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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상플] 94년 어느 날, 어쩌면 - 제5장 사랑아, 선택해. 제발 날...

그랑블루08 2016. 2. 29. 23:31
[선택/상플] 94년 어느 날, 어쩌면 5 : 원본 글 94년 어느 날, 어쩌면 5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reply1988&no=898543

* 3화 앞에 이 글의 의도를 자세히 써두었음.
* 스압주의, 썸않썸 주의, 인기녀 혹은 팜므파탈형 덕선 주의, 맴찢 주의. 미안.


5장 사랑아, 선택해. 제발 날...

 

 

 

 

사랑이 내게 오지 않는다면,

정말로 사랑이 나를 선택해 주지 않는다면,

나의 생에 사랑이 와주지 않는다면,

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멱살이라도 잡아서

나 좀 선택해 달라고, 제발 내게 좀 와 달라고,

그렇게 무릎을 꿇어서라도

나를 선택해 주기를.....

그렇게 바라고 바라고 또 바란다.

 

그리고 감히 또 바라고 바라고 바란다.

그 사랑이 너이기를.....

내게 오는 그 사랑이,

나를 선택해 준 그 사랑이

제발 너이기를.....

 

사랑아, 선택해. 제발 날....

 

 

 

1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사람들이 보고 있는지, 어떤 건지, 동기가 옆에서 오올~하며 놀리는 소리도, 그 어떤 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다행히도 난기류는 지나갔고, 바로 식사를 준비해야 했다. 바쁜 게 낫지. 동기도 옆에서 뭐라고 더 떠들 수도 없고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감출 수 없는 건 있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아무리 승객들에게 친절히 말하고, 서빙을 하고, 준비실로 왔다갔다 뛰어다녀도, 저 아래에서 홧홧 타는 듯이 올라오는 뜨거움은 어떻게 하지 못하고, 덕선의 뺨을 자꾸만 발그라하게 만들었다. 남자 승객들이 자꾸 덕선을 흘낏 흘낏 쳐다보지만, 뭔가 붕 떠있는 듯한 덕선은 하나도 알지 못했다.

 

"손님, 식사 어느 것으로 하시겠습니까? 스테이크와 비빔밥 있습니다."

 

", 됐어."

 

택이 앞에서 덕선은 한껏 아닌 척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하듯이 말을 건넸지만, 사실 들을 사람도 없었다. 택의 옆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어차피 옆 사람도 없고, 비행기 소리가 시끄러워서 주변에는 들릴 리도 없다 싶어 덕선도 편하게 얘기하기로 했다.

 

"옆 분은 아직 안 오신 거야?"

 

택이 아까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 안 오실 거야."

 

"?"

 

"내가 아내분과 같이 앉으시라고 했어."

 

"..."

 

그러고 보니 택이가 두 좌석을 잡았다고 했었다. 세상에 그게 돈이 얼마야? 불현듯 괜히 택이만 힘들어진 것 같아서 열이 확 올라왔다.

 

"정말, 아무 것도 안 먹을래? 다른 거 뭐라도 가져다줄까?"

 

"아아니. 아까 죽 먹었잖아. 됐어."

 

뭐라고 더 말하려다 동기가 선반을 당기며 택의 뒤편 손님 쪽으로 진행하자 덕선도 어쩔 수 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택은 덕선이 뒤로 움직이자, 아까 선반을 잡았던 왼쪽 손목을 살짝 돌려보았다. 살짝 삔 건가. 심한 건 같지 않은데, 돌릴 때 약간 시큰거렸다.

 

번잡스럽던 식사와 음료가 모두 제공되고 나니 다시 조금 조용해졌다. 복도의 불이 꺼지고 취침 모드로 돌아가자, 누군가 택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돌아보니 덕선이었다. 덕선은 아무 말 없이 따라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덕선은 자신이 준비하는 준비실이 아닌, 택이가 앉아 있는 바로 앞 준비실 커텐을 열고 들어갔다. 이상하다 싶어 따라간 택의 눈 앞에는 구급상자가 보였다. 덕선은 택이 준비실 안으로 들어오자 커텐을 단단히 치고는 택이 앞으로 돌아왔다.

