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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상플] 94년 어느 날, 어쩌면 - 제11장 신발끈

그랑블루08 2016. 3. 1. 00:09

[선택/상플] 94년 어느 날, 어쩌면 11

 

 

원본 글 :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reply1988&no=948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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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신발끈

 

 

 

 

그 아이가 신발끈을 묶어주었을 때,

그리고 그 신발끈이 풀리지 않도록 고쳐 묶었을 때,

절대 이 끈이 풀리면 안 된다고,

그렇게 이를 악물고 다짐했다.

다시 묶을 때마다 마음도 새어나가지 못하게

그렇게 묶고 또 묶었다.

 

그렇게 5년 반의 세월 동안 고쳐 묶었는데,

오늘 그녀는 단숨에 그 세월을 뛰어넘고

심장 안으로 와서 박혀 버린다.

 

그녀의 손으로 다시 묶인 신발끈은

아무 의미도 없는데, 아무 것도 아닌데,

자꾸 의미를 두고 싶어진다.

어쩌면, 그 마음을 묶어두지 않아도 된다고,

아니 어쩌면 그 마음을 흔들리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단단히 매어두라고,

그렇게 그녀의 답이라도 들은 것처럼

자꾸만 욕심이 생긴다.

 

 

1

 

 

"그 친구.....사실 택이예요."

 

온 세상이 고요해졌다. 검은 눈동자가 묻고 있었다. 무슨 의미냐고.... 그래, 그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덕선도 알 수 없었다. 이제 어쩌면 한계까지 온 것인지도 모른다. 들켜버리고 나면,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5년 동안 너를 가슴에 품어 왔다고, 너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고, 너의 시선 하나에도 며칠을 잠도 이룰 수 없었다고, 그렇게 말해야 할까. 그렇게 말하면 넌 뭐라고 할까. 당황할까. 어색해질까. 그래서 그토록 피해왔는데, 끝은 이처럼 순식간에 왔는지도 모른다. 감출 수도, 거짓을 말할 수도 없는 상황.

 

", 덕선아, 너 나가서도 그러고 있냐."

 

그 숨막힐 듯한 정적을 깬 건 동룡이었다.

 

"사실 우리가 다 이래요, 최 사범 때문에.

이 놈이 혼자 전쟁을 치르고 있으니, 잠도 못 자지, 두통에 시달리지....

이건 진짜 비밀인데, 최 사범이 수면제를 좀 먹습니다."

 

"......그래서......"

 

뭔가 이해가 간다는 듯, 그제야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수면제를 먹는다고 했을 때, 덕선 씨 표정이 변했던 이유가 있군요.

걱정 많이 해주셨는데..... 우유도 데워서 가져다 주시고....."

 

그 순간 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또다시 일동은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

 

"화장실........"

 

", 그래, 너 술 많이 마셨지? 다녀와라."

 

택은 예의 느릿한 걸음으로 덕선을 지나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덕선은 놓치지 않았다. 택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던 것을, 주먹에 힘줄이 돋아나와 있던 것을.....

"혹시 최택 9단님, 화나신 건 아니시죠? 아니면 제가 마음에 안 드신다거나......"

 

그리고 그 모습을 본 건, 덕선만이 아니었다. 우진은 당황스러움과 약간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담고 덕선에게 묻고 있었다. 덕선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당황하는 사이 이번에도 동룡이 도와주었다.

 

", 최 사범, 원래 말이 없어요."

 

"그래도 기분이 좀 안 좋아 보이시기도 하던데...

혹시 제가 실례를 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최 사범이 원래 낯을 많이 가려서 그래요.

감정이 안 좋고,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맞지, 선우야? ?"

 

"? ...그렇지. 택이가......"

 

어색한 듯 맞장구를 치고는 있었지만, 선우의 눈길은 자꾸만 문으로 향한다.

 

"정말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니십니다. 최택 9단님."

 

"예에? 우리 희.., 아니 최 사범이요?"

