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택/상플] 94년 어느 날, 어쩌면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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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나는 너다, 오로지 너다.
참회록 -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滿)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
―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1
19열, 19행. 열아홉 개의 선이 열아홉 개의 선을 만나 361개의 자리를 만든다.
우주의 중심 천원(天元)(*주 : 바둑판의 가장 정중앙의 점, 우주의 근원이라고도 하며, 북극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을 제외하면 360개의 점. 1년의 세계와 맞닿는 이 점들로 만들어진 세상. 바둑.
수많은 판들을 이루어왔지만, 단 한 번도 같은 바둑이 이루어진 적은 없다. 그래서 바둑은 늘 새롭고 두려운 길이다.
그 361개의 점 속에서 나는 세상을 배웠다. 361개의 점 안에서는 그 누구도 잘난 사람도, 또한 못난 사람도 없었다. 내가 우위다, 라는 잘난 척도 불가능했다. 그 정직한 선 앞에서 거짓을 말할 수도, 있는 척을 할 수도, 단계를 무시할 수도, 교묘히 사람을 속일 수도 없었다. 사람을 '판단'하지 않도록 그 선은 그렇게 겸손하나 냉철하게 한 판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바둑의 세계는 상대와의 싸움이 아니라, 나와의 싸움이었다. 내가 나와 싸울 수 있는가, 내가 나를 이길 수 있는가, 내가 약해지려는 나의 거짓된 외침을 거절할 수 있는가, 내가 나의 바닥을 마주할 수 있는가, 바닥까지 내려갈 용기가 있는가.
바둑은 그러했다. 바둑은 너무나 맑아 속이 들여다보이는 깨끗한 연못이었다. 제 속이 너무나 선연히 들여다보이는 것이 부끄러워 그렇게 닦고 또 닦아야 하는 거울이었다. 그렇게 닦아내어도 부끄러워 한숨을 내쉬어야 하는, 또 그렇게 나를 돌아보아야 하는, 내 걸음이 흐트러져 있는지, 진흙탕을 걷고자 하는지, 자꾸만 돌아보아야 하는 그런 발자취였다.
바둑은 자신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채움이 아니라 비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비움.... 끊임없이 덜어냄으로써 비로소 얻을 수 있는 나의 공간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꾸만 채우고만 싶어진다. 그리하여 자꾸만 비워야 할 욕심도 채워지기만 한다. 빨리를 외치고 있는 나의 머리에 정지를 명령해도 내 손은 어느 새 조바심을 낸다.
'두려움'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게 만든다. 나아가야 할지, 멈추어야 할지 판단이라는 것을 할 수 없도록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만든다. 상대를 끊고, 나를 연결하는 것이 바둑. 그러나 두려움은 그 수를 읽지 못하게 한다.
바둑의 361개의 점에서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려 했을 때, 유일하게 바둑과 다른 것은, '너'다. '너'라는 세상이다. '너'는 이기는 것도, 지는 것도 아닌, 그저 '너'라는 절대적인 우주다.
그래서 그 무엇도 자신할 수 없고, 그래서 내 손은 조급하며, 그래서 내 심장은 두렵도록 뛰어댄다.
2
여전히 나는 믿는다. 따분해도 정수(正手)가 최선이라고. 그리고 그 정수 앞에 나는 또 '너'를 둔다. 그리하여 묻는다. '너는, 어떤가.', '너는, 어떤 마음일까.' 그 물음을 던지는 것만으로 성급하게 흘러가던 마음이 멈춘다. 날선 검 위에 선 것처럼,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고, 이제 더 이상 넘쳐흐르는 마음을 제어할 능력이 없다고, 그리 외치면서도, 정작 '너'라는 외침 앞에서 나는 멈출 수밖에 없다.
너는 묻지 말라 했다, 너의 행복을.
그러나 나는 물을 수밖에 없다, 너의 행복을.
너의 행복이 아니라면 나는 움직여서도, 이겨서도 안 된다. 나는 그러하다. 나의 존재를 너라는 존재 없이 정의할 수 없으므로, 나는 내 혀에 재갈을 채운다. 내 손에 수갑을 채운다. 그렇게라도 나는 너다. 오로지 너다.