 

"이거 뭐야?"

 

눈 앞에 놓인 게 뭔가 싶어 택은 궁금한 듯 물어봤지만, 덕선은 뭔가 단호한 표정으로 택이 앞에 손을 내밀었다.

 

"!"

 

"?"

 

"왼손 내라고!"

 

덕선은 머뭇대는 택의 손을 확 하니 가져와서는 살살 만져보았다.

 

"아파?"

 

"...?"

 

"아프냐고."

 

뭔가 얼이 빠진 듯한 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어~짓말!"

 

덕선은 다 안다는 듯이 택의 손목에 연고통을 꺼내더니 바르기 시작했다.

 

"이거, 좋은 거야. 내가 잘 다니는 한의원에서 받은 건데, 발목 시큰거리거나 삐거나 할 때 바르면 직빵이야. 사실 이거 전기 마사지기로 마사지하면 더 좋은데...."

 

연고를 듬뿍 바르던 덕선은 갑자기 손을 닦고 자신의 두 손을 열심히 비비기 시작했다.

 

"...?"

 

"이렇게라도 하면, 손에 열도 나고, ()도 돌아서 마사지하면 좋대. 전기 마사지기보다는 못해도, 아니지, 사람 손의 기()가 더 좋을지도 모르지."

 

혼자 뭐라고 뭐라고 궁시렁대는 게 마치 중학교 때 덕선을 보는 것 같아 택은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정작 택이 미소짓고 있다는 걸, 택이 자신도, 덕선도 몰랐다는 것이 함정이지만 말이다.

 

덕선은 정말 시술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턱의 손목을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덕선의 행동이 귀여워서 미소짓고 있던 택도, 덕선이 엄지손가락으로 손목을 살살 문질러대자, 뭔가 뭉쳐 있던 것이 풀리는 것도 같았다.

 

"한의원에서 하면 최소 10분 이상은 이렇게 전기 마사지기로 하는데, 우리는 그럴 순 없으니까, 5분이라도 하자. 약이 제대로 스며들어야 하니까 아파도 조금만 참아."

 

덕선은 너무 힘을 주면 택이 아플까봐 살살 조금씩 문질렀다. 그런데 문지르다 보니, 손목 위쪽도 약간 부어 있는 듯했다. 살짝 건드려보니, 택이가 약간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안 아픈 척 하고 있지만, 그 윗쪽 근육까지 놀란 게 확실했다.

 

하필이면 왼손이야. 애 밥 먹기도 힘들게.....

 

당분간 아플 텐데 걱정이었다. 그래도 다시 생각해 보니, 오른손이 아니라 다행인 건가 싶기도 했다. 바둑은 오른손으로 두니까, 밥 먹을 때야 정 안 되면 가족들이 도와주면 되는 거니까.

 

"택아. 좀 아프더라도 조금만 참아. 그래도 삐었을 때 24시간 내로 바로 치료하면 바로 나으니까, 지금 아파도 해야 돼."

 

덕선은 작정을 하고, 택의 왼쪽 팔을 위로 확 걷어 올렸다. 그러고는 왼쪽 팔 접히는 부분부터 손목까지 다시 연고를 다 바르고는 다시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움찔하던 택이도 뭔가 고요했다.

 

"괜찮.....!!"

