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신/단편) 축제 中
written by 그랑블루
청춘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 청춘은 아름다운 만큼 아팠다.
청춘을 겪어낸 이들에게 청춘은 아름답기만 하다.
그러나 그 청춘을 겪어내는, 그 진행형을 겪어내는 이들에게,
청춘은.......아프기만 하다.
그게 청춘일지 모르지만, 청춘은 아팠고 그래서 아름다웠다.
어쩌면 아프지 않고서는 아름다울 수 없나 봅니다.
지독할 만큼 그 아팠던 기억에 대한 이야기, 한 남자의 짝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I'm In Love (Piano RMX) - Ra.D
사실은 첨봤을 때부터 그댈 좋아했다고
말하기가 내겐 참 어려웠던거죠
먼저 다가서지않으면 그댈 놓칠까봐
편지를 쓰고 또 작은 선물을 준비했죠
깊어지면 상처뿐일거라는 생각에
두려움이 앞선건 사실이지만
간절한 맘으로 기도하고 바랬던 사람이
그대라고 난 믿어
Oh~ I`m in love Oh~ I`m fall in love
어쩔 수 없네요 내 맘을 숨기기엔
그대는 너무 아름답죠
I thought I never gonna fall in love
But I'm in love
Cuz I wanna love you baby
사실은 처음 봤을때부터
내 맘 속으로부터
그댄 파도처럼 밀려들어
온통 하루종일 그대만 떠올라
I can be a good lover
wanna be a 네잎 클로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 줄게요
그댄 gotta believe me
make it never gonna leave me
약속따윈 안 할래요
그냥 보여줄게요
Oh~ I`m in love Oh~ I`m fall in love
어쩔수 없네요 내맘을 숨기기엔
그대는 너무 아름답죠
Oh~ I`m in love I`m so deep in love Oh~ I`m fall in love
어쩔수가 없네요 내맘을 숨기기엔
그대는 너무 아름답죠
그대는 너무 아름답죠
가사 출처 : Daum뮤직
* 축제(상)보다 더 앞의 과거 이야기입니다.
축제(중)을 보시고 축제(상)을 보시면 시간 순서상으로는 맞습니다.
1
귀찮았다.
다가오는 여자들이,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그 여자들의 짙은 화장품 냄새와 향수의 향이 숨을 답답하게 했다.
딱히 여자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귀찮았을 뿐이다.
그만큼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여자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독한 오만함일 수도 있었다.
그 누구나 나를 좋아하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넘어선 오만함....
너무나 많은 여자들이 그의 말 한 마디에, 그의 눈짓 하나에 넘어오고는 했다.
여자란 언제나 그런 존재다, 라는 매우 편파적인 정의가 그의 내면에 성립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 관심이 생기다가도, 금방 자신에게 넘어오는 여자들을 보면, 어느 새 귀찮아지고 지루해지고는 했다.
그렇다고 그가 바람둥이였던 것은 아니다.
그저 관심이 없었을 뿐인데, 시경 때문에 목을 매는 여자들은 많았다.
시경의 거절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여자들도 한 트럭은 족히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경은 더 여자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관심이 없었다.
그는 공부가, 차라리 정치가, 법이 더 재미있었을 뿐이다.
풍물을 하며, 삶을 논하고, 인생을 논하는 것이 더 즐거웠는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에 대한 고민이 그에게는 더 중요했다.
차라리 자본론을 읽는 것이, 신자유주의에 대해, 차라리 제3세계에 대해 읽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동아리에서 그에 대한 토론을 하는 것이 더 두근댔다.
오로지 그것이었다.
여자는, 그의 권역 밖이었다.
그리고 그런 활동들 때문에 다른 동학들보다는 조금 늦게 군에 갔다.
2
처음으로 길게 나온 휴가였다.
상병을 달고 바로 나올 수도 있었지만, 여름까지 기다렸다가 제대로 휴가를 써서 나왔다.
어차피 학기 중에 나와 봤자 만날 수 있는 사람들도 없고 해서, 아예 방학을 맞추어 나온 것이었다.
우리 동아리도 여름이 가장 바쁘니, 그런 것들도 고려해서 여름을 맞추었다.
오랜만에 들른 동아리방은 여전히 들떠 있었다.
선후배와 섞여드는 스터디룸도, 틈만 나면 울려대는 북소리도, 시끄럽다며 옆 동아리와 투닥투닥 싸워대는 소리도
모두 정겨웠다.
시경이 들어서자, 다들 난리가 났다.
이미 그가 휴가를 받았다는 소식이 퍼져서 그런지 다들 몰려와 있었다.
"시경 선배, 더 멋있어졌어요. 완전 멋져요!!"
하트를 뿅뿅 쏘는 여학우들 사이로, 남자 복학 선배들은 질투를 대놓고 해댔지만, 모두들 어쩔 수 없다 싶었다.
그 이름도 유명한 은시경이 아닌가.
그 누구도 그의 대적이 될 수는 없었다.
그는 들어오면서부터 한국대 최고의 킹카였다.
한국대 수석입학에 한 번 놀라고, 그의 배우 같은 외모에 놀라고, 그 이후는 그의 엄청난 박식함에 놀라고 만다.