하늘의 천원(天元, 바둑판의 정중앙점, 혹은 북극성에 비유됨)을 바라보던 그 날, 너의 손의 온기를 느끼며 모든 것을 잊고 싶었던 그 날 몇 번이나 울컥하며 올라오려던 나의 목소리들을 눌러 넣었다. 바둑처럼.....너는 그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떠나버리면 어쩔 거냐고 고백하라고 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내 모든 수 앞에 있는 것이 '너'이므로.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너'이므로, 나는 침묵한다. 새어나오려는 마음을 손에 담아, 두근거림 속에 스며드는 고통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인다.
그래도 누르고 눌렀던 마음 사이로 한 마디는 새어나와 버렸다.
"덕선아....."
언제나처럼 저 안에서부터 품어왔던 한숨 같은 너의 이름이 공기 중으로 퍼져나갔다.
"어......"
"우유.....주지 마."
".....뭐?"
"우유 주지 말라고..... 다른 사람한테."
덕선이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걸 알지만, 택은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이렇게 담아놨다가 결국에는 새어나오고야 마는 마음이라는 것이, 자꾸만 울컥대다가, 속상해 하다가 이렇게 자신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걸 어떻게 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 말할 자격도 없으면서 자신의 이런 뻔뻔함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택은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말 앞에서 자신을 잃어버렸던, 도저히 앉아 있을 수 없었던 '나'를, '나'의 마음의 한 자락을 택은 보여주고야 말았다.
덕선은 아무 말이 없었다. 용기를 내어 덕선을 바라보지만, 그녀는 하늘만 바라볼 뿐이다. 이상하게 생각할까, 니가 뭔데 라고 화를 낼까 두려워지는 순간, 덕선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어......"
작은 그 목소리가 택의 가슴에 물결을 치듯 파장을 일으켰다. 검은 하늘 위로 천원(天元, 바둑판의 정중앙점, 혹은 북극성에 비유됨)이 반짝였다. 머리 위로 바둑판이 새겨진다. 더 나가고 싶지만, 혹여나 마음이 먼저 달려갈까 택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벅차오르는 감정은 손을 타고 내려가 자꾸만 욕심을 부렸다. 그 아이의 손가락 하나하나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는다. 당황하는 그 아이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 더 깍지를 끼며 더 깊이 감겨든다. 온 세상의 감각이 손으로 모여들었다.
3
삶은 바빴다. 바둑은 인생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대국은 삶을 잊게 만들었다. 그래서 5년이 넘는 시간 동안을 견뎌왔는지도 모르겠다. 육체가 피로해야 정신이 잠들 수 있으므로, 몸을 혹사시켜서라도 마음을 침묵시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택도 알고 있었다. 마지막임을...진정 그 마지막이 왔음을......
늦은 밤, 내일의 대국을 앞두고, 그렇게 귀가하고 있었다. 조용한 골목길이 발자국 소리만이 묻어나온다. 덕선이를 본 지, 일주일이 넘었다. 하루의 개념은 늘 덕선이었다. 그러지 말자고, 잊자고 아무리 말해도, 5년 반의 시간 동안 모든 하루의 기준은 덕선이었다. 덕선이를 못 본 지 일주일, 덕선이를 못 본 지 보름..... 그렇게 하루는 그 기준을 중심으로 마음에 무게를 가하고 있었다.
작은 속삭임, 작은 외침, 그리고 작은 발자국 소리.
"우...우진 씨....."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발이 천천히 뒤로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그녀를 향하여 그 남자는 앞으로 움직였다. 그녀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선 만큼, 그 남자는 한 걸음 앞으로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마침내 그녀가 벽에 부딪쳤을 때, 그녀와 그 남자의 간격은 천천히 좁혀졌다.
아......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안 된다고, 지금 뭐하는 짓이냐고,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지만, 그건 내 역할이 아니다. 택은 주먹을 쥐었다. 심장으로 피가 쏠리는 것 같았지만, 핏줄이 터질듯이 주먹을 쥐어보지만, 그것은 내 역할이 아니다.
택의 눈에 핏발이 섰다. 고개를 돌리고 가버려야 하는데,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심장이 펄떡대며 찢어지는 것 같아도, 외면해버리라는 머리의 외침도 택은 그저 핏발이 선 채로 그 광경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입술이 덕선의 입술로 향하는 그 때, 그렇게 두 입술이 마주칠 것만 같았던 그 때, 덕선이 고개를 돌렸다. 우진의 입술은 그 자리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덕선은 고개를 돌린 채로, 우진은 여전히 덕선을 향한 채로, 마치 영겁의 시간이 지나가는 듯, 그렇게 멈추어 서 있었다.
