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심장] 2회. 그를 잊고 그를 만나다
1
그를.....만났다.
그를 만났으나, 그를 만나지 못했다.
그였으나, 그가 아니었다.
그가 떠난 지 2년.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그를 잃어버린 사고 이후, 나는 여전히 걷지 못했다.
여전히 나는 휠체어에 앉아 있어야 했다.
그 날, 우리가 혼인식을 했던 바로 그 날. 그의 고향에 있는 성당에 가서 관면혼배를 드렸던 그 날, 신은 그를 내게서 빼앗아 갔다.
아버지의 반대도, 오빠의 반대도,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우리 둘만의 결혼식. 그것으로 충분하다 여겼다. 그는 반대했다. 그래도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이렇게 당신을 가질 수 없다고, 그토록 반대했었다.
“나, 당신을....가지고 싶어.”
그 말에 얼어붙어버린 그에게 나는 그저 맑게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렇게 그를 설득해서 갔던 길이었다. 우리만의 결혼식을 올리자고, 신의 축복 아래, 그리 살면 되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그를 설득했다. 그렇게 내 품 안에 그를 가지게 된 줄 알았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돌아오던 길...... 우리만의 첫날밤을 보내자, 그리 들떴던 그 날.....그토록 수줍었던 그 날.....하늘은 우리를 시샘하여 그를 데려가 버렸다.
중앙선을 넘어 돌진해 오던 덤프 트럭을 우리는 피할 수 없었다. 그가 한 행동은 한 가지였다. 왼쪽으로 핸들을 꺾어 온 몸으로 막아버리는 것. 그래서 운전석 옆쪽에 앉은 나를 보호하겠다 생각했겠지. 그 마지막 순간. 그의 눈을 잊지 못한다. 그 처연하던 미소를 잊지 못한다. 그의 눈이 2년이 지난 지금도 내 눈 앞에 있다.
잊어보려 했다. 그와 관면혼배를 드렸던 그 성당에 가서, 이제 당신을 잊겠노라고, 이젠 나를 떠나버린 당신 따위 필요 없다고, 내 가슴 속 어디에도 당신을 담지 않겠노라고, 그리 독하게 말하고 왔다.
그가 들었겠지. 내가 이젠 그를 잊겠다는 걸, 이젠 다른 이를 만나겠다는 걸.......마음....아파할까.......그라면 웃어줄까.......
그가 없는 동안, 미친 듯이 일했다. 걷지 못하는 진한 그룹의 비운의 막내딸이 되어 온 세상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야 했다. 수많은 억측들이 난무했다. 사랑의 도피를 하다가 애인은 죽었다는 둥, 집안의 반대에 자살을 하려했으나, 남자만 죽고 여자는 반병신이 되었다는 둥, 억측과 악의 어린 소문들이 퍼져갔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그는 없다. 이곳에 더 이상 그는 없다. 그러니 그저 미친 듯이 일하면서 모진 목숨, 죽지 못해 살아갈 뿐이었다. 그렇게 잊어보려, 내 존재 이유를 설명해보려, 가치 있는 일들을 해보려 노력했다.
문화와 연관된 일들에 내 열정을 쏟았다. 진한 그룹의 이미지 홍보와 연관되면서 급물살을 탔다. 나라를 위해, 나라의 문화재를 위해 일하는 기업이라는 이미지는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다리도 못 쓰는 죽지 못해 사는 인생, 아버지도 오빠도 그러려니 내버려 두었다. 그래서 문화재의 반환을 위한 일이라면, 그 어디라도 찾아갔다. 다리를 쓰지 못하는 그것도 혼자 살아 남은 재벌가의 딸이 그토록 애타게 쫓아다니는 건, 언제나 이슈가 되었다. 걷지 못하는 여자가 일어서서 몇 걸음만 움직여도, 그들은 죄책감에 휩싸이거나, 동점심에 움직이고는 했다. 값싼 동정에 나를 팔아서라도 도움이 된다면, 뭐라도 할 수 있다 생각했다.
내 목숨값. 죽지 못해 사는 내 목숨값. 그가 자신의 몸으로 막아 살린 내 목숨이니, 그 시퍼런 목숨을 딛고 내가 이렇게 있는 것이니,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고, 살아야 한다면, 적어도 값어치 있게 살아야 한다고, 나를 다독였다.
그와 둘만의 신혼여행을 가기로 했던 그곳. 발해의 땅. 둘이 같이 가보자고, 언젠가 저 곳에서 우리의 유산을 되찾아 오겠다고 오기 있게 말하던 나를 그는 늘 한결 같은 모습으로 격려해주었다.
