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신상플)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32. 기적
<silver님께서 주신 당기못 대문짤~~ 감솨감솨합니다.^^>
<디씨 그러하다 횽이 주신 당기못 대문짤~~저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__)>
* 배경음악을 꼭 틀어놓고 읽어주시길....
1. 슬픔도 지나고 나면 / 이문세
2. 가슴이 뛴다 / 이은미
3. 그 중에 그대를 만나 / 이선희
4. 함께 있는 우리를 보고 싶다 / 이승환
1. 슬픔도 지나고 나면 / 이문세
어디쯤 와있는 걸까 가던 길 뒤돌아본다 저 멀리 두고 온 기억들이 나의 가슴에 말을 걸어온다 그토록 아파하고도 마음이 서성이는 건 슬픔도 지나고 나면 봄볕 꽃망울 같은 추억이 되기에
서글퍼도 그대가 있어 눈부신 시간을 살았지
오래전 내 그리움에게 가만히 안부를 묻는다.
서러워도 그대가 있어 눈부신 시간을 살았지
오래전 내 그리움에게 가만히 안부를 묻는다.
다시 내게 불어온 바람 잘 지냈다는 대답이려나
흐느끼는 내 어깨 위에 한참을 머물다 간다.
또다시 내 곁에 와줄까.. 봄처럼 찬란한 그 시절
가난한 내 마음속에도 가득히 머물러주기를
어디쯤 와있는 걸까 가던 길 뒤돌아본다
저 멀리 두고 온 기억들이 나의 가슴에 말을 걸어온다
그토록 잊고 싶어도 마음이 서성이는 건
슬픔도 지나고 나면 봄볕 꽃망울 같은 추억이 되기에
그대를 만나 따뜻했노라고
그대가 있어 참 좋았노라고
2. 가슴이 뛴다 / 이은미
가혹하다 내게 내린 현실이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슬퍼하다 흔들리다 죽을 만큼 니가
보고 싶었다
다시 봄이 내게 온다
내 가슴에 비가 내린다
흔한 사랑얘기에 마음이 떨린다
이제는 흔적도 없을 줄 알았었는데
다시 세상을 향해 다시 너만을 위해
가슴이 내 가슴이 뛴다
다시 봄이 내게 온다
내 가슴에 비가 내린다
흔한 사랑얘기에 마음이 떨린다
이제는 흔적도 없을 줄 알았었는데
다시 세상을 향해 다시 너만을 위해
가슴이 내 가슴이 뛴다
잃어버린 것들이 이제서야 아프다
목이 메어온다
잠시 잊고 있었던 다짐을 꺼낸다
이렇게 우리의 상처는 아물어간다
다시 꿈틀거리는 사랑이 되었다
가슴이 내 가슴이 뛴다
뛴다
3. 그 중에 그대를 만나 / 이선희
그렇게 대단한 운명까진
바란적 없다 생각했는데
그대 하나 떠나간 내 하룬 이제
운명이 아님 채울 수 없소
별처럼 수 많은 사람들 그 중에 그대를 만나
꿈을 꾸듯 서롤 알아보고
주는 것 만으로 벅찼던 내가 또 사랑을 받고
그 모든건 기적이었음을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고
자신한 내가 어제같은데
그대라는 인연을 놓지 못하는
내 모습, 어린아이가 됐소
별처럼 수 많은 사람들 그 중에 그대를 만나
꿈을 꾸듯 서롤 알아보고
주는 것 만으로 벅찼던 내가 또 사랑을 받고
그 모든건 기적이었음을
나를 꽃처럼 불러주던 그대 입술에 핀 내 이름
이제 수많은 이름들 그 중에 하나되고
오~ 그대의 이유였던 나의 모든 것도 그저 그렇게
별처럼 수 많은 사람들 그 중에 서로를 만나
사랑하고 다시 멀어지고
억겁의 시간이 지나도 어쩌면 또다시 만나
우리 사랑 운명이었다면
내가 너의 기적이었다면
4. 함께 있는 우리를 보고 싶다 / 이승환
우리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대와 함께 있는 우리를 보고 싶다
별이 속삭이는 소리로 내게 오는 그대여
꽃이 닿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그대
매일 만나도 다 못 만나는 그대
오직 한번 만나도 다 만나는 그대
우리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대와 함께 있는 우리를 보고 싶다
그대에게 가는 길 아파도 보이지 않아도
그래도 그대가 길이다 그대가 길이다
아 그대여 희망이여 나의 길이여
그대여 희망이여 내 사랑이여
우리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대와 함께 있는 우리를 보고 싶다
아 그대여 희망이여 나의 길이여
그대여 희망이여 내 사랑이여
그대여 희망이여 내 사랑이여 그대여 운명이여
1.
“무슨 소리야? 그걸 알려주면 안 되지.
누군데?”
염동하가 버럭 대자, 이제 갓 임관한 이소위는 목소리가 쫄아 들고 있었다.
“아...죄송합니다. 중대장님.
근위대장님 예전 후배라고........”
“기밀사항이잖아.
근위대장님 혼자 계신 것도 아니고.....
지금 공주님까지 계시는데......”
“무슨 소리야?”
짜증이 난 듯한 염동하의 목소리 뒤로,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엇! 전하!!!”
재하는 일찍 업무를 정리하고 잠깐 근위대원 상황실에 들렸다.
오늘은 가족들에게로 일찍 복귀하겠으니 신경 쓰지 말고 쉬라는 말을 전하러 들렀다가
염동하의 격앙된 목소리를 듣고, 호기심이 발동되는 중이었다.
“무슨 소리냐니까? 여자야?”
“예? 예. 전하.”
이 소위는 전화를 든 채, 차렷 자세로 재하에게 대답했다.
그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준 재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예? 무슨....?”
“전화기 내놓으라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 소위에게서 전화를 받자마자, 재하는 짐짓 근엄한 척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예? 아.....은시경 근위대장님 연락처를 알고 싶어서 전화 드렸습니다만........
지금 전화 받으시는 분은 누구신지........>
수화기 너머 여자의 목소리는 맑았다.
목소리만으로는 꽤 세련된 스타일이 아닐까, 재하는 짐작하고 있었다.
“은시경, 후배라고 했습니까?”
<예....그런데요......>
“그런데 왜 갑자기 오늘 연락을 한 겁니까?”
<예? 아...그게.......제가 사실 지금 제주도에 취재차 왔거든요.
그런데 기사에 보니, 공주님께서 강연을 하신다고 하셔서, 시경 선배, 아...그러니까 근위대장님도 오신다고 들어서요.
오셨으면, 잠시 만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연락드렸어요.
그런데.....아무래도...공주님 공무 중이시니....안 되실 것 같네요.
그럼...다음에.....>
“메모할 종이는 있습니까?”
<예? 아, 예.>
“지금, 왕실에서는 통화내역이 녹음되고 있는 중이니, 비밀은 꼭 지키셔야 합니다.
추후에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아, 물론이죠. 그건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럼, 오늘 5시 30분, XX호텔 1층 로비로 가보시죠.
음......아무래도 15분부터 로비에서 기다리면 확실할 겁니다.”
<연락처는.......어떻게......?>
“뭐, 은시경 연락처는 이 소위가 알려줄 겁니다.
그런데 나라면 연락하지 않고 기다릴 겁니다.”
<예?>
“은시경.....후배였다면, 알지 않습니까? 공무 중에 은시경이 어떨지.......”
<아, 그렇죠. 시경 선배, 공무 중에 사적인 만남을 가질 사람이 아니죠.>
“그럼 그렇게 알고.....이만.....”
