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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상플] 94년 어느 날, 어쩌면 - 제4장 그 남자와 만나는 이유

그랑블루08 2016. 2. 29. 23:26

[선택/상플] 94년 어느 날, 어쩌면 4 : 원본 글 :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reply1988&no=894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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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그 남자와 만나는 이유

 

 

 

 

어쩌면 좋아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그와 비슷한 사람을 찾아 헤매는지도 모른다.

내게는 단 한 사람만이 떠오른다.

단 한 사람, 단 한 남자, 그 아이.

그러나 나 자신을 속이고 또 속여보아도

세상 어디에도 일 뿐,

와 같은 는 없다.

 

 

 

 

 

1

 

 

 

 

"그거 아냐, 사실 남녀가 사랑을 하지만 말야. 실제로 사람을 사랑하는 게 아닐지도 몰라."


갑작스런 자현의 말에 덕선의 표정은 그저 심등렁했다.


"이건 또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래?"


"그렇잖아. 니가 지금 이렇게 미친 듯이 연애를 해대고.

아니지, 넌 소개팅을 해대는 거지, 연애를 하는 건 아니잖아."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연애를 안 해? 지금 우진 씨랑은 2달이 다 되어 가거든?"


"됐고. 어쨌든 생각해 봐.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을 좋아해.

정말 그 사람이어야 할까, 아니면 그런 스타일의 사람이 좋은 걸까?"


"뭐래니?"


덕선은 이제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 너도 알잖아. 수정이라고, 내 대학 동창.

걔 알지? CC였는데, 남친이 완~전 또라이였잖아. 주먹 휘두르고."


"그래, 그 미친 놈. 근데 헤어졌다고 했잖아? 경찰서까지 갔다며?"


"그랬지. 근데 더 웃긴 게 뭔 줄 아냐?

수정이 그 년이 또 딴 남자를 사귀거든.

근데 며칠 전에 만났더니 그 년 눈두덩이가 또 시퍼런 거야.

그래서 내가 난리를 쳤지.

누가 그랬냐, 엇 놈이냐, 해도

그 년은 계속 문에 박았다, 어쩌고 하면서 구라를 때려.

근데 결국은 실토하더라. 새로 사귄 놈이 쳤단다. 그 미친 놈. 어휴.."


"웬열, 미쳤구나, 미쳤어.

그런 놈을 왜 만나? 당장 헤어지라고 해. 미쳤니?"


"안 그래도, 내가 열 받아서, 헤어지라고 아주 난리를 쳤다.

그 년 이번에 안 헤어지면, 내가 걔네 부모님께 다 꼬발라버릴라고."


"그래, 그래, 잘 했어. 그런 놈은 절대 만나면 안 되지."


"근데 말이다. 덕선아.

그 년이랑 얘기하다보니 기가 차더라.

그 년이 뭐라는 줄 아냐?

자기는 왜 자꾸 그런 남자가 멋있게 보이는지 모르겠단다.

착한 남자보다 그런 남자가 좋단다. 미친 거 아니냐?"


"그래서 아까 그런 거야?

그 사람이 아니라, 그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거 아니냐는 거?"


"그래, 솔직히 나도 그런 거 아닌가 싶어서.

사람마다 좋아하는 스타일이 딱 정해져 있는 거 같아서 말이야.

내가 좋아서 난리친 남자들 보면, 성격도 생김새도 다 비슷해.

심지어 내가 빠질 했던 원준 오빠도 말이야.

딱 보면, ~~ 이 스타일인 거야. 순간 섬뜩하더라."


그랬나. 그렇게 좋아하는 스타일이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덕선이 넌 어떤 스타일인 거니?

고등학교 때 그 난리친 이후로는 영 잠잠해. 뭔가 시큰둥하고.

잘 생각해봐. 남자들이 너 좋다 그러지, 니가 옛날처럼 좋다고 난리치는 게 없잖아? 맞지?"


그랬나. 내가. 내가 그렇게 보였나.

