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심장] 3회. 땅이 하늘의 별을 가슴에 품은 날
1
대무예(大武藝).
발해(渤海, 대진국)를 세운 대조영의 맏아들로, 발해의 2대 왕 무왕이 된 존재.
그는 발해 사상 가장 큰 영토를 장악했고, 중원을 가슴 서늘하게 만들며, 만주 일대를 누볐던 왕이다.
당대 대륙의 중심이었던 당을, 당의 현종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며, 그를 압박했던 젊은 왕이자, 동북쪽 여러 민족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며, 발해를 동아시아 최고의 신흥 국가로 만들었던 당사자였다.
719년 아버지 대조영이 사망하자, 맏아들이었던 대무예가 왕이 되어 정복에 나섰다. 721년 그가 통치한 지 2년.
아비의 대업을 이어 중원을 누벼야 한다는 강박으로, 우리의 잃었던 고구려의 땅을 찾아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평원을, 고원을 달렸다. 그 사이 어린 시절 정혼했던 비(妃)는 정복을 다녀온 사이, 아비를 따라가고 말았다.
향백국에는 아비의 빈들로 가득 차 있었고, 6부의 대신들은 정비와 후궁을 들여야 한다며 압박을 가해왔다. 그러나 그럴 틈이 없었다. 여자는 귀찮은 존재일 뿐, 그의 대업에 그리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죽은 비의 얼굴도 채 기억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정혼했다고는 하나, 아비가 돌아가기 전까지 그는 당에서 유학하며 정세를 살피고 있었으니, 비와 마주할 시간도 없었다. 전쟁 후 돌아와 몇 번, 예법이라는 의무로 형식상 잠자리를 함께 한 것 외에는, 비와 함께 있었던 적도 없었다. 그의 머리 속은 온통 중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신라의 배신과 당의 압박.
그 안에서 우리의 땅을 찾아야 한다는, 아니 그 이상으로 우리의 기상을 펼쳐야 한다는 압박은 그를 자꾸만 평원으로 달리게 했다. 수많은 전쟁으로 그의 손은 피로 물들어갔다. 후사를 걱정하는 대신들에게 아우 문예(文藝)가 있다며 뭐가 걱정이냐고 넘어가고는 했다.
그의 곁에는 운휘장군과 충무장군이 왕의 오른팔과 왼팔이 되어 그를 지켰다. 피로 맹세한 그들과 함께 대무예는 중원을 누볐다.
그렇게 왕위에 오른 지 2년이 흘렀던 그 날.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아비가 돌아가기 전, 그에게 전했던 비밀은, 큰일이 있을 때 신비의 샘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주술도, 무녀의 말도 믿지 않는 그에게 아비는 너무도 간절하게 유언을 남기셨다.
신비의 샘을 지켜라.
하늘이 움직이는 날, 반드시 신비의 샘을 지켜라.
그도 알고 있었다. 아비가 왜 이곳에 도성을 쌓고 대진국을 세웠는지. 아비는 이곳에서 신비의 샘을 발견했다고 했다. 어느 돌팔이에게서 들은 예언인지 알 수 없는 그것을 아비는 믿고 있었다. 신비의 샘에서 귀인이 나와 발해의 길을 인도할 것이라는 그런 얼토당토 않는 말을 예언이랍시고 아비는 믿었다. 아비는 그곳에서 천상의 세계를 엿본 적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역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비의 맹목적인 믿음이 만들어낸 환상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날은 그랬다. 아비의 말을 들어야 할 것 같은 날이었다. 큰 별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비의 말처럼 하늘이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별들이 찬란히 빛나며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그는 그곳에 갔다. 그곳에 앉아 언제나처럼 가슴에 품고 다니는 어미의 유품을 만지작거리던 순간, 그는 아비의 말을 눈으로 보고 말았다.
물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간헐천처럼 부글대던 물이 어느 순간 높게 솟아올라 떨어졌다. 그리고 그의 품에 한 여인이 안겨왔다.
.......서....대....윤.......?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소리를 내며 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그녀는 그의 품에서 정신을 놓았다.
2
서대윤.......
정말 그일까.......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의 실루엣이 보인다.
언제 저렇게 머리가 긴 거지.....
저 옷은 뭐지.....
몽롱한 가운데 눈을 떠보니, 오래된 방에 누워 있었다.
오래되었다.....
그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이상한 공간.
내부도 장식품도 모두 옛것이었다. 비단으로 덮여진 침구나 방 안을 메우고 있는 것들이 옛스러웠다. 마치 민속촌에라도 온 것처럼 그러했다.