"....미....미안...해요."
덕선은 울먹이고 있었다. 떨려나오는 목소리 사이로 울음이 배어들었다.
그 말에 마치 정신이라도 차린 듯, 우진이 서서히 멀어졌다. 아니 멀어지는 줄 알았다. 우진은 덕선을 자신의 품 안으로 가만히 안아왔다.
"내가....하아.....내가.....미안해요. 덕선 씨."
한숨 같이 우진이 사과를 건네고 있었다.
"정말, 미안해요..... 미안해요 우진 씨. 내 탓이에요. 다....."
"......괜찮아요....난....."
우진은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 아니 마치 모든 건 자신의 탓인 양, 덕선을 달랬다. 그래도 덕선의 어깨는 자꾸만 들썩였다. 우진은 말없이 그 울음을 다 받아주었다. 한참이 지나서, 덕선의 어깨가 잦아들고 나서, 덕선은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오늘은....그냥....들어갈게요."
뭐라고 말하려던 우진은 결국 입을 다물고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말도 묻지 않고, 아무 말도 듣지 않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진은 그녀가 들어가고 나서도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그렇게 억지로 고개를 돌리며 돌아서려는 순간, 골목 끝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말았다.
하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우진이 천천히 움직이자, 골목 끝 그 남자도 그에게로 조금씩 다가갔다.
"오랜만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아무럴 것도 없는 인사였다. 그러나 둘은 알고 있었다. 서로의 눈빛이 어떠한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택도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눈빛이 어떤 눈빛을 하고 있을지, 어떻게 이 남자를 보고 있을지.... 아마 저 남자의 눈빛과 같을 것이라 생각했다.
택은 그의 눈빛을 보며, 바둑을 생각했다.
위기십결(圍碁十訣; 당나라 바둑의 명수 왕적신이 펴낸 10가지 요결, 바둑에 임하는 자세와 바둑을 둘 때 활용할 수 있는 전략)의 첫 번째, 부득탐승(不得貪勝).
바둑은 이겨야 하고, 그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승부에 집착하다보면 일을 그르치기 쉽다.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처럼 잡념과 허욕이 없는 깨끗한 마음으로 최선의 수를 찾아야 한다. 지금 자신이 갖추어야 할 것은 승부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올곧게 나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다.
"남자로서 묻겠습니다.
덕선 씨와...최택 9단, 아니 최택 씨.
무슨 사이입니까?"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던 우진의 입으로부터 던져진 공격.
이기고자 하면, 그 무리수 때문에 질 것이다. 허욕을 부리지 않는 정직한 한 수만이 답이 될 수 있다.
"친구....사입니다."
"친....구....하아....."
또 한 번의 공격이 들어올 거라 생각했으나, 우진은 말이 없었다. 그는 아마 주저하는지도 모른다.
그의 돌은, 그의 질문은 잘못되었다.
그는 물었어야 했다. 내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그녀에게 어떤 마음인지 물어야 했다. 그러면 나 역시 또 다른 돌을 놓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묻지 않았다.
"정말....친구....사이.....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그의 두 번째 돌도 잘못되었다.
"그럼....그렇게 믿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우진은 택을 지나 성큼성큼 걸어갔다. 택이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우진이 알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골목 끝 돌아가기 전, 택은 우진의 한숨 섞인 한 마디를 듣고 말았다.
"왜...하필이면....최.택.....하아....당신..입니까......"
택은 그 때 알았다. 그가 잘못된 돌을 놓은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돌을 놓을 수 없었다는 것을, 그 정확한 질문을 던질 수 없었다는 것을....이미 택의 수를 그가 알아버렸다는 것을......
4
[녹음하라고 그러지. 녹음해 그럼.]
[뭘....?]
[니 말, 뭐 아무 거라도, 필요한 말.]
[무슨 말......?]
[어휴, 이 바보!!!!]
[아...아파 덕선아.....]
[이게 엄살만 늘었어. 어휴.......]
[그럼, 이렇게 하자. 택아, 니가 날 부르고 싶어. 그러면, 내 번호를 누르고, 1번 누르고 또 1번 누르고, 전화 끊어.]