 

동룡은 기가 막히다는 듯 되물었다.

 

". 솔직히 잠깐 말씀 나눠봤지만, 아무 말씀 안 하셔도 카리스마가.....

정말 등에 식은땀이 나던데요."

 

"....?"

 

"바둑 두시는 분들, 멘탈이 진짜 장난이 아니실 것 같습니다.

전 최택 9단님 눈만 봐도 정신이 하얗게 되는데, 저런 분과 어떻게 앉아서 대국을 두시는지....."

 

"웬열..... 최 사범 이미지 하나는 기똥차게 만들어놨네.

쟤가 뭐, 바둑 하나는 천재지만, 그만큼 다른 부분은 허술하답니다.

쟤도 사람이에요, 사람. 돌부처 어쩌고 하지만, 몰라서 그러는 거고, 실제로는 에휴...말을 말아야지.

괜히 우진 씨 실망하실까 더 말씀은 못 드......"

 

"아니야."

 

동룡이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덕선이 끼어들었다.

 

"뭐가?"

 

"택이, 진짜, 카리스마 장난 아니야."

 

"웬열!!! 이게 뭔 소리니? 덕써이? 너 갑자기 우진 씨 앞에서 택이 이미지 관리하는 거니?"

 

"도롱뇽, 너 택이 대국 본 적 있어?"

 

"? 아니, 없지. TV에서 인터뷰하는 것도 겨우 보는데......

아쭈~~ , 너 고딩 때 중국 따라간 거 자랑하려고 그러는 거지?“

 

", 그런 모습 처음 봤어. 우리가 알던 택이가 아니야."

 

"..?"

 

".. 최택 9단이더라. 물론 그 때는 6단이지만. 진짜 다른 사람이야.

, 무서워서 말도 못 걸었어."

 

"뭐라고, 천하의 성덕선이?

맨날 택이 두들겨 패는 성덕선이 무서웠다고?

그걸 날더러 믿으라고?

구라도 말이 되게 까야지, 이건 뭐, 말이 안 되잖아. 말이."

 

"열여덟 살인데, 겨우 고등학생 나이밖에 안 됐는데,

다들 무서워서 말도 못 붙이더라.

어른들이 깍듯하게 존대하고, 고개 숙이고....

그런데 그곳에서 보니까 진짜 고개 숙여야 할 것 같았어.

택이 이름도 잘 못 부르겠더라."

 

"정말.....택이는...중국에서 신인 거니?"

 

", 5년 전에 이미 신이었다. 아직도 몰랐냐?'

 

선우가 덕선을 도와 동룡을 정신 차리라는 듯 한 방 먹였다.

 

"근데 얘는 왜 이렇게 안 들어와?"

 

"한 대 굽고 계시겠지, ."

 

선우와 동룡이 대거리를 하는 사이, 우진이 슬그머니 일어섰다.

 

"아무래도 전,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 왜 벌써 가시려고.....?"

 

"사실 요즘 프로젝트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며칠 야근을 쭉 했었거든요.

오늘은 진짜 좀 자고, 다시 며칠 밤샘 작업을 해야 해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또 제가 있으면 방해되실 것도 같고....."

 

그 말에 덕선이 놀란 듯 우진을 바라보았다.

 

"계속 밤 샜던 거예요? 나한텐 왜 얘기 안했어요?"

 

"덕선 씨도 스케줄 때문에 바쁘시니까.... 괜히 걱정하실 것도 같고....해서....."

 

그랬구나. 그래서 오늘 이렇게라도 온 거구나.

 

덕선은 또다시 미안한 감정이 올라왔다. 이런 사람을 두고 자신은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인지, 도대체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 건지....

"그럼, 다음에 정식으로 뵙겠습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우진이 그렇게 인사를 하고 나가자, 덕선도 따라서 같이 나갔다. 그렇게 남은 둘은 아까까지의 시시껄렁한 표정은 사라지고 그저 술잔만 기울였다.