<아, 저 감사합니다. 그런데...누구신지......>
그러나 재하는 바로 수화기를 이 소위에게 넘겨주고는 흥미롭다는 듯 염동하에게 눈짓을 했다.
“큭큭....은시경....이 놈...여자가 있었다, 이건가?
너, 뭐 들은 거 없어?”
“예? 글쎄요. 전하. 제가 알기로는......근위대장님...모쏠인 걸로 아는데 말입니다.”
염동하는 당최 믿기지 않는다는 투였다.
그 목석 같은 근위대장에게 후배라며 전화 온 여자가 있다는 것이 못내 믿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재하는 알 수 없는 미소만 짓고 있었다.
“전하....그런데 말입니다.
공주님도 같이 계시는데, 호텔까지 알려주셔도....괜찮겠습니까?”
“안 괜찮으면?”
“예?”
“그거 아냐, 염동하?
작전에서 말이야. 최고의 수비는......공격이야.
허를 찌르는 공격.”
염동하는 전하의 심중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공격이라는 건지.....
근위대장님, 안 그래도 요즘 다 죽어가시는데, 공주님 오해라도 하시면......에효......
절로 한숨이 나온다.
“이재신이라면....이렇게 해야 돼.
그렇게 안 되면, 그것 역시 운명인 거지.
안 되면 더 좋고.......”
뭐가 재미있는 것인지, 재하는 낄낄 대며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그런 재하를 뒤에서 바라보던 염동하는 알 수 없었지만, 웃음소리와는 달리, 재하의 미간은 심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나쁜 새끼!!!!!!
결국에는 툭하고.........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내가 어떻게.....살려냈는데......떠나?
이 새끼......오면, 내가 반드시 반 죽여놓는다!!
2
그랬다.
그 날, 그 자리에서,
전하께서 공주님을 보필하라 명하셨던 그 날,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주저했다.
그러나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최악을.....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끝을 생각할 때마다 목이 메어오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아도,
나는 늘 그렇게 살아왔다.
최악을....내가 생각할 수 있는 그 최악을 생각해야만 했다.
그렇게 길들여졌고, 그렇게 훈련받았다.
그것이 내 삶이었다.
공주님께서는 그런 나에게 말씀하셨었다.
왜 그렇게 어두운 부분만, 최악의 상황만 생각하느냐고.......
그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살아가는지,
어떤 일이든지, 나는 그 최악을 생각하며, 그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려놓고 있다는 것을.......
변명은 이것이었다.
그렇게 최악을 준비해야, 덜 다칠 수 있다고.....
그래야, 덜 실망하게 된다고.....
하아......
그러나 그건 이론일 뿐이었다.
상처는......준비한다고......줄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더 강력하게 한 방을 날려버리고는 한다.
지금처럼.......
“무슨 말이야? 분위기가 왜 그래?”
전하께서도 뭔가 아는 눈치이신 듯했다.
그러나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내 입으로 인정을 하고 나면, 내가 예상한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될까봐, 두렵다.
“야!! 너 왜 그래? 겁나게?
너.......이상한....생각하는 거 아니지?”
전하의 말씀에도 고개를 숙인 채, 주먹만 꽉 쥐고 있을 뿐이었다.
말해야 한다. 내 입으로 전해야 한다.
그러나....그래도....그렇다고 해도........하아.......
“야!!!! 은시경!!!!!!”
“전하........잠시........군으로......돌아가겠습니다.”
전하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채근하시는 부름에 겨우 입을 뗐을 뿐이다.
정적........
초침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세상은 고요했다.
마치 심장이 부서지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 내 이마에 맺혔던 땀이 흘러내리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
온 방안이 긴장으로 가득 찼다.
그저 나는 주먹만 꽉 쥐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 것도 붙들 것이 없는 내가 잡을 수 있는 것은 주먹뿐이라는 듯이, 내 빈 손을 그저 움켜쥐고 있었다.
하아............
머리까지 곤두서게 하는 이 정적을 깬 것은 전하의 한숨소리였다.
“이게.......니......결론이야?”
“.........예.....전하........”
“좋아. 그렇다, 치자.
너 잠시라 그랬지? 잠시가 어느 정돈데? 구체적으로 말해 봐.”
그 말씀에 고개를 들었다가, 전하의 준엄한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
마치 선왕 전하의 그것과도 같이 뒷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날카로운, 아니 내 심장 안까지 도려내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그게.......”
“니가 계획했으니까, 구체적으로 날짜도 있겠지.
정확하게 말해 봐.
언제? 재신이가 결혼할 때까지?
아니면, 재신이가 애라도 낳을 때까지?
이건 어때?
재신이가 이혼이라도 하고 나면?”
“저...전하!!!!”
대못......
심장에 대못을 쳐대는.......
피를 토할 듯한, 그 고통은.......
차라리 죽는 게 나으리라.....
제발 죽여 달라....
누군가에게 매달리기라도 하고 싶은......
생의 바닥.......
절벽 끝에 선.......칼날......이었다.
3
일본에서 돌아오신 후,
아니 그 날 밤 이후,
공주님은.......나를 보려고도 하지 않으셨다.
아니다. 처음은.....내가 도저히 공주님의 눈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어떻게 감히, 공주님 앞에 나선단 말인가.
그런 짐승 같은 짓까지 해놓고......
그것도 의식이 없으셨던 공주님 앞에서, 내 더러운 욕망을, 짐승 같은 욕망을 드러내놓고....
어떻게 감히.......그분을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사실은 두려웠다.
공주님의 눈에서 보게 될 경멸의 시선이......
더럽다 여기실까, 무섭다 여기실까......
나라는 놈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하실까......
그런 생각들로, 죽을 것만 같았다.
은시경! 정말이지 미쳤구나!!!
한 달......
생애 기적 같은 그 한 달......
그것은 신의 선물이었다.
그러나....그래도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아무리 내게는 내 평생을 가져갈 기적적인 시간이라 해도, 공주님께는 시험의 시간일 뿐이었다.
착각하면 안 된다고, 내 마음 내키는 대로, 내 욕심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그토록 다짐해놓고서도,
나는.......어쩔 수 없는......남자였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저 그런 남자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남자가 아니라,
공주님을 사랑한......은시경이라는 한 남자였다.
그래서 그녀 앞에서 제어가 되지 않았다.
아니다.....이것도 변명이다.
몇 번이나 되뇌어 보아도, 나는......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가지고 싶었다.
온전히 그녀를 소유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강렬했던 유혹......
그것은....그녀의 선택조차 빼앗고 싶었던, 돌이키지 못하게 하고 싶었던.....
나의 추악한 욕망......
다른 남자에게 가지 못하도록, 영원히 올무를 채우고 싶었던......
나의 거지 같은, 아니, 짐승보다 못한.....욕망.....
그것이었다.
공주님도 아셨겠지.
그러니 나를 바라보려고도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 일이 있고나서도, 공주님은 공주님다우셨다.
아무렇지 않으신, 너무나 고고하신 공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고통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지으시는 미소가, 나를 절망으로 빠뜨렸다.
그 미소에서 나는 제외되었다.
나라는 인간은......그녀의 사정권 안에 존재하지 못했다.
비참......했다......
내 눈은, 내 가슴은, 내 심장은, 미친 듯이 그녀를 쫓아다니지만, 그녀를 감히 잡을 수는 없었다.
감히 그 눈과 마주칠 수는 없었다.
나는 마치 죄인처럼, 그녀의 뒤에서, 가슴을 치며,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그림자처럼......어둡게......그녀의 등 뒤로 내려앉았다.
그렇게 검은 그림자 속에 켜켜이 내 감정을 묻었다.
