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신상플)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34 – 그대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어줘서(전체)
<silver님께서 주신 당기못 대문짤~~ 감솨감솨합니다.^^>
<디씨 그러하다 횽이 주신 당기못 대문짤~~저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__)>
* 꼭 배경음악을 틀고 읽어주세요. *
다행이다 / 이적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마주 보며 숨을 쉴 수 있어서
그대를 안고서
힘이 들면 눈물 흘릴 수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대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어줘서
거친 바람 속에도
젖은 지붕 밑에도
홀로 내팽개쳐져 있지 않다는 게
지친 하루 살이와
고된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게
언제나 나의 곁을 지켜주던
그대라는 놀라운 사람 때문이라는 걸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나눠 먹을 밥을 지을 수 있어서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저린 손을 잡아줄 수 있어서
그대를 안고서
되지 않는 위로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대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어줘서
거친 바람 속에도
젖은 지붕 밑에도
홀로 내팽개쳐져 있지 않다는 게
지친 하루살이와
고된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게
언제나 나의 곁을 지켜주던
그대라는 놀라운 사람 때문이란 걸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
1
No Disturb
바닷가에서 돌아와 재신이 자신의 룸 앞에 서 있다.
재신의 방문 옆에 빨간 불이 들어와 있었다.
“Clean up, 안 했어요?”
의아한 듯 묻는 재신에게 시경은 무언가 뻘줌한 듯 눈을 비꼈다.
“왜?”
“그게......”
방문을 닫자마자, 벨이 울렸다.
시경이 부탁했는지, 호텔직원이 새 수건과 새 시트를 가져다 주었다.
시경의 손에 올려져 있는 하얀 시트를 보며, 재신은 의문이 들었다.
“어차피 갈아야 할 텐데, 왜 안 시켰어요?”
“흠흠....제가 하면 됩니다. 공주님.....”
시경이 몇 번 목을 가다듬으며 대답하는 사이, 그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서야 재신도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멈칫 대고 있는 시경을 보며, 어제 두 사람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침대 옆에 뭉쳐 놓은 시트가 말해 주고 있었다.
“아.....저.....”
재신이 더듬거리고 있었다. 볼 거 다 본 사이에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재신은 빨갛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아...그래요. 나 더워서 씻고 나올게요.”
“예...예? 아...알겠습니다.”
재신은 급히 속옷을 챙겨 들어오며, 내가 미쳤지 싶었다.
씻어? 이 와중에?
뭘 하자는 거야?
은시경 씨 분명 내가 엄청 밝힌다고 생각할 텐데....
아, 내가 미쳐, 정말!!!
재신은 욕조에 걸터 앉아 한숨을 쉬었다.
난감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시경은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다가, 혼자 더운 듯 부채를 부치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시트를 깔기 시작했다.
저건 어쩌지......
하얀 시트에 그녀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붉어진 시경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시트를 곱게 접어 시경은 룸 밖으로 나갔다.
재신이 씻고 나와 보니, 그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나가지, 하며 온갖 생각을 다하다 겨우 나와 보니 그가 없었다.
뭐랄까...이 엄청난 자신의 갈등이 우습게 느껴진달까.
재신은 샤워를 하고 나서도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해가 졌다고 하지만, 초저녁. 지금 씻고 나와 어쩌겠다는 건지. 그것도 너무나 당당히 그는 재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부랴부랴 씻으러 들어왔으나, 씻고 나서는 어찌할 것인가.
화장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들고 온 옷은 또 너무 외출복스러운 건 아닌지. 아니지 지금 잠옷을 입을 수도 없잖아.
아 정말 미치겠네.
재신은 생각하면 할수록 이건 뭔가 싶기만 했다.
엷게 베이스를 바르고, 대충 화장을 한 다음, 겨우 문을 열고 나와서는 그 허탈감에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그는 없었다.
아, 나, 지금 뭐 한 거지......
맥이 쭉 빠질 것 같은 찰나, 룸의 문이 열렸다.
자신을 그토록 허탈하게 만든 그 남자였다.
그런데 이 남자, 자신의 방인 양, 카드 키로 문까지 열고 들어와서는, 그녀를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기만 한다.
“왜...왜 그렇게 봐요? 나....뭐 이상해요?”
불안한 마음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씻고 너무 화장을 안 한 건가. 어쩌지......
