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팔 선택 상플/(선택) 94년 어느 날, 어쩌면

[선택/상플] 94년 어느 날, 어쩌면 - 제3장 수면제가 의미하는 것

그랑블루08 2016. 2. 27. 23:29

[선택/상플] 94년 어느 날, 어쩌면 3  원본 글 :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reply1988&no=891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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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94년 ㅇㅅㅎ 콘서트 가기 전 어느 날의 이야기야.
내가 볼 때 덕선이는 둘째로서의 트라우마가 강하지만, 또 그만큼 그 트라우마를 깨려고 하는 노력도 대단한 것 같아.
그래서 토익 700이 나올 정도로 공부도 하고, 어엿한 직장도 얻고, 그렇게 자존감을 높여가야 할 덕선이가,
이상하게 남자 문제 있어서는 계속 "나 차인 거 아니다"를 외치는 것이,
왠지 자꾸 마음에 걸려서......

그래서 아주 조금, 원작의 의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아주 조금 비틀어 봤어.
덕선이가 "나 차인 거 아니다"를 외치는 건, 소개팅 남과 극장 씬에서 팔짱 철벽녀로 확실히 보여준 거니,
분명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는 덕선이 자체의 문제였어.
그러니 이 비루한 글에서는, 덕선이 토익 700 이상을 얻게 된 것처럼
남자와의 연애? 혹은 사랑?에 있어서도, 엄청난(?) 사랑을 받게 되는 걸로,
그렇게 자신의 트라우마와 싸워 이겨나가고 있는 덕선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


그리고 더불어, 썸않썸도 그리고 싶었달까.
작감께서 아주 멋지게 그 이후는 그려줬으니 그 사이만 아주 살짝 들여다보고 싶어서......

갤에 금손이 많아서 나도 상플을 읽어대고 있었지만, 그러다 이 부분만큼은 내가 보고 싶어서,
그저 나 자신을 위한 상플이야.(내가 보고 싶어 내가 쓰는 비루한 상플.)
그러니 비루해도 즐감해주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
글고 맴찢이라는 댓글 많던데, 미안하다, 내가 좀 이쪽이 좋아서...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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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에 안 올라가서 자꾸 나누어 올리니까, 이상하게 끊어지더라도 이해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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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상플] 94년 어느 날, 어쩌면 3  [텍본으로 재업로드]



3장 수면제가 의미하는 것

 

 

 

 

 

수면제......

 

그 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생판 모르는 남자에게,

그것도 덕선의 서빙 위치도 아닌 곳에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데워서 건넨 것은.

그 수면제, 라는 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정말 지긋지긋하게도 그와 연관된 모든 것들이 덕선을 지배하고 있었다.

 

 

 

1

 

 

얼마 전 김포공항. 탑승하러 가는 길에 덕선은 택이를 만났다. 만나려고 만났다기보다는, 덕선은 일하러, 택은 동경에서 대국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공항에서 맞닥뜨린 거였다. 다행히 덕선은 택을 봤지만, 택은 덕선을 보지 못했다. 어쩌면 택의 오랜 습관 때문인지도 몰랐다.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 앞에, 혹은 카메라 앞에 있어야 하는 택은 공공장소에서 사람의 눈을 쳐다보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택은 약간 고개를 숙이며 이 부장님과 말을 하며,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부장님의 말을 들으며, 그렇게 걸어가고 있었다. 이게 다행인 건가.


인사를 해, 말아로 아직도 갈등 중인 덕선의 앞으로 짙은 향수 냄새가 확 풍겼다. 공항 내에서 썬글라스를 끼고 엄청난 몸매를 뽐내며 누군가에게로 급히 걸어가는 여자는 분명 TV에서 좀 볼 수 있는 인물이었다. 탤런튼가? 별 생각 없이 그 여자를 보던 덕선은 이내 걸음을 멈추었다. 정확하게는 그 여자가 누군가 앞에서 걸음을 멈추는 걸 보면서, 덕선 자신도 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썬글라스를 벗고 환하게 웃는 그 여자는 바로 요즘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하다는 배우였다. 바로 그 여자가 택이의 팔을 잡고 있었다. 덕선이 있는 자리에서는 택이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택은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그 여자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덕선은 그게 더 아팠다. 웃고 있는 저 여자의 얼굴보다, 보이지 않는 택이의 표정보다, 여자의 손을 그대로 두는 택이가 낯설었다.