 

괜찮은 건가 싶어 살짝 눈을 들어 택이를 확인하는데, 덕선은 택의 까만 눈동자와 마주치고 말았다. 택의 눈이 덕선의 눈을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

 

택의 눈은 이런 눈이 아닌데...... ....아니다. 딱 한 번, 내 생애 딱 한 번 택의 이런 눈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날....죽어도 잊지 못하는 19살의 그 날....그 밤.....이 아이의 눈빛이 지금과 같았다. 순하다고, 착하다고만 생각했던 눈이, 남자의 눈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듯한, 아이가 아니라 순식간에 남자가 되어버린 택이가 낯설었다. 그 검은 눈이 덕선을 삼켜버릴 것처럼, 심연의 못처럼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숨이 턱하고 막혔다. 눈을 마주보지 못할 만큼, 뭔가 부끄럽고, 무언가 이상한 감정들이 저 안에서 자꾸만 기어다니며 간질거렸다. 덕선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이제 그만해도....."

 

택의 손을 놓아주는 순간, 택의 손이 덕선의 손목을 잡았다.

 

"...........?"

 

놀라서 바라보는 덕선을 택은 힘을 주어 조금 더 자신의 쪽으로 잡아 당겼다.

 

!!!!!!!!

 

바로 그 순간, 준비실 안의 인터폰이 울렸다.

마법과 같았던 순간은 깨지고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왔다. 덕선은 이미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덕선아, 이제 식사하러 와. 우리 식사 다했어. 바로 교대하자."

 

"?.......알겠어."

 

얼이 빠진 듯 대답하던 덕선은 택은 보지도 못하고, 지금 밥 먹으러 가야 한다며, 아까 데워두었던 뜨거운 수건을 택에게 건넸다.

 

"이걸로 닦아."

 

"...?.......그래....."

 

둘 다 무슨 정신으로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채로, 우왕좌왕하던 덕선이 먼저 커튼을 젖히고 나갔다. 택이는 수건이 뜨거운지도 모른 채, 한참 동안이나 수건을 든 채로 나오지 못하고 그저 목석처럼 서 있었다.

 

 

 

2

 

 

 

무사히 착륙한 후, 일정리를 하고 공항로비로 나오는데, 이 부장님과 유 대리님이 택이를 붙들고 뭐라고 한참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저거 저거 또 고집피우고 있네.

 

택이는 자신이 하기 싫으면, 저렇게 입을 꽉 다문 채로, 정말 목석처럼 있다.

 

저럴 때 보면, 똥고집 정말 장난이 아니야.

 

덕선은 아무래도 짚이는 데가 있어서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 사이 택이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덕선 양. 진짜 잘 왔어.

난 못하겠네. 덕선 양이 좀 설득해 봐."

 

", 안 가겠대요?"

 

"그래, 저 황소 고집, 어휴.....최 사범 고집을 누가 꺾나."

 

"그러게 말입니다. 손목이 안 좋으시면 식사하시기도 힘드실 텐데요."

 

이 부장님도 유 대리님도 한의원에 데려가려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안 그래도 덕선이 두 사람에게 택이 손목을 삐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춰야 한다고 언질을 주었었다. 그러나 이렇게 안 가겠다고 버틸 줄은 몰랐다.

 

"두 분 먼저 가세요."

 

"? 어쩔려고?"

 

"제가 택이 나오면 어떻게든 해볼게요. 먼저 가세요.

어차피 집도 같은 방향이니까 저랑 같이 택시 타고 가면 돼요."

 

"그럴래? 고마워.

유 대리, 우리는 먼저 가자고. 어차피 옆에 있어도 도움이 안 돼."

 

".....이 부장님....!"

 

이 부장은 뭐가 바쁜지 자신의 여자친구 얼굴이라도 보고 가려는 유 대리를 질질 끌고 공항 밖으로 나가 버렸다.

 

"! 덕선아!"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는 덕선을 보자, 놀란 듯하던 택의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올랐다.

 

"지금 웃을 때야?"

 

"? .....?"

 

"왜라니. 몰라서 물어?"

 

"....내가......잘못했어?"

 

"그래, 아주 많이 잘못했다. , 무조건 나랑 같이 가야 돼."

 

"? 이 부장님과 유 대...."