그러다 보니, 사실 학교 홍보 도우미로 거의 강제로 끌려가다시피 해서 화보를 찍어대야 했고,
1,2학년 때는 학교 행사 때마다 끌려가서 고등학교에서 학교 홍보를 해대야 했으며,
거의 1년 가까이는 그의 사진이 학교 홈페이지에 자리잡고 있기도 했다.
그러니 은시경을 모르면, 간첩이라 할 만했다.
그가 아무리 군대에 가 있다고 해도, 그 오랜 명성은 쉽사리 숙여들지 않았다.
"형, 이번에 들어온 새내기, 아직 못 보셨죠?
우리 완전 킹카 아니 퀸카가 들어왔어요."
동욱의 말에 그저 피식 웃고 있던 시경의 눈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사람에게 꽂혔다.
빨간 머리에 하얀 얼굴, 거기에 엄청나게 큰 눈을 가진 한 여학생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순간, 시경의 심장이 멈췄다.
시경은 자신도 모르게 왼쪽 가슴을 눌렀다.
안 그러면 터질 것만 같아서,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지.....
시경 스스로도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토록 심장이 뛰어대는지, 왜 저 여학생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지, 왜 이렇게 식은땀이 나는지,
생애 처음으로 느끼는, 아니 몸으로 감각되는 감정이었다.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쏠려 있었다.
그녀가 들어서자 공기도 달라진 것 같았다.
동아리 방에 있던 모든 남자들의 시선이 오롯이 그녀에게 향했다.
그녀는 방에 있던 모두에게 인사를 건네며, 환한 미소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 누구세요? 이 분은....."
재신이 그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심장이 자꾸만 쿵쿵 소리를 내며 미친 듯이 뛰어댔다.
뭐라고 말하기 전에 동욱이 그녀에게 그를 소개하고 있었다.
"재신아, 너 처음 보지?
이 형이 그 유명한 은.시.경이다.
알지? 이 형 모르면, 우리 학교에서 간첩인거....."
"아.....예. 안녕하세요? 선배님!
저, 52기 12학번 국어국문학과 이재신입니다!"
그녀가 당당하고 거침 없이 그에게 인사를 해왔다.
시경은 그저 낯설게 약간 미소지을 뿐, 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자신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이러냐, 은시경.....
그녀는 시경이 아무 말도 없자, 그저 맑게 웃음을 짓더니, 곧 다른 선배들이 있는 곳으로 가버렸다.
시경은 그 때 느꼈다.
생애 처음으로 강렬한 충격이 왔다는 것을......
어쩌면, 이제 다시는 그녀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것을......
그 짧은 시간, 마치 벼락에 맞은 듯이, 그의 심장을 강타해버렸다.
3
시경이 굳이 휴가를 미뤄서 여름을 택한 이유는 동아리방의 농활 때문이었다.
나름 역사와 전통을 지닌 행사라, 시경은 일부러 그 시간을 맞춰 온 것이었다.
"이번에...새내기들도 다 가냐? 농활?"
"당연하죠. 형. 새내기들은 필참인데요."
새내기들이 다 간다는 말에 기대가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가 간다.....
그것만으로도 시경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어댔다.
"와 진짜 사람 잡는다. 농활....
이번 여름 왜 이렇게 더워!"
다들 더워 죽겠다며 야단이었다.
새벽 5시에 해가 뜨자마자 나가서 9시가 되어 들어왔는데도 이미 아침 햇살은 너무나 뜨거웠다.
시경은 후배들의 말에 그저 피식 웃고만 있었다.
"형! 형은 안 힘들어요?
막 웃고 계시는데.,...."
"뭐, 그렇지 뭐."
"역시 대한민국 육군은 다른데요?":
웃고 즐기는 가운데, 시경은 재신을 눈으로 찾았다.
빨개진 얼굴을 연신 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처음이면 힘들 텐데, 힘든 내색 하나 하지 않는 모습이 대단하다 싶었다.
같이 온 새내기 여학생들은, 아니 남학생들조차 힘들다고 야단인데, 재신은 그저 입에 미소가 가득했다.
그녀를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언제나 먼저 일하고, 누구보다 먼저 움직였다.
다들 쉬고 싶어할 때도, 재신은 제일 먼저 일어나서 일을 하고 있었다.
"어쩌지? 지금 콩밭 주문 들어왔어."
학생들이 온 걸 알고, 마을 어르신들은 자신들의 밭에 데려가려 이렇게 찾아오시고는 했다.
오후엔 어느 정도 일이 소강상태라 쉬어도 되는 줄 알았다가,
또다시 콩밭을 매야 한다는 사실에 다들 한숨이 터져나왔다.
"크지는 않다는데......
2-3명이면 될 거 같은데...."
"제가 갈게요."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재신이 가겠다고 하자, 다들 대단하다며 혀를 내둘렀다.
"나도 갈게."
시경도 가겠다고 하자 갑자기 뭔가 선착순이 되는 듯, 너도 나도 가겠다며 지원을 해댔다.
어쩌겠나, 남학생들 입장에서는 재신과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되는 것이고,
여학생들 입장에서는 전설의 은시경 선배와 같이 있을 수 있으니,
몸이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같이 가려는 것이었다.
갑자기 지원자가 많아지자, 회장인 상우는 재신에게 알아서 뽑으라며 일임해버렸다.
