었거늘

흐르는 세월을 잡지 못했다 한들

내 어찌 그 세월에

당신을 보낼 수 있었겠습니까

수천 겹의 껍질 속에 갇혀

수천 년의 세월을 보지 못했다 한들

내 당신을 모른다 하겠습니까.

그 세월 동안 당신은 나에게 빛이고 길이기에

그런 당신을 떠나서 단

한걸음이라도 뗄 수가 있었겠습니까.

얕은 가슴에 너무 많은 것을 남겨 두었기에

그래서 깊게 패인 상처여서

스물스물 새어나오는 못쓸

그리움의 대상으로 낙인찍혀 가지만

운명의 틀 안에서 뿌리내리고 맺어

달콤한 열매의 유혹으로 존재하므로

뽑고 잘라내려 해도 다시 자라나는 당신을

어찌 하겠습니까

 

 

 

 

 

 

 

<윤찡갤 시경재신횽 짤...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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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말이 필요가 없는,

은시경이지요.

30회의 결론은 이런 걸로.

그래서 님들께 여쭈어보았다지요.

님들께서 생각하시는 은시경은 어떤 존재인지.......

30회가 왜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는지는 이유가 있었다지요.

은시경이라면.....은시경이니까.....

그걸로 답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은시경의 시선으로 보는 것은 32회에서 공개될 듯합니다.

사실 31회의 끝은 은시경이 밖에 서 있는 장면까지였습니다.

놀라서 흔들리는 재신을 잡는 장면까지...

그 뒤의 폭풍 고백들은 사실은 32회의 것이었으나,

이대로라면 도저히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기도 어렵고 속만 터지실 듯해서,

32회의 앞 부분까지 끌어넣었습니다.

그래서 32회 큰일났네요. 에효.....

 

여튼 31회로 3부가 끝이 났습니다.

32회부터 이제 4부가 시작되네요.

뭐 사실 여기서 끝내버려...라는 생각도 마구와구 올라오는 것도 사실이라는....ㅠㅠ

 

31회는 꽤 오래 준비했던 건데, 그래도 보름간 가열차게 써왔습니다.

중요한 대사나 공주님의 연설은 이미 적혀 있었지만,

그래도 계속 보완하며 넣다 보니 시간이 꽤 걸렸네요.

게다가 오늘은 41장이나 되어 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그래도 꼭 크리스마스 선물로 올려드리고 싶어서 열심히 달렸는데,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습니다.

기대에 못 미치실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제게는 31회가 8회만큼이나 중요한 회입니다.

8회의 고백이후, 수많은 시간이 지난 후 드디어 나온 고백이라......

제게는..참...뭉클한 회이기도 합니다.

또한 31회는 굉장히 많은 행간들과 이야기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실패는 시도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제 입에서 늘....선언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공주님의 강연을 적으며, 저 역시 몇 번이나 다짐하게 됩니다.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겠다고,

나는 다음 실패를 준비하겠다고.......

그래서 0.1%로 99.9%를 이기겠다고.....

그리하여 언젠가 저 하늘을 감동시키겠다고.....

그런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성탄절 되시길.......

올 한 해, 주신 사랑, 정말 감사했습니다.

내년에도 여전히 이렇게 연을 이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시절이 하수상한 이 때에 평안을 여러분께 전합니다.

평안하소서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