 

"두 분은 기원 일 때문에 먼저 가셨어. 그러니까 무조건 나랑 같이 가자."

 

택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뭐가 좋은지, 자꾸만 웃음이 입가에 걸렸다.

 

 

 

3

 

 

 

덕선이 택이를 데리고 택시에서 내린 곳은 공항 근처 한 한의원 앞이었다.

 

"....."

 

"최 택!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따라와."

 

덕선은 택의 왼손을 잡았다가 아, 맞다 하며 오른손으로 다시 바꾸어 잡고는 한의원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택이가 가지 않겠다고 버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술술 딸려 왔다. 택의 눈은 오로지 덕선과 맞잡은 자신의 손만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덕선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한의원 원장님께 인사를 하느라 손을 놓았을 때, 그 손을 다시 잡고 싶어서 덕선의 손 근처를 헤매다가 왔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 덕선 양. 오랜만이네. 또 발 삔 거야?"

 

"아니에요, 원장님. 오늘은 다른 사람을 좀 데려오느라....."

 

"? 누구? !!! 혹시 최택 9....? 맞죠? 최택 9?"

 

"? .... 안녕하세요?"

 

"...이거 진짜 영광인데요. 방금 전에 뉴스에서 본 사람이 여기 있네.

...이거 참....."

 

아버지 뻘은 되어 보이시는 원장님은 최택을 보자 몇 번이나 일어섰다 앉았다 하시질 않나, 밖에 차 좀 부탁한다고 여러 번 왔다 갔다 하시질 않나,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덕선은 그저 흐으흥...하며 예의 웃음을 지었고, 최택은 그저 바닥만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원장님 침은 하나도 안 아파. 진짜야."

 

그러나 침이 손목에 들어갈 때는 택의 미간이 좁혀졌다. 생각보다 좀...아픈가......

 

"언제 삐었어요?"

 

"........6~7시간 정도 됐어요."

 

덕선이 대신 대답했다.

 

". 그럼 괜찮을 거야. 근데 의외로 근육이 괜찮은데? 임시 처치를 잘 했나봐?"

 

", 주신 연고로 제가 마사지를 해.........."

 

덕선은 말하다 말고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마사지..... 택도 같은 상황이 떠올랐는지 귀가 빨개지기 시작했다. 택은 괜히 흠흠하며 마른 침을 삼켰다. 택도 덕선도 서로를 보지도 못한 채, 괜히 벽에 걸린 무언가를 보는 척했다. 물론 나와서는 도대체 뭐가 걸려 있었는지 기억도 못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원장님은 혼자 들떠 있어 전혀 눈치 채지 못하시고는 마사지를 아주 잘했다며, 아주 오랫동안 칭찬을 해댔다.

 

그 미칠 것 같이 부끄러운 시간이 어서 지나기만을 바라는 중에, 시간이 다 되어 침을 뽑는 사이, 원장님이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 덕선 양, 지금 사귀는 사람, 혹시 있어?"

 

"? ....지금은 없어요."

 

그럼......?”

 

원장님은 딱히 무어라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눈짓으로 택과 덕선을 번갈아 보았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저희 그냥 친구예요.

동네 소꿉친구.“

 

"그렇지? 그럼, 잘 됐네. 사실 내가 덕선 양에게 소개해 줄 사람이 있는데....."

 

"?"

 

"사실은 말이야. 우리 아들놈인데 말이야.

내가 저번에 한의원 사진 몇 장 찍어서 보냈는데, 그 때 덕선 씨가 물리치료실에 있었나봐.

그거 보고 아들놈이 덕선 양 소개해 달라고 난리야. 곧 한국 들어오는데 한 번만 만나 봐."

 

"아유, 원장님. 왜 그러세요?"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만나 봐. 내 아들이지만 꽤 성실하고 착한 놈이야."

 

". 계속 그러시네. 그럼, 아드님 들어오시면 연...?"