 

2

 

"최택 9단님께 인사드리고 나오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

 

택이는 도대체 어디를 간 건지, 진짜 한참이 지났는데도 들어오지 않았다. 가게를 나오면서 주변을 살펴봐도 택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잘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시한폭탄 같은 지금 자신의 감정이 어디로 튈지, 어떻게 터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차라리 택이 안 보이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오늘, 미안해요."

 

"? 뭐가요?"

 

"갑자기 찾아와서.... 덕선 씨 친구들 앞에서 당황하신 것도 같고......

제가 생각이 짧았....."

 

같이 걸어가다가 덕선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함께 멈추며 놀란 듯 덕선을 바라보고 있는 우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오늘. 정말 잘 오셨어요."

 

"?"

 

"어차피 소개하려고 했었는데, 잘 됐어요."

 

우진은 뭔가 감동 받은 듯, 울컥하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보니, 덕선의 마음이 또다시 저려 와서 고개를 돌리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차 어디 세우셨......!!!!!!!!"

 

우진의 손이 덕선의 손을 잡았다.

 

"..우진 씨......"

 

"나 사실, 많이 불안했어요."

 

"? 뭐가요?"

 

"5인방이라고 했을 때, 다 남자들인지 몰랐어요.

게다가 다들 대단하신 분들이라....

벌써 가게 주인이신 분도 있고, 의사에 심지어 전투기 조종사까지....

물론 오늘 뵙진 못했지만.

그리고 정말 말이 필요 없으신 최택 9단님까지....어휴....."

 

정말 우진은 가슴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어댔다.

 

"무슨 드림팀 같아요. 그 굉장한 드림팀 안에 덕선 씨가 계시는 거니까...... 진짜 불안합니다."

 

"무슨 소리예요? 저희 그냥 오래된 친구 사이라구요.

도롱뇽, 아니 동룡이도 그랬잖아요.

형제라고, 걔들 저를 그냥 남자로 생각해요.“

 

우진이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덕선 씨, 덕선 씨 자신을 너무 몰라요."

 

"제가 뭘요? 뭘 몰라요?"

 

"그 드림팀이 진짜 드림팀이 될 수 있는 건, 덕선 씨 때문이죠.

전체를 완성해 주는 존재. 그 전체를 묶어주는 존재.

그 사람이 바로 덕선 씨예요."

 

그 말에 덕선이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다들, 비웃을 텐데...지금 이 말.....!!!!!!"

 

그 순간이었다. 우진은 잡고 있던 덕선의 손을 자기 쪽으로 당겼다. 그 바람에 덕선은 우진의 품 안으로 그대로 안길 수밖에 없었다.

 

"..우진 씨!!!!!"

 

"........불안해서요....잠깐만 이러고 있어줄래요? 너무 드림팀이라, 불안해요."

 

우진 씨......"

 

불안하다는 말에 덕선도 더 이상 빠져나오려 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덕선 씨가 왜 애인이 없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이렇게 괜찮은 사람이....남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그런데 오늘 알게 됐습니다.

웬만해서는 덕선 씨 눈에 남자로 안 보일 것 같다는 걸 말입니다."

덕선은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그래서 그저 안겨 있었다. 그의 품이 따뜻해서 자꾸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 남자의 품으로 언젠가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이 마음이 조금은 이 사람에게로 흐르면 좋겠다고.... 그 품 속에서 그 생각을 했더랬다. 그렇게 한 사람을 지워갔으면 좋겠다고, 어쩌면 지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아니 조금은 옅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

 

우진이 놀라는 소리에 덕선도 그의 품에서 벗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그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지워갔으면 좋겠다고, 이젠 조금은 옅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던 그 한 사람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해볼 테면 해보라고, 니가 나를 잊고 살 수 있겠느냐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렇게 또다시 수면 위로 돌을 던지고 있었다. 그 존재만으로 가슴 안으로 물결이 퍼져나갔다.

 

"...택아!!!!"

 

"................"

