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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상플] 94년 어느 날, 어쩌면 - 제9장 눈 먼 소녀에게 전하는 소년의 고백

그랑블루08 2016. 2. 29. 23:54
[선택/상플] 94년 어느 날, 어쩌면 9

 

 

원본 글 :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reply1988&no=937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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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눈 먼 소녀에게 전하는 소년의 고백

 

 

 

소녀는 고백하라고 한다.

더 늦기 전에, 다른 사람이 영원히 데려가기 전에, 빼앗기기 전에

고백하라고 한다.

 

그러나 소녀는 모른다.

그 사람이 소녀 자신이라는 것을.

이제 마음이 터져버릴 것 같은데,

이제 그 사랑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입 밖으로 새어나올 것만 같은데,

그 사랑이 소녀 자신이라는 것을

소녀는 알지 못한다.

 

또한 소녀는 알지 못한다.

사실 소년은 지금 이 순간도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자신의 감정을, 자신의 사랑을

온 마음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그의 눈을 보면서도

소녀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오늘도 소년은 고백한다.

그러나 오늘도 소녀는 알지 못한다.

 

 

 

1

 

"그럼.....지금도 그 사람, 못 잊는 거야?"

 

"한 번도, 단 한 번도......잊은 적이 없어."

 

5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고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그 세월을 어떻게 한 사람만 생각할 수 있느냐고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덕선의 시간도, 덕선의 5년 반도 그러했으므로 택이가 어떤 마음으로 그 세월을 살아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므로 그 마음이 어떨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므로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더 기가 막힌 건 덕선 자신이었다. 택이 아픈 게 싫어서, 왜 그 여자는 택을 아프게 하는지, 왜 택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지 그것만 신경 쓰일 뿐이었다.

 

덕선이 바라는 건 한 가지였다. 택이가 행복해지는 것. 택이가 슬프지 않는 것. 택이가 아프지 않는 것. 그래서 택이가 예전처럼 웃음짓는 것. 그러면 자신의 5년은 괜찮다고, 앞으로의 5년도 괜찮을 거라고......

 

덕선도 설마하고 있었다. 택이는 왜 여자를 사귀지 않을까. 연예인들이 좋아하고, 그런 굉장한 사람을 만나면서도, 정작 택이는 마음이 없는 듯했다. 그 옛날 택의 마음을 듣지 않았다면, 덕선은 그저 택이가 여자에 대해서 무관심한 거라 생각했을 거였다. 아니 어쩌면 택이가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남자를 좋아하나, 싶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선우나 동룡이와 연애를 한다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 그러나 그 날, 넌 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라, 라고 말한 그 순간부터 택이가 남자구나, 택이도 좋아하는 여자가 있구나, 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도 그렇게 끝나버린 일이라 생각했다. 얼마 전, 택이가 대국을 치르던 그 때, 사천에 있는 정환이만 빼고 택이 방에 모여 있을 그 때 설마설마 했던 택이의 5년 반의 시간을 알아버렸다.

 

"요즘 택이 담배 더 늘었는 것 같다."

 

택의 책상 아래 서랍장을 열던 동룡이 걱정된다는 듯 툭하니 말을 던졌다.

 

"좀 그렇지? 수면제도 장난 아냐."

 

아까까지 실실 웃고 있던 선우의 표정도 영 좋지 않았다.

 

"웃는 것도 많이 줄었어. 그렇게 많이 웃던 애가."

 

"많이 힘든가......."

 

"많이 힘들지...그 성격에..... 왜 고백을 안했을까...."

 

혼잣말처럼 던진 선우의 말에 동룡이 의외의 말을 꺼냈다. 동룡도 아차 싶었는지 선우와 덕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선우는 덕선의 눈치를 보며. 입 모양으로 미쳤냐를 외치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혹시 택이가 예전에 좋아했던 여자, 얘기 아니야?"

 

그전까지 아이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덕선이 끼어들자, 그것도 택이가 좋아했던 여자 운운을 해대자 동룡과 선우는 기겁을 했다.

 

", 너 어떻게 알아?"

 

"들었어. 택이한테."

 

"? 뭐라던데? 그놈이?"

 

"그냥...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고백할 거라고."

 

"이런 미친 놈. 어휴..."

 

선우는 뭐가 답답한지 한숨을 내쉰다.

 

"근데 고백 못했어?"

 

". 못했댄다."

 

덕선이 던진 질문에 답한 건 동룡이었다.

 

"? 나한테도 자기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할 거라고 말하던데?