이 남자 앞에서 자신은 왜 이리 자신이 없는 건지, 뭐가 이리도 신경이 쓰이는 건지, 재신은 스스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얼굴에 열이 오르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시선 앞에서, 뚫어질 듯 바라보는 그의 검은 눈빛 앞에서 재신의 얼굴은 자꾸만 붉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멍하니 서 있기만 하던 그가 그녀를 향해 성큼 성큼 걸어왔다.
재신이 올 것이 왔나 싶었지만, 두려운 마음에 무조건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어차피 벽에 닿아 더 이상 갈 곳도 없었지만, 마음만은 물러서고 있었다.
이럴 때 이 남자는 무언가 두렵게 했다.
자신에게 다가설 때, 자신을 향해 올 때, 그의 마음의 깊이가 자꾸만 두려웠다.
그러면서도 가슴 속에 이는 바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손이 재신의 볼을 쓰다듬었다. 재신은 눈을 감았다.
그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의 숨결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입술이 스칠 듯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곧 그는 다시 멀어졌다.
그의 팔이 천천히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따뜻하고 포근하게.....
아까까지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던 그 욕망의 남자는 어디로 가고, 그곳에는 따뜻한 한 남자만이 존재했다.
따뜻하고 단단한 남자......그런 한 남자만이 재신을 품에 가득 안고 있었다.
“은...시경 씨......”
“잠시만, 이렇게 있겠습니다. 공주님......”
시경은 재신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은은한 라벤더 향이 코를 감싸며, 저 안으로 가라앉아 자꾸만 가슴에 바람을 일으킨다.
“이런.....느낌이군요.......”
“응? 뭐가요?”
시경의 품에 갇혀 뭔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던 재신이 꼬물꼬물거리자, 시경의 얼굴 한 가득 미소가 번졌다.
“.....행복....이란 거 말입니다......”
재신은 그 말에 무언가 목이 막혀왔다.
이 남자가 말하는 그 단어가 무엇을 말하는 건지, 무슨 의미인지,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아니 자신도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바로 그 감각, 그 느낌일 것이다.
재신은 두 팔로 그의 넓은 등을 힘을 주어 껴안았다.
아름드리 나무처럼 품 가득 벅차게 들어왔다.
그렇게 서로를 나무 삼아, 서로가 서로의 나무가 되어 쉼이 되어주었다.
2
쿵...쿵...쿵...쿵.....
재신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에게 들릴까 신경 쓰일 만큼, 재신의 온 몸으로 심장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가 서서히 재신을 품에서 놓아주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그녀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검은 눈이 따뜻하게 그녀를 향해 일렁였다.
그 일렁임은 그대로 재신의 가슴으로 내려 앉아 자꾸만 벅차오르게 했다.
그의 눈이 깊어질수록, 그의 검은 눈에 온전히 그녀가 담길수록 재신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쩌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부끄러움에 그의 눈을 비껴섰다.
그 순간, 그의 눈에 작은 미소가 어리는 것을 본 것도 같다.
쿵쿵쿵쿵......
이젠 심장이 밖으로 나오겠다는 듯이 뛰어댄다.
이 분위기......초저녁부터......어쩔 거야......
부끄럽다 못해, 숨고만 싶어졌다.
이 남자의 눈앞에서 발가벗겨진 듯이 부끄럽기만 했다.
하아........
그의 한숨소리......
놀라서 바라보니, 그의 눈은 어느 새 재신에게서 비껴나 있었다.
모든 소리들이 정지하고, 오로지 그의 숨소리와 재신의 심장 소리만이 들리는 듯한 공간 속에서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공주님......”
“네....네?”
재신의 목소리가 당황한 듯 떨려나왔다.
“.....식사, 하셔야죠?”
순간....정말 재신은 푸시식하며 꺼지는 소리를 리얼로 들었다.
이 모든 정적을 깨고 꺼지는 소리를, 이 모든 긴장감이 일순간 내려앉는 소리를......
“뭐....뭐요?”
“저녁, 드셔야죠. 벌써 일곱 시가 넘었습니다.”
“아..아...그렇죠. 밥 먹어야죠. 밥, 먹어요.
그렇네. 왠지 배가 고프더라니......
아, 은시경 씨, 잠깐만 밖에서 기다려요.
옷 갈아입고 나갈게요.”
그 말에 시경이 멈칫 한다.
“왜요?”
재신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자, 시경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제가 있어도.....
아, 아닙니다. 나가 있겠습니다.”
그는 근위대장답게,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이고는 방을 나갔다.