하루가......백년 같았고, 또 하루가 일초와 같았다.
일본에서 돌아와 며칠이 되지 않았을 때, 공주님께서는 결국 초인적인 일정을 소화하시다가 돌아오는 길에 실신하시고 말았다.
내가 따라갔어야 했는데......
후회가 밀려오는 순간, 내 발은 그녀를 향해 뛰고 있었다.
“공...공주님은...헉...헉......”
숨도 고르지 못한 채로, 그 밤, 그녀의 방까지 뛰어갔다.
그런 나를 궁중실장님은 알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셨다.
그러나 내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남들의 시선 따윈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지금......진정제를 맞으시고, 주무십니다.”
“괜찮으신.....겁니까?”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아무리 누르려고 해도,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지금은....괜찮아지셨지만........”
궁중실장님께서 말끝을 흐리고 계셨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무슨....다른....문제라도.......”
“왕실주치의 말씀으로는......무리한 일정도 문제지만,
공주님께서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계신다고 합니다.
정신적인 쇼크가 있으셨던 것 같다고도 하십니다.
그게 결국엔 탈을 일으키신 거라고......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한다고....하셨습니다.
정신적으로 쇼크를 주는 스트레스는 절대 금물입니다.”
그 말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답은 하나였다.
나 때문이다.
주먹을 꽉 쥔 채, 이윽고 신음같이 말을 뱉었다.
“잠시만.......들어가서 뵈어도 되겠습니까?”
궁중실장님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문을 열어주었다.
“정말......잠시만......이셔야 합니다. 보는 눈도 많으니.......”
그래....보는 눈이 많다.
나도 안다.
보는 눈.......
내 사랑 앞에 늘 놓여야 하는 단어, ‘감히’.......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그 ‘감히’를 나는 내 감정에 이기지 못하고, 또다시 한 발 내딛고 말았다.
링거를 맞으시며, 눈을 감고 계신......그녀는......또다시 내 심장을 철렁 내려앉게 한다.
예전...아주 오래 전.......그 날처럼,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 곁에 앉았다.
그때처럼, 자꾸만......묵직한 무언가가, 내 울대 너머로 올라올 것만 같다.
그 날......오랜....날에......
그녀의 수척해진 볼도, 만지지 못한 채, 떨리는 손을 거두어야만 했다.
오랜 후, 나는 기시감처럼, 그 날을 느끼고 있다.
여전히.....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나는......
떨리는 손을 들어, 그녀에게 향하지만, 또다시 거둘 수밖에 없었다.
감히........
이번에도.....
감히였다.
너무 큰 사랑은.......
너무 앞서 달려나간 사랑은......
그 감정만으로도, 칼이 되고, 사랑하는 이를 다치게 하는 무기가 되고 만다.
아무리 아니라, 사랑이라 변명해 보려고 해도,
그 사랑에 맞추어 걷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 되고 만다.
나는........이제야, 서른 해를 넘게 살고서야, 이제야.......그 단순한 진리를 깨우쳤다.
모든 진리는 단순하다.
간결하고 명쾌하다.
그래서......그 진리대로 사는 삶은 어렵고 두려운 일이다.
진리는 단순하나, 삶은 복잡하므로.......
진리는 명쾌하나, 삶은 안개와 같으므로......
그러니 진리가 삶이 되는 순간, 두렵고 떨릴 수밖에 없다.
가느다란 그녀의 손을 겨우 잡아 불순한 내 입술을 그 위에 놓았다.
자꾸만 터져 나오려는 내 가슴을 움켜쥐고, 내 심장의 소리를 눌러 넣으며, 그녀를 내 영혼 안으로 담아왔다.
그러나 자꾸만 차오르는 뜨거움은.....못내 입 밖으로 마음을 밀어낸다.
공주님.....하아.....
들으실 수도 없는 공주님 앞에, 나는 목놓아, 내 마음을 드러내었다.
제가......당신을........사랑하면.......안 되는 겁니까.........
당신을 사랑하면.......감히....인겁니까.......
그래도......사랑하면.....안 됩니까.......
그녀의 손등이.....젖어들어간다.
그래도.....놓을 수가 없다......
당신이라는.......가혹한.......내 사랑 앞에서......
나는 내 영혼을.....저 바닥까지....내려놓는다......
4
정확했다.
5시 반.
로열패밀리의 행렬이 호텔로 들어왔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자신의 첫사랑도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변함이 없지?
더 단단해져서, 더 남자다운........
카페에서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는 그의 오른손 위로 파랗게 핏줄이 도드라진다.
그래.....저 모습이 좋았다.
“오랜만이죠? 우리?”
“내가 임관하면서 못 본 것 같은데.......
잘....지냈지?”
시경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동동 떠 있는 연희의 목소리와는 대조적이었다.
“은시경 선배! 어떻게 연락 한 번을 안 해요?”
그 말에 시경이 멈칫한다.
“아....미안. 임관하면서부터 정신이 없었어.
소대도 맡고, 작전 투입도 되고.......”
“그거 다 변명인 거 알죠?”
서운한 듯 묻는 연희를 보고서도 시경은 별 말이 없었다.
그는 자신과 마주 앉아 있지만, 영혼은 마치 다른 곳에 두고 온 듯했다.
연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언젠가의 그처럼.....세월이 지나도 그는 변한 게 없었다.
“나, 정말 많이 울어서.....실신까지 했었어요.”
“뭐?”
그제야 뭔가 반응다운 반응이 오고 있었다.
“은시경 선배 때문에, 나 병원에 실려가기까지 했다고요.”
여전히 그는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말을 해야 아는 건, 여전하네요.
시경 선배......2년 전...아니지, 이제 2년도 더 지난 그 때 말이에요.”
그 말을 듣고서야 시경의 눈에서 미안한 듯한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그 땐....어쩔 수가 없었어.
살아날 수 있다는 확률도 없었고......전하께서 나를 살리신 거야.”
“그렇겠죠. 유명해요. 은시경 선배.
전하의 충신!”
“아니야, 그런 건.......”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소령 주제에 근위대장까지 바로 꽂혔는데,
전하 대신 목숨까지 내놨는데, 전하께서 뭔들 못해 주시겠어요?”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근위대장은 임시직이야.
전임 근위대장님께서 건강상 이유로 사임하시면서 공석이 됐거든.
하실 분을 정하시기 전에, 임시로 내가 빈 자리를 메우는 것뿐이야.”
흐음.......
여전하다.
저 몸에 밴, 겸손인지, 대쪽인지...알 수 없는 저 성질....
저게 선배의 매력이기도 했다.
“근데, 어쨌든 근위대장인 건 맞잖아요.
그런데 왜 근위대장이 전하가 아니라 공주님을 호위해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었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으니까.
옛날로 치면 근위대장은 전하의 내금위장 같은 직위니까, 반드시 전하의 곁에 있어야 하는데.....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나 연희는 내심 뭔가 찝찝하기도 했었다.
저번.......기사 때문이기도 했다.
제주 테러 사건 때, 대서특필되었던 그 사진......
쓰러진 공주님을 안고 나오던....근위대원......
그 처절하던 표정을.......잊을 수가 없었다.
그 표정을 지은 사람이 은시경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연희가 아는 한, 은시경이라는 남자는, 감정이라는 것도, 표정이라는 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남자가 또다시 낯선 표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신이 보지 못했던, 볼 수 없었던 표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외면했다.
못 본 걸로 하자.......
“선배, 나.....2년 간.....유학 다녀왔어요.”
“아....그랬구나.”
“여기 있으면, 죽을 것 같아서요.