 

택은 그저 말갛게 바라볼 뿐, 아무 대답이 없었다.

 

", 벌써 가는 거야?"

 

"..아니.., 담배 사러........"

 

담배 사러 이까지 내려왔다는 게 이상했다. 가게 옆에도 슈퍼가 있는데, 왜 큰 길 근처까지 내려왔는지..... 가게 옆 슈퍼는 다 팔렸나. 그렇게 이상하다 싶은 사이, 우진이 다행이라는 듯 택에게 말을 붙였다.

"인사 못 드리고 갈 줄 알았는데 다행입니다. 오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 .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그렇게 인사를 하는 사이, 덕선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더 따라 내려갈까 어쩔까 싶은 순간 택이 다시 입을 열었다.

"들어가자, 덕선아, 애들이...기다려."

 

"? ."

 

"그래요. 들어가세요. 나중에 삐삐할게요."

 

덕선은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왔던 길을 택이와 함께 걸어 올라갔다.

 

우진은 호기롭게 외친 것과는 달리, 마음이 이상했다. 자꾸만 두 사람을 돌아보게 되는 자신이 너무나 이상했다. 사실 지금 걸어가는 두 사람은 자신이 보기에도 너무나 잘 어울렸다. 분명 친구 사이라고 했는데, 이상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친구로서의 익숙함이 아니라, 긴장감이 존재했다. 동룡이나 선우와 있을 때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 두 사람과 있을 때의 공기는 분명 익숙함이었다. 너무나 오래된 가족 같은 사이, 그런 사이에서 긴장감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저 두 사람은 달랐다. 택과 있을 때는 마치 우진 자신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택과 덕선만을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뭐라 할 수 없는, 두 사람 사이에만 존재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것을 긴장감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그런 느낌이 존재했다.

 

잠을 너무 못 잤나.

 

아니겠지. 자신이 너무 예민하겠지 싶어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우진의 심장이 서늘해졌다.

 

택이 재킷을 벗어서 블라우스만 입은 덕선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우진의 가슴 안으로 싸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마치 아까 느낀 감정이 맞다고, 확인사살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알게 모르게 택에게 신경을 쓰고 있던 덕선과 그리고 단 한 사람만을 바라보던 택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마치 자신을 싫어하는 듯한, 경계하는 듯한 분위기는 수컷들만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이었다.

 

아닐 거다.

 

우진은 불안한 생각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주 오래된....소중한...하아..........거든요."

처음 만났던 날, 들었던 그 말이 자꾸만 울려대고 있었다.

 

 

3

 

 

둘만 걷는 길, 이상하게 긴장이 되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분명 저 뒤에 우진 씨가 있는데, 그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지금 자신의 곁에서 조용히 걷고 있는 한 남자 때문에 덕선은 가슴이 떨렸다.

 

"!!!!!"

 

어느 틈에 택이가 재킷을 벗어 덕선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 안 추워."

 

"알아. 내가 더워서....."

 

그것이 아니라는 걸, 덕선도 알고 있다. 아마 지금 자신이 얇은 블라우스만 입은 걸 보고 그는 옷을 벗어준 것이리라. 원래 택이는 이렇게 따뜻한 사람이니까 착각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덕선의 심장은 자꾸만 뛰었다. 그냥 착각하고 싶다고.... 아닌 줄 알지만, 지금 이 순간만, 지금 이렇게 같이 걷는 이 시간만 착각하겠다고, 마치 택이가 마음에 둔 사람이 나인 양, 그렇게 아주 잠시만 행복한 착각을 하고 싶다고.....

 

그렇게 설레는 마음을 애써 누르려 고개를 숙이며 걷는데, 택이의 한쪽 신발끈이 풀어져 있는 게 보였다.

 

"잠깐만, 택아."

 

덕선이 멈춰 서자, 택은 의아한 듯 덕선을 바라보았다.

 

", 신발끈 풀어졌어. 다시 매야겠다."

 

"......"