재신은 그 모습을 뻥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뭐지? 지금?
이 남자, 뭔가 이해가 안 되었다.
연인에서 갑자기 다시 업무로 돌아온 느낌이랄까.
이 남자는,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에 대한 스위칭이 자유자재인가 보다.
어떻게 다시 근위대장과 공주로 돌아올 수가 있지?
재신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3
“은시경 씨, 혹시 내 휴대폰 봤어요?”
룸을 나온 재신이 밖에 서 있던 시경에게 묻자, 시경은 눈에 띄게 당황하는 듯했다.
“아...공주님, 제가 챙겼습니다.”
“그래요? 주세요. 내가 가지고 있을게요.”
“음......제가....가지고 있겠습니다.”
“어? 왜?”
뭔가 이상했다. 이 남자.
갑자기 내 폰을 자기가 가지고 있겠다니.......
“휴대폰, 꺼두었습니다.”
“엥? 왜요? 연락 올 지도 모르는데.....
오빠....난리날지도....아.......”
재신은 그 말을 하자마자 확 느낌이 왔다.
이미 난리를 쳤겠다 싶었다.
갑자기 오버랩되는 기억이 있었다.
그날이었다.
시경이 재신을 붙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재신이 상우를 만나고 돌아왔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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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은시경입니다.
공주님, 잠시 모시고 다녀오겠습니다."
대한민국 국왕에게 통보를 하고 있던 은시경.
전화기 너머로 분노해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재하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음에도 그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야- 은시경, 너 죽을래?
지금 몇 신데, 애를 데리고 어딜 가겠다는 거야?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어? 너 완전 도둑놈 심보 아니야?>
"그렇게 늦지는 않을 겁니다."
<야, 내가 널 어떻게 믿어?
시커먼 니 속내를 내가 어떻게 믿냐고?>
"못 믿으신다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어쨌든 늦지 않게 모시고 오겠습니다."
<야!!! 은시경!!!!!>
"그럼, 다녀와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하."
시경은 재하가 소리를 지르든 말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는 휴대폰의 전원까지 꺼버렸다.
마치 재하가 바로 옆에 있는 듯이 통화소리가 들렸다.
그만큼 분노에 쩔고 있는 재하를 시경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무시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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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금처럼.......
시경의 표정은 단호하다 못해, 온화했다.
폰을 꺼두었다는 건, 이미 한바탕 했다는 뜻일 텐데, 시경의 표정에서는 그 어떤 것도 볼 수가 없었다.
작은 오빠, 지금 속 터지고 있겠네....큭큭......
재신은 웃음이 나왔다.
재하 잡는 인물이 딱 두 사람이었는데, 이제 플러스 원이 된 것 같았다.
그것도 가장 파워풀하고 막강한 은시경......
재신은 그가 이끄는 대로, 1층 테라스가 있는 호텔 레스토랑으로 갔다.
근위대원들에게 연락해 두었는지, 1층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재신을 보고는 에워싸서 밖으로 안내했다.
테라스......
어제.......가슴이 무너졌던 그곳에서 저녁을 먹다니.....
가을이라 아무래도 밤은 싸늘했다.
들어가시겠느냐는 시경의 말에 재신은 고개를 저었다.
근위대원들은 안에서, 시경과 재신은 밖의 테라스에서 저녁을 먹었다.
근위대장님과 공주님이 함께 식사를 하는데도, 근위대원들에게서는 별다른 눈치가 보이지 않았다.
교육을 잘 시킨 건지, 아니면 포커페이스들인 건지,
어쨌든 재신이 안에서 편안히 식사하라고 하자 다들 별말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둘은 어제처럼, 혹은 어제와 다르게, 그렇게 그곳에 앉아 식사를 했다.
“우리, 처음이죠?”
“예?”
“둘만 식사하는 거.......”
함께 둘이서만 식사를 하는 건 처음인 듯했다.
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에서 놀이공원에 갔을 땐 저녁을 먹었다고는 해도,
길거리에서 패스트푸드로 대충 때웠으니 제대로 식사를 했다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어제 그런 밤을 보냈으니 아침은 당연히 건너뛰었고, 점심도 룸서비스로 대충 먹는 둥, 마는 둥이었다.
데이트 한 번 제대로 못해 봤는데, 어쩌다 보니, 뭔가 순서가 거꾸로 가는 느낌이었다.
같이 밥도 제대로 먹은 적이 없다니......