그와 함께 가려했던, 우리의 시작을 맞이하려 했던 그 나라에서 동.북.공.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와 함께 하려 했던 나라......그곳만은 왜 그리 가고 싶지 않았는지....나도 모르겠다. 아직도 그가 떠났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지도 몰랐다. 그곳에 가면, 그의 마지막을 인정하게 될 것 같아서, 그래서 싫었는지도 모른다. 나 혼자 그 땅을 밟는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젠 뒤로 재껴 디딜 데가 없었다. 칼날 위에 서서, 나는 이제 그를 잊겠다, 선언했다. 그곳에서,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하겠다고 맹세했던 그곳에서 나는 이제 그를 잊는다.
그렇게 길림성, 연길로 떠났다.
돈화시.
발해를 그들의 역사로 바꾸려는 그들의 오랜 작업에 대기업이 조금만 관심을 가져도 시각을 바꿀 수 있다. 아버지도, 오빠도 찬성해주었다. 이슈를 몰고 다니는 내가 그곳을 거니는 것만으로도 관심이 집중될 거라는......멀쩡하지 못한 다리로라도 그 땅을 딛고 일어서면, 우리의 역사를 맥놓고 빼앗기지는 않을 거라는.....그리고 그 역사라는 이름 뒤에 진한 그룹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 역시 꿈틀대고 있었다. 명목은 좋았다. 진한 그룹이 후원하는 발굴단을 방문하는 것이니, 그 나라에서도 크게 반대는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그와 밟고자 했던 발해의 땅을 혼자서 당도했다.
발해의 역사를 돌아보기 위해 목단강 왼쪽에 있는 동모산부터 목단강 오른쪽에 위치한 왕들과 대신들의 무덤이라는 육정산 고분군을 향했다. 그러다가 육정산 고분군 아래에 있는 발해의 궁터라 예측되는 영승유적을 돌아보는데, 어느 한 노파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조선족인가 했는데, 그 노파는 중국어로 말하고 있었다. 한 손에 방울을 흔들며, 수연을 둘러보았다.
“必定六个月前要回来”(6개월 전에 반드시 돌아와야 합니다.)
“什么?”(뭐라구요?)
“六个月后不能回来”(6개월 후에는 돌아올 수 없습니다.)
노파는 알 수 없는 말들을 던지고 있었다. 그러더니 수연의 손에 가느다란 무언가를 쥐어주고는 저쪽으로 질척질척 걸어갔다. 수연이 부르는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마치 언제 이야기를 나누었냐는 듯이, 어디론가로 가버리고 말았다. 손 안에는 검게 변한 은으로 만든 듯한 길쭉한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아가씨! 이건.......”
그녀를 경호하느라 곁에 서 있던 장하가 놀란 듯 바라보고 있었다.
“쉿!”
알 수 없었지만 수연은 그것을 감추었다. 본능이 시키는 대로, 그것을 옷 속으로 감추어 넣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이 곳이 옛 궁터로 예측되는 곳입니다.
여러 터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들이 어떤 생활을 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아, 온돌을 사용했다는 흔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전설로는 이곳에 어떤 샘이 있어서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신의 예언을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 샘의 터는 구체적으로 발견되지는 않았습니다.”
샘이라......
유적지 발굴을 담당하고 있는 팀의 박사님이 수연과 일행들의 안내를 도우며 설명을 더하고 있었다. 주변에서는 조금 떨어져서 기자들도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새로 유적이 발굴되면서 여기 저기 천막이 쳐진 채, 발굴이 진행되고 있었다.
평원과 산이 어우러진 곳이었다.
예전에도 이곳은 이랬을까.
그녀가 피곤해보였는지, 장하와 경호팀은 기자진들에게 오늘 일정은 끝이라며 돌려보내고 있었다.
“진수연 이사님, 더 둘러보시겠습니까?”
유적지 발굴을 담당하고 있는 팀의 박사님이 수연에게 안내를 해주겠다고 했지만, 수연은 혼자서 둘러보겠다며 거절했다. 유적의 터는 꽤 넓었다. 저 멀리 동모산이 보였다. 평원으로 펼쳐진 그곳에서 말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아직 그 터가 다 발굴이 되지는 못했다 했는데......
곳곳에 유적팀들의 발굴이 진행되면서 이리저리 땅이 파헤쳐져 있었다. 왠지 가슴에 남는 곳이었다.
돈화시 숙소로 돌아와 방에 앉아 있는데도 자꾸만 심장이 뛰었다. 자신을 둘러싸고 무언가가 자꾸만 움직이고 있는 듯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었다. 아까 노파에게 받았던 가느다란 금속을 꺼냈다.
