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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신/단편) 새해 (上)

그랑블루08 2015. 1. 6. 09:29

(은신/단편) 새해 (上)

 

 

 

 

 

 

 

1

 

 

, 진짜 숨막혀.

도대체가 아무리 해도 적응이 안 되네.”

 

재신은 왕실 신년 파티에서 집요하게 따라붙던 G그룹의 차남을 겨우 떼어내고 바람을 쐰다는 핑계로 밖으로 나왔다.

어느 틈에 곁에 서 있는, 마치 그림자 같은 그 남자에게 혼잣말하듯이 툭 던져보지만, 그 남자는 그림자로서의 본분을 묵직하게 수행중이었다.

 

아무리 열이 났다고 해도, 겨울은 겨울.

그것도 올 겨울은 더 춥다는데, 어깨를 덮는 숄로는 휘몰아치는 바람을 막기는커녕, 맨살에 소름만 오소소 돋아오게 만들고 있었다.

잠시 부르르 떠는 사이, 따뜻한 온기가 어깨로부터 전해져왔다.

 

웬일이래, 이 남자가?”

 

올 봄에 별 보러 갔을 때만 해도 추위에 떠는 여자 어깨에 옷을 걸쳐줘야 한다는 기본 매너도 상식도 없던 남자가 웬일인가 싶었다.

 

은시경 씨....변했네.”

 

?”

 

갑작스런 그녀의 말에 자신의 상의로 그녀의 어깨를 덮어주던 그의 손이 아주 살짝 흔들렸다.

 

변했다구요, 은시경 씨.”

 

........말입니까?”

 

그녀의 나뭇빛 눈동자가 어느 새 그의 까만 눈을 가득 채웠다.

그 남자의 목울대가 울렁이다 다시 제자리로 찾아드는 것을, 그러나 그녀는 알지 못했다.

 

나 영국 갔다 온 사이에, , 매너특훈이라도 받은 거야?

요즘 궁에서 매너 교육이라도 받아요?”

 

무슨...말씀이신지.......”

 

여전히 그의 검은 눈은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그녀가 웃었다.

 

바보......

 

그녀의 웃음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찬바람 때문만은 아닐 텐데, 그의 가슴으로 서늘한 겨울의 바람이 지나갔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고개를 흔들더니 이내 정원을 걷기 시작했다.

그도 그런 그녀의 곁을 묵묵히 지키며 따라 걸었다.

 

, 영국 가고 나서....뭐 했어요?”

 

아무 말 없이 걷던 그녀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남자에 대해서, 그녀가 없던 그 시간에 대해서 묻고 있었다.

남자는 잠시 마른 침을 삼켰다.

잠시 후 흘러나온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했습니다.”

 

.........

 

그의 일상적인 대답에 또 그녀는 웃고 만다.

그녀의 맑은 웃음소리가 정원 가득 울려 펴지자, 이상하게 그의 발끝이 자글자글해진다.

 

.....웃으십니까?”

 

.........웃기잖아요. 일했겠죠. 당연히. .”

 

이 남자, 무언가 억울한 표정인데...아마 또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할지 몰랐다.

재신은 얼른 표정을 다잡았다. 그러나 입술 끝에 머문 미소까지 거둘 수는 없었다.

 

작은 오빠가 많이 괴롭혔어요?”

 

? 흠흠......아닙니다.”

 

이 남자는 모르는 듯했다. 자신이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을.....

무언가 감출 때면 헛기침을 한다는 것도......

 

, 영국 가 있는 동안 안 보고 싶었어요?”

 

?”

 

나 안 보고 싶었냐구요? 보고 싶었죠? 그죠?”

 

이젠 정말로 그의 검은 눈이 파르르 흔들리고 있었다.

가끔은 이 남자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하기도 하다.

특히 지금처럼 저렇게 눈빛이 흔들릴 때면, 저 남자의 머릿속으로 들어가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됐어. 뭐 그렇게 당황할 필욘 없구요.