재신은 가장 먼저 얘기한 시경과, 자신과 가장 친한 민경에게 가자고 했다.
그러자 회장인 상우도 가겠다며, 모두 4명이서 콩밭으로 나갔다.
오후 4시....
여전히 볕이 뜨거웠지만, 그곳을 향하는 네 남녀의 마음은 뭔가 들떠 있었다.
민경은 시경을 흘낏 흘낏 쳐다보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고,
상우는 재신에게 장난을 치며 그녀의 곁에 머물고 있었다.
"와 재신아, 너 전생에 콩밭 매는 아낙이었냐?
너, 장난 아닌데?"
재신이 콩밭을 매는 실력은 정말 대단했다.
단 한 번 배웠을 뿐인데, 속도도 속도였지만, 땅을 솎는 실력도 보통이 아니었다.
주인 아주머니가, 저 처자는 원래 촌에 살았나, 어찌 저리 잘하냐고, 옆에서 엄청나게 칭찬을 해댈 정도로, 재신의 실력은 장난이 아니었다.
콩잎을 3-4개만 남기고 떼어낸 다음, 땅을 몇 번 솎아내면 되는 일인데,
그게 생각보다 만만치가 않았다.
"진짜 선배, 나 전생에 농부였나 봐요. 큭큭"
재신 스스로도 인정하는 듯이, 혼자 키득키득 웃어댔다.
상우는 그런 재신이 이쁘다는 듯, 연신 그녀의 곁에서 자꾸만 장난을 쳐대고, 재신은 그런 상우의 장난을 받아주며 웃고 있었다.
시경은 두 사람을 그저 지켜볼 뿐, 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가슴이 뭔가 자꾸 답답해졌다.
재신이 워낙 속도가 나다 보니, 민경이나 상우에 비해서 훨씬 빨랐다.
민경이 느리자, 상우가 옆에서 왜 그리 못하냐며 타박을 하느라고 둘은 더 더뎌지고 있었다.
시경은 원래 농활을 자주 왔는데다, 군인 체력까지 더해서 재신 못지 않게 빨리 해내고 있었다.
어느 틈에 재신과 시경이 서로 옆에서 콩밭을 매고 있었다.
“안, 힘들어?”
묵묵히 밭을 매던 시경이, 재신에게 말을 툭, 던지자, 뭔가 재신의 얼굴은 신기하다는 듯 시경을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봐?”
“아, 아니에요. 선배.....얘기하시는 거, 첨 보는 거 같아요.”
“어?”
“그게...거의 말씀을 안 하시는 듯해서요.
말하는 거, 싫어하시는가 보다 했어요.”
“아니야, 그런 거.”
뭔가 대화를 이어가고 싶은데, 시경의 입술은 자꾸만 바짝 바짝 말라왔다.
자신이 이렇게 바보 같은지, 처음 알았다.
왜 재신 앞에서만 그러는지, 자신도 알 도리가 없었다.
그녀에게 바보 같아 보일까봐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데, 긴장이 되어 더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렇게 머뭇대는 순간, 재신이 민경을 불렀다.
“민경아, 상우 선배 놔두고 일루와.
괜히 싸우지 말고.”
그 말에 민경은 바로 재신과 시경의 사이로 들어와 콩밭을 매기 시작했다.
민경의 얼굴이 발그레해져 있었지만, 시경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재신의 곁에 와서 재신의 빨간 머리를 잡아당기며 장난을 거는 상우가 자꾸만 눈에 거슬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경의 시선을 민경 또한 보고 있었다.
그 이후 농활이 끝나도록 시경은 재신과 대화를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재신의 근처에 가면, 재신은 자꾸 민경을 찾아서 시경의 곁에 민경을 세워두고 도망가버리는 듯했다.
그리고 늘 그녀의 곁에는 남자 선배들이 드글드글거리고 있었다.
자신은 내년 2월은 되어야 제대를 하는데, 아직도 7개월이나 남았는데....
그녀는 이토록 아름답게 빛나고만 있었다.
불안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딱히 그가 어떤 행동을 할 수도 없었다.
그녀의 눈에 자신은 없었다.
그것이 자꾸만 가슴을 아프게 했다.
4
제대를 앞둔 1월, 마지막으로 휴가를 나왔다.
시경은 심호흡을 하고 재신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재신이니?”
“네. 누구세요?”
“나, 48기 은시경인데.....”
“어, 선배가 웬일이세요?
지금, 군에 계신 거 아니세요?”
“아....휴가 나왔어.”
“와...그렇구나. 곧 제대하신다고 들었는 거 같은데.....”
“제대는 2월......”
“그럼, 3월에 바로 복학하시는 거예요?”
“응.”
뭔가 말을 주고 받다가 또 맥이 끊어져 버렸다.
뭔가 용기를 내서 말해야 하는데, 시경의 가슴이 자꾸만 떨려와서 말을 잇기가 어려웠다.
왜 이렇게 바보 같은지......
“근데, 웬일이세요?”
“아....다들...바쁘더라고.....
그래서 1학년들한테 연락해서 놀아달라고 하는 중이야.
혹시, 저녁에 시간 되니? 되면, 술이나 한 잔 하자.”
그 말을 하기까지 시경의 손에는 식은땀이 절로 나서 전화기를 쥔 손이 미끄러울 지경이었다.