[어?]
[그럼, 내가 넌 줄 알고 전화할게.]
[어디로?]
[어디겠냐, 니가 방 아니면 기원이지.]
[기억했지? 내 번호, 1번, 다시 1번.]
[응. 기억했어. 내가 바보냐?]
[근데 최택, 지금은 안내하는 언니 목소리가 나오지만, 내가 배경음악을 넣기도 하고, 내 목소리 넣기도 하거든. 그럼 1번, 2번 얘기가 안 나올 수도 있어.]
[그래? 그럼, 뭘 눌러?]
[미치겠네. 야, 최택!!! 똑같다니까!!!! 그냥 내 번호, 1번, 다시 1번!!!!]
[아...알았어. 알았어, 덕]....
1분 30초의 선물이었다.
그 날, 삐삐 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던 그 날, 그 아이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우리가 함께 있었던 그 시간을 박제해서 정지시켜 놓고 그렇게 수화기 너머로 들었다. 그러면 조금은 살 것도 같았다. 니 목소리가 그리워서 미칠 것 같을 때면, 아무 전화기나 붙들고 그렇게 덕선은 자신의 삐삐를 들었다. 마지막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까지 녹음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지만, 그 또한 과욕일 뿐이다. 너의 목소리가 담긴 것만으로, 니가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 숨을 쉴 수가 있었다. 그러나 너는 모른다. 최택, 너는 이런 나를 절대 모를 것이다.
그가 다가올 때, 그의 눈빛을 보고 알았다. 뒷걸음치며 벽에 부딪쳤을 때, 그의 눈이 깊게 변하는 걸 보며,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지금 무엇을 하려는 건지 알아차렸다. 그러나 나는 너를 떠올렸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 날, 별을 보며 앉아 있던 그 날...너의 손을 떠올렸다.
그 날 너의 손을 떠올리는 순간, 숨이 막혔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2년 전, 서울에 있는 4명이 함께 가서 봤던 그 영화가 아니었다면, 몰랐을지도 모른다. 나는 모른 체를 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넌 여전히 아이 같고 순진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치부했을지도 모른다.
◈◈◈◈◈◈◈◈◈◈◈◈◈
2년 전, 92년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던 어느 날, 오랜만에 택이 방에 뭉쳐 술을 마실 때, 덕선이 승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머리를 터져하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동룡이 티켓 4장을 내밀었다.
"자, 특공대, 너를 위한 선물이다."
"웬열!!! 와, 이거 연.인. 이잖아. 이거 겁나 야하다던데?"
"어허~! 영화의 예술성을 그렇게 심한 말로 무시하면 안 되지.
야, 갈 거지, 다들 갈 거지? 어? 어? 내가 아침부터 가서 표 구해왔다고!!!"
"나는 콜. 무조건 콜!!! 야한 거 보고 정신 차려야겠다.
요즘 내가 너무 건전하게 살고 있어서 말이야."
"뭐, 나도 콜! 택이 넌? 돼?"
덕선이 콜을 외치자, 선우도 픽 웃더니 콜을 외치며 택에게 물었다.
"야, 최 사범, 너도 세상을 알아야지. 맨날 돌만 만지면 되겠냐?
요즘 내가 흠흠 교육을 좀 중단했는데 말이야.
이건 확실한 교육이 될 거다. 흐흐흐
과외 교육비 따로 받아야 되는데, 이 형님이 그냥 봉사활동 해주는 거야."
동룡의 말에 택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렇게 그날 4명의 영화 관람이 성사되었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종로에서 모두 모였다는 점, 택이를 데리러 가지 않아도 택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영화관을 찾아왔다는 점, 그런 것들이었다.
영화관 안으로 들어가자 이상하게 덕선의 주변으로 아이들이 오려하지 않았다. 선우와 동룡은 앞 다투어 덕선에게서 멀어지려 하다 보니, 동룡, 선우, 택, 덕선의 순서대로 앉고 말았다. 왜 저래?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던 덕선은 영화가 시작되면서 아이들의 행동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냥 사랑이야기려니, 약간 야한 씬이 있겠거니 마음 놓고 있다가 차 안에 두 남녀가 있는 씬부터 덕선은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남자의 손과 여자의 손이 서로 맞잡으며 일으키던 이상한 분위기와 소리들이 웬만한 어떤 영화보다도 더 야하게 느껴졌다.