그래도, 말썽쟁이 공주라도 안 보니까 보고 싶었죠? 그죠?”

 

흠흠.....

 

그는 또다시 목을 가다듬었다.

그만 놀릴까....또 이 남자 버럭 화낼지도 모르는데.......

 

 

 

2

 

 

 

초여름에 작은 오빠 약혼식 하는 걸 보고는 바로 영국으로 떠났었다.

공항에서 악수를 청하는 재신에게 그는 한동안 머뭇댔었다.

 

뭐야? 나랑 악수도 안 하는 거야?

그렇게 나 미웠어요? 내가 그렇게 괴롭혔어?

치잇~ 그래도 사람이 악수는 좀 해주.....!”

 

그때였다.

머뭇대던 그의 손이 그녀의 하얀 손을 잡았다.

주저하고 있었던 게 맞는지, 그의 손아귀 힘은 셌다.

재신이 조금은 놀랄 만큼, 그의 손은 따뜻했고, 컸고, 강했다.

 

은시경 씨, 고마웠어요.”

 

그 말에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 겨울에 오면, 그때도 나 호위 해줄 거죠?”

 

“.....겨울에...오십니까......”

 

착각이었을까.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허스키하다 싶을 만큼 낮게, 가슴 저 안으로 깊게 가라앉는 듯하게 낮은 음성으로 그녀의 가슴을 울려댔다.

 

.....아마 새해 왕실 파티엔 참석해야 할 거예요.”

 

. 그 때 뵙겠습니다.”

 

은시경 씨도 잘 있어요. 작은 오빠 때문에 힘들겠지만, 잘 참아내요.”

 

그래 여기까지는 이상할 게 하나도 없었다.

대화도, 악수도 모두 이상할 게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말썽 많았던 공주님과 묵묵히 자기 일을 열심히 수행한 근위중대장과의 아주 흔한 대화일 뿐이었다.

단지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조금 강하게 잡고 있었다는 거......

그래서 그녀가 아주 살짝 손을 빼내려 했을 때, 아주 잠깐, 정말 몇 십 분의 일초 정도 그녀의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였달까.

아니, 그녀의 착각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가 준 손의 감각은 아주 오래 갔다.

비행기 안에 앉아 있는 동안도 그 감각은 오랫동안 살아 있었다.

묘했다.

따뜻하고, 강했던 그 남자의 손이 묘하게 오래 남았다.

 

 

 

 

3

 

 

 

며칠 전 쌓였던 눈들이 얼어서 뽀드득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녀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파티장의 음악이 은은하게 공기 중으로 울려퍼졌다.

 

......좋아하시지 않으십니까......”

 

.....

 

또다시 재신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래, 이 남자, 날 참 품위 없게 봤네.

 

그 때 그렇게 강렬했어요?”

 

.”

 

역시 이 남자는 단호박이었다.

 

, 좋아해요. 당연히 좋아하죠.”

 

그런데.........?”

 

, 춤 안 추고 여기 나와 있냐구요?”

 

.”

 

파티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노래를 좋아하고 춤을 좋아하는 공주님이니, 당연히 좋아하시지 않으실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파티장에서 공주님은 무언가 어색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와서는 안 될 곳에 온 듯, 그녀의 태도는 부자연스러웠다.

여전히 아름답게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답답하잖아. 그런 장소......가식적이야. 그래서 안 좋아해요.”

 

공기 중으로 여전히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재신의 눈빛이 다시금 반짝였다.

의아한 듯 바라보는 시경에게 재신은 손을 내밀었다.

 

공주님? 무슨.....”

 

생각해보니, 여긴 안 답답하네.”

 

? 공주님!!”

 

시경이 알아채기도 전에, 그녀의 왼손이 그의 목을 감쌌다.

그의 이마로 핏줄이 돋아나왔다.

긴장하고 있는 건가...........

재신의 오른손이 헤매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허리에 놓았다.