그녀가 대답을 어떻게 할지, 자꾸만 긴장이 되었다..
“어, 그래요?
다들 너무하네. 의리도 없이.....
음....그렇다면, 의리 빼면 시체인 제가 나가야죠.”
“그...그럴래?”
나오겠다는 재신의 말에 시경의 가슴이 또다시 미친 듯이 뛰어대고 있었다.
“그럼, 민경이랑 같이 나갈게요.
어디로 갈까요?”
“학교 앞에 우리 아지트에서 보자.
6시 어때?
저녁 먹으면서 술 한 잔 하지 뭐.”
“예. 알겠습니다.
그럼 6시에 뵐게요.”
그렇게 만난 학교 앞 아지트.....
불판에 고기가 지글지글 타고 있는데, 시경은 그저 소주만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재신의 대화는 오로지 민경과 자신을 이어주는 듯한, 뭔가 묘한 분위기였다.
민경의 뺨이 점점 붉어오고 있지만, 시경은 자꾸만 재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미 대화의 초점은 오로지 민경이었다.
시경은 그저 입을 다물었다.
끓어오르는, 애가 타는 마음을 그저 꾹꾹 눌러놓을 뿐이었다.
“어어, 뭐야, 야, 은시경!!
너 지금, 우리 동아리, 아니지, 우리 대학 최고의 미녀들과 술 마시고 있는 거야?”
동하가 언제 왔는지, 시경의 등을 툭 때렸다.
“야, 너 뭐야, 이 형님에게는 연락도 않고, 재신이랑 민경이만 불러냈다는 거야?”
“왔으면 앉아라.”
동하는 일행이 있다며, 일행과 저녁을 먹은 이후, 다시 합세했다.
앉은 자리에서 계속해서 소주를 입에 붓다시피 하며 시경은 취하지도 않는 술을 마셔대고 있었다.
좀 취하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체력만 좋아진 건지, 정신만 말짱했다.
술잔 사이로, 간간이 그녀의 얼굴을 훔쳐 보며, 또다시 애타하는 마음으로 그저 술만 입에 넣을 뿐이었다.
민경은 점점 취하고 있었고, 재신은 취하지도 않는지 여전히 말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하철 탈 거면, 지금 나가야 하지 않나?”
묵묵히 앉아 있던 시경이 한 마디 하자, 재신이 시계를 보더니 화들짝 놀란다.
“어, 막차 타야 하는데, 빨리 일어나야 돼요.”
큰 길로 급하게 내려온 네 사람이 지하철 역 앞까지 오자, 재신이 시경에게 부탁을 했다.
“전 혼자 가도 괜찮아요.
시경 선배가 민경이 데려다 주면 안 돼요? 얘가 아무래도 술이 좀 취해서......”
시경이 뭔가 난감해 하고 있는 사이, 동하가 교통 정리를 했다.
“내가 알기로 시경이랑 민경이 방향은 완전히 반대야.
민경이랑 나랑 집 방향이 비슷하니까 내가 근처까지 바래다 줄게.
이게 경제적으로나 거리상으로 보나 가장 합리적인 방법일 걸?”
“아, 그래요. 그럼 동하 선배가 민경이 좀 잘 데려다 주세요.”
그렇게 둘을 먼저 택시에 태워 보냈다.
“그럼..안녕히 가세요.”
재신이 시경에게 꾸벅 절을 한다.
“가긴 어딜 가?”
“예?”
“바래다 줄게.”
“아니에요. 저 진짜 튼튼해요.”
“넌....내가...그렇게 불편하니?”
돌직구 같은 물음에, 재신은 놀란 듯 시경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말할 수가 없었다.
시경은 먼저 앞장 서서 지하철 역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괜찮은데......”
그녀가 계속해서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시경은 못 들은 척 했다.
재신은 어쩔 수 없는 듯 그를 따라 들어왔다.
지하철은 그야말로 만원이었다.
막차다 보니, 다들 꽉꽉 차서 들어오고 있었다.
재신은 사람에 치여서 이러다 숨 막혀 죽지 않을까 싶었다.
시경은 반대편 문 옆으로 비집고 들어가서 그녀를 문과 손잡이 봉 사이에 세우고 자신이 그 앞을 막아주었다.
끊임없이 사람들이 밀려들어오고 있었지만, 시경이 든든하게 앞에 서 있는 바람에 재신은 상대적으로 편할 수밖에 없었다.
재신은 이 상황이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너무나 전형적인 상황이었다.
드라마나 영화나, 심지어 고등학교 때 본 하이틴 로맨스나 만화에서,
그야말로 전형적으로 벌어지는 일이었다.
이런 일을 자신이 직접 겪고 있으니, 정말 입술이 바짝 바짝 타오르고,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가슴이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아, 이걸 민경이 했어야 했는데....
그 때 술 취한 사람이 타서는 무리를 해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를 피해서 사람들이 우왕좌왕 움직이자 자신도 모르게 시경도 밀리며 재신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숨결이 재신의 귀에 거칠게 들리자, 재신의 심장이 자꾸만 두근두근대며 뛰기 시작했다.
그의 가슴과 그녀의 가슴이 서로 닿을 듯 가까워져 있었다.
정말 눈 둘 곳이 없었다.