 

그저 치열하게 살아왔을 뿐이다. 누군가가 멀어지는 걸 최선을 다해 잡아보려다, 그 누군가가 작정하고 멀어지는 것 같아서, 내가 잡을 수 없는 사람인 것 같아서, 그렇게 아예 놓아버리려고, 그래서 살아보려고 이러고 있다는 걸 사람들은 모른다.


"덕선아, 그래도 생각해봐.

니가 그러~엏게 덤덤하게 남자 만나다가,

이번엔 그래도 우진 씨랑은 좀 길개 가고 있는 게,

어쩌면 우진 씨 스타일이 니가 좋아하는 스타일인 거 아니냐?

옛날에 좋아했던 남자랑 비교해 봐.

, 왜 있잖아, 여러 명."


내가 좋아했던 남자, 라는 말에 떠오르는 건 단 한 사람이었다. 여러 명, 따위 내겐 없었다. 언제나 단 한 명. 이런 미칠 놈의 단호박 같은 감정에 정말 웃지 않을 수가 없다.


", 잘 생각해 보면, 무의식중에 닮아서 좋아할 수도 있어."


자현은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그랬나, 나도......

 

덕선의 입술에 쓰디쓴 웃음만 머물다 사라진다.

 

 

2

 

 

비행기, 우는 아이, 그리고 아기 침대......

익숙한 조합이다. 애써 생각지 않으려 한, 억지로 저 깊숙이 묻어둔 기억 한 자락이 마치 자현의 한 마디로 봉인이 풀린 듯 헤쳐 나왔다.

 

우진을 만나기 한 달 전, 62.

 

원래 이 때는 비행이 없는 날이었다. 동기 하나가 사정이 생기는 바람에 덕선이 대신 들어가면서 꼬여버렸다. 덕선이 땜빵으로 들어간 싱가폴 라인은 미주나 유럽선만큼 길진 않았지만, 그래도 비행시간이 6시간이나 되어 나름 힘든 축에 속했다. 원래는 오사카행이었는데..... 2시간이면 되는 걸, 6시간으로 때우는구나, 내가 그렇지 뭐. 투덜대어 본들 변할 것은 없었다.

 

싱가폴로 들어간 후, 이틀 후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탑승 전 준비부터 시끌시끌했다. 덕선은 이코노미석 체크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여자 승무원들은 호들갑을 떨며 좋아하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분위기 왜 이래?"


비즈니스석 커튼을 제치면서 뛰어오는 동기에게 덕선도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물어보았다.


"야야....덕선아, 장난 아니야. 오늘 비행기에 누가 탄 줄 아니?"


", 장동건이라도 탔어? 싱가폴에서 광고라도 찍었대?"


"뭔 소리야. 완전 영앤리치~~~한 인물이 탔지."


"재벌 2세야? 퍼스트쪽 고생하겠네."


", 진짜 그게 아니고. 최택 9단 말이야. 최택 9단님이 타셨댄다."


"..?"


", 방금 전에 슬쩍 뒤에서 봤는데, 포스 장난 아냐."


", 그럼 지금 탑승하는 거잖아. 정신 차리고 빨리 준비해."


"...알았다고. 여튼 기집애. 지 혼자 일 다해요."


열심히 뭔가를 하는 듯이 보였지만, 실상 덕선은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원래는 내일인데....그래서 다행이다 생각하고 있었다. 탑승자 정보 확인했을 땐 분명 내일로 되어 있었다.


도대체 왜 갑자기 바뀐 거지.


"근데 있잖아. 덕선아. 원래 최택 9단님 이 비행기 아닌데 바꾸셨댄다.

우리 완전 재수지?"


"...바꿨대?"


"생각해 봐라. 왜 바뀌었겠냐?"


동기가 턱짓으로 가리킨 곳에는 비즈니스석 복도에 서 있는 탑 언니의 미소가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그렇군. 유 대리님이었군.


", 근데 영앤리치라 그런지, 정말 장난 아니더라."


", 대국 치른다고 힘들었을 테니 퍼스트 정도는 당연하...."