미쳤군, 성덕선.


그 날, 어렸던 열아홉 살의 그 날부터 하루에도 수십 번도 외쳐댄 말. 그 말이 아무 제어 없이 훅하고 튀어나왔다.

 

미친.....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잘도 하네, 성덕선.

 

벌써 그렁그렁 올라오는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며 가까스로 참아냈다. 직장이다. 성덕선! 마른 침을 삼키며 한 걸음 떼려는 그 순간, 덕선아, 하며 탑 언니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 오셨어요."


"뭐야, 왜 이리 멍하니 서 있어. 누구를 보는 거....? ~~!! 유람 씨다 유람 씨.

안 그래도 잘 하면 볼 수 있겠다 싶었는데...유람 씨!!!!"


말릴 사이도 없이 탑 언니는 택의 곁에 서 있던 유 대리를 불렀다. 그러자 유 대리는 자신의 여자친구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고, , 덕선 양도 있었네. 하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 때였다. 아무 움직임 없이 서있기만 하던 택의 얼굴이 서서히 덕선을 향해서 움직였다. 주변은 흑백처리라도 된 듯이 사라지고, 오로지 택이만이 보였다. 그리고 택의 팔을 붙잡고 있는 그 손도 더욱 뚜렷해졌다. 놀란 듯한 택의 눈이 덕선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팔로 내려가다 거기에 놓인 낯선 손을 보며 마치 처음 알게 되었다는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택은 어느 틈에 여자의 손을 털어내고는 당황한 눈으로 덕선을 다시 바라보았다.


탑 언니는 이미 유 대리 옆에서 팔짱을 끼며 애교를 부리고 있었고, 덕선은 그저 원래 가던 길만 가면 되었다.

 

", 덕선 양, 바로 들어가?"

 

이 부장님과 유 대리님께 인사를 꾸벅하고 입국 심사장 쪽으로 가려던 덕선을 이 부장이 의아한 듯 불렀다.


". 전 미리 가서 준비를 좀 해야 해서....언니 저 먼저 들어가요."


그리곤 온 힘을 짜내어 그를 향해 웃어주었다. 딱 이만큼의 거리. 늘 이만큼의 거리였다. 그 거리 너머에서 덕선은 택에게 웃어주었다. 그러나 택은 웃지 않았다. 그 잘 웃던 그 아이가 웃지 않았다. 그렇게 그 아이는 ""가 되었다. 저만큼의 거리에 있는 그런 "그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덕선은 알지 못했다. 황급히 멀어져가는 덕선을 쫓아 몇 걸음을 걸어오던 택을, 그러다 입술을 깨물며 멈춰 서던 택을, 자신의 발걸음을 잡기 위해서 꽉 쥔 주먹에서 핏줄이 그토록 튀어 올라왔다는 것을, 덕선은 하나도 알지 못했다.

 

 

2

 

 

"덕선 씨? 덕선 씨?"


"...? 뭐라고 하셨어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걱정이라도 있어요?"


우진의 걱정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덕선은 얼마 전 기억을 황급히 지워냈다.


"괜찮아요?"


그래, 그 아이도 그랬다.


덕선아, 괜찮아?


"괜찮아요. 멍 때리는 게 제 취미잖아요. 걱정 같은 거, 없어요."


약간은 코믹하게 말하며 웃어주는 덕선의 앞에서 우진은 다행이라는 듯 덕선을 따라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 그 아이도 그랬다.