 

택이 신발끈을 매려 몸을 굽히려는 찰나, 그보다 더 빨리 덕선이 택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내가 할게. 덕선아."

 

덕선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풀어진 신발끈을 묶어주었다. 단단히 리본을 맨 다음, 다시 한 번 더 묶었다. 그러고는 반대편 신발의 신발끈을 풀었다.

 

"그 쪽은 괜찮은데....."

 

"매는 김에 같이 매자. 두 번씩 묶었으니까, 절대 안 풀어질 거야."

 

다 됐다 하면서 일어나는데, 술기운이었는지 덕선이 비틀거렸다. 그러자 택의 손이 덕선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이제."

 

덕선은 괜찮다며, 택의 손을 빠져나왔다. 늘 손을 잡고 다니던 사이였는데, 이렇게 손을 잡고 있으니, 이상하게 떨렸다. 자꾸만 자신의 마음이 들킬 것만 같아서 덕선은 그의 손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저 어깨에 옷을 걸쳐주고, 신발끈을 묶어주고, 넘어질까봐 손을 잡아 준 것밖에 없는데, 온 세상이 쿵쿵대고 있었다. 서로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살짝씩 팔이 스칠 때, 손이 스칠 때, 가슴에 간질간질거리는 무언가가 떠다니며 얼굴을 붉히게 했다.

 

하아......

 

택이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소리에서 떨림을 느낀 건, 덕선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덕선은 그렇게 생각했다.

 

"....."

 

"?"

 

"신발끈....."

 

"....."

뭐 그런 걸로 그러느냐고, 우리 사이에, 하며 웃어넘겨야 하는데, 덕선도 어설픈 아....소리 정도 외에는 무슨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덕선은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왜 이렇게 서로 부딪칠까, 왜 이렇게 어깨가, 왜 이렇게 손이 자꾸만 스치는 걸까. 그렇다고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걸을 수도 없고, 이 숨막히는 듯한 긴장감에 덕선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갔다.

 

4

 

어느덧 가게가 보였다. 덕선은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빨리 들어가야지 싶은 순간, 택이가 덕선의 팔을 슬며시 잡았다.

 

".........."

 

"?"

 

"잠깐 앉았다가 갈래?"

 

택이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가게 앞 공터 벤치가 보인다.

 

"...술도 좀...깨고....."

 

덕선이 아무 말도 없자, 택은 망설이듯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래, , 많이 마시긴 했지."

 

덕선이 보기에도 오늘 택은 거의 말술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말이나마 좀 하고, 안주라도 먹으면서 마셨지, 택은 그저 술잔만 기울였다. 그게 그렇게 신경 쓰였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취하긴 취했나 보다 싶었다.

 

가게가 동네보다 약간 언덕 위에 있다 보니, 그 벤치 앞에 앉으면 동네가 훤하게 보였다. 고즈넉했다. 그래서 곁에 있는 한 사람이 더 두드러졌다.

 

"아까....니가 했던 말......"

 

"?"

"고백...하라고 했던 말....."

 

고백이라는 말에 덕선의 심장이 또다시 쿵하고 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잊고 있었다. 그냥 곁에 있는 게 좋아서, 그냥 같이 있는 게 좋아서 잊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택은 아마 그 사람에 대해 말하고 싶었나 보다. 덕선은 심장을 쓸어내렸다. 친구로, 오랜 친구로 돌아갈 시간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어진 택의 말은 또다시 덕선의 심장을 정신없이 뛰게 만들었다.

 

"그 고백, 너라면 어떨 것 같아?"

 

"?"

 

"사귀는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널 좋다고 하면, 어떨 것 같아?"

 

...그래서 물어본 거였나 보다. 나는 지금 만나는 사람이 있으니까, 내게 물어보려는 거였다. 내가 던진 말이니,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

 

"누가 말하느냐에 달렸겠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좋아하는 사람이면, 좋을 거고, 아니면....."

 

"아니면?"