나 택이가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는 거 처음 봤어."

 

"그러게 말이다. 내 말이. 왜 그러는 거냐? 걔는 진짜....., 선우야?"

 

"마음이 그렇게 마음대로 되냐?"

 

뭔가를 안다는 듯, 선우의 표정이 씁쓸했다.

 

"근데 말이야.

그렇게 단호하던 놈이 고백하지 않았다면 경우의 수는 딱 2가지 아니냐?“

 

"웬열, 경우의 수 같은 소리하네. 도롱뇽, 너 경우의 수도 아냐?"

 

", 989 특공대! 니가 그런 소리하면 섭하지."

 

"무슨 경우의 수? , 뭐 아는 거 있냐?"

 

선우는 혹시 택이가 동룡에게만 언질을 준 건가 싶어서 황급히 물어보았다. 솔직히 가장 궁금한 것이기도 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때 고백을 안 한 건지, 지금까지도 왜 저렇게 다른 여자를 만나지 못하는 건지 궁금하기만 했다.

 

"원한다면 도사님께서 알려주지. 이런 경우는 딱 2가지야.

한 가지는 그....흠흠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

다른 한 가지는 택이가 아는 누군가가 혹은 친한 누군가가 그 여자...

, 그 여자라고 하려니 계속 오글거리네. 어쨌든 그 여자를 좋아한다.

이것밖에 더 있냐?"

 

"그런가......"

 

선우도 약간은 짐작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니까, 내가 달리 연애 도사님이겠냐? 나한테 다~ 물어봐. 확실히 대답해 주지."

 

"웬열, 그런 놈이 지 연애는 왜 못하냐?"

 

"어쭈~ 써누~, 니가 이렇게 나오면 안 되지. 난 그래도 여자 만나거든?

너야말로 병원엔 여자 없냐? 허구헌날 우리랑 붙어 다니게?"

 

선우와 동룡이는 서로 지가 낫다며 투닥대고 있었지만, 덕선의 귀에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직도...그 여자를 좋아하는구나...

 

그 사실만 가슴에 남아서 자꾸만 시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설마 했던, 절대 현실이 아니길 바랐던 그 상황이, 바로 오늘 현실이 되어버렸다.

 

"한 번도, 단 한 번도......잊은 적이 없어."

 

그 말이 자꾸만 귀에 남아 가슴 저 안으로 가라앉는다. 생채기가 난 듯, 심장에서 자꾸 서걱대기만 한다.

이제 정말, 떠나보내야 할 것 같다.

 

덕선은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에 잡힐 듯이 보이는 것은, 그 아이의 깊디 깊은 검은 눈동자, 그 심연의 흔들림이었다.

 

 

2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또다시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일주일쯤 지났을 때, 퇴근하는 덕선의 삐삐가 울렸다. 동룡의 가게 번호였다.

 

"도롱뇽, 뭔 일이야?"

 

"덕선아, 뭐하냐?"

 

"뭐하긴, 퇴근한다."

 

"어딘데? 공항이야?"

 

"."

 

"오늘, 고기 좋~은 거 들어왔는데, 우리 집에 와라."

 

"웬열, 도롱뇽~! 의리 있는데?"

 

"지금은 바쁘고, 나중에 9시 넘어서 와. 저녁은 조금만 먹어라. 고기 조옿다."

 

"큭큭....근데 누구누구 오는데?"

 

"모르지. 선우는 밤에는 된다고 했고, 정팔이는 어차피 사천에 있는 놈이고"

 

"........이는?"

 

택이라고 입 밖으로 꺼냈을 뿐인데, 덕선의 심장은 자꾸 쿵쿵 울려댄다.

"...택이? 글쎄. 얘는 될지 모르겠다.

이 놈 이거 요즘 기원이 집이야. 집하고 기원이 바뀌었다니까?"

 

"그래?"

 

택이는 못 오는 듯했다. 덕선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다. 목소리에서 실망하는 티가 덜 나길, 도롱뇽이 못 알아채기만 바랐다. 잘 된 건지도 모른다. 술이나 한 잔 하다 오는 거지, .

 

"9시야, 9! 꼭 와라."

 

"알았어."

 

저녁은 간단하게 먹고, 동룡의 가게로 향했다. 손님이 어느 정도 빠졌지만, 그래도 아직 몇 테이블은 손님들이 있었다.

 

더 늦게 올 걸 그랬나?

 

나갔다가 다시 올까 싶을 즈음, 동룡이 덕선을 보고는 손짓을 했다.