덕선 자신의 손까지 뭔가 자글자글해서, 보고 있기도, 안 보고 있기도 민망했다. 게다가 바로 옆에는 택이 앉아 있었다. 택이도 뭔가 민망한지 살짝 움직이다가 덕선의 어깨와 부딪치고 말았다. 순간 둘 다 누구랄 것도 없이 어깨를 움츠렸다. 흠흠..... 택은 주먹을 쥐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옆에 앉아 있으면 좁은 좌석 때문에 부딪칠 수도 있다. 손도 늘 잡고 다니던 둘이었다. 그러나 이건 그야말로 살얼음판이었다. 신경이 쓰이다 못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일어서는 것 같았다. 옆에 앉아 있는 그 사람의 숨소리에, 작은 몸짓에, 침 넘기는 소리까지 하나하나 들려와 심장을 헤쳐 놓았다.
쿵쿵쿵쿵......
심장은 뛰어대고, 숨은 제대로 쉴 수도 없고. 덕선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화...장실.....이라고 속삭였지만, 그 작은 목소리에서도 떨림은 감출 수가 없었다. 후다닥 뛰어나와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화장실 거울에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한 여자가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내가 미쳐.....
화장을 해서 세수를 할 수도 없고, 그냥 나가면 정말 미친 X이 되는 거고. 화장지에 물을 묻혀 화장이 닦이지 않게끔 얼굴에 올려두고 식혔다. 한참 그러고 있어도 열은 쉽게 내려가지 않았다. 여전히 홍조가 남아 있지만, 이 정도면 더워서 그런 줄 알겠지 싶어 화장실 밖으로 나갔는데, 화장실 복도 끝 한 남자가 자신의 발끝을 툭툭 치며 서 있었다.
"어....택아!!"
그제야 택이가 반듯이 서서 덕선을 바라보았다.
"너, 왜 나왔어?"
"아....나도..화장실."
그러고는 둘은 뭐가 그리도 부끄러운지 눈을 돌렸다. 말하지 않아도 뻘줌한 무언가가 있었다.
"너...먼저 들어가."
어렵게 꺼낸 덕선의 말에 택의 눈이 다시 말갛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넌?"
"나? 아..난....더워서 시원한 것 좀 마시고....또......"
"그럼...잠깐만."
"태...택아!!"
택이 이렇게 빨랐나 싶을 만큼, 콜라 두 잔을 사와서는 덕선의 앞에 내밀었다.
"고..고마워."
택이 내미는 콜라를 받아드는 순간, 택이의 손 위로 덕선의 손이 겹쳐졌다. 화들짝 놀란 덕선이 손을 떼려 하자, 택이 다시 콜라를 잡으면서 덕선의 손 위로 다시 겹쳐졌다.
아......
닿아있는 손 위로 둘의 눈이 마주치자, 덕선은 자신의 손을 황급히 빼냈다. 손 안 가득 물방울이 맺힌 차가운 콜라가 차가운지도 알 수 없었다. 택이도 목을 가다듬으며 덕선의 곁에 앉았다. 그렇게 둘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아무 말도 못한 채, 콜라를 마셨다. 왜 안 들어가느냐, 안 들어갈 거냐, 등의 말은 내뱉지도 못하고, 그저 그곳에 앉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덥지, 하며 손부채를 하면서 열을 식히려 노력할 뿐이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선우와 동룡이 붉어진 얼굴로 나올 때까지, 택과 덕선은 그렇게 앉아 있었다. 동룡이 다가와 택의 어깨를 말없이 두드리며, "넌...다음에....." 라고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던져도 둘은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날 왜 그렇게 선우와 동룡이 집에 일찍 가자고 했는지, 또 그 둘이 덕선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는지, 왜 선우가 택이에게 잘 나와 있었다고 말했는지 덕선은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자현과 다시 <연.인.>을 보러 가서 얼마나 그 날 아찔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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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덕선은 기억한다.
2년 전, 택의 붉어졌던 귀와, 자신의 열이 오르던 뺨을..... 동양인 남자 배우와 프랑스 여자 배우의 손이 얽혀들던 그 시간을, 곁에 앉은 택이를 두고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그 날을, 그리고 어느 새 덕선을 따라 나와 곁에 어색하게 서 있던 택이를, 덕선은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가 마칠 때까지 밖에서 어색하게 앉아 있던 그 날의 우리를 기억한다. 그 날 이후, 너와 손잡는 것이 어색해져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 날 이후, 니 손을 잡을 때면, 그렇게 심장이 덜컹거렸는지도 모르겠다.