 

덕선의 주치의처럼 잘 해주시는 분이라 계속 거절할 수가 없어서, 대충 대답만 해 놓고 나중에 시간이 안 된다고 해야겠다 싶었는데, 순간 조용히 곁에 있던 택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덕선아!!!"

 

"...?"

 

"가자."

 

"무슨 소리야? 너 물리치료도 좀 받고....."

 

"감사합니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 벌써 가시게요?"

 

". 기원에 일이 있어서. 죄송합니다. 그럼......."

 

택은 덕선의 손을 쥐고는 원장실을 나와서 순식간에 계산을 끝내고 한의원을 나와버렸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얼떨떨한 표정으로 문만 지켜보던 원장님은 한참 후에야 아, 사인! 하며 아쉬워할 수밖에 없었다. 택의 손에 이끌려 정신없이 밖으로 나온 덕선은 순간 자신을 잡은 손이 왼손이라는 걸 알고는 소리를 질렀다.

 

"택아!! 택아!! 너 왼손이야. 왼손!!"

 

"?"

 

그제야 멈춰 서서 덕선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택의 왼손은 덕선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너 지금 다친 손으로 내 손 잡았다고!"

 

"....."

 

아까의 상남자는 어디 가고 다시 예전 택이로 돌아왔다.

 

"너 이러면 치료 효과 하나~~도 없어. 조심해야지."

 

덕선이 자신의 손을 놓자, 뭔가 못마땅한 듯 보던 택이 오른손으로 다시 덕선의 손을 잡았다.

 

"? !"

 

"됐지?"

 

택은 여전히 덕선을 잡은 채, 택시를 잡으러 길가로 나갔다.

 

"근데 택아....."

 

"?"

 

", 혹시 기분 나쁜 거 있었어? 한의원에서?"

 

"....아니......"

 

저건 거짓말이다. 덕선은 분명 보았다. 처음 덕선을 끌고 나올 때, 택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화난 표정이었다. 이렇게 화난 표정은 정말 잘 본 적이 없는데....특히 덕선에게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표정이기도 했다. 이 아이는 자꾸만 낯설어지고 있다. 내가 알던 택이가 아닌 것 같아서 조금은 서글픈 덕선이었다.

 

"...그래?"

 

"아니야. 아무 것도."

 

알 수 없었지만, 더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았다. 결국 상처받는 것은 오롯이 자신일 터.

 

그렇게 덕선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아무 일도 없었는 척, 택시 안에 택이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둘은 택시 안에서 아무 말도 없었다. 슬쩍 돌아본 택이는 마치 화난 사람처럼 정색한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그 주먹 위로 자꾸만 푸른 핏줄들이 튀어 올라왔다. 택시 운전사가 룸미러로 택이를 보며 몇 번이나 갸우뚱거렸지만, 정작 둘은 아무 것도 몰랐다. 그저 이 숨 막히는 정적이, 둘만 있는 이 공간이 낯설고, 긴장될 뿐이었다. 아주 작은 움직임도, 작게 침 넘기는 소리도, 흠흠대며 목을 가다듬는 소리도, 아주 작게 새어나온 한숨 소리까지, 두 사람의 세포를 하나하나 일깨워 예민하게 세워놓는 듯했다.

 

택시에서 내려 골목 안까지 걸어오는 길.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는 낮이었는데 어느 새 어둑어둑 해가 지고 있었다. 차라리 다행이야. 덕선은 차라리 어두워졌으면 싶었다. 택이와 함께 걷는 동안, 자신의 표정이, 자신의 감정이 들키질 않길 바랐다. 그러다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어차피 얘는 모를 텐데..... 대낮에 해가 쩡쩡했다고 해도, 얘는 아무 것도 모를 텐데, 내가 뭘 걱정하나, 싶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없이 초라해졌다. 마치 비행기의 일은 눈만 뜨면 사라지는 백일몽처럼, 그렇게 물거품처럼 없어지는 한여름 밤의 꿈일지도 모른다. 내 기억이 만들어낸, 아니 내가 만든 동화 같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덕선은 그래서 두근댔던 만큼 또다시 슬퍼졌다. 오랜 습관처럼 또 다시 슬픔이 찾아왔다.