"퍼스트 말고 비즈니스 석이긴 한데, 두 자리야, 두 자리. 옆자리까지 잡았다는 거지."


"?"


"정말 돈...이지 않냐?

, 그래도 상금이 어마어마한데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겠지.

그냥 영앤리치겠어. 에휴.....

사람들 얘기로는 재벌 2세 부럽지 않단다.

게다가 생긴 건.......장동건이고 손지창이고 울고 간다. 정말."


"~! 그만해. , 바둑 대국 본 적 있어? 그거 사람 죽는 거야.

거의 10시간 이상 그냥 앉아서 하는 건데, 최택은..아니 최택 9단은 그걸 3일 연장으로 한 거잖아.

내리 이겼으니 3일로 끝난 거지, 아님 이틀은 더 해야 됐어."


"그런가. 그렇게 고생하는 거야?"


"그래. 내 소꿉친구가 바둑 둬서 아는데 장난 아니야. 그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래 니 말이 맞다.

최택 9단은 사실 대통령 나와도 당선될 거야. 거의 신격 아니냐.

, 그래도 사람은 괜찮은 것 같애.

이건 탑 언니한테 들었는데 기원 사람 2명도 싱가폴은 힘들다고 비즈니스석 끊어줬대, 최택 9단이."


그래, 그런 아이지. .


어차피 같은 비행기에 있더라도 볼 일은 없었다. 덕선의 담당구역은 이코노미석 중간 열이었고, 비즈니스석은 탑 언니와 다른 사람이 서빙을 하고 있었다. 최택은 아마 내가 있는지도 모를 거야.


별 문제가 없어보였던 이코노미석에 아기 침대 때문에 실랑이가 있었다. 이번 비행에는 왜 이리 사람들이 많이 몰렸는지 정말 빈 자리가 거의 없었다. 아기 침대가 달리는 중간 맨 앞 열도 아이 엄마가 아이를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애는 칭얼대고 사람은 많고, 난감해 하는 엄마에게 덕선의 동기 승무원은 무게 때문에 아기 베드를 달 수 없다고 진땀을 흘리며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엄마도 힘들고, 아이도 힘들고, 옆 사람도 힘들고, 승무원은 더더 힘들고. 타자마자부터 이 난리인데 6시간을 어떻게 갈 것인지 난감했다. 울고 있는 아이도 이륙하면서 기압차 때문에 귀가 아파 더 괴로운 듯했다. 엄마가 타이레놀을 먹이긴 했지만, 아이는 막무가내로 울어댔다. 게다가 엄마가 계속 아이를 안고 있어야 하니, 아이는 울어서 더운데 더 짜증이 나는 듯도 했다.


덕선이 다가가자 동기는 다급하게 말했다.


"탑 언니한테 좀 물어봐. 두 자리 혹시 나는지."


덕선은 비즈니스석 커튼을 젖히고, 탑언니를 불렀다.


"언니, 혹시 두 자리 비어요?"


"? 뭔 일 있어?"


"아이 무게 때문에 침대를 달 수가 없는데, 애도, 엄마도 상태가 안 좋아요.

애도 계속 울고.

눕혀서 좀 재우면 좋겠는데, 가능해요?"


"안 될 걸. 지금 비즈니스도 만석이야. 이번엔 왜 이러나 몰라.

어떡하니, 덕선아. 힘들겠다."


"제가 뭐 힘든가요. 애랑 엄마가 힘들죠. 알았어요. 어떻게든 해볼게요."


덕선은 동기에게 안 되겠다고 고개를 가로젓자, 동기는 거의 울상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보던 덕선은 사무장을 찾아서 퍼스트 쪽이라도 알아볼까 싶을 즈음, 탑 언니가 덕선에게 급하게 다가왔다.


"덕선아, 가능할 것 같아. 자리 바꿔주실 분이 생겨서 말야. 여기 자리 정돈 좀 해."


"? 비즈니스에서 이쪽으로 오신다구요? 퍼스트 아니구요?"


". 그러니까....."