사극 촬영장인가......
아까 넘어지면서 정신을 잃었던 것인가.
“이제 정신이 드느냐?”
익숙한 목소리.......
아니....그리웠던 목소리......
그러나 다시 들을 수 없었던 목소리......
늘 가슴 속에서 반복되던, 목소리.....였다.
내 눈이 바라보고 있는 대상을 나는.......도저히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인가.....그일까......그일 수도 있는 걸까....
나는 지금 어디에 온 것일까.....
나는 죽은 것인가......
“너는, 누구냐?”
그는 답이 없는 수연을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차가웠다. 그는 단 한 번도 저토록 차가운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넨 적이 없었다.
그가 아니다.
그는 저런 눈으로, 저렇게 메마르고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본 적이 없다.
그가 아니다.
그의 목소리로, 그의 얼굴로 그는 알지 못하는 사람의 눈빛을 하고 있다.
진수연....이제 환영을 보는 거니?
이젠 잊겠다며....
이젠 다른 남자 만나서 선보겠다며.....
뭐야......
지금 이건 뭐야....
아직도 그 자리야?
2년을 그리 살아도 그대로야?
아무리 열심히 걸어와도 여전히 난 같은 자리에 서 있었던 거야?
수연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젠 헛것을 보는 거니.......
그러나 그의 다음 말을 듣는 순간, 수연의 호흡이 멈추었다.
“너는 누구이길래 내 아호를 아는 거냐?”
아호......?
“내 아호를 아는 이는, 내 혈육밖에 없다.
이 아호를 아는 이는 이제.....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런데, 어찌 니가 아는 것이냐?”
“당신의....아호라는 것이.......뭐죠?”
수연의 목소리가 떨리는 듯, 공기 중으로 번져 나왔다.
“방금, 니가 부르지 않았느냐?”
무슨 소린지.......수연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는 어디며, 마치 사극의 대사를 읊는 듯한 이 남자는 누구며, 그리고 내가 아호를 불렀다는 것은 무슨 말인지.......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내 아호는......서대윤(徐旲潤)이다.
내 어미가 돌아가시기 전, 부르신 아호.
오직 이를 아는 이는 내 어미와 나, 세상에 단 둘뿐이다.
그런데 그걸.....니가 어떻게 아는 것이냐?”
그는 분명 서대윤이라고 했다.
분명...자신의 입으로, 그의 목소리로, 그의 얼굴로, 그의 이름을 자신의 아호라 했다.
그 순간......힘없이 내려져 있던 그녀의 손이 그의 팔을 잡았다.
“무엄하다. 니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아느냐?
감히.....황체에......!!!”
그의 목소리가 당황한 듯, 크게 울렸다. 그러나 그녀의 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힘이라고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아 보이는 여인이 그의 팔을 잡고 자신의 몸을 일으켜 그대로 그를 안아버렸다.
“....서...대...윤!!!”
그녀의 입술에서 그의 이름이 울려 퍼지는 순간, 황상의 가슴으로 쩡하는 소리와 함께 공기의 운행이 멈추었다.
새로운 공간이 열리는 듯이, 알 수 없는, 그러나 너무나 강력한 기운이 그의 가슴을 치고 지나가 그토록 단단한 사내의 몸을 흔들리게 했다. 순간 정신이 혼미해지고 귓가로 수많은 사람의 소리들이 스쳐지나가다가 다시 공기의 운행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공간은 그 어떤 것도 변함이 없었으나, 황상의 심장만은 이 모든 일을 감당하고 있다는 듯이 밖으로 튀어나올 듯 뛰어대고 있었다.
“너는......도대체......누구냐.......”
황상의 품에, 또다시 정신을 놓은 가녀린 여인이 안겨 있을 뿐이었다.
알 수 없는 것은, 자신이......자신의 손이, 자신의 팔이, 그리고 자신의 몸이 그녀를 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것을 황상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 날은, 땅이 하늘의 별을 가슴에 품은 날.......이었다.
(네이버와 북팔에 올린 내용은 거의 같지만, 북팔에는 친구공개 느낌의 글이 있습니다.(조금 다릅니다. 북팔은 연령 설정이 가능해서요.)
편하신 대로 보시면 됩니다.~^^;)
네이버웹소설 : https://novel.naver.com/challenge/detail.nhn?novelId=252144&volumeNo=10
북팔웹소설 : 4회 http://novel.bookpal.co.kr/viewer/70233
(네이버와 북팔의 회차가 다릅니다. 네이버 3회=북팔 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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