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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상플] 94년 어느 날, 어쩌면 - 제6장 추억 속에서 침묵해야만 하는

그랑블루08 2016. 2. 29. 23:37

[선택/상플] 94년 어느 날, 어쩌면 6  원본 글 : 94년 어느 날, 어쩌면 6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reply1988&no=907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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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추억 속에서 침묵해야만 하는

 

 

 

그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대를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

그대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낄 수 있었던 그날들


그렇듯 사랑했던 것만으로 그렇듯 아파해야 했던 것만으로

그 추억 속에서 침묵해야만 하는 다시 돌아볼 수 없는 그날들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부질없는 아픔과 이별할 수 있도록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대를


- 그날들가사 에서 -

 

1

 

 

자현은 도대체 누구를 향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채로, 그저 육실헐 놈, 엇놈이 울려, 라며 그렇게 덕선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욕을 해댔다. 자현도 뭐가 이상하다 싶었다. 3 때였나, 그 때 이후 덕선이 뭔가 달라졌다는 것을. 무언가 가슴에 생채기라도 난 것처럼 그렇게 한숨을 쉬어대고, 잘생긴 오빠들을 보면서도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자신과 달리, 갑자기 커버린 듯한 덕선이 낯설어 보이기도 했었다. , 정신을 차린 건가, 싶어 시원섭섭했었는데, 이 기집애가 이렇게 자신을 잡고 울 줄은 몰랐다.


삐삐삐삐.....


덕선의 울음도 잦아질 즈음, 삐삐가 울려댔다.


", 덕선아, 이거 그 사람 아니야? 1004 찍혔는데? 우진이라는 그 사람 맞지?"


덕선이 빨개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생각해 보니, 열 받네.

~! 성덕선, 너 지금 나 솔로라고 엿 먹이는 거냐?

넌 애인도 있으면서...와 생각할수록 더 열 받네.

, 당장 니 애인 불러. 도대체 어쨌길래, 니가 이래?

내가 오늘 니 애인 손 보고 만다."


"그런 거. 아니야. 미안해....울어서......"


"우진 씨랑.....싸웠냐?"


덕선은 그저 고개만 저었다.


"근데? 말 못하는 거야?"


"미안......."


"어휴~! 이럴 때 장만옥이라도 옆에 있어서 같이 씹어 돌려야 되는데.....

미옥이 이 년도 독한 년이지.

웬열, 내 인생이 젤 엿 같구만."


"나중에.......나중에....내가 진짜 다~ 정리가 되면, 그 때 말해줄게."


"지금은 아직 정리가 안 된 거야?"


"....."


정리라는 말에 덕선의 눈에는 또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에휴...알았다, 알았어. 기다려줄게. 됐지?

, 빨리 남친한테 전화나 해라. 목 빠지겠다."


커피숍 전화기로 걸어보니 삐삐에 음성이 남겨져 있었다.


<덕선 씨, 오늘 오프죠? 오늘 저도 일찍 마칠 것 같은데, 시간 괜찮으면 같이 저녁할까요?>


덕선은 잠시 망설였다. 우진 씨도 요즘 회사일이 바빴고, 덕선도 곧 비행이 잡혀 있어서 이렇게 잠깐이라도 시간이 되면 만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덕선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한 켠으로 드러난, 균열 사이로 조금씩 새어나온 그 기억이 자꾸만 덕선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덕선이 우진의 삐삐 번호를 눌렀다.


"호출은 1, 음성 녹음은 2......."


안내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덕선의 손가락은 또다시 헤매고 있었다. 결심한 듯 2번을 누른 덕선은 녹음을 시작했다.


"우진 씨, 미안해요. 나 오늘 고등학교 때 친구를 만나고 있어서, 안 될 것 같아요. 나중에 봐요."


수화기를 내려 놓으며 생각했다. 내가 생각해도 나.....정말....나쁜 년이다.

 

 

2

 

 

집에 돌아온 덕선은 멍하니 앉아 있다가 김광석 다시부르기 1집 테이프를 꺼냈다.


작년....

한 동안 미칠 것 같은 마음을 이 테이프를 들으며 견뎌냈다. 아니 견뎌내었다기보다는 들으면서 울었다. 감정을 꺼내고 싶어도 꺼낼 수 없어서 그래서 이 노래를 들으면서, 그저 미치도록 울고 싶어서 울었다.

 

그날도......우진 씨를 만나기 한 달 전.....그 날도 그랬다. 기대했던 만큼 쿵 떨어지던 심장은 이내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소개팅도 글로벌하지 않냐니.....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기대했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연인이라도 된 양,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택이 품에 안기고, 택이 손을 잡고 집까지 오며, 어쩌면이란 상상을 나도 모르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허망한 착각은 단 한 마디에 날아가고 말았다. 얼마나 자신이 한심한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이를 악물고 문을 닫았던 그 날, 덕선은 대문을 닫고 한참을 서서 울었다. 소리가 새어나갈까봐 이를 꽉 깨물고 그저 눈물만 툭툭 흘릴 수밖에 없었다. 뭐가 그렇게 서러웠을까. 자신도 모르게 기대했던 게 속상해서? 아니면 전자 회사 사장 딸이라는 말에 자신이 초라해서? 그랬을까.