주위의 눈치를 보던 탑 언니가 이내 입을 다물더니, 어서 아이 엄마와 짐을 옮기라며 지시를 했다. 덕선이 자리 정리를 하는 동안, 덕선의 동기가 아이 엄마를 따라 짐을 가지고 비즈니스 쪽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한숨을 돌리는 듯했다.

 

그 때 비즈니스 석에서 이쪽으로 한 남자가 걸어왔다. 그 남자 곁에 선 동기의 얼굴이 발그라하게 홍조가 들어 있었다. 이상하다 싶어 다시 그 인물에게로 고개를 돌린 순간, 그곳에 택이가 있었다. 마스크를 쓰고 야구 모자를 푹 눌러 썼지만, 택이었다.


쟤가 지금.....!


덕선은 짜증이 확 밀려 왔다. 대국을 치르느라 잠도 못 자고 컨디션도 안 좋을 텐데, 여기가 어디라고 이쪽으로 와. 다른 사람이 알아보면 보통 피곤한 게 아닐 텐데...... 생각하면 할수록 열이 올라왔다. 지금 택이를 봐서 좋다, 안 좋다 따질 때가 아니었다. 심장이 떨린다, 안 떨린다의 문제가 아니었다. 덕선의 본능이 오롯이 되살아나서, 택이의 몸상태만을 체크하고 있었다.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승무원의 말에 택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택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아내와 아이를 따라 잠시 비즈니스석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아직 서빙시간이 아니라서 복도 외에는 불도 다 꺼져 있어서 사람들은 택이인지 모르는 듯했다. 기회는 이 때다 싶어 덕선이 택의 곁으로 갔다.


"택아......"


작은 목소리로 불렀지만, 택은 이내 고개를 들었다.


"덕선아."


", 뭐야, 니가 왜 여기 있어?"


"그게.....아까 너 얘기하는 거 들었어."


"탑 언니랑 말하는 거, 그걸 들었다는 거야?"


택이 고개를 끄덕인다.


", 그렇다고 니가 왜 바꿔.

너 지금 대국 치르느라 초죽음 상탠데, 힘들어서 어쩔려구 그래?"


"안 힘들어. 괜찮아."


사람 애타는 건 모르고, 택의 대답은 느릿하면서도 편안했다.


", 안 힘들긴 뭐가 안 힘들어? 앞으로 최소 5시간은 더 가야 돼. 사람들도 많은데, 괜찮겠어?"


". 난 괜찮아."


하아......


덕선의 입에서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사람 속은 타들어가는데, 얘는 왜 이렇게 해맑게 웃고 있나 싶었다. 진짜 기가 막혔다.


"잠은 좀 잤어?"


택이 고개를 끄덕인다.


"수면제?"


또다시 끄덕이는 택을 보며, 덕선은 가슴이 답답하다.


"밥은? 밥은 먹었어?"


택이 이번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그렇지. 먹을 리가 없지.


"오늘도 아무 것도 안 먹었어? 아침에도?"


고개를 끄덕이는 택이를 보며, 덕선은 입술을 깨물었다.


"잠깐, 있어봐."


덕선은 뒤쪽 준비칸으로 들어가더니 한참 소식이 없었다. 그러더니 작은 그릇 하나를 가지고 와서는 택이 앞에 내밀었다.


"이거...뭐야?"


". 속 안 좋은 분들이나 특별히 원하는 분들 때문에 준비해 두는 건데.....

게살죽이라 먹기 괜찮을 거야. 조금이라도 먹어."


". 고마워."


"...근데, 택아."


"?"


"너 원래 내일 비행기 아니었어?"


"....그거......"


"어떻게 된 거야? 하루라도 쉬고 오지. 힘들잖아."


"그냥.....요즘은 이 부장님, 유 대리님과 스케줄 맞추는 게 편해서......"


"...그래...? 그럼, 먹고, 필요한 거 있으면 불러."


고개를 끄덕이는 택을 뒤로 하고 덕선은 뒤쪽 준비칸으로 걸어갔다. 택은 그런 덕선을 한참 동안 돌아보았다.