시경의 오른손이 재신의 머리를 지나 벽을 짚었다.
그야말로 재신은 그의 품에 안긴 듯이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도 했다.
자꾸만 긴장이 되는데, 눈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라 결국 눈을 감으며 재신은 벽에 바짝 기대어 서있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숱한 땀내음들 사이로, 그의 스킨향이 가까이에서 느껴졌다.
그 순간 다음 역에 정차를 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이제 좀 내리나 싶은 순간, 갑자기 재신 쪽으로 문이 열리려 했다.
어!!!!
재신의 허리를 감싸는 강한 힘이 느껴졌다.
어, 하며 놀라는 와중에 재신의 허리를 시경이 확 잡아 당겨 자신의 품으로 바짝 안아왔다.
그는 오른손으로 벽을 잡고 지탱하며, 왼손으로 재신의 허리를 강하게 감싸 안아 자신의 품으로 밀착시켰던 것이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재신의 심장이 정말 튀어나올 것처럼 뛰고 있었다.
볼에 그의 단단한 가슴이 느껴졌다.
지금......그에게 안겨 있었다.
그의 팔에 자꾸만 힘이 들어가서 뒤로 물러설 수도 없이 자꾸만 그의 몸에 밀착이 되었다.
재신의 얼굴이 확 하고 붉어졌다.
정차하는 그 짧은 순간이 마치 몇 시간이나 되는 듯이 긴장감으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드디어 문이 닫히자, 재신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그가 놓아줄 것이라고 여기며, 기다렸지만, 그는 여전히 그녀의 허리를 안고 있었다.
아.......
그의 팔이 그녀를 더욱 감싸 안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이 그녀의 머리를 감싸 안고, 자신의 가슴으로 안아왔다.
뭐지....이거....뭐지.......
놀란 재신의 얼굴 위로, 그의 심장이 마치 터질 것처럼 뛰어대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재신을 놓아주지 않았다.
정말로 그는 재신을 안고 있었다.
그의 깊은 한숨소리가, 그리고 거친 숨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간질이며 지나갔다.
그러면서 그의 팔은 더욱더 강하게 재신을 안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머리 위에서 느껴졌다.
그 순간....재신의 심장이 쿵....하고 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흠흠.......
그의 헛기침 소리에 놀란 재신이 흘낏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재촉했다.
지하철에서 내린 이후,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뭔가 알 수 없는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저...선배,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데려다 주셔서 감사해요.”
“아...아니야.....집 앞까지 데려다 줄게.”
“예? 아니에요. 괜찮아요.”
“가자......”
그는 길도 모르면서 먼저 앞으로 쑥 나가 걸어가 버린다.
에효.....
재신은 한숨을 쉬며, 그의 곁으로 가서 걸을 뿐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집 앞, 뭔가 어색한 상황에서 재신이 고맙다며 인사를 하자, 시경이 입을 뗐다.
“제대하면, 보자.”
“3월에 복학하신다고 했죠?”
“그래.”
“그럼, 그때 뵈어요. 시경 선배.”
5
짝사랑.....
제대 후 돌아온 학교에서 지독한 짝사랑이 시작되었다.
자신의 생애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시경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짝사랑 때문에 괴롭다는 친구놈들에게 여자는 많다며, 뭘 그리 목숨을 거냐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고,
그럴 시간에 정치에 관심을 가지라고 까칠하게 한 마디하던 시경이었다.
그랬던 자신이 지금 이런 지독한 가슴앓이를 하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랬다.
재신은 그야말로 동아리의 꽃이었다.
아니다.
어쩌면 한국대 전체에서 가장 주목 받는 퀸이었다.
국문과 이재신이라고 하면, 적어도 이름은 다 들어본 듯한, 그래서 그 때문에 13학번 새내기들까지
우리 동아리에 문을 두드릴 정도로 그녀의 네임 파워는 엄청났다.
그녀는 어김없이 풍물 연습에 나타났다.
그러나 시간을 함부로 쓰질 않았다.
정시에 나타나서, 정시에 사라지고는 했다.
남자에도 관심이 없는 건가 싶다가도, 동아리 남자 선배들과 어울리는 걸 보면, 속이 뒤집어지고는 했다.
어쩌면 저 선배들 중에 그녀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고는 했다.
특히.....작년 회장이었던 상우 형은 뭔가 의심스러웠다.
분명 재신을 보고 있었다.
여름에 추졸을 하는 상우 형은, 좀 더 집요하게 재신의 곁에 맴돌았다.
복학을 하고 수업을 따라가기가 어려운데, 정신 차려야 하는데,
시경은 자꾸만 재신에게 정신이 팔리자, 자신이 한심하기만 했다.
얼마 전 끝난 중간고사도 과히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은시경 사전에 공부 때문에 걱정을 하는 일이 발생하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정신 차리자 싶어, 기말고사까지 천천히 학업이나 따라가자는 마음으로 책도 읽을 겸, 법대 도서관이나 가야겠다 싶어서 동아리방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재신에 대해 후배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재신이 어디 갔냐는, 어디 있냐는 이야기에, 중도에 늘 가서 공부하고 있다는, 그것도 늘 개방식 열람실에 가서 책만 파고 있다는 이야기에
시경은 급히 가방을 메고 중앙도서관으로 향했다.