밥을 먹었다 하더라도, 모두가 둘러싸여서 업무적으로 먹었을 뿐이었다.
가을의 밤바람은 차가웠지만, 그래도 고즈넉했다.
“우리......”
재신이 또다시 입을 뗐다.
시경은 재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우리”라는 말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그녀와 자신이 묶여지는 느낌.....마치 운명처럼 하나로 엮이는 그 느낌이 자꾸만 울컥하게 만들었다.
그런 그를 향해 그녀가 말갛게 미소 짓고 있었다.
“1일인 거죠?”
시경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처음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점점 그 말이 가슴을 지나 머리로 올라오자, 그제야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시경이 먹먹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사이, 재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지. 우리 1달 만난 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건, 넣어야 하는 건가, 아닌가......
아, 헷갈려......”
재신은 혼자서 이리 생각해 보고, 저리 생각해보며 고민하고 있었다.
“우리, 넣어요? 말아요? 한 달......”
재신이 갸우뚱거리며 물어오고 있었다.
시경은 그런 재신을 묵묵히 바라볼 뿐,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주님.......”
“응?”
“시작...부터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그렇죠.”
“그 시작이라는 것이......서로 좋아한다고 고백한 순간이라고 봐도 좋겠습니까?”
재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은 그렇다. 좋아한다고 서로 고백하면, 결국 사귀게 되는 거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조금.....다를 지도 모르겠습니다.”
“뭐가요?”
“제게는......만 2년 4개월입니다.”
“네?”
“공주님의 고백을 받고, 제가 당신께 고백한 그 날로부터 오늘까지.....
그 시작부터 만 2년 4개월이 지났습니다.”
재신의 목이 갑자기 칼칼해지는 듯했다.
가슴이 무언가 뻐근해지는 듯도 했다.
그의 시작은 이토록 오래된 것이었다.
내게는 1일이라 말하는 것이, 그에게는 만 2년이 지난 시간이었다.
재신은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은시경에게만 흘러간 시간이었다.
자신에게는 사라진 시간, 그것이 미안했고, 미안해서 더 미안하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재신은 한참 만에 입을 뗐다.
“그럼 우리.....840일인가?”
“예?”
“대충 계산하면 28개월이니까, 840일쯤 된 거네요.
나 그럼, 100일마다 선물 챙겨줘요.
분명히 은시경 씨가 말했으니까 이제 와서 딴소리 하기 없기예요?
100일마다 챙기면...보자. 30개월은 되어야 900일이니까, 그만큼은 안 되었으니 8번이네.
8번 선물 다 챙겨줘요.”
시경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가, 눈가로 잔잔한 주름이 생겨난다.
그의 눈이 웃고 있었다.
“흠흠....공주님은....아무 것도 안 해주실 겁니까?”
“허어~~!!! 이 남자 보게!!
와 은시경 씨!!! 이렇게 나올 줄 몰랐네요.
은근 선물 밝히는 거 아니에요?
완전 도둑 심보야.”
“아, 아닙니다. 공주님...그게 아니라......”
장난처럼 한 말에 재신이 정색하듯이 말하자, 시경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앞으로는......”
“예?”
재신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내가......할게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앞으로.....1000일은, 내가 챙겨줄게요.
그러니까.....억울해 하지 말기~~!!!“”
재신의 입가에 피었던 미소가 시경의 입술로 옮겨갔다.
재신은 미안하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경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하지 않은, 그러나 하고 싶어한 그 말들을 들을 수 있었다.
기억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 그 시간 동안 사랑해줘서 고맙다는 말......
그녀는 그 말 대신, “앞으로”라고 말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니 넘치도록 과분했다.
누군가에게는 참으로 평범한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참으로 특별한 일이 될 수도 있다.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기념일을 챙기는 것.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평범한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가슴이 차올라오도록,
목이 메어 어떠한 말도 할 수 없도록,
심장이 터지도록 저릿해서 눈물을 삼켜야 할 정도로,
그토록 뭉클한 일이었다.
4
저녁을 먹은 후, 재신은 휠체어를 타고 시경과 함께 호텔 산책로를 따라 거닐었다.
밤의 산책로는 마치 숲속을 걷는 듯이 고즈넉하고 아름다웠다.
“웬일이에요? 근위대원들을 다 쉬게 해주고?
엄청 빡빡하신 근위대장님께서?”
