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택/상플] 94년 어느 날, 어쩌면 7 : 원본 글 :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reply1988&no=911318
제7장 만 17년의 시간
혹시 행복하지 않다면,
혹시 그 사람이 아프게 한다면,
그 때는......내게.....와줄래?
기다리는 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잘 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너는 행복하기만 하면 되니까
내게 와줄래?
1
선우와 택은 옷을 챙겨 입고 집 근처 포장마차로 향했다. 그냥 집에서 마시자는 택을 선우가 억지로 질질 끌고는, 인마, 너도 세상을 좀 보고 살아야 될 거 아니냐, 며 그렇게 자신의 단골집까지 데려다 놓았다. 낮에는 여전히 여름의 기운이 느껴졌지만, 해가 지고 나서는 제법 가을답게 쌀쌀했다. 선우가 으 춥다 하며 몸을 한 번 부르르 떠는데 앞에 앉은 택은 그저 티 한 장이 다였다.
"넌, 안 춥냐?"
"응. 안 추워."
택은 이모가 가져다 준 소주를 따서는 선우의 잔에 따랐다. 선우가 소주를 가로챌 시간도 주지 않고는 바로 자신의 잔에 따라버린다.
"야, 내가 자작하지 말랬지?"
"미안.“
그렇게 둘은 조용히 잔을 마주치며, 차디찬 술을 목구멍 안으로 흘려보냈다.
참 신기하지 않은가. 이토록 차가운 술이 이토록 뜨겁게 사람을 불타오르게 한다는 것이 말이다.
"택아."
"어?"
"너, 삐삐 왜 안 해?"
"내가 뭐 할 줄 알겠냐?"
"그럼, 삐삐 칠 줄은 아냐?"
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택은 자신의 잔에 술을 가득 채운다. 뭐가 저렇게 고픈 건지. 분명 술 마시자고 한 건 선우였으나, 정작 술이 고팠던 건 택이었던 것 같다. 종종 같이 마셔야지. 기원에서 마셔봤자, 그게 술이겠나, 일이지 싶었다.
"삐삐 쳐 본 적은 있어?"
택은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냥 번호만 눌러 보는 거야?"
그 소리에 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택이 순간 정지화면처럼 멈춰 있었다.
"......어?"
"노래 바꿨던데? 덕선이."
그 말에 택이 마른 침을 삼켰다.
◈◈◈◈◈◈◈◈◈◈◈◈◈
아까 포장마차로 나오기 전에 택이가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나간 사이, 선우는 책상 앞에 얼쩡대다 벽에 붙은 5인방의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택이를 제외한 4인방의 삐삐 번호가 눈에 들어왔다.
이 형님이 오늘 오작교 한 번 해줘?
어차피 한 놈은 사천이고, 다른 한 놈은 생업 중이라, 남은 건 한 명뿐이니 덕선이만 불러낸다 해도 이상할 건 하나도 없었다.
이 자식은 삐삐 번호나 붙여놨지, 눌러본 적은 있나 몰라.
덕선의 삐삐번호를 누르며 궁시렁대던 선우의 얼굴에서 어느 새 웃음기가 사라졌다.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부질없는 아픔과 이별할 수 있도록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대를"
그렇게 아까 택이가 물었던 그 노래의 후렴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새끼.....진짜.....
선우의 가슴 저 안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오는 것 같았다.
◈◈◈◈◈◈◈◈◈◈◈◈◈
놀란 듯 바라보고 있는 택이와는 달리 선우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나 사실 집에서 나오기 전에 덕선이한테 삐삐 치려 했었거든."
택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이렇게 제 속이 다 드러나는 놈이 바둑은 어떻게 두는 건지....
"근데 그만 뒀다. 니가 말하던 그 노래가 나오던데..... 맞지?"
택이 또다시 잔을 비웠다. 선우도 그런 택이를 따라 입 안에 소주를 부어넣었다. 오늘따라 술이 더 쓰다.