개방식 열람실로 들어가 주위를 둘러보니, 확실히 시험기간이 끝나서 자리가 텅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창가 자리 쪽에 빨간 머리를 뒤로 찔끈 묶고 책을 읽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재신이다.....
시경은 쿵쿵거리는 마음을 겨우 다잡으며,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그가 와도 신경도 쓰지 않고,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있었다.
시경은 자리에 앉아 한참을 그녀를 바라보았다.
빨간 옆 머리가 흘러내려와 있는 하얀 얼굴과 큰 눈, 그리고 빨간 입술......
그녀는.....보고 있기가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보고만 있어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대었다.
뭔가 이상했는지, 그녀가 눈을 들어 시경을 바라보다가 순간 깜짝 놀란다.
“어! 선배!”
“중간고사 안 끝났어?”
“예? 아, 끝났죠.”
“대단한데?”
“아, 아니에요. 책 읽어가는 과제가 많아서요.
우리과가 좀...독하죠.”
그녀의 얼굴에 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책을 펼쳐 놓아도 책에 눈이 가질 않았다.
자꾸만 하얀 그녀의 얼굴에 눈이 갔다.
이러다 그녀에게 들킬 텐데, 그래도 시경은 그녀를 자꾸만 바라보고 있었다.
안 보는 척, 그녀가 책장을 넘기려 잠깐 고개를 들 때면, 급히 얼굴을 숙이다가도,
또다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다.
그녀가 너무 아름다워서, 자꾸만 심장이 뛰었다.
그저 이렇게 그녀의 얼굴만 보고 있어도, 시간이 정신없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재신에게 문자가 도착했다.
<나가서 차 한 잔 할까?>
그녀가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시경을 향해 미소를 짓는다.
그 모습에 다시 가슴이 뛰는 시경......
두근두근대다 못해 이젠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시경.....
벚꽃이 날리는 봄.....두 사람은 자판기 커피를 들고 중앙도서관 앞 나무 숲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비록 자동판매기 커피였지만, 두근댔다.
벚꽃이 그녀의 머리 위로 내려앉자, 시경은 그녀의 머리 위에 앉은 벚꽃 잎을 떼주었다.
살짝 놀란 듯하던 그녀가 시경을 향해 맑은 미소를 보내왔다.
시경은 방금 떼낸 벚꽃잎을 버리지 않고, 바지 주머니 안에 넣어두었다.
그녀의 몸에 잠시 앉았던 그 꽃잎이 마치 그녀인 양, 시경은 조심스레 넣어두었다.
모두가 바라보는 것만 같다.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들.......
그래서 시경은 두렵고 긴장되고 늘 애가 타는 심정이 되고야 만다.
어떻게...너에게 다가가야 할까...
부담스러울까 걱정되고.....니가 싫어할까 걱정되고....
마음을 보이면, 나를 멀리할까봐.....그게 걱정돼서 쉽게 다가가지도 못하는데....
그러면서도 그녀 주변에 있는 남자들 때문에, 미칠 것만 같다.
“시경 선배.”
“응?”
“왜....법대 도서관에서 안 하세요?
보통은 그곳에서 모여서 하던데..스터디 모임도 많고.....사시 준비 모임도 있고.....”
그 말에 시경은 피식 웃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너 때문이라고, 이렇게라도 니가 보고 싶어서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다.
곁에...있고 싶다.
그러나 그 말을...그녀에게 할 수는 없었다.
밤.......
동아리에서 저녁을 다 같이 먹고 난 후, 한두 시간 책을 보던 재신이 주섬주섬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던 시경도 일어나 짐을 챙겼다.
“어, 선배도 가시게요?”
“응.”
같이 정문으로 걸어나오는 길에 시경은 멈칫 거리며 재신에게 말을 건넸다.
“바래다 줄게.”
“네? 아, 아니에요. 아직 10시도 안 됐어요.
괜찮아요. 시경 선배.”
“........위험해......너......”
“에이..아니에요. 저 얼굴이 무긴데요.”
“무슨 소리야?
너.....넌...정말 위험해.....다른 누구보다도 더......”
“예? 제가 왜요?
저 이렇게 튼튼하고 힘도 센데....”
시경의 말에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재신은 계속해서 아니라고 손사래를 쳐댔다.
“넌.....너무....”.
“네?”
“........너무...........예뻐.........”
그 말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쿵쿵쿵쿵쿵.....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은 시경도, 그 말을 들은 재신도,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고 있었다.
뭐라고 더 말도 못하고, 묵묵히 정문까지 걸어갈 뿐이었다.
“어, 큰오빠!!“
재신에게 그 때 전화가 걸려왔다.
“어, 정문이라고? 나도 정문인데? 아....봤어. 곧 갈게.”
전화내용으로 봐서는 재신의 큰오빠가 오신 모양이었다.
“울 오빠가 왔대요.
전 그럼 먼저 갈게요.”
같이 가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재신은 시경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급히 큰오빠의 차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멈춰서 돌아서더니 재신이 시경에게 외쳤다.
“시경 선배, 혹시....계속 중도로 오실 거예요?”
“어? 어.....”
“풋.....알겠어요.”
그 말에 시경은 뭔가 가슴에 살랑살랑 봄바람이 부는 듯 설렜다.