 

"잘 가. 팔목 조심하고."

 

덕선은 자신의 집 앞에서 택이에게 안녕을 고했다.

 

"오늘.....고마웠어. 너 아니었음 큰일날 뻔했다."

 

택은 덕선이 고맙다고 해도, 들어가라고 인사를 해도, 그저 목석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아니 덕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들리지 않는 것같이 보였다. 덕선이 들어가, 말아를 고민하는 사이, 택은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뗐다.

 

"....덕선아...."

 

"? ?"

 

대답하는 덕선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떨려나온다.

 

"........요즘 소개팅 많이 해?"

 

"...갑자기 뭐야? 그런 건 왜 물어?"

 

"그게.....주변에서 많이...그러는 거 같아서.....

승객들도 좀..그런 것 같고."

 

덕선은 갑자기 왜 이런 걸 묻는 건가 싶었다. 사실 덕선이 일하는 모습을 택이가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같은 비행기를 탄 적도 손에 꼽혔고, 지금처럼 제대로 맞닥뜨린 적은 더더욱이 없었다. 그저 알게 모르게 서로의 시간이 빗나가곤 했다. 처음엔 우연이었는지 택이가 피한 건지 알 수는 없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덕선이 피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였다.

 

"이번 비행에서는 별 손님 없었는데. 게다가 난기류 때 그 난리를 쳤는데, 누가...흠흠...아니지.

, 가끔 있지만, 그래도 상도덕이라는 게 있지. 승객들하고는 안 만나. 직장이잖아."

 

"......"

 

뭔가 알겠다는 듯 택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표정이 뭔가 마음을 놓는 듯한, 안도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는데?"

 

덕선의 물음에 또다시 택이가 답을 하지 못한 채,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아니 시선을 피하는 건지, 무언가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다음 무언가 결심한 듯이 택의 눈이 덕선의 눈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지금 말이다.

 

"...택아?"

 

그 눈빛이 너무 깊어서, 마치 깊은 연못에 빨려드는 것만 같아서, 아까의 마법이 다시 시작되는 것만 같아서 덕선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심장을 한 손으로 꾸욱 눌렀다.

 

"...선아......"

 

대답을 뭐라도 하고 싶었지만, 덕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마른 침만 삼킬 뿐이었다. 도대체 이 아이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 아까 그 소개팅, 할 거야?"

 

"..?"

 

덕선의 심장이 쿵하고 떨어져 내렸다. 덕선은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것인가 의심했다. 소개팅? 왜 자꾸 소개팅 얘기를 하는 거지?

 

"... 할 거냐고."

 

그의 질문은 단호했다. 착각하면 안 되는데, 자꾸만 착각할 것만 같은데. 덕선의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뛰어대기 시작했다.

 

", 소개팅, ......"

 

끼이이익!

 

", 택아!!! 언제 왔노. 덕써이도 있네. 우째 맹키로 이래 만났노. 같은 비행기라도 탔나?"

 

", 안녕하세요? 아줌마.

. 오늘 비행기에서 만났어요."

 

"하모야, 신기하네. 둘이 그래~~ 잘 붙어 댕기드마, 요새는 바빠가 잘 몬봤제?

오늘 반가바가 이래 수다 떨고 있는가배?"

 

"......."

 

", 덕선아, 잘 됐다. 니 이거 가가라. 오늘 내가 산나물을 마싰~게 무쳤다 아이가. 이거 성님 좀 갖다주거래이."

 

". 아줌마. 감사합니다."

 

"그라마 얘기 좀 하다 들온나. 내 먼저 드가께."