재신은 뒤에서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으며 자신을 밀어주고 있는 시경을 돌아보며 놀리듯이 말을 건넸다.
“뭐야? 그렇게 자신 있는 거예요?
은시경 씨 한 사람이면 경호, 충분해요?”
“...................”
시경은 앞만 바라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뭐지, 이 남자......
“왜 아무 말이 없어요?
묵비권 행사하는 거예요?
은시경 씨, 알고 봤더니, 은근 근자감 쩌는 스타일......”
그 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낮은 음성이 밤공기를 따라 흘러나왔다.
“공주님과 둘만 있고 싶었습니다.”
별 말이 아니었다.
그냥 둘이 있자는, 그런 말인데.....
그런 평범한 말인데, 재신의 심장은 정말로 큰 소리를 내며 쿵 하고 떨어져 내렸다.
그가 보고 있을 텐데......
뜨겁도록 그의 시선이 느껴지는데, 재신은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얼굴이 빨개지고 있을 텐데, 벌써 열이 오르는데....
그가 다 보고 있을 텐데.....
재신은 주책 맞게 뛰어대는 자신의 심장을 타박할 뿐이었다.
왜 이러는 걸까. 왜 이토록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전부 가슴을 떨리게 하는 걸까.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감정이란 것이 어디까지 달려갈 수 있는지....
태어나 처음으로 사람 때문에, 그 사람 앞에서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이 낯선 감정을 재신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부끄러웠다.
이 남자 앞에서, 그저 부끄럽기만 했다.
마치 숲길처럼 이어진 바닷바람이 부는 길 위를 남자도 여자도 아무 말도 못한 채, 심장 소리를 품으며 그리 함께 가고 있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함께 있어서 좋았다.
심장 소리가 귀를 터질 듯이 울려대는 것도 좋았다.
얼굴에 올라오는 열을, 가을의 바닷바람이 식혀주는 것도 좋았다.
그저 함께라서, 그저 같이 있어서, 좋았다.
존재만으로 벅차올랐다.
사람이 사람에게로 와서 온 세상이 되었다.
그 놀라는 세상을 “함께”라는 이름으로 경험하고 있었다.
시경이 문득 휠체어를 멈추었다.
의아한 듯 바라보는 재신의 앞으로 시경이 다가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재신이 그의 손을 잡자, 그의 강한 손이 재신을 일으켜 세웠다.
“은시경 씨?”
“걸으시겠습니까?”
재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경이 데려온 곳은 글램핑을 할 수 있는 잔디밭이었다.
아직 글램핑 철이 아니라서 그런지, 재정비하는 중인지,
잔디밭 끝쪽으로 글램핑용 텐트가 별 장비 없이 세워져 있을 뿐, 운동장만한 잔디밭만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의 손을 잡고, 재신은 아이처럼 천천히 잔디밭 위를 한 발 한 발 걸었다.
잔디의 부피가 폭신폭신하게 다가왔다.
그 넓은 잔디밭 위에, 별들이 비처럼 떨어져 내리는 그곳에 단 두 사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세상이 조용했다. 오로지 별들만이 반짝이고 있었다.
잔디밭 가운데까지 들어가자, 시경이 재신의 손을 놓고, 자신의 자켓을 벗어 잔디밭 위에 깔았다.
“앉으시겠습니까?”
그 말에 재신이 피식 웃었다.
“아니요? 싫은데요?”
재신의 말에, 시경은 당황한 듯 머뭇대고 있었다.
재신은 얼른 시경의 옷 위에 앉았다.
그러고는 장난 어린 목소리로 다시 한 마디 덧붙였다.
“누울 건데요?”
“예? 어!! 공주님!!!”
재신은 그의 자켓 위에 누웠다.
재신의 눈 앞에 광활한 밤하늘이 펼쳐졌다. 그 검은 하늘 위로 마치 떨어져 내릴 듯,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무엇보다 반짝이는 별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그날 보았던 별처럼,
유성우가 비처럼 쏟아졌던 그 날의 그 별처럼,
내게 떨어져 내려와 준 한 별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경...씨........”
그 말을 들은 시경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의구심이 가득 찬 그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고.......
재신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리 와서 나랑 같이 누워서 별 볼래요?
막 떨어져 내릴 것 같아.
빨리 와서 누워 봐요!
응? 시.경.씨?”
재신은 좀 더 분명하게 한 음절, 한 음절 힘을 주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눈썹이 움찔하는 걸, 재신은 놓치지 않았다.