 

택은 긴장이 되는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냥....부담스럽겠지."

 

"........"

 

택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아니 말문이 막힌 듯했다. 부담스럽다는 말, 그 말이 택을 슬프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택아, . 해도 돼."

 

"?"

 

"....달라."

 

"뭐가....?"

 

"...최택이잖아."

 

덕선은 마치 결심했다는 듯, 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덕선을 마주한 택의 눈동자가 또다시 울렁였다.

 

"최택 9. 니가 말하는 건, 다르다고.

이거 웬 횡재야 할 걸? , 잡으면 완전 재수지 뭐."

 

덕선이 아무리 장난스럽게 말해도, 택의 눈은 아프기만 했다.

 

"두 사람이 행복해 보이면....내가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면.....

그 사람이 많이 좋아하는 거 같으면......?"

 

아까 택은 다른 상상을 했나 보다. 나와 우진 씨를 보며, 택은 자신의 그 사람을 생각했나 보다. 그래서 아팠나 보다. 또다시 덕선의 가슴이 저릿해온다.

 

"택아....그냥...니가 제일 잘하는 방법으로 해."

 

"?"

 

"바둑처럼 생각해.

난 바둑 잘 모르지만, 울 아빠가 맨날 그러시더라.

바둑이 인생이라고... 그래서 니가 세상을 가장 잘 알 거라고.....

그러니까...바둑처럼 생각해."

 

택의 눈동자가 일렁인다.

 

"고백 당장 못한다 해도,

니가 생각할 때, 가장 알맞을 때, 그 돌을 놓는 게 맞다 싶을 때, 그 때 놔.

바둑처럼......

정정당당하게....피하지 말고.....

, 절대로 포기한 적 없잖아. 너 무섭다고 기권한 적도 없잖아.

, 언제나 그 자리를 지켰어.

정정당당하게 싸워. 이기면 이기는 대로, 지면 지는 대로....."

 

택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조금 입가로 미소를 드리웠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택이 왼손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짚었다.

 

"..."

 

"? 머리 아파?"

 

"...약간....."

 

", 체한 거 아니야?"

 

"?"

 

"손 좀 줘봐."

 

머뭇대는 택의 손을 덕선이 잡아와서는 예전 그 날처럼 엄지와 검지 사이 손바닥을 눌렀다.

 

"..아야! 아파...덕선아."

 

"으이구. 그러니까 내가 천천히 씹어 먹으라고 했지?

많이 먹지도 않은 애가 왜 체하고 그래?"

 

속상해 하며 덕선이 자신의 손부위를 지압해주자, 처음엔 찡그리고 있던 택의 얼굴에 조금씩 미소가 퍼져나갔다. , 먹지도 못하고 체하기나 하고, 이러니까 살이 찌니? 으이구...진짜... 어쩌구 하며 자신을 걱정하는 덕선 때문에 머리가 아픈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걱정해 주는 덕선이 좋았는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만은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아까 그 남자도, 그리고 멀리 있는 그 친구도..... 모두 잊고 싶었다. 지금 자신의 손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손길만, 그저 감각만이 살아서 자신의 심장을 뛰게 할 뿐이었다.

 

"택아....."

 

덕선은 여전히 택의 손을 지압해 주며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

 

"너 만약에 그 사람한테 고백했는데, 그 사람 반응이 영 시원찮으면 너, 대국하는 데 데려가."

"?"

 

"내가 장담한다. , 대국장에서만큼은 원톱이야. 장동건도 울고 간다, 진짜."

 

"그 사람이 누군데?"

 

그 말에 덕선은 황당하다는 듯 지압하다가 멈추고 택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 , 장동건 몰라? 마지막 승부 안 봤어? 심은하랑 같이 나와서 난~리난 그 사람 모른다고?"

 

택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덕선은 기가 찬다는 듯, 한번 바라보다가 다시 지압에 집중했다.

 

"에휴...내가 널 데리고 뭔 말을 하겠냐.