그것은 마치 귀이개 같기도 했고, 가느다란 비녀 같기도 했다. 검게 변한 부분을 헝겊으로 닦으니, 제법 반짝거리기까지 했다. 손잡이 부분은 볼록하게 되어 있었고, 예전에는 물감으로 빨갛게 그림이 그려져 있었던 듯 흔적이 남아 있었다. 꽤 아름다웠을 법한 물건이었다.
빛이 바래지 않았다면.....
빛이 바래?
그렇다면......?
뭔가 이상한 예감에 수연은 노트북을 꺼내 발해 유적을 검색해보기 시작했다.
설마!!!!
정말로 그곳에 있었다.
아무르강(흑룡강) 근처에서 나왔다는 발해 장신구.
발해 귀이개라는 이름으로 사진이 나오고 있었다. 은으로 만든 귀이개로 흑룡강성 연안현 발해진 고분군에서 나왔다는 그것과 꽤 흡사했다. 다른 게 있다면, 자연이 가진 것이 훨씬 더 화려하고 장식이 더 있다는 것.
http://www.emuseum.go.kr/relic.do?action=view_d&mcwebmno=75435
<박물관 포털 e뮤지엄, 발해 귀이개 사진>
그럼 정말로 발해 유물이라는 건가.....
그 노파는 도대체 누구길래.....
아!!
장신구를 쥐고 있던 수연의 왼손에 갑자기 전기가 통한 듯 순간 찌릿했다. 그 잔재가 남은 듯 왼손이 파르르 떨렸다.
뭐지....왜 이러는 거지.....?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수연은 자신이 미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알 수 없는 힘에 수연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더 나빠질 게 뭐가 있을까.
그를 잊기로 했고, 이젠 내게 뭐 그리 미련이 남았다고,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상황에서, 이보다 더 못해본들.....싶었다.
수연은 자신의 휴대폰을 들었다.
“예! 아가씨.”
“장하 씨! 지금 당장 극비로 차 좀 준비해줘요.”
“예? 지금 말씀이십니까? 너무 늦은 시각인데......”
“급해요. 바로 준비해줘요.
위에는 알리지 말아요. 꼭 가볼 곳이 있어서 그래요.”
그렇게 수연은 불안해하는 장하를 끌고, 낮에 봤던 그곳으로 돌아왔다. 유적 발굴팀들도 숙소로 돌아간 듯, 평원은 고요했다.
“아가씨....너무 늦었습니다. 돌아가시는 것이.......”
“잠깐만요. 뭔가.....잠깐만 확인하면 돼요.”
평원으로 가는 동안, 아니 영승유적지로 가는 동안 점점 왼손의 떨림을 커져만 갔다. 찌릿찌릿하다 못해 온 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했다.
맞다. 분명 이곳이다.
본능에 의지하며, 수연은 자꾸만 장하를 독촉해서 그쪽으로 몰고 갔다. 그러나 영승유적지에 도착해서는 의외로 찌릿함이 약해지고 있었다.
여기가 아닌가.....
그 순간, 마치 나침반처럼 귀이개의 머리가 서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곳은......동모산이 있는 곳.....
수연은 마치 무언가에 이끌린 것처럼, 그곳으로 향했다.
쨍!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쨍하고 장신구가 금속의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여기다!
수연은 급히 장하를 시켜 차를 세우고 휠체어를 내려 장신구가 시키는 대로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아가씨!!!!! 그러다가 넘어지십니다. 천천히 가십시오!!!”
장하가 달려오기 시작했지만, 수연은 휠체어를 몰고 미친 사람처럼 앞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저러다 넘어지신다 싶었던 그 순간, 수연의 휠체어가 기우뚱하면서 수연이 땅으로 그대로 미끄러져 넘어졌다.
“아가씨!!!!!!”
단 10초, 아니 더 짧은 순간이었을 수도 있다.
이리저리 헤쳐진 땅 사이로,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구덩이가 마치 싱크홀처럼 파여 있었다.
그리고........수연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남은 것은 그 옆에 널부러져 있는 휠체어뿐.
대한민국의 최고의 기업, 진한 그룹의 막내딸은 그렇게 사라졌다.
<다른 곳에서 연재중입니다. 블로그에는 5회까지만 올려둘게요. 그 이후를 보시고 싶다면, 아래 주소로 가셔서 보시면 됩니다.>
(네이버와 북팔에 올린 내용은 거의 같지만, 북팔에는 친구공개 느낌의 글이 있습니다.(조금 다릅니다. 북팔은 연령 설정이 가능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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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팔은 분량상 2개로 나누어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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