여전히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며 서 있는 그를 향해 재신은 자신의 옆 자리를 손으로 팡팡 쳤다.
시경은 그런 재신의 곁에 천천히 앉았다.
그러나 눕지는 않고, 여전히 재신만 바라볼 뿐이었다.
“뭐야? 시경 씨....별 보자니까?”
“.................”
그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검은 하늘같은 검은 눈을 하고, 재신을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
“시경 씨.......”
“보고 있습니다. 별.......”
“...................”
“지금......가슴 벅차도록....보고...있습니다.....”
시경의 손이 천천히 재신의 뺨을 쓰다듬었다.
분명 오글거리는 말인데, 재신은 오글거리는 게 아니라, 심장이 저려왔다.
정말 그런가 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오글거리는 것들이 하나도 오글거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 정말 사실이었는가 보다.
그의 손길 앞에서 숨을 쉴 수가 없다.
자신을 향해 있는, 오롯이 자신만 담고 있는 그의 눈을 도저히 쳐다볼 수가 없다.
아....어떡하지.....
바람이 불었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슬쩍 흩트리고 지나간다.
그의 눈이 더욱 검게 변했다.
눈을 둘 곳이 없었다.
온 세상이 그로 가득 찼다.
바람도 공기도 나무도 숲도 바다도.....그 무엇도 그라는 세상 앞에서 자취를 잃었다.
가득 차 올라오는 감정 때문에 눈을 감았다.
감은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그의 숨결이 그 눈 위로 스치듯 지나갔다.
부드럽게 놓였다 멀어지는 그의 입술 앞에서 재신은 몰아놓았던 숨을 작게 뱉었다.
그 순간, 그대로 그의 입술이 그녀의 숨을 삼켰다.
마치 누군가 마법을 건 것 같았다.
아니 아니다.
이 남자가 내게 마법을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입술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도록, 손 끝 하나 까딱 할 수 없도록,
그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나를 묶어놓았는지도 모르겠다.
아까까지 가득하던 풀잎의 향기도, 바람의 일렁임도, 별빛의 반짝임도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대라는 아름다운 한 남자만이 존재했다.
입술 안으로 깊이 들어와 자신의 혀와 얽혀드는 그의 혀는 숨도 쉬지 못하게 몰아붙였다.
이곳이 어디인지,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채로, 그저 그에게 취해들었다.
누군가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이곳이 밖이라는 생각도 그 무엇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라는 세상 앞에서 오롯이 여자가 된다.
그의 입술을 받고, 그의 손길에 야한 신음을 뱉는 오직 그만의 여자가 된다.
그의 입술은 어느 새 거친 숨을 뱉으며 그녀의 목으로 내려와 입을 맞추고 있었다.
목을 감싸는 감각 때문에 재신은 터져나오는 신음을 참지 못하고 뱉어내고 말았다.
으음.......
그녀의 색스러운 신음 소리가 공기 중에 퍼지며 그의 정신까지 잃게 만든다.
오로지 만지고 싶다, 느끼고 싶다, 입맞추고 싶다....는 생각뿐, 그 어떤 이성도 끼어들지 못했다.
(중략)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속살에 스며들어오자, 재신은 온 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중략)
하아...하아.....
참으려고 해도, 아무리 입술을 깨물어도 그녀의 입술에서는 견딜 수 없는 신음이 자꾸만 흘러나왔다.
그의 입술은 너무나 야했다.
(중략)
안 되는데.....
여긴 너무 공개되어 있는데.....
머리로는 생각하면서도 재신은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중략)
아........
탄식 같은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입술에 먹히고, (중략) 그녀는 그저 물고기처럼 꿈틀대고 있을 뿐이었다.
(중략)
그녀의 신음은 오롯이 그의 입술 안으로 삼켜지고,
자지러질 듯한 그녀의 몸만이 그녀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줄 뿐이었다.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머리 위로 하늘이 쏟아지고 있었다.
(중략)
그의 입술과 혀의 얽힘 속에서 그녀는 참을 수 없는 신음을 뱉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감각이 몰려왔다.
살면서 이런 감각이 있는지 몰랐다.
이토록 자릿하고 미칠 것 같은, 온몸을 간질거리는,
아니 아랫배를 누를 정도록 강렬한 감각이 재신의 온 몸을 강타하고 있었다.
(중략)
참을 수 없어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그 순간,
(중략)
새까만 밤, 수많은 별들이 그녀의 위로 떨어져 내렸다.