 

". 들어가세요. 아줌마."

 

문을 열고 다시 들어가려던 선영은 아, 내 정신 좀 봐라 하며 다시 택을 불렀다.

 

"택아, 맞다. 아까 기원에서 전화 왔는데, 내 요새 깜빡깜빡해가 바로 안 카마 다 까묵는다.

정신이 있을 때 말해야제. 거 와, 이번 주에 니 선 보는 거 알제?"

 

"...?"

 

"니 선 봐야 된다 카던데. 토요일 3ㅅㄹ호텔 1층 커피숍이란다.

절대 까묵으면 안 된단다. 거 와, ~명한 전자 회사 사장님 딸내미라는데,

미국서 택이 니 본다꼬 일부러 나온다 안 카나.

니 저얼~~대 까묵지 마래이.

유 대리가 당부를 엄청씨럽게 하더라.

, 인자 진짜 드간다."

 

끼이익 쾅.

 

문이 닫히는 소리 사이로 갑자기 뭔가 현실감이 확 들었다.

 

미친. 성덕선.

 

하아.....

 

택이 한숨을 쉬었다.

 

"저기...덕선아....."

 

택이가 무언가를 말하기 전에, 먼저 말하기로 했다. 내 남은 모든 힘을 짜내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러나 떨리는 목소리는 숨기지 못한 채, 입을 뗐다.

 

"너나 나나 미국이랑 뭔 인연이냐?

소개팅도 글로벌하지 않냐?"

 

"덕선아...그게...."

 

"나 들어갈게. 너도 소개팅 잘하고. 잘 되면......"

 

한 번에 말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목이 메었다.

 

"나한테....흠흠....소개도....시켜주고.

그럼, 잘 가."

 

"덕선아!!!!"

 

택이의 애타는 목소리가 들리지만, 덕선은 대문을 열고 들어와 쾅하고 닫아 버렸다. 마치 새어나가는 마음을 다잡으려는 듯이 그 소리만으로도 그 마음이 끊어질 것처럼 그렇게 덕선은 마음의 문도 닫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4

 

 

 

그래 그랬구나.

비행기, 아이, 아이침대. 우진 씨를 만나기 한 달 전쯤의 기억.

그렇게 가슴 깊숙이 묵혀 두었던, 비밀스럽게 잠가두었던 결계가 풀어져버렸다.

 

결국 나는 자현의 말처럼.....다른 사람에게서 그림자만 찾고 있었을 뿐인 거다.

우진 씨에게서 그 사람의 그림자만 찾고 있다 해도, 그래서 내가 지옥에 떨어져야 한다고 해도, 그래도 살고 싶었다.

이 미칠 듯한 사랑이란 놈으로부터 좀.....나 좀 살려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덕선아...너 왜 그래? ? 너 왜 그래!!!"

 

툭툭툭툭......

 

덕선의 눈에서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참고 참았던, 안으로 채워넣고 채워넣고 이제 더 이상 채워넣을 수조차 없이 터져버릴 듯한 감정이 그 미세한 균열 사이로 폭발해버렸다.

 

"자현아...만약에...만약에 말이야.

사랑이...절대로 나한테 오지 않으면 어쩌지?"

 

"무슨 소리야? 그게?"

 

"사랑이, .....선택해 주지 않으면 어떡해?"

 

"! , 우진 씨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데 무슨 소리야."

 

"자현아....엉엉......사랑이 말이야...

정말로 날.....선택해주지 않으면........어떻게 살아......."

 

"야아~~ 너 진짜 왜 이러냐. 울지 마.

헛소리 하지 말라고 해.

니가 왜 사랑이 안 와. . 반드시 와. 오라 그래.

사랑보고 말해. 날 선택하라고. 사랑 그놈보고 널 선택하라고 멱살이라도 잡고 데려 오면 되지."

 

사랑아.......선택해.......제발.........

이러다 정말 죽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