내가 웃으면, 그 아이도 웃었다. 아니 내가 웃기도 전에, 그 아이가 먼저 웃었다.


그 웃음이, 나를 향한 그 미소가 언제나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아이의 넘버 원은 나라고, 나 외에는 아무도 될 수 없다고 그리 믿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내가 있어도, 이제 그 아이는 웃지 않는다. 내가 웃어도, 이제 그 아이는 웃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웃지 않는다.


"덕선 씨, 오랜만에 웃는 모습 보네요. 웃는 모습, 진짜 이뻐요."


"? 무슨 소리세요? 저 잘 웃어요.

저번에 이 달의 스마일 상도 탔는데요?"


"그건 일할 때니까... 그냥 덕선 씨 보면, 열심히 웃고 있는데, 가끔은 슬퍼 보여요."


"제가 슬플 일이 뭐가 있어요."


왜 이러나, 이 남자. 자꾸 이렇게 넘겨 짚으면 안 되는데.....


그런 덕선을 보는 이 남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이 불편하지 않았다. 우진은 이렇게 덕선이 침묵하고 싶어할 때, 생각에 잠기고 싶어할 때, 그저 조용히 곁에 있어주었다. 억지로 말을 꺼내어 번잡스럽게 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침묵을 지겨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있었다. 그래서 이 남자를 아직 만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천하의 성덕선이. 오는 남자 안 막고, 가는 남자 안 막는다는 이 성덕선이 말이다.

 

"....

아주....많이....그래서...미안할 만큼....."


아이들에게 말했던 자신의 대답이 떠오른다.

 

그래, 미안할 만큼.....



3

 

 

이전까지 소개팅으로 만났던 다른 남자들과는 달리, 우진을 처음 만난 건 런던행 비행기 안이었다. 근무 중 사적으로 접근하는 남자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철벽을 쳐대던 덕선이 비행 중에 만난 남자와 사귀자, 덕선의 주변에서는 희한한 일이라고 다들 난리였다. 우진은 덕선이 서브했던 이코노미석 중간열에 앉아 있었다.


그 날 런던행 비행기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그날따라 이코노미석엔 아이를 안은 엄마들이 왜 그리 많았는지. 베이비베드를 장착할 수 있는 곳엔 친구끼리 탄 건지 아이 하나에 엄마 한 명씩 2명이 타고 있었다. 원래 중간 아기침대를 놓을 수 있는 곳은 3자리라 한 가족이 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번엔 웬 걸, 아빠 없이 탄 엄마 둘, 아이 둘은 그야말로 덕선의 승무원 경력 중 삼대 비극에 손꼽힐 만했다.


엄청나게 울어대는 아이들 때문에 곁에 있는 승객들도, 엄마들도, 그리고 하나하나 죄송하다고 양해를 구하는 덕선까지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최고의 정점은 이거였다. 아기 침대를 원래는 각각 달 수 있지만, 무게가 정해져 있다는 거다. 10kg이 가장 안정적이지만, 12kg까지도 특별한 경우 가능은 했다. 여자아기는 11.5kg이라 가능했지만 문제는 남자아이였다. 남자아이의 엄마 말로는 13kg라는데 솔직히 15kg는 되어보였다. 규정이 규정인지라 덕선은 미안하다며 양해를 구했다. 그러나 남자아이 엄마는 침대를 달아달라며 막무가내였다. 이미 5시간을 왔지만 아직 7시간 이상 더 날아가야 하는 마당에 이 엄마는 이미 초죽음 상태였다.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저 정말 죽을 것 같아요. "


여자아이 침대를 보며 자기도 내놓으라고 땡깡을 부리며 울어대는 아이를 달래던 그 엄마는 급기야 눈물까지 비치고 있었다. 덕선도 베드를 달아주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다. 그러나 만에 하나 사고라도 난다면, 혹 벽에 달아둔 베드가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아이가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정말 덕선 자신이야말로 살려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아이 엄마자리 바로 오른쪽 건너편 자리, 그러니까 가장 피해가 큰 자리에 앉아 있던 한 남자가 정중하게 말을 건넸다. 덕선은 올 것이 왔다 싶었다. 아이 주변 대부분의 손님들이 컴플레인을 해와서 덕선이 죄송하다며 양해를 구했는데 유일하게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책을 읽던 남자였다. 저 남자도 이제 슬슬 한계가 온 거지.