 

"야야, 이쪽이야. 이쪽."

 

"?"

 

바깥 테이블쪽이 아니라 안쪽 룸쪽으로 동룡이 끌고 갔다.

 

"뭐야? 너 바쁜 거 아니야?"

 

"곧 끝나. 일단 들어가 있어."

 

"오올~!! 웬열!!! vip실 주는 거야?"

 

"어쩌겠냐? 웬만하면 밖에 앉으라 하고 싶은데......"

 

동룡이 vip실 문을 열며 손짓을 한다.

 

"보시다시피......"

안에는 택이가 혼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진짜 vip께서 오시는 바람에......"

 

"택아!!!!"

 

"...왔어?"

 

"못 온다고 그러지 않았어?"

 

"? ..... 시간이 돼서....."

 

택은 약간 당황한 듯했지만, 평상시대로 느릿느릿 대답을 이어갔다.

 

"그럼, 둘이 좀 있어라. 고기 금방 가져다 줄테니...."

 

"선우는? 선우는 안 와?"

 

"선우는 좀 늦으신댄다. 니들 먼저 먹고 있어. 나도 테이블 좀 정리되면 올 테니까."

 

그렇게 동룡은 나가버렸다.

 

덕선은 그저 당황스러웠다. 택이가 오는 줄 모르고 있다가, 택이가 이곳에 있는 것도 당황스러웠지만, 이 좁은 장소에 둘이서만 있는 것 자체가 뻘줌하다 못해 긴장되었다.

 

"앉아.....덕선아....."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택은 덕선을 앉으라며 의자를 당겨준다.

 

"? ....."

 

어쩔 수 없이 택의 맞은편에 앉는 사이, 동룡이 고기를 가지고 나타났다.

 

"보이냐, 이 고급진 마블링을~!!

니들은 나한테 평생 감사해야 할 거다. 흐흐흐

오늘 이 고기맛을 평생 못 잊을 걸?"

"너도 앉아. 같이 먹자."

 

"택 사범, 고맙지만, 이 몸은 생업이 바빠서.....

먼저 먹어. 조용해지면 오지 말란대도 올 테니까."

 

그렇게 동룡은 또다시 나가버렸다.

 

이젠 진짜 둘만 있어야 한다. 어떡하지..... 그래, 고기 구워야지. 고기.

 

덕선은 불판을 데우며 고기를 올렸다. 택은 그 사이 덕선의 잔에 소주를 부어주었다. 그런데 양이 문제였다.

 

"! 너 뭐하냐? 왜 붓다 말아?"

 

반도 채 차 있지 않은 잔을 보며, 덕선이 버럭대자, 택은 너, 술 약하잖아. 라며 꿋꿋하게 소주를 가져가 버린다.

 

"!!! 내가 왜 약해!!!"

 

"알았어. 천천히....마셔."

 

화를 내는 것도 뭔가 죽이 맞아야 내지, 한 쪽이 아무리 열을 내도, 다른 한 쪽은 저렇게 차분히 얘기하는데 더 난리를 칠 수도 없었다.

 

치익치익거리는 고기 익는 소리만 방 안 가득 퍼지고 있었다. 그 사이 택은 한 번 더 술잔을 기울였다.

 

"택아, 안주랑 같이 먹어."

 

"....."

 

택이 그 예의 엑스자로 젓가락질을 하며 불판의 고기를 집으려 하자, 덕선이 집게로 막았다.

 

"아직 안 돼."

 

"?"

"조금 더 익으면 먹어."

 

그 말에 가만히 있던 택이 픽하고 웃는다.

 

"왜 웃어?"

 

"아니, 그냥 예전 생각이 나서."

 

"언제?"

 

"우리 옛날에 동룡이 가출했을 때, 찾으러 간 적 있었잖아."

 

"....그 때....."

 

"둘이만 남아서 고기 먹을 때 태워서 먹지 말라고....."

 

"내가?"

 

"."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다. 둘이서 고깃집에 갔을 때, 덜 익었던 고기를 택에게 넘겨주었던 것도 같다. , 먹는 건 얼마나 밝혔던지,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정말 양반이 된 것도 같다.

 

"그래서, 덜 익어도 먹는 거야?"

 

"....그런 건 아니고...."

 

", 다 익은 거 좋아하잖아."

 

그 순간, 미소를 머금던 택이 덕선을 멍하니 바라본다. 그러나 덕선은 고기를 뒤집느라 알지 못했다.