이제 좀......살 것 같다고......이젠 아무 생각 없이 살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또 오라는 곳도 있고 해서
돌아왔는데......
선배도.......돌아왔더군요.”
“.......................”
“와서......바로 연락할까 하다가.......저도 좀...자리 잡고.......그러고 나서 연락해야지...했었어요.
사실....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였기도 했어요.”
“이곳은.....어떻게.....안 거야?”
“왕실로 전화했었어요.”
“뭐?”
“그런데....누가 알려주더라고요.
아주....친절히......
이곳으로 가보라고.......”
시경의 표정이 눈에 띠도록 난감해 하고 있었다.
“전하.....맞죠? 나한테 알려주신 분......”
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위대 기밀 사항이다.
이 사항을 얘기한 거라면, 전하 말고는 없다.
그 때 카페 안 큰 프로젝터 스크린에서 공주님 연설이 뜨고 있었다.
음악방송이나 영화를 틀어주다, 뉴스 채널에 걸린 모양인데 공주님이 나오시자, 주인이 소리까지 키워서 보고 있었다.
“어, 공주님이네요. 오늘 강연 아니에요?
와, YOO 뉴스 빠르네.”
공주님의 연설 마지막 부분인 듯했다.
<실패는 특권입니다.
도전하고 노력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특권.
그러니...나는 그 특권을 내 평생을 두고 누릴 것입니다.
예. 전 실패하겠습니다.
오늘 노력해서 실패하면, 내일 또 노력하겠습니다.
내일 노력해서 실패하면, 모레, 그리고 그 다음날,
그렇게 저는 매일매일 실패하겠습니다.
그래서 내 평생, 내가 눈 감는 마지막 날까지 그리 한다고 해도,
저는 그 마지막 날까지 실패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실패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오직 시도한 자만이, 몸부림치며 노력한 자만이,
홀로 피눈물을 흘리며 나아간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바로 실패니까요.
그러니 저는 이 특권을 제 죽는 날까지 누릴까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저를 보며 그 실패를 함께 누리게 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래서 어느 날,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다면,
실패의 특권이 모여, 실패의 줄기들이 모여,
그렇게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다면,
예. 저는 계속 실패해나가겠습니다.
이 특권을 평생 누리겠습니다.
청춘이여! 실패하라!!
그리고 시도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이 놀라운 특권을 누려라!!!
여전히 청춘을 살고 있는. 스물여덟 해를 살아온, 그리고 오늘도 실패하고 있는 한 여자가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축복입니다.>
연희는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 듯 공주님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카페 안에 있던 몇 안 되는 손님들도 다들 연설을 보고 있었다.
공주님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그런 엄청난 카리스마가 있었다.
저 여린 몸으로, 어떻게 저런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지, 잠시 잠깐 들은 연설 내용만으로도,
뭔가 속에서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정말....우리....대한민국 공주님...참.....자랑스럽죠?
우리 공주님으로 있어주셔서.....정말 감사하달까요?
이런 나라에 태어나주셔서....막...고맙고..그런..감정......?”
연희는 연설을 바라보며 말을 하다가 마지막 부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고개를 돌려 시경을 바라보는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도 잊고 말았다.
그를 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여자 중에서는, 자신만큼 그를 아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만 포기하지 않으면, 이 남자도 어쩌면 자신을 선택하리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돌아왔다는 것을 안 순간, 이번에는 절대 포기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지금.......자신의 앞에는....한 낯선 남자가 앉아 있었다.
연희 자신과 무뚝뚝한 이 남자, 단 둘이 있다고 생각한 지금 이 자리에, 세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지금 떠올리고,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이......이 자리에 함께 있었다.
그의 시선은.....오로지 스크린만을 향하고 있었다.
자신의 철벽 같던 마음의 빗장을 다 연 모습으로, 어쩌면 단 한 번도 사람에게 보여주지 않았을 법한 그런 표정으로,
자신의 온 감정을 그대로 다 드러내며,
그렇게 스크린을, 아니 스크린 안에 비추어지는, 한 사람을 온 영혼을 다해 바라보고 있었다.
연희도, 그런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그가 그렇게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그렇게 자신만을 바라봐주기를.....
바라고 또 바랐던 시간도 있었다.
그러나 이 남자는 그럴 수 없는 남자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목석과도 같은, 대나무와도 같은, 선비 같은 남자라 체념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그토록 바라던 모습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희는 피식.....웃음을 지었다.
“저, 여기 냉수 한 잔만 가져다 주세요.”
연희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시경이 멋쩍은 듯 고개를 돌렸다.
“무슨....얘기까지 했더라........”
그의 말에 연희는 또 웃었다.
그러고는 자신에게 가져다 준, 얼음물을 벌컥 벌컥 단숨에 마셔버렸다.
“이걸로는 안 되겠는데.......”
“뭐?”
연희는 종업원을 불러, 끝내 칵테일 하나를 시켜 그조차 원샷을 하고 말았다.
시경은 황당해 하면서도, 그런 연희를 아무 말 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하고 싶은 말....있는 거 아니야?”
“끝!”
“무슨 소리야?”
“끝이라고요. 오늘!
드디어 쫑!! 내는 거라고요.”
여전히 시경은 무슨 소린지 몰라 황당해 하고 있었다.
“내 참......병원에 실려간 게 아깝네.
이태리에 그렇게 괜찮은 놈들 많았는데, 내가 미쳤지.
어휴......거기서 그렇게 궁상이나 떨고.......”
“연희야......”
“자그만치 6년이야. 6년이라구요.”
시경의 눈빛이 당황한 듯 흔들렸다.
무슨 말인지, 이제야 조금은 안 듯, 그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여기요? 여기 아까 칵테일 한 잔 더요!”
“그만 해. 낮부터 취하겠다.”
“낮, 아니거든요? 뭐, 저녁 대신 술로 배 채우죠 뭐.”
뭔가 불만인 듯 땡깡을 피우는 듯한 연희가 시경은 불편하면서도 미안하기도 했다.
분명 자신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나 무어라 아는 척을 할 수도 없었다.
기어이 연희는 한 잔을 더 원샷 하고 말았다.
시경은 말리지도 못하고, 어쩌지도 못한 채,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어쩌면, 누구보다도 자신이 지금......연희처럼 알콜의 힘을 빌리고 싶은지도 몰랐다.
“난...난 말이에요. 선배.
선배는.....죽어도, 펴~엉새앵~~~~~ 연애 따위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니, 아니지. 연애야, 여자가 매달리면 할 수도 있지.
선배는 흉내 정도는 낼 스타일이니까......”
“무슨 말이야?”
“공주님......이죠?”
“뭐...뭐?”
연희의 직구였다.
그래서 술이 필요했는지도 몰랐다.
술의 힘을 빌어, 겨우 직구를 날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맞죠?”
시경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연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또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저 얼어붙은 듯, 앉아 있을 뿐이었다.
“대답......했네요. 이미.”
“어?”
“이미, 그 대답, 했다구요.
아까......
있죠. 선배. 지금....나랑 둘이 있는데, 사실은 세 명이 있는 거, 알고 있어요?”
시경의 미간이 좁혀졌다.
대답은......이걸로 충분했다.
“나....좀.....비참하지만.....
뭐, 그래도....인정!!!
선배, 눈 끝장나게 높은 것도....인정!!!
그러니까, 아쉬움은 없는 걸로......
그래도 이 말은 하고, 끝내야겠어요.”
시경은 연희의 주정 같은 말들을 그저 묵묵히 듣고 있었다.
“나, 선배, 정말 좋아했어요.”