"이렇게 하면 어떨까 싶은데....."


그 남자는 일어서서 자기 머리 위 도어를 열고 직시각형의 캐리어를 꺼냈다. 그러더니 옆에 달려 있는 다른 아이의 침대 높이와 견주어 보며 침대가 달려야 하는 위치에 가방을 두었다. 자기 블랭킷과 아이 엄마 블랭킷을 돌돌 말아 캐리어 위에 올리니 얼추 높이가 같아졌다.


"물론 아이 어머니께서 잡고는 있으셔야겠지만, 혹시 무게 때문에 떨어지더라도 캐리어가 있어서 괜찮을 것 같은데요. 또 담요로 완충작용도 하니 아이에게 충격이 가진 않을 겁니다. 물론 절대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되지만 말입니다."


윗선까지 와서 협의해 본 결과, 결국 남자가 제시한 대로 하기로 했다. 어차피 착륙 때는 베드를 걷어야 하니 상관이 없었고 비행 중에는 의자 다리 각각의 철에 작은 캐리어를 끼워 침대받침을 고정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땡깡을 피우던 아이는 잠들었고, 아이의 엄마도, 덕선도, 잠시의 휴식을 누릴 수 있었다. 남자는 내릴 때까지 젠틀했다. 아이 엄마를 도와 짐을 내려주고, 나머지 뒤치다꺼리도 도우며 비행기에서 내렸다. 덕선에게 아주 정중하게 인사를 하면서 말이다.


덕선은 그런 우진이, 꽤 깔끔한 매너남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다시 보지 않을 줄 알았던 그 남자를 우연찮게도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다시 마주쳤다. 3일 후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 한 남자가 덕선을 향해 아는 체를 했다.


", 혹시 기억나실지 모르겠는데, 히드로로 올 때 아이 침대 때문에......"


처음엔 그저 컴플레인이 있는 줄 알고 찾아간 자리에 그 남자가 있었다. 이코노미석에 있었지만, 그는 마일리지로 혹시 비즈니스석 업그레이드가 되는지 물었다. 다행히 빈 좌석도 있었고, 마일리지로 가능했다.


"저번에 많이 힘드셨나 봐요."


미안한 마음 반, 고마운 마음 반으로 슬쩍 건넨 덕선의 말에 그는 약간 난감한 듯 조용하게 대답했다.


"....그건 아닙니다. 사실 제가 한국 도착하면 업무 보고 때문에 바로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해서, 잠을 좀 자야 할 것 같아서요."


", . 아무래도 주무시려면 비즈니스석이 낫죠. 가능해서 다행이에요.

주무실 거면, 안대라도 드릴까요?"


", 굳이 안 주셔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수면제를 먹어야 하거든요.

사실 수면제 먹으면 어디건 상관이 없긴 합니다만, 제가 뻗어버리면, 안쪽에 앉은 분들이 불편하실 것 같아서 옮기는 겁니다."


수면제......

 

그 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생판 모르는 남자에게, 그것도 덕선의 서빙 위치도 아닌 곳에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데워서 건넨 것은. 그 수면제, 라는 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정말 지긋지긋하게도 그와 연관된 모든 것들이 덕선을 지배하고 있었다. 덕선의 따뜻한 마음에 고마워하던 우진은, 머뭇머뭇대며 덕선의 삐삐 번호를 물었다. 왜 그랬는지, 덕선 자신도 모르겠지만, 수면제라는 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번호를 적어 건넸다.

 

그에게서 받은 명함에는 서..진이라 적혀 있었다.

그것이 벌써 두 달 전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