2
병원 생활 때문에 삐삐가 필요했던 선우와, 취직을 하며 정신없이 바빠진 덕선이 제일 먼저 삐삐를 구입했다. 덕선과 택의 사이는 늘 그만큼이었다. 멀어지는 듯했으나, 어느 순간 서로에게 묶여 있는 줄이라도 있는 듯 그렇게 그만큼을 유지하고 있었다. 여전한 친구 사이, 그러나 마음을 다해서는 안 되는 사이. 그래도 덕선은 택을 챙겼다. 어쩌면 덕선은 택에게 가장 먼저 번호를 알려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택아, 이것 보라고. 이렇게 번호만 누르면 된다고."
"어..어? 어......."
"어휴....진짜 최택....널 어째야 되냐. 잘 봐. 내 번호 일단 눌러 봐."
택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조심스럽게 덕선이 적어준 번호를 눌렀다.
"어떤 언니가 뭐라고 하지?"
"어. 호출은 1번, 음성 녹음은 2번이라는데?"
"그래, 그러면 그냥 1번 누르고 번호 찍어봐."
"무슨 번호?"
"아, 진짜~! 니 번호."
"내 번호?"
"와....나 진짜 혈압 오른다. 좋아, 그럼 2번 눌러 봐."
"2번?"
"응."
택이 2번을 누르자, 또다시 어떤 여자가 뭐라고 말한다.
"삐 소리가 나면 녹음하세요. 삐........"
택이 들은 말은 이거였으나,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녹음하라고 그러지. 녹음해 그럼."
"뭘....?"
"니 말, 뭐 아무 거라도, 필요한 말."
"무슨 말......?"
"어휴, 이 바보야!!!!"
덕선은 참다 못해 택의 등짝을 한 대 때리고야 말았다. 사실 열은 받았어도 힘을 주지는 못했는데, 택은 아프다며 엄살을 부린다.
"아...아파 덕선아....."
"이게 엄살만 늘었어. 어휴......."
덕선은 기가 막힌다는 듯, 이를 어쩌나 싶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택아, 니가 날 부르고 싶어. 그러면, 내 번호를 누르고, 1번 누르고 또 1번 누르고, 전화 끊어."
"어?"
"그럼, 내가 넌 줄 알고 전화할게."
"어디로?"
"어디겠냐, 니가 방 아니면 기원이지."
택은 그렇다 싶어서 고개를 또 끄덕였다.
"기억했지? 내 번호, 1번, 다시 1번."
"응. 기억했어. 내가 바보냐?"
너, 지금 정말 바보 같거든? 하고 받아치고 싶었지만, 덕선은 참기로 했다.
"근데 택아, 지금은 안내하는 언니 목소리가 나오지만,
내가 배경음악을 넣기도 하고, 내 목소리 넣기도 하거든.
그럼 1번, 2번 얘기가 안 나올 수도 있어."
"그래? 그럼, 뭘 눌러?"
"미치겠네. 야, 최택!!! 똑같다니까!!!! 그냥 내 번호, 1번, 다시 1번!!!!"
"아...알았어. 알았어, 덕선아."
"그래, 실전이 중요해. 내가 지금 배경음악 바꿔볼게.
이번엔 내 목소리로 녹음해 볼 테니까, 니가 해봐."
덕선은 자신의 삐삐로 전화를 걸어 비밀번호를 눌렀다. 배경음악 바꾸기를 눌러서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대한항공 25기 성덕선 삐삐입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되세요."
덕선이 업무용 목소리로 녹음을 마치자 택은 처음 듣는 덕선의 목소리가 낯설다는 듯, 그녀를 바라본다.
"자, 이제 해 봐."
택은 신중하게 덕선의 삐삐를 눌렀다. 정말 아까와는 달리 덕선의 목소리가 들렸다. 택은 그저 한참 수화기를 들고만 있었다.
"야, 눌러. 왜 안 눌러?"
"니 목소리 다 듣고 해야지."
"그거, 그냥 해도....아후...알았다."
택은 다시 1번을 누르고, 또다시 안내 멘트를 다 들은 후, 1번을 눌렀다. 그리고는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덕선의 삐삐가 울려댔다.