“재신이 너도......올 거니?”
“네.”
그렇게 두 사람의 도서관 데이트는 시작되는 듯 보였다.
물론 오로지 시경의 입장에서만 데이트였다.
도서관에 오기 전, 몇 번이나 거울을 바라보다, 그런 자신이 한심해서 한숨만 퍽퍽 쉬며 도서관으로 왔다.
어제 그녀가 앉아있던 맞은편 자리에 와서 앉으며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도 시경이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시경의 맞은편에 와서 앉았다.
오늘따라 더 예쁜 것 같아서, 시경은 그녀가 인사를 해도 인사도 제대로 받을 수가 없었다.
얼굴이 붉어졌으면 안 되는데, 자꾸만 얼굴이 홧홧하게 붉어지는 기분이었다.
재신은 잠시 앉아 있더니 전화기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오늘도야?”
“그래, 빨리 와.”
“넌....어쩌고....?”
“난 걱정 말고 빨리 오시죠. 민경 씨.
내 자리 바로 맞은 편에 선배야.”
“고맙다. 친구야! 나 완전 심장 떨려 죽을 것 같애.”
“시끄럽고, 이쁘게 해서 빨리 와라.
야, 근데 그래도 공부하는 것처럼은 입고 와라.
클럽 갈 것처럼 입고 오지 말고.....”
“알았어. 기집애야. 걱정 붙들어 매셔.”
전화를 한 후, 1시간 쯤 지나자 재신이 책은 책상 위에 올려 둔 채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시경은 그런 재신을 보자 놀란 듯 물었다.
“벌써 가?”
“아니요. 일이 있어서 잠시 나갔다 오려구요.”
“그래? 다시 들어오니?”
“그럼요.”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열람실을 나갔고, 그녀가 나가자 마자 민경이 들어와 그녀의 자리에 앉았다.
메뚜기라며, 친구 빈 자리에서 공부하겠다고 했다.
그 때 민경의 휴대폰으로 재신의 문자가 도착했다.
<내 책...내 사물함에 넣어줘.
이상하게 보일까봐 내가 일부러 놔두고 왔어.
너,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알지?>
<고맙다. 친구야.
이 원수, 평생 갚아 줄게. 사랑해~~>
그 상황을 전혀 알 수 없는 시경은 계속 열람실 문을 쳐다보다가 시계를 쳐다보다가 뭔가 집중을 하지 못했다.
그런 모습이 민경에게는 뭔가 이상했다.
동아리 방에서 점심을 먹고 온 이후는 더 심하게 밖을 내다 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뭔가 답답한 사람처럼 시경은 자꾸만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저녁이 다 되어가자, 결국 시경은 참지 못하고 열람실 밖으로 가서 재신에게 전화를 걸었다.
“늦니? 안 들어와?”
“네? 아...네...못 들어갈 것 같아요.
죄송해요 선배. 다시 들어온다고 그래서.....
민경이랑 같이 저녁 드세요. 헤헤....”
“그래......”
실망감에 시경은 온 몸의 기운이 다 빠지는 것 같았다.
하루종일 그녀가 들어오길 기다렸다.
어제와는 완전히 달랐다.
어제 하루 종일 그녀와 함께 도서관에 있으면서 정말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붕 떠있던 기분이 오늘은 지옥의 나락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시경 선배, 저녁 먹으러 안 가요?”
“그래. 가자.”
“저, 괜찮으시면, 우리 술 한 잔 해요. 선배.”
이미 오늘 하루는 날려 버린 것 같아서 저녁이나 먹으며 술이나 걸쳐야겠다 싶은데 민경이 술 한 잔 하자고 하자, 차라리 잘 되었다 싶었다.
늘 가는 동아리 아지트인 고깃집으로 가서 소주를 시켜놓고 조용히 마시고 있는데 민경은 아까부터 얼굴이 붉어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 무슨 일 있니?”
뭔가 이상해서 시경이 민경에게 말을 건네자, 민경은 갑자기 소주 한 잔을 원샷하더니 시경을 똑바로 바라본다.
“시경 선배!!!”
“어?”
“여자 친구, 있으세요?”
“어? 무슨 소리야.......없어.”
시경은 피식 웃으며, 소줏잔을 기울였다.
“좋아해요. 선배!”
시경은 소줏잔을 입에 댄 채로, 그대로 얼어버리고 말았다.
지금 이게 무슨 소린가......
“무슨....소리야?”
“제가 시경 선배 좋아한다고요.”
하아......
시경의 입에서 한숨이 깊게 새어나왔다.
시경은 비어 있는 민경의 잔에 술을 따르고는 자신의 잔에도 따랐다.
그리고는 그대로 한 잔을 입에 털어넣었다.
“미안하다.”
“서....선배!!!”
“나....좋아하는 사람.....있어.”
“여자 친구....없다면서요?”
약간씩 울먹이는 듯한 민경의 목소리를 외면하며 시경은 다시 잔을 들이켰다.
“여자...친구는 아니지......
나 혼자 좋아하는 거니까.......”
“선배.....저 귀찮아서 일부러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다른 선배들 말로는....시경 선배, 여자한테 관심 없다고.....그랬는데.......”
“예전엔....그랬었지......
지금은....있어.”