됐고, 여튼 너 대국장에선 끝내주니깐 무조건 데리고 가.

엘리베이터부터 대국장까지만 따라오라고 해.

그럼 그 사람도 아무리 눈이 높아도 뻑이 갈 거다."

 

택이 잠시 조용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택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덕선은 또 한 번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를 듣고 말았다. 택의 눈이 그 말간 눈이 온전히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어땠는데?"

 

"......?"

 

택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울대가 울렁거렸다. 마치 덕선의 대답을 기다리며 긴장이라도 하는 것처럼.

 

"....나도......"

 

자신도 모르게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 눈빛 앞에서 거짓을 말할 수는 없었다.

 

택의 얼굴에 미소가 천천히 번져가는 것을 보면서, 미쳤어, 성덕선! 미쳤어!! 를 외쳐댔지만, 이미 엎어버린 물이었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지압을 하는 척 집중을 해보지만, 볼에 열이 오른 듯 붉어지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택이가 다 보고 있는데.....내가 미쳐.

 

"덕선아....."

 

얘는 또 왜 자꾸 물어보는 건지.....

 

"그 사람, 어디가 좋아?"

 

순간 택의 손을 누르던 덕선의 손이 멈추었다.

 

"..?"

 

"아까 그 사람, 어디가 좋냐고...."

 

덕선이 마른 침을 삼켰다. 그래도 대답해야 했다.

 

"........"

 

"만약...더 착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도 좋아할 거야?"

 

그 말에 덕선은 허를 찔리고 말았다. 이럴 때 최택은 택이가 아니라 최택 9단 같았다. 마치 바둑판을 복기하듯, 전체의 상황을 관망하며 날카롭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너 진짜 그 사람 좋아하는 거 맞아? 라고 묻는 것 같아서,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서 두렵기만 했다.

 

그 순간 택이 덕선의 손을 꽉 잡았다.

 

"..택아. 지압....더 해 줄게."

 

당황한 덕선은 지압 핑계라도 대며, 딴청이라도 피려는데, 택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만해. , 손 아파."

 

"..그래도...."

 

택은 덕선의 손을 잡은 채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있다. 저기."

 

서울 하늘에, 별이 보였다. 잠시 그렇게 있기로 했다. 아주 잠시만, 이 사람의 손을 잡고, 설레 하면서, 그렇게 쿵쿵 뛰는 심장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누르며, 그렇게 잠시만 별을 보기로 했다. 택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리고 그만큼 덕선의 심장은 온 세상을 울리듯 뛰어대었다.

 

 

 

◈◈◈◈◈◈◈◈◈◈

 

 

 

"저것들 뭐하는 거니? 지금, ? 선우야? 저것들 손잡고 있는 거 맞지? ?"

 

"설마.....덕선이 애인 간 건, 맞겠지?"

 

"아니, 선우야, 도대체 덕선이 애인은 누구인 거니?

지금, 우린 뭘 보고 있는 거니? ?"

 

"하아...낸들 알겠냐?"

 

선우와 동룡은 그저 기가 찬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것들, 우리한테 거짓말 치는 건 아니겠지?"

 

동룡이 뭔가 불안한 듯 물었다.

 

"무슨 거짓말?"

"둘이 사귀는데, 안 사귀는 척하는 거 말이야. 설마....아니겠지? 그지? 선우야?"

 

"아우!!! 나도 모르겠다. 머리 아파."

 

"그럼, 우진 씨는 어떡하냐? 괜찮은 사람 같던데? ? 선우야, 선우야? 대답 좀 해 봐. ?"

 

"시끄러, 인마. 넌 이제 그 남자까지 걱정이냐? 오지랖도 작작해라. ."

 

둘이 투닥거리거나 말거나, 한 여자만을 평생에 품은 한 남자는 그 여자의 손을 꼭 잡은 채, 그렇게 온 세상을 품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부터 대국장까지...끝!>

<말이 필요 없는 사범님, 움짤은 갤줍, 감솨감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