"와!! 택아, 성공했어. 왔어. 이것 봐."
덕선의 삐삐에는 "1"이라고 찍혀 있었다. 덕선은 뭐가 미션을 치렀다는 생각에 기쁨에 겨워했다. 이 어려운 임무를 완수하다니..... 역시 성덕선 대단해.
그러나 정작 택은 다른 의미로 마음이 뿌듯했다.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싶었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날 이후, 택은 그렇게 전화기를 들었다. 정말 누르다가 누르다가, 감추다가 감추다가, 정말로 숨을 못 쉴 것 같으면, 이러다 죽을 것 같으면, 덕선의 삐삐 번호를 눌렀다. 그러면 그곳에 덕선이 있었다. 덕선의 목소리가 있었다. 어떤 날은 슬픈 노래가 흘러나오기도 했고, 어떤 날은 덕선이 직접 노래를 불러 녹음해 놓기도 했다.
덕선의 목소리가 아니라 가수의 노래가 녹음되어 있을 때는 뭔가 허전했지만, 어느 순간, 그 역시 덕선이의 마음인 것처럼 택도 그 노래를 찾아 들었다. 이승환도 그렇게 알게 되었다. 처음엔 이오공감과 이승환이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가 선우에게 타박을 받기도 했었다. 그렇게 택은 덕선의 시간에 함께 머물렀다.
3
얼마 전까지도 다른 곡이었는데, 이번 곡은 왠지 택의 가슴을 자꾸만 울려대었다.
그 아이는 도대체 무엇을 잊고 싶은 걸까.......
혹여 그것이 어린 시절, 그리고 자신이 거기에 포함되는 걸까봐, 자꾸만 가슴이 서늘해진다. 그래서 자꾸만 술을 들이켰다.
"택아......."
"어."
"우리, 왜 이런 거냐?"
"뭐가....?"
"5년이잖아."
".....응."
"올해만 지나면 괜찮아질까? 그렇지 않을까? 5년이면......할 만큼 했잖아. 이 정도면......"
택은 말이 없었다. 조용히 자신의 손 안에 든 술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노래 가사에도 있잖아. 시간이 해결해 준다며. 우리 할 만큼 했으니까, 시간이 알아서 해주겠지? 그렇겠지?"
선우는 뭐가 그리도 불안한지 자꾸만 택의 대답을 요구했다. 그렇다고, 괜찮아질 거라고, 그런 말을 듣고 싶었다. 이 놈은 어른이니까, 우리보다 훨씬 일찍 어른이 된 놈이니까, 이 놈이 그렇다면 그럴 것 같았다.
택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것이 너무나 처연해서 그 모습이 마치 거울인 것 같아서 선우의 눈이 자꾸만 촉촉해졌다.
".....만 17년......"
"어?"
"그 세월이 옅어지려면, 그 시간만큼은 더 필요하겠지? 그럼, 34년......."
"택..아......"
"우리, 그 때 몇 살이냐?"
".......마흔....둘......"
"그렇구나."
택이 천천히 술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 때 다시 이야기해 보자."
"뭘?"
"우리, 할 만큼 했는지.....시간이 알아서 해줬는지....."
둘의 잔이 동시에 채워지고, 동시에 비워졌다. 이 자식은 진심이다. 어쩌면 자신도......
선우가 물었다.
"택아. 너, 왜 고백 안 했냐? 그 때?"
참 일찍도 물어본다, 싶으면서도 선우는 5년이나 아니 5년 반이나 흐르고 나서야 물을 수 있었다. 그 때는 건드리기만 해도 애가 바스라질까봐 물어보지도 못했다. 매년 100건 이상의 대국을 치러내는 최택을 보며, 말도 제대로 붙일 수가 없었다. 5년도 훨씬 지나고 나니, 그래도 지금은 입 밖으로 말을 꺼낼 수는 있지 않을까 싶었다. 세월은 그렇게 조금씩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어가고 있으니까, 아니, 적어도 그렇게 보일 수 있도록 위장하는 방법을 배우게 해주니까.