연희의 말에 시경은 놀란 듯, 미안한 듯 연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늘......자신을 뛰게 만들던, 그 검은 눈을 하고......
저 검은 눈이 깊어지면, 어떤 모습일까.....늘 상상했었는데,
오늘......그것을 보게 되었다.
단지....연희 자신을 보는 순간이 아니었다는 것뿐......
“진짜 진짜 많이!!!!
자, 내 얘기는 여기서 끝! 하구요.
선배 얘기나 물읍시다.
그래서, 지금 선배는 어떤 상황이에요?
쌍방향이에요? 혼자 끙끙대는 거예요?”
그 말에 시경이 입술을 깨물었다.
안 봐도 비디오였다.
이건 뭐, 은씨눈 아니랄까봐.
오죽했으면, 동아리에서 별명이 은씨눈이었을까.
어휴........
“으이구!!! 나 참...죽다 살았으면, 뭔가 달라져야지. 그대로예요?”
시경의 눈이 슬퍼보였다.
그래서 연희는......지금 자신이 실연을 당했다는 것조차, 아니 예전에 실연을 당하고, 지금 확인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 선배를 어쩌면 좋을가 싶었다.
분명 혼자서 끙끙대고 있을 텐데........
“공주님은.....아세요? 선배 마음?”
설마 설마 하며 물었다.
그런데 선배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 그래도 다행이네.
자신의 마음을 알리기는 했다는 거네.
아니지. 저 상태면, 그냥 누구나 봐도 아는 단계니, 공주님도 모르려야 모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공주님은요?”
시경이 고개를 숙였다.
공주님께서 거절하신 걸까......
정말 그런 걸까.......
웃기지......나도 참.......
내가 실연당했는데, 이 남자가 실연당한 게 왜 이리 마음 아픈 건지........
“미안하다. 연희야.
공주님, 곧 식사하실 시간이야.
근위대 호위 들어가야 해서, 가봐야 할 것 같다.”
“알았어요. 나 할 말 다했으니까....들어가도 돼요.”
“미안하고......고마웠다.......”
시경은 그렇게 올라갔다.
저.....남자....참...너무하네.
다시 보자, 다음에 보자, 그런 빈 말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래야 은시경이었다.
연희도 천천히 일어났다.
약간 현기증이 나는 듯도 했다.
비틀대다 잠시 화장실에서 세수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화장실 복도로 향하는데, “공주님”이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복도에서 살짝 내다본 로비에서는 공주님이 누군가를 찾는 듯 두리번대고 있었다.
촉......
그래 촉이라고 보는 게 맞다.
아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 촉 때문에,
한 번도 그렇게 불러 본 적 없던 “시경 오빠”라고 부르며 데이트네 마네 하며 오바를 떨었던 것처럼.......
지금도 그 촉이 동하고 있었다.
‘또’ 아니면 ‘모’다.
내 첫사랑은 끝이지만, 선배의 첫사랑은.......어쩌면.......
발자국 소리가 점점 화장실 복도 곁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연희는 심호흡을 했다.
한껏 하이톤으로 장전을 한 후, 전화를 열고 외쳤다.
"시경 오빠......"
분명했다.
급한 발걸음 소리가 조용해졌다.
"응.....사실.....아까는 부끄러워서....말을 제대로 못했어.
나 사실....오빠가 먼저..다시 만나자고 말해줘서 진짜 기뻤어.
나...사실...오빠 못 잊고 있었어.
고마워...나....오빠한테 잘 할게.....
서울 가면 바로 연락할게."
다시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내 마지막 선물이었다.
여자는, 여자가 아는 법이다.
안녕, 시경 선배~!
그리고 내....첫사랑.......
그렇게 연희는 화장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5
연설 때문이었다.
이젠 끝이라고, 이젠 더 이상 기대해서도 안 된다고,
전하께 말씀드리는 그 순간, 나는 이제 마지막이라 그리 결심했었다.
그런데 공주님의 연설을 들으며, 나는 또다시 꾸어서는 안 되는 꿈을 꾸고 말았다.
연희와 헤어지고 올라오는 동안, 길이 어긋났는지 공주님께서는 이미 식당으로 내려가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나는 바로 따라갈 수가 없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오늘.......
나는.....또 한 번......그 0.1%에 기대고 싶은 내 마음에 지고야 말았다.
아니.....마치 그 메시지가 공주님께서 내게 전해주신 말씀인 것처럼 착각하고 싶었다.
그래서....... 뵙고 싶다고....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문자를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보냈다.
그리고......그 후.....나는......이곳에 혼자 남아 있다.
그녀의 온기가 있다가 가셔지고 난 상황은.......따뜻했던 만큼, 서늘했다.
살을 에는 듯이 추웠다.
그것은 내 영혼이 느끼는 추위일지도 몰랐다.
확인이었다.
내 끝에 대한 확인.
내 최악의 시나리오를 내 눈으로 보게 된 재현.
그것이었다.
준비....
하...........
웃음이 나왔다.
준비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최악을 알았다고 해도, 그것을 예상했다고 해도,
그것은 절대로 준비될 수 없는, 절대로 예비할 수 없는, 폭격과도 같았다.
“은시경 씨......우리가....함께 한 한 달 때문에....
나한테 매여 있을 필요....없어요.”
그녀는 그렇게 나를 거절했다.
“어쩌면...그 한 달은....당신과 내게 꼭 필요했었는지도 몰라요.
정리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었는지도 몰라요.
조금은 아쉬웠을, 당신과 나의 추억에......마지막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그런 시간이었는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이제......공주와 근위대장으로......돌아가요.......”
아무 말도.....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다.
세상의 끝을 맞닥뜨리게 되면, 그 어떤 말도, 그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다.
온 세상이 가득 차 있었는데, 순식간에 온 세상이 텅 비어버렸다.
더 비참한 것은.......내가 어떻게 해도 변할 수 없다는 것......그것이었다.
노력해서.....노력한다고......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미치게 했다.
노력해서 되는 일이라면, 나는 그 누구보다도 노력할 수 있다.
노력해서......당신을 가질 수만 있다면, 나는......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다.
그러나........이것은.......신께서 노력을 허락하시지 않은 유일한 일......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먼저 시작한 것도, 노력도.......소용이 없는.....유일한.....일이었다.
신의 섭리이자, 신의 축복.....그리고.....신의 저주........
그랬다......
전하의 말씀이 맞았다.
미쳤느냐고, 왜 그 제의를 받았느냐고.....
한 달 전, 나를 다그쳤을 때, 오만하게 나는 괜찮다고 했었다.
괜찮다고, 이 한 달로 끝나도 괜찮다고, 나는 평생 안고 갈 선물이라, 그렇게 어쭙잖게 대꾸했었다.
이제 전하께서 마음껏 비웃으셔도 할 말이 없다.
오만했다.
이 사랑에 대해서....나는 너무나 오만했다.
나는.......내가 나를.......통제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내가 감히.......나라는 인간을........컨트롤 할 수 있을 거라고.....오만하게 지껄였다.
어떻게 감히....인간이......그런 오만한 말을 뱉었던가......
손 등으로 뜨거운 무언가가 툭툭 떨어져내렸다.
신을 우습게 여겼던 오만한 인간은......그저 나약하게 엎드러져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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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가 뭐야?”
“....................”
“말해 봐. 너! 니 목숨! 어떻게 살려낸지 알아?
그러니까, 대답해봐. 적어도 나는, 그럴 자격 정도는 있어.”
이렇게 두려운 전하를 뵌 적이 없었다.
전하는 무섭게 다그치고 있었다.
냉정하게, 그리고 싸늘하게........