"우유.....주지 마.
우유 주지 말라고..... 다른 사람한테."
웃기지 않는가. 우유 주지 말라는 말에, 별 거 아닌 말에 심장이 쿵하고 떨어져 내렸다. 그 아이는 우유라고 말했고, 나는 관심이라 받아들이는 이 상황은 나의 착각이라고 해도, 그 순간만은 아무 것도 묻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대로, 이 순간 그대로 정지시키고 싶었다. 손끝으로 와 닿는 너라는 존재가 주는 감각만을 느끼고 싶었다.
그렇게 고요하다고 생각했다. 조금은 떨린다고, 그렇지만 이 따뜻한 감각이 좋다고 그리 생각했다. 택의 손이 덕선의 손에 힘을 실을 때, 당황은 했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천천히 택의 손이 풀려나갈 때, 그 따뜻함이 이제 끝나는가 싶어 조금은 서글펐던 그 때, 택의 손은 덕선의 손으로 천천히 밀려들어왔다. 손가락 마디마디 사이로 그의 손가락이 느껴지자 낯선 감각에 덕선은 손을 움츠렸다. 아니 움츠리려 했다. 그러나 택은 그런 덕선의 손을 다시금 잡아와서는 부드럽게 얽혀들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택은 그저 손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감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의 긴 손가락이 스칠 때마다 불에 닿는 듯, 뜨거움이 올라왔다. 엄지 손가락이 천천히 그녀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맞닿아 있는 손바닥 사이로 전율이 흘렀다.
하아....
택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공기 중에서 그의 떨림이 전해오는 것만 같았다. 온 세상이 손으로 몰려들었다. 감각의 향연이 서로의 손을 타고 온 몸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숨이 막힐 듯한, 심장이 터질 듯한 그 시간들은 아이들이 부를 때까지, 별이 쏟아질 것 같던 그 밤 가득 이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 날, 우리의 손은 사랑을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덕선은 수화기를 든 채로 눈을 감았다. 여전히 수화기 너머에서는 택의 목소리가 들린다.
너는 나의 세계에서도 집을 짓는다.
다른 집을 지으려 하면, 막고, 끊어지고,
어느 새 그 집 안에 포위되는 느낌.
나갈 수 없는 느낌.
그러나 너는 모른다.
니가 집을 짓고, 그 집 안에 나를 가두고 있다는 것을, 정작 너는 모른다.
그래서 미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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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1) 2년 전 본 영화는 <연인>임. 92년 여름~가을에 개봉됨. 딱 2년 전에 봤음.(현재 9월 중순)
<연.인>의 하이라이트는 손.잡.는. 씬('잡는' 안에는 훨씬 많은 의미가 포함됨)
<연.인> 예고편
http://movie.daum.net/moviedetailVideoView.do?movieId=10741&videoId=43628
덧2) "따분해도 정수(正手)가 최선이다"라는 말은 역시 갓ㅊㅎ님의 말씀.
덧3) 택의 시점으로는 안 쓰는 게 맞는 것 같다.
의식 그 자체를 보여주려 하면 안 되니 그래서 어렵다.
택은 보이는 대로, 봐야 한다.
왜냐하면, 택의 행동과 말에는 단 하나도 허투로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바둑에 의미 없는 돌이 없듯이.
택은 구구절절하지 않다. 정확하고 냉철하고 솔직하다.
그러나 그런 택을 보여주기 위해 택의 시점을 선택하는 것이 아이러니다. 그래서 너무 어렵다. 비루한 내게는.
여튼 내 정리를 위해 시작한 이 글이 내 발목을 잡고 있다. 이 또한 아이러니다.ㅠㅠ
사족이 길면 안 되는데, 사족이 길다. 이 또한 내가 비루한 탓이다.
덧4) 12회부터 닉넴을 그랑블루로 바꿨다. 원래 닉넴이라.(혹시 작성자로 검색하면 12회밖에 안 나올 거임)
11회까지는 "그랑"으로 되어 있을테니 그랑으로 해야 작성자 검색될 듯. 혹시나 해서 하나 더 달아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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