 

", 그 뒤에 속 안 좋았잖아. 적당히 익혀서는 먹어."

 

"........떻게...알았어?"

 

추억의 한 자락. 정작 자신이 덜 익은 고기를 줬다는 사실은 잊은 채, 그 날 버스 안에서의 일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그날 고생 좀 했지."

 

"?"

 

 

3

 

버스 안, 서로에게 기대어 정신없이 잤던 것 같다. 고개를 심하게 꺾다가 놀라서 일어난 덕선은 옆에 앉은 택을 흘낏 바라보았다. 감기는 안 들겠지. 너무 심했나. 그래도 겨울인데 바다에 괜히 끌고 들어갔나 싶어 걱정이 되기도 했다. 혹시나 해서 택의 이마를 짚어보니, 약간 미열이 있는 것도 같았다. 감기 들면 어쩌지. 걱정이 되는 찰나, 택이 뒤척이다 뭔가 불편한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어 번 친다.

 

"택아, 왜 그래? 답답해?"

 

덕선이 조용히 물어봤지만, 택은 여전히 꿈속이라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저 미간을 찡그리며 덕선의 어깨로 기대어 왔다.

 

"아까 너무 급하게 먹어서 체했나?"

 

혹시나 싶어 덕선은 택의 손을 잡고 엄지와 검지 사이 옴폭 들어간 부분을 눌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뭔가 단단했다. 택이도 아픈지 인상을 썼다.

 

딸 것도 없는데......

 

큰일이다 싶었다. 겨울에 바다까지 들어갔지, 게다가 체하기까지 하면 택이가 고생할 텐데 싶었다. 이럴 때는 지압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노을이가 체하면 덕선이 늘 등이며, 팔이며 쓸어주고는 했다. 그래도 안 되면, 손을 잡고 한참 동안 엄지와 검지 사이를 눌러주고는 했다. 노을이도 처음에는 아프다고 난리를 치지만, 결국엔 내려가는 걸 보고는 작은 누나는 진짜 이쪽으로 나가야 한다며 감탄에 감탄을 하고는 했다. 사실 이 방법은 할머니께서 가르쳐주신 방법이었다. 어쩌면 가장 오래되었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일지도 몰랐다.

 

덕선은 택이의 손을 잡고 살살 눌렀다. 처음에는 아픈지 무의식중에도 손을 빼려는 택의 손을 못 빼도록 꽉 잡은 채, 천천히 그 부분을 눌러주기 시작했다. 손바닥 전체를 엄지로 꾹꾹 눌러주다가,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는 힘을 주었다 뺐다 하면서 계속해서 지압을 했다. 손을 바꾸어 가며 눌러주는데, 겨울인데도 덕선의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어느 정도 되었다 싶을 즈음에는 팔을 쓸어주었다. 할머니 말씀으로는 겨드랑이에서 손가락 한 마디만큼 떨어진 팔 위치가 위와 연결이 되어 있다고 하셨다. 아주 심하게 체했으면 팔을 쓸어주고, 그 부분을 눌러주면 금방 내려간다고 하셨다. 그래서 택이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하며 그렇게 팔을 쓸어내렸다. 어느 틈에 택이의 입 사이로 트림이 새어나왔다. 택의 얼굴도 뭔가 편안해 보였다.

 

4

 

 

"....전혀 몰랐어."

 

여전히 택은 멍하게 덕선을 보고 있었다.

 

"우리 할머니께 감사해라. 할머니께서 가르쳐주신 거니까."

 

".....고마워......"

 

"?"

 

"고마워, 덕선아."

 

"뭐니? 5년도 더 됐는데 인사까지 받고.....야 꼭 인사받자고 내가 얘기한 거 같잖아."

 

"그날도 고맙고, 얘기해 준 것도 고마워."

 

"?"

 

"얘기 안 해줬으면 몰랐을 테니까.....그럼, 난 평생....몰랐겠지......"

 

"...그래.... 별 거 아닌데......"

 

별 거 아니라는 말에 택이 덕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별 거 아닌 거.......아니야."

 

"............"

 

"나한테는......."

 

조용히 한 자 한 자 뱉어내는 택의 말에 덕선의 심장이 쿵 하고 또 떨어져 내렸다.

 

또 시작이다.

 

덕선은 그 검은 눈동자를 계속 바라볼 수가 없어서 고기를 굽는 척 얼굴을 돌렸다. 그러나 자신의 얼굴 위로 쏟아지는 그 눈빛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왜 그래..........