, 잘한 짓이겠지, 덕선아......


마음 속에서 울림 하나가 오랫동안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3

 

 

"최 사범, 하루 쉬고 올 거지?"


". 아무래도 그게 편해서요."


대국 후 이 부장의 물음에 택은 언제나처럼 대답했다.


"그렇지? 난 유 대리가 하루 당겨서 간다고 해서 같이 들어갈까 싶어. 기원 일도 있고."


"그러세요. 그럼."


"그래. 쉬어. 고생했어."


"아니에요. 이 부장님도 고생하셨어요."


"그래."


택이 호텔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찰나, 유대리가 복도 끝에서 급히 뛰어왔다.


"이 부장님, 내일 바로 가실 거죠?"


", 그러기로 했어."


"그럼, 최 사범님은 어떻게 하시기로?"


"최택 9단은 원래 스케줄대로 하기로 했어."


"그렇죠? 저도 그러실 것 같아서. 그럼 제가 바로 전화하겠습니다."


"누구? 그 승무원 여친?"


". 바로 연락하면 자리 알아봐 줄 거예요."


"아이고, 편하고 좋네.

, 거기가 덕선 양도 있는 곳 맞지? 안 본 지 한참 됐네."


", 잘 됐네요, 이 부장님. 내일 덕선양도 근무랍니다. 오랜만에 얼굴 보면 되겠..."

 

"저도!"


그때였다. 불쑥 택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 "?"


"저도...내일 갈게요. 저도, 바꿔주세요."


"? .... 그렇게 할게요."


의아해 하는 유 대리를 앞에 두고 택은 뭔가 상기된 표정으로 호텔 방 안으로 사라졌다.


"?"


이상한 듯 이 부장을 향해 묻는 유 대리에게 이 부장은 에휴 하며 한숨을 쉬어보였다.


"몰라도 돼. 여튼......길다, 길어."


"뭐가요, 이 부장님?"


"그냥 그렇다고. 그냥 우리 최택 9단은 말이야. 여자로 태어났으면 열녀비는 받았을 거다."


"예에?"


"그냥 그렇다고......"


  

4

 


"덕선아, 너무 멋있지?

...진짜 완전체다. 미모에, 능력에, 어떻게 인품까지 되냐?"


".......그래, 착하네."


", 그냥 착한 게 아니지. 그리고 사실 최택 9단 이코노미로 안 와도 됐거든?

퍼스트로 바꿔주겠다고 해도, 싫대. 이코노미로 가겠대.

완전 특이해. 나 같으면 무조건 퍼스트지."


그 얘기를 듣고 있는 덕선은 뭔가 마음에 꽃잎이 떠다니는 것 같았다. 살랑살랑대며 왔다가 사라지는 꽃잎처럼 그렇게 가슴이 간질간질거렸다. 그럴 리가 없다, 생각하면서도 혹시, 하는 마음이 자꾸만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물어보고 싶지만, 물을 수가 없었다. 아니, 물어 보면 안 되었다. 그저 혼자 착각해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그 때 승무원실로 인터폰이 울렸다. 사무장님이었다.


". 사무장님."


<지금 이상기류야. 안전벨트 사인 올릴 거니까, 두 사람도 빨리 착석해.>


". 알겠습니다."


덕선이 인터폰을 내려놓자마자 사인들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뭐야? 사인 떴는데?"


". 착석해야 돼. 이상기류야."


", 저 승객, 콜사인 떴어."


"넌 여기 앉아 있어. 내가 가서 얘기하고, 비상구 자리에 앉을게."


"오올, 고맙다. 덕선아. 솔직히 비상구 자리는 승객과 마주 앉아야 돼서 좀 뻘줌하잖아."


"됐어. 으이구....."