그러나 선우는 알고 있었다. 이 대답을 듣지 못할 거라는 걸. 택이에게 덕선이 어떤 존재인지를 선우 자신만큼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신이 지금 품고 있는 이 불덩이 같은 마음이 택의 마음일 테니. 이 놈은 자기보다 더 오랜 시간을 견뎌내고 있는 것이니.
"선우야......"
"어."
"한 명은 애인이 생기기를 바랐고, 한 명은 애인이 생기지 않기를 바랐어."
"............"
"그런데......그 반대가 될 것 같아서.....두려워......"
이번에는 한참동안 선우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렇게 조용히 술잔이 부딪치는 소리만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견뎠냐?"
"............"
"5년을.......그런 마음으로?"
"............"
"대국을.....후우.....백 몇 판이나 두면서....그렇게......?"
선우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우씨...술 째렸나....선우는 주먹으로 뺨을 훔쳤다. 고개를 숙인 택의 눈에서 방울 하나가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근데....선우야.....나, 이제 끝까지 온 것 같다."
"뭐가?"
"나......정말 끝에 선 것 같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그 누구보다 잘 알기에 선우는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목이 꽉 메어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없으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그 소년의 그 마음을 알기에, 그저 잔을 채워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4
둘은 터덜터덜 평생의 추억이 묻어 있는 길을 걸었다. 그들에게 이 골목길은 추억이자 고통이고, 기억이자 아픔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뛰어넘을 만큼 찬란했던 그들의 시간이 바로 지금인 것처럼 그렇게 되살아났다. 그래서 이 골목길은 위로이자 고통이었다. 이 이율배반적인 감정은 작은 돌 하나에도, 세월이 묻은 담벼락 하나에도 오롯이 새겨져 있었다.
"안 추워요?"
"네. 괜찮아요."
골목의 구석에 한 남자와 한 여자. 연인 사이인 듯한 두 사람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여자에게 악수를 하자는 듯, 손을 내밀었다. 시작하는 연인인 건지, 남자는 무언가 용기를 내는 듯했다. 좋을 때다. 선우가 자그마한 소리를 뱉어내자, 그제야 택이 앞을 바라본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왜...그래 택아?"
그렇게 택의 시선을 따라 다시 바라본 그 연인들은, 아니 남자가 내민 손을 맞잡아 주고 있는 여자는 덕선이었다.
왜...하필이면.....
선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택은 주먹을 꽉 쥔 채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제 가세요. 늦었어요."
"그래야죠."
"우진 씨......."
덕선은 악수한 손을 잡아 뺐다. 우진은 덕선의 손을 놓아주고 싶지 않았지만, 부담스러워 할까 싶어서 그 손을 놓아주었다.
"덕선 씨......고마워요."
"네? 뭐가요?"
"그냥 전부 다......"
"왜 그래요? 갑자기?"
"덕선 씨가 이렇게 같은 하늘 아래 사는 것도, 이렇게 나랑 만나주는 것도, 또 밤늦게 찾아왔는데 얼굴 보여주는 것도, 전부 다...고마워요."
그 말에 덕선은 한동안 말을 못했다.
"덕선 씨......? 기분 나쁜 거...아니죠? 내가 말을 잘못...."
"우진 씨...나는요....나는 미안해요."
"예?"
"미안해요. 전부 다........"
"덕선 씨.....왜?"
"이제 가세요. 이러다 동네 사람들 다 보겠네."
"아....그렇죠. 여긴 아무래도 덕선 씨 동네니까 좀 신경 쓰이겠네요. 알겠어요.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에는 조금만 더 있다 갈게요."
덕선이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뭐가 그리도 아쉬운지 몇 번이나 덕선을 돌아보았다. 덕선은 그 때마다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러나 그 남자를 보내고 정면을 바라보던 덕선은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고 말았다.
그곳에 택이가 있었다.
"...태..택아.....!!!"
택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덕선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니 아무 말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무언지 알 수 없는 수많은 말들이 웅성대고 있었다.