 

늘 이런 식이다. 정리하려 하면, 꼭 이렇게 사람을 흔들어 놓는다. 놓으려 할 때마다 사람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린다. 이렇게 심장을 흔들어대고, 가슴을 저릿하게 만들어버린다. 너는 모를 것이다. 너의 눈빛이 얼마나 깊은지, 너의 목소리가 얼마나 따뜻한지, 그래서 얼마나 착각하고 싶어지는지...... 그래서 화가 난다. 이토록 쉽게 흔들려 버리는 마음이라는 것에, 그리고 이렇게 자꾸만 흔들어버리는 너라는 존재에......

 

만약, 일주일 전, 그 말을 묻지 않았다면, 나는 또 흔들리고, 잠 못 이루고, 그렇게 두근대고 있을 것이다.

 

"한 번도, 단 한 번도......잊은 적이 없어."

 

그 말이 마치 부적처럼, 흔들리고 있는, 착각하고 싶은 덕선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었다.

 

택이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택이는 원래 따뜻한 사람이다.

택이에게 우리는 모두 같다. 나 역시.....5인방 중 하나일.......뿐이다.

 

주문처럼 외우다가 덕선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택아......."

"?"

 

", 5년 동안 한 번도,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다고 했지?"

 

또다시 그 눈빛이다. 그날처럼 그의 눈이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 봐. 성덕선, 착각하지 말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택의 울대가 울렁인다.

 

"고백해."

 

택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고백해, 택아."

 

택의 눈빛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언젠가 이 말을 건넨 적이 있었다고, 그 때는 나인 줄 알고 그 고백의 대상이 나인 줄 알고 참으로 뻔뻔하고 여우 같이 말했었다. 첫눈 오는 날 고백하라는 말을, 그렇게 능청스럽게 얘기했었다. 웃기게도, 그 날, 그 말의 대상은 다른 이에게 고백을 했었다. 그리고 더 웃기게도, 그렇게 울고 있었던 그 날, 너는 내게 전화를 했었다.

 

온 세상이 나를 버린 것 같던 그 날,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던 그 날, 마치 위로처럼, 영화 보자고, 우리 영화 보자고 내게 말해주었었다. 그랬구나. 택아. , 그 때도 내게 위로였구나. 넌 한결같이 내 친구로 그렇게 따뜻하게 내 곁에 있어 주었구나. 그저 변한 건 나일 뿐인데, 너에게 왜 날 이렇게 흔들어대냐고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이렇게 어린 날을 지나, 숱한 세월을 보내고, 또다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 몰랐다. 너무나 명백히 다른 사람을 향한 그 마음을 보면서, 이 말을 너에게 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해야 했다. 너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5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는 너의 그 사람에게 다가가라고, 니 마음을 전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왜냐하면....왜냐하면...내 마음보다 니 마음이 더 아프기 때문이다, 내게는...

 

"그 사람한테.....말해, 택아."

하아......

 

한참동안 그저 덕선을 바라보던 택의 입 사이로 흘러나온 깊은 한숨소리가 또다시 덕선의 심장을 내려앉게 했다.

 

".......좋아하는.....사람, 있어."

 

"무슨 소리야, 그게? ......그 사람, 누구 사귀는 사람, 있는 거야?"

 

택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럼, 저 바보는 그걸 그냥 지켜보고 있는 거다. 덕선의 심장이 꽉 조여왔다. 그걸 어떻게 봐. 그걸 어떻게 지켜보고만 있어?

 

"그래서? 넌 입 다물고 그냥 있는 거라고? 뻔히 보면서?"

 

택의 눈에 핏줄이 서는 것도 같다. 택의 울대가 또다시 울렁거리고 있었다. 덕선은 그저 열이 확 올랐다.

 

"5년도 넘었다며? 한 번도 잊은 적 없다며? 근데 그냥 입 다물고 있겠다고? 그 사람이 다른 사람 사귄다고 아무 말도 못하고 있겠다고?"

 

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 때문에, 그런 모습 때문에 덕선은 자꾸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래 너라면 그럴 것 같다. 자기 마음 정리도 못하고, 그렇다고 다가서지도 못하고, 바보 같이 그렇게 5년이 넘도록 꾹 눌러가며 참아 왔겠지.

 

", 그 사람 정리할 수 있어?"

 

그저 얼어붙은 듯 가만히 있던 택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택의 눈이 아파보였다.

 

", 그러면 어쩔 건데? 정리도 못하고, 그냥 그렇게 바라보고만 있는 거야?"