콜사인 승객에게는 기류가 안정되고 나면 다시 오겠다고 말한 뒤에, 덕선은 비상구쪽 의자에 앉아 벨트를 맸다. 비상구 쪽에 앉은 승객과 약간의 거리는 있지만, 그래도 마주보고 있어야 했다. 동기 말처럼 아무래도 맞은 편 승객도 불편할 것도 같았다. 눈이 마주치는 것은 피하자는 생각으로 복도 쪽으로 눈을 돌리는데 그 순간 덕선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언제부터였는지, 택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간 복도 바로 옆 자리인 택의 자리와 덕선의 자리는 불과 몇 미터 되지도 않았다. 주변은 어두웠지만, 복도의 불빛에 택의 눈이 반짝였다. 마치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듯했다.


그 순간 비행기가 심하게 요동치면서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몸도 심하게 흔들렸다. 가끔 이런 일이 있고는 했다. 이러다 말겠지 싶었는데, 순간 비행기가 갑자기 툭 떨어지는 느낌이 들더니,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승객들이 조금씩 동요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떡하지? 덕선이 앉아 있는 오른쪽 준비실 안에서 자꾸만 뭔가가 덜그덕거렸다. 앞쪽 팀에서 제대로 고정을 안 시킨 건지 뭔가 자꾸 불안해서 덕선의 눈은 커튼 안을 살피고 있었다. 설마....그럴 일은 없겠지. 예전 난기류 때 안전고리가 풀려서 승무원이 다친 경우도 있다고 했다.


철컹.


한 번 더 비행기가 좌우로 심하게 흔들리는 순간, 준비실 커튼 사이로 운반선반이 튀어나왔다.


...!!!!!!


바로 덕선을 향해 굴러오는 철선반을 보며, 빨리 안전띠를 풀고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머리의 생각만큼 몸은 빨리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 이러다 크게 다치겠구나 싶어 포기하는 마음에 눈을 찔끔 감은 그 순간, 누군가의 팔이 덕선의 머리를 감싸안았다.


!!!!!!


눈을 떠보니, 택이가 자신을 안고 있었다. 왼손으로는 운반선반의 손잡이를 잡고, 오른팔로는 덕선의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더 정확하게는 덕선을 보호하려는 듯 무릎을 굽힌 채, 자신의 몸으로 덕선을 감싸 안았다.


"...택아......"


"괜찮아?"


"... , 넌 괜찮아?"


". 괜찮아. 다행히 잡았어."


걱정스레 묻는 덕선에게 택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택의 왼쪽 손목에는 파랗게 핏줄이 돋아나와 있었다. 아무래도 택이 혼자 한 손으로 잡고 있는 건 힘들 것 같아, 덕선도 오른손으로 운반선반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 순간 다시 난기류에 비행기가 흔들렸다.


!!!!!!


택의 오른팔이 덕선의 어깨를 강하게 감싸 안았다. 운반선반을 각자 잡고 있다 보니 서로의 몸은 더 가까이 밀착됐다. 그렇다고 택이를 밀어낼 수는 없었다. 택이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다른 사람의 안전을 위해서도, 아니 무엇보다 택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덕선이 택을 잡아주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쿵쿵쿵쿵.........


누구의 심장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심장소리가 머리를 울려댔다. 어떡해...... 들킬까봐, 이 심장소리를 들킬까봐 덕선은 조금이라도 떨어지고 싶지만, 택의 팔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덕선이 조금 떨어져보려 살짝 밀어내 보지만, 택은 도리어 팔에 더 힘을 주어, 더 깊이 덕선을 끌어안았다.


쿵쿵쿵쿵.........


덕선의 얼굴로, 피부로 심장소리가 전해져왔다. 마치 살아있다고, 펄떡펄떡 살아있다고, 피를 뿜어내는 듯이, 그의 심장이 덕선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이러다 터져버리면 어떡하나 싶을 만큼, 이러다가 심장이 고장나면 어떡하나 싶을 만큼, 그렇게 병이라도 난 게 아닌가 걱정이 될 만큼, 택의 심장은 살아서 뛰어대고 있었다.

 

택의 팔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택의 품에 안기면 안길수록 덕선의 얼굴은 발갛게 물들어갔다.

심장에 병이 생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