아주 낮은 목소리로, 흥분하지 않은 듯한 차가운 목소리로 너무나 두렵게 다그치고 있었다.
그래서 대답해야 했다.
“........제가......착각할지도 모릅니다.”
“뭘?”
“........제가 미쳐서.......날뛸지도 모릅니다.”
“그래, 뭘 말이야?”
“......제가.....마치.....공주님의.....실연당한.....애인인 양......착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총이라도 들고, 공주님께서......하아.....사랑....하시는.....남자에게...찾아갈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터져버렸다.
그렇게 최악의 상황을, 내 자신도 내 자신이 믿을 수 없어 두려워지는 순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정말로....제가 미쳐서.....납치라도 해버리면요......
어딘가에 가두고, 제가....정말로....짐승처럼 공주님께......그렇게.........”
“야!!!!! 이 미친 놈아!!! 너, 은시경이야! 내가 널 몰라?
니가 그럴 놈이야? 넌, 죽어도, 그런 짓 못해!!!!”
“아닙니다. 전하.
전하는......절대로......모르십니다......저를.......”
“은시경!!!!”
“아십니까......전하!!!
저도......제가.......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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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내가....두렵다.
내 자신이....너무나 두렵다.
최악의 시나리오......
하나하나 실현되고 있다.
은시경, 최대한 빨리....공주님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
그 어떤 생각도 해서는 안 된다.
보호해야 할 대상과, 적(敵)은 명확하다.
적으로부터 털끝도 다치시지 않도록 보호할 것.
모든 전쟁의 전략과 전술을 통틀어서, 하나의 진리로 귀결된다.
그러니, 나는 지금 배운 대로, 철저하게 작전을 수행하면 된다.
적으로부터 공주님을 보호할 것.
그 적(敵)은 바로 나, 은시경이다.
최대한 공주님으로부터 그 적(敵)을 멀리 떼어놓을 것.
더 이상 내가 미치기 전에, 멀리 떠나는 것. 그 외에 방법이 없었다.
하나만 생각하자.
공주님을 보호하는 것. 공주님의 안전을 생각하는 것. 공주님의 행복을 지켜주는 것.
시경은 주먹을 쥐고 일어나 미친 듯이 자신의 방으로 갔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은 가방을 싸는 것밖에 없었다.
그래 전하께......먼저 복귀하겠다고...말씀을....드려야 한다....
매뉴얼대로...하면 된다. 그러니까......
그 순간이었다.
시경의 전화가 울렸다.
전하....셨다.
“예. 전하.”
<목소리가....왜 이래?>
“예?”
<너......괜찮냐?>
“아....괜찮습니다.”
<뭐가 괜찮아? 임마! 너, 지금....안 괜찮아!!!!
너 지금, 목소리 굉장히 이상하다고!!!”
“아닙니다...전하......괜찮........”
<재신이가, 아니래?>
“........................”
순간.......현실이 다시 돌아왔다.
고통이 엄습했다.
고통은 그대로 심장을 강타해버렸다.
애써 나와 나를 분리하고 있었던 순간이 깨져버렸다.
<야, 은시경!!!!! 너....진짜.....살 수 있겠냐?>
“......................”
<너, 재신이 안 보고, 살 수 있겠어? 너, 그럴 수 있겠냐고!>
“.....................”
또 다시 터져버렸다.
나는 미쳐버렸다.
이미 나는 그곳에 서 있었다.
미친 놈처럼.......
그 방 앞에....나는 서 있었다.
살...수....없습니다.......전하.......
그래 그 말이었다.
내가 전하께 뱉은 마지막 말은 그것이었다.
그리고는 미쳐버렸다.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나는 그렇게 미친 짐승처럼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기적처럼......방문이 열렸다.
그곳에.......내 목숨인 이가.....서 계셨다.
그리고......내 생명을 건.....고백을......내 심장의 주인인 그녀에게 드렸다.
“왜, 여기 있는 거죠?"
“......공주..님........하아.....”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니에요?
말해 봐요.”
“.......전......”
마치 신음처럼, 아니 절규처럼 목숨 같은 고백을........심장 밖으로 쏟아놓았다.
“.....공주님과......근위대장이라는 관계로......돌아갈 수가.....없습니다........”
“은시경 씨!!!! 당신 뭐야?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내가 잘못 봤네요.”
“예?”
“그래서 떠나겠다고?
나한테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떠난다고?
내가 그렇게 싫어? 꼴도 보기 싫어?
당신은....공과 사도 구분 못 해?
왜, 왜 가는데?
말해 봐!!!! 똑바로 말해보라고!!!!”
공주님은 화를 내시고 계셨다.
그러나 나는....그런 그녀를 향해 내 마음을 드러내놓고야 만다.
“........사랑....하니까요......”
“뭐?”
“당신을........사랑하니까요.........공주님......”
“은...시경....”
“이젠......더 이상....참을 수...없으니까요......
이젠.....제가...제 자신을.....믿을 수 없으니까요.”
그렇게 나는 나의 주인에게 내 절절 끓어대는 내 심장을 꺼내어 바쳤다.
6
사실일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좋아해요....은시경 씨......
그 오랜.....말을 들었다.
그 오랜.....떠올릴 때마다 죽을 것같이 설레고, 죽을 것 같이 고통스러운 그 말을....들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닐까....
내가 미쳐서 환청이 들린 건 아닐까....
내 사랑이......내 눈을 가리고, 내 귀를 가리고, 그녀의 마음까지 착각하도록 만든 건 아닐까.....
두려움이 밀려오고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재신의 입술이 주는 감각은 시경을 미쳐버리게 만들었다.
다시는....가지지 못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녀의 입술을 생각만 해도,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될 거라 생각했었다.
부드러운 그녀의 입술 앞에서, 너무나 황홀하게 감겨오는, 반응해 오는 그녀의 혀 앞에서 시경은 자꾸만 울컥대고 있었다.
입을 맞추고, 또 맞추어도 모자라서, 시경은 자꾸만 그녀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헉헉대는 숨찬 소리가 흘러나와도, 머리의 명령과는 달리 그녀의 입술을 놓을 수가 없었다.
혹여, 놓으면, 착각이라 하실까, 내가 착각한 것일까, 두려워 그녀의 입술을 놓을 수도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재신이 심하게 비틀거렸다.
그 바람에 시경도 어쩔 수 없이 재신의 입술을 놓고, 그녀의 허리를 그대로 껴안아 자신의 품 안 가득 안아왔다.
“은시경 씨.......”
그녀의 두 팔이 시경의 목을 감싸 안았다.
“한 번만 더......말씀해 주세요.
한 번만 더......”
“.....좋아해요......은시경 씨......
아주....아주....많이요......진짜...진짜....많이......어!!!”
순간 시경이 재신을 안아들었다.
“은시경 씨!!!”
놀란 재신을 시경은 그대로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시경의 검고 깊은 눈이 재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볼을 쓰다듬으며, 아직도 남아 있는 눈물을 닦아내었다.
마치 너무나 소중한 것을 만진다는 듯이, 그의 손은 섬세하게 그녀의 이마를, 그녀의 볼을, 그녀의 입술을 쓸어내렸다.
재신은 이제 심장이 뛰다 못해, 멎을 것만 같았다.
이 남자의 깊은 눈은 그랬다.
숨도 쉬지 못하게 했다.
숨이 막혀왔다.
그가 그저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재신은 자꾸만 열이 올라왔다.
부끄럽고....또 부끄러웠다.
그의 눈을 마주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입술을 쓸었다.
그의 손이 입술에 닿을 때면, 재신은 등 뒤로 무언가가 자글자글 흘러내렸다.