시경도 알고 있었다.
(중략)
자신의 품 안에서 감각의 여운을 감당하지 못해 파르르 떨고 있는 그녀를.......
자신도 미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살면서....살아오면서.....
그 어떤 것도 통제할 수 없는 이런 순간은 없었다.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도, 참을 수도 없었다.
파르르 떨고 있는 재신을 안아 들었다.
재신은 온 몸에 힘이 빠진 듯, 그에게 가만히 안겨왔다.
그저 가쁜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시....시경 씨.......”
시경은 잔디밭 위 글램핑을 위해 쳐놓은 텐트 안으로 놀란 듯 그를 부르는 그녀를 안고 들어갔다.
텐트 밖으로 남녀의 뜨거운 입맞춤 소리가 흘러나왔다.
감각을 견디지 못해, 울음 같은 신음을 뱉어내고 있었다.
아아........
그녀의 탄식 같은 신음 소리가 터져 나오고, 이내 남자의 헉헉대는 숨소리가 섞여 들었다.
아.....시경 씨....조금만......천천히.......
바람 사이로 그를 말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스며나오고, (중략) 소리가 깊게 깊게 나직이 흘러나왔다.
가을.....차가운 바람만 피해 텐트 안으로 들어왔을 뿐인데, 그 작은 공간은 어느 새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다.
두 남녀가 서로를 품으며 내는 소리들이 얽혀들어 자꾸만 야하게 스며들게 만들었다.
그렇게 시경은 재신을 품었다.
그 공간에서, 별이 떨어지던 그 밤, (중략) 그녀의 영혼까지 소유해버렸다.
자신의 아래에서 겨우 숨을 고르고 있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시...경 씨......”
그녀가 또다시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미치도록 가슴이 간질거린다.
또다시 저 아래에서부터 욕망이 불타오르고 말았다.
그녀의 입술에, 그녀의 목에, (중략) 또다시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절정의 끝에서, 이제 막 숨을 고르고 있는 그녀에게 시경은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또다시 밀어닥쳤다.
그녀에게 입만 맞추어도, (중략) 시경의 욕망은 아우성치고 있었다.
그녀를 가지라, 그녀를 온전히 소유하라, 그녀와 (중략) 환희를 맛보라고,
자꾸만 욕망은 그를 다그치고 있었다.
그는 또다시 하얗다 못해 투명한 그녀에게 입을 맞추며, (중략) 다가갔다.
펄떡 대는 활어처럼 꿈틀거리는 자신의 욕망은 또다시 (중략) 희열을 맛보았다.
맛보면 맛볼수록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그녀는 너무나 요염하게, 너무나 색스럽게 그의 욕망을 품었다.
(중략)
그렇게 그녀는 그녀를 향한 욕망에 자신을 놓아버린 한 마리 짐승을 온 몸으로 품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절정을 온 하늘이 쏟아 내리는 그곳에서 맞이하고 있었다.
그대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그렇게 여기 이곳에 있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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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합니다.
그런데....전 왜 이렇게 짠하고 울컥한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야한데, 가슴도 저릿하고 울컥하고 혼자 눈물짓고 있는 이 청승은 무엇인지.......
그것은 야한 아름다운 슬픔 같은 사랑이랄까요.
제게는 그렇게 느껴집니다.
시경의 감정도, 재신의 감정도, 제게는 피부에 와 닿듯이 느껴져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다행이다......
34회의 메인 테마곡입니다.
이 한 곡을 글로 표현한 걸로 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다른 말이 필요 없을 듯합니다.
8회의 은시경의 고백과 같은 곡이라 더 그런 것도 같습니다.
이번 회는, 저 안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와서 울컥하게 만드는 회였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상이, 누구나 하는 그 일상들이 둘에게는 그토록 마음을 움직이고,
가슴을 설레게 하는 그런 회였습니다.
정말 별 거 아닌데....저는 왜 이런 게 이렇게 설레는지,
왜 이렇게 저릿한지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이 허접하고 재미없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게도 여러분이 계셔서 참...다행입니다. (__)
* 헛뜨~~ 1200일로 읽으신 분들, 840일로 고쳤습니다. 이를 어쩔....
3년 4개월 아니고, 2년 4개월입니다.
당기못은 2년 후 돌아오는 것이니,
지금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은 2014년 9월 말입니다.
왜 이걸 헷갈린 건지....죄송함돠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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