그 싸늘한 표정과 꽉 쥔 주먹이, 어금니를 꽉 깨물며 화를 참고 있는 택을 덕선은 어떻게 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덕선아.....우리 술 마시고 가는 길인데....나 먼저 갈게. 나 좀 자고 새벽에 나가야 해서......"
선우가 급히 둘 사이를 피하며 집 방향으로 걸어가 버렸다. 선우의 말에도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다. 아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입을 여는 순간, 말이 아니라 감정이 튀어나올까봐, 5년이나 쌓인 감정이 그 균열 사이로 터져 버릴까봐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덕선은 피하고 싶었다. 택의 눈을 피하고만 싶었다. 그 검은 눈동자를.......숨을 막히게 하는 그 깊이를.....피하고만 싶었다. 그러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눈이 마치 쇠사슬처럼 자신을 묶어두고 있었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숨을 쉴 수도 없었다. 택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말라고, 자신을 바라보라고.....심장이 자꾸만 내려앉았다.
택이 천천히 덕선에게로 다가왔다. 택이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덕선의 심장은 덕선의 가슴을 울려대다 못해, 온 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한걸음 앞에서 택이 멈추었다. 여전히 그 눈은 덕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도 말해야 하는데, 덕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남자...친구야?"
택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깊게 깔리듯이 울렸다.
덕선은 몇 번이나 대답해 보려 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아 결국에는 천천히 고개만 끄덕였다.
"......저번에 말했던, 두 달 됐다는?"
또다시 덕선은 고개만 끄덕였다.
하아........
택의 한숨이 차가운 공기를 갈랐다. 그 한숨 소리가 덕선의 가슴 안으로 들어와 깊게 내려앉는다.
".......같이....보자고...했었지.....결국 봤네."
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속은 타들어 가는데 목소리는 여전히 낼 수가 없었다.
그런 덕선을 택은 뚫어질 듯 바라보다 엷게 미소지었다.
"덕선아........"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언제부턴가 택은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아니 부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 골목길에서 부르던, 한참을 기다리다 만나 반가움이 어린, 그 목소리는 아니었다. 뭐라고 할 수 없는 온갖 감정이 다 스며든 듯한, 세월이 묻어있는 듯한 그 이름을 택이 부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자꾸만 울컥거려서 덕선은 눈을 자꾸만 깜빡였다.
"행복하니?"
"......뭐?......"
"아니....행복...하라고......."
"...택아......."
"들어가자. 늦었다."
택은 천천히 집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랬다. 행복하면 되었다고.......그것으로 충분하다고......
그러나 택은 차마 한 마디를, 하고 싶었던 한 마디를 하지 못했다.
혹시......행복하지 않다면......
혹시 그 사람이 아프게 한다면......
그 때는......내게.....와줄래......
기다리는 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잘 할 수 있다고......
그러니까 너는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고......
골목길에 추억 하나와 고통 하나와 눈물 한 묶음과 가슴 저림 한 뭉치가 그렇게 한 발짝씩 내딛을 때마다 새겨졌다.
<짤은 갤줍, 감자감자>
* 내가 비루해서 현업과 상플이 공존하기가 사실 참 힘들다. 미안하다, 내가 능력이 없어서 좀 느리다. 짧은 분량도 왜 그렇게 오래 걸리는지. 능력 부족임. 사실 지금 이렇게 글찌고 있는 것도 내 본진이 알면 내가 미안해 죽음. 바쁘다는 핑계로, 접고 있는 중인데.....이번엔 정말 눈팅만 하려했는데.....이꼴이 됐다. 어쩔.....6화부터 눈팅으로 달리다 현망진창.
* 선택 때문에 내가 진짜...... 이 글은 진짜 내 위안을 위한 글인데.....여튼 비루한 글 읽어주고, 추천, 댓글 날려줘서 감자하다. 갠적으로 6년이 그렇게 아프다. 나는. 저 짤의 택은 그냥 6년 그 자체라서.....그냥 아프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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