그는......너무나 야하다.
단지 이렇게 바라만 보고 있어도, 이렇게 자신의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기만 해도,
마치....그와 사랑을 나누는 듯, 떨려오기만 했다.
나....정말.....이 남자에게 단단히 반했나봐......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그가 나를 바라보기만 해도, 온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눈을 내리깔고 있는 재신의 촉촉한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시경의 가슴도 파르르 떨려왔다.
시경의 입술이 또 한 번 그녀에게 내려앉았다.
그녀의 이마에, 그녀의 양 볼에, 그리고 그녀의 입술에, 그렇게 천천히 그러나 깊게 내려앉았다.
그의 입술 앞에서 재신은 자신의 저 안 깊은 곳에서 불덩이가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키스만으로도 그 입술만으로도 재신은 온 몸의 세포가 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맨 정신인데.......분명....어떤 약도 먹지 않았는데,
마치....일본에서 그 날처럼......약에 취한 것만 같았다.
아니.....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이렇게 미칠 것 같지는 않았다.
이렇게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지는 않았다.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이.......이토록 불덩이 같을 줄 몰랐다.
그 따위 약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재신의 영혼을 미치도록 들뜨게 했다.
이것이......신이 내린.....인간에게 선물하신......영혼의 묘약인지도 몰랐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신이 내린.....기적 같은 신비였다.
그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미친 듯이 피어올랐다.
불꽃이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블라우스의 단추가 어떻게 된 것인지, (중략)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옷이.....거추장스럽게만 느껴졌다.
태초의....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신이 창조한....가장 아름다운 자연인.......인간...그 자체로.......그와 만나고 싶었다.
그와 맞닿는 것이 (중략) 좋았다.
그의 단단한 가슴이 좋았다.
그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머리를 감싸 안고, 태초의 선물을 즐기고만 싶었다.
입에서는 자꾸만 너무나 야한, 태초의 소리가 흘러나오고만 있었다.
(중략) 저 안까지 불덩이가 지나다니기만 했다.
(중략) 마치 약에 취한 것처럼,
미친 듯이 그에게 얽혀들었다.
(중략) 비로소 재신은 정신이 돌아왔다.
(중략) 재신은 소스라치듯 놀라고 있었다.
아!!!
(중략)
“잠...잠깐만요. 은시경 씨...”
자신의 목소리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말리는 목소리도 여전히 열에 들떠 있었다.
“....싫으...십니까....”
그의 목소리는 허스키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아니..그게 아니라...나...땀도 많이 흘리고...그러니까....막 울고 하느라...아......”
말하면서도....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머리가 하얗다.
그런데 웃기게도 말이다.
지금....그와 사랑을 나눌지도 모를 이 순간에 솔직히.......이게 가장 신경 쓰였다.
아....미치겠다.....
그래도....신경 쓰이는 걸....어쩌란 말인가......
그런데....이 남자의 대답이란.......하아.......
“그러면.....씻으시면 되는 겁니까?”
“응....그..그렇긴 한데......아아니 그게 아니라..은시경 씨!”
(중략) 그가.....갑자기 욕실로 들어갔다.
뭐지?
재신은 당황하며 시트를 끌어다 덮었다.
(중략) 시트로 둘둘 말고 나서, 옷을 가지러 갈까 말까 갈등하고 있는 사이 어느 새 시경이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재신은 그도, 자신도 부끄러웠다.
(중략) 그를 쳐다볼 수가 없어서 재신은 시트를 머리끝까지 올려 덮었다.
시트 안으로 온통 심장소리로 가득했다.
나...어쩌지....진짜...어쩌지.......
그 순간이었다.
“어...어!!!! 은시경 씨!!!!!”
시경은 시트를 덮은 채로, 재신을 들어올려 어딘가로 안고 갔다.
“지금...뭐하는 거예요?”
“씻고 싶으신 거, 아니셨습니까?”
“아,..아니...은시경 씨...아!”
시경은 시트 채 그대로 욕조 안으로 재신을 앉혔다.
따뜻한 물이 점점 차올라 오고 있었다.
(중략)
재신이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고 있는 동안, 시경도 욕조 안으로 들어와, 재신의 뒤에 앉았다.
욕조 안은 점점 거품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몸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등 뒤로 그의 단단한 가슴이 느껴졌다.
하아.....
그녀의 귓가로 한 남자의 한숨 소리가 묘하게 퍼져나가 가슴 저 안까지 자글거리게 했다.
그의 손이 천천히 재신의 등을 쓰다듬었다.
따뜻한 물과 거품이 주는 감각이 묘하게도 야했다.
(중략)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불덩이는 이제 모든 이성을 태워버렸다.
(중략)
그는......정말....선수일지도 몰라........
재신은....그 와중에도......이런 생각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분명....이 남자....처음일 텐데.....처음이 아닌 것 같이........
너무나 야하기만 했다.
그의 손길이, 그의 입술이......온 세포를 곤두서게 할 만큼 좋았다.
아니 좋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오로지 이 남자만 바라보게, 이 남자만 생각하게, 이 남자에게 몸와 마음을 다 빼앗기게 만들었다.
(중략)
미친 듯이 빨려 들어가는 키스를 하던 그가 그녀의 입술을 갑자기 놓았다.
그의 눈이 검게 가라앉고 있었다.
아니.....검게 불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의 눈을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그 뜨거운 열기에 잠식될 것만 같이, 그의 욕망을......보고야 말았다.
“......하아........공주님........”
(중략)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남은 물방울 때문인지......혹은....그 다음 일어날 일들 때문인지.....재신도 알 수 없었다.
침대에 재신을 눕히고,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분명했다.
재신은....느끼고 있었다.
그를........막을 수는.....없을 것이다......
그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남자를 보고 있었다.
한 여자를.....사랑해서, 그 여자를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온 영혼으로 소유하려는, 한 남자를.....보았다.
그리고....그 남자가 내게 물었다.
“......이제....공주님 가져도 됩니까......”
“은시경 씨....”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더 이상......후회 따위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까....전....오늘....공주님, 가질 겁니다.”
가질 거라는 그 말 앞에서.....여자는.....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말을 하기까지.....그가 겪어내었을 고통을.....보았는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모릅니다.
내 심장에 새겨진 고통을.......
당신이 나를 어떻게 길들였는지.....
그래서 당신 없이 사는 것이 내겐 죽음과 같다는 걸.......
당신은 알지 못합니다.
불안합니다.
아니....두렵습니다.
그래서....당신을.....가져야겠습니다. 공주님......”
선전포고를 해오는데, 나를 가지겠다 하는데, 나는 그저 심장이 튀어나올까.....그 걱정만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불안함을......이렇게.....당당하게 말하는....남자.......
그래서 나를....내 몸을, 내 영혼까지 가지겠다는 이 남자.......
그 말이....왜 이리 설레는지.....왜 이리 떨리는지......
그리고......그 말을 하는 이 남자가......왜 이리....멋있는지.......
나도....알 수가 없다.
“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지위도, 명예도, 부도, 배경이 될 만한 어떤 것도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저도.....
당신을 사랑하는 일, 당신을 품는 일.......
당신은......제가 꿈꾸어서도 안 될 욕심이라는 것도.....알고 있습니다.
당신을 가슴에 품는 것만으로도, 그것은......감히입니다.
제가 감히...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마음에 품고, 당신을.....온전히 가지고 싶습니다.
그러나........
오늘은.....‘감히’ 라는 말을 빼겠습니다.
당신을 향한 감정 앞에.....감히라는 말은...이제 없습니다.”
그가 나를 온전히 가지겠다고 한다.