허리로 그의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떨림이 묘하게 그녀의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 지금 너무 적극적인건가, 싶다가도, 이 남자 놀리는 재미가 쏠쏠하니 괜찮다고 스스로 변명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정말로 재미있었다.

당황하는 이 남자를 보는 것도,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그녀의 손을 꽉 잡는 그의 손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는 그의 강한 힘이,

묘하게 간질간질했다.

 

분명 재미있었다.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검은 눈이 깊게 가라앉기 전까지는, 그의 눈이 재신의 가슴 저 안까지 바라보고 있기 전까지는,

그의 눈 때문에 더 이상 바라보기 힘들기 전까지는.....괜찮았다. 재미있었다.

어느 순간......그녀의 눈이 파르르 떨려왔다.

묘했다.

그만 해야겠다 싶으면서도, 놓고 싶지 않은, 무언가 이상한 묘한 감정.......

큰 마음 먹고 손을 빼려고 할 때, 너무나 강하게 잡아오는 이 남자의 손길에 어느 새 심장이 쿵 하고 가라앉았다.

 

이상....했다.

너무 많이....이상...했다.

자신이 이상한 건지, 이 남자가 이상한 건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의 눈이 점점 더 깊어진다고 느껴진 순간, 그녀의 뺨은 조금씩 빨갛게 물들어갔다.

발에 힘이 빠진다고 느낀 순간, 얼어버린 눈길에 그만 그녀의 발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온 몸 가득 그 남자가...그 남자의 품이 다가왔다.

따뜻하고 강한 그 남자의 품이 그녀의 온 몸을 감싸 안았다.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하아........

 

공기 중으로 그의 한숨 소리가 퍼져나갔다.

그러나 그녀는 숨을 죽인 채, 그 어떤 말도, 어떤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숨이 멈추는 것처럼, 심장이 멈추어버린 것처럼, 온 세상이 침묵하고, 또한 온 세상이 뛰어대고 있었다.

 

 

공주님!!!! 공주님!!!!”

 

누군가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어쩌면 계속 되었을 순간이었다.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한다며, 자신을 데리러 온 염중위가 아니었다면, 재신은 어쩌면 그 마법과 같은 순간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수도 있다.

 

파티장으로 들어오면서, 그저 그가 자신의 곁에 있다는 것 정도만 파악할 뿐이었다.

그의 눈을 바라보지도, 그에게 말을 건네지도 못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순간마다, 심장 소리만이 귀까지 울려대고 있을 뿐이었다.

남자의 존재.......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 새해를 위한 카운트 다운을 해볼까요?”

 

형과 형수를 향해 잔을 높이 들고 있는 재하가 새해의 카운트 다운을 위해 무대 위로 올라갔다.

재하의 곁에는 곧 왕제비가 될 항아 역시 어색해 하며 서 있었다.

내려가고 싶어도 재하의 팔이 허리를 휘감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만간 이 개철철이의 면상을 주먹으로 날려주리라 다짐하며 억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올해는 말입니다. 제가 아주 특~~별한 이벤트를 계획했는데 말입니다.”

 

또 무슨 일을 치려고 저러는 건지, 재신은 골치가 아팠다.

큰 오빠의 성격이 부러울 뿐이었다.

저런 사고뭉치 동생을 저렇게 환하게 바라보며 웃을 수 있다니......

큰 코 다쳐 봐야 저렇게 동생을 함부로 내놓지 않지....에효.....

한숨을 쉬는 사이, 재하는 말도 안 되는 이벤트를 설명하고 있었다.

 

카운트 다운이 끝나면, 여러분의 소원을 이루시면 됩니다.

1분간 불을 꺼드릴 테니, 당신의 곁에 계신 사랑하는 분과 함께 편안히 새해를 누리십시오.

, 물론, 아무 숙녀분께 들이대시면, 큰일납니다.

왕실 근위대에 붙잡혀 감옥에서 새해를 맞으실 수도 있으니, 허락 받으신 분들만 가능하신 걸로....

저는............”