 

두 눈 뻘겋게 나타난 딸에게 일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비행기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싶어 초조하게 방 밖에서 딸을 걱정할 뿐이었다. 엄마가 걱정할 걸 알면서도 덕선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한 번 풀려버린 마음은 온통 슬픔을 쏟아내기만 했다. 우는 소리가 새어나갈까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나왔다.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부질 없는 아픔과 이별할 수 있도록.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대를"


그래서 울었다. 심장을 내어놓고 울었다. 정말로 잊혀지면 좋겠다고, 지금 손에 남아 있는 그의 온기를......자신을 바라보던 그 깊디 깊던 검은 눈동자도......자신의 팔목을 잡아 당기던 그의 힘줄이 돋아나던 하얀 손도.....어깨를 감싸안던 그 강한 팔도......가슴으로 느껴지던 그 터질 것 같던 그의 심장 소리도......모두 잊혀지면 좋겠다고.......


오늘 자현의 말 때문에 그 봉인했던 기억들이 깨어나고 말았다. 추억 속에 침묵해야 한다고, 아니 추억조차 꺼내어서는 안 된다고, 내 아래 가장 깊은 곳에 가두어 두고 살짝 들여다보는 것조차 가슴이 저려서 그저 아릿한 고통만 새겨 넣었을 뿐인데, 그렇게 순식간에 수면 위로 드러나 버렸다.


그날들..... 너에 대한 기억들......


내게는 미치도록 두근대고, 미치도록 아팠던 그 날이 누군가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게 가십처럼 흘러다녔다. 기사 제목이 "최택 9, PC 통신에 뜬 훈훈한 미담"이었던가. 나우누리에 올라온 사연들이 소개되고 있었다. 우는 아이와 그 엄마에게 비즈니스석을 양보하고 자신은 이코노미로 갔다는 이야기와 크게 다칠 뻔한 승무원을 구했다는 사연. 그저 그 사연들은 최택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것일 뿐이었다. 최택 9단의 인기가 인기 연예인 뺨을 친다는 것, 팬클럽 회원 수가 가수 김원준 팬클럽 수를 능가했다는 초유의 사태라고 대서특필되기 위한 작은 빌미에 지나지 않았다.

 

덕선은 자신의 삐삐로 전화를 걸어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리고는 수화기를 들어 테이프의 음악을 녹음했다. 눈을 감은 덕선의 눈가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날들 - 김광석

 

그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대를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

그대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낄 수 있었던 그날들


그대는 기억조차 못하겠지만 이렇듯 소식조차 알 수 없지만

그대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흐르곤 했었던 그날들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부질없는 아픔과 이별할 수 있도록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대를


그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대를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

그대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낄 수 있었던 그날들


그렇듯 사랑했던 것만으로 그렇듯 아파해야 했던 것만으로

그 추억 속에서 침묵해야만 하는 다시 돌아볼 수 없는 그날들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부질없는 아픔과 이별할 수 있도록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대를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부질없는 아픔과 이별할 수 있도록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대를


그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대를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

그대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낄 수 있었던 그날들...


녹음을 끝내고도 한참동안 멍하니 음악을 듣고 있는데, 또 삐삐가 울렸다. 우진 씨였다.

 

"삐삐 배경 음악, 바꿨네요? 근데 무슨 일 있었어요?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다라....

오랜만에 친구 만나서 마음이 좀 그랬나 봐요. ...이제 퇴근하는 길입니다.

오늘 덕선 씨 못 만나서 그냥 야근했어요.“

 

그리고 그렇게 음성은 끝날 줄 알았다. 언제나처럼 딱 그까지의 이야기들만 담길 줄 알았다. 그러나 우진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근데....어쩌죠....덕선 씨.

, 병 걸렸나 봐요.

덕선 씨가......너무 보고 싶어요."


덕선은 눈을 감았다. 가슴 저 안으로 싸하게 저릿한 감정이 고통처럼 가라앉았다.


  

3


  

"택아, 뭐하냐?"


늘 병원에서 꼼짝도 못하던 선우가 오늘은 웬일로 집에 들어온 건지 택의 방으로 건너왔다. 선우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택은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 전화하던 거 아니었어?"


택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


"그래?"


"오늘은 들어왔네?"


". 너무 힘들어서. 잠깐이라도 집에서 자야지. 병동에서는 미춰버릴 것 같다.

언제 불려갈지 몰라서 일단 도망 나왔다."


"그래도 돼?"


"안 되지. 나도 모르겠다."


"............"


계속 가만히 앉아 있는 택이가 이상해서 선우가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는 순간, 택이 먼저 입을 열었다.


", 선우야."


"?"


"...혹시 이 노래 알아?"


"? 무슨 노래?"


"가사가.....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다...뭐 그런 내용인 것 같은데....."


"...그거. 그거 엄~청 유명한 곡이잖아.

왜 작년에 김광석 다시부르기 앨범 나왔었는데. 너 몰라?"


택이 처음 들어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테이프 하나 사다 줘?'


"아니. 내가 살게. 가수 이름이 뭔데?"


"... 니가 말한 그 곡 제목이 그....일 거야.

명곡은 명곡이지.

근데 갑자기 그 곡은 왜?"


".....그냥 라디오에 나와서......"


"그래? , 요새 라디오도 듣냐?"


".......그냥 틀어보다가........"


택이 머뭇대며 입을 다물었다.

선우는 뭐라고 더 말하려다 그만둔다.


그날들...그거.....되게 아픈 곡인데......에휴.......

 

"택아....."


"?"


"울지 마라."


"?"


"그 노래 들으면.....그럴 걸.

어휴.........술 땡긴다. 소주나 한 잔 할까?"

 

택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