 

설마.........!!

 

"택아, , 설마......기다리는 거야?"

 

흔들리는 눈빛, 그런가 보다. 이 바보는 그럴 생각인가 보다.

 

"그러다가, 그 사람 결혼하면 어쩔 건데?

다른 남자 좋다고 빠이빠이라도 하면 어쩔 건데?

그러면 너 혼자 죽어라고 좋아하다가 끝나는 거야? 니 인생은 뭐가 돼?

5년도 더 넘게 좋아했으면서, 말도 못하고, 그냥 꾸역꾸역 집어 넣고 끝낼 거야?

아니, 끝은 낼 수 있어?

그렇게 말 한 마디 못해 보고 그렇게 나중에 그 여자 결혼하고 나서 후회할래?"

 

택의 눈이 아프다. 택의 고통이 그대로 덕선에게로 넘어와 심장에 생채기를 내버린다.

 

"......다시는.....못 보면....어떡하지..........."

 

"................"

 

"살 수가 없을 것.....같은데......"

 

저 말이 무슨 의미인지, 덕선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보지 못하면 살 수가 없다.

 

"택아, 희동이가 둘리 데려온 거 알아?"

 

"?"

 

"둘리가 자기 엄마 옆에 살고 싶어했는데, 희동이가 둘리 발에 줄 묶어서 현재로 데려와."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택은 그저 덕선을 바라보기만 한다.

 

"살 수 없다며? 그러면 발에 줄을 묶어서라도 데려와야지."

 

택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결혼했어? 결혼한 거 아니면, 아직 몰라.

고백해. 택아.

더 늦기 전에. 다른 사람이 영원히 데려가기 전에, 빼앗기기 전에, 고백해."

 

울렁이는 검은 눈동자를 보며, 덕선은 마른 침을 삼켰다.

 

"고백하고, 5년 동안의 니 마음 모두 보여주고.......매달려 보고......그래도 안 되면......."

 

하아...... 덕선의 입에서도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 때....다시 생각해 봐. 기다릴지.....아니면.....이제 정말 정리...해야 할지......"

 

그러면....그 때 나도....기다릴지, 정리할지 생각할 수 있겠지.

 

삐삐삐삐.....

 

삐삐 소리가 울리는 것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 니들 벌써 다 먹었냐? 부랴부랴 뛰어왔는데......"

 

선우에게 겨우 웃어주고, 덕선은 삐삐를 들고 방을 나왔다.

 

5

 

 

우진이었다. 잠깐 통화할 수 있냐는 말에 가게 전화 번호를 넣었다. 무어라고 말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동룡의 가게에서 고기를 먹고 있다는 말에 부럽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남의 가게에서 전화를 오래 하기도 그래서 그렇게 부랴부랴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자꾸 떨어지는 눈물을 어쩌지를 못해서 한 칸을 차지하고 코가 빨개지도록 울었다. 파우치도 안 가지고 왔는데.....이럴 줄 알았으면, 가방이라도 들고 나올 걸 그랬다 싶었다.

 

휴지를 찬물에 적혀서 한참 코에 얹어두었더니, 조금은 가라앉은 듯도 했다. 그래도 운 티를 내지 않으려니 한참 동안 화장실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방문을 열었을 때, 선우는 왜 이렇게 늦었냐며, 연애 안 하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냐며 타박을 했다.

 

"미안......"

 

"고기 먹어. 덕선아, , 고기 킬러잖아. 내가 다 먹으려다 참았어."

 

선우가 방금 구운 고기를 덕선의 그릇에 놓아주었다. 고기를 입 안에 넣어도 그게 고기인지 고무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씹었다. 지금 택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누구를 보고 있는지 쳐다보지도 못한 채,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었다.

 

그 때 문이 열리고 동룡이 들어왔다.

 

"여러분!!!!!!!"

 

무언가 들뜬 듯, 상기된 표정으로 동룡이 외치고 있었다.

 

"누가 오셨는지 보시라!!!!!!"

 

바로 그 순간 동룡의 뒤로 누군가 따라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모인 그곳에 그 사람이 있었다. 덕선이 벌떡 일어섰다.

 

"...우진 씨!!!!!!!!"

 

덕선의 목소리가 떨리는 듯 흘러나온 사이로, 택이 고개를 들었다. 당황한 듯 택이쪽을 향하던 덕선의 시선과, 덕선을 바라보던 택의 시선이 서로를 향해 얽혀 들었다.



 

<갤 줍, 감솨감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