 

재하가 만면에 웃음을 띠며 항아를 보자, 항아는 재하의 허리를 팔꿈치로 확 밀어버린다.

 

....어쨌든 제가 드리는 새해 선물입니다.

국왕 전하께서도 사랑하시는 왕비님께.......”

 

그 말에 재강이 잔을 높이 들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 국왕전하께서도 오케이 하셨으니, 저희는 카운트 다운을......”

 

10.9.8.7.........

 

여튼...저 악동.....

 

하긴 외국에선 이런 이벤트야 아무 것도 아니니까, 재하도 뭔가 이 답답한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겠지.

게다가 사랑하는 님도 옆에 있으니, 대놓고 키스하기는 그렇고, 새해를 사랑하는 님과 키스하며 시작하고 싶겠지...이해한다고 이해해.

그래도 솔로 염장을 지르는구나. 질러......

 

발코니 쪽 바로 앞에 서 있는 재신의 뒤로 행사 진행자들이 와서 두꺼운 커튼을 쳤다.

아예 빛이 새어 들어오지 못하게 재하가 단단히 벼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기자들 중에 적외선 카메라 가져왔으면 대박인데......

어차피 카메라 소지가 불가능하니, 왕실에서 제공하는 사진만 싣도록 되어 있었다.

재신은 커튼에 몸을 기댔다.

 

엄청 긴 1분이 되겠네.

 

“3.2.1. 여러분 새해입니다!”

 

순간 재하가 손짓하자, 파티장 내 모든 불이 꺼졌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조차 완전히 막아 정말 칠흑 같은 어둠만이 내려앉았다.

 

재신은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그녀의 손끝으로 누군가의 손이 느껴졌다.

근위대원인가?

 

순간 당황하기는 했지만, 어두우니 아무래도 로얄패밀리인 그녀를 보호하려고 이러는 건가 싶었다.

어차피 이곳은 신원 확실한 재계의 인물들, 나름 빵빵한 인물들만 들어올 수 있었고, 사방에 근위대원들로 깔려 있었다.

불을 끄기 전, 그녀의 주변엔 근위대원 외에 그 누구도 근접하지 못했다.

그 깐깐한 은시경 씨까지 곁에 있는데.....뭐가......걱정이 있!!!!!!!

 

찰나........

 

1분의 찰나.........

 

숨죽였던, 정적의 시간이 끝나고 불이 켜졌다.

누군가는 웃고 있었고, 누군가는 여전히 여운을 즐기고 있었으며, 여전히 연인과의 입술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기도 했다.

 

 

재신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그 순간,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

 

그녀의 입에서 한숨 같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찮으....십니까......”

 

어느 새 쉰 듯한, 조금은 떨리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

주위의 시끄러운 소리가 웅웅대고 있었지만, 그녀는 오로지 단 한 가지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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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은 재하 약혼식 이후 영국으로 갔다가 다시 새해가 되어 돌아온 상황입니다.

은시경과는 6개월만의 재회랄까요.

짧은 2편이 하나 더 있는 이야기입니다.

요건 다음에 가지고 올게요.

참, 배경음악은 한.여.름.밤.의. 꿀.입니다.

한 겨울에 웬 여름? 하시겠지만, 그래도 어울려서리.......

배경음악 틀어놓고 봐주시길.....

 

오래만입니다.

하루 하루 근근히 살아가고 있는 요즘입니다.

하루의 일을 다 하는 게 요즘은 제 목표랍니다.

주어진 일을 다 할 수 있을지, 하루 하루 긴장의 연속이네요.

 

3주간 온 가족이 새벽을 깨우러 다녀오고 있는데,

오늘은 짬을 내서 한 편 적어보았습니다.

오랜만에 써보니 잘 안 써져서...그냥 손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그저 맘대로 쓴 것이니

별 생각 없이 읽어주시길.....

 

열심히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2월말까지는 계속 이렇게 숨 막히는 일정이 이어질 듯합니다만,

그래도 이렇게 짧은 글이라도 가지고 오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