민경의 눈에는 곧 흘러내릴 것만 같은 눈물이 가득차 올랐다.
“많이....좋아해요? 그 사람?”
“그래.....아주 많이.......”
그의 말을 들을수록 민경의 마음은 칼로 도려내는 듯, 아파왔다.
그는 지금 자신과 마주하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듯했다.
술잔을 기울이며, 그의 눈이 깊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은 민경을 향하지 않았다.
지금 이곳에 없으나, 마치 곁에 있는 듯, 그의 눈은 애잔했다.
그래서 더......가슴이 쓰렸다.
“누군지.....얘기해 주시면 안 돼요?”
“민경아.......”
그때였다.
“뭐야, 이것들!!! 맨날 나만 빼놓고 고기 굽는 거냐? 어?
이거 이거 은시경! 너, 새내기 킬러잖아!
아니지, 민경이 너도 이제 구내기지....큭큭.....”
“염동하, 왔으면 니네 무리들과 조용히 가서 먹어라.”
시경의 말이 뭔가 가라앉아 있자, 동하도 뭔가 이상한 듯, 민경과 시경의 눈치를 살폈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한 게 느껴진 듯, 동하는 친구 무리로 가서 뭐라 말한 뒤, 시경에게로 다시 돌아와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뭐야, 왜 이리 심각해?”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시경은 동하가 오자, 잘 되었다 싶어 화장실 간다는 핑계로 밖으로 나왔다.
담배를 꺼내 한 입 피어 물자, 머리가 약간 핑 도는 듯, 멍해져 왔다.
뭐가 이런지.....
왜 하필......재신이랑 가장 친한 애가.......
그리고 그 순간.....뭔가...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어쩌면 재신은 이미 민경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는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민경이 고백한 걸 보면, 이미 재신과도 상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오늘도.....재신이 일부러 자리를 마련해준 것인지도 모른다.
시경의 가슴이 점점 답답해져 왔다.
담배를 하나 더 꺼내 물었다.
민경이 툭툭 눈물을 흘리며, 고백 얘기를 하자, 동하는 한숨을 퍽퍽 쉬어댔다.
“흠....근데 너 접는 게 낫다.”
“왜요?”
“저 놈..좀 오래 됐어. 생각보다....
군에 있을 때부터 좋아하는 여자 있었던 것 같더라.
소개팅도 죽어도 안 하더라고..
갔다 와서도 그렇고.....”
점점 더 민경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아예 엉엉 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이를 어째야 하나, 난감해 하고 있는 찰나, 민경이라면 죽을 동 살동 덤벼드는 정훈이 녀석이 전화가 왔다.
“야, 김정훈!”
“어, 너 누구야?”
“누구긴 누구야? 너 죽을래? 나 염동하야. 임마.”
“어, 형, 형이 왜 민경이 전화를 받아요?”
“내 말이. 그 말이다. 야, 지금 민경이 술 마시고 울고불고 난리 났으니까 얘 좀 데려 가라.”
“울어요? 거기가 어딘데요?”
“우리 아지트.”
끊는다는 말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린 정훈이 거의 빛의 속도로 아지트에 도착했다.
아마 10분도 안 걸린 듯했다.
취한 채 울고 있는 민경을 부축해서 일으켜 세우는 정훈이의 표정도 정말 속이 터져보였다.
뭔 놈의 화살표들이 이리 어긋나는지...쯧쯧.......
시경은 마셔도 마셔도 취하지 않아 괴로워하다가 결국 자신도 모르게 예전 바래다주었던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의 집 옆 어두운 골목의 담벼락에 기대어 그저 서 있었다.
이미 그녀는 돌아왔는지, 아니면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조차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전화를 할 수도 없었다.
지금 전화를 하면, 자신이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자꾸만 마음이 터져버릴 것 같은데......
그녀가 자신을 피할까봐 두려웠다.
이러다가 심장이 터져버리는 것이 아닐까.....
이러다 병이라도 생기는 게 아닐까....겁이 났다.
사람을......이렇게도....좋아할 수 있구나.....
이렇게 심장에 직접적으로 힘을 가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저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집 앞에 차가 한 대 서더니, 그녀의 오빠인 듯한 사람과 그녀가 함께 내렸다.
시경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재신아, 너 왜 오늘 다른 도서관에 있었어?
내일도 그쪽으로 갈 거야?”
“응.....당분간 그럴 거 같애.”
“왜? 중도는 별로야?”
“아니....그럴 일이 좀 있어.”
“뭔데?”
“그냥...내가 지금 오작교 해주거든.....”
두 사람이 집으로 들어갈 때까지, 아니 그리고 나서 한참이 지나고서도 시경은 그곳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이 계속해서 반복해서 들렸다.
하아.......
웃음인지, 한숨인지 알 수 없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다음날부터 시경은 법대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 수 있다 믿었다.
그 시간 동안, 시경의 가슴은.....그저 타들어가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그렇게 그들은 모두 축제를 앞두고 있었다.
청춘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 청춘은 아름다운 만큼 아팠다.
청춘을 겪어낸 이들에게 청춘은 아름답기만 하다.
그러나 그 청춘을 겪어내는, 그 진행형을 겪어내는 이들에게,
청춘은.......아프기만 하다.
그게 청춘일지 모르지만, 청춘은 아팠고 그래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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