늘 입에 담았던....그 ‘감히’라는 말을 버리겠다고 한다.
나는 그의 고백 앞에서 울컥하고 말았다.
“아십니까...공주님......
당신은.......나의 전부입니다.
저를 살게 하는, 살고 싶게 하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공주님.......제가......살 수 있게.....해주시겠습니까?
제게.....찬란한 봄을.....선물해 주시겠습니까?
당신을......제게......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제 삶을......받아주시겠습니까.......”
세상을 단단하게 살아가는.....한 남자가 자신의 영혼을 끌어올려 고백한 말이었다.
그 남자의 눈에 고인 눈물조차......강해 보였다.
한 남자가......자신의 목숨을 걸고.......사랑을 고백한다.
눈물.....
아니다....그의 눈을 가득 투명하게 채우고 있는 것은.....
그의 사랑이었다.
사랑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그의 전 생애를 담은......목숨이었다.
그를 보고 싶지만, 그가 보이지 않는다.
자꾸만 차올라오는 눈물 때문에, 그의 얼굴을 볼 수조차 없다.
재신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당신이니까......
은시경 씨 당신이니까......”
“공...주...님......”
“나라는 여자........보잘 것 없지만......
나......아직.......많이 불편한 몸이지만......
그래도.....나........따뜻하게.......품어줄래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제게 너무나 과분합니다. 공주님....
아십니까.......공주님 당신은......너무나 아름다워서........
제가 함부로 손대는 것도.......아깝습니다.”
재신의 눈에서 또르르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그 눈물조차 아깝다는 듯이 입술로 훔쳐내었다.
“사랑합니다. 공주님......사랑합니다.......”
“은시경 씨......당신이어서....다행이에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당신이라는 사람을......내가 알아볼 수 있어서......”
“공주님.......”
“별들이 떨어질 때....수많은 유성우들이 떨어질 때.......
별처럼 내게 내려와주길....바랐던...내 기도가.....당신이라는 사람이어서......정말.....다행이에요.”
툭.......
진중한 남자의 눈에서.....별처럼.....눈물이 떨어져내렸다.
기적.......
별이 비처럼 떨어져 내리는 그 순간이,
사실은 인간을, 이 땅을 지키시는 누군가의 기적의 손길인 것처럼,
서로를 만지고 품어내는 이 순간이,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 놓고 서로의 몸을 받아내는 이 순간이......
누군가가 위로하시는.......기적의 손길이라는 것을.......
기적은.......삶에서 예상되지 않는 범주의 기이한 일들이라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일분 일초가.....기적일지도 모른다.
혼자서 살아가야 하는 이 낯선 세상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보듬어줄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
조금은 머물러도 좋을 넉넉한 가슴을 만난다는 것.......
기적은......이미 우리 안에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신이 주신 기적을 몸으로 풀어내었다.
(중략)
칼날 같은 고통이 (중략) 엄습해도.......그라서 참을 수 있었다.
고통조차.....감사할 수 있었다.
내 몸에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의 사랑을, 그의 고통을, 그의 영혼을, 새겨넣고 싶었다.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는 그의 검은 눈이,
그러나 또다시 열망으로 가득차는 그의 눈이,
좋다.
가슴이 터지도록 좋다.
생채기 같은 사랑에 눈물이 흘러도, 그라서.....좋다.
그의 손길에, 그의 흔들림에, 그의 땀에, 그리고 안타까운 듯 다가오는 그의 입술에,
(중략)
나는 미끄러지듯 빠져든다.
은시경.......
이 남자라서........좋다........
고통일지라도.........좋다.......
이 남자라서.......고통이 고통이 아니게 된다.
그의 목을 감싸 안으며, 그의 눈을 바라본다.
그의 눈이 촉촉이 젖어온다.
나의 눈도 그러리라.......
기적과 같은 시간......
신의 축복과 같은 시간.......
신이 인간에게 내린....가장 아름다운 시간.......
그 시간을......이 남자와......나눌 수 있어서.......감사하다.........
“은...시경........”
그의 이름을 부른다.
“사랑합니다.....공주님......나의 공주님.......공주님......하아.....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서로의 눈물을 받으며, 서로의 입술을 품으며.......
그는 내 부름에 응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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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립다......
내 가슴 안에 있어도, 그대의 입술에 입을 맞추어도,
내 안의 모든 것으로 그대에게 다가가도,
그대가 그리워서 심장이 울어댄다.
사랑이......나를....살게 한다.
당신은 내게......찬란한......봄이다.
<윤찡 갤 시경재신횽 짤 감솨감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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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세운 것 같습니다.
94일만에 올리는 당기못이라는 기록.
그리고 45장이라는 기록.
32회는.....아주 많이 고팠고, 고생 고생 하며 썼고, 또 한편 쓰면서 행복했습니다.
32회는 온전히......은시경을 위한 회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갖기까지.....
미친 듯이 은시경을 읽어댔습니다.
모든 글을 은시경의 시점에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단편에서 중편, 그 이전 당기못 회들도 그랬습니다.
온전히 올라와야 쓸 수 있었습니다.
32회는....그야말로 기적이니까......
그의 마음을 온전히 느끼지 못한다면 쓸 수 없는 회였습니다.
힘들면 안 된다고 걱정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힘든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늘....동전의 양면이 아닌가 합니다.
고통과 행복은....늘.....함께 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니...염려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다른 어떤 회들보다도, 또 다른 어떤 글들, 단편이나 중편들보다....
당기못은 특별하기를 바랐나 봅니다.
특히 32회는 더 그랬습니다.
다른 모든 글들이 다....당기못을 위해서 존재했으니까요.
제게는 그랬습니다.
그래서....그 모든 글들을 뛰어넘는....그런....회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왜냐하면.....당기못의 은시경은....가장 처절한, 가장 고통스러운 은시경이니까요.
그에게 주는......가장 특별한 선물이고 싶었습니다.
배경음악은....모두 거장들의 신곡입니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어떻게 이렇게 딱 맞아떨어졌는지.....
이 거장들의 곡이 아니었다면, 전...아마 못 썼을 겁니다.
이 음악들이 제 손을 근질거리게 하더라고요.
1의 이*문*세님의 곡과 2의 이*은*미님의 곡은 앞 부분에서,
그리고 두 사람이 만난 상황에서는 오롯이 이*선*희님의 곡이 메인테마입니다.
이 글을 한 번 다 보셨다면,
이*선*희 님을 반복 재생하시면서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32회의 메인 테마곡입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제 어쩔 수 없는 결벽증이라...여겨주시길....
이렇게 오래 끌었다고 해서......허접한 글이 좋아질 것도 아니지만,
아예 쓸 수가 없으니.....그저....봐주소서.....
오늘 회는 <당기못> 0회, 26회와도 연결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혹시 복습하시게 되면, 그 부분도 같이 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전 사실.....이 글을 쓰면서......한참....눈물을 쏟았습니다.
쓰기 시작한 건.....사실....몇 달 되었습니다.
사실 저번 주 일주일은 장염으로 링겔도 맞고...좀 고생도 하긴 했습니다.
그래서 더 늦어졌다지요.
여튼 그 사이 떠오르는 장면에 대해서 틈 나면 써놓고는 했습니다.
특히 요 며칠은 작정하고 써서 그런지......감정이 완전히 올라와서 그런지.....
오랜만에 펑펑 울었습니다.
어째...이리 감성은 이리.....넘치나 모르겠습니다.
여튼 별 쓸데없이 주저리만 깁니다.
허접한 글....그래도 즐감해 주시길......
따뜻한 주말, 행